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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현 동래부사를 모신 부산 충렬사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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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송상현 동래부사를 모신 부산 충렬사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천곡 송상현 동래부사가 임진년에 순절한 내용, 김섬과 이양녀, 하인 신여로에 대한 행적을 기록한 전기가 신흠(申欽)의 『상촌선생집』에 전하고 있다.

 

1. 송상현 공의 정실부인인 성주 이씨의 비극적인 충효의 삶

 

 

천곡 송상현 동래부사가 임진년에 순절한 내용, 김섬과 이양녀, 하인 신여로에 대한 행적을 기록한 전기가 신흠(申欽)의 『상촌선생집』에 전하고 있다. 여기에는 『송동래전(宋東來傳)』, 『김섬전(金蟾傳)』, 『이양녀전(李良女傳』), 『신여로전(申汝櫓傳)』 네 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전기가 정확하게 언제 쓰였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1612년(광해 4년)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신여로라는 자는 서얼이다. 공을 따라 동래에 왔는데 공은 여로가 모친이 살아 있어 혹시 피해를 당할까 염려하여 돌려보냈다. 여로는 돌아가는 도중에 적이 부산을 함락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옆 사람에게 말하기를 “나는 공의 후한 은혜를 받았는데 난리를 만나 감히 죽음을 아낄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도로 공에게 돌아와 함께 죽었다.

 

 

신흠은 위의 네 편의 전기를 짓고 마지막에 “공은 과연 어떠한 사람이기에 일개 수령으로 특출하여 죽음을 알기를 자기 집에 돌아가듯 쉽게 하였단 말인가. 비록 옛날의 충신인 장순(張巡)이나 허원(許遠)과 같은 이라 하더라도 어찌 그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 공의 몸은 나라를 위해 죽었으나 공을 따라 죽은 자는 공을 위해 죽었으니, 이는 곧 공의 풍치가 그렇게 하도록 자극을 한 것이다. 저 개돼지 같은 적도 존경을 할 줄 알았으니 참으로 특이한 일이다.” 라고 논평을 하였다.

 

 

첩실인 금섬과 이양녀는 앞의 칼럼에서 언급했으므로 이번에는 송상현 공의 정실부인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천곡 선생은 1568년(선조 2년) 19세에 성주 이씨 이온(李熅, 1518~1557)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이온은 기묘명현(己卯名賢)인 이문건(李文楗)의 아들이다. 이문건은 조광조의 문하생으로 1513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일파가 화를 당하자 조광조에 대한 의리를 지켜 조상(弔喪)하였다.

낙안에 유배되었다가 사면되고 152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注書), 정언(正言), 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사화에 연루되어 성주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아들 이온은 아버지보다 먼저 타계했다. 저서에 묵재일기(黙齋日記)와 양아록(養兒錄)이 있다.

 

 

부인되는 성주 이씨는 인품이 그윽하고 한가하며, 정조가 바르고 성품이 조용하여 웃어른의 말씀을 순순히 좇았으며, 공경을 다하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양반가의 현모양처였다. 1591년 조모가 돌아가시고, 1594년 시아버지가 타계하는 연이은 우환을 겪었지만 예법에 어긋남이 없이 슬기롭게 대처하였다.

 

 

1595년 맏아들 인급(仁及)을 시켜 남편의 유해를 청주로 옮겨오도록 조정에 청원하여 이듬해 드디어 남편을 청주에 안장하였다. 수차례의 우환과 어려운 고비를 슬기롭게 잘 극복하였으니 충렬을 이룬 남편 천곡 선생의 배필다운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장자 인급이 1605년 문과에 뽑혀 관직에 올랐으나 1608년 병으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차남인 효급(孝及)과 딸도 모두 같은 병으로 목숨을 잃게 되는 연이은 불행을 겪어야 했다. 조선시대에는 의술이 낙후되어 역질이 돌면 많은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다. 요즘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 조선시대 때 벌어지면 원인도 모르고 속절없이 죽을 수 밖에 없었다. 부인은 고손(高孫) 송근(宋根, 1599~1674년)을 이끌고 한양 옛집에 은거하다가 68세에 타계하였다. 성주 이씨 타계와 관련하여 『조선왕조실록』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충신 송상현의 처 이씨가 죽었다. 해조(該曹)에 명하여 특별히 휼전(恤典)을 넉넉하게 베풀어주도록 하였다. 도승지 이덕형의 청을 다른 것이다. <해조에서 공신을 조애(助哀)하는 예에 따라 무명 5필, 관 1부, 종이 7권, 유둔(油屯 : 종이 도는 포목에 기름을 먹인 것) 등의 물건을 하사하였다.>”

 

 

성주 이씨는 1621년 남편의 직함을 따라 정경부인에 증직되는 교지가 내려졌다. 교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교지 정부인이씨증정경부인자 신유오월십구일(敎旨 貞夫人李氏贈貞敬夫人者 辛酉五月十九日)”

 

 

부인의 묘소는 충렬사 남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황구산(黃龜山)에 있다. 둥근 봉분 앞쪽에 1983년 세운 묘갈이 있다. 송상현 공의 묘소 앞쪽에는 첩실 김섬과 이양녀의 묘가 좌우에 자리 잡고 있는데, 정경부인 성주 이씨의 묘는 남편과 떨어진 곳에 있다. 임금인 선조가 점지해준 자리에 쓴 묘역을 함부로 바꿀 수 없다는 유교적 윤리에 따라 정실 부인은 죽어서도 남편 곁에 나란히 묻히지 못하는 설움을 겪고 있다.

 

 

살아서 남편을 국가에 바치고, 3년간의 남편 시묘살이를 함으로써 남편에 대한 도리를 다하였다. 아들과 딸을 병으로 먼저 보내는 비극을 당하는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낸 비극적인 어머니였지만 자신의 운명을 담담하게 수용한 조선시대 사대부 가문의 법도를 지킨 숭고한 여인이었다.

 

 

2. 송상현 공에게 내린 임금의 사제문(賜祭文)

 

천곡 선생의 사후 국가 차원의 제사가 여러 차례 이루어졌다. 선생에 대한 치제(致祭)는 1665년(현종 6년) 제사를 지내게 한 이후 1713년(숙종 39년), 1717년(숙종 43년), 1735년(영조 11년), 1772년(영조 48년), 1832년(순조 32년), 1891년(고종 28년), 1909년(순종 2년) 등 조선왕조실록에는 모두 8차례의 기록이 보인다.

 

 

치제란 국가에서 왕족이나 대신, 국가를 위하여 죽은 사람에게 제문과 제물을 갖추어 지내주는 제사를 말한다. 현재 천곡기념관, 부산 충렬사에 전시되고 있는 치제문은 모두 4점이다. 전시되어 있는 치제문을 차레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숙종 임금의 1717년(강희 56년) 치제문

 

절의를 포상하는 일을 나라에서 먼저 힘쓰면 사람의 도리가 세워지고 풍성(風聲)이 수립된다. 생각건대 경이 충절에 목숨을 바친 것은 고금에 뛰어났도다. 섬 오랑캐가 창궐하여 바다를 덮고 나는 듯 건너올 때 외로운 성은 비바람이 몰아치는 처지에 놓였음에도 시퍼런 칼날을 두려워함이 없었고, 한 몸을 가벼이 버림은 한낱 깃털처럼 보았도다.

대의를 이렇게 판단하였으니 사사로운 은정을 어찌 돌볼 것이랴. 죽음이 눈앞에 닥쳐도 생각을 변치 않고 성난 머리털이 오히려 뻣뻣이 서는구나. 왜적의 무리들도 감탄하고 열사들은 다투어 사모하네. 누세 조정이 정표권장(旌表勸獎)함에 구천(九泉)을 빛나게 하였다.

 

 

저 청주 땅을 돌아보니 그 무덤은 우거지고 아름드리 나무는 빽빽한데 정기는 서리어 깃들어 있다. 마침 내가 온천을 행행함에 어가를 가까이 머물게 하여 멀리서 바라보고 생각을 일으켜 보니 영특한 자태를 보는 듯 하도다.

 

 

이에 사관에게 명하여 가서 분향케 함은 선조의 포천을 진실로 다시 거행하는 바이다. 영이여! 그 앎이 있거든 이 제물을 흠향하시라.

 

<유숭(兪崇)이 지어 올림>

위의 치제문은 1717년(숙종 43년) 예조정랑 김윤해(金潤海)를 송상현의 묘소로 보내 치제할 때 하사한 제문이다. 제문은 유숭(1666~1734년)이 지어 올린 것이다.

 

2) 1750년(건륭 15년) 영조 임금의 치제문

 

나라가 어지러운 때를 당하면 충렬이 대대로 날리니 송나라에는 문산(文山)이 있었고, 당나라에는 장(張)・안(顔)이 있었다. 경이 옛적 동래부사가 되었을 때 돼지나 뱀과 같은 왜병이 강역을 충격하니 성첩은 무너지고 병기는 노후하여 화살이 관청에 날아 들어왔다.

 

경은 당시 조복을 갈아입고 노기가 충천하였으며 천지가 비등하고 해와 별이 캄캄하였다. 이에 열사들은 수저를 던지고 무사들은 격분하여 창의에 앞장섬이 북을 치는 것처럼 기세가 앙양하였다.

 

오랑캐들은 바로 침공하지 못하고 그 칼끝이 꺾여 버렸다. 쓰러져도 오히려 공을 칭송하고 죽어도 또한 길이 빛이 나도다. 저 초목이 우거진 서원 땅은 굳센 혼백이 잠든 곳이오. 뼈는 창이 되고 정기는 혜성이 되었도다. 내가 온천 길에 근교에서 잠시 수레를 멈추고 이에 사관에게 명하여 유장을 거행한다. 하잘것 없는 제수나마 혼령이 어둡지 않거든 오히려 이 술을 흠향하시라.

<김치인(金致仁) 지어 올림>

 

위의 치제문은 1750년(영조 26년) 영조가 송상현의 묘소 인근을 지나다가 예조정랑 신일청(申一淸)을 보내 치제할 때 하사한 제문이다. 제문은 김치인(1716~1790년)이 지어 올린 것이다. 치제문에 나오는 문산(文山)은 남송 말기의 충신 문천상(文天祥)을 이른다. 그의 자는 송서(宋瑞), 호는 문산(文山)으로 원병(元兵)이 쳐들어왔을 때 포로가 되었으나 굴하지 않고 정기(正氣)의 노래를 지어서 그 충절을 보이고 죽었던 인물이다. 또한 장(張)・안(顔)은 당대의 충신 장순(張巡), 안고경(顔杲卿)을 말함인데, 이들은 안녹산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켜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위의 세 사람은 충신과 절개의 대명사로 흔히 쓰인다. 천곡 선생의 높은 충절을 송나라 문천상과 당나라 장순, 안고경에 비유하고 있다.

 

3) 1772년(건륭 37년) 영조 임금의 치제문

 

어려서 몽매할 때부터 다만 왜적을 물리친 기록을 보았네. 저 동래의 일을 보고는 경이 절개를 지킴을 흠모했었소. 세월이 오래 흐르니 사람의 마음도 소홀하게 바뀌었으나 어찌 다른 날에 이 날(그 당시)을 다시 만날 것을 의도하겠소. 상신들이 글을 올려 아뢰기를 강개하여 다가앉아 특별히 제물을 내릴 것을 명하고 그 제문을 직접 지었으나 그 어찌 이에 그치리오? 경의 자손들에게 특별히 관직도 내리고 본관에서 제물을 차리고 예랑이 잔을 올리어. 저 호서지방을 바라보니 소나무, 잣나무 같은 절개를 그리워함이 간절하니 나의 이런 뜻을 느끼고 모름지기 흠향하시오.

 

위의 치제문은 1772년(영조 48년) 예조정랑 변경진(邊景鎭)을 송상현의 부조묘로 보내 치제할 때 하사한 제문이다. 부조묘(不祧廟)는 불천위 제사의 대상이 되는 신주를 둔 사당을 말한다. 즉, 본래 4대가 넘는 조상의 신주는 사당에서 꺼내 묻어야 하지만 나라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위는 왕의 허락으로 옮기지 않아도 되는 불천지위(不遷之位)가 된다. 따라서 불천지위가 된 대상은 사당에 계속 두면서 기제사를 지낼 수 있다. 이 글에서 영조는 천곡 선생의 후손에게 특별히 관직도 내려 등용하겠노라고 위로하였다.

 

4) 1832년(도광 12년) 순조 임금의 치제문

 

천지의 기는 지극히 바르고 순수하며 굳세어서, 사람에게 빼어난 품성이 충이 되고 강상(綱常)이 되면 위기에 임하여도 흔들리지 않는다. 소무(蘇武)의 절의와 안고경(顔杲卿)의 터럭이 우리나라에 모여 있으나 오직 경의 충렬이 뛰어나도다. 액운이 생겨 일본 섬 오랑캐가 바다로 쳐들어 왔을 때에 동래는 바다라서 제일 먼저 그 칼날을 만나야 했다. 경은 당시 부사로서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대비를 하지 못하였다.

 

싸워서 지키지를 못하고 한 번 죽기로 뜻을 정하고 한 통의 편지에 은혜는 가볍고 충성은 무겁다고 하였다. 조복을 엄연히 차려입고 상에 걸터앉아 움직이지 않았고, 단심(丹心)을 더럽히지 않고 흰 칼날에 마침내 돌아가셨다. 아름다운 덕은 하늘이 내린 떳떳함이니 저 일찍부터 볼 수 있었다.

 

경과 같이 죽으니 오랑캐도 감탄할 줄 알아 슬피 크게 통곡하고 제 지내어 유골을 거두어 무덤에 묻었도다. 삼충(三忠)과 오절(五節)이 이 문액(門額)에 드러나 함께 별사(別祀)에 제사를 받드노니 풍운(風韻)이 어제와 같도다. 아! 섬(蟾)과 향(香)은 여인이거늘 어찌 알았으랴. 보고 감동함이 깊어 지아비를 위해 죽고 나라를 위해 죽었도다.

 

조그마한 나라에서 저 휴양(睢陽)에서처럼 어찌 그리 많은지 여러 충신이 무리지어 나왔도다. 옛 사람의 말에 “장순과 허원이 당(唐)을 일으켰다.” 하였나니 그들은 적을 섬멸하지는 않았으나 강상(綱常)을 부지하였도다. 경 또한 그러하니 그 충과 그 열은 일월처럼 나란히 걸렸도다. 저 동래성은 우뚝하고 바닷물은 동쪽에서 출렁이네. 공의 기운은 우리나라에서 장하니 죽어서도 응당 그 의리를 권장하도다.

 

조두(俎豆)가 있는 곳에 사당의 모습이 더욱 높다랗다네. 옛날을 어루만지는 감회가 있어 그대의 장손을 녹용(錄用)하노라. 상당한 것은 아니나 보답이며, 내 마음을 나타낸 것이라오. 내가 올리는 술이 깨끗하니 와서 흠향하기 바라오

<이돈영(李敦榮) 지어 올림>

 

위의 치제문은 1832년(순조 32년) 동래도호부사(東萊都護府使) 박제명(朴齊明)을 동래단(東來壇)으로 보내 치제할 때에 하사한 제문이다. 제문은 이돈영(1801~?)이 지어 올린 것이다. 제문에 나오는 소무는 한 무제(武帝) 때의 장군으로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다가 포로가 되었으나 끝까지 절의를 지켰던 인물이다.

 

또한 안고경(692~756)은 당나라 현종 대의 충신으로 상산태수(常山太守)로 있을 때 안녹산(安祿山)이 난을 일으키자 그의 사촌 동생인 안진경(顔眞卿)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서 대항하다가 패전하여 안녹산에세 잡혀 회유를 당하였으나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비참한 형(刑)을 당하여 죽었던 인물이다. 여기서는 천곡 선생이 소무와 안진경 같은 충신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상에서 소개한 치제문 외에도 선묘을미 사묘제문(宣廟乙未 賜廟祭文), 인묘갑자 사묘제문(仁廟甲子 賜廟祭文), 현묘을사 사묘제문(顯廟乙巳 賜廟祭文), 영묘어제 임진사묘제문(英廟御製 壬辰賜廟祭文) 등이 있다.

 

송상현 동래부사를 보신 부산의 충렬사는 도심지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고 공원으로 잘 꾸며져 있어 부산시민들이 자주 방문하는 곳이다.

 

넓은 송상현광장에 우뚝 선 동상의 글씨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충렬사의 정화기념비 앞에 박정희 대통령이 기념 식수한 주목을 참배객들이 유심히 살펴보고 있어 감동받았다. 충렬사 연못에는 많은 비단잉어가 노닐고 있어 가족단위 참배객들이 먹이를 주며 아이들은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울창한 숲속의 충렬사 공원 벤치에는 많은 시민들이 더위를 피해 담소를 나누고 있어 보기 좋았다.

 

송상현 동래부사 일가는 온통 충효를 실천한 가문이라 할 수 있다. 송상현 공과 두 첩실에게는 나라에서 정려문을 내리고 정실부인 성주 이씨에게는 정경부인을 증직하는 교지를 내렸다. 송상현 동래부사의 충효정신은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나라와 국민의 사표가 되고 있다. 조선시대 임금은 제문을 하사하여 그의 충의를 기렸고, 박정희 대통령도 부산 충렬사를 성역화 하고 송상현광장의 동상에 친필휘호를 남겨 존경심을 표하였다.

 

요즘 정치권은 가치관이 전도되어 수학여행가다 죽은 학생들에게는 과도한 보상을 해주고, 서해교전 희생 장병들에게는 무관심으로 일관하여 대조적이다. 한미동맹에 균열을 일으키고 6.25 한국전쟁 때 적이었던 중국에게 사대하는 정치인들은 각성해야 하겠다. 국방을 소홀히 하고 애국심이 결여 되고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않으면 국난은 또 되풀이될 수 있다는 사실을 국민들은 명심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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