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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현 동래부사를 모신 청주 충렬사,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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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송상현 동래부사를 모신 청주 충렬사,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임진왜란 당시 왜적과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1551~1592) 공, 양산군수 조영규(趙英圭, 1535~1592) 공을 평소에 흠모하여 유적지 답사에 나섰다.

 

1. 강상촌과 정려문

 

 

임진왜란 당시 왜적과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1551~1592) 공, 양산군수 조영규(趙英圭, 1535~1592) 공을 평소에 흠모하여 유적지 답사에 나섰다. 양산의 삼조의열로 추앙받아 양산의 춘추공원 충렬사에 모셔진 조영규 양산군수는 전남 장성이 고향인데, 작년에 장성의 조영규정려를 다녀왔다. 송상현 동래부사를 모신 청주 충렬사, 묘소를 참배하기 위해 7월 16일 방문하였다. 14일 부산 송상현광장, 17일 부산 충렬사를 답사하였다.

 

 

조영규 양산군수는 동래성이 위기에 빠지자 달려가 송상현 부사를 만나 함께 싸울 것을 약속하였다. 양산에 연로한 어머니가 있어 다시 양산에 돌아가 작별 인사를 하고 아들 정로에게 할머니를 모시고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가라고 한 다음 동래성으로 돌아와 송상현 동래부사와 함께 싸우다 장렬하게 최후를 맞았다.

 

 

큰 느티나무 아래에 동네 노인들이 모여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먼저 정려문, 효열각, 효부각을 둘러보았다.

 

 

느티나무 아래 표지판이 있어 가보니 놀랍게도 이승만 대통령이 1953년 4월 기념 식수했다고 적혀 있었다(당시 동네 주소는 청원군 강서면 강촌). 대부분의 답사객은 이 느티나무의 존재를 모르고 무심하게 지나치는 것 같았다.

 

 

6.25 한국전쟁이 휴전이 안 된 시기에 이곳을 방문하여 충신 송상현 동래부사를 추모하며 기념식수를 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농민들에게 저렴하게 땅을 불하하였다. 남로당 총책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남쪽으로 쳐들어가면 남한의 농민들이 호응할 거라고 장담을 하였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땅을 갖게 된 농민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웠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오늘날의 굳건한 한미동맹, 경제 번영의 터전을 이룩하였다. 좌파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오히려 친일파라고 매도하며 깎아내리기에 급급하지만 국민 대다수는 동의하지 않고 있다. 부산 충렬사를 7월 17일 참배하였는데, 이곳을 정비하고 성역화한 분은 박정희 대통령이다. 1978년 7월 21일 유적 정비 후 주목을 기념 식수하였다. 부산 유엔기념공원에도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 남아 있다. 역사 위인, 안보와 관련된 유적지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성역화에 기여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청주 여산 송씨 정려각이 강상촌 마을 입구에 서 있다. 임진왜란 때 동래성을 지키다 순절한 천곡 송상현 동래부사와 그 후손들의 가계에서 배출된 열녀, 효부의 정려이다. 본래는 1595년(선조28) 송상현만 정려되었으나 1704년(숙동30)에 두 소실이 정려됨에 따라 함께 모시게 된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1954년에 중수한 것이다.

 

 

충렬각은 묘소 이장 후 세운 것으로 보이며, 1594년(선조 27년) 12월에 처음 명정되었고, 1704년(숙종 30년) 한금섬(韓金蟾)과 이양녀(李良女)의 열녀문을 합쳐 다시 세운 것이다. 또한 후손 송현기(宋鉉器, 1684~1750)의 처 밀양 박씨의 효열각, 송명휘(1737~1793, 宋明暉)의 처 연일 정씨의 효부각이 있다. 이러한 일문삼려(一門三閭)의 형식은 흔치 않은 것이다.

 

 

여산송씨 정려각은 경부고속도로 청주IC에서 청주로 들어가는 가로수길 옆에 자리한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에 있다. 동네 이름이 강상촌(綱常村)인데, 삼강오상(三綱五常)의 정문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강상촌( 綱常村)’이라 줄여 부른다고 한다. 유교의 삼강오륜이 살아있는 전통마을이라 할수있다.

 

 

충신과 더불어 열녀와 효부의 산실이 바로 강상촌이다. 필자가 추풍령 옛길을 답사할 때 김천시 봉산면에 갔는데, 동네 이름이 유교의 인의예지신을 본떠 인의리, 예지리가 있어 좋은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2. 한금섬과 이양녀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송공단(宋公壇)에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기녀 한금섬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인 금섬 순난비(金蟾殉亂碑)가 있다. 송공단은 임진왜란 때 동래성을 지키다 순절한 송상현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의 비석을 세운 곳이다. 금섬은 비록 기녀였지만 송상현의 첩으로써 그에 못지않은 의로움과 충절을 보여주었고 그것을 잊지 않고 기념하기 위해 순난비가 세워졌다.

 

 

금섬 순난비는 높이 73cm, 너비 30.5cm, 폭 12cm의 크기로 비석 윗부분이 반달처럼 둥글게 다듬어져 있는 형태이며, 송상현 순절비 뒤쪽 왼편에 마련된 별도의 공간에 세워져 있다. 비석 앞면에는 ‘금섬 순난비’라 새겨져 있고 붉은색으로 덧칠해져 있는데 이는 ‘나라의 위기에 목숨을 바친 금섬의 비’라는 정도의 의미로 볼 수 있다.

 

 

한금섬은 함경남도 함흥 출신의 기녀로, 1592년 열세 살 되던 해에 송상현의 첩이 되어 동래부사로 부임하게 된 송상현을 따라 부산으로 갔다. 금섬이 관아에 있다가 여종 금춘과 함께 동래성에 찾아갔으나 송상현이 이미 순절한 후였다. 금섬도 왜군에게 잡히게 되었으나 두려워함이 없었다. 오히려 사흘 동안 왜적들을 욕하며 꾸짖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조선의 사신으로 왔었던 왜군의 장수가 금섬의 의로움을 기특하게 여겨 동래성 밖에 송상현과 함께 묻어주었다고 한다.

 

 

1608년 동래부사 이안눌이 동래성 남문 밖에 제단을 만들어 임진왜란 때 동래에서 순절한 사람들을 기렸는데 여기에 금섬도 속했다. 1742년 동래부사 김석일이 송공단을 설치하면서 앞선 제단이 옮겨졌으며 이후 매년 음력 4월 15일 제사를 지냈다. 또한 충렬사에 배향되어 매년 5월 25일 제향을 통해 그 의로운 절개가 기려지고 있다. 부산 동래 지역의 역사와 설화를 스토리텔링한 민속 공연이 최근 진행되었는데, 송상현 동래부사와 금섬을 소재로 재구성된 이야기가 포함되어 많은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양녀는 이소사라고도 한다. 동래성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일본까지 끌려갔다. 일본에서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수청을 강권받았으나 목숨 걸고 항거하였다. 지진이 일어나 건물이 무너졌지만 이양녀가 있는 곳은 멀쩡하였다. 일본에서는 정절에 감동받아 조선으로 돌려보내주었다.

 

 

3. 동래부사 송상현 공의 생애와 청주 충렬사

 

송상현 공은 1551년(명종 6년) 1월 8일 한양에서 출생하여 15세 때 승보시(陞補試)에 장원하고 20세에 진사가 되었다. 본관은 여산(礪山)이고, 자는 덕구(德求), 호는 천곡(泉谷), 한천(寒泉)이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정자에 보임되었다. 천곡종친회 송해종(전직 공무원) 회장에 의하면 송상현 공의 부친인 송복흥(宋復興)은 전북 고부 사람이고, 송상현 공은 고부가 아닌 부친 근무지인 서울 ‘황화방’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아래로 동생 송상인(宋象仁)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송전(宋琠)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송승은(宋承殷)이다. 부인은 성주이씨(星州李氏)로 기묘명현인 묵재 이문건(李文健)의 손녀다. 부친은 평강, 용안 등에서 현감을 지낸 후 임진왜란이 발발한 시점에서 이미 사헌부 감찰을 역임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재주가 뛰어나 10여 세에 경사(經史)에 통달하였다. 15세에 승보시(陞補試)에 장원하면서 문장을 떨쳤고 사계 김장생과 우의를 맺었다. 1570년(선조 3) 진사시에 입격하여 진사가 되고, 1576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에 보임되었으며, 다음 해 저작(著作)으로 승진하였다. 1579년 박사(博士)와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임명되었고, 다음 해에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외직에 나가 유학을 진작시켰다.

 

1583년 사헌부지평으로 들어와 호조・예조・공조의 정랑(正郞), 공조좌랑과 군자감(軍資監)의 정(正) 등을 지냈다. 1584년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다시 지평이 되었다가 은계도찰방(銀溪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다시 지평을 지내고 배천군수로 나갔다가 3년 만에 전직되어 경력(經歷), 집의, 사간과 사재감(司宰監), 군자감(軍資監)의 정(正)이 되었다.

 

1591년(선조 24년)에 집의(執義)로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진되고 동래부사(東萊府使)에 임명되었다. 왜구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들려오는 가운데 임지에 도착하여 방비를 굳게 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1592년 4월 14일 왜적들이 목판에 “전즉전의 부전즉가도(戰則戰矣, 不戰則假道)” 즉, “싸울려면 싸우고, 싸우기 싫으면 길을 빌려 달라.”하니 송상현 동래부사는 “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難)” 즉,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고 써서 적에게 던지고 성민들과 일치단결하여 싸웠다.

 

전투는 중과부적으로 4월 15일 오시경 동래성이 함락되었다. 피하라고 권유하여도 피하지 않은 채 태연히 북쪽의 임금에게 북향요배(北向遙拜)를 마친 후 부채에다 고별의 글을 써서 고향에 계신 부친에게 올리고 42세를 일기로 의연하게 순절하였다. 왜장 소 요시토시〔宗義智〕 등이 그의 충렬을 기려 동문 밖에 장사지내주었다. 현재 묘소는 충북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 산1-1에 있다.

 

공은 동래부사로서 짧은 재임 기간이었지만 목민(牧民)에 힘썼기 때문에 부민(府民)들은 공을 부모 모시듯 하였다고 한다. 상여가 떠날 때는 살아남은 유민이 백리 밖까지 따르면서 호곡했고 적장 고니시유키나가(小西行長)도 공의 높은 충절에 감복하여 공을 해친 자를 찾아내어 목을 베고 상여가 지나갈 때 하마(下馬)하여 숙연히 예를 표했다 하니 이는 전사상 유례가 없는 것이다.

 

사후에 이조판서,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부산의 충렬사, 개성의 숭절사(崇節祠),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고부의 정충사(旌忠祠), 청원의 충렬묘(忠烈廟)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청주 충렬사(淸州 忠烈祠)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에 있다. 선조 28년(1595년)에 묘소를 동래에서 이장하고 광해군 2년(1610년)에 사당을 창건하였다.

 

충렬사 뒷산에는 송상현의 묘소와, 현종 원년(1659년)에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쓴 신도비가 있다. 사당 입구에 선조 28년(1595년)에 건립한 충신문이 있다. 지금의 건물은 1980년에 중수한 건물로 정면 3간, 측면 2간의 겹처마 목조기와집인데 내부는 통칸 마루방에 3개의 분합문을 달고 앞퇴를 두었으며, 마당 앞에 삼문을 세우고 주위에는 석축담장을 쌓아 보호하고 있다.

 

청주시에서는 천곡의 애국충절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2001년에 인근 부지를 확장 정비하여 전시관과 사당을 신축하였으며, 주변을 공원화하여 시민들이 역사와 함께 호흡하는 공간으로 조성하였다.

 

4. 천곡 기념관

 

요즘 코로나19 때문에 역사 유적지는 개방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 답사하기가 매우 힘들다. 송상현 공 기념관인 천곡기념관 역시 폐쇄되었으리라 생각하고 방문하였는데, 기념관에서 사람들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기대하고 가보니 기념관 전시물 보완을 위해 송씨 문중 인사, 관리사무소장, 관련기관 관계자, 문화관광해설사 등이 모여 회의를 하였다. 기념관을 구경하고 싶다고 요청하니 개방을 안 한다고 하였다.

 

날씨는 찌는 듯이 더워서 땀이 많이 흘렀다. 청주 충렬사를 답사하기 위해 멀리 양산에서 왔다고 이야기하며 잠깐 사진만 찍겠다고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마침 김미영 문화관광해설사가 열의에 감동했는지 관리사무소장에게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충렬사 답사를 마치고 주차장으로 내려오니 김미영 해설사가 관리사무소장을 만나보고 가라고 이야기하였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여러 가지 궁금한 점을 물어보고 대화를 나누었다.

 

송상현 공 후손인 송정화 선생은 묘소 주소를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수의동 10번지로 치면 묘소 앞의 신도비가 나온다고 하였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묘소 주소가 여러 개가 뜨고 산 몇 번지로 되어 있어 찾기가 쉽지 않다고 나와 있었다. 송정화 선생은 일제강점기 때 청주의 송상현 공 문중과 후손들이 일제경찰로부터 핍박을 받았다고 하였다. 넓은 문중 땅을 빼앗기 위하여 산에 나무를 심으라고 하는 등 괴롭혔다고 얘기하였다.

 

송상현 공의 표준 영정을 만들기 위하여 후손들의 얼굴을 참작하고 컴퓨터로 합성하여 권오창 화백이 제작하였다고 송정화 선생이 전해주었다. 양산의 김해 김씨 문중에서도 삼국통일에 기여한 김무력 장군, 김서현 장군, 김유신 장군 3대의 표준 영정 제작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송정화 선생과 송해성 관리소장은 얼굴이 미남형으로 잘 생겼다.

 

송해성 청주 충렬사관리소장의 공식 허락을 받고 김미영 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천곡기념관으로 다시 올라갔다. 김미영 해설사가 전시된 자료를 재미있게 해설해주었다. 필자가 울산광역시 문화관광해설사, 북구청 관광해설사, 중구청 울산큰애기 관광해설사, 남구청 마을해설사 등의 특강 강사로 해설안내기법을 강의한다고 얘기하였다. 김미영 문화관광해설사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천곡 송상현 공 유물은 동래부순절도 1폭, 교지 3점, 치제문 4점, 혈선발 1첩, 『천곡수필집』 1책 등 5건 10점이다. 이들 유물은 지금까지 전해지는 천곡 송상현 공의 일괄 유물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한다.

 

기념관의 동래부순절도는 1658년(효종 9년) 동래부사 민정중이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전투상황을 잘 아는 노인의 말을 토대로 그린 그림이다. 중심에 동래성이 둥글게 자리 잡고 있고, 남쪽 성루를 중심으로 동래 병사들이 수비하고 있으며, 이들을 공격하기 위해 왜병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다. 성곽 아래쪽으로는 왜군과 죽음의 결전을 벌이는 장면이 있고, 성곽 안쪽 중심에는 붉은 조복을 입고 북쪽을 향해 앉아있는 송상현 공의 순절 장면이 그려져 있다. 김미영 해설사가 조영규 양산군수의 위치를 알려주고 도망가는 경상좌병사 이각도 얘기하였다.

 

송해성 청주 충렬사관리소장은 필자에게 여러 가지 자료를 주었다. 송상현 공의 문집인 ‘천곡선생집’, 역주 천곡수필, 천곡 송상현의 학문과 사상 등의 두꺼운 책을 주었다. 묘소도 같이 동반하여 안내해주겠다는 말씀을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왜냐하면 날씨가 너무 더워서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혼자 답사하였다. 송해성 관리소장께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이다.

 

전국 답사를 다녀보면 명문가 후손들은 조상에 대한 존경심과 자부심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답사목적을 밝히고 질문을 하면 친절하고 열정적으로 답변해주었다. 책자와 같은 자료도 제공해주고 답사 안내도 흔쾌히 응해주었다.

 

5. 송상현 공 묘소와 신도비

 

송상현(宋象賢) 공 묘소 아래 진입로 왼편에 신도비(神道碑)가 있어 1984년에 충청북도 기념물 제66호로 지정되었다. 비문은 일부분이 훼손되었다.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송준길(宋浚吉)이 썼으며, 비의 제목은 이정영(李正英)이 전서(篆書)로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금석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송상현은 1591년 동래부사로 부임했는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민이 더불어 혈전을 벌였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마지막으로 고향에 있는 부친에게, ‘고성월휘(孤城月暉), 열진고침(列陣高枕), 군신의중(君臣義重), 부자은경(父子恩輕)’ 즉 ‘외로운 성에 달무리 지니, 여러 군진은 높이 베개를 베고 잠자네. 임금과 신하의 의리는 중요한 것이며, 아버지와 아들간의 은혜는 가벼운 것이다.’라는 절명사(絶命詞)를 남기고 장렬히 순국했다. 이에 왜적의 장수도 그의 절의에 탄복하여 그를 살해한 왜병을 참살한 뒤 송상현의 시신과 그의 첩(妾)인 한금섬(韓金蟾)의 시신을 동문 밖에 안장하고 나무로 표찰을 세웠다. 그리고 시를 짓고 제사를 지냈다.”

 

신도비에서 묘소로 올라가는 긴 계단석이 있었다. 묘소는 각종 석물로 단장되어 있었다. 송상현 공 묘소 왼쪽에는 이양녀의 묘소, 오른쪽에는 한금섬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양녀의 묘소는 양평군 서종면 정비리에 있었는데 실전되어 가묘로 만들었다. 임금이 정해준 산소는 함부로 못 건드린다는 나라의 법도를 따라서 송상현 공의 정경부인 묘소는 1km 떨어진 황구산 기슭에 있다고 한다. 여산 송씨의 재실은 신도비에서 200m 남짓 떨어져 있었다.

 

송상현 공의 묘가 동래에 있는 것을 안 선조는 당대 제일 풍수가 ‘두사총’에게 명당을 잡도록 명령을 하였다. ‘두사총비기’의 저자이기도 한 두사총은 명나라 사람으로 명의 조선원군과 함께 한반도에 들어왔다. 부모산 자락이 끝나는 지금의 묘자리에서 명당을 발견하고 묘를 이장하였다. 송상현 공의 부인이 3년간 시묘살이를 했고, 이때부터 여산 송씨가 청주, 청원 일대로 이주하여 세거지를 형성하게 되었다.

 

삼복더위에 송상현 공과 관련된 유적을 답사하며 땀을 많이 흘렸지만 보람은 있었다. 답사에서 만난 분들이 친절하게 안내해주고 자료를 제공해준 덕분에 많은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었고, 글을 작성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단순한 친일, 반일을 논하지 말고 선조들의 애국심을 깊이 공부하고 본받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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