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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본거지인 성주 백세각.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박사 심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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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독립운동의 본거지인 성주 백세각.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박사 심상도

야계(倻溪) 송희규(宋希奎, 1494~1558년) 선생의 본관은 야성(冶城)이다. 야성은 야로(冶爐)의 별호인데, 경상남도 합천군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신라 때 적화현(赤火縣)이었던 것을 

 

1. 백세각을 지은 야계 송희규 선생

 

 

야계(倻溪) 송희규(宋希奎, 1494~1558년) 선생의 본관은 야성(冶城)이다. 야성은 야로(冶爐)의 별호인데, 경상남도 합천군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신라 때 적화현(赤火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야로로 고쳤다.

 

 

야계는 송수겸(宋守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송소(宋紹)이고, 아버지는 부사직 송방현(宋邦賢)이며, 어머니는 황진(黃珍)의 딸이다. 1513년(중종 8) 향시에 합격하고 이어 1519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병조좌랑, 현풍현감, 호조정랑 등을 지내고, 1534년 흥해군수가 되었다.

 

 

이 때 옥산(玉山)에 있는 이언적(李彦迪)과 왕래하면서 교분을 두텁게 하였으며 선정관(善政官) : 정치를 훌륭히 잘한 관원)으로 뽑혀 1급이 승진되었다.

1543년 이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상주목사,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역임하였고, 유희춘(柳希春)과 함께 윤임(尹任)을 옹호하다가 파직당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년) 대구도호부사로 복직하였고, 이듬해 예빈시정이 되어 다시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송희규 선생의 자(字)는 천장(天章), 호는 야계 또는 야계산옹(冶溪散翁)이라 하였다. 효행이 지극함을 당시 경상도 관찰사 회재 이언적이 장계를 올려 중종 38년(1543년) 9월 28일 정려가 내려지고 노포동에 정려각을 세웠다. 선조 32년(1599년) 동산 모암 아래로 이건하였다.

 

 

야계 송희규 선생은 사헌부 집의(執義)로 있을 때 세도가 윤원형을 탄핵하다가 전라도 고산(高山)으로 귀양을 갔다. 을사명현(乙巳名賢)으로 사면된 후 고향으로 돌아와 고산리에 백세각(百世閣)을 짓고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학문과 시주(詩酒)를 즐기며 유유자적(悠悠自適)하였다.

 

 

사후에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증직(贈職)되고 충숙(忠肅)이란 시호가 하사되었다. 남달리 효우가 두터워 죽은 4년 뒤에 조정에서 정려와 효우비를 세워주었으며, 1565년 직첩을 환급받았다. 저서로는 『야계문집(倻溪文集)』이 있다.

 

 

송희규 선생은 이곳 공서(公西)마을에 백세각(百世閣)을 짓고 학문에 힘써 많은 문집을 냈다. 초전면 고산리 542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방문화재 163호이다. 정면 7칸, 측면 7칸의 맞배지붕, 口자형 집이다.

 

 

송희규 선생이 귀양에서 5년 만에 풀려 고향으로 돌아와 마을 이름을 고산리(高山里)라 바꾸고 명종 6년(1551년)에 기공하여 이듬해에 준공된 누각으로 현재까지도 원형 그대로 관리되고 있다. 종손 송만수 씨에 의하면 그동안 두 번의 화재가 발생하여 부분적으로 불타서 중수하였다고 한다.

 

 

2. 파리장서운동과 성주 3.1만세운동의 본거지인 백세각

 

백세각에 이율곡(李栗谷), 한석봉(韓石峯), 채번암(蔡樊巖)의 친필이 소장되어 있었는데, 한석봉의 친필은 1970년에 도난당하였다고 한다. 백세각에는 소, 닭이 들어가면 울지도 못하고 비오는 날 자정에는 말발굽 소리가 요란히 들려오기 때문에 종손이 아니면 무서워서 잠을 못 잔다는 전설이 있다. 대지 756평이며 쇠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전통적 건축물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현존하는 목조건물 중 성주군 관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역사적인 사연을 간직하고 종택으로서 면모를 유지하고 있다.

 

 

야성송씨(冶城宋氏) 집성촌인 고산정(高山亭 : 고산리 마을)은 초전면 소재지 서북 약 4km 떨어진 유곡천(酉谷川)의 세천(細川)을 끼고 있다. 서편에는 표고 181m의 산봉을 뒤로 위치해 있는 서편 마을(公西 : 음지뜸)과 그 동에 있는 동편 마을(公東 : 양지뜸)로 구성되어 있는 마을이다. 종손 송만수 씨에 의하면 집성촌이었으나 현재는 다른 성씨가 30% 정도 들어와 산다고 하였다.

 

 

초전면 소재지의 서북쪽 산곡을 바탕으로 서쪽으로는 벽진면으로 통하는 도로가 있고 동남으로는 초전의 중심과 가깝게 자리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고산동이 되었고, 1988년 5월 조례 1076호로 동(洞)이 리(里)로 개칭되었다. 4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백세각 뒤로는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어 소음 공해가 심한 편이다. 종손 송만수 씨에 의하면 문화재인 백세각과 너무 인접한 곳에 고속도로가 개설되어 마을주민과 야성송씨 문중에서 적극 반대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원래 노선에서 70m 정도 물리는 선에서 고속도로가 건설되었다고 한다.

 

 

제1차 유림단 의거 회의 장소가 바로 백세각이다. 1919년 경북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야성송씨 문중이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의 서명과 성주지역의 만세운동 참여를 논의한 곳이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김창숙을 비롯한 유림 대표는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제1차 유림단 의거(파리장서운동)를 추진하였다. 성주군 초전면 고산마을의 야성송씨 문중도 적극 참여하였는데, 이에 앞장선 사람이 공산 송준필 선생이다.

 

1919년 3월 초순 송준필 선생은 야성송씨 충숙공파의 종가인 백세각에서 문중회의를 열어 시국상황을 논의하였다. 이어 김창숙 선생과 만나 파리장서 계획을 협의하고 성주지역 서명자 규합에 나섰다. 송준필 선생은 통고국내문(通告國內文)을 작성하여 유림의 궐기를 독려하였으며, 4월 2일(성주장날) 성주읍내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는 데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백세각은 1982년 경북 유형문화재 163호로 지정되었다.

 

백세각 항일 의적비는 2004년에 송준필, 송홍래, 송회근, 송규선, 송훈익, 송천흠, 송우선, 송문근, 송인집, 송수근, 송명근 11명의 애국지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성주군은 파리장서 서명 참여자가 유림 137명 가운데 16명으로 가장 많은 지역이며, 독립운동으로 추서된 독립유공자만 85명인 독립운동의 중심지이다. 1919년 4월 2일 성주 장날 만세 운동에는 유림들과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성주 군민 3천여 명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일본 경찰의 발포로 사망 2명, 부상 20명, 투옥 46명 등의 피해를 보았다.

 

3. 공산 송준필 선생이 지은 ‘통고국내문’

 

‘통고국내문(通告國內文)’은 일제강점기인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당시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공산 송준필 선생이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렸다.’며 유림과 국민들에게 궐기를 호소하기 위해 작성된 문서이다.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에 불교, 천도교, 기독교 등의 종교단체 대표가 참가하였는데, 유림은 빠져서 이에 대한 대책으로 파리장서운동이 전개되었다.

 

초안은 김창숙, 송규선, 곽종석이 작성키로 하고 송준필과 장석영은 파리장서 서명을 촉구하는 국내 통문을 작성해 영남 일대 유림대표 137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았다. 통고국내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렸다. 나라가 회복되면 죽어도 오히려 사는 것이요, 나라가 회복되지 못하면 살아도 또한 죽은 것이다. 이 날은 무슨 날인가? 서울 이하 밖으로 이름 있는 도시, 큰 항구 및 궁산 벽촌에 이르기까지 혈기를 가진 모든 사람들이 환호하고 고무하며 일제히 한마음으로 함께 창의(倡義)하였으니, 하늘의 뜻이 화를 뉘우치고 사람의 마음이 단결되었음을 이미 알 수 있다.

아! 우리가 입을 다물고 혀를 깨물면서 분루(憤淚)를 삼킨지 지금 10년이 되었다. 천 년에 한 번 있는 기회를 만나 만방의 공의(公儀)가 자재(自在)하여 나라를 회복할 가망이 있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떤 사람인데, 오히려 문을 닫고 앉아서만 있을 수 있겠는가? 이에 우리는 울분을 이기지 못하여 통문을 돌려 우러러 알리노니, 이는 진실로 팔역(八域)이 똑같은 심정일 것이며 여러 군자들도 또한 마음에 환할 것이다.

 

원컨대 지금부터 군(郡)에서 향(鄕)으로 향에서 동(洞)으로 각각 독립의 깃발을 세워 우리들의 종노릇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자, 그리고 다시 만국 회의에 편지를 보내 우리의 실정과 소원을 알게 하여 공의가 널리 신장되도록 한다면, 천만 매우 다행이리라.”

 

가수 스테파니, 쏘머즈, 지세희, 박영수가 참여하고 독립운동 되새기기 프로젝트 앨범 ‘통고국내문’ 음원이 2020년 12월 14일 발표되었다. 독립운동에 대한 소중함을 다시금 일깨우는 것은 물론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들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 오늘날 전 국민이 기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제작하였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선율이 담긴 음악으로 부활하게 됐다.

 

곡은 ‘통고국내문’ 싱어송라이터 쏘머즈가 원 글을 최대한 변형 없이 가사로 담아내며 완성도 높게 작곡했으며 노래에는 스테파니, 쏘머즈, 지세희가 참여하고 나레이션의 경우 배우 박영수가 담당했다. 프로젝트 앨범 ‘통고국내문’은 음원 수익은 경북 성주군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교육 사업에 사용될 예정이다.

 

4. 봉강서당에서 인쇄한 ‘통고국내문’

 

송준필은 야성송씨 종택인 백세각(百世閣)에서 아버지 송기선과 어머니 영천 최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파리장서운동, 성주 3.1운동의 역사 현장이 바로 백세각(百世閣)이다. 송준필과 그 문인들이 성주시장 만세운동에 앞서 3월 26일 유림과 국민에게 독립을 촉구하는 글인 ‘통고국내문’ 3천 장을 인쇄하여 뿌렸다. 백세각에서 가까운 봉강서당에서 인쇄하고 태극기도 만들었다.

 

봉강서당은 백세각과 약간 떨어져 있는데, 종손 송만수 씨가 위치를 알려주었다. 백세각에서 출발하여 중부내륙고속도로 밑을 지나 조금 올라가다가 좌회전하여 좁은 길로 들어서 작은 저수지를 지나니 봉강서당이 나왔다. 안내 표지판이 없어 초행자는 찾기 힘들었다. 성주군에서는 송희규 선생의 정려각의 풀도 베고, 봉강서원 안내 표지판도 설치해야 하겠다.

 

봉강서원은 1785년 여러 고을 사림들이 본주(本州) 향교에 통문을 보내 야계 송희규 선생의 서원 창건을 요청하였고, 1786년 고상정 북쪽 명곡에 서원을 건립, 선생의 위판을 봉안하였다. 신연(新淵) 송사이(宋師頤) 선생을 배향했으며, 원액(院額)은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썼다.

 

1838년 지반이 기울고 무너져 손곡 야계 선생 분암(墳庵)이 있는 이곳으로 이건했으며 1868년 대원군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869년 그 자리에 사림들의 뜻을 모아 봉강서당을 세워 존모(尊慕)의 뜻을 기리고 있으나 아직 힘이 미치지 못하여 서원 복원을 못하고 퇴락한 곳이 많아 자손들의 정성을 모아 중수하고 여기에 그 뜻을 새긴다고 봉강서당 중수비에 나와 있다.

 

백세각에는 공산 송준필의 명에 따라 사람들이 사랑방에 모였다. 짧지만 강한 ‘통고국내문’의 문장에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일치하였다. 성품이 강건하고 재기가 출중하여 일찌감치 소년재사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인 송인집이 많은 사람들에게 통고문을 나눠주려면 일일이 필사를 하는 것보다 차라리 인쇄를 하는 방법이 더 나을 것 같다고 제안하였다.

 

인쇄를 하려면 멀리 대구까지 나가야 하는데, 일본경찰의 눈을 피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사전에 기밀이 새어나갈 우려가 있었다. 재사(齎舍)의 마루나무로 직접 판을 새겨 사용하자고 하니 공산 송준필 선생이 동의하였다.

 

마침 봉강서당에 있는 흥효당의 마루나무가 감나무로 ‘통고국내문’을 새겨 인쇄를 하기엔 적당하였다. 송인집이 글을 쓰고 나무를 다듬고 글을 새기는 건 송중립이 맡았다. 송인집이 나서서 책임을 분담하자,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인쇄된 통고문 3천 장은 송인집과 이수택에게 나누어져 각지에 배포됐다. 이와 함께 제작된 태극기 3천 장도 거사일까지 백세각 2층에 몰래 보관하였다. 인쇄에 사용했던 마루나무는 도로 제자리에 뒤집어 넣어 감쪽같이 흔적을 지웠다.

 

송준필이 통고국내문을 찍을 때 봉강서당 내 흥효당의 청목(廳木 : 청마루창 나무) 가운데 한 장을 떼어낸 다음 송인집이 글씨를 쓰고 송중립이 새겼다. 인쇄 뒤 판을 다시 마루창에 맞춰 경찰 눈을 피했다. 마루창 원판은 1980년 7월 다시 빛을 봤는데, 종손 송만수 씨에 의하면 현재 목판 2장 중 1장만 남았다고 한다.

 

백세각은 종가의 고택으로 보존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3.1운동 기념일에는 각종 행사가 열려 많은 성주군민과 외지인들이 참여하여 숭고한 독립운동의 정신을 기리고 있는 살아 있는 독립운동의 현장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백세각과 항일 유적비 살펴보기, ‘통고국내문’ 탁본뜨기와 사발통문 작성하기, 파리장서운동을 소재로 한 연극공연(외부 참가자도 참여 가능, 성주 별고을 광대단의 연극과 노래 공연, 성주 읍내 시장 보기(성주사랑상품권 사용)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양산시도 춘추공원에 항일독립기념관을 건립하고 있는데, 완성되면 양산시민들의 애국심 고취에 기여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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