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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구국에 앞장선 양산의 광주 안씨 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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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임진왜란 때 구국에 앞장선 양산의 광주 안씨 문중

소계사(蘇溪祠)는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율리마을에 있다. 조선 후기인 1783년(정조 7년)에 광주 안씨(廣州 安氏) 문중에서 건립한 사당이다. 1866년(고종 5년)에 소계서원은 대원군의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소계서원과 임진왜란 공신

소계사(蘇溪祠)는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율리마을에 있다. 조선 후기인 1783년(정조 7년)에 광주 안씨(廣州 安氏) 문중에서 건립한 사당이다. 1866년(고종 5년)에 소계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 방침에 따라 철향(撤享)한 뒤 서당으로 바뀌었다. 1950년에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로 재건하고 이어 강당을 중건하였다.

 

 

소계사는 광주 안씨 판사공파(判事公派) 양산 문중(梁山 門中)의 파조인 조선 태종 때의 유학자인 안몽득(安夢得)과 아들인 계산 안우(安宇), 치암 안주(安宙), 광려 안택(安宅)을 주향(主享)으로 모시고 있다.

 

 

광주 안씨가 율리마을에 터를 잡게 된 것은 광주 안씨 판사공파 양산 문중의 파조 안몽득(安夢得德)의 손자 계산 안우(安宇) 공이다. 안우는 조선 초기 함안(咸安)에서 출생하여 1524년(중중 19)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개성 및 밀양, 선산, 평산 등지의 부사를 역임하고 재임 시에는 청백리로 청빈하게 생활하였다. 이후 양산군 상북면 소토리에 거주지를 옮겨왔다. 이곳에 집성촌을 이루어 살기는 약 500여 년이 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공신인 구암(龜庵) 안근(安瑾), 도훈도(都訓導) 안수(安琇), 주부(主簿) 안시명(安諟命), 첨사(僉使) 안이명(安以命), 매죽헌(梅竹軒) 안신명(安信命)을 배향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안근은 아들과 사촌 안수, 조카 안제, 종질 신명, 양산의 이수생, 이몽란, 이웃 마을의 정호인, 정호의 등과 함께 양산뿐만 아니라 경주, 울산, 서생포, 대구 등지에서 왜적에 대항하여 싸웠다.

 

 

안근은 왜적이 쳐들어오자 아들들과 집의 노비를 모아 군량과 병기를 정비하여 이웃 사람들과 일어나 수백 명의 의병을 모집하였다. 안근은 양산을 지키기 위하여 낙동강 하구를 거슬러 오르는 왜적을 구포와 금정산에서 맞아 수십 명을 베었고, 그의 종제 안수(安琇)는 동래 출신 김정서(金廷瑞)와 함께 동래전투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안근은 임진왜란에서 세운 공으로 선무원종 삼등공신에 책봉되었으며 관직은 주부(主簿)에 이르렀다. 아들 안시명은 임진왜란 중의 공적으로 교첩을 받았고, 선무원종 삼등공신에 책봉되었으며, 1603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셋째아들 안이명은 백호장군(白虎將軍)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정유재란 때에는 이충무공 휘하에서 당포만호로 있다가 훈련원정(訓練院正)에 승진되고 다시 가리포 첨사에 올랐다. 1597년(선조 30) 10월 16일 밤에는 해남에서 적 13명을 베었으며 왜적에게 투항한 송원봉의 목을 베어 왔다. 『난중일기(亂中日記)』의 1597년 2월 4일자에서는 안이명을 당포만호(唐浦萬戶)로 기록하고 있다. 선무원종공신 1등에 서훈되었다.

 

 

소계서원에는 광주 안씨의 3명의 현인, 5명의 충신 위패와 비를 안치하고 있다. 조선 태종 때 유학자인 안몽득(安夢得)과 후손인 안우(安宇), 안주(安宙), 안택(安宅) 3형제와 임진왜란 공신 안근(安瑾), 안수(安琇), 안시명(安諟命), 안이명(安以命), 안신명(安信命)을 가리킨다.

 

 

소계서원은 1866년에 중건, 1868년에 철향(撤享)된 뒤, 서당으로 바뀌었다. 1950년에 향중의 사론(士論)에 의하여 안몽득(安夢得)과 삼현오충(三賢五忠)을 향제하고 건물은 전학후묘의 형태로 재건하고, 이어 강당을 중건하였다. 소계사에는 양산군수를 지낸 이능화의 「양산삼현오충가(梁山三賢五忠歌)」와 안효진(安孝進)의 시가가 전해지고 있다. 소계사 입구에 있는 두 기의 비석은 양산군에 무기를 사도록 기금을 낸 여문조를 기리는 불망비, 양산군수 김여익의 선정비다.

 

 

2. 안씨 문중의 무과 교지

 

2002년 안전한 보관을 위해 통도사성보박물관에 임시로 기탁 보관하였던 양산시 소장 문화재 38건 153점이 2012년 12월 20일 유물전시관 수장고로 이관되었다. 이 중에서 대표적인 유물로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친 양산의 광주 안씨 문중의 안근, 안시명 공의 귀중한 교지(도유형문화재 제149, 150호)가 포함되어 있다.

 

 

신용철 양산시립박물관장이 밝힌 교지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안근의 교지는 1594년 무과 병과에서 118등으로 입격한 내용을 담고 있다. 또 다른 교지는 참봉인 안시명이 무과 병과에서 343등에 입격한 내용이다. 원래 무과는 갑 3명, 을 5명, 병 20명을 선발하지만 이들 교지를 통해 당시에는 임진왜란이 발생하고 또 전란이 막 끝난 후이기 때문에 많은 무과생들을 선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교지는 조선시대 국왕의 말씀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동시에 국왕이 관직 및 과거 합격 증서, 토지나 노비, 기타 특권을 내리는 문서 가운데 첫 행에 ‘교지’라고 적는 문서군을 통칭하는 용어로도 사용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왕지(王旨)’라는 용어가 사용되다가 1435년(세종 17년)에 교지를 사용하도록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이들 교지라고 지칭된 문서는 관직 임명 문서인 고신(告身, 사령장), 과거 합격 증서인 홍패(紅牌)・백패(白牌), 추증 교지(追贈敎旨), 시호 교지(諡號敎旨), 면역 교지(免役敎旨), 사패 교지(賜牌敎旨) 등이 있다.

무관 고신교지는 조선시대 무관 임명장이다. 즉 1594년(선조 27) 안시명이 받은 교첩(敎牒) 1점으로 교첩은 5품 이하의 관직에 대해 이조나 병조에서 왕명을 받아 발급하는 임명장으로 보면 된다. 문서의 내용은 향교생 안시명을 종9품 장사랑(將仕郞) 군자감 참봉으로 임명하는 것으로 발급 일자인 만력 22년(1594) 7월 옆에 군공(軍功) 때문에 임명한다고 적혀져 있다.

 

안시명은 임진왜란 때 아버지 안근을 도와 전쟁에 참전하였다. 다른 지역의 의병과 합세하여 울산, 경주 등지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전쟁을 치르는 도중에 교첩을 받았다. 안시명은 이후 1603년 무과에 합격하여 관직이 훈련주부에 이르렀다.

 

3. 안근이 참여한 문천회맹(蚊川會盟)

 

안근(安瑾)은 문천회맹에 참여하였다. 문천회맹(蚊川會盟)은 임진왜란 당시 영남 의병장들의 맹약이다. 문천(蚊川)은 경주의 남쪽을 흐르는 하천으로 남천이라고도 부른다. 문천회맹은 왜군에게 대항하기 위해 경주를 중심으로 경주부윤 윤인함과 판관 박의장을 필두로 영남 각지에서 의병장들이 1592년 6월 9일 경주 문천에 모여 말의 피를 나누어 마시고 민군이 합세하여 결사 항전을 다짐했던 회합이다.

 

1593년 2월 문경의 당교회맹(唐橋會盟), 1593년 10월 언양의 구강회맹(鷗江會盟), 1596년 3월 대구의 팔공산회맹(八公山會盟), 1597년 7월의 화왕산회맹(火旺山會盟)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실제로 문천회맹에 참여했던 의병장들 중 살아남은 다수가 구강회맹, 팔공산회맹과 화왕산회맹에 참여하였다.

죽계실기에는 양산지역 의병장들이 빠져있다. 문천회맹록(蚊川會盟錄)은 여러 본이 있는데, 동엄실기(東广實紀)에 따르면 양산의 의병장은 다음과 같다. 이몽란(李夢鸞), 안근(安瑾), 정호의(鄭好義), 정호인(鄭好仁), 최기(崔沂) 등이다.

 

문천회맹에는 많은 의병들이 참여하였다. 이들의 신분은 대개 지역의 유현(儒賢 : 유학에 정통하고 언행이 바른 사람)이지만 김호와 같은 전직 관리부터 백의의 상민과 천민은 물론 승려까지 다양했다. 연령도 60대의 노구를 이끌고 참전한 김응하에서부터 18세의 소년 장사 황희안까지 왜적을 물리치는 데 있어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4. 안시명은 구강회맹(鷗江會盟)에 참여

 

구강회맹은 임진왜란 당시인 1593년 영남 일대 의병장들이 울산 구강에 모여 논의한 전략 회의인데, 구강(鷗江)은 울산 동천(東川)이며, 구체적으로는 동천 하구에 있는 반구동을 의미한다.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 10월 26일 울산, 언양, 경주, 장기, 연일, 영천, 양산, 그리고 거주지를 알 수 없는 의병장들이 구강에 모였다. 울산의 김태허(金太虛), 윤홍명(尹弘鳴), 서인충(徐仁忠) 등 22명, 언양에 신전(辛荃) 등 3명, 경주에 권사악(權士諤), 김광복(金光福), 견천지(堅川至) 등 29명, 장기에 이대임(李大任) 등 2명, 연일에 김현룡(金見龍) 등 4명, 영천에 강일찬(姜日纘) 등 3명, 양산 안시명 1명, 거주 불명 오열(吳悅) 등 3명으로 모두 67명이다.

구강회맹에 참여한 의병들의 연령대를 보면 경주의 김응생이 16살로 가장 어렸으며, 김한걸 17살, 황희안 의병장은 18살로 십대가 3명이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의병장은 울산의 이응춘 의병장으로 52살. 3,900여 명의 의병이 결의를 다졌다.

 

윤홍명(尹弘鳴)의 『화암실기(花巖實紀)』 중 「구강동고록(鷗江同苦錄)」이라는 항목에 그 명단이 실려 있다. 명단은 먼저 이름을 쓰고, 세주(細註)로 자(字), 호(號), 본관(本貫), 시임 관직(時任官職), 시호(諡號), 녹훈(錄勳) 여부를 기록하였다. 『화암실기』는 선무원종공신을 책훈한 1605년(선조 38) 4월 이후에 작성한 것이다.

 

회맹 당시에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왜군이 서생포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간혹 울산, 경주에 출몰하는 등 전쟁이 소강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이 모임은 ‘회맹’보다는 왜군의 동정을 살피면서 이에 대처할 전략을 논의한 자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경주의 의병장 김득복은 종군록(從軍錄)에서 “구강에서 여러 의병장을 만나 동고록(同苦錄)을 닦았다. 적의 형세가 움츠러들었으나, 겁탈하고 노략질하는 도적이 아직도 제멋대로 날뛰고 있다. 참으로 슬프고 놀라운 일이다. 마땅히 각자 마음 속 깊이 맹세하자고 했다.”고 기록했다.

 

5. 안근은 아들과 함께 팔공산회맹 참여

 

윤홍명(尹弘鳴, 1565~?)은 임진왜란 당시 28세로 종횡무진의 큰 활약을 펼쳤다. 파평 윤씨로 자는 응시(應時), 호는 화암(花巖), 현감 윤응경(尹殷卿)의 증손이다. 울산의 의병은 3천여 명이었는데, 구강에서 모여 회맹하여 결사보국할 것을 다짐하였다. 윤홍명도 참여하였다.

 

윤홍명은 1592년 4월 23일 1차 개운포 전투에서 적을 무찌르는 데 앞장섰으며, 7월 18일 경주 의병을 도와 형산강을 거슬러 오르는 왜적을 쳤다. 1593년 2월 17일 남쪽에서 모화로 들어오는 왜적을 무찌르고, 곧 문경으로 달려가 전국의 의병들이 결전한 문경 당교(唐橋) 전투에 이경연과 함께 울산 의병을 대표해 참전했다.

 

1593년 10월 29일 울산 의병들이 모여 왜적을 쳐부술 것을 결사 다짐한 구강회맹을 앞장서 주도했다. 1595년 2월 12일 불국사로 쳐들어오는 왜적을 막았다. 2월 18일 무룡산의 고개 달현 전투에서 경주 의병과 합동작전에 참전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정유재란 때는 창녕의 화왕산성으로 달려가 곽재우 장군의 진중에서 함께 싸웠다. 임진왜란 후 윤홍명은 네 고을에서 벼슬을 했으며, 사후 형조정랑(刑曹正郎, 정5품)에 증직되었다.

 

윤홍명이 병신(丙申) 3월에 지은 화암실기(花巖實記)에 양산의 의병장인 안근과 아들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화암실기는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졌으나 분실되어 존재 유무를 아는 이도 몇 안 된다.

 

문중의 일원 중 한 사람이 송호일기, 인심재일기, 제월당실기 등에서 윤홍명 관련 글만 추출하여 편집・해석하여 화암실기라고 이름붙인 책이 전해지고 있다. 화암실기는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울산문화사 뿐만 아니라 조선 의병사 연구의 중요 자료가 되고 있으며, 일본에서도 중요기록으로 인용하고 있다.

 

대구 팔공산 동화사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 유정이 이끄는 승병의 지휘소가 됐다. 사명대사가 팔공산 일대에서 활약한 때는 1595년 무렵이다. 동화사 성보박물관에는 사명대사의 인장인 ‘영남도총섭인(嶺南都總攝印)’과 승군을 지휘할 때 불었던 소라나팔, 나무로 만든 밥통인 비사리구시가 보관돼 있다. 동화사 봉서루 뒷면 벽에는 ‘영남치영아문(嶺南緇營牙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영남치영아문은 영남지역 승병 본부 출입문이라는 뜻이다.

 

1596년 도체찰사 류성룡의 지시로 영남지역에 거주하는 의병장이 공산성에서 회맹을 했다. 팔공산 회맹은 6개월 뒤 다시 열렸는데, 전국 16개 지역에서 105명의 의병장이 참여하였다. 윤홍명이 쓴 화암실기에 나오는 양산 출신 의병장은 이수필(李秀弼), 이몽란(李夢鸞), 안근(安瑾), 안시명(安諟命), 안이명(安以命), 정호인(鄭好仁), 최기(崔沂), 정호의(鄭好義) 등이다.

 

의병장 곽재우 장군이 지킨 화왕산성의 ‘화왕성동고록(火旺城同苦錄)’에 안근 부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안근, 안시명(字 士明, 생년 乙丑), 안이명(字 士順, 丁卯), 이몽란, 이수필, 정호의[양산 개정(介井)].

양산 광주 이씨 문중의 안근, 그의 아들인 안시명, 안이명, 사촌 안수, 조카 안제, 종질 안신명 등 집안 전체가 의병활동을 하였다. 전재산을 털어 무기를 준비하고 용감하게 구국의 길에 떨쳐나섰다. 왜적이 쳐들어오자 전국 곳곳의 관군은 지리멸렬하여 도망치기에 바빴지만 지역의 유현들과 일반 백성들이 과감하게 재산과 목숨을 바쳐 싸웠기에 왜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양산시민들은 양산의 명문 가문인 광주 안씨 일가의 공적을 알 수 있는 상북면 소토리 율리마을의 소계사를 참배하고 후세 교육의 귀감을 삼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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