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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화요칼럼] 임진왜란때 작원관전투를 지휘한 밀양부사 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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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심상도박사화요칼럼] 임진왜란때 작원관전투를 지휘한 밀양부사 박진 

작원관은 영남지방의 동과 서, 남과 북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에 세운 숙박과 검문을 위한 시설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공무를 위해 여행을 하던 관원들의 숙소를 원(院)이라 하

 

1. 작원관 복원사업에 토지를 기증한 검세리 주민들의 애국심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작원관은 영남지방의 동과 서, 남과 북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에 세운 숙박과 검문을 위한 시설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공무를 위해 여행을 하던 관원들의 숙소를 원(院)이라 하고, 출입하는 사람과 화물을 검문하는 곳을 관(關)이라 하였다.

 

 

작원관은 관원의 숙소와 일반인의 검문을 위해 지은 시설로 남해에서 올라오는 왜적의 방어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낙동강가의 작원진(鵲院津)이라는 나루터를 오르내리는 사람과 화물도 검색하였고, 임진왜란 때 밀양부사 박진이 왜적을 맞아 결사적으로 싸웠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원래는 터를 표시하는 비석만 남아 있었으나 1995년에 작원관의 성문을 복원하여 세웠다.

 

 

1990년 11월 12일 작원관을 복원할 때 토지를 기증한 주민들의 이름이 적힌 송덕비가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당시 호국영령들의 거룩한 희생을 기리기 위한 작원관지 성역화 사업에 토지 7,934㎡를 기증하여 초석을 다지게 하였으니 베푸신 은혜가 하해와 같아 그 고마운 뜻을 후세에 길이 빛내고자 이 비를 세웁니다.”

 

 

기증자는 작원(깐촌)마을 주민 강갑득, 강말순, 강명득, 강삼득, 강인득, 김기동, 김도섭, 문석보, 문종수, 박명화, 박춘자, 서영순, 양이근, 오우기, 오정희, 오태환, 이경우, 이삼현, 이용덕, 이용재, 이종호, 윤중근, 윤중환, 장길형, 주경자 25명이었다.

 

 

삼랑진읍민 일동이 세운 작원관 복원 기념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곳 작원관은 원, 관, 진의 역할을 겸하던 곳으로 교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으며, 임진왜란 때는 군관민(軍官民) 300여 명이 왜적 1만 8천 7백 명을 상대로 결사항전(1592년 4월 17일)을 벌였던 전적지로서 구국충혼(救國忠魂)들이 잠들어 있는 성지이며, 수백 년 동안 피땀을 흘린 지역민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유서 깊은 곳이었다.

 

 

그러나 경부선 철도가 개설되면서 원래의 자리에서 밀려나 낙동강변에 그 터를 잡았으나 1936년 대홍수에 휩쓸려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이를 복원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이는 경운(耕雲) 송만술(宋萬述) 선생이었다. 선생께서는 작원관의 역사적 의미와 그 중요성을 깨닫고, 작원관을 복원하는 일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왔으나 그 복원을 보지 못하고 타계하셨다.

 

 

뒷날 선생의 작원관에 대한 깊은 사랑과 지역민의 노력으로 지금과 같이 우뚝 서게 되었으니, 이를 기념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조국과 민족사랑을 몸소 실천하신 선조들의 거룩한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한 작은 의지로 이 비를 세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적극적으로 항쟁한 밀양의 조선군과 의병들의 후예답게 정부의 복원사업에 토지를 기증한 주민들의 애국심은 상찬받아 마땅하다. 요즘은 정부사업의 감정가 토지매입에 반대하고 시가 매입을 주장하는 주민들이 많은데, 무상 기부한 밀양시 삼랑진읍 검세리 주민들의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은 높이 사야 마땅하다.

 

 

2. 작원관 비각

 

작원관 비각 안에 보관된 보관되어 있는 작원관원문기지비(鵲院關院門基址碑), 작원대교비(鵲院大橋碑), 작원진석교비(鵲院津石橋碑)이다. 작원관을 당초 위치에서 떨어진 현 위치에 복원하면서 작원관 옛터에 있던 비석도 이곳으로 옮기고 비각을 지어 보존하고 있다. 비각의 중앙에 있는 비석이 ‘작원관원문기지비’이고, 그 좌우에 있는 비석이 ‘작원진석교비’, ‘작원대교비’이다.

 

 

작원관원문기지비는 1939년 작원관 옛터에 세웠던 것으로 작원관의 본래 위치와 그후 이전관계를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이 비의 높이는 145cm이며, 사각형 받침돌 위에 비석 위를 육각형으로 다듬어 비석의 몸돌을 세운 것이다. 비석 정면에 한자로 ‘작원관원문기지비(鵲院關院門基址碑)’라고 새겨놓았으며, 측면에는 소화 14년 10월 일이 음각되어 있다. 소화 14년은 1939년으로 이해 10월에 만들어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작원대교비’는 본래 삼랑진읍 검세리 13번지 작원 선창가, 작원진석교비는 검세리 2번지의 작은 비석거리에 각각 있었다. 1971년에 ‘작원관원문기지비’(검세리 3번지) 옆에 옮겨 세웠다가 다시 현 위치로 가져와 보존하고 있다.

 

 

높이가 140cm인 ‘작원대교비’는 숭정기원15년(崇禎紀元十五年)이라고 새겨진 명문으로 보아 1642년에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작원대교는 영남대로가 지나던 율동리와 청룡리 사이 우곡천에 돌다리로 추정되며, 이 비는 작원대교를 건설하고 그에 관한 사실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3. 처자교 전설

 

작원진석교비는 영남대로가 통과하던 삼랑진읍 안태리에 있던 석조 홍예교를 지은 기념으로 기념하여 1690년(康熙二十九年)에 대리석으로 만든 것이다. 이 비의 높이는 124cm이며 비문의 내용은 안태리 주민 200호가 1690년 2월부터 8월까지 7개월간 노력해서 홍예교를 놓았다는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이 홍예교는 2011년에 발굴되었으며, 구조와 형식미를 인정받아 경남기념물 제281호로 지정되었으나 보존상의 어려움으로 다시 흙을 덮어 보호하고 있다.

 

이 다리는 일명 처자교로 알려져 있으며 재미있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매장문화재 발굴역사문헌 내용 중 1530년 중종 때의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작원관 앞 사포교, 『밀주징신록』에서 ‘승교, 처자교’, 『밀양지』에서 ‘숙종 때에 세운 아치형으로 처녀교, 승교’의 기록이 있다.

 

밀양지명고에서 작원관 근처의 작은 절에 한 스님이 살았는데, 근처 마을에 사는 미모의 한 처자를 연모했다. 그러던 어느 해에 두 남녀는 서로 사랑을 걸고 다리놓기 시합을 했다. 통행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사랑놀음이었던 것이다. 스님은 행곡천 다리를 맡았고, 처자는 우곡천 다리를 맡아 작업을 시작했다.

 

처자의 연약한 노동력을 깔본 스님이 교만한 마음에 빠져 게으름을 피고 있는 사이 처자가 다리를 완성했다. 이를 부끄러워한 스님이 낙동강에 빠져 죽자(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설도 있다.), 처자도 따라서 죽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스님이 만든 다리는 승교(僧橋), 처자가 만든 다리는 처자교(處子橋)로 불려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4대강살리기 사업 현장에서 발굴된 처자교는 조선시대 영남대로상에 남아있는 보기드문 쌍홍예교로 세워진 교량으로 그 규모는 폭 4.25m, 길이 25.3m, 높이 3.2m의 교량이다. 당시의 건축 및 토목 기술을 알 수 있는 역사적으로 귀중한 자료이다. 처자교는 2011년 6월 발굴 후 낙동강 물에 의한 훼손 및 유실 방지를 위하여 현재 자리(우곡천 하류)에 매립하여 보존하고 있다.

 

사대강 정비사업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던 환경단체, 시민단체들은 4대강 사업이 완성된 후에도 끈질기게 비판하며 4대강 보를 부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4대강 보 주변의 주민들은 홍수를 막아주고 농업용수를 제공하는 보 철거를 결사반대하고 있다. 낙동강 정비사업에서 양산의 가야진사도 발굴하여 현 위치에 보존했고, 작원관잔도 역시 보호하였다. 밀양의 처자교는 발굴 후 매립하였다. 밀양시에서는 처자교를 발굴하고 안전하게 작원관 옆의 오토 캠핑장 근처로 이전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면 좋을 것이다.

 

4. 작원관 전투에서 패배한 밀양부사 박진

 

임진왜란 때 왜적들이 타고 온 배가 대마도에서 부산포 앞에 이르는 바다를 가득 메워 그 끝이 보이질 않았다. 절영도로 사냥을 나갔던 부산진 첨절제사 정발은 왜적의 침략을 보고 받자 경상좌수사 박홍에게 수군으로 기습하자고 했으나 박홍이 반대하였다. 정발 첨사는 성으로 들어와 군민과 함께 분전하였으나 전사하였다. 경상좌수사 박홍은 적의 세력에 질려 동래성에 들어갔다가 송상현 부사를 돕지 않고 도망쳤다. 다대포 첨사 윤홍신 또한 목숨을 걸고 싸웠으나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경상좌병사 이각은 울산에서 동래성을 지원하기 위하여 동래성으로 왔다. 동래부사 송상현이 이각에게 자신과 함께 성을 지키자고 제안했으나 이각은 압도적인 왜군에 놀라 핑계를 대고 도주했다. 송상현은 자리에 앉은 채 한 치도 움직이지 않고 왜적의 칼에 찔려 죽었다. 양산군수 조영규도 송상현 부사와 함께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동래성에 머물던 밀양부사 박진(1560년~1597년)은 이각과 소산역에 방어진을 쳤으나 이각이 먼저 도망가자 할 수 없이 후퇴했다. 박진은 작원관을 방어하려 했다. 조영규 군수가 없는 양산에 무혈 입성하고 작원관으로 왜적이 몰려오자 3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분전하였다. 작원관은 양산의 험준한 천태산의 바위로 형성된 암산에서 고야산을 거쳐 불끈 치솟다 낙동강에 내리꽂힌 바위산 한 굽이의 돌을 깨고 관도를 열고 고려시대부터 요새를 설치하였다.

 

산이 높고 험하여 날짐승만 넘나들 수 있다 하여 까치 작(鵲)자를 따오고, 여행하던 관원이 쉬어가던 역원이 있어 원(院)자를 취하였으며, 나루터(津)와 관문의 기능을 갖추었던 곳이라 이 권역을 작원관(鵲院關)이라 이름하고, 문을 한남문(捍南門), 누(樓)를 공운루(拱雲樓)라 편액(扁額)하였다.

 

작원관은 한 사람의 군사가 지키면 만 명의 군사를 막을 수 있다는 요새였다. 1592년 임진년 4월 17일 아침에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의 왜병 제1군 1만 8천 7백 명의 병력이 동래를 출발하여 양산을 거쳐 침입해왔다. 부장 마쓰우라(松浦鎭信)의 지휘로 오후 들어 작원관 산의 위쪽 방향에서부터 내려다보고 조총으로 사격을 가하며 달려들었다.

 

일본군은 작원관에 관한 정보를 미리 입수하고 험난한 잔도를 통해 대부대가 진격하기는 어려운 것을 알고 양동작전을 취하여 양산에서 우회하여 천태산을 통해 작원관을 공략하였다. 양산의 황산잔도 역시 아무 방어 병력이 배치되지 않아 무사통과하였다. 영남대로의 험난한 3대 잔도는 황산잔도, 작원잔도, 문경의 토끼비리였다.

 

신립장군은 문경새재에서 왜적을 막지 않고 충주의 탄금대 앞 남한강에서 배수의 진을 쳤다. 왜군 척후병은 험난한 문경새재를 미리 염탐하였으나 방어 병력이 없는 것을 알고 노래부르고, 춤을 추며 넘었다고 한다. 신립장군과 병사들은 말과 병사가 원활하게 움직이기 힘든 늪지에서 싸우다 전멸당했다. 명나라 이여송 장군은 후일 문경새재를 지나다 신립 장군은 병법을 모른다고 지적하였다.

 

작원관을 방어하던 밀양부사 박진을 비롯한 군관 이대수(李大樹), 김효우(金孝友) 등이 관병, 민병 등과 함께 분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여 군관 이대수, 김효우를 비롯한 병사 300여 명이 전사하였다.

 

포위되었던 밀양 부사 박진은 간신히 밀양성으로 도망쳐 병기와 창고를 불사른 다음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김해 부사 서예원도 도망쳤다. 순찰사 김수는 진주성에서 침략 소식을 접한 후 서부지역으로 도망쳤다. 결국 온 고을은 텅텅 비게 되었고 적의 진격에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밀양부사 박진은 항왜의 대표격인 사야가(김충선 장군)가 조선에 투항할 때, 그 투항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좌선봉장으로 군사 3,000명을 인솔하고 한반도로 쳐들어왔다가 경상도 병마절도사(慶尙道兵馬節度使) 박진에게 항복하여 여러 번 전공을 세웠다. 사야가는 박진에게 강화서에서 “이 나라의 예의문물과 의관 풍속을 아름답게 여겨 예의의 나라에서 성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라고 썼다.

 

5.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박진 장군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박진(朴晋) 장군이 경주를 수복하였다. 박진이 1차 공격에서 패하였다가 다시 군사를 모집하여 안강현(安康縣)에 주둔하다가 밤에 몰래 군사를 다시 진격시켜 성 밖에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성안으로 발사하여 진안에 떨어뜨렸다. 적이 그 무기를 몰랐으므로 다투어 구경하면서 서로 밀고 당기며 만져보는 중에 조금 있다가 포(砲)가 그 속에서 터지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쇳조각이 별처럼 부서져 나갔다.

이에 맞아 넘어져 즉사한 자가 20여 명이었는데, 온 진중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신비스럽게 여기다가 이튿날 드디어 성을 버리고 서생포(西生浦)로 도망하였다.

 

박진이 드디어 경주에 들어가 남은 곡식 만여 석을 얻었다. 일이 알려지자, 가선대부로 승진시켰다. 비격진천뢰는 옛날에는 없었는데, 화포장(火砲匠) 이장손(李長孫)이 처음으로 만들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선조는 양피(羊皮)로 만든 옷 한 벌을 경상 병사 박진(朴晉)에게 특별히 하사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좌의정 윤두수, 이조판서 이산보, 호조 판서 이성중, 대사헌 이덕형(李德馨), 예조 판서 윤근수 등 신료들이 함께 아뢰기를, “박진(朴晉)이 영좌(嶺左)를 수복한 공로는 이순신의 공과 다름이 없는 것으로 영좌에 자못 생기가 돌고 있습니다. 박진은 색깔이 있는 말을 탔었는데 처음에는 적이 알아볼까 염려하여 진흙으로 발라 말의 색깔을 없앴다가 지금은 명성이 이미 적들에게까지 났기 때문에 일부러 말의 색깔을 내보여 적이 보기만 하여도 놀라게 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선조는 “박진(朴晉)은 국사(國事)에 자신을 잊고 부지런히 애썼으니 특별히 한 자급을 가자(加資)해 주라”고 하였다.

 

선조는 “관유격(毌遊擊)이란 자가 심유경(沈惟敬)의 말을 듣고 왜적을 비호하여 박진(朴晉) 등 네 장군을 묶어다가 곤장까지 치고 온갖 치욕을 보였다고 하니 통분함을 견딜 수 없다.”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사간(司諫) 윤경립이 또 아뢰기를, “박진(朴晉)의 사망은 중국 장수에게 구타를 당해서입니다. 죽은 뒤에 보니, 가슴뼈가 부러져 있었다 합니다. 국가의 일로 죽은 것이니, 다른 사람에 비하여 더욱 참혹합니다. 지난번에 홍계남(洪季男)의 노모(老母)에게 음식물을 하사하도록 명하자, 중외(中外)가 모두 감격했었습니다. 박진이 홍계남과 어찌 다르겠습니까. 그에게도 노모가 있으니 구휼하는 은전(恩典)이 내려져야 할 것입니다”

특진관(特進官) 신점이 아뢰기를, “박진을 구타한 중국 장수는 누승선(婁承先)입니다.” 하자, 집의(執義) 한준겸이 아뢰기를, “박진의 뼈가 부러진 곳을 신도 보았습니다. 그는 병으로 사직하고자 하였으나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는 것을 피하려 한다는 혐의가 있으므로 감히 신병을 말하지 못하다가 죽음에 이른 것입니다.”

박진 장군은 경상도의 육군을 지휘하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와 전라도 및 황해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으며, 군사를 총괄​하는 병조의 참판(국방부 차관)에 올랐다.

 

정유재란 와중인 1597년 명나라 장군 누승선의 구타로 인해 병을 얻어 억울하게 38세의 한창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전쟁터를 누비다 왜적의 총칼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니라 오만한 명나라 지원군의 장군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다. 나라가 약하면 백성 모두가 피해자가 된다.

 

사후에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영조시대에 의열​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박진 장군 묘소는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두일리 산149-2번지에 있다. 민간인 통제선 내 밀양박씨 묘역에 위치한다. 1987년 2월 12일에 경기도 기념물 제110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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