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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의 경계를 표시한 통도사 국장생 석표/심상도.박사 화요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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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의 경계를 표시한 통도사 국장생 석표/심상도.박사 화요 칼럼

고려 전기의 기본적 토지제도는 전시과였다. 전시과는 976년(경종 1)에 처음 제정되어, 998년(목종 1), 1014년(현종 5), 1034년(덕종 3)에 각각 수정, 보완된 뒤에 1076년(문종 30)에 이르러 최종적으로 정


 

1. 고려시대의 토지제도

 

고려 전기의 기본적 토지제도는 전시과였다. 전시과는 976년(경종 1)에 처음 제정되어, 998년(목종 1), 1014년(현종 5), 1034년(덕종 3)에 각각 수정, 보완된 뒤에 1076년(문종 30)에 이르러 최종적으로 정비되었다. 

 

 

전시과는 좁은 의미로는 문무관료 및 직역(職役) 부담자에 대한 수조지의 분급을 규정한 토지법을 의미하는 것이며, 넓은 의미로는 이 토지법을 기초로 하여 구성된 광범위한 토지지배의 체계를 의미한다.

 


전시과의 토지, 즉 과전의 분급을 받는 관료 및 직역부담자는 18과등(科等)으로 분류되었다. 1과로부터 18과에 이르는 각 과등 안에는 수급자(受給者)의 직함 및 그들에 대한 전지와 시지(柴地)의 지급액 결수가 명시되어 있다.

 


국가에 대한 직접적인 직역과 관계없이, 무산계(武散階)가 수여된 계층이나 승려, 지리사(地理師) 등 특정한 관념세계의 직무자에 대하여 지급하는 무산계전시과, 별사전시과(別賜田柴科) 등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별사전시는 승과(僧科)나 지리업(地理業) 출신자를 대상으로 한 규정이었다. 고려는 불교와 풍수지리사상이 유행했으므로, 대덕(大德) 등의 법계(法階)를 가진 승려나 대통(大通), 부통(副通), 지리사(地理師), 지리박사(地理博士), 지리생(地理生) 등의 지사(地師)에 대해 그들의 사회적 역할을 인정, 우대한 것이다. 

 

 

모두 6등급으로 구분되어 최고 전 40결, 시 10결로부터 최하 전 17결의 전시가 분급되었다.


5품 이상의 고급관료에 지급하는 공음전시과(功蔭田柴科), 그리고 6품 이하의 의지할 곳이 없는 관료미망인, 전망군인(戰亡軍人)의 처, 퇴역한 연로군인(年老軍人) 등에 대하여 지급하는 구분전(口分田)의 제도도 시행되었다.
고려시대는 토지를 크게 공전(公田)과 사전(私田)으로 구분하였다. 

 

사전은 고려시대 토지 지배관계에 따른 구분으로 조(租)가 국가에서 지정한 사인(私人)에게 귀속되는 토지, 또는 소유권이 사인에게 있는 토지를 말한다. 


『고려사』 식화지 상평의창조(常平義倉條) 현종 14년(1032) 윤9월 판(判)에 의하면, 공전은 1과, 2과, 3과로 구분되며, 사전은 궁원전(宮院田)・사원전(寺院田)・양반전(兩班田)과 군인호정(軍人戶丁=軍人田)・기인호정(其人戶丁=其人田)으로 구분되어 있다. 

 

기인은 고려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 지방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토호세력의 자제를 인질로 서울에 머물러 있게 한 제도이다.


1결(結)의 넓이가 농가 일가구에 나누어 주기 위한 면적이었으므로 ‘목’이라고도 하였다. 삼국시대에서 고려 문종 때까지 1결의 넓이는, 장년 농부의 10지(指)를 기준한 지척(指尺)으로, 사방 640척이 차지한 정방형으로 15,447.5㎡가 된다. 

 

고려 문종 때부터는 전토(田土)를 3등급으로 나누어 옛 1결은 하등전(下等田) 1결이 되고, 중등전(中等田) 1결은 하등전의 9분의 6.25배, 상등전 1결은 9분의 4배에 해당하게 되었다.

 

2. 고려시대의 사원전(寺院田)

 

사원전은 사위전(寺位田), 사전(寺田) 또는 사사전(寺社田)이라고도 한다. 불교의 세속적, 물질적 위력의 기반이 되는 것이 바로 사원경제였는데, 사원경제에서 그 비중이 가장 큰 것이 사찰이 소유하는 사원전이었다. 

 

신라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받은 후 사원은 국가에 의한 토지사급(土地賜給)과 귀족이나 부호들의 시납(施納)으로 넓은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면세의 특전이 부여된 이와 같은 사원전의 지나친 확대는 국가의 재정수입을 감축시켜 664년(신라 문무왕 4년) 사원에 대한 토지의 기증을 금지하는 법령을 제정하였으나 실효성이 없어 사찰 토지는 더욱 증가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융성해짐에 따라 사원전의 규모는 차츰 증가하였다. 고려시대의 사원전은 그 성격에 따라 국왕, 귀족, 백성들이 기진한 시납전(施納田)과 국가가 공적으로 사원에 절급한 수조지(收租地), 그리고 사원이 본래부터 소유하던 사유지 등 세 유형으로 대별할 수 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독실한 불자들이 절에 시주하는 시납전의 비중이 가장 컸다.


『고려사』 권80 식화지3 상평의창조에 나오는 현종(顯宗)의 판문에 의하면 사원전은 2과 공전(公田)에 대비되는 사전(私田)으로 분류되어 있다. 사원전의 경우 그에 예속된 노동력에 의해 직영되거나 혹은 소작제에 의해 경영되었다. 직영일 경우 사원소속의 노비나 하급승려가 경작에 동원되었고, 소작제의 경우 일반농민에 의해 경작되었다.


사원의 예속 농민으로 알려진 수원승도(隨院僧徒)에 의한 경작도 상당량에 달했다. 이런 토지의 경우 전호는 사원에 50%의 지대를 지불했다. 반면 승려에게 면역의 특권이 주어진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사원의 사유지는 면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원에는 수조지(收租地)도 있었다. 국왕이 토지를 사원에 시납할 경우, 국왕의 사유지를 기진(寄進)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일반 백성 소유인 민전을 기진한 경우도 있어서 이 경우에는 소유권을 준 것이 아니라 수조권을 준 것으로 보인다.


고려 말기에 이르면 권력의 비호 아래 사원들은 광범위한 토지의 소유, 탈점, 겸병으로 부패에 물들어 각종 부작용이 나타나게 되었다. 토지제도의 문란으로 인한 조세의 감소로 개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결국 고려가 망하고 유교를 국교로 한 조선의 건국 이후에는 불교의 특권은 폐지되고 사원전도 대폭 축소되었다.

 

3. 국장생 석표를 통해 본 통도사 사원전(寺院田)

 

통도사 국장생 석표는 절의 경계를 표시하던 고려시대의 장승이다. 양산시 하북면 백록리 718-1에 있으며,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74호로 지정되었다. 

 

35번 국도변에 국장생 석표가 있는데, 오른쪽에는 동해석재, 도로 건너편에는 광우전자, 북쪽 바로 위에는 SK주유소가 있고, 성천이 흘러 양산천으로 합류한다. 주차장은 도로변에 있는데, 2대 가량 주차 가능하며, SK주유소 진입로 직전에 있다. 


국장생(國長生)이란 말은 나라의 명에 의하여 세운 장생이란 뜻이다. 통도사의 기록에 따르면 사방 산천의 기를 보충하기 위해 12곳에 이러한 장승(장생표)을 세웠다고 전한다. 절의 경계 표시인 동시에 땅의 기운을 보충하여 절에 들어오는 액운을 막으려 했던 고려시대 풍수사상의 단편을 보이고 있다.


통도사의 통도사 국장생석표 외에도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도갑사 입구에 국장생, 황장생이라고 쓰여 있는 석표 1구가 더 남아있으며, 모두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통도사 국장생 석표와 상천리 국장생 석표가 남한 땅에서 가장 오래된 석표로 알려져 있다.


거의 자연 석주에 가까운 형태로 한쪽 평편한 면을 사용하여 글을 새겼다. 화강암의 돌기둥에 6cm~9cm 크기의 글자를 네 줄로 새겼는데, 해서(楷書)로 음각되었다. 문장에는 이두문의 표기가 섞여 있다. 

 

현재의 높이는 167cm, 넓이는 60cm 정도이다. 이두는 신라 때부터 한자의 음과 새김을 빌려 우리말을 적던 방식이다. 


설총은 이두(吏讀)를 집대성하였다. 원효대사의 아들인 설총은 성인으로 추앙받는 유교의 거목이었다. ‘화왕계(花王戒)’라는 명문을 써서 우리 문학사의 특이한 경지를 개척했다. 국장생 석표는 나라의 통첩을 받아 세웠다는 내용이 적혀 있어 국가와 사찰과의 관계를 알려주는 중요한 금석문이다. 


지금의 장생표는 고려시대(1085년)에 세워진 것이지만 다시 세운다는 문장으로 보아 원래는 보다 앞선 시대에 세워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제4대 임금인 광종(光宗, 925~975, 재위 949~975)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많은 공신을 숙청하였는데, 통도사를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 국장생 석표가 앞선 시대에 세워졌다면 광종 때가 유력하다. 석표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通度寺孫仍川國長生一坐段寺
所報尙書戶部乙丑五月日牒前
判兒如改立令是於爲了等以立
大安元年乙丑十二月日記
  
 “통도사의 孫仍川(손내천, 솔래천, 聲川里) 국장생 한 자리는 절에서 보고한 바에 (의해서) 尙書戶部(상서호부)가 을축년 5월 일에 통첩하기를 前(전)의 보고서에 대한 判(판)과 같이 고치어 세우게 하라고 하기 때문에 (이에 의해서) 세운다. 大安(대안) 원년(宣宗, 선종 2년, 1085년) 을축 12월 일에 기록한다.”


솔래천의 것과 같은 해에 세워지고 거의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석비형 장생이 표충사가 있는 밀양군 하서면 무안리, 울주군 삼남면 상천리에서 발견되었는데, 표충사 장생 석표는 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상천리 국장생 석표는 현전하고 있다.


『통도사사적약록(通度寺事蹟略錄)』을 보면 통도사는 14세기 초엽 12개의 장생표에 둘러싸인 주위 4만 7천보(步) 가량의 넓은 사령(寺領)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장생표를 관리, 보호하기 위하여 직간(直干)이라는 특정한 역역(力役)을 부담한 민(民)을 두었다.

장생표 내의 사원 토지의 성격에 대해서는 이를 모두 사원의 사적(私的) 소유지로 보는 견해와 그 안에 사원 수조지(收租地)로서 민유지(民有地)가 포함되었을 가능성을 상정하는 견해로 나누어져 있다.


장생표는 토지구획을 나타내긴 하지만 사방경계를 표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각 장생표를 연결하는 지역 모두가 사찰 관할의 사령(寺領)은 아니었다. 당시 사원에 소속된 경지나 산림 등이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각 소유지의 중앙 혹은 눈에 잘 띄는 곳에 장생표를 세우고, 이를 중심으로 한 사방 지역이 사원에 소속되었음을 나타낸 것이었다.


12개의 장생표는 통도사 문전의 동구에 검은 나무로 된 장생표 2개를 설치하였고, 동쪽의 흑석봉에는 돌로 쌓은 장생표 2개를 설치하였다. 현재 울주군 삼남면 조일리 부근으로 보인다. 조일대사가 올랐다던 동쪽 봉우리가 바로 흑석봉으로 유추되며 지명에 조일리가 있어 추정이 가능하다.


가운데 흐르고 있는 성잉천(省仍川)과 궤천에는 각각 석비 장생표 둘씩을 설치하였다.   성잉천(省仍川)은 현재 지명 성천[(聲川 : 답곡리(畓谷里))이다. 성잉천에는 이 근처에 또 하나의 장생표가 있었는데, 확인이 불가능하다. 궤천(机川)에 세워진 장생표 2개는 현재 울주군 삼남면의 상천리(象川里)와 가천리(加川里)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에 북쪽 동을산(언양)에 돌로 쌓은 장생표 하나를 설치하였으나 1085년 당시에는 없어졌다. 남쪽의 사천포천봉(천성산)에는 돌로 쌓은 장생표 2개를 설치하였다. 서쪽의 대령현(이천령, 배내고개)에는 석비 장생표 하나를 설치하였고, 남쪽의 대천(양산천)에는 석비 장생표 하나를 설치하였다. 이상 합하여 총 12개가 있었다.


장생표를 사방에 설치하고 그곳에 각각 간(干) 10명씩을 배치하였다. 간들에게 각각 위전(位田), 위답(位畓), 가(家), 대전(代田) 등을 지급하였다. 이 급여지는 모두 사방 장생표 내에 포괄된 전, 답, 토지들이다. 석비, 석적의 장생표 내에는 종래부터 현재까지 국가의 소유지 또는 제삼자의 사적 소유지는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 토지는 모두 의춘군(宜椿郡, 양산)의 경계에 속한다.


통도사 국장생 석표의 주차장이 부족하여 잘못 주차하면 SK주유소 입구를 막을 우려가 있어 주차장 확장이 시급하다. 석비의 글자 가운데 이두문(吏讀文)이 섞여 있어 금석문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므로 보존 대책이 강구되어야 하겠다. 


천년 가까운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비석의 글자가 많이 마모되었으므로 이 비석을 양산시립박물관으로 이전하여 실내에 안전하게 보존하고, 현장에는 모조품을 세워 전시할 필요가 있다.

 

6.25 한국전쟁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총알 자국이 3개 있는데, 추가적인 훼손을 방지해야 하겠다. 차량 통행이 빈번한 35번 국도변에 있어 진동, 매연에 의한 피해도 우려되므로 대책이 필요하다.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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