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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박사 화요 칼럼 / 임란공신 정호인과 정호의 형제의 우국충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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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telling

심상도 박사 화요 칼럼 / 임란공신 정호인과 정호의 형제의 우국충정

소노서원은 조선시대 소산(蘇山) 정호인(鄭好仁)과 노산(魯山) 정호의(鄭好義) 형제의 우국충정을 길이 새기고자 향중 유림의 공의로 서원을 창건하였다. 소노서원(小魯書院)의 이름은 공자가 태언난 노나라를 지향하는 작은 노나라라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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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노서원(小魯書院)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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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소노서원은 조선시대 소산(蘇山) 정호인(鄭好仁)과 노산(魯山) 정호의(鄭好義) 형제의 우국충정을 길이 새기고자 향중 유림의 공의로 서원을 창건하였다. 소노서원(小魯書院)의 이름은 공자가 태언난 노나라를 지향하는 작은 노나라라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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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충절의 정신은 형제가 모두 투철하였다.

 

소노서원은 임란공신인 정호인(鄭好仁)과 정호의(鄭好義)를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으로 1835년(헌종 2년)에 건립되었다. 양산시 상북면 소노2길 13-27(지번 주소 상북면 소토리 331-2)의 소노마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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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29년 동래 정씨 문중에 의해 복원되면서 소노서원(小魯書院)으로 개칭하였다. 그 후 상의사(尙義祠)와 강당이 풍우에 퇴색되어 1985년 유림에서 사우(祠宇)를 중건하고 강당을 확장, 중건하여 정규 서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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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인은 본관이 동래(東萊)이다. 조선 전기 예조참의를 지낸 정절(鄭節)의 8세손이며 의릉참봉(義陵參奉) 정희란(鄭希鸞)의 큰아들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산향교 교임(校任)이었던 정호인은 향교의 오성 위패를 신주동 고깔바위 밑에 정결하게 모셔놓고 예를 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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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포로로 잡혀가서 9년간이나 절의를 지키다가 1600년 포로송환 때 귀국하였다.

 

임진왜란 선무 3등공신의 녹권을 받았고 1603년(선조 33)에 후릉 참봉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고향에서 1624년 생을 마쳤다. 1832년 호조좌랑에 추증되었고 소노서원, 부산충렬사, 경주임난공신추모비단. 대구임난호국영남충의단에 배향된 충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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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의는 자가 시원(時仲)이며 정호인의 동생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정호인, 안근(安瑾), 이몽란(李夢鸞), 최기(崔沂)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1592년(선조 25) 6월 5일 경주성에서 싸웠으며 6월 9일 경주부윤(慶州府尹), 판관(判官)들과 「문천회맹록(蚊川會盟錄)」을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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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선조 30) 7월 21일 곽재우의 의병군과 함께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싸웠으며 임진왜란 후에는 지역교육에 힘썼다.

 

선무원종공신 3등 훈록에 기록되었다. 소노서원은 상의사(尙義祠), 정교당(政敎堂), 연경당(硏經堂), 강례실(講禮室), 서대(西黛), 동루(東樓), 삼문(三門)이 있다. 동래정씨 문중서원으로 향사일은 음력 9월 중정일이다. 소노서원 표지석은 (주)HS텍스 노형식 대표가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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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소산사 상량문

 

"지군(知郡) 이연상(李淵祥) 계사(癸巳) 시월(十月), 오랑캐 나라에도 오히려 갈 수도 있다 함은 그 충성과 공경이 모두 존경받을 만하기 때문인데, 양산 고을에서 어떻게 얻었던가. 그 기풍과 명성은 크게 보답하는데 진실로 합당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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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네 번째의 임진년을 맞이하여, 춘추 두 정일(丁日)에 제향하는 사당을 마련하니, 터는 소노(小魯) 가운데에 정하고, 사당은 대동 천하에 이루도다.

 

공경히 생각컨대 고 침랑(寢郞) 증호부원외(贈戶部員外) 동래 정선생(鄭先生)은 태어나면서 출중한 자질이 있어 공자의 학풍을 듣고서, 어릴 때부터 내 집에 있으면서 내 어버이에게 효도하였으므로 반드시 시서를 배우고 예의를 익힘에 얻음이 있었을 것이요, 장성한 뒤에는 큰 난에 임하여 큰 의리를 판별하였으니 홀로 선비의 도리에 부끄러움이 없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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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有司)가 있는 줄 알았더니, 다행히도 부자(夫子)께서 계셨으니, 그로써 견양(犬羊)에게 붙잡혀갔지만 어느 시대나 현자가 없으리오.

 

만리 이역의 적국 옥중에서 굽히지 않고 끝내 돌아오니 제 임금이 아니면 섬기지 않았네. 고국의 대궐을 그리는 마음 없는 때가 없었으니, 형은 돌아오고 아우는 군중에 있었으며, 간 곳마다 『논어(論語)』읽는 소리 있어 몸은 돌아오고 이름은 바닷가에 남겼도다.

 

대개 이러한 시대를 뛰어넘은 충신의사는 실로 전 영남 사람들이 살아서 영광으로 여기고 죽어서 애통했던 바이다.

 

그러나 당시에 이름은 산촌벽지에 잠복되어 있었으니 그 마음과 행적을 찬찬히 살펴보면 과연 송천곡(宋泉谷)과 정충장(鄭忠壯)의 동류가 아니겠는가! 어찌하여 세월이 오래도록 향사에 모시는 예가 없었던가.

 

만약 덕을 높이고 공을 보답할 것을 말한다면 도리어 노교수(盧敎授)와 나상사(羅上舍)의 아래에 있으리오.

 

인신(人臣)의 도리를 이 신하가 다하였으니 영남 70주(州)의 인사가 흥기하여 추모하고 탄식하지 아니함이 없으며, 신주동(神主洞)은 뉘가 주장하였던가. 거의 3백년이 이르도록 그 이름은 사라지고 업적은 묻혀버렸다. 양산이 비록 크다 하나 어찌 부끄럼이 없겠으며, 낙동강이 출렁거리며 흘러가나 응당 한이 있으리라.

 

임진년에 와서 충절을 살피면서 홀연 대궐에서 교지가 내리시니, 무덤길에 이로써 광채가 나고, 성대한 예식이 향리의 여론에 걸맞아, 이에 감회를 더하여 소리를 합하여 하는 말이 있었다. 저 백록동과 소수서원의 옛 규모를 창건한 것은 곧 자양(紫陽) 주자와 퇴도(退陶) 이선생이 현자를 받드는 아름다운 일이었다.

 

그런 뒤에 군자의 덕이 높으면 경모하는 마음 깊은 것을 볼 수 있나니, 이로써 영예가 있으면 예를 갖추어 신령을 모심이로다.

 

이제 좋은 손을 맞이하여 잔치하는 자리에 자손들이 두루 탄식하는 말을 기다릴 것 없이 곧장 이곳 양산의 옛 터에다 전년 겨울 모일부터 시작하여 공사를 경영하여 건물을 지음에, 처음에는 일이 너무 거창하고 힘겨운 것 같더니, 웅대하고 화려하게 완성하여 문득 사당을 먼저하고 강당을 뒤로 하였으니, 얼마나 성대하냐! 제향을 올리고 정성을 펼 기약이 있고, 또한 즐겁지 않으리오. 궁장(宮墻)에 우모할 곳이 있도다.

 

오늘 굽어보고 우러러보는 감회가 이곳에 오니 더욱 간절하다.

 

봉혜산(鳳兮山) 제일봉 천 길 날아오르는 빛나는 덕은 어제와 같고, 구지동(龜之洞) 깊은 곳에 간직한 아름다운 행적은 지금에 이르렀다.

 

내 마음을 반 뙈기의 네모진 연못에 씻으니 어찌 뚜렷한 연원이 없겠으며, 이 사당은 한 줄기 원적산(圓寂山)을 장하게 하였으니 별도로 추앙하여 의지하는 마음 깊이 있었네.오호라! 북녘 대궐에는 평화로운 시대를 다스리고, 남쪽 변경에는 방비의 자물쇠 굳게 채워 거룩한 임금님 학문을 숭상함이 전재보(錢宰保)의 포충받는 시기를 즈음하였고, 고로(古老)가 사당에 참배하니 마침 한승상(漢承相)의 우애를 보았도다.

 

그 사람을 어질게 여기므로 그 예를 높이고, 서원으로 받들어서 정성으로써 섬김이 마땅하나니, 사당에 있으면 어찌 부판(負板)의 대의를 생각지 아니하겠으며, 강당에 올라 학업을 강구하면 포로로 사로잡혀 있을 때의 심정을 살펴보기 바라노라.

 

재목을 모으고 공을 갖춘 것은 이미 우리들이 모두 원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사업을 잘 이어받을 자는 현량한 후손이요, 한가히 있어 깊이 생각함에 어찌 혹시나 사문이 쇠퇴할까 근심함은 여러 선비들에게 관련된 것이로다.

 

의관을 정제하고 위의를 갖춘 모습 어렴풋이 당년에 친히 뵙는 것 같네. 봉래산 구름 깊디 깊고 금정산 높디 높아 서로 길이 내세까지 보존하기를 기약하네. 짧은 송사를 가려 들보를 올리는 일을 돕나이다.

 

들보를 들어 동으로 던지니, 선생의 생사가 소중화(小中華)에 있도다. 수백년 지난 임진란 감회가 있기에, 억센 이웃나라 향하여 비로소 새 궁을 짓는다. 들보를 들어 서쪽으로 던지니, 바라뵈는 옛 학궁에는 가을풀이 처량하다.

 

당시에 묻히고 사라진 한을 말하지 말라. 이 나라 학문이 흥한 것은 누구의 힘이었던가. 들보를 들어 남으로 던지니, 바다 건너 남방의 연기는 푸르러 남색같구나. 저 곳의 옥수 노인에게 말을 붙여보나니, 논의 한 책이 공의 감실에 있도다.

 

들보를 들어 북쪽으로 던지니, 후릉의 송백은 얼마나 아득하냐. 신성한 후손 정사를 베풀어 교목나무 그늘 펼쳤으니, 영남의 봄빛은 함께 교화 받는 지역이로다.

들보를 들어 위로 던지니, 당 곁에 대가 있어 높이는 10장이로다.

 

한 기운 호탕하여 그 아래 떠오르니, 여기에 오르는 여러 선비 호연지기를 잘 기르리라. 들보를 들어 아래로 던지니, 평탄한 길에 망망한 들길을 걷도다. 공경 공부 독실히 하여 자리에 올라서야, 연후에 바야흐로 이(夷)와 하(夏)에 행하리라

 

엎드려 원하옵건대 상량한 뒤에 풍성은 추로(鄒魯)에 전하고, 예식을 춘추에 거행하며, 사당을 세운 여론을 살펴보면 뉜들 공자(孔子)의 법을 배우고자 아니하겠으며, 선비를 만드는 공부를 넓혀서 내 장차 무성(武城)의 현가(絃歌) 소리를 들으리라.

 

경영하여 만든 경계 시원하고 한가함은 이곳에서 놀고 쉬려함이 아니니 오직 자제들은 뭇 현인처럼 힘쓰도록 하고, 정성들여 모신 사당 모습 가까이 있으니 어찌하여 나아가 닦고 수양함을 배우지 않으리오. 너희 부형들과 더불어 도를 강론하여 이 만황(蠻荒)의 가까운 곳에서 문헌의 꽃다운 명성을 길이 드리워라.

 

3. 충신이 태어난 소노마을

 

소노(小魯)마을의 의미를 풀이해보면 작을 소(小), 노나라 노(魯)로서 작은 노나라를 의미한다. 중국의 노나라는 공자가 태어난 마을이다.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를 닮고 싶은 마을로서 정호인, 정호의 형제 충신이 태어난 유서깊은 마을이다.

 

이와 같은 의미로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는 말이 있다. 나라 이름 추, 나라 이름 로, 갈 지, 시골 향인데, 공자의 고향인 노나라와 맹자의 고향인 추나라를 의미한다. 예절을 알고 학문이 왕성한 곳인 경북 안동 등을 지칭한다. 소노마을은 동래 정씨의 집성마을이다.

 

소노마을 정자가 있는 곳은 쉼터로 큰 느티나무 밑에 마을 제단이 있고, 사람들이 걸터앉을 수 있는 큰 바위가 여러 개 있었다. 마을 어르신들에게 물어보니 이 바위는 아주 오래 되었다고 알려주었다.

 

소노서원이 있는 소노마을은 뒤로는 천성산에서 뻗어내린 산자락, 앞에는 소노지라는 큰 저수지가 있는 배산임수의 명당이다. 큰 인물이 태어날만한 마을이다.

 

소노마을 출신 동래 정씨 후손들은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간 선조인 정호인, 전남 영광의 유학자 강항이 일본에서 만난 것을 기리기 위하여 매년 영광의 내산서원을 방문하며 영호남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이는 영호남 화합의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양산시민들도 소노서원의 역사적 유래를 알아야 한다. 소산사 상량문에 두 형제의 나라를 위하는 충의정신이 잘 묘사되어 있다. 포로생활 9년간 절의를 굽히지 않았고, 의병으로 왜군을 물리친 두 형제의 우국충정의 정신을 본받아야 하겠다.

 

YNEWS 총괄운영위원장 심…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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