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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상'공부인은망부석으로변하고새가되어~동남문화관광연구소장'관광경영학박사'심상도박제상 공 부인은 망부석으로 변하고 새가 되어. . .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박사 심상도 1. 망부석 설화 망부석은 절개 굳은 아내가 외지에 나간 남편을 고개나 산마루에서 기다리다가 만나지 못하고 죽어 돌이 되었다는 설화로 전국 여러 곳에 분포하고 있다. 첫째, 아내가 죽어서 돌이 된 경우, 둘째, 아내가 자연석인 돌 앞에서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는 경우 두 가지 모두 포함된다. 대표적인 설화는 신라시대 박제상 공의 아내가 치술령에서 죽어 망부석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눌지왕 때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간 왕제(王弟)인 복호를 구해 온 박제상은 집에도 들르지 않고 바로 왜국에 건너가 또 다른 왕제인 미사흔을 구해 신라로 보냈다. 왜국에서 붙잡혀 왜왕이 회유해도 끝까지 신라의 신하임을 내세우다 고문을 받고 죽는다. 그의 아내는 일본에 간 남편을 기다리다 죽어서 망부석이 되고,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 주민은 부인의 정절을 칭송하고 추모하는 행사를 해왔다. 박제상의 부인은 죽어서 치(鵄)라는 새가 되고 같이 기다리다 죽은 두 딸은 술(述)이라는 새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박제상 공 부인과 딸들이 치술령신모(鵄述嶺神母)가 되었고 이에 주민들이 사당을 지어 모셨다고 한다. 과학적으로 볼 때 사람이 돌로 변한다는 화석(化石) 모티프는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돌’에 찬양받을 만한 기념물이라는 의미를 부여하여 추모하게 된 것이다. 부인이 남편을 기다리다 지쳐서 죽은 장소에 있는 돌, 또는 나중에 인공으로 기념비를 세워서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대상물로 삼게 되면 후세들의 교육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 곳을 방문하는 참배객들은 망부석(자연석), 기념비를 대할 때 정절을 지킨 훌륭한 부인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게 된다. 특히 유교에서 강조하는 삼강오륜 정신에 입각하여 충, 의, 효, 열의 덕목을 백성들의 교화에 적극적으로 활용한 왕조 국가에서 박제상 공 부인의 망부석은 그 교육 효과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부인이 죽어 새가 되었다는 ‘치술령 망부석 전설’에서 새의 의미는 일본에 건너간 뒤 소식이 없는 남편을 기다릴 때 차라리 새가 되어 훨훨 날아 바다를 건너가 남편을 보고 싶어하는 데 있다. 죽어서 새로 변하여 현실적인 공간을 극복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제 현생에서 부부의 만남이 살아서는 불가능하므로 죽은 뒤에 새가 되어 소원을 푸는 것이다. ‘이 몸이 새가 된다면’ 하는 살았을 적의 소원이 죽어서 실현이 된다는 의미는 죽음을 초월한 부부의 사랑을 뜻한다. 딸들도 마찬가지로 새가 되어서라도 아버지를 만나고 싶은 소원 때문에 새가 된 것이다. 치술령 아래에 금교 김씨 부인과 딸들이 새가 되어 살았다는 은을암(隱乙岩) 바위가 있으며, 이곳에 지은 암자인 은을암(隱乙庵)과 위패를 모신 당(堂)이 있다. 이들을 추모하는 기념정신은 망부석으로 남아 있고, 죽어서라도 남편과 아버지를 만나겠다는 의지에서 새로 변한 영혼이 은을암에 깃들어 있고, 주민들의 박제상 공 부인과 딸에 대한 존경심과 신앙심은 치술령 신모(神母)로 남아 있다. 치술령 정상에는 1999년 5월 치산사보존회에서 세운 신모사지(神母祀址) 비석이 있다. 치우산악회에서 1995년 1월 2일 세운 치술령 정상석은 높이가 765m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건설교통부 국립지리원에서 2002년 10월에 세운 삼각점 설치에서 766m로 나타나 있다. 치술령의 정확한 높이는 해발 766m이다. 전라북도 정읍시 정읍사공원에 있는 망부석은 아내가 장사를 나간 남편을 기다리던 곳을 기념한 돌이다. 『정읍사(井邑詞)』 노래와 이 노래를 이야기로 꾸민 전설이 있는데, 이것도 오랜 기념 정신을 뜻하는 것이다. 경북 포항시의 ‘망부산(望夫山) 솔개재전설’은 신라 말 경애왕 때 소정승(蘇政丞)이 일본에 사신으로 가 돌아오지 않자 부인이 산에 올라가 기다리다 지쳐 죽어 산 이름이 망부산이 되었다. 부인을 기념하는 뜻에서 사당인 망부사(望夫祠)를 짓고 같이 기다리던 개와 말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치술령 망부석 전설’과 유사하다. 망부석이 망부산으로 규모가 커진 것이 다르다. 고기를 잡으러 갔거나 혹은 중국에 사신으로 간 남편을 기다리다가 아내가 떨어져 죽었다는 서해안의 ‘낙화암 전설(落花巖 傳說)’도 이 ‘망부석 설화’의 변형이다. 한 여인이 정절을 지키기 위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고, 후세 주민들이 이를 추모하는 ‘망부석 설화’는 유교의 삼강오륜 정신에 충실한 의식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2.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나타난 박제상 공과 그의 부인 행적 삼국유사에는 내물왕 김제상(柰勿王 金堤上)편에 나온다.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처음에 제상이 신라를 떠날 때 부인이 듣고 남편의 뒤를 쫓아갔으나 따르지 못했었다. 이에 망덕사(望德寺) 문 남쪽 사장(沙場) 위에 이르러 주저앉아 길게 부르짖었는데, 이런 일이 있었다 하여 그 사장을 장사(長沙)라고 불렀다. 친척 두 사람이 부인을 부축하여 돌아오려 하자 부인은 다리를 뻗은 채 앉아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곳을 벌지지(伐知旨)라고 이름 지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오래된 뒤에 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치述嶺)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고 통곡하다가 죽고 말았다. 그래서 그를 ‘치술신모’라고 하는데, 지금도 그를 제사 지내는 사당(祠堂)이 있다. 삼국사기 열전 박제상 편에 나오는 박제상 공과 그의 부인인 금교 김씨의 대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상은 이에 죽기를 맹세하고 처자도 만나지 않은 채 율포로 가서 배를 타고 왜로 향하였다. 그의 아내가 이 소문을 듣고 포구로 달려가 배를 바라보면서 대성통곡하며 말했다. “잘 다녀 오시오!” 제상이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내가 명을 받들고 적국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그대는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지 마시오.” 하고, 드디어 그 길로 곧장 왜국에 들어갔다. 박제상은 신라 눌지왕 때 왜에 볼모로 잡혀간 왕의 동생 미사흔을 구하기 위해 왜로 건너 갔다가 그를 구출하고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왜의 온갖 회유와 고문을 뿌리친 그의 정신은 신라 백성을 감동시켰고 후대로 이어져 백성 교육의 표상이 되었다. 왜국으로 떠난 남편이 돌아오는 모습을 보기 위해 금교 부인은 날마다 치술령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았다. 남편을 기다렸지만 결국 순절한 비보만 듣게 된다. 왜국으로 떠난 님을 기다리던 그 여인은 하염없이 울다 이내 돌이 되어버렸다. 애통한 마음이 죽음으로 승화한 자리엔 망부석(望夫石)이 남고 죽은 부인과 딸은 새가 되어 은을암(隱乙岩)에 자리를 잡았다. 3. 치술령의 망부석 박제상 공의 부인 금교 김씨는 남편이 떠난 율포(현재 울산시 북구 정자)와 동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치술령 아래인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친정)로 이사하였다. 이후 치술령 정상 부근(현재 망부석이 있는 자리)에서 남편의 무사 귀환을 빌며 참새미 물로 연명하였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참새미는 망부천(望夫泉)이라고도 한다. 훗날 지역 유림들이 금교 부인의 정절을 기려 봄과 가을에 향제를 지낼 때 참새미의 물을 길러 목욕하고 이 물로 밥을 지었다. 참새미의 물은 겨울철에도 물이 마르지 않고 물맛이 좋다. 9월 4일 답사했을 때 참새미의 물은 흘러나오고 있었다.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바가지는 걸려 있었지만 수량이 많지 않아 마시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박제상 공의 아내 금교 김씨 부인은 남편에 대한 짙은 그리움의 사연을 간직한 신라의 여인이다. 그녀는 망부석이 되어 처연한 모습으로 치술령 정상을 오늘도 여전히 지키고 있다. 치술령 망부석은 전국의 수많은 망부석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하다. 필자가 사진을 찍으면서 바위를 다각도로 찍었는데, 나중에 보니 여인의 옆 모습이 나타났다. 마치 박제상 공의 부인인 금교 김씨 부인의 얼굴처럼 눈, 코, 입이 뚜렷하게 보여 신기했다. 망부석은 정상에서 서쪽으로 400m 가량 떨어진 지점에 있다. 울산 앞바다를 볼 수 있게 전망대를 설치하였다. 전망대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내려가면 망부석 바위를 올려다 볼 수 있다. 망부석에는 ‘望夫石’이라고 한자가 새겨져 있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글자를 발견할 수 없다. 망부석 전망대에서는 두동면 만화리와 은편리 일대가 까마득히 내려다보인다. 망부석 좌우에는 두 돌이 더 있는데 이는 큰 딸 아기와 막내딸 아경도 어머니를 따라 죽어 화석이 되었다. 차녀 아영은 동생 문량을 양육하기 위해 죽지 않았다고 한다. 치술령 정상에는 그 옛날 박제상 부인의 넋을 기린 사당이 있었음을 알리는 신모사지(神母祠址) 표석이 세워져 있다. 화강석 기둥으로 둘러쳐진 구획 안에 오석으로 만들어진 표석이 있다. 박제상의 아들 문량은 누나 아영에 의해 키워졌다. 눌지왕은 아영을 동생 미사흔과 혼인시키고 변한국부인에 봉했다. 문량은 올곧게 자라서 눌지왕 다음의 임금 자비왕 때의 명신(名臣)이었다. 그러나 간신들의 모함을 받아 자비왕에게 내침을 당했다. 문량은 벼슬을 잃은 것을 개의치 않고 여유롭게 여생을 보냈다. 신라인들이 신유림(神遊林)으로 부르며 신령시한 낭산 기슭에서 살았다. 방아타령을 지은 백결 선생이 바로 박제상의 외아들 문량이다. 원래의 망부석 말고 경주시에서 새롭게 주장하는 망부석이 또 하나 있다. 경주의 망부석은 치술령 정상석 근처에 있는 ‘치술령망부석’ 표지판을 따라 급경사 데크 계단을 내려가면 있다. 망부석 아래는 매우 가파른 절벽이고 경주시에서 세운 안내판도 있다. 바위 위에서 바라보면 울산 앞바다, 경주시 외동읍 석계와 모화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경주시 향토사학자들은 울산의 원래 망부석은 높이가 그다지 높지 않아 밑으로 뛰어내려도 죽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경주 망부석은 위치가 높아서 뛰어내리면 죽을 수도 있다. 필자의 견해로 본다면 원래 망부석이 맞다고 판단된다. 경주에서 주장하는 망부석은 치술령 정상에서 좀 떨어져 있고, 정상에서 볼 때 나무가 가려서 쉽게 찾을 수 없다. 원래 망부석은 바위에 글자도 새겨져 있고, 생존에 필요한 샘물도 가까이 있어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다. 유림들이 망부석에서 추모제를 할 때도 이 샘물을 이용하였다고 하니 가까이 있는 것이 진짜 망부석이다. 치산서원에서 1㎞쯤 가면 하천을 끼고 갈림길이 나온다. 바로 가면 망부석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암자인 은을암(隱乙庵)으로 가게 된다. 망부석 쪽으로 가면 충효사라는 절이 나오고, 포장된 도로로 계속 가면 법왕사까지 갈 수 있다. 법왕사 입구에 주차하고, 절 오른쪽의 등산로를 따라가면 망부석이 있는 치술령으로 갈 수 있다. 법왕사 안으로 들어가면 사나운 개가 짖으며 달려드니 사찰 경내로 들어가지 말고 등산로로 가면 된다. 법왕사에서 40~50분 정도 정상을 향해 오르면 망부석이 나온다. 등산로는 계속 오르막으로 가파르다. 4. 금교 김씨 부인의 영혼이 깃든 은을암 부인의 몸은 돌이 되어 망부석으로 그 자리에 굳었지만 넋은 자유로워졌다. 부인의 넋은 치술조로 변해 박제상이 목숨을 잃은 곳으로 알려진 목도까지 날아가 남편의 넋을 맞아 신라로 돌아왔다고 한다. 어느 날 왕이 있는 마루에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아 구슬픈 소리로 지저귀며 ‘목도의 넋을 맞아 고국에 돌아오니 뉘라서 그것을 알리요’라는 뜻의 글자를 쪼아 놓고 날아가자 왕이 이상히 여겨 뒤쫓아 가보게 했더니 치술암 기슭의 바위 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왕은 비로소 그 새가 박제상 부인의 넋임을 알고 그 바위를 은을암이라 하고, 그 바위 위에 영신사를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그 후 왕은 박제상의 딸을 미해공의 부인으로 삼고 박제상에게 대아찬으로 관위를 높여주고, 김씨부인은 국대부인에 추봉했으며 사당을 짓고 그 뜻을 기리는 제를 봉행토록 한 곳을 치산서원이라 한다. 부인의 영혼은 새가 돼 근처 마을에서 잠깐 쉰 뒤에 국수봉 아래 바위틈으로 날아 들어갔다. 잠시 쉰 마을이 울주군 두동면 비조(飛鳥)마을이다. 날아 들어간 바위가 범서읍 척과리 국수봉 아래의 은을암(隱乙岩)이다. 현재는 은을암(隱乙庵)이라는 조계종 소속의 암자가 있다. 울주군 척과리 국수봉에 있는 은을암은 절벽처럼 가파른 산비탈에 마치 제비집처럼 붙어 있다. 국수봉 꼭대기에 매달리듯 자리 잡은 위치 자체가 신비스런 풍광을 연출하고 있다. 절 앞까지는 승용차로 갈 수 있지만 외통길로 운전을 조심해야 한다. 주차한 후 올려다보면 은을암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이 나온다. 무거운 짐을 올리는 계단 리프트가 설치되어 있다. 리프트 시주자는 ㈜태화관광, ㈜태진관광, ㈜태화공항버스, ㈜현대관광이다. 은을암의 전각은 터가 좁아서 옆으로 늘어서 있다. 은을암 앞마당은 절벽이라 기둥을 세우고 나무 판자를 깔아서 공간을 마련하였다. 오른쪽 길로 올라가면 극락전이 나오고 범종루가 보인다. 범종루는 너무 가파른 절벽에 있어 출입을 금하고 있다. 극락전 오른쪽으로 가면 금교 김씨 부인과 딸들이 새가 되어 숨었다는 커다란 바위틈이 나온다. 바위틈새에서 샘물이 흘러나온다. 샘은 기다란 용으로 장식되어 있다. 울창한 숲에 새들의 지저귐이 유난스럽다. 박제상 공과 그의 금교 김씨 부인의 유적지인 박제상기념관, 치산서원, 은을암, 망부석은 아침 일찍부터 서둘면 하루에 모두 둘러볼 수 있다. 울산광역시 울주군에서 박제상 공 유적을 잘 정비하여 볼거리가 많고, 망부석으로 가는 둘레길도 잘 조성되어 있었다. 반면 박제상 공의 탄생지인 양산시는 미흡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애초에 성역화 사업을 할 때 부지를 넓게 잡아야 하는데, 협소한 편이고, 효충사, 징심헌에도 컨텐츠가 없어 볼거리가 없다. 시급히 보완해야 할 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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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상 공을 모신 치산서원과 박제상기념관ㅡ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1. 치산서원과 박제상기념관 박제상은 양산을 중심으로 한 삽량주의 책임자인 삽량주간(歃良州干)이라는 직책에 있었다. 그는 418년 왕명을 받들어 고구려에 가서 장수왕을 언변으로 회유하여 인질로 잡혀 있는 왕의 동생 복호를 구출하고 무사히 귀국하였다. 다시 왜국에 볼모로 있던 또 다른 왕의 동생 미사흔을 구출하기 위해 집에 들르지도 않고 왜국으로 떠났다. 미사흔의 구출에는 성공하였으나 자신은 붙잡히고 말았다. 왜왕은 박제상을 신하로 삼기 위해 협박과 감언이설로 회유했으나 박제상은 끝내 신라에 대한 충절을 지키다가 고문을 받아 죽었다. 박제상 공과 그의 부인인 금교 김씨, 그의 딸들의 숭고한 혼을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할 수 있는 곳이 있다. 그곳은 바로 울주군에 있는 치산서원과 박제상기념관이다. 사당을 짓고 그 뜻을 기리는 제를 봉행토록 한 곳을 치산서원이라 한다. 치산서원의 전신은 박제상과 그 부인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사당터로서 영조 21년(1745년)에 최초로 세워졌다가 그 후 조선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었다. 이후 1993년 복원돼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치산서원 내에는 충렬공 박제상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충렬묘와 박제상의 부인 금교 김씨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신모사, 박제상의 장녀 아기와 삼녀 아경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쌍정려가 있다. 8월 22일 치산서원을 방문하니 보수, 정비하느라 대대적인 공사를 하고 있어 내부를 볼 수 없었다. 박제상기념관은 코로나19 방역으로 폐쇄를 걱정하였으나 개방하여 체온 체크를 하고 내부를 둘러볼 수 있었다. 양산에 있는 박제상 공 역사유적 공원에 있는 효충사, 징심헌은 코로나 사태로 문이 굳게 잠겨 있어 내부를 볼 수 없어 울산과 대조적이었다. 지난 2008년 9월 개관한 박제상 기념관은 9,641㎡ 부지에 박제상 전시관과 울주문화관, 로비, 교육영상실 등으로 구성돼 있다. 치산서원 바로 옆에 있는 박제상 기념관은 박제상과 그 가족에 얽힌 이야기를 주제로 충, 의, 효, 열의 의미를 되새기는 교육 체험의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족단위 방문객, 학생 단체, 역사유적 답사자 등에게 인상깊은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박제상 전시관에는 박제상의 일대기와 그의 가족 이야기가 담긴 삼국유사 등 각종 고서와 박제상 순절비 등이 전시돼 있다. 박제상 공이 왕자를 구하기 위해 배를 타고 일본으로 떠나는 장면을 재현하기 위해 밀랍으로 당시의 배 모형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다. 그 당시 박제상 공이 일본까지 배를 타고 간 항로, 한일간의 항로도 보여주고 있다. 체험 코너에서는 삼국시대 복식 블록 맞추기, 신라시대 사신 찾기, 편지쓰기 등이 마련돼 있다. 울주문화관에는 박제상이 살았던 4~5세기의 신라시대 시장 풍경을 디오라마(배경 위에 모형을 설치한 것)로 연출하고 당시의 다양한 유물도 전시됐다. 로비에는 박제상과 부인의 부조와 언양현의 고지도 복제판 등이 벽면에 전시됐으며 교육영상실에서는 홍보영상물 상영과 예절교육, 다도교육 등이 이뤄질 수 있도록 했다. 학생들의 체험학습을 위한 코스로 인기가 있다고 한다. 2. 박제상 축제 요즘 전국적으로 자기 고장의 역사 인물을 기념하는 축제가 많이 벌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역사문화축제는 단순한 축제를 넘어 지역의 정체성을 살리고 지역민들에게 자부심을 갖게 하는 중요한 사업이 되고 있다. 2010년 울주군과 울주문화원이 박제상 공을 기념하기 위한 첫 문화제를 시작하였다.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 치산서원 일원에서 열리는 박제상 문화제는 역사적 인물인 박제상 공, 부인, 딸들을 기리는 행사이다. 우리 민족의 고유 가치인 충과 효, 정렬의 의미를 되새기는 새로운 문화축제였다. 박제상 축제는 참가자들이 과거의 역사 인물과 만나 그들이 남긴 정신의 면면을 짚어보고 이를 가슴 속에 소중하게 간직하는 기회가 되었다. 문화제에서 박제상의 흔적을 더듬어 보는 치술령까지의 역사답사길, 퀴즈대회, 민속놀이 체험 마당을 통해 과거와 오늘이 소통하는 문화의 장이 되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였다. 역사인물을 문화제화 하는 의미를 살려 한시와 시조 백일장도 개최하였다. 필자는 박제상 축제에 직접 참가하여 양산과 비교하는 기회를 가진 바 있었다. 우선 축제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충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주차장도 충분하고, 치산서원과 박제상기념관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어 공간적으로 활용하기 좋았다. 그 당시 양산의 효충사는 주차장도 제대로 없고 효충사 사당만 겨우 있었다. 현재는 주차장을 확장하고 동상도 건립하였지만 울주군에 비해서는 컨텐츠가 매우 빈약하다. 양산의 역사적 인물로 중요한 박제상 공은 울주군에서 대대적으로 기념하는 바람에 울주군의 인물로 오인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고향의 봄 작사가인 이원수 선생도 창원시 마산에서 선수를 쳐서 양산에서는 생가 복원도 못하고 선양사업도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양산의 역사적 인물로는 삼국통일을 이룩한 김유신 장군의 할아버지인 김무력 장군도 있는데, 잊혀진 인물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김무력 장군의 아들인 김서현 장군은 양주도독으로 양산에서 복무하여 춘추공원에 기념비가 있다. 역사에 무관심한 양산시민과 정치인들 때문에 지역의 대표적인 인물을 이웃 도시에 넘겨주거나 선양사업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형편이어서 안타깝다. 3. 충신 박제상 공과 『삼강행실도』 삼강오륜은 유교(儒敎)의 도덕사상에서 기본이 되는 3가지의 강령(綱領)과 5가지의 인륜(人倫)을 말한다. 삼강은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 부위부강(夫爲婦綱)으로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의미한다. 오륜은 오상(五常) 또는 오전(五典)이라고도 한다. 이는 『맹자(孟子)』에 나오는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의 5가지이다. 부자유친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도(道)는 친애(親愛)에 있으며, 임금과 신하의 도리는 의리에 있고, 부부 사이에는 서로 침범치 못할 인륜(人倫)의 구별이 있으며,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하며, 벗의 도리는 믿음에 있음을 뜻한다. 삼강오륜은 원래 중국 전한(前漢) 때의 유명한 유학자인 동중서(董仲舒)가 공맹(孔孟)의 교리에 입각하여 삼강오상설(三綱五常說)을 논한 데서 유래되어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과거 오랫동안 사회의 기본적 윤리로 존중되어 왔다. 현재도 일상생활에서 은연 중에 의식구조의 일단을 차지하고 있는 윤리 도덕이다. 『삼강행실도』는 충신, 효자, 열녀의 세 가지 도리에 대해 실제의 예를 들어 글과 그림으로 표현한, 조선 최초의 도덕책이다. 1428년(세종 10년) 경남 진주에서 발생한 김화의 부친 살해사건이 유교국가인 조선에 큰 충격을 안겼다. 세종은 백성들에게 죄를 짓지 않고 도리에 대해 깨우치게 하기 위해 편찬을 명령하여 세종 14년에 완성되었다. 『삼강행실도』는 무지한 백성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글과 함께 그림을 넣어 한자를 모르는 사람들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책에는 조선 뿐 아니라 고려와 삼국시대의 예까지 모아 집현전에서 편찬하게 하였다. 1431년(세종 13년) 집현전의 부제학이었던 설순 등에게 왕명을 내려 권부(權溥)의 『효행록(孝行錄)』에 우리나라의 옛 사실들을 첨가하여 조선과 중국의 서적에서 충신, 효자, 열녀 등의 사례를 뽑아 그 행적을 그림과 글로서 칭송하도록 하였다. 이 책은 조선보다는 중국의 사례를 중심으로 하여 기초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또한 각각의 사실에 그림을 붙이고 이를 설명한 영가(詠歌)나 찬(贊)을 달았다. 내용은 삼강행실효자도, 삼강행실충신도, 삼강행실열녀도의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강행실효자도에는 ’순임금의 큰 효성(虞舜大孝)‘을 비롯하여 역대 효자 110명을, 충신도에는 ’용봉이 간하다 죽다(龍逢諫死)‘ 외에 112명의 충신을, 열녀도에는 ’아황, 여영이 상강에서 죽다(皇英死湘)‘ 외 94명의 열녀를 소개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효자 4명, 충신 6명, 열녀 6명이 실려있다. 한편 이 책은 1481년(성종 12년)에 3권 1책의 목판본으로 하여 한글로 언해한 것이 있으며 이것은 각 편당 인원을 줄이고 있으며, 조선 전기 한글 연구로 중요한 자료이다. 삼강행실효자도에는 ’호랑이를 잡은 고려의 누백(누백포호)‘을 비롯하여 효자 110명, 삼강행실충신도에는 ’신라 박제상의 충렬(제상충렬)‘외 112명의 충신을, 열녀도에는 ’백제 도미와 도미부인의 절행(미처담초)‘외 94명의 열녀를 소개하고 있다. 그중 중국이 아닌 우리나라의 인물로는 효자 4명, 충신 6명, 열녀 6명을 싣고 있다. 처음에는 효행에 관한 일만으로 시작했으나 후에 충신과 열녀의 이야기까지 포함해 만들어졌으며, 보통의 딱딱한 유교 경전이 아니라 실제 예를 그림과 더불어 엮었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볼 수 있었다. 『삼강행실도』라는 제목은 세종이 직접 지었으며 여러 권을 인쇄하여 각 도에 보내어 읽게 하였다. 『삼강행실도』는 책 3권 분량의 어마어마한 양이었으므로, 받은 지방에서 인쇄 비용도 많이 드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책 분량이 방대하여 전체를 읽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되어 후대에 갈수록 점점 축소되어 성종 때에 비로소 책 1권 분량이 되었다. 『삼강행실도』는 중앙에서 제작하여 각 지방에 몇 부씩 나누어주면, 각 지방에서 다시 이를 번각하여 일반 백성에게 배포하였다. 때문에 같은 시기에 제작된 『삼강행실도』라도 번각의 정도에 따라 판화의 격이 달랐다. 세종판(1434년)을 시작으로, 성종판(1490년), 선조판(1579년), 영조판(1726년) 등 여러 차례 복각되어 내용은 같아도 판화에는 시대적인 양식의 차이가 반영되어 있다. 또한 성종은 『삼강행실도』에 언문(한글)을 포함해 개정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삼강행실도』는 ‘효자편’, ‘충신편’, ‘열녀편'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각 장에 그에 해당하는 실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양산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삼강행실도는 경남 유형문화제 제 160호로 지정되었다. ’효자편‘, 아버지가 호랑이에게 살해당하자 최누백은 복수를 결심하고, 호랑이를 꾸짖고 죽인다. 아버지를 장사지내고 무덤 곁에서 3년 동안 움막을 짓고 살았는데 아버지가 꿈에 나타나 누백의 효를 칭찬하였다. ’충신편‘, 신라왕이 박제상에게 일본에 볼모로 간 동생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박제상이 일왕에게 거짓으로 항복하여 신라왕의 동생은 탈출시켰으나, 박제상은 탈출에 실패하여 잡혔다. 박제상은 일왕의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고 죽음을 맞았다. ’열녀편‘, 왜적이 마을에 쳐들어와 노략질을 하는데 왜적이 최씨를 잡고 칼을 내보이며 위협했다. 최씨가 "죽어서 의를 지키겠노라"며 저항하자 왜적이 그녀를 해쳤다. 양산에서 태어난 박제상 공을 충분히 예우하지 못하는 사이에 울주군에서 선양사업을 본격적으로 함으로써 자칫 잘못하면 박제상 공을 울주군의 인물로 빼앗길 우려도 상존하고 있다. 양산의 박제상 역사공원의 컨텐츠를 보완하여 제대로 선양사업을 해야 하겠다.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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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상공부인과관련된유적,동남문화관광연구소장관광경영학박사'심상도'1. 벌지지의 역사적 내력 박제상의 충절에 대해 조선시대 숙종은 ‘신라 천년의 으뜸가는 충신이다’라고 했고 정조는 ‘도덕은 천추에 높고 정충은 만세에 걸친다’라고 극찬했으며 1,5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국민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박제상의 부인은 딸들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슬품과 그리움에 겨워 통곡하다가 죽어 치술령 산신모가 되니, 백성들은 부인의 절개를 기리기 위해 '치술령곡'이라는 노래를 지어 되새겼다. ‘치술령곡’은 신라 때 노래로 내용은 전하지 않고 『증보문헌비고』(1908년)에 그 유래만을 전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보면 박제상을 기다리는 부인의 유적에 대한 내력을 알려주고 있다. 신라충신 박제상공 부인 유적(新羅忠臣朴堤上公夫人遺蹟), 처음 제상이 떠날 때 그 부인(夫人)이 듣고 쫓아가다가 미치지 못하고, 망덕사문(望德寺門) 남쪽 모래 위에 이르러 드러누워 길이 부르짖었으므로 그로부터 그 모래벌을 ‘장사(長沙)’라고 한다. 그 친척 두 사람이 그를 부액하여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부인이 다리를 뻗고 앉아 일어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땅을 ‘벌지지(伐知旨)’라 하였다. 이런 연유로 지명이 벌지지가 됐다. 뻗치다의 음을 한자로 적은 것이 ‘伐知旨(벌지지)’가 된 것이다. 벌지지를 양지버들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7번 국도변에 있는 경주 사천왕사터 건너편이 망덕사터이다. 망덕사터 앞 남천변에 '장사벌지지(長沙伐知旨)'란 비석이 세워져 있다. 경주 화랑교육원 가는 길에서 남천다리 건너기 전 좌회전하여 제방길로 가면 벌지지가 나온다. 차량 한 대가 지나갈 정도의 외통길이다. 망덕사 근처에는 박제상의 부인의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아들 문량이 치술령으로 옮겼다가 다시 치술령 아래 만화리로 옮겼다고 전해진다. 2. 박제상공 부인의 원찰인 망덕사 경주 낭산(狼山)의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절터로 사천왕사와 마주하고 있다. 처음 지어진 때는 정확하지 않으나 신라 문무왕 또는 신문왕 때로 전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문무왕 19년(679)에 중국 당나라가 침입하자 부처의 힘으로 물리치고자 사천왕사를 짓게 되었다고 한다. 그 소문이 당나라에 전해지자 당에서는 사신을 파견하여 이를 확인하려 하였는데, 신라에서는 사천왕사 건너편에 이 절을 지어 보여주었고, 당나라의 덕을 우러른다는 의미에서 망덕사(望德寺)라 하였다고 한다. 그 뒤 효소왕 1년(692)에 다시 지어 완공하였다. 당고종은 악붕귀(樂鵬龜)라는 사람을 사신으로 보내 박문준이 말한 절이 정말로 당 황제의 만수무강을 비는 절이 맞는지 확인하려 했다. 그러나 사천왕사는 실제로는 당나라 같은 외세를 물리치기 위해 만든 절이므로 당나라의 조사를 받으면 들통날 것이 뻔했기에, 신라 조정은 당나라 사신 악붕귀에게 보여주기용으로 미리 사천왕사 남쪽에 새 절을 날림으로 지었으니 바로 망덕사다. 예상대로 악붕귀는 오자마자 먼저 황제의 장수를 기원하는 천왕사에 들르고 싶다고 말했다. 신라인들이 악붕귀를 망덕사로 인도해 보냈더니, 그도 뭔가 미리 입수한 정보가 있는지 망덕사의 문 앞에 서서 “이것은 사천왕사가 아니고,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다.”라고 하면서 들어가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신라에서 악붕귀에게 금 1천 냥을 주어 매수했다. 사신은 귀국 후 당고종에게 황제의 수명을 축하하는 절이 맞더라고 거짓 보고를 올린 덕에 무사히 넘어갔다. 경덕왕 14년(755)에 탑이 흔들렸는데, 마침 중국에서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으므로 신라사람들은 당나라를 위해 지은 절이어서 그렇다고 하였다 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훗날 경덕왕 때인 755년에 13층짜리 두 탑이 갑자기 흔들리면서 떨어졌다 붙었다 하며 곧 넘어질 듯하고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지진이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공교롭게도 그해 당나라에서는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 혼란스러웠기에 당나라와 연관된 이 절이 거기에 감응한 것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동사강목에 의하면 798년과 804년에도 두 탑이 서로 부딪히도록 흔들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삼국유사』에는 절을 지은 후 잔치를 베풀 때 효소왕이 진신석가를 알아보지 못하여 조롱을 당했다는 이야기, 『반야경』을 베껴 쓰다가 죽은 승려 선율이 불경의 완성을 위하여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절터는 낭산(狼山) 남쪽의 사천왕사에서 남쪽으로 좀 더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남쪽 끝부분은 경사가 급한 편이고, 그 남쪽에는 남천(南川)이 흐른다. 현재 동서 목탑터와 금당(金堂)터, 강당(講堂)터, 중문(中門)터, 회랑(廻廊)터 등이 남아 있어,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쌍탑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 또한 남쪽에는 계단터가 잘 남아 있고, 서쪽에는 망덕사지 당간지주(보물 제69호)가 자리하고 있는데 원래의 위치는 아닌 듯하다. 1969년∼1971년 3차례에 걸쳐 문화재관리국에서 발굴하였다. 그 결과 현재의 금당터는 축소된 것으로, 원래의 받침 부분 너비가 동서(東西) 방향으로 좀 더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탑이 있던 자리에는 받침돌 아래의 바닥돌과 계단의 바닥돌이 남아 있으며, 동탑에도 대부분의 주춧돌이 원래의 위치에 남아 있다. 중문터와 동서 회랑은 받침 부분의 범위가 확인된 정도지만, 회랑은 일부 자연석 또는 벽돌로 된 받침돌만 확인되었다. 특히 금당과 회랑 사이에는 익랑(翼廊)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어, 신라의 쌍탑 가람에서 익랑이 필수적이었음이 알려지게 되었다. 강당터는 훼손이 심하여 받침 부분의 흔적조차 확인할 수 없으나, 주변에서 발견된 유구(遺構)로 보아 조선시대까지 작은 암자 등이 자리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중문 앞 경사진 곳에는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거대한 돌계단이 있는데, 이것은 불국사의 경우와 같이 중문 앞에 규모가 큰 계단을 설치하는 방식이 당시 사찰 조영의 일반적인 사례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 절은 황룡사, 사천왕사, 황복사와 함께 경주의 중요한 사찰이었던 곳으로서 그 의미가 크다. 망덕사지와 사천왕사지는 경주에서 울산으로 가는 7번 국도(산업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사천왕사지의 기단 복원, 경역 정비공사가 지난 2월부터 올 연말까지 진행되고 있어 들어갈 수가 없다. 높은 공사 가림막이 처져 있어 사천왕사지 경내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사천왕사지 주차장에서 선덕여왕릉으로 가는 길이 있다. 가까운 곳에 신문왕릉도 있어 둘러볼 역사유적이 많다. 망덕사는 박제상 공의 부인인 금교부인의 영혼을 달래는 원찰 역할도 하였다고 한다. 망덕사지를 둘러보면 벌지지와 매우 가깝고 규모가 아주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논에 벼가 자라는 가을까지는 전체를 둘러보기 힘들지만 겨울철에 답사하면 논으로 들러가 망덕사의 석축 돌도 둘러볼 수 있다. 3. 박제상 공이 왜국으로 떠난 율포 공이 눌지왕의 동생 미사흔을 구하기 위해 배를 타고 왜국으로 떠난 발선처(發船處)는 삼국유사에 나와 있다. “제상이 집에도 들르지 않고 길을 떠나 곧바로 율포(栗浦) 바닷가에 도착했다. 아내가 뒤쫓아와 율포에 이르러 보니, 남편은 이미 배에 오른 뒤였다.”고 나와 있다. 율포는 지금의 울산광역시 북구 강동동 바닷가다. 유포 석보에 ‘신라충신 박제상공 사왜시발선처(使倭時發船處)’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석굴암연구회가 1989년 10월에 세웠는데, 글씨는 오제봉이 썼다. 우리나라의 동해 율포에서 흘러간 물은 박제상 공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 대마도 미나토 마을에 바로 닿는다고 한다. 미나토의 방파제에 가면 한글이 적힌 쓰레기들이 많이 떠내려와 있다고 한다. 박제상은 이 물결을 역으로 이용하여 신라 왕자를 탈출시킨 후 자신은 잡혀서 처형당했다. 유포 석보를 보기 위해 새로 조성된 주차장에 도착하여 보니 안내 표지판이 없어 찾기가 힘들었다. 도로변 인도를 따라 약간 올라가니 집이 나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사왜시발선처 비석과 유사한 것이 보였다. 마당에 큰 개가 앉아 있었는데, 다가가니 갑자기 뛰쳐나와 깜짝 놀랐다. 다행히 목줄이 있어 물리지는 않았다. 할 수 없이 주차장으로 되돌아왔다. 주차장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강동초등학교 건물이 보였고, 토종닭, 오리백숙 전문의 식당 ‘향나무집’이 보였다. 마침 밭에서 일하는 할아버지를 만나 물어보니 유포 석보를 올라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주차장에 도착한 동네 아주머니가 주차 후 친절하게 길을 안내해주었다. 유포 석보로 올라가는 길이 제대로 없고 풀도 무성하다고 얘기하였다. 폐가 담장 옆으로 난 길은 풀이 무성하여 매우 위험하게 보였다. 혹시 뱀이 나올지도 모르는 위험한 길이었다. 올라가는 길이 이길 밖에 없기에 큰 풀을 밟으며 집 옆으로 해서 언덕으로 올라갔다. 바로 안내판이 보이고, 옛 성벽의 흔적인 돌무더기도 나타났다. 사진을 찍고 ‘사왜시발선처’ 비석을 찍으려고 약간 올라가니 아까 만났던 개가 또 으르렁거렸다. 마침 주인 아주머니가 마당에 나왔다가 개를 꼭 안으며 날뛰지 못하도록 진정을 시켰다. 유포 석보의 낮은 성벽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드넓은 동해 바다가 잘 보인다. 발선처를 놓고도 주장이 엇갈린다. 경주 사람들은 지금의 경주시 양남면 하서리 진리마을 바닷가라고 한다. 현대중공업의 여름휴양소가 설치돼 있는 곳이다. 곰솔로 뒤덮인 마을 뒤편 언덕에서 박제상의 부인이 떠나는 남편을 바라다 봤다고 한다. 석보 정상 쪽으로 올라가니 군데군데 성벽의 흔적이 보였다. “이 문화재는 ‘울산문화재돌봄사업단’이 보호, 관리하고 있습니다,”라는 팻말이 소나무에 걸려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정자항이 잘 보였다. 한참 올라가니 농막과 같은 임시 거주지가 나타났다. 풀을 베고, 안내표지판도 설치하여 유포 석보 둘레길이 잘 정비되었으면 좋겠다. 일제강점기 때 정자항에 방파제를 쌓을 때 이곳 석보의 큰 돌을 뽑아서 공사하는 바람에 성벽의 원형이 거의 파괴되고 말았다. 미처 가져가지 못한 성벽 잔해만 남아서 옛 역사를 유추할 수 있다. 산의 능선을 따라 토성처럼 보이는 석보의 흔적은 남아 있다. 조선왕조실록 단종실록 2권, 단종 즉위년 8월 1일 신유 3번째 기사에 유포 석보 축성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1452년, 충청, 전라, 경상도 도체찰사 정분(鄭苯)이 아뢰기를, “청컨대 종사관(從事官) 김순(金淳)을 경상도에 보내어 군사 7천 5백 명을 뽑아서 울산(蔚山), 유포(柳浦)에 석보(石堡)를 쌓게 하여 좌도 도만호(左道都萬戶), 우도 도만호(右道都萬戶)로 하여금 병선(兵船)을 거느리고 수호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단종실록 3권, 단종 즉위년 9월 6일 을미 3번째 기사 1452년,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이제 듣건대 여러 고을의 축성의 역사(役事)를 파하였다고 하지만, 아직 파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금년에 밀, 보리와 올곡(早穀), 늦곡(晩穀)이 모두 여물지 못하여 백성의 생활이 가히 걱정스럽습니다. 변읍(邊邑)의 성참(城塹), 적대(敵臺)의 수축 및 유포의 석보(石堡)와 영광, 함흥의 읍성(邑城) 역사를, 청컨대 모두 정지하소서.”하고 건의하니 따랐다. 세조실록 6권, 세조 3년 1월 29일 갑오 5번째 기사 1457년, 병조에서 경상도 유포, 웅천과 전라도 강진에 성을 축조가 급함을 아뢰었다. 경상도(慶尙道), 전라도(全羅道), 충청도(忠淸道)의 도순찰사(道巡察使) 박강(朴薑)과 부사(副使) 구치관(具致寬) 등이 치계(馳啓)하기를, 울산은 유포(柳浦)에 다만 목책(木柵)만 설치하고 있으니 방어(防禦)가 허소(虛疎)하게 되었습니다. 마땅히 본포(本浦) 옛 연대(煙臺)의 남쪽에 석보(石堡)를 축조해야 할 것입니다.”고 건의하였다. “반드시 풍년을 기다려서 이를 축조(築造)한다면 지완(遲緩)될 듯하오니, 청컨대 가까운 여러 고을 사람을 부역(赴役)시켜 이를 축조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조실록 14권, 세조 4년 10월 9일 계해 3번째 기사 1458년, 병조에서 도절제사영을 건조하고, 유포의 석보를 쌓는 일에 관해 아뢰었다. “지난번에 도절제사영(都節制使營)을 건조하는 것과 유포(柳浦)의 석보(石堡)를 쌓고 진주성(晉州城)을 쌓는 것을 일시에 거행하기가 어려워서 이를 정지하였습니다. 지금 진주성은 이미 정지시켰으니, 청컨대 절제사영을 건조하게 하고, 유포의 석보를 쌓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4. 유포 석보 동진(東津)은 울산광역시 울주 지역의 옛 지명으로 이칭으로 율포현(栗浦縣)이라고 하였다. 본래 신라의 율포현(栗浦縣)이었는데, 757년(경덕왕 16년) 동진현(東津縣)으로 고쳐 임관군(臨關郡)의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 태조 때 울산군으로 이속하였고, 1018년(현종 9년) 유포진첨사(柳浦鎭僉使)를 설치하였다. 1397년(태조 6년 유포석보(柳浦石堡)를 두어 병마절제사가 다스리게 하였으며 유포면(柳浦面)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895년(고종 32) 강동면으로 개명하여 울산군에 속하였으나, 1962년 울산시가 생기면서 울주군 관할이 되었다. 동진현이 있던 당시의 북쪽은 약장(約章), 서쪽은 임관(臨關), 남쪽은 울주와 접하고 있었다. 신라 때에는 경주의 동쪽 외곽을 방위하는 군사적인 요충일 뿐만 아니라 경주의 외항(外港)으로서 해상교통상 매우 중요하였다. 조선 초기 동진과 인접한 감포에 감포진(甘浦鎭)을 두었고, 동진의 진산인 하서지(下西知)에 봉수대가 있어 북쪽의 독산(禿山), 남쪽의 남목천(南木川) 봉수와 연결되었다. 교통망은 장기(長鬐)와 울산을 연결하는 해안도로가 발달하였고, 임관을 거쳐 경주와 연결될 수 있었다. 유포 석보는 울산광역시 중구 병영동에 있었던 경상도좌병영의 보조적 군사시설이었다. 석보의 군사들은 적의 침략해 올 경우 상황을 파악하여 사령부인 경상좌병영에 보고하고, 인근 주민을 대피시키며, 동시에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전투를 하는 소규모 성(城)인 방어진지다. 현대 군사적 개념으로 하면 보(堡)는 중대, 그보다 상급 부대인 진(鎭)은 대대에 해당한다. 유포 석보의 전체 둘레는 755m 정도이며, 구릉 기슭의 낮은 평지와 계곡을 성안으로 삼고 그 주위에 성벽을 쌓았다. 현재 가장 잘 남아 있는 동문(東門) 근처 성벽의 높이는 2m 20cm 정도이다. 만고충신 박제상 공과 열부(烈婦)인 그의 부인에 대한 역사 유적지를 답사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시대가 변해도 국가를 지키는 충신은 변함없이 높게 평가받고, 그 반대로 나라에 해를 끼치는 역적은 두고두고 지탄받게 된다. 남편에 대한 사랑을 끝까지 지킨 박제상 공의 부인은 열부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애국심, 충성심, 사랑은 시대를 초월하여 지켜야 할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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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고충신'박제상'공을모신'효충사'동남문화관광연구소장'관광경영학박사'심상도1. 신라 최고의 충신 양산시 상북면 박제상길 11-1(소토리)에 있는 효충사(孝忠祠)는 박제상 공의 유적이다. 신라시대 만고 충신 박제상 공의 생가로 구성되고 있으며, 사당 안에는 박제상 공과 그의 아들 백결선생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 사당 앞에는 박제상의 업적을 적은 효충사 석비가 세워져 있다. 박제상 공의 호는 관설당(觀雪堂),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9세손, 제5대 파사왕 5세손이다. 내물왕 7년(362년) 9월에 삽량주 소토리에서 태어나 성장한 공은 학업과 출사를 위해 왕경인 서라벌(경주) 치산 아래 삼강동으로 이거하여 수학하였다. 눌지왕 2년(418)에 고구려에 들어가 볼모로 잡혀 있던 왕제(王弟) 복호(卜好)를 데려오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역시 볼모로 잡혀 있던 왕제(王弟) 미사흔(味斯欣)을 계교로 탈출시키고 자신은 스스로 잡히는 몸이 되어 순국하였다. 시호는 충렬공이다. 양산의 춘추공원에는 양산을 대표하는 역사적 위인 세 명의 삼조의열을 모신 충렬사가 있다. 충렬사에는 신라 최고의 충신 박제상 공, 고려시대 양주방어사 김원현 공, 임진왜랜 때 동래성에서 순국한 양산군수 조영규 공의 위패를 모시고 그 공을 기리고 있다. 왜국에 볼모로 가 있는 미사흔(未斯欣)을 구하고자 박제상을 주축으로 신자천(申自天), 배중량(裵仲良)이 모의한 후, 왜에 망명한 것으로 가장하여 도착하였다. “신라 왕이 나의 부모를 죽이고 나를 해치려 하므로 도망쳐 왔소.”하니 왜왕은 그 말을 곧이듣고 장차 신라를 칠 때 미사흔과 박제상을 앞잡이로 삼고자 그들을 끌어들였다. 어느 정도 신임을 받게 된 박제상은 미사흔을 데리고 바다에 나가 뱃놀이를 하면서 탈출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던 중,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해무가 끼자 재빨리 미사흔을 몰래 탈출시켰다. 미사흔을 떠나보낸 후 숙소로 돌아온 박제상은, 왕자를 구하기 위한 계책이었음을 왜왕에게 밝혔다. 왜왕은 박제상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회유하여 신하를 삼고자 하였다. “나는 계림(鷄林)의 신하이다. 나는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망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을 것이며 계림의 모진 종아리는 맞을지언정 왜국의 작록은 받지 않을 것이다.” 하며 저항하였다. 왜왕은 분노하여 고문했다. 박제상이 발바닥을 멋겨 갈대밭을 끌고 다녀도 굴하지 않고 불에 달군 철판 위로 끌고 다녀도 끝내 굴복하지 않으니 왜왕은 그를 목도(木島)로 유배시켰다가 마침내 장작불에 태워 죽이고 목을 베었다. 부사로 갔던 김철복(金轍復)이 말을 끌고 가서 박제상의 의복을 수습하고 매장하여 이 사실을 혈서로 써 말의 입에 물리고 채찍을 쳐 바다로 쫓고 자결하였다. 말이 신라로 돌아와 궁궐 앞에 이르러 혈서를 토하고 죽으니 왕이 그 혈서를 읽고 크게 슬퍼하며 대아찬에 추증하고 양산에 비를 세워 충절을 기리도록 했다. 왕은 이 소문을 듣고 애통해하며 박제상을 대아찬으로 추층하고, 그의 가족들에게 후하게 물건을 하사하고, 미사흔으로 하여금 제상의 둘째 딸을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함으로써 은혜에 보답케 하였다. 처음 미사흔이 돌아올 때 대왕은 6부에 명령하여 멀리 나가서 그를 맞게 하였으며, 그를 만나게 되자 손을 잡고 서로 울었다. 형제들이 모여 술자리를 마련하고 마음껏 즐겼으며, 왕이 가무를 스스로 지어 자신의 뜻을 나타냈는데, 지금 향악 가운데의 우식곡(憂息曲)이 그것이다. 2. 박제상 공 동상 양산시는 양산 출신인 박제상의 충절 정신을 기리고자 2016년 6월 9일 공의 사당이 있는 효충사에 동상을 건립하고 제막식을 하였다. 2015년 2월 상북면민들이 풍력발전기금 1억 2천 3백만 원을 양산시에 기부하여 효충공원내 박제상 공의 동상 건립을 요청하였다. 양산시에서 2015년 1회 추경예산에 반영하고 2015년 5월 부시장을 위원장으로 총 11명으로 동상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2015년 7월부터 타시군 벤치마킹과 4차례 자문회의를 거쳐 종류, 형태 규모 등을 결정하고 2015년 11월 동상제작 설치 사업을 공모하여 응모 작품에 대해 7명의 평가위원이 심사하여 아트인페이스 업체가 선정되어 12월에 계약을 체결하였다. 6명으로 구성된 소위원회 통해 철저한 고증과 자문으로 여러 차례의 수정 보완을 거쳐 2016년 5월 19일 동상을 제작 설치 완료하였다. 이에 따른 제작기간은 5개월, 소요사업비는 1억 2천 9백 5십만 원으로 풍력발전기금 1억 2천 3백만 원, 시비 6백 5십만 원이 소요되었다. 공의 동상 제작을 위해 지역원로, 영해 박씨 문중 관련자, 관련 교수 등 11명으로 동상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타시군 벤치마킹, 회의를 한 결과 충신으로의 강한 인상과 신라 관복의 세밀함을 표현하기 위하여 석상보다 청동 브론즈로 제작하기로 하였다. 형태는 공의 중앙관인으로 간관, 이찬, 삽량주 간 등 관직을 고려하여 무인보다는 문인에 가깝다는 결론으로 좌상을 결정하였다. 삼국시대 인물로 의복, 관모, 관식 등 철저한 고증이 필요하여 복식, 조형 등 전문가 6명을 소위원회로 구성하여 추진하였다. 공의 신분과 출신 및 주요 일대기를 통하여 유형을 장유와 바지, 절풍형 관모에 조익식 관을 삽식하고 의장미를 갖추어 위엄과 당당한 이미지로 제작하였다. 관모는 통일신라 절풍형 관모를 기본으로 황남대총, 양산부부총 등 동시대 출토유물을 상호 비교한 후 동상의 크기에 적합한 미적 형태와 비를 조정하였다. 조형은 초상화를 근거하여 위엄과 강하고 흔들림이 없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충신열사 이미지로 표현하였다. 동산은 인체 비율의 적정성을 반영하고 전체적으로 규사 주물로 제작하고, 얼굴과 허리띠, 손 등 세밀한 부분은 밀납 주물로 제작하였다. 동상과 좌대의 높이는 효충공원의 규모와 주변환경, 그리고 탐방객들의 시선 등을 고려하였다. 동상의 높이 2m, 좌대 1.5m, 바닥직경 6m이다. 3. 효충역사공원의 시비 효충사 경내에는 박제상의 충절을 기리는 시비가 세워졌다. 조선시대 관료들이 남긴 박제상 공을 추모하는 시는 돌에 새겨져 참배객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조선통신사가 양산을 거쳐갈 때 정사, 부사 등은 효충사를 찾아 참배하고 많은 추모 시를 남겼다. 적국인 일본으로 떠나는 통신사 일행은 박제상 공이 왕자를 구출하기 위해 왜국에 가서 목숨 걸고 행했던 충절을 되새기며 비장한 각오를 새롭게 하였다. 1) 눌지왕(訥祗王) 우식곡(憂息曲) 눌지 마립간(訥祗 麻立干 : 재위 417년~458년)은 신라의 제19대 임금으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최초로 마립간의 칭호를 사용한 임금이다. 신라본기에서 김대문의 말을 인용하길 “마립간이란 방언으로 말뚝을 이른다. 말뚝은 함조를 말하는데 관위에 따라 배치했다. 즉 임금의 말뚝을 위주로 신하의 말뚝들을 그 아래 벌였으니 왕호를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성은 김씨이며, 내지왕(內知王)이라고도 부른다. 포항중성리신라비에는 내지왕(乃智王)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아버지는 내물마립간이고, 어머니는 미추이사금의 딸인 보반부인(保反夫人)이며, 또는 내례길포부인(內禮吉怖夫人), 내례희부인(內禮希夫人)이라고도 전한다. 비는 실성이사금의 딸이다. 내물 이사금이 재위 37년인 392년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를 보냈는데, 401년에 귀국해 내물마립간에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실성이 이에 한을 품고 내물의 아들 눌지를 몰아내고 동생 복호와 미사흔을 각각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보냈다. 그 뒤 고구려 사람을 시켜 눌지를 살해하려 했으나 오히려 고구려의 지원을 받아 정변을 일으킨 눌지가 실성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처럼 그의 왕위 계승에 고구려의 힘이 작용하였다. 복호와 미사흔은 418년 박제상을 시켜 돌아오게 했다. 그러나 즉위 후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418년에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동생 복호(卜好)를 고구려에서 탈출시켰다. 또한 왜(倭)와의 화호(和好)를 위해 실성마립간 때 볼모로 보내졌던 동생 미사흔(未斯欣)도 귀국시켰다. 고구려와는 424년에 사신을 보내어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고구려의 평양천도 이후의 남진정책에 대항하기 위해 433년에는 종래 적대적 관계에 있던 백제와 동맹을 체결하였다. 440년 왜가 두 차례에 걸쳐 남쪽과 동쪽 변경을 침입, 백성들을 납치했다. 444년 음력 4월에는 왜가 보다 대규모로 쳐 와, 금성을 열흘간 에워쌌으나 군량이 떨어져 도망쳤다. 임금이 기병 수천을 거느리고 추격해 독산 동쪽에서 싸웠으나, 신라군 장병 절반이 넘게 죽었다. 임금이 패해 말을 버리고 산 위에 올라, 적들이 여러 겹으로 에워싸는데, 안개가 짙게 끼어 간신히 왜군의 눈으로부터 피해 도망칠 수 있었다. 눌지왕은 두 아우를 찾아 크게 기뻐하며 잔치를 베풀고 우식곡(憂息曲)이란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박제상의 죽음을 접하고 매우 슬퍼하였다. 우식곡은 동도악부(東都樂府) 7수 중의 하나이다. 『시경』에 상체화(常棣華)는 상체꽃(常棣花)을 의미하는데, 형제에 비유하였다. 상체꽃이 한데 다닥다닥 붙어있기 때문이다. 부상은 해 뜨는 곳에 있다는 나무 이름으로 동쪽에 위치한 왜국을 비유한 말이다. “常棣華隨風落扶桑 상체꽃 바람따라 부상에 떨어지니,/ 扶常萬里鯨鯢浪 부상 만리에 고래 물결 사납구나./ 縱有音書誰得將 비록 서신이 있은들 누가 가져올 수 있으랴!/ 常棣華隨風返鷄林 상체꽃 바람따라 계림에 돌아오니,/ 鷄林春色擁雙闕 계림의 봄빛이 쌍궐에 둘렀네./ 友于歡情如許深 우애의 즐거운 정 이렇게 깊구나.” 2) 김종직(金宗直) 양산의 징심헌에서 차운하다(梁山澄心軒 次韻) 김종직의 자(字)는 계온(季溫), 효관(孝盥), 호는 점필재(佔畢齋),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세조 때에 동료들과 함께 관직에 진출하여 세조 때부터 성종 때까지 동료, 후배 사림파들을 적극적으로 발탁하여 사림파의 정계 진출 기반을 다졌다. 1459년(세조 5년) 문과에 급제하여 출사하여 성종 초에 경연관, 함양군수(咸陽郡守), 참교(參校), 선산부사(善山府使)를 거쳐 응교(應敎)가 되어 다시 경연에 나갔으며, 승정원도승지, 이조 참판, 동지경연사, 한성부 판윤, 공조 참판, 형조 판서, 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재지사림(在地士林)의 주도로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사림파의 사조(師祖)의 한사람이자 중시조격이다. 그러나 세조의 즉위를 비판하여 지은 ‘조의제문’이 무오사화를 불러일으켰다. 김종직은 자신을 전별(餞別)하는 문인들을 ‘우리당’(吾黨)이라고 불렀는데, 김종직을 종주로 삼았던 정치세력이 사림(士林)이다. 이를 통상 붕당 정치의 시원으로 간주한다. 정여창, 최부(崔溥), 김굉필, 이목, 권경유, 김안국, 김정국, 김일손 등이 모두 그의 제자였고, 조광조는 김굉필의 제자로서 그의 손제자였다. 남효온과 남곤, 송석충, 김전, 이심원도 그의 문하생이었다. 그는 세조의 찬탈을 비판하고 이를 항우의 초 회왕 살해에 비유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기록에 남겼으나 그 자신은 1459년(세조 5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가 후일 비판을 받았다. 김종직(金宗直·1431~1492)은 연산군 때 무오사화로 부관참시당했다. 밀양에 전해지는 설화에 따르면, 이때 호랑이가 나타나 찢어진 시신을 지키며 몇 날 며칠을 슬퍼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시신을 거두어 이장하여 안장한 이후에도 호랑이는 무덤을 지키다 결국 그 앞에서 죽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가엾이 여겨 김종직 묘 옆에 호랑이 무덤을 따로 만들어주었다고 전해진다. 사망 직후 그에게는 문충(文忠)의 시호가 내려졌다가 1494년(성종 24) 문간(文簡)으로 개정되었다. 다시 1708년(숙종 34년) 원래의 시호대로 회복되어 문충으로 다시 복작되었다. “봄경치 아득하여 시야가 끝이 없는데,/ 나그네 정은 쓸쓸해라 도리어 가을 같구려./ 세간의 시비 분쟁 부질없는 일에 대해선,/ 맑은 강 마주해 앉아 시름을 말하지 말아야지.” 3) 김일손(金馹孫) 양산 징심헌 점필재 선생 운을 따라(梁山郡澄心軒 謹次佔先生韻) 김일손(1464년~1498년)은 조선 성종, 연산군 때의 문신이며 학자, 사관, 시인이다. 본관은 김해이며,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소미산인(少微山人)이다. 성종 때 문장실력을 높게 평가받아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활동했다. 이때 공문서인 사초에 왕실에 대한 유언비어, 전라도관찰사 이극돈(李克墩) 윤필상 등의 의혹 등 여러 소문들을 검증도 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사서에 기록해 물의를 빚었고, 거기에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세조를 비난한 목적으로 사초(史草)에 실었고 이것을 국문 도중에 드러나 반역죄로 사형당한다. 그는 주로 언관(言官)으로 있으면서 유자광(柳子光), 윤필상, 이극돈(李克墩), 임사홍 등 훈구파(勳舊派) 학자들과 학조 등 승려들의 부패와 비행을 앞장서서 신랄하게 지적과 규탄했다. 그의 가족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해 자손이 끊겼지만 큰 형 김준손(金駿孫)의 차남 김대장(金大壯)이 출계(出系)하여 그의 대(代)를 이었다. 중종반정 이후 신원되었고, 문민(文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승정원 도승지가 추증되었다. 충청남도 목천(木川)의 도동서원(道東書院), 경북 청도의 자계서원(紫溪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탁영문집』이 있다. “한 구비 긴 강은 만고에 흐르고/ 쓸쓸한 대잎은 몇 년이나 겪었나?/ 효충동 안에는 이제 주인이 없어./ 푸른 풀만 해마다 몰래 근심 자아내네.” 4) 서거정(徐居正) 양산(梁山) 징심헌(澄心軒) 서거정(1420년~1488년)은 조선 문종, 세조, 성종 때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강중(剛中), 초자는 자원(子元), 호는 사가정(四佳亭) 혹은 정정정(亭亭亭)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의 여섯 임금을 섬겼다. 1444년(세종 26) 문과에 급제하여 사재감 직장(直長)을 지내고 이조 참의, 사헌부 대사헌(1478년), 의정부 좌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1451년(문종 1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집현전 박사(集賢殿博士), 부수찬(副修撰), 응교(應敎)를 역임하였다. 1456년(세조 2) 문과중시에 급제, 이듬해 문신정시에 장원했다. 후에 공조참의(工曹參議)가 되어 1460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가서 그곳 학자들과 문장과 시(詩)를 논하여 해동(海東)의 기재(奇才)라는 찬탄을 받았다. 세조 때 『경국대전』, 성종 때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등 책의 편찬에 깊이 관여하였으며, 또한 왕명으로 『향약집성방』을 한글로 번역했다. 사후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경상도 대구의 구암서원에 배향되었다. 서울 지하철 7호선의 사가정역은 그의 호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푸르디 푸르고 영롱한 만 그루 대나무 숲에,/ 다시 경관 좋은 징심헌 한 채가 자리하였네./ 바람이 잔물결 불어라 잔물결마다 옥이요./ 성긴 발에 달빛 스며라 조각조각 황금일세./ 신선의 무리 불러서 함께 학 타고 가고파./ 좋은 시구를 큰 소리로 읊조리고 있노라니/ 난간 기대 생각에 젖는 걸 아는 이 없어라./ 천 갈래 이별의 시름에 밤은 깊어만 가네.” 5) 이사경(李士慶) 징심헌 차운(澄心軒 次韻) 이사경의 본관은 용인(龍仁). 자는 이선(而善), 호는 쌍곡(雙谷). 이집(李濈)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랑 이신충(李藎忠)이다. 아버지는 생원 이계인(李啓仁)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첨정(僉正) 이극강(李克綱)의 딸이다. 1590년(선조 23) 생원시에 합격하고, 1601년 식년문과에 장원하여 전적, 정언, 병조좌랑, 삼화현령 등을 역임하였다. 1606년 예조좌랑을 거쳐 정언, 지평이 되고, 1613년(광해군 5)에 성천부사로 나갔다가 선조가 임진왜란 때 피란하였던 관사의 화재로 파직되었다. 1618년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듬해 대사간에 승진하였다. 이때 인목대비(仁穆大妃)는 존호를 삭제당하고 서궁(西宮)에 유폐되어 있었는데, 경상도관찰사 윤훤(尹暄)과 충청도관찰사 이춘원(李春元)이 진선장(進膳狀)에서 폐모에 대한 존칭을 그대로 쓴 것을 묵인하여 준 것이 말썽이 되자 사직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이사경의 역량이 널리 인정되어 다시 승지, 병조, 예조의 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청렴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백세토록 맑은 강은 지금도 흐르는데,/ 다짐하고 님 떠난 지 몇 가을이 흘렀던가? /충신의 의기로써 죽음 길을 택하실 때,/ 대장부 굳은 마음, 집 시름도 잊으셨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만고충신 박제상 공, 그의 아들 박문량 공이 태어난 양산시에서 효충사를 정비하고 동상도 건립하는 등 추모사업을 계속해왔다. 효충사의 부지가 협소하여 추가적으로 토지를 매입하고 주차장을 증설하는 등의 시행착오를 겪었다. 앞으로 좀 더 보완사업을 펼쳐 양산을 대표하는 위인의 탄생지에 걸맞은 위상을 확립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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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성전투에서'송상현'동래부사를도운'조영규'양산군수/동남문화관광연구소장/관광경영학박사/심상도1. 조영규 양산군수와 아들 조정로의 정려각 임진왜란때 동래성 전투에서 전사한 조영규(趙英圭) 양산군수와 효자인 그의 아들 조정로(趙廷老)의 충효정신을 기리는 정려각이 전남 장성군 북이면 백암리에 있다. 조선시대 나라에서 내린 정려각으로 1985년 2월 15일에 전라남도 기념물 제78호로 지정되었다. 조영규(趙英圭, 1535∼1592)의 본관은 직산(稷山)이고 자는 옥첨(玉瞻)이다. 그는 장성군 백암리에서 조준(趙準)의 아들로 태어났다. 무과에 올라 용천부사 등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냈으며, 청렴결백의 목민관으로 유명하였다. 조영규는 1554년(명종 9년) 무과에 급제한 후 훈련원 초관(訓練院哨官), 사복시 주부, 제주판관, 무장현감, 영암군수, 용천부사, 낙안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 양산군수로 있으면서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과 함께 동래성을 수비하다가 전사하였다. 호조참판에 추증되고 양산의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그의 아들 조정로(趙廷老)는 아버지의 시신을 다 수습하지 못해 평생 죄인으로 자처하다 세상을 마쳤다. 사후에 선무랑(宣武郞) 빙고별검(氷庫別檢)에 증직되고 정려가 내려졌다. 이후 1669년(현종 10)에 송준길(宋浚吉)이 이들 부자의 일을 아뢰어 조영규 양산군수는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이 정려각은 그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왕명으로 건립되었고, 1849년(헌종 15년)에 중수되었다. 정려각은 앞면 2칸, 옆면 1칸의 맞배집이며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다. 안에는 충신 조영규와 효자 조정로의 명정 편액과 ‘조씨충효정려중수기(趙氏忠孝旌閭重修記)’가 있다. 조영규는 본관이 직산이며 명종 때에 무과에 급제하여 7곳의 수령을 거쳐 양산군수로 부임해 임진왜란을 당했다. 왜군이 밀려오자 경상좌병사 이각은 도망쳤으나 동래부사 송상현 공과 함께 동래성을 지키다가 장렬하게 순국하여 동래의 안락서원, 부산 충렬사, 양산 충렬사, 그리고 장성의 모암서원에 배향되었다. 직산 조씨는 고려말에 장성군 북일면 누태마을로 입향했다가 조영규 군수의 조부 때 장성군 북이면 백암으로 이거했는데 후손은 그곳에 3~4호 살고 있다고 한다. 충렬사는 조영규와 백수회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1696년(숙종 22) 양산군수 조무훈(曺武勛)에 의해 양산읍성 내의 동쪽에 세워졌다. 그후 1788년(정조 12)에는 영조 때의 양산군수 권만이 추가로 합향되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자, 1870~1873년 양산군수로 재임한 손상일(孫相馹)을 중심으로 철거된 충렬사 자리에 호조참판 조공비(趙公碑)를 세우고 치제(致祭)하였다. 일제강점기 동안 치제는 중단되고 조공비는 양산시 북부동 옛 양산군청 뒤 느티나무 고목 아래와 논밭에 버려져 있었다. 이 비석은 해방 이후 양산 춘추계(春秋稧)에 의해 다시 수습되어, 1949년 준공된 양산시 강서동 춘추원(春秋園)의 삼조의열단(三朝義烈壇)에 모셔져 있다. 삼조의열단은 현재 충렬사로 정비되어 있으며 경내에 삼조의열비가 있다. 증호조참판 조공비는 세 개의 비석 중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2. 임진왜란과 제승방략 임진왜란 때 조영규 양산군수가 동래읍성으로 달려가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과 함께 동래성을 수비하다가 전사한 이유는 조선시대 군사전략인 제승방략(制勝方略) 때문이었다. 전쟁 혹은 변란이 일어났을 때 각 지역의 수령이 소속 군사를 이끌고 거점 지역으로 이동하여 중앙에서 파견된 장수의 지휘를 받는 군사 전략이다. ‘제승(制勝)’이란 적을 제압하여 승리로 이끈다는 뜻이다. 조선 전기 국방 체제는 1457년(세조 3) 만들어진 진관체제(鎭管體制)였다. 진관체제는 병력 이동 없이 행정 단위에 따라 소속 지역을 지키는 전략이었기 때문에 많은 군사와 군비(軍費)를 발생시켰다. 또한 진관체제는 군사를 분산시키게 되므로 상습적으로 침입을 당하는 지역이나 군사 요충지를 선별하여 병력을 집중시키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조선 전기의 골칫거리였던 북방 여진족과 남해안 왜구와 벌이는 소규모 국지전에 대처하기에는 비효율적이었다. 전국을 군사지대화하고 방위망화했던 진관체제는 성립기반이 지나치게 광범위한 것으로 실제 유사시에는 오히려 무력함을 드러내고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이러한 무력함은 국가의 경제기반 등이 허약했고, 지방의 행정관인 문관 수령이 군사지휘권을 겸하게 됨으로써 군사를 잘 알지 못하여 국방에 무관심하게 되는 등의 부작용이 발생했다. 진관체제 아래의 정병과 수군 등은 정해진 기한의 복무를 마치면 농민으로 돌아와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으나 또한 요역(徭役)을 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요역은 국가가 백성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징발하는 수취제도이다. 요부(徭賦), 잡역(雜役), 호역(戶役), 역역(力役), 부역(賦役) 등이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이들에게 보인(保人)이 설정되기는 했으나 단위 보인의 수가 감소되고 있었으며 종래까지의 자연호 단위의 경제권을 위협하는 요소까지 있어 군사의 부담 능력을 더욱 가중시켰다. 보인은 군(軍)에 직접 복무하지 아니하던 병역 의무자로서 정군(正軍) 한 명에 대하여 두 명에서 네 명씩 배당하여, 실제로 복무하는 대신에 베나 무명 따위를 나라에 바쳤다. 조선 정부는 1510년(중종 5) 일어난 삼포왜란을 계기로 하여 전투가 벌어지는 거점 지역에 각 진관의 수령이 휘하 군사들을 이동시키고, 중앙 정부에서 보낸 군사 전문 지휘관의 지휘를 받는 전략, 곧 제승방략(制勝方略)의 방어 체제를 구축하였다. 조선 정부는 비전문가가 지휘하는 분산적 방어 시스템을 전문가가 지휘하는 집중적 방어 시스템으로 변화시킴으로써 변방의 국지전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같은 전면전에서 제승방략 체제는 매우 취약하였다. 집중적 방어 거점 지역이 함락될 경우 후방에서 방어선을 다시 형성할 방법이 없었으며, 중앙 지휘관이 전선에 도착하는 시간보다 적의 진격이 빠를 경우 전장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일본군이 삽시간에 수도를 함락시키는 것으로 현실화 되었다. 결국 임진왜란 이후 국방 체제는 제승방략 체제의 취약점을 보완하여 중앙군을 강화한 5군영과 지방군을 강화한 속오군으로 크게 변화하였다. 동래성 전투를 도운 양산군수 조영규, 경상좌병사 이각, 울산군수 이언함 등은 국방 전략인 제승방략에 의거하여 나라의 부름에 따라 동래성으로 갔다. 그러나 이들의 운명은 크게 달라졌다. 조영규 양산군수는 동래성에 가서 송상현 동래부사를 만난 후 양산에 계신 노모와 작별인사를 하고 오겠다고 약속하고 되돌아가 장렬하게 전사하여 양산을 대표하는 삼조의열로 추앙받고 있다. 반면 경상좌병사 이각은 송상현 부사에게 자신은 성밖에서 싸우겠다고 거짓말을 하며 살기위해 동래성 북문을 통해 달아났다. 동래부순절도에도 이각의 도주행각이 그려져 있어 비겁한 인물로 역사에 오점을 남겼다. 울산군수 이언함도 일본군에 포로가 되어 왜장이 선조 임금에게 주는 서찰을 받고 석방되어 임무도 수행하지 않고 오명을 남겼다. 3. 부산 충렬사 정화기념비 내용과 박정희 대통령의 관심 일제시대에는 동래 유림에 의해 봉행되는 충렬사 제향이 민족정기를 북돋운다고 하여 일제가 방해했기 때문에 보수하지 못하여 건물이 낡고 허물어져 갔다. 박정희 대통령 관심 덕분에 1976년부터 1978년까지 정화공사를 통해 성역화사업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였다. 1991년에는 임진왜란 때 동래부지역 전투에 참가하여 순절하거나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된 자 중에서 조사 미비로 누락된 66명에 대한 공적을 확인하여 13명을 추가로 모셨고, 1997년에 다시 3위, 2003년에 1위, 2006년에 1위를 각각 추가로 모셨다. 현재는 25,600평의 경내에 본전 외에 15채의 건물이 있으며, 93위(본전 89, 의열각 4)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매년 5월 25일에는 온 시민의 정성으로 제향을 올린다. 1978년 5월 이주홍 짓고 배재식 쓴 부산 충렬사 정화기념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왜적이 바다를 건너 침략해 침략해왔던 1592년 4월 13일은 우리 한민족으로서 천추에 잊지 못할 통탄의 날이 된다. 고려조 때에 몽고군이 우리 나라를 침공했고, 그 뒤 조선왕조 때에는 청군이 침략해 왔던 적이 있으나 임진왜란의 불행은 이들의 외침보다 몇 갑절이 더 뼈저리게 느껴지는 비극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경제정책의 빈곤 위에 당쟁으로 국론이 통일되지 못했고, 그로 인해 국방이 부실해졌던 까닭에 더욱 큰 희생을 당해야 했던 사실을 상기한다면 적에 대한 적개심과 아울러 우리 스스로에 대한 회한이 동시에 통감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맨 먼저의 적의 침공을 받은 부산지방의 성주와 백성들은 일치단결 최후까지 싸워 그 성과 함께 운명을 같이 했던 것이다. 부산이 없으면 동래가 없고 동래가 없으면 나라 전체가 어찌될지 모를 사정을 누구보다 절감했던 동래부사 송상현과 부산첨사 정발, 다대첨사 윤흥신은 적을 맞아 싸운 첫날에 각각 장렬한 전사를 했고 뜻을 같이한 양산군수 조영규, 교수 노개방, 교생 문덕겸 등도 나라의 편안에 승화되는 드높음을 몸으로서 통감하지 않고서야 어찌 군관민 남녀노소 모두가 한 덩어리 지어 목숨을 바칠 수 있었으며 칠년전쟁에 동래 수영에서 일어난 수많은 의병의 봉기가 이분들의 순절한 높은 뜻과 어찌 무관하겠는가? 적이 피신하라는 권유에도 응함이 없이 마지막 나라에 하직하는 북향요배하고 부친에게 글을 남겨 나라의 위급함에는 태산 같은 부모의 은혜도 뒤로 돌리지 않을 수 없음을 표한 뒤 태연자약하게 죽음에 나아간 송상현의 늠름한 태도 그대로 대의의 무거움 앞엔 개인의 목숨이 홍모같이 가벼운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희박한 곳에 나라의 번영을 생각할 수 없고, 나라의 안보사상이 미약한 곳에 나라의 태평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진리일 진데, 이곳에 충렬사를 세워 순국선열들을 추모해 왔음은 다름 아닌 이들 선열들의 충절을 만고에 기리려는 것이 어니와, 이번에 박정희 대통령의 분부로 문화공보부와 부산직할시가 경역을 크게 중수 확장하여 정화사업을 완수한 뜻도 이분 선열들의 충절을 국민의 호국정신으로 받들어 총화단결로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고 민족중흥의 역사적 대업을 이룩하려 함에 있는 것이니, 이제 우리는 선영의 영령에 부끄럼이 없게 그 막중한 은혜를 충성으로써 갚고 후손을 만대 반석위에 안주케 할 책임을 다하기 위해 우리 모두 가슴에 손을 얹어 멸사봉공 살신성인할 것을 굳게 맹세해야 할 것이다.” 4. 부산 충렬사 정화사업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관심 박정희 대통령은 1978년 7월 21일 부산 충렬사 정화사업 준공식에 참석, 테이프를 끊고 경내를 돌아본 뒤 관계자들을 격려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정화기념비 앞에 20년생 주목 한 그루를 기념식수하고 관리사무소에 들러 “충렬사를 새로 단장하느라고 수고가 많았습니다.”라고 직원들을 칭찬하였다. 박대통령은 최석원 부산시장의 안내로 충렬사 사당에 국화 화롱을 헌화한 뒤 분향재배하고 참예록에 서명했다. 박대통령은 충렬사 본전 안을 돌아보고 임진왜란 때 분전한 정운 장군과 무명전사들의 위패들도 함께 모신 것은 잘한 일이라고 치하했다. 박대통령은 충렬사 건축내용을 살펴보고 “이제 이런 사적의 건축기술이 상당히 좋아졌으며 경내의 축대도 잘 쌓았습니다”라고 말했다. 박대통령은 의열각에도 분향재배하고 기념관에 들러 임진왜란 때 분전 순국한 송상현 동래부사 등의 유품과 임진왜란 기록화 등을 돌아보고 기록화를 그린 서울대 정창섭 교수, 부산대 이의주 교수에게 “그림들이 잘되었으며 앞으로 수백 년, 수천 년 뒤에는 명화로 남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박대통령은 안락서원의 중심건물이었던 소행당의 한국식 마루가 넓은 것을 보고 “집을 지을 때 한국식으로 방과 마루를 이렇게 지으면 멋이 있습니다” 하면서 “집 크기가 옛날 집과 꼭 같습니까?”하고 묻기도 했다. 박대통령은 정화사업기념비(무게 18t)가 둥근 북 모양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이 기념비를 조각한 한인성 부산대 교수에게 ”기념비 모양을 둥글게 한 것은 좋은 착상이고 조각도 잘 되어 있군요.“하고 격려했다. 5. 부산 충렬사 정화사업에 대한 비화 부산시보(2012년 11월 29일)에 충렬사 정화사업에 관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충남 아산의 현충사 성역화로 전 국민의 이목이 아산으로 집중되던 때가 있었다. 1975년 5월 25일, 당시 부산시 문화계장이던 김부환(73) 씨는 부산 충렬사 제향을 마친 뒤 시장을 모시고 오는 차 안에서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시장님, 일년에 4억 원씩 3년간 12억 원만 주시면 아산 현충사 못잖게 충렬사를 정화해서 부산시민 정신의 구심점으로 삼도록 하겠습니다.“ 당시 부산시장은 박영수 씨. ”이 사람아, 내가 부산시장을 천년, 만년 한단 말인가?“ 그 한마디로 정화사업은 물 건너간 듯싶었다. 문화계장을 3번째 하고 있던 김부환 씨는 부산시에서는 만년 문화계장을 못 벗어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듬해 8월 자청을 해서 상공부 소속 마산수출자유지역으로 근무처를 옮겼다. 5개월여가 지난 1977년 1월 느닷없이 박 시장이 그를 불렀다. ”이 사람아, 상공부에서 국가에 충성하나, 부산시에서 충성하나 똑 같은 것 아닌가? 자네는 사학과를 나와서 문화재 업무에 흥미가 있고, 언젠가 나에게 12억 원만 주면 충렬사를 정화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15억 원 예산을 확보했으니 나를 좀 도와주게.“ 부산시의 유능한 사무관들을 제쳐두고 ”나를 좀 도와주게!“ 하는 겸손한 시장의 뜻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상공부 근무 6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부산시로 돌아왔다. 그것도 신설된 부산시 문화재과장으로 승진해서 돌아오니 벌집을 쑤셔놓은 듯 시끄러웠다. 지방행정사무관으로 승진한 지 2년이 겨우 지난 시점에 과장 승진이었으니 주위의 따가운 질시와 견제가 상상을 초월했다. 온갖 질시와 견제 속에서 충렬사 정화작업이 시작됐다. 지금 같으면 시민 반대에 막혀 꿈도 못 꿀 일이었지만 충렬사 주변의 교회와 집들을 철거하고, 부지 7만 6천 33㎡를 확장했다. 난제가 첩첩산중이었다. 무엇보다 공사감독은 도시계획국장, 문화재 고증은 문화재과장 책임 아래 시행되는 것이어서 국장과 과장 사이에 사사건건 부딪히는 일이 많았다. 일부 국장, 구청장들은 서로 잘 보이려고 시장에게 아부성 제안이나 건의를 늘어놓기 일쑤였다. 일일이 해명하고 설득하느라 일은 쉽사리 진척되지 않았다. 정확한 지적은 열 번, 백 번이라도 고쳐야 하겠으나 그렇지 못한 지적이 문제였다. 더러는 귀가 솔깃해진 시장까지 설득하고 해명하자니, 이게 무슨 짓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입술을 깨물어가며 처음 해결한 일은 기념관 안에 전시할 기록화로 100호 정도 크기의 16점을 제작하는 것으로 조잡하게 계획된 것을 한국에서 가장 큰 3천호 크기 2점과 300호 크기 4점으로 압축했다. 기존 계획을 뒤집는 것인데다 예산까지 더 드는 것이어서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결재를 올려도 결재가 나지 않았다. 견디다 못해 라인을 생략하고 시장 결재를 바로 받아 시행에 들어갔다. 윗분들에게는 그것이 두고두고 눈엣가시였다. 점잖기로 소문난 김학중 당시 부시장 앞에서도 호된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대 미대 정창섭 교수에게 의뢰해 ‘부산분전순국도’, 부산대 이의주 교수에게 의뢰해 ‘동래보국충정도’를 완성했다. 당시 그린 그림들은 지금도 한국기록화 역사상 가장 큰 대작으로 충렬사에 자리 잡고 있다. 공사가 한창일 때 최석원 시장이 부임했다. 부임한 지 두 달이나 되었을까. 어느 날 시장께서 급히 찾는다는 전갈을 듣고 바람처럼 달려갔다. ”자네 눈에 색맹 있나?“ 밑도 끝도 없이 질문이 쏟아졌다. 어리둥절해 눈만 껌벅이고 있는데, ”시장이 묻는데 대답을 안 하느냐“고 재차 윽박지르는 바람에 한다는 대답이 지금 생각해도 빙긋이 웃음이 난다. ”예, 최근에 색맹검사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중고등학교 입학시험 칠 때 색맹검사를 했는데, 그때는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럼 충렬사 정당에 청기와를 올린다고 해놓고 왜 옥기와를 올렸소. 그리고 기와는 검어야 하는데 왜 희다 검다 하는 불량품을 사용했소. 당장 기와를 교체하시오.“ 어디서 또, 무슨 말을 들은 것이 분명했다. 시장을 이해시키기 위해 가마에서 기와가 구워지는 과정, 고려청자의 빛깔, 문화재 보수공사에 쓴 청기와 견본과 사진첩을 만들었다. 기와는 보통 800~900도 사이에서 구우면 검은색이 되지만, 더 잘 굽기 위해 1천 100도로 열을 가하면 은회색이 나오고, 은회색 기와가 10년 이상 세월이 흐르면 검어지게 된다는 보고서를 올려도 막무가내였다. 기와를 교체하라는 불호령뿐이었다. 5천만 원이 넘는 관급 기와를, 그것도 하자가 없는데 무슨 재주로 교체를 한단 말인가. 2주에 한 번씩 개최하는 대책회의 때마다 터지고 깨졌지만 묘책이 없었다. 주위에서는 위로는커녕 한술 더 떠서 교체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쪽으로 의견을 몰아갔다. 골머리를 싸매고 있던 1978년 1월, 오후 4시쯤 진해 별장에 계시던 박정희 전 대통령께서 사전예고도 없이 충렬사 현장으로 시찰을 나온다는 전갈이 떨어졌다. 서둘러 시장님과 브리핑 차트판을 들고 안락로터리를 돌아 대통령께서 하차하는 지점에 대기했다. 박 대통령이 탄 차가 시장이 서 있는 바로 앞에 섰다. 대통령께서는 한 발은 땅에, 한 발은 차 안에 두고 미처 내리지도 않은 상태에서 충렬사를 쳐다보시더니 ”야, 충렬사 기와 잘 입혔다“고 첫 말씀을 던졌다. 그 뒤의 대책회의부터는 기와 이야기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3개월의 고심이 눈 녹듯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정에서 당파싸움을 하며 국방에 대한 대비를 소홀히 하여 국토는 유린되고 백성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난세에 충신이 나온다고 동래부사 송상현 공, 조영규 양산군수는 압도적인 숫자의 왜군에게 맞서며 용감하게 싸우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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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현 동래부사의 순절에 의해 일어난 구국의 물결 - 동남문화관광연구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1. 동래읍성의 군관청과 장관청 군관청(軍官廳)은 부산광역시 동래구 충렬대로 345 충렬사 경내에 있다. 군관청(軍官廳)은 조선 시대 동래부(東萊府) 청사 건물의 하나로, 군관들의 집무소로서 부산 지역에 남아 있는 대표적 관아 건물이다. 동래부는 일본과 대치하는 국방상의 요충지로 인식되어 1655년(효종 6)에 동래 독진(東來獨鎭)이 설치되었다. 동래 독진은 양산군 및 기장현(機張縣) 소속의 군사까지도 통합하여 지휘할 수 있게 한 군사 조직으로, 동래부사가 동래 수성장(東萊守城將)을 겸임하여 동래 독진의 군사를 지휘하고 군사 사무를 처리하였다. 동래 지역의 관방으로서 군사적인 입지가 강화됨에 따라 군사의 수도 늘어났으며, 군인들의 집무소인 무청(武廳)도 증가하였다. 충렬사 경내 충렬사관리사무소 사무실에서 동래읍성지(東萊邑城址) 동장대로 올라가는 길목 좌측에 군관청이 자리하고 있다. 동래 장관청(東萊 將官廳)은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로 면적은 보호구역 14필지 1,171㎡, 1972년 6월 26일에 지정되었다. 소재지는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 94번길 36-6 (수안동)이며, 옛 동래읍성 안에 있다. 이 건물은 조선후기 동래부 청사 건물의 하나로 이곳 군장관(軍將官)들의 집무소였다. 동래부는 일본과 인접하고 있는 국방상의 요충으로서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영향으로 군사적 요충지인 동래의 중요성이 더욱 높아짐에 따라 중요시되었다. 1655년(효종 6년)에 독진(獨鎭)으로 승격하였다. 군사상의 지위가 강화됨에 따라 군관의 기관이 설치되었다. 부사의 경찰과 군사적인 속료에 군교(軍校)가 있다. 군교는 장관(將官), 군관(軍官), 포교(捕校)를 말한다. 1669년(현종 10년)에 동래부사 정석(鄭晳)이 창건한 후, 숙종 연간에 두 차례 중건되었다. 1675년(숙종 1년)에 동래부사 어진익이 중건하였고, 1680년(숙종 6년)에는 동래부사 조세환이 중건하였다. 1706년(숙종 32년) 동래부사 황일하(黃一夏)가 향청(鄕廳)이 있었던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상량문에 의하면 1815년(순조 15) 3월에 현재 위치에 옮겨 온 것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모습이 바뀌어 본채는 1998년 2월에 해체, 보수를 통해 원래의 모습을 거의 되찾았으나, 행랑채는 변형된 모습 그대로 있게 되었다. 건물의 양식은 정면 7칸, 측면 2칸 규모의 ‘ㄱ’자형으로 도리 끝에 접시받침을 한 집이다. 처마는 부연(浮椽)이 있는 겹처마이며, 지붕은 팔작(八作)지붕이다. 부속된 행랑은 정면 7칸, 측면 1칸의 민도리집이다. 이 건물은 부산에 남아 있는 조선 후기 관아 건물로 당시의 건축 양식을 엿볼 수 있는 가치 있는 집이다. 여러 차례에 걸친 구조의 개조와 무리한 맞춤으로 변형이 심하여 1998년 전면 해체, 복원하였다. 현재 동래기영회(東萊耆英會)에서 관리, 사용하고 있다. 2. 동래읍성 복원의 의미와 문제점 동래읍성 서장대는 부산시 기념물 제5호로 1734년(영조 10년) 최명상 부사가 세운 15개의 보루 중 하나인 것으로 추정되나, 역사 기록에는 1870년 정현덕 부사가 세웠다고 전해오는데 1937년 동래읍성과 함께 철거 방치되다가 지난 1979년 정화사업시 북문, 동장대, 북장대와 함께 옛 모습으로 복원된 바 있다. 2001년 8월 22일 새벽에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서장대가 소실되었다. 2002년 8월 9일 동래읍성지 내에 있는 서장대에서 서장대 중수 상량식을 거행하고 복원공사를 하였다. 문화재는 복원도 중요하지만 사후 관리를 철저히 하여 앞으로 화재로 인한 피해를 미연에 방지할 필요가 있다. ‘동국여지승람(1486) 읍성조’에 인용되고 있는 이첨 기사에 의하면, ‘원구 박무가 1387년(우왕 13) 8월 19일 성축에 착수하여 한 달 이상 걸려서 완공하였다. 당시 읍성의 석축은 둘레가 3,090척, 높이 13척으로 우물이 6개가 있었다고 한다.’ 이후 동래읍성은 1592년(선조 25) 임진년 4월 14일에 송상현(宋象賢) 동래부사가 관민 합세하여 왜군을 막다가 중과부적으로 함락당했다. 최후의 순간까지 처절하게 항쟁하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순절하였다. 동래읍성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보수를 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그후 1731년(영조 7) 당시의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이 관찰사와 역사를 발의하여 과거의 성보다 훨씬 규모가 큰 읍성을 쌓게 되었다. 1735년에는 각 5칸으로 된 보루 15개소와 인화문을 건립하였고, 1870년(고종 7)에는 동래부사 정현덕이 일본의 침입에 대비하여 다시 성벽과 문루를 수축하였다는 사실이 전해지고 있다. 현대에 들어서서 1979년부터 보수에 착수하여 성곽, 북문, 옹성, 동장대, 서장대, 여장 등을 복원한 바 있다. 동래읍성에 관한 상세한 역사 기록이 없기 때문에 복원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미 복원한 것도 역사적 고증에 소홀한 것이 많아 비판을 받고 있다. 인생문 복원은 공사업자의 부실공사, 공무원의 감독 소홀로 복원한 성벽이 무너지는 사고도 있었다. 동래구청 청사를 신축하는 과정에서 동래읍성과 유적이 발굴되어 논란이 되었으나 유적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는 것으로 문화재청의 허락을 받았다. 부산시의 시민단체들은 이러한 조치에 반대 성명을 발표하였다. 3. 동래 왜성 터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 및 안락동에 있는 임진왜란 때 축조된 왜군이 쌓은 성 터이다. 동래 왜성은 조선 후기 축조된 동래읍성의 동장대(東將臺)를 중심으로 충렬사 경내 대부분으로 현 동래읍성의 동남쪽에 해당된다. 동래 왜성의 중심부는 동래구 칠산동 산2번지에 있는 동래읍성 동장대를 중심으로 동남쪽 능선이 이어지는 충렬사 정문까지 범위에 들어가며, 동래 왜성의 외곽부는 동래구 안락동 20번지에 있는 에스뻬랑스 예식장 주변에 위치한다. 『동래부지(東萊府誌)』 ‘산천조’에는 “증산(甑山)은 동래부 동쪽 2리에 있으며 임진왜란 때 왜인(倭人)이 성을 쌓고 수비했는데, 지금[영조 16년(1740년)]은 반이나 허물어졌다. 성 위에는 장대(將臺)가 있으며 아래에 성황사(城隍祠)가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성이 동래 왜성으로 조선 후기 동래읍성을 축성한 직후에는 동래 왜성의 흔적이 잘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당시 요시카와 히로이에(吉川廣家)가 성을 쌓고 수비하였다고 한다. 이곳은 동래를 비롯하여 해운대, 기장, 구포가 한눈에 조망되는 지역으로 당시 온천천과 수영강을 통하여 바다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동장대를 중심으로 하여 가운데 골짜기를 두고 서남쪽으로 하강하여 시내로 내려가는 동래읍성의 성벽과 동남쪽의 능선을 따라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곳곳에 왜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현재의 동장대에 올라서 부산시가지를 바라보면 해운대 방면의 고층 건물, 광안대교 등이 보인다. 대체로 동래읍성의 안쪽에 해당되는 서쪽은 자연 경사면을 이루고, 60m 지점의 동쪽에는 수직상(垂直狀)의 해자[수굴(竪堀)] 서너 곳이 확인되며 서북쪽에는 큰 골짜기가 형성되어 있다. 동장대가 복원되어 있는 곳이 동래 왜성 중심부의 본환(本丸 : 왜성 내에서 중심이 되는 공간)였던 곳이다. 북쪽으로 연결된 능선에 소규모의 공간인 소곡륜(小曲輪)이 단을 이루며 연속되어 있다. 정상부에서 동북쪽으로 약간 내려오면 치성(雉城 : 성벽에 붙은 적을 사살하기 위하여 원형이나 방형으로 성벽에 붙여 쌓은 성)이 있는데, 치성의 동북쪽으로 동래 왜성의 벽이 시작되는 부분에도 폭 5~8m의 V자 형의 수직 해자 3곳이 확인된다. 동장대의 북쪽에는 3~4개의 곡륜(曲輪)이 확인되며 동쪽으로는 수굴 3곳이 확인된다. 동장대의 남쪽 군관청 쪽으로도 단상(段狀)의 곡륜이 다수 확인되며, 서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에도 가늘고 긴 곡륜이 양호하게 남아 있다. 외곽부의 경우는 교회를 비롯한 주택들이 들어서면서 대부분 파괴되었다. 중심부가 있었던 동장대 주변의 왜성 벽은 조선 후기 동래읍성을 신축하면서 대부분 훼손되어 그동안 그 소재조차 확인되지 않았으나, 토축(土築)의 곡륜이 충렬사 내에 대부분 잔존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지도를 보면 안락 로터리 서남쪽 작은 언덕에도 외곽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79년 동장대 복원을 위한 발굴 조사에서 1568년을 일컫는 융경 2년 명(隆慶二年銘)의 막새기와가 출토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동래 왜성을 함락시킨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거성(居城)인 구마모토(熊本)의 무기시마죠(麥島城)에서 출토된 막새기와와 동일한 와범(瓦笵) : 기와 제작 틀)으로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이곳에서 일본으로 가져간 기와를 모본(模本)하여 일본 성에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동장대에서 출토된 막새기와를 보아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도자기뿐만 아니라 기와까지도 약탈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일본 내 막새기와의 변천 과정을 추론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4. 수안역의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 2005년 4월 부산교통공단[현 부산교통공사]의 부산 지하철 3-2호선(현재 부산 도시 철도 4호선) 수안역 건설 공사 중 동래읍성 해자가 발견된 뒤 2005년 7월부터 2008년 8월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하였다. 그 결과, 해자에서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 전투에서 희생된 약 100명 안팎 사람들의 뼈와 다양한 무기 등이 출토되었다. 동래읍성 백성들도 힘껏 싸웠다. 백성들은 낫과 도끼 등 농기구를 들거나 맨주먹으로 왜군에 맞섰다. 아녀자들은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뜯어 왜군에게 던졌다. 왜군은 동래읍성 백성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해자 밑바닥에선 남자 59명, 여자 21명, 어린이 1명 등 모두 81명의 뼈가 발굴되었는데 8명의 두개골에선 칼에 베이거나, 활이나 총, 둔기 등에 맞은 흔적이 드러났다. 뒤쪽에 구멍이 뚫린 20~40대로 추정되는 남자의 두개골, 두 차례나 칼로 잘려나간 흔적이 남아 있는 20대 여성 두개골 등이 발견됐다. 총이나 활이 관통한 5살가량 어린아이의 두개골도 나왔다. 동래읍성의 처절한 전투 소식은 조선 백성들의 피를 끓게 했다.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 왜군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동래는 ‘충절의 고장’이 됐다. 발굴을 담당한 경남문화재연구원은 문화재청과 협의해 지하철 노선 변경을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건의했다. 이에 대해 부산교통공사는 30% 이상의 공정을 완료한 노선을 변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유물을 적극 보존할 것을 약속했다. 부산교통공사는 발굴 지도 위원, 부산광역시 등과 의논하고, 문화재청의 협조를 받아 출토 유물 등의 전시관을 수안역 안에 짓기로 한 뒤 2011년 1월 28일 공사를 끝내고,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을 개관하였다. 이로써 부산 도시 철도 4호선 수안역은 임진왜란 동래읍성 전투의 역사(歷史)가 있는 역사(驛舍)가 되었다.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은 1,029㎡ 규모로 주 전시, 기획 전시, 해자 단면 연출, 전사 그래픽 연출이라는 크게 4개의 전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 전시 공간에는 동래읍성 축소 모형, 갑옷, 큰칼, 창, 활, 화살 등 출토 유물의 복제, 복원품, 발굴 현장을 그대로 재현한 동래읍성 해자, 임진왜란 역사와 동래읍성 전투 상황을 그린 「동래부 순절도」와 같은 유물 등 임진왜란 관련 자료 등을 전시하고, 무기 체험실도 갖추고 있다. 시뮬레이션을 이용해 임진왜란 당시의 무기를 실제로 사용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무기체험실도 운영된다. 조선왕조실록 등 문헌으로 그 존재만 알고 있었던 조선시대 비늘갑옷도 역사관에 전시하고 있다. 해자 단면 연출 공간은 개찰구를 통과하면 바로 앞쪽에서 볼 수 있다. 전사 그래픽 연출 공간은 동래읍성 전투를 해자 발굴 유물과 사료를 통해 재연한 동영상을 보여주는 영상실로 되어 있다. 이밖에 승강장 벽면에는 「임진전란도(壬辰戰亂圖)」, 「동래부 순절도」, 『동래 부사 접왜사도(東萊府使接倭使圖)』가 벽돌로 설치되어 있다. 현재 역사관은 거리두기로 폐쇄되었다. 5.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본 송상현 동래부사의 충절 조선왕조실록에 송상현 동래부사의 순절에 대한 조정 대신들의 논의가 상세히 나온다. 선조실록 59권, 선조 28년 1월 12일 을유 2번째 1595년 기사에 송상현 동래부사의 포상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왜군의 추장이 절의를 칭찬했다는 내용이다. ‘주강(晝講)하고, 왜와의 강화 문제를 논의하다.’ 참찬관 오억령(吳億齡)이 아뢰기를, “인심이 무너져서 군부를 위해 죽을 사람이 없는데, 동래 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賢)은 성이 함락되자 절의를 위하여 죽었으므로 적의 추장까지도 칭찬하였으니, 포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방문하여 처리하게 했다.” 하였다. 【송상현은 비록 활 쏘고 말 타는 재주는 있었으나 본디 선비의 명망은 없었는데 하루 아침에 조용히 의리를 위해 목숨을 끊기를 이처럼 고결하게 하였으므로 비록 흉적이라 하더라도 역시 그를 의롭게 여긴 것이다. 청성(靑城) 이시랑(李侍郞) 한 사람이 있었으나 이보다 낫지는 않았다.】 선조실록 45권, 선조 26년 윤11월 14일 갑오 2번째 1593년 기사에 ‘임금이 남별궁에 나아가 유성룡을 인견하고 중국 사신에 관한 일 등을 의논하다’ 상이 남별궁(南別宮)에 나아가 막차(幕次)에서 영의정 유성룡을 인견하였는데, 도승지 심희수(沈喜壽), 주서 남이신(南以信), 대교 김상준(金尙寯), 검열 박동선(朴東善)이 입시하였다. “부산이 함락되자 첨사 정발은 힘껏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이튿날에 동래도 함락 되었는데,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 교수(敎授) 노개방(盧蓋邦), 양산 군수(梁山郡守) 조영규(趙英珪) 이하 죽은 장관(將官), 군민(軍民)이 수만여 인입니다. 밀양 부사(密陽府使) 박진(朴晉)이 군사를 거느리고 양산·밀양 사이에서 잇따라 싸웠으나 모두 패하고 밀양도 함락되었습니다. 그때 적봉(賊鋒)이 매우 날카로와 길을 곱잡아 나아가니, 인심은 놀라서 동요되고 열진(列鎭)은 미처 서로 구원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4월 14일 계묘 1번째 1592년 기사에 ‘14일 왜적이 군사를 일으켜 부산진을 함락시켜 부사 정발과 송상현이 전사하다.’ 동래 부사 송상현은 적이 바다를 건넜다는 소문을 듣고 지역 안의 주민과 군사 그리고 이웃 고을의 군사를 불러 모두 몰고 성에 들어가 나누어 지켰다. 병사 이각(李珏)도 병영(兵營)에서 달려왔으나 조금 지나서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겁을 먹고 어쩔줄 모르면서 핑계대기를 ‘나는 대장이니 외부에 있으면서 협공하는 것이 마땅하다. 즉시 나가서 소산역(蘇山驛)에 진을 쳐야 하겠다’고 하였다. 상현이 남아서 같이 지키자고 간청하였으나 그는 따르지 않았다. 성이 마침내 포위를 당하자 상현이 성의 남문에 올라가 전투를 독려했으나 반일(半日) 만에 성이 함락되었다. 상현은 갑옷 위에 조복(朝服)을 입고 의자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도왜(島倭) 평성관(平成寬)은 일찍이 동래에 왕래하면서 상현의 대접을 후하게 받았었다. 이때에 이르러 그가 먼저 들어와 손을 들고 옷을 끌며 빈 틈을 가리키면서 피하여 숨도록 하였으나 상현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적이 마침내 모여들어 생포하려고 하자 상현이 발로 걷어차면서 항거하다가 마침내 해를 입었다. 성이 장차 함락되려고 할 때에 상현은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손수 부채에다 ‘포위당한 외로운 성, 달은 희미한데 대진의 구원병은 오지 않네, 군신의 의리는 중하고 부자의 은혜는 가벼워라[孤城月暈 大鎭不救 君臣義重 父子恩輕]’고 써서 가노(家奴)에게 주어 그의 아비 송복흥(宋復興)에게 돌아가 보고하게 하였다. 죽은 뒤에 평조신이 보고서 탄식하며 시체를 관(棺)에 넣어 성 밖에 묻어주고 푯말[標]을 세워 식별하게 하였다. 상현에게 천인(賤人) 출신의 첩이 있었는데, 적이 그를 더럽히려 하자, 굴하지 않고 죽었으므로 왜인들이 그를 의롭게 여겨 상현과 함께 매장하고 표(表)를 하였다. 송상현은 기국(器局)이 탁월하였으며 시(詩)를 잘하는 것으로 이름이 났다. 경인년에 간관(諫官)이 되고, 신묘년에 부사로 나갔는데, 실상은 배척당한 것이었다. 갑오년에 병사(兵使) 김응서(金應瑞)가 울산(蔚山)에서 청정(淸正)을 만났을 때 청정이 그가 의롭게 죽은 상황을 갖추어 말하고, 또 집안 사람이 시체를 거두어 반장(返葬)하도록 허락하는 한편 경내를 벗어날 때까지 호위하여 주었는데, 적에게 함락된 유민들이 길에서 옹위하여 울며 전송하였다. 이조 참판에 추증하고 그의 아들 한 사람에게는 벼슬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동래부사 송상현 공, 조영규 양산군수, 동래교수 노개방, 동래읍성의 군인, 일반 백성 등이 왜적에 맞서 장렬하게 순절함으로써 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고, 의병이 봉기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송상현 공의 순국은 백성들의 의분을 자극하여 구국의 물결이 일파만파로 번져나가게 하였다. 왜군의 잔악성은 수안역 지하철 공사장인 과거 동래읍성 해자에서 발굴된 유골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외적의 침략을 받아 의연하게 싸운 송상현 동래부사를 비롯한 군인, 관리, 백성들의 우국충절은 영원히 기려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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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현 동래부사와 동래읍성, 동남문화관광연구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1. 동래읍성의 역사 동래읍성지(東萊邑城址)는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과 안락동, 명륜동, 칠산동, 명장동 일대에 있는 조선시대 동래부의 행정중심지를 둘러싸고 있었던 읍성이다.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호로 지정되었다. 역사적으로 삼한시대부터 동래에는 거칠산국, 내산국, 장산국, 독로국 등으로 불린 작은 국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초의 동래성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에 나오는 1021년에 동래군의 성을 수리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동래부는 대일 외교상 중시되는 지역으로 관아의 규모도 크고, 격식이 높았다. 정3품의 부사가 재임하는 왜적 방어의 제1관문이었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산진성과 함께 일본군의 1차 공격목표가 되어 동래부사 송상현을 위시한 군관민의 장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최대 격전지이기도 하다. 송상현 공의 충절 때문에 동래읍성은 역사에 찬란하게 기록되었다. 동래읍성은 충렬사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동래읍성 북문, 북장대, 서장대는 출입이 자유로우나 동장대는 충렬사를 통해 들어가야 한다. 동장대는 인생문에서 올라가도 되지만 일요일에는 개방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이후 부분 보수되었던 성을 1731년에 동래부사 정언섭이 나라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그 규모를 훨씬 크게 고쳐 쌓았다. 이때의 성이 지금 흔적으로 남아 있는 읍성의 기원이다. 증축된 성의 규모는 성곽의 둘레가 약 3.8km였다. 읍성에는 동문, 서문, 남문, 북문, 인생문, 암문이 있었고, 각 문에는 문루가 있었다. 동문에는 지희루, 서문에는 심성루, 남문에는 무우루, 암문에는 은일루가 각각 있었다. 중요한 문루였던 남문에는 익성을 두었는데, 앞쪽의 세병문과 뒤쪽의 주조문을 둔 이중 구조로 되어 있었다. 남문에는 양 날개가 달린 듯 좌우로 뻗은 성벽인 익성이 있고, 나머지 3개의 문에는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튼튼히 지키기 위해, 성문 밖으로 원형이나 방형으로 쌓은 옹성을 두어 적으로부터 성을 방어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시가지 정비계획 등으로 평지의 성은 철거되고, 마안산을 중심으로 산지에만 성곽 모습이 남았다. 최근 부산광역시에서 일부 성곽과 성문을 복원하였다. 성내에 북문, 동장대, 서장대, 북장대, 인생문이 복원되었고 성벽도 부분적으로 복원하고 있다. 충렬사 뒷산에서 마안산을 거쳐 동래향교 뒷산까지의 구릉지와 현재의 동래 시가지 중심지역인 평탄지를 일부 포함하는 지세에 전형적인 평산성(平山城) 형식으로 쌓았다.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춘 대한민국에서 대표적인 읍성이다. 일반적으로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 행정적인 기능을 함께하는 성을 말한다. 동래읍성은 마안산을 거쳐 구릉지와 동래 시가지의 평탄한 지역을 포함하여 쌓은 읍성으로, 고려말에 축조되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현종 12년(1021)에 동래읍성을 수리하였으며, 그 뒤 우왕 13년(1387)에 왜구를 막기 위해 동래성을 크게 고쳐 쌓아 둘레가 3,090자, 높이 13자라고 전한다고 기록되었다. 왜적 방어의 제1관문인 이 성은 조선시대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부산진성과 함께 왜적의 1차 공격목표가 되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임진왜란 이후 방치되었던 것을 조선 영조 7년(1731)에 다시 증축하여 당시 규모가 둘레 1,729자였고, 4곳에 문을 만들었다. 부산 동래읍성 6개 문 중 하나인 '인생문(人生門)'의 성곽 일부가 2005년 3월 복원되었으나 부실공사로 10년 만인 2015년 9월 17일 붕괴되었다. 부실 공사로 무너진 동래읍성 인생문이 조선시대에 제작된 설계도 ‘축성계초’를 활용해 2017년 9월 복구되었다. 동래읍성을 답사해보니 공원처럼 잘 꾸며져 있어 산책과 등산하기에 좋았다. 동래읍성 성곽 옆으로 편백나무 숲이 울창하게 조성되어 있고, 황토길도 있어 많은 부산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편백나무 숲길에는 시비도 있고, 과거의 인물에 대한 스토리텔링이 잘 되어 있어 걷는데 지루하지 않았다. 송상현 동래부사라는 역사적 위인 덕분에 동래읍성, 동래사적공원은 부산시민의 자긍심을 높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동래읍성 북문 앞에는 조선 세종 때 과학자인 장영실의 이름을 딴 장영실과학동산, 동래읍성역사관이 있어 역사, 교육 투어에 알맞은 곳이었다. 동래읍성축제는 동래구 주관으로 매년 10월 동래읍성 주변에서 개최되는 역사체험형 마을축제, 지역축제, 역사축제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동래성을 공격할 때,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1551~1592)과 성민들이 왜적에 맞서 결사항전하던 당시의 전투상황을 재현하고 읍성의 생활상을 직접 체험하는 역사체험형 축제이다. 송상현 동래부사는 동래읍성축제를 통해 부산시민들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 있다. 2. 임진왜란 때 페허가 된 동래성을 수축한 기록인 내주축성비 내주축성비(萊州築城碑)는 1731년(영조 7년)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이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된 동래읍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성을 고쳐 쌓은 내력과 동원 인원, 규모 등을 적어 건립하였다. 비의 크기는 높이 270㎝, 너비 107㎝로 큰 규모이다. 비석의 머리 부분인 이수(螭首)에는 한 쌍의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으며, 재질은 화강암으로 기단 부분인 비대(碑臺)에는 연꽃무늬가 소박하게 양각되어 있다. 비석 주위에 주춧돌이 남아 있어 비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었다. 내주축성비는 조선 시대 동래성 연구의 가장 정확한 자료가 되는 동시에 조선 후기 성축사(城築史)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조선 후기 국방사 및 지역사 연구에 가치가 있는 문화재로 평가된다. 일제강점기 때 금강공원으로 옮겨진 내주축성비와 이섭교비가 제자리로 되돌아왔다. 금강공원 내 케이블카 탑승대에서 산 쪽으로 200여 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들 비석은 일제강점기 시절 한 일본인이 금강원이라는 개인 별장을 만들면서 내부를 꾸미기 위해 임의로 옮긴 것이다. 이섭교비는 1694년 조선 숙종 때 현재의 수안동과 연산동을 잇기 위해 수영천에 놓았던 이섭교의 완공을 기념해 세운 비석으로, 이섭교 옆으로 이전하였다. 내주축성비는 영조 7년(1731년) 동래읍성을 대대적으로 확장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1735년 세워진 비석이다. 처음엔 동래읍성 남문 밖에 세워져 있었으나, 여러 차례 읍성 안팎으로 옮겨 다니다 일제강점기 때 금강공원으로 이전됐다. 동래구는 이 비석을 현재 복원된 동래읍성 북문 인근에 2012년 9월 이전하였다. 동래경찰서가 있는 동래읍성 남문 인근에는 비석을 설치할 공간이 없고 마지막으로 비석이 옮겨진 자리가 어디인지 명확하지 않아 최근 복원한 북문 인근에 이전하였다. 앞면에는 축성에 관한 사실을 20행으로 기록하고, 뒷면에는 축성에 종사한 임원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비의 앞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승훈랑 행황산도 찰방 김광악 기. 유학 송광제 서. 통훈대부 행현풍 현감 유우기 전. 금상(今上) 9년 계축(癸丑)년[1733, 영조 9년] 겨울에 광악(光岳)은 승정원의 당후(堂后)에 있게 되어 경연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어떤 중신이 임금 앞에서 평양에 성을 쌓는 일을 계획하며 ‘만약 정언섭이 동래성을 쌓았던 일과 같이 그 고을 신하가 스스로 하도록 청을 들어 준다면 국고를 쓰지 않고 백성의 힘을 고갈시키지 않아도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황산도 찰방은 현재 양산시 물금읍 서부마을에 있었다. 나는 그것을 일기에 적어 승정원에 보관하였다. 이듬해 봄에 황산(黃山)의 역승(驛丞)이 되었을 때 동래 사람을 만날 수 있었는데, 동래 사람은 정공의 치적에 훌륭한 것이 많다고 칭송하였다. 동래의 선비 중에 송광순(宋光洵)이 성을 쌓을 때의 사적을 기록한 책 두 권을 가져 와서 나에게 비문을 청하였는데 대여섯 번이나 청하여 포기하지 않으므로 나는 결국 사양할 수 없었다. 그 도면과 기록을 살펴보니 동래는 임진년에 성이 함락된 후부터 140여 년 사이에 그 주변의 옛터가 무너져 백성들의 집이 되어 한 조각의 울타리를 친 설비도 없게 되었다. 공이 처음 이곳에 와서 변방의 설비가 어설픈 것을 크게 두려워하고 장마 대비하여 보수하는 계획은 시절이 태평하더라도 소홀히 할 수 없다고 하여 개연히 보수할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어느 날 밤 바깥사람 모르게 미복(微服)으로 몰래 나가 성터를 두루 살펴보고 돌아왔다. 드디어 계획을 확정하고 장계(狀啓)를 띄우니 당시의 관찰사 조공(趙公)[조현명(趙顯命)]과 뜻이 잘 맞아 그것을 도와주었다. 신해(辛亥)년[1731] 정월 정묘에 성터를 측량하고 일을 분담하여 각 패장(牌將)에게 맡기니 기기와 물자 및 인력은 오래전부터 비축해 두었던 것이라 한 가지도 모자란 것이 없었다. 이에 바람 만난 불처럼 명령을 내리니 감히 거역하는 자가 없었다. 땅을 파니 해골이 쌓여 있었고, 옆에 화살촉이 있었으니 임진왜란 때 전사한 병사들이었다. 종이와 베로 염을 하여 관에 넣어 제사를 지내고 묻어 주었다. 그 후에 발견된 해골은 모두 이렇게 해 주었다. 날마다 일하는 곳을 돌며 부지런한 자와 게으른 자의 작업을 살펴 벌할 것은 조금도 늦추지 않고 상줄 것은 반드시 상을 주었고 술과 음식을 먹이고 돈과 베를 아낌없이 주었다. 그래서 장수와 병사들이 다투어 힘을 내고 기뻐 뛰어다니며 모두 사력을 다하였다. 그해 4월 성이 완성되고 5월에 성문이 완성되었으며 7월에는 문루가 완성되니 공사를 시작한 지 백여 일 만에 견고하게 우뚝 솟은 성이 마치 귀신이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둘레가 2,280보(步)로서 8리(里)[약 3.14㎞] 정도 되고 높이가 수십 자가 되었으며 길이는 전보다 길어졌고 돌도 모두 새 것을 썼다. 일꾼 5만 2천명, 쌀 4,500섬, 베 1,550필, 돈 1만 3천 냥을 썼는데 모두 공이 낸 것이니 정말로 백성에게 걷은 것도 아니고 국고를 축낸 것도 아니다. 공사를 다 마치자 장수와 병사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고 돈과 곡식을 넉넉히 나누어 주었으며, 네 곳의 장교들에게 각기 문루에 술자리를 설치하고 음악을 연주하게 하여 마음껏 놀게 하였다. 8월 기유에 잔치를 열어 낙성하니 관찰사 조현명 공과 좌병사(左兵使) 이복휴(李復休) 공, 그리고 여러 고을 수령과 각 진(鎭)에서 모두 와서 모였다. 얼마 후 또 성을 지키는 데 양식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해서 따로 조미(租米) 4,000여 섬을 준비하여 창고를 설치하고 ‘수성창(守成倉)’이라 이름을 붙이고 군대가 필요할 때 쓰게 하였다. 부지런하고 민첩한 무인 5명에게 그 일을 맡기고 급료를 주었으며 특별히 수첩 군관(守堞軍官) 200명을 뽑아 부역을 덜어 주고 성을 지키게 하였다. 시설이 견고하고 오래가지만 그래도 무비(武備) 때문에 공부를 소홀히 할 수 없다고 해서 읍의 서쪽 몇 리 되는 곳에 서재를 세워 ‘시술재(時述齋)’라 이름을 붙이고 읍의 자제들이 공부하는 곳으로 삼으니 가르침에 요령이 있었고 음식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었다. 공과 같은 이는 근본이 되는 것을 알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나는 책을 덮고 탄식하며 말한다. 지혜로써 계획을 시작하였고 용단으로 일을 결정하였으며 은혜로써 무리를 모았고 검약하게 재물을 모아 나라 일에 썼으니 몸은 한때 수고로운 일을 맡았지만 나라 위해 천백 년의 굳은 방비를 도모한 것이다. 무비를 갖추고 나서 문교(文敎)로 근본을 돌려놓았으니 이 한 가지 일에서 모든 것이 아름답게 되었다. 지난날 경연 자리에서 이야기된 것은 그중 한두 가지 뿐이었다. 손순(孫順)이 임금의 포상을 받을 때, 임금이 ‘나는 이제 남쪽을 근심할 것이 없다’고 한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그 후에 호서 절도사로 나아갔고 승정원을 거쳐 동도(東都)의 책임자가 되었으니 이유가 있다. 숭정 기원 후 92년 을묘[1735] 10월 일 세움. 건륭 을유[1765] 가을 농주산에서 이전해 세움. 감관 박사연, 좌수 이중열, 색 김응윤, 후에 경진(1820년) 가을에 이전해 세움. 도감 정상언, 좌수 신태규, 감관 장우일. 3. 송공단 송공단(宋公壇)은 부산광역시 동래구 동래시장길 27 (복천동)에 있으며,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11호(1972.6.26.)이다. 동래시장 바로 앞에 있다. 동래부 동헌도 송공단에서 동래시장을 돌아서 약간 걸어가면 나온다. 송공단은 1742년(영조 18년) 동래부사 김석일이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 송상현 공이 순절한 정원루가 있던 곳에 설치한 단으로서, 송상현 공을 비롯하여 동래성 전투에서 순절한 분들을 모신 곳이다. 송공단이 세워지기 전에는 동래읍성의 남문 밖 농주산(현 동래경찰서 자리)에 임진왜란 때 순절한 분들의 전망제단을 세워 동래부사 송상현, 부산첨사 정발, 양산군수 조영규, 동래교수 노개방을 비롯한 순절 의사들을 모셨다. 이 제단을 1742년(영조18년) 송공단이 세워지자 그곳으로 옮겼다. 송공단은 동서남북의 4단으로 되어 있는데 북단에는 송상현 동래부사, 조영규 양산군수, 동래교수 노개방, 동단에는 유생 문덕겸, 비장 송봉수, 김희수, 겸인 신여로, 서단에는 노개방의 부인, 송상현의 애첩 금섬, 정발의 첩 애향, 남단에는 향리 송백, 부민 김상과 이촌녀(二村女) 및 무명 전망인을 모시고 매년 4월 15일 관에서 제사를 올렸다. 1760년(영조 36년)에는 동래부사 홍명한이 사림의 공의(公義)에 따라서 부산첨사 정발과 함께 싸우다 전사한 부사맹 이정헌을 모셨으며, 1766년(영조 42년)에는 다대첨사 윤흥신, 유생 양조한을 기리어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이후 동래성에서 순절하지 않은 분들은 제사를 모시지 않았으며, 부산진에서 순절한 분들은 정공단, 그리고 다대포에서 순절한 분들은 윤공단으로 옮겨서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 일제강점기부터는 매년 순절한 날인 음력 4월 15일에 (재)동래기영회에서 제사를 올리고 있다. 송공단이 세워진 정원루(靖遠樓)는 원래 동래동헌 객사에 딸린 누각이다. 정원루는 조선 세종 28년에 김시로 동래부사가 만들고, 신숙주가 일본 등 변방을 조용하게 한다는 뜻으로 정원(靖遠)으로 이름을 지었다. 1442년 조선통신사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실사학자 신숙주는 일본을 무시하고 깔본 다른 사신과 달리 일본이 앞으로 조선에 큰 우환이 될 것으로 보았다. ”일본인들은 사나워 의리로 굴복키 어렵다. 군사로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정원루 기문“. 신숙주 당시 일본은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세운 무로마치 막부가 쇠퇴하고 일본 66주간의 전국시대가 시작되는 시기로 일본인의 호전적이고 조직적인 전투장면을 보고 그들은 타고난 싸움꾼으로 그 화가 조선에 미칠 것을 알았다. 4. 동래부동헌 동래부동헌은 조선시대 동래부사가 집무를 하던 곳이다. 현재와 대비한다면 동래부동헌은 부산시청이고, 동래부사는 부산시장이다. 조선시대 255명의 동래부사가 정치, 행정, 외교 업무를 하면서 동래의 엄청난 역사가 고스란히 이곳에 담겨 있다. 주소는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로112번길 61이다. ‘동래부동헌’의 수안동(壽安洞)의 유래는, 으뜸 되는 관아 안이라는 뜻의 수안(首安), 또는 땅을 조금만 파도 물이 나오는 등 물이 흔하다고 수안(水安), 동래성 수문안의 동네라는 설이 있다.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동래부동헌은 아헌이라고도 하며, 조선시대 수령이 일을 처리하던 곳이다. 따라서 동헌은 관아 건물 가운데서 중심이 되는 건물이고, 동래는 일본과 국방, 외교상 요충지여서 정3품 당상관인 부사가 재직하였다. 이곳을 거쳐간 부사만도 1547년에 최초로 임명된 이윤암 부사부터 1895년 사임한 정인학 부사까지 349년 동안 모두 255명에 이른다. 동래부동헌 충신당 (東萊府東軒 忠信堂)은 1636년(인조 14)에 동래부사 정양필이 창건하고, 1711년(숙종 37) 동래부사 이정신이 충신당으로 편액을 붙여 조선시대 말기까지 동헌으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동래군청 청사로 사용되다가 1973년 동래군이 양산군으로 편입됨에 따라 양산군 보건소 동래지소로 사용되었고, 1977년 부산광역시에서 매입하여 초석 이상을 해체, 복원하여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원래 양옆에는 방, 가운데는 마루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동래군청 등으로 사용되면서 벽면, 평면구조, 천장, 마루 등이 교체, 보수되어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고, 현재와 같이 방은 모두 없어진 대신 마루로 바뀌었다. 현재의 현판은 독립운동가 한형석 선생의 글씨다. 건물의 구조는, 아헌인 충신당의 좌우에 동・서익랑(東西翼廊)과 대문, 바깥 대문이었던 동래도호아문(東萊都護衙門), 독진대아문(獨鎭大衙門)이 부속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서익랑은 파괴되고, 철거되었다. 망미루와 독진대아문은 지금의 금강공원 입구와 금강공원 안으로 옮겨 세웠다. 충신당과 대문만 본래의 위치에 보존되어 있으나, 부지(敷地)는 축소되었고, 원래 떨어져 있었던 동익랑이 충신당에 너무 가까이 이건 되어 마치 하나의 건물처럼 보인다. 일제강점기 때 철거됐던 부사의 휴식처 혹은 무관들의 대기소였던 ‘독경당’과 동래부사를 호위하는 비장의 처소인 ‘찬주헌’을 2014년 3월 복원했다.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5호인 ‘독진대아문’은 1636년 동래부사 정양필이 동헌 정당(正堂)인 충신당과 함께 지은 것으로 동래부 동헌의 바깥 대문이다. 1655년(효종 6) 동래부의 군사권이 경상좌병영 휘하 경주진영에서 동래독진(東萊獨鎭)으로 독립, 승격되었음을 알리는 동래독진대아문(東萊獨鎭大衙門)이란 현판이 정면에 걸려 있다. 망미루 (望美樓, 42.97㎡)는 1742년(영조 18년) 동래부사 김석일(金錫一)이 동래부 청사인 동헌(東軒) 앞에 세운 문루이다. 옛날 한양으로부터 부임해온 어느 동래부사가 임금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이 누각을 망미루로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1919년 동래의 3․1운동은 이 누각에서의 만세 삼창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전면에는 동래도호아문(東萊都護衙門)이라고 쓰여진 큰 편액이 걸려 있고, 후면에는 망미루(望美樓)라는 큰 편액이 걸려 있다. 1895년(고종 32) 동래도호부가 동래관찰사영(東萊觀察使營)으로 승격됨에 따라 일명 포정사(布政司)라고도 불렀다. 누각 위에는 동래성 4대문의 여는 시각과 정오를 알리기 위해 치는 큰 북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시가지 정리계획에 따라 아무런 연고도 없는 금강공원으로 이전하였다가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겨졌다. ‘고마청(雇馬廳)’은 조선시대까지 가장 빠른 운송수단이자 중요한 군수물자인 말을 관리하던 관청 건물로 일제강점기 멸실, 훼손됐다가 동래부동헌 정비사업으로 목조건물 2동(92.9㎡) 규모로 2015년 12월 23일에 복원되었다. 완대헌(緩帶軒)은 동래부사가 허리띠를 풀고 쉬는 휴식공간으로 1636년 동래부사 정양필이 충신당과 함께 지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동래구는 사업비 26억 원으로 부지를 사들이고 설계와 부산시문화재위원회 심의 등을 거쳐 2018년 7월 16일 여덟 칸의 기와지붕 목조 건물 완대헌을 복원했다. 임진왜란 때 왜적에 맞서 싸우며 장렬하게 순절한 송상현 동래부사는 조선시대 동래부사 255명 중 가장 청사에 빛나는 인물로 부산시민과 한국인에게 기억되고 있다. 청주 충렬사, 부산 충렬사, 동래읍성을 차례대로 답사하며 송상현 공의 우국충정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며 감사한 마음을 지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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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현 동래부사를 모신 부산 충렬사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1. 송상현 공의 정실부인인 성주 이씨의 비극적인 충효의 삶 천곡 송상현 동래부사가 임진년에 순절한 내용, 김섬과 이양녀, 하인 신여로에 대한 행적을 기록한 전기가 신흠(申欽)의 『상촌선생집』에 전하고 있다. 여기에는 『송동래전(宋東來傳)』, 『김섬전(金蟾傳)』, 『이양녀전(李良女傳』), 『신여로전(申汝櫓傳)』 네 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전기가 정확하게 언제 쓰였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1612년(광해 4년)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신여로라는 자는 서얼이다. 공을 따라 동래에 왔는데 공은 여로가 모친이 살아 있어 혹시 피해를 당할까 염려하여 돌려보냈다. 여로는 돌아가는 도중에 적이 부산을 함락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옆 사람에게 말하기를 “나는 공의 후한 은혜를 받았는데 난리를 만나 감히 죽음을 아낄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도로 공에게 돌아와 함께 죽었다. 신흠은 위의 네 편의 전기를 짓고 마지막에 “공은 과연 어떠한 사람이기에 일개 수령으로 특출하여 죽음을 알기를 자기 집에 돌아가듯 쉽게 하였단 말인가. 비록 옛날의 충신인 장순(張巡)이나 허원(許遠)과 같은 이라 하더라도 어찌 그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 공의 몸은 나라를 위해 죽었으나 공을 따라 죽은 자는 공을 위해 죽었으니, 이는 곧 공의 풍치가 그렇게 하도록 자극을 한 것이다. 저 개돼지 같은 적도 존경을 할 줄 알았으니 참으로 특이한 일이다.” 라고 논평을 하였다. 첩실인 금섬과 이양녀는 앞의 칼럼에서 언급했으므로 이번에는 송상현 공의 정실부인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천곡 선생은 1568년(선조 2년) 19세에 성주 이씨 이온(李熅, 1518~1557)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이온은 기묘명현(己卯名賢)인 이문건(李文楗)의 아들이다. 이문건은 조광조의 문하생으로 1513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일파가 화를 당하자 조광조에 대한 의리를 지켜 조상(弔喪)하였다. 낙안에 유배되었다가 사면되고 1528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注書), 정언(正言), 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사화에 연루되어 성주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아들 이온은 아버지보다 먼저 타계했다. 저서에 묵재일기(黙齋日記)와 양아록(養兒錄)이 있다. 부인되는 성주 이씨는 인품이 그윽하고 한가하며, 정조가 바르고 성품이 조용하여 웃어른의 말씀을 순순히 좇았으며, 공경을 다하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양반가의 현모양처였다. 1591년 조모가 돌아가시고, 1594년 시아버지가 타계하는 연이은 우환을 겪었지만 예법에 어긋남이 없이 슬기롭게 대처하였다. 1595년 맏아들 인급(仁及)을 시켜 남편의 유해를 청주로 옮겨오도록 조정에 청원하여 이듬해 드디어 남편을 청주에 안장하였다. 수차례의 우환과 어려운 고비를 슬기롭게 잘 극복하였으니 충렬을 이룬 남편 천곡 선생의 배필다운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장자 인급이 1605년 문과에 뽑혀 관직에 올랐으나 1608년 병으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차남인 효급(孝及)과 딸도 모두 같은 병으로 목숨을 잃게 되는 연이은 불행을 겪어야 했다. 조선시대에는 의술이 낙후되어 역질이 돌면 많은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다. 요즘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 조선시대 때 벌어지면 원인도 모르고 속절없이 죽을 수 밖에 없었다. 부인은 고손(高孫) 송근(宋根, 1599~1674년)을 이끌고 한양 옛집에 은거하다가 68세에 타계하였다. 성주 이씨 타계와 관련하여 『조선왕조실록』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충신 송상현의 처 이씨가 죽었다. 해조(該曹)에 명하여 특별히 휼전(恤典)을 넉넉하게 베풀어주도록 하였다. 도승지 이덕형의 청을 다른 것이다. <해조에서 공신을 조애(助哀)하는 예에 따라 무명 5필, 관 1부, 종이 7권, 유둔(油屯 : 종이 도는 포목에 기름을 먹인 것) 등의 물건을 하사하였다.>” 성주 이씨는 1621년 남편의 직함을 따라 정경부인에 증직되는 교지가 내려졌다. 교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교지 정부인이씨증정경부인자 신유오월십구일(敎旨 貞夫人李氏贈貞敬夫人者 辛酉五月十九日)” 부인의 묘소는 충렬사 남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황구산(黃龜山)에 있다. 둥근 봉분 앞쪽에 1983년 세운 묘갈이 있다. 송상현 공의 묘소 앞쪽에는 첩실 김섬과 이양녀의 묘가 좌우에 자리 잡고 있는데, 정경부인 성주 이씨의 묘는 남편과 떨어진 곳에 있다. 임금인 선조가 점지해준 자리에 쓴 묘역을 함부로 바꿀 수 없다는 유교적 윤리에 따라 정실 부인은 죽어서도 남편 곁에 나란히 묻히지 못하는 설움을 겪고 있다. 살아서 남편을 국가에 바치고, 3년간의 남편 시묘살이를 함으로써 남편에 대한 도리를 다하였다. 아들과 딸을 병으로 먼저 보내는 비극을 당하는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낸 비극적인 어머니였지만 자신의 운명을 담담하게 수용한 조선시대 사대부 가문의 법도를 지킨 숭고한 여인이었다. 2. 송상현 공에게 내린 임금의 사제문(賜祭文) 천곡 선생의 사후 국가 차원의 제사가 여러 차례 이루어졌다. 선생에 대한 치제(致祭)는 1665년(현종 6년) 제사를 지내게 한 이후 1713년(숙종 39년), 1717년(숙종 43년), 1735년(영조 11년), 1772년(영조 48년), 1832년(순조 32년), 1891년(고종 28년), 1909년(순종 2년) 등 조선왕조실록에는 모두 8차례의 기록이 보인다. 치제란 국가에서 왕족이나 대신, 국가를 위하여 죽은 사람에게 제문과 제물을 갖추어 지내주는 제사를 말한다. 현재 천곡기념관, 부산 충렬사에 전시되고 있는 치제문은 모두 4점이다. 전시되어 있는 치제문을 차레대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숙종 임금의 1717년(강희 56년) 치제문 절의를 포상하는 일을 나라에서 먼저 힘쓰면 사람의 도리가 세워지고 풍성(風聲)이 수립된다. 생각건대 경이 충절에 목숨을 바친 것은 고금에 뛰어났도다. 섬 오랑캐가 창궐하여 바다를 덮고 나는 듯 건너올 때 외로운 성은 비바람이 몰아치는 처지에 놓였음에도 시퍼런 칼날을 두려워함이 없었고, 한 몸을 가벼이 버림은 한낱 깃털처럼 보았도다. 대의를 이렇게 판단하였으니 사사로운 은정을 어찌 돌볼 것이랴. 죽음이 눈앞에 닥쳐도 생각을 변치 않고 성난 머리털이 오히려 뻣뻣이 서는구나. 왜적의 무리들도 감탄하고 열사들은 다투어 사모하네. 누세 조정이 정표권장(旌表勸獎)함에 구천(九泉)을 빛나게 하였다. 저 청주 땅을 돌아보니 그 무덤은 우거지고 아름드리 나무는 빽빽한데 정기는 서리어 깃들어 있다. 마침 내가 온천을 행행함에 어가를 가까이 머물게 하여 멀리서 바라보고 생각을 일으켜 보니 영특한 자태를 보는 듯 하도다. 이에 사관에게 명하여 가서 분향케 함은 선조의 포천을 진실로 다시 거행하는 바이다. 영이여! 그 앎이 있거든 이 제물을 흠향하시라. <유숭(兪崇)이 지어 올림> 위의 치제문은 1717년(숙종 43년) 예조정랑 김윤해(金潤海)를 송상현의 묘소로 보내 치제할 때 하사한 제문이다. 제문은 유숭(1666~1734년)이 지어 올린 것이다. 2) 1750년(건륭 15년) 영조 임금의 치제문 나라가 어지러운 때를 당하면 충렬이 대대로 날리니 송나라에는 문산(文山)이 있었고, 당나라에는 장(張)・안(顔)이 있었다. 경이 옛적 동래부사가 되었을 때 돼지나 뱀과 같은 왜병이 강역을 충격하니 성첩은 무너지고 병기는 노후하여 화살이 관청에 날아 들어왔다. 경은 당시 조복을 갈아입고 노기가 충천하였으며 천지가 비등하고 해와 별이 캄캄하였다. 이에 열사들은 수저를 던지고 무사들은 격분하여 창의에 앞장섬이 북을 치는 것처럼 기세가 앙양하였다. 오랑캐들은 바로 침공하지 못하고 그 칼끝이 꺾여 버렸다. 쓰러져도 오히려 공을 칭송하고 죽어도 또한 길이 빛이 나도다. 저 초목이 우거진 서원 땅은 굳센 혼백이 잠든 곳이오. 뼈는 창이 되고 정기는 혜성이 되었도다. 내가 온천 길에 근교에서 잠시 수레를 멈추고 이에 사관에게 명하여 유장을 거행한다. 하잘것 없는 제수나마 혼령이 어둡지 않거든 오히려 이 술을 흠향하시라. <김치인(金致仁) 지어 올림> 위의 치제문은 1750년(영조 26년) 영조가 송상현의 묘소 인근을 지나다가 예조정랑 신일청(申一淸)을 보내 치제할 때 하사한 제문이다. 제문은 김치인(1716~1790년)이 지어 올린 것이다. 치제문에 나오는 문산(文山)은 남송 말기의 충신 문천상(文天祥)을 이른다. 그의 자는 송서(宋瑞), 호는 문산(文山)으로 원병(元兵)이 쳐들어왔을 때 포로가 되었으나 굴하지 않고 정기(正氣)의 노래를 지어서 그 충절을 보이고 죽었던 인물이다. 또한 장(張)・안(顔)은 당대의 충신 장순(張巡), 안고경(顔杲卿)을 말함인데, 이들은 안녹산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켜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위의 세 사람은 충신과 절개의 대명사로 흔히 쓰인다. 천곡 선생의 높은 충절을 송나라 문천상과 당나라 장순, 안고경에 비유하고 있다. 3) 1772년(건륭 37년) 영조 임금의 치제문 어려서 몽매할 때부터 다만 왜적을 물리친 기록을 보았네. 저 동래의 일을 보고는 경이 절개를 지킴을 흠모했었소. 세월이 오래 흐르니 사람의 마음도 소홀하게 바뀌었으나 어찌 다른 날에 이 날(그 당시)을 다시 만날 것을 의도하겠소. 상신들이 글을 올려 아뢰기를 강개하여 다가앉아 특별히 제물을 내릴 것을 명하고 그 제문을 직접 지었으나 그 어찌 이에 그치리오? 경의 자손들에게 특별히 관직도 내리고 본관에서 제물을 차리고 예랑이 잔을 올리어. 저 호서지방을 바라보니 소나무, 잣나무 같은 절개를 그리워함이 간절하니 나의 이런 뜻을 느끼고 모름지기 흠향하시오. 위의 치제문은 1772년(영조 48년) 예조정랑 변경진(邊景鎭)을 송상현의 부조묘로 보내 치제할 때 하사한 제문이다. 부조묘(不祧廟)는 불천위 제사의 대상이 되는 신주를 둔 사당을 말한다. 즉, 본래 4대가 넘는 조상의 신주는 사당에서 꺼내 묻어야 하지만 나라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위는 왕의 허락으로 옮기지 않아도 되는 불천지위(不遷之位)가 된다. 따라서 불천지위가 된 대상은 사당에 계속 두면서 기제사를 지낼 수 있다. 이 글에서 영조는 천곡 선생의 후손에게 특별히 관직도 내려 등용하겠노라고 위로하였다. 4) 1832년(도광 12년) 순조 임금의 치제문 천지의 기는 지극히 바르고 순수하며 굳세어서, 사람에게 빼어난 품성이 충이 되고 강상(綱常)이 되면 위기에 임하여도 흔들리지 않는다. 소무(蘇武)의 절의와 안고경(顔杲卿)의 터럭이 우리나라에 모여 있으나 오직 경의 충렬이 뛰어나도다. 액운이 생겨 일본 섬 오랑캐가 바다로 쳐들어 왔을 때에 동래는 바다라서 제일 먼저 그 칼날을 만나야 했다. 경은 당시 부사로서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대비를 하지 못하였다. 싸워서 지키지를 못하고 한 번 죽기로 뜻을 정하고 한 통의 편지에 은혜는 가볍고 충성은 무겁다고 하였다. 조복을 엄연히 차려입고 상에 걸터앉아 움직이지 않았고, 단심(丹心)을 더럽히지 않고 흰 칼날에 마침내 돌아가셨다. 아름다운 덕은 하늘이 내린 떳떳함이니 저 일찍부터 볼 수 있었다. 경과 같이 죽으니 오랑캐도 감탄할 줄 알아 슬피 크게 통곡하고 제 지내어 유골을 거두어 무덤에 묻었도다. 삼충(三忠)과 오절(五節)이 이 문액(門額)에 드러나 함께 별사(別祀)에 제사를 받드노니 풍운(風韻)이 어제와 같도다. 아! 섬(蟾)과 향(香)은 여인이거늘 어찌 알았으랴. 보고 감동함이 깊어 지아비를 위해 죽고 나라를 위해 죽었도다. 조그마한 나라에서 저 휴양(睢陽)에서처럼 어찌 그리 많은지 여러 충신이 무리지어 나왔도다. 옛 사람의 말에 “장순과 허원이 당(唐)을 일으켰다.” 하였나니 그들은 적을 섬멸하지는 않았으나 강상(綱常)을 부지하였도다. 경 또한 그러하니 그 충과 그 열은 일월처럼 나란히 걸렸도다. 저 동래성은 우뚝하고 바닷물은 동쪽에서 출렁이네. 공의 기운은 우리나라에서 장하니 죽어서도 응당 그 의리를 권장하도다. 조두(俎豆)가 있는 곳에 사당의 모습이 더욱 높다랗다네. 옛날을 어루만지는 감회가 있어 그대의 장손을 녹용(錄用)하노라. 상당한 것은 아니나 보답이며, 내 마음을 나타낸 것이라오. 내가 올리는 술이 깨끗하니 와서 흠향하기 바라오 <이돈영(李敦榮) 지어 올림> 위의 치제문은 1832년(순조 32년) 동래도호부사(東萊都護府使) 박제명(朴齊明)을 동래단(東來壇)으로 보내 치제할 때에 하사한 제문이다. 제문은 이돈영(1801~?)이 지어 올린 것이다. 제문에 나오는 소무는 한 무제(武帝) 때의 장군으로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갔다가 포로가 되었으나 끝까지 절의를 지켰던 인물이다. 또한 안고경(692~756)은 당나라 현종 대의 충신으로 상산태수(常山太守)로 있을 때 안녹산(安祿山)이 난을 일으키자 그의 사촌 동생인 안진경(顔眞卿)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서 대항하다가 패전하여 안녹산에세 잡혀 회유를 당하였으나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비참한 형(刑)을 당하여 죽었던 인물이다. 여기서는 천곡 선생이 소무와 안진경 같은 충신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상에서 소개한 치제문 외에도 선묘을미 사묘제문(宣廟乙未 賜廟祭文), 인묘갑자 사묘제문(仁廟甲子 賜廟祭文), 현묘을사 사묘제문(顯廟乙巳 賜廟祭文), 영묘어제 임진사묘제문(英廟御製 壬辰賜廟祭文) 등이 있다. 송상현 동래부사를 보신 부산의 충렬사는 도심지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고 공원으로 잘 꾸며져 있어 부산시민들이 자주 방문하는 곳이다. 넓은 송상현광장에 우뚝 선 동상의 글씨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충렬사의 정화기념비 앞에 박정희 대통령이 기념 식수한 주목을 참배객들이 유심히 살펴보고 있어 감동받았다. 충렬사 연못에는 많은 비단잉어가 노닐고 있어 가족단위 참배객들이 먹이를 주며 아이들은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울창한 숲속의 충렬사 공원 벤치에는 많은 시민들이 더위를 피해 담소를 나누고 있어 보기 좋았다. 송상현 동래부사 일가는 온통 충효를 실천한 가문이라 할 수 있다. 송상현 공과 두 첩실에게는 나라에서 정려문을 내리고 정실부인 성주 이씨에게는 정경부인을 증직하는 교지를 내렸다. 송상현 동래부사의 충효정신은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나라와 국민의 사표가 되고 있다. 조선시대 임금은 제문을 하사하여 그의 충의를 기렸고, 박정희 대통령도 부산 충렬사를 성역화 하고 송상현광장의 동상에 친필휘호를 남겨 존경심을 표하였다. 요즘 정치권은 가치관이 전도되어 수학여행가다 죽은 학생들에게는 과도한 보상을 해주고, 서해교전 희생 장병들에게는 무관심으로 일관하여 대조적이다. 한미동맹에 균열을 일으키고 6.25 한국전쟁 때 적이었던 중국에게 사대하는 정치인들은 각성해야 하겠다. 국방을 소홀히 하고 애국심이 결여 되고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않으면 국난은 또 되풀이될 수 있다는 사실을 국민들은 명심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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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현 동래부사를 모신 청주 충렬사,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1. 강상촌과 정려문 임진왜란 당시 왜적과 맞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1551~1592) 공, 양산군수 조영규(趙英圭, 1535~1592) 공을 평소에 흠모하여 유적지 답사에 나섰다. 양산의 삼조의열로 추앙받아 양산의 춘추공원 충렬사에 모셔진 조영규 양산군수는 전남 장성이 고향인데, 작년에 장성의 조영규정려를 다녀왔다. 송상현 동래부사를 모신 청주 충렬사, 묘소를 참배하기 위해 7월 16일 방문하였다. 14일 부산 송상현광장, 17일 부산 충렬사를 답사하였다. 조영규 양산군수는 동래성이 위기에 빠지자 달려가 송상현 부사를 만나 함께 싸울 것을 약속하였다. 양산에 연로한 어머니가 있어 다시 양산에 돌아가 작별 인사를 하고 아들 정로에게 할머니를 모시고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가라고 한 다음 동래성으로 돌아와 송상현 동래부사와 함께 싸우다 장렬하게 최후를 맞았다. 큰 느티나무 아래에 동네 노인들이 모여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먼저 정려문, 효열각, 효부각을 둘러보았다. 느티나무 아래 표지판이 있어 가보니 놀랍게도 이승만 대통령이 1953년 4월 기념 식수했다고 적혀 있었다(당시 동네 주소는 청원군 강서면 강촌). 대부분의 답사객은 이 느티나무의 존재를 모르고 무심하게 지나치는 것 같았다. 6.25 한국전쟁이 휴전이 안 된 시기에 이곳을 방문하여 충신 송상현 동래부사를 추모하며 기념식수를 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농민들에게 저렴하게 땅을 불하하였다. 남로당 총책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남쪽으로 쳐들어가면 남한의 농민들이 호응할 거라고 장담을 하였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땅을 갖게 된 농민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웠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오늘날의 굳건한 한미동맹, 경제 번영의 터전을 이룩하였다. 좌파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오히려 친일파라고 매도하며 깎아내리기에 급급하지만 국민 대다수는 동의하지 않고 있다. 부산 충렬사를 7월 17일 참배하였는데, 이곳을 정비하고 성역화한 분은 박정희 대통령이다. 1978년 7월 21일 유적 정비 후 주목을 기념 식수하였다. 부산 유엔기념공원에도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 남아 있다. 역사 위인, 안보와 관련된 유적지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성역화에 기여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청주 여산 송씨 정려각이 강상촌 마을 입구에 서 있다. 임진왜란 때 동래성을 지키다 순절한 천곡 송상현 동래부사와 그 후손들의 가계에서 배출된 열녀, 효부의 정려이다. 본래는 1595년(선조28) 송상현만 정려되었으나 1704년(숙동30)에 두 소실이 정려됨에 따라 함께 모시게 된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1954년에 중수한 것이다. 충렬각은 묘소 이장 후 세운 것으로 보이며, 1594년(선조 27년) 12월에 처음 명정되었고, 1704년(숙종 30년) 한금섬(韓金蟾)과 이양녀(李良女)의 열녀문을 합쳐 다시 세운 것이다. 또한 후손 송현기(宋鉉器, 1684~1750)의 처 밀양 박씨의 효열각, 송명휘(1737~1793, 宋明暉)의 처 연일 정씨의 효부각이 있다. 이러한 일문삼려(一門三閭)의 형식은 흔치 않은 것이다. 여산송씨 정려각은 경부고속도로 청주IC에서 청주로 들어가는 가로수길 옆에 자리한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에 있다. 동네 이름이 강상촌(綱常村)인데, 삼강오상(三綱五常)의 정문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강상촌( 綱常村)’이라 줄여 부른다고 한다. 유교의 삼강오륜이 살아있는 전통마을이라 할수있다. 충신과 더불어 열녀와 효부의 산실이 바로 강상촌이다. 필자가 추풍령 옛길을 답사할 때 김천시 봉산면에 갔는데, 동네 이름이 유교의 인의예지신을 본떠 인의리, 예지리가 있어 좋은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2. 한금섬과 이양녀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송공단(宋公壇)에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기녀 한금섬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인 금섬 순난비(金蟾殉亂碑)가 있다. 송공단은 임진왜란 때 동래성을 지키다 순절한 송상현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의 비석을 세운 곳이다. 금섬은 비록 기녀였지만 송상현의 첩으로써 그에 못지않은 의로움과 충절을 보여주었고 그것을 잊지 않고 기념하기 위해 순난비가 세워졌다. 금섬 순난비는 높이 73cm, 너비 30.5cm, 폭 12cm의 크기로 비석 윗부분이 반달처럼 둥글게 다듬어져 있는 형태이며, 송상현 순절비 뒤쪽 왼편에 마련된 별도의 공간에 세워져 있다. 비석 앞면에는 ‘금섬 순난비’라 새겨져 있고 붉은색으로 덧칠해져 있는데 이는 ‘나라의 위기에 목숨을 바친 금섬의 비’라는 정도의 의미로 볼 수 있다. 한금섬은 함경남도 함흥 출신의 기녀로, 1592년 열세 살 되던 해에 송상현의 첩이 되어 동래부사로 부임하게 된 송상현을 따라 부산으로 갔다. 금섬이 관아에 있다가 여종 금춘과 함께 동래성에 찾아갔으나 송상현이 이미 순절한 후였다. 금섬도 왜군에게 잡히게 되었으나 두려워함이 없었다. 오히려 사흘 동안 왜적들을 욕하며 꾸짖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조선의 사신으로 왔었던 왜군의 장수가 금섬의 의로움을 기특하게 여겨 동래성 밖에 송상현과 함께 묻어주었다고 한다. 1608년 동래부사 이안눌이 동래성 남문 밖에 제단을 만들어 임진왜란 때 동래에서 순절한 사람들을 기렸는데 여기에 금섬도 속했다. 1742년 동래부사 김석일이 송공단을 설치하면서 앞선 제단이 옮겨졌으며 이후 매년 음력 4월 15일 제사를 지냈다. 또한 충렬사에 배향되어 매년 5월 25일 제향을 통해 그 의로운 절개가 기려지고 있다. 부산 동래 지역의 역사와 설화를 스토리텔링한 민속 공연이 최근 진행되었는데, 송상현 동래부사와 금섬을 소재로 재구성된 이야기가 포함되어 많은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양녀는 이소사라고도 한다. 동래성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일본까지 끌려갔다. 일본에서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수청을 강권받았으나 목숨 걸고 항거하였다. 지진이 일어나 건물이 무너졌지만 이양녀가 있는 곳은 멀쩡하였다. 일본에서는 정절에 감동받아 조선으로 돌려보내주었다. 3. 동래부사 송상현 공의 생애와 청주 충렬사 송상현 공은 1551년(명종 6년) 1월 8일 한양에서 출생하여 15세 때 승보시(陞補試)에 장원하고 20세에 진사가 되었다. 본관은 여산(礪山)이고, 자는 덕구(德求), 호는 천곡(泉谷), 한천(寒泉)이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정자에 보임되었다. 천곡종친회 송해종(전직 공무원) 회장에 의하면 송상현 공의 부친인 송복흥(宋復興)은 전북 고부 사람이고, 송상현 공은 고부가 아닌 부친 근무지인 서울 ‘황화방’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아래로 동생 송상인(宋象仁)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송전(宋琠)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송승은(宋承殷)이다. 부인은 성주이씨(星州李氏)로 기묘명현인 묵재 이문건(李文健)의 손녀다. 부친은 평강, 용안 등에서 현감을 지낸 후 임진왜란이 발발한 시점에서 이미 사헌부 감찰을 역임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재주가 뛰어나 10여 세에 경사(經史)에 통달하였다. 15세에 승보시(陞補試)에 장원하면서 문장을 떨쳤고 사계 김장생과 우의를 맺었다. 1570년(선조 3) 진사시에 입격하여 진사가 되고, 1576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에 보임되었으며, 다음 해 저작(著作)으로 승진하였다. 1579년 박사(博士)와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임명되었고, 다음 해에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외직에 나가 유학을 진작시켰다. 1583년 사헌부지평으로 들어와 호조・예조・공조의 정랑(正郞), 공조좌랑과 군자감(軍資監)의 정(正) 등을 지냈다. 1584년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다시 지평이 되었다가 은계도찰방(銀溪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다시 지평을 지내고 배천군수로 나갔다가 3년 만에 전직되어 경력(經歷), 집의, 사간과 사재감(司宰監), 군자감(軍資監)의 정(正)이 되었다. 1591년(선조 24년)에 집의(執義)로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진되고 동래부사(東萊府使)에 임명되었다. 왜구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들려오는 가운데 임지에 도착하여 방비를 굳게 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1592년 4월 14일 왜적들이 목판에 “전즉전의 부전즉가도(戰則戰矣, 不戰則假道)” 즉, “싸울려면 싸우고, 싸우기 싫으면 길을 빌려 달라.”하니 송상현 동래부사는 “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難)” 즉,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고 써서 적에게 던지고 성민들과 일치단결하여 싸웠다. 전투는 중과부적으로 4월 15일 오시경 동래성이 함락되었다. 피하라고 권유하여도 피하지 않은 채 태연히 북쪽의 임금에게 북향요배(北向遙拜)를 마친 후 부채에다 고별의 글을 써서 고향에 계신 부친에게 올리고 42세를 일기로 의연하게 순절하였다. 왜장 소 요시토시〔宗義智〕 등이 그의 충렬을 기려 동문 밖에 장사지내주었다. 현재 묘소는 충북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 산1-1에 있다. 공은 동래부사로서 짧은 재임 기간이었지만 목민(牧民)에 힘썼기 때문에 부민(府民)들은 공을 부모 모시듯 하였다고 한다. 상여가 떠날 때는 살아남은 유민이 백리 밖까지 따르면서 호곡했고 적장 고니시유키나가(小西行長)도 공의 높은 충절에 감복하여 공을 해친 자를 찾아내어 목을 베고 상여가 지나갈 때 하마(下馬)하여 숙연히 예를 표했다 하니 이는 전사상 유례가 없는 것이다. 사후에 이조판서,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부산의 충렬사, 개성의 숭절사(崇節祠),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고부의 정충사(旌忠祠), 청원의 충렬묘(忠烈廟)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청주 충렬사(淸州 忠烈祠)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에 있다. 선조 28년(1595년)에 묘소를 동래에서 이장하고 광해군 2년(1610년)에 사당을 창건하였다. 충렬사 뒷산에는 송상현의 묘소와, 현종 원년(1659년)에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쓴 신도비가 있다. 사당 입구에 선조 28년(1595년)에 건립한 충신문이 있다. 지금의 건물은 1980년에 중수한 건물로 정면 3간, 측면 2간의 겹처마 목조기와집인데 내부는 통칸 마루방에 3개의 분합문을 달고 앞퇴를 두었으며, 마당 앞에 삼문을 세우고 주위에는 석축담장을 쌓아 보호하고 있다. 청주시에서는 천곡의 애국충절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2001년에 인근 부지를 확장 정비하여 전시관과 사당을 신축하였으며, 주변을 공원화하여 시민들이 역사와 함께 호흡하는 공간으로 조성하였다. 4. 천곡 기념관 요즘 코로나19 때문에 역사 유적지는 개방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 답사하기가 매우 힘들다. 송상현 공 기념관인 천곡기념관 역시 폐쇄되었으리라 생각하고 방문하였는데, 기념관에서 사람들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기대하고 가보니 기념관 전시물 보완을 위해 송씨 문중 인사, 관리사무소장, 관련기관 관계자, 문화관광해설사 등이 모여 회의를 하였다. 기념관을 구경하고 싶다고 요청하니 개방을 안 한다고 하였다. 날씨는 찌는 듯이 더워서 땀이 많이 흘렀다. 청주 충렬사를 답사하기 위해 멀리 양산에서 왔다고 이야기하며 잠깐 사진만 찍겠다고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마침 김미영 문화관광해설사가 열의에 감동했는지 관리사무소장에게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충렬사 답사를 마치고 주차장으로 내려오니 김미영 해설사가 관리사무소장을 만나보고 가라고 이야기하였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여러 가지 궁금한 점을 물어보고 대화를 나누었다. 송상현 공 후손인 송정화 선생은 묘소 주소를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수의동 10번지로 치면 묘소 앞의 신도비가 나온다고 하였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묘소 주소가 여러 개가 뜨고 산 몇 번지로 되어 있어 찾기가 쉽지 않다고 나와 있었다. 송정화 선생은 일제강점기 때 청주의 송상현 공 문중과 후손들이 일제경찰로부터 핍박을 받았다고 하였다. 넓은 문중 땅을 빼앗기 위하여 산에 나무를 심으라고 하는 등 괴롭혔다고 얘기하였다. 송상현 공의 표준 영정을 만들기 위하여 후손들의 얼굴을 참작하고 컴퓨터로 합성하여 권오창 화백이 제작하였다고 송정화 선생이 전해주었다. 양산의 김해 김씨 문중에서도 삼국통일에 기여한 김무력 장군, 김서현 장군, 김유신 장군 3대의 표준 영정 제작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송정화 선생과 송해성 관리소장은 얼굴이 미남형으로 잘 생겼다. 송해성 청주 충렬사관리소장의 공식 허락을 받고 김미영 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천곡기념관으로 다시 올라갔다. 김미영 해설사가 전시된 자료를 재미있게 해설해주었다. 필자가 울산광역시 문화관광해설사, 북구청 관광해설사, 중구청 울산큰애기 관광해설사, 남구청 마을해설사 등의 특강 강사로 해설안내기법을 강의한다고 얘기하였다. 김미영 문화관광해설사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천곡 송상현 공 유물은 동래부순절도 1폭, 교지 3점, 치제문 4점, 혈선발 1첩, 『천곡수필집』 1책 등 5건 10점이다. 이들 유물은 지금까지 전해지는 천곡 송상현 공의 일괄 유물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한다. 기념관의 동래부순절도는 1658년(효종 9년) 동래부사 민정중이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전투상황을 잘 아는 노인의 말을 토대로 그린 그림이다. 중심에 동래성이 둥글게 자리 잡고 있고, 남쪽 성루를 중심으로 동래 병사들이 수비하고 있으며, 이들을 공격하기 위해 왜병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있다. 성곽 아래쪽으로는 왜군과 죽음의 결전을 벌이는 장면이 있고, 성곽 안쪽 중심에는 붉은 조복을 입고 북쪽을 향해 앉아있는 송상현 공의 순절 장면이 그려져 있다. 김미영 해설사가 조영규 양산군수의 위치를 알려주고 도망가는 경상좌병사 이각도 얘기하였다. 송해성 청주 충렬사관리소장은 필자에게 여러 가지 자료를 주었다. 송상현 공의 문집인 ‘천곡선생집’, 역주 천곡수필, 천곡 송상현의 학문과 사상 등의 두꺼운 책을 주었다. 묘소도 같이 동반하여 안내해주겠다는 말씀을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왜냐하면 날씨가 너무 더워서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혼자 답사하였다. 송해성 관리소장께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이다. 전국 답사를 다녀보면 명문가 후손들은 조상에 대한 존경심과 자부심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답사목적을 밝히고 질문을 하면 친절하고 열정적으로 답변해주었다. 책자와 같은 자료도 제공해주고 답사 안내도 흔쾌히 응해주었다. 5. 송상현 공 묘소와 신도비 송상현(宋象賢) 공 묘소 아래 진입로 왼편에 신도비(神道碑)가 있어 1984년에 충청북도 기념물 제66호로 지정되었다. 비문은 일부분이 훼손되었다.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송준길(宋浚吉)이 썼으며, 비의 제목은 이정영(李正英)이 전서(篆書)로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금석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송상현은 1591년 동래부사로 부임했는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민이 더불어 혈전을 벌였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마지막으로 고향에 있는 부친에게, ‘고성월휘(孤城月暉), 열진고침(列陣高枕), 군신의중(君臣義重), 부자은경(父子恩輕)’ 즉 ‘외로운 성에 달무리 지니, 여러 군진은 높이 베개를 베고 잠자네. 임금과 신하의 의리는 중요한 것이며, 아버지와 아들간의 은혜는 가벼운 것이다.’라는 절명사(絶命詞)를 남기고 장렬히 순국했다. 이에 왜적의 장수도 그의 절의에 탄복하여 그를 살해한 왜병을 참살한 뒤 송상현의 시신과 그의 첩(妾)인 한금섬(韓金蟾)의 시신을 동문 밖에 안장하고 나무로 표찰을 세웠다. 그리고 시를 짓고 제사를 지냈다.” 신도비에서 묘소로 올라가는 긴 계단석이 있었다. 묘소는 각종 석물로 단장되어 있었다. 송상현 공 묘소 왼쪽에는 이양녀의 묘소, 오른쪽에는 한금섬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양녀의 묘소는 양평군 서종면 정비리에 있었는데 실전되어 가묘로 만들었다. 임금이 정해준 산소는 함부로 못 건드린다는 나라의 법도를 따라서 송상현 공의 정경부인 묘소는 1km 떨어진 황구산 기슭에 있다고 한다. 여산 송씨의 재실은 신도비에서 200m 남짓 떨어져 있었다. 송상현 공의 묘가 동래에 있는 것을 안 선조는 당대 제일 풍수가 ‘두사총’에게 명당을 잡도록 명령을 하였다. ‘두사총비기’의 저자이기도 한 두사총은 명나라 사람으로 명의 조선원군과 함께 한반도에 들어왔다. 부모산 자락이 끝나는 지금의 묘자리에서 명당을 발견하고 묘를 이장하였다. 송상현 공의 부인이 3년간 시묘살이를 했고, 이때부터 여산 송씨가 청주, 청원 일대로 이주하여 세거지를 형성하게 되었다. 삼복더위에 송상현 공과 관련된 유적을 답사하며 땀을 많이 흘렸지만 보람은 있었다. 답사에서 만난 분들이 친절하게 안내해주고 자료를 제공해준 덕분에 많은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었고, 글을 작성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단순한 친일, 반일을 논하지 말고 선조들의 애국심을 깊이 공부하고 본받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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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본거지인 성주 백세각.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박사 심상도1. 백세각을 지은 야계 송희규 선생 야계(倻溪) 송희규(宋希奎, 1494~1558년) 선생의 본관은 야성(冶城)이다. 야성은 야로(冶爐)의 별호인데, 경상남도 합천군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신라 때 적화현(赤火縣)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야로로 고쳤다. 야계는 송수겸(宋守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송소(宋紹)이고, 아버지는 부사직 송방현(宋邦賢)이며, 어머니는 황진(黃珍)의 딸이다. 1513년(중종 8) 향시에 합격하고 이어 1519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병조좌랑, 현풍현감, 호조정랑 등을 지내고, 1534년 흥해군수가 되었다. 이 때 옥산(玉山)에 있는 이언적(李彦迪)과 왕래하면서 교분을 두텁게 하였으며 선정관(善政官) : 정치를 훌륭히 잘한 관원)으로 뽑혀 1급이 승진되었다. 1543년 이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상주목사,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역임하였고, 유희춘(柳希春)과 함께 윤임(尹任)을 옹호하다가 파직당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년) 대구도호부사로 복직하였고, 이듬해 예빈시정이 되어 다시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송희규 선생의 자(字)는 천장(天章), 호는 야계 또는 야계산옹(冶溪散翁)이라 하였다. 효행이 지극함을 당시 경상도 관찰사 회재 이언적이 장계를 올려 중종 38년(1543년) 9월 28일 정려가 내려지고 노포동에 정려각을 세웠다. 선조 32년(1599년) 동산 모암 아래로 이건하였다. 야계 송희규 선생은 사헌부 집의(執義)로 있을 때 세도가 윤원형을 탄핵하다가 전라도 고산(高山)으로 귀양을 갔다. 을사명현(乙巳名賢)으로 사면된 후 고향으로 돌아와 고산리에 백세각(百世閣)을 짓고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학문과 시주(詩酒)를 즐기며 유유자적(悠悠自適)하였다. 사후에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증직(贈職)되고 충숙(忠肅)이란 시호가 하사되었다. 남달리 효우가 두터워 죽은 4년 뒤에 조정에서 정려와 효우비를 세워주었으며, 1565년 직첩을 환급받았다. 저서로는 『야계문집(倻溪文集)』이 있다. 송희규 선생은 이곳 공서(公西)마을에 백세각(百世閣)을 짓고 학문에 힘써 많은 문집을 냈다. 초전면 고산리 542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방문화재 163호이다. 정면 7칸, 측면 7칸의 맞배지붕, 口자형 집이다. 송희규 선생이 귀양에서 5년 만에 풀려 고향으로 돌아와 마을 이름을 고산리(高山里)라 바꾸고 명종 6년(1551년)에 기공하여 이듬해에 준공된 누각으로 현재까지도 원형 그대로 관리되고 있다. 종손 송만수 씨에 의하면 그동안 두 번의 화재가 발생하여 부분적으로 불타서 중수하였다고 한다. 2. 파리장서운동과 성주 3.1만세운동의 본거지인 백세각 백세각에 이율곡(李栗谷), 한석봉(韓石峯), 채번암(蔡樊巖)의 친필이 소장되어 있었는데, 한석봉의 친필은 1970년에 도난당하였다고 한다. 백세각에는 소, 닭이 들어가면 울지도 못하고 비오는 날 자정에는 말발굽 소리가 요란히 들려오기 때문에 종손이 아니면 무서워서 잠을 못 잔다는 전설이 있다. 대지 756평이며 쇠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전통적 건축물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현존하는 목조건물 중 성주군 관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역사적인 사연을 간직하고 종택으로서 면모를 유지하고 있다. 야성송씨(冶城宋氏) 집성촌인 고산정(高山亭 : 고산리 마을)은 초전면 소재지 서북 약 4km 떨어진 유곡천(酉谷川)의 세천(細川)을 끼고 있다. 서편에는 표고 181m의 산봉을 뒤로 위치해 있는 서편 마을(公西 : 음지뜸)과 그 동에 있는 동편 마을(公東 : 양지뜸)로 구성되어 있는 마을이다. 종손 송만수 씨에 의하면 집성촌이었으나 현재는 다른 성씨가 30% 정도 들어와 산다고 하였다. 초전면 소재지의 서북쪽 산곡을 바탕으로 서쪽으로는 벽진면으로 통하는 도로가 있고 동남으로는 초전의 중심과 가깝게 자리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고산동이 되었고, 1988년 5월 조례 1076호로 동(洞)이 리(里)로 개칭되었다. 4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백세각 뒤로는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어 소음 공해가 심한 편이다. 종손 송만수 씨에 의하면 문화재인 백세각과 너무 인접한 곳에 고속도로가 개설되어 마을주민과 야성송씨 문중에서 적극 반대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원래 노선에서 70m 정도 물리는 선에서 고속도로가 건설되었다고 한다. 제1차 유림단 의거 회의 장소가 바로 백세각이다. 1919년 경북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야성송씨 문중이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의 서명과 성주지역의 만세운동 참여를 논의한 곳이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김창숙을 비롯한 유림 대표는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제1차 유림단 의거(파리장서운동)를 추진하였다. 성주군 초전면 고산마을의 야성송씨 문중도 적극 참여하였는데, 이에 앞장선 사람이 공산 송준필 선생이다. 1919년 3월 초순 송준필 선생은 야성송씨 충숙공파의 종가인 백세각에서 문중회의를 열어 시국상황을 논의하였다. 이어 김창숙 선생과 만나 파리장서 계획을 협의하고 성주지역 서명자 규합에 나섰다. 송준필 선생은 통고국내문(通告國內文)을 작성하여 유림의 궐기를 독려하였으며, 4월 2일(성주장날) 성주읍내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는 데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백세각은 1982년 경북 유형문화재 163호로 지정되었다. 백세각 항일 의적비는 2004년에 송준필, 송홍래, 송회근, 송규선, 송훈익, 송천흠, 송우선, 송문근, 송인집, 송수근, 송명근 11명의 애국지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성주군은 파리장서 서명 참여자가 유림 137명 가운데 16명으로 가장 많은 지역이며, 독립운동으로 추서된 독립유공자만 85명인 독립운동의 중심지이다. 1919년 4월 2일 성주 장날 만세 운동에는 유림들과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성주 군민 3천여 명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일본 경찰의 발포로 사망 2명, 부상 20명, 투옥 46명 등의 피해를 보았다. 3. 공산 송준필 선생이 지은 ‘통고국내문’ ‘통고국내문(通告國內文)’은 일제강점기인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당시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공산 송준필 선생이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렸다.’며 유림과 국민들에게 궐기를 호소하기 위해 작성된 문서이다.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에 불교, 천도교, 기독교 등의 종교단체 대표가 참가하였는데, 유림은 빠져서 이에 대한 대책으로 파리장서운동이 전개되었다. 초안은 김창숙, 송규선, 곽종석이 작성키로 하고 송준필과 장석영은 파리장서 서명을 촉구하는 국내 통문을 작성해 영남 일대 유림대표 137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았다. 통고국내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렸다. 나라가 회복되면 죽어도 오히려 사는 것이요, 나라가 회복되지 못하면 살아도 또한 죽은 것이다. 이 날은 무슨 날인가? 서울 이하 밖으로 이름 있는 도시, 큰 항구 및 궁산 벽촌에 이르기까지 혈기를 가진 모든 사람들이 환호하고 고무하며 일제히 한마음으로 함께 창의(倡義)하였으니, 하늘의 뜻이 화를 뉘우치고 사람의 마음이 단결되었음을 이미 알 수 있다. 아! 우리가 입을 다물고 혀를 깨물면서 분루(憤淚)를 삼킨지 지금 10년이 되었다. 천 년에 한 번 있는 기회를 만나 만방의 공의(公儀)가 자재(自在)하여 나라를 회복할 가망이 있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떤 사람인데, 오히려 문을 닫고 앉아서만 있을 수 있겠는가? 이에 우리는 울분을 이기지 못하여 통문을 돌려 우러러 알리노니, 이는 진실로 팔역(八域)이 똑같은 심정일 것이며 여러 군자들도 또한 마음에 환할 것이다. 원컨대 지금부터 군(郡)에서 향(鄕)으로 향에서 동(洞)으로 각각 독립의 깃발을 세워 우리들의 종노릇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자, 그리고 다시 만국 회의에 편지를 보내 우리의 실정과 소원을 알게 하여 공의가 널리 신장되도록 한다면, 천만 매우 다행이리라.” 가수 스테파니, 쏘머즈, 지세희, 박영수가 참여하고 독립운동 되새기기 프로젝트 앨범 ‘통고국내문’ 음원이 2020년 12월 14일 발표되었다. 독립운동에 대한 소중함을 다시금 일깨우는 것은 물론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들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 오늘날 전 국민이 기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제작하였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선율이 담긴 음악으로 부활하게 됐다. 곡은 ‘통고국내문’ 싱어송라이터 쏘머즈가 원 글을 최대한 변형 없이 가사로 담아내며 완성도 높게 작곡했으며 노래에는 스테파니, 쏘머즈, 지세희가 참여하고 나레이션의 경우 배우 박영수가 담당했다. 프로젝트 앨범 ‘통고국내문’은 음원 수익은 경북 성주군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교육 사업에 사용될 예정이다. 4. 봉강서당에서 인쇄한 ‘통고국내문’ 송준필은 야성송씨 종택인 백세각(百世閣)에서 아버지 송기선과 어머니 영천 최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파리장서운동, 성주 3.1운동의 역사 현장이 바로 백세각(百世閣)이다. 송준필과 그 문인들이 성주시장 만세운동에 앞서 3월 26일 유림과 국민에게 독립을 촉구하는 글인 ‘통고국내문’ 3천 장을 인쇄하여 뿌렸다. 백세각에서 가까운 봉강서당에서 인쇄하고 태극기도 만들었다. 봉강서당은 백세각과 약간 떨어져 있는데, 종손 송만수 씨가 위치를 알려주었다. 백세각에서 출발하여 중부내륙고속도로 밑을 지나 조금 올라가다가 좌회전하여 좁은 길로 들어서 작은 저수지를 지나니 봉강서당이 나왔다. 안내 표지판이 없어 초행자는 찾기 힘들었다. 성주군에서는 송희규 선생의 정려각의 풀도 베고, 봉강서원 안내 표지판도 설치해야 하겠다. 봉강서원은 1785년 여러 고을 사림들이 본주(本州) 향교에 통문을 보내 야계 송희규 선생의 서원 창건을 요청하였고, 1786년 고상정 북쪽 명곡에 서원을 건립, 선생의 위판을 봉안하였다. 신연(新淵) 송사이(宋師頤) 선생을 배향했으며, 원액(院額)은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썼다. 1838년 지반이 기울고 무너져 손곡 야계 선생 분암(墳庵)이 있는 이곳으로 이건했으며 1868년 대원군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869년 그 자리에 사림들의 뜻을 모아 봉강서당을 세워 존모(尊慕)의 뜻을 기리고 있으나 아직 힘이 미치지 못하여 서원 복원을 못하고 퇴락한 곳이 많아 자손들의 정성을 모아 중수하고 여기에 그 뜻을 새긴다고 봉강서당 중수비에 나와 있다. 백세각에는 공산 송준필의 명에 따라 사람들이 사랑방에 모였다. 짧지만 강한 ‘통고국내문’의 문장에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일치하였다. 성품이 강건하고 재기가 출중하여 일찌감치 소년재사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인 송인집이 많은 사람들에게 통고문을 나눠주려면 일일이 필사를 하는 것보다 차라리 인쇄를 하는 방법이 더 나을 것 같다고 제안하였다. 인쇄를 하려면 멀리 대구까지 나가야 하는데, 일본경찰의 눈을 피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사전에 기밀이 새어나갈 우려가 있었다. 재사(齎舍)의 마루나무로 직접 판을 새겨 사용하자고 하니 공산 송준필 선생이 동의하였다. 마침 봉강서당에 있는 흥효당의 마루나무가 감나무로 ‘통고국내문’을 새겨 인쇄를 하기엔 적당하였다. 송인집이 글을 쓰고 나무를 다듬고 글을 새기는 건 송중립이 맡았다. 송인집이 나서서 책임을 분담하자,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인쇄된 통고문 3천 장은 송인집과 이수택에게 나누어져 각지에 배포됐다. 이와 함께 제작된 태극기 3천 장도 거사일까지 백세각 2층에 몰래 보관하였다. 인쇄에 사용했던 마루나무는 도로 제자리에 뒤집어 넣어 감쪽같이 흔적을 지웠다. 송준필이 통고국내문을 찍을 때 봉강서당 내 흥효당의 청목(廳木 : 청마루창 나무) 가운데 한 장을 떼어낸 다음 송인집이 글씨를 쓰고 송중립이 새겼다. 인쇄 뒤 판을 다시 마루창에 맞춰 경찰 눈을 피했다. 마루창 원판은 1980년 7월 다시 빛을 봤는데, 종손 송만수 씨에 의하면 현재 목판 2장 중 1장만 남았다고 한다. 백세각은 종가의 고택으로 보존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3.1운동 기념일에는 각종 행사가 열려 많은 성주군민과 외지인들이 참여하여 숭고한 독립운동의 정신을 기리고 있는 살아 있는 독립운동의 현장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백세각과 항일 유적비 살펴보기, ‘통고국내문’ 탁본뜨기와 사발통문 작성하기, 파리장서운동을 소재로 한 연극공연(외부 참가자도 참여 가능, 성주 별고을 광대단의 연극과 노래 공연, 성주 읍내 시장 보기(성주사랑상품권 사용)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양산시도 춘추공원에 항일독립기념관을 건립하고 있는데, 완성되면 양산시민들의 애국심 고취에 기여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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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독립운동가 송준필 선생과 원계서원동남문화관광연구소소장관광경영학박사 심상도 1. 송준필 선생의 생애와 독립투쟁 필자는 추풍령 옛길 답사를 위하여 5월 22일 김천시를 방문하였다. 김천도역 찰방 선정비가 있는 김천초등학교를 기점으로 출발하였다. 김천도역은 조선말까지 경남 서부지역(김천, 구미, 성주, 거창, 고령, 합천, 함양, 대구)을 관할하는 20개소의 속역을 거느린 중심역이었다. 양산의 황산역과 비슷한 중심역이었다. 추풍령 옛길을 따라가면서 원골을 답사하다가 원계서원을 만났다. 이곳은 바로 위대한 항일 독립투사인 송준필 선생과 관련된 역사 유적지였다. 사진을 찍다가 사당 문이 잠겨 있어 직방문에 붙어 있는 전화번호로 연락하였더니 증손자 송재인씨가 나와서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었다. 감사드리는 바이다. 영남의 성리학을 대표하는 대단한 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 1869~1943년) 선생은 경북 성주군 초전면 고산동의 야성송씨 종택인 백세각(百世閣)에서 아버지 송기선과 어머니 영천 최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字)는 순좌(舜佐), 호(號)는 공산(恭山), 본관(本貫)은 야성(冶城)이다. 송준필은 어려서부터 그 영민함이 남달랐으며, 여섯 살 때 할아버지 봉하(鳳下) 송홍익 공으로부터 사략(史略)을 배웠고, 열살 때는 부친 암하공(巖下公)에게서 소학(小學)을 배우며 학문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 15세(1874년) 때 여씨(呂氏) 부인과 결혼하였다. 성리학의 심오한 세계에 매료된 송준필은 18세가 되던 해, 새로운 스승을 찾아 나선다. 송준필은 1886년, 칠곡에 살고 있던 유학자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를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30세가 되던 1898년에는 안동의 거유(巨儒)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제자가 된다. 김흥락은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후손으로 퇴계의 학맥을 잇는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송준필 역시 김흥락의 문하에서 수학, 퇴계학맥도의 가장 마지막 부분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이후 회당 장석영, 심산 김창숙, 심재 조긍섭 등의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송준필 선생은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자 학문에 힘쓰며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의 굳건한 독립을 지키는 데 뜻을 두었다. 을사5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안동향교로 달려가 유림들과 참오적소(斬五賊疏)를 올렸다. 이후 봉강서당, 송간정 등에 거처하며 저술과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10년 한일합방 소식을 듣고 북쪽을 향해 통곡하였다. 일제의 감시하에서는 제대로 된 독립운동을 펼칠 수 없어 조국 독립의 열망을 품고 망명을 결심 후 1912년 만주로 향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노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신의주에서 접하고 눈물을 머금고 다시 되돌아왔다. 고종의 인산일을 기해 3.1독립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곽종석, 장석영, 김창숙 등 향내 유림들과 협의 후 성주 장날에 거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송준필 선생은 통고국내문(通告國內文)을 작성하여 유림들의 궐기를 호소하였다. “오호라 슬프도다. 죽고 삶은 하늘에 매였도다. 이 나라의 빼앗긴 주권을 다시 회복하면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이요, 이 나라의 광복을 되찾지 못하면 곧 살아있어도 죽음과 같으니라 ……” 이 항일 만세사건을 주도하고 일경에 체포되어 6개월여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였다. 선생의 둘째 아들인 송인근(宋仁根) 공이 만세사건의 전말과 선생의 옥중투쟁을 자세히 기록한 『심중실기(瀋中實記)』를 저술하였다. 『심중실기』에는 옥중기록과 문옥록, 저파리서, 통고국내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송준필 선생의 투옥 생활을 중심으로 정리되었지만, 파리장서를 작성하여 서명자를 규합하는 성주 유림계의 동향과 음력 3월 2일에 있었던 성주지역 만세시위 사건의 전말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옥중실기의 첫머리에는 송준필 선생이 1919년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 보낼 유림단의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를 곽종석, 장석영, 김창숙 등과 발기하고 통고국내문의 작성을 주도한 과정을 밝히고, 이어 성주지역에서의 서명자 규합 과정을 정리하고 있다. 다음에는 이 사건으로 인해 송준필 선생이 그해 음력 3월 5일 체포되어 7월 26일 무죄로 석방될 때까지의 투옥 생활과 공판 기록을 중심으로 관련된 자료들을 모은 것이다. 문옥록에는 감옥에 찾아온 사람의 성명과 성금 액수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2. 송준필과 파리장서 송준필 선생은 일제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것이 곧 ‘파리 장서사건’ 일명 ‘경북유림단사건’이다. 이 사건을 당시 경북경찰국에서는 유림대표의 ‘독립청원사건’이라 이름하여 조선총독에게 보고하였다. 이 극비의 보고서는 동사건 관계자를 분명히 하는 대목에서 거창의 곽종석, 칠곡의 장석영 그리고, 성주의 송준필, 김창숙 등 20여 명으로 지적했다. 3.1운동에 유교계 인사가 한 명도 참여하지 못하였던 것을 통탄하며 유림이 이에 뒤질 수 없다고 생각, 파리평화회의에 장서를 보내는 유림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야성송씨 종가인 백세각(百世閣)에 일가 친척을 모아놓고 궐기할 것을 당부하였으며 백세각을 활동본부로 하여 조선독립청원서(파리장서)를 작성하기 위해 유림의 대표인 장석영, 김창숙, 송규선 등과 회합하였다. 그 초안은 김창숙, 송규선, 곽종석이 작성키로 하고 송준필과 장석영은 파리장서 서명을 촉구하는 국내 통문을 작성해 영남 일대 유림대표 137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았다. 송준필은 파리장서 서명을 받는 도중에 보다 확실한 의지를 표명하려 장석영과 함께 ‘조선독립청원서’를 써 총독부에 직송하려다 발각되어 중단되었다. ‘경성유림’이 김창숙을 파리로 보내는 문제로 논의하던 즈음, 호서지방의 유학자인 임석후가 서울로 상경하였다. 그는 호서지방의 유학자 17명이 서명한 ‘독립청원서’를 소지하고 있었다. ‘경중유림’의 유진태와 이득년(李得秊)은 호서유림과 영남유림의 입장을 조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3·1운동은 조선 독립에 대한 민중의 의지를 대변한 사건이었다. 조선의 유림 역시 국제사회에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알리려 했다. 때마침 1919년은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 짓는 파리강화회의가 열리던 해였다. 게다가 승전국인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1919년 1월 8일, 미의회에 ‘대전 종결에 따른 14개조 원칙’을 제시했다. 그중에는 민족자결주의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각자의 민족은 자치적 발달이 가장 자유로운 기회에 따라 처결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과 ‘인민과 영토는 주권과 주권 사이의 거래물이 아니다’라는 내용이었다. 137명의 유림대표는 한국독립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보냈다. ‘파리에 보내는 편지’라는 뜻의 이 호소문은 ‘한국의 비천한 선비 모 등(某 等)은 감히 파리평화회의 대표 제위 각하들께 호소합니다’라는 문구로 시작한다. 호소문의 주요 내용은 일본의 침략에 대한 비판과 우리나라가 자주독립 국가임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것이었다. 파리장서에는 송준필을 포함해 최학길, 이경균, 이명균 등의 지역 인사들이 서명했으며, 송준필은 그가 태어난 성주 백세각에서 독립 시위를 독려했다. 대표파견 경비는 황일성(黃佾性)이 조달하였다. 그러나 장서는 김창숙이 파리로 가져가지 못하고, 당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대표로 선정되어 파리에 가 있던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되었으며, 또한 국내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성주의 만세시위운동에 관련되어 일본경찰에 붙잡혔던 송회근(宋晦根)에 의해 사건이 발각됨으로써 관계자들이 피체되어 옥고를 겪었다. 1919년 송준필 선생은 성주 3·1운동과 파리장서 주모자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일제 경찰들은 예우를 갖춰서 대우했다. 유림의 종장 송준필을 함부로 대했다가는 민중의 저항이 거세질 것을 예상한 일경들의 궁여지책(窮餘之策)이었다. 송준필은 일경의 혹독한 심문에도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재판을 위해 대구지방법원에 도착하고 난 후에도 송준필 선생은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일관해 좌중을 압도했다. 당시 수감자들은 강제로 머리를 깎아야 했지만 간수들은 감히 송준필의 머리카락에 손을 대지 못하였다. 독방에서 도포를 입고 지냈으며, “내 목은 차라리 자를 수 있을지언정 내가 죽기 전에는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을 것이다.”라며 상투를 자르지 않았다. 당당한 풍채의 송준필 선생은 옥고를 치르면서도 한결같이 위엄을 유지하였다. 3. 김천의 원계서원 출옥 후 일경의 감시와 탄압이 계속 이어지자 송준필 선생은 성주에서 김천 부곡동 원골 음지마을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에서 원계서당을 개설하여 후진을 양성하며 훗날을 기약하였는데, 문하에서 수백 명의 제자가 배출되었다. 자신이 거처하는 집을 ‘원호재’라 이름 짓고, 문 앞에 ‘황학동천백운산방(黃鶴洞天白雲山房)’이라는 글을 써 붙였다. 이곳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1942년 원계정사를 세웠다. 경상도의 이채진(왜관), 윤한오(예천), 멀리 전라도, 충청도에서 제자들이 공부하러 옴에 따라, 건물 4칸을 증축하였다. 그가 75세의 일기로 별세한 이후 그의 제자들과 유림들이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68년 원계서원을 낙성하였다. 강당의 이름을 정학당(政學堂)이라고 하였다. 이듬해 서원 뒤편에 사당을 낙성하고 숭덕사(崇德祠)라 이름하였다. 사당은 옛 원계정사 터에 세워졌다. 그 뒤 1971년에 이곳에 송준필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또 그해 동재인 일성재와 서재인 제양당, 문루인 직방문이 낙성되었다. 원계서원은 약 300평의 땅에 전학후묘(前學後廟)라는 전형적인 서원 건축 양식으로 세워졌다. 정학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 일성재와 제양당, 숭덕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설립되었다. 숭덕사의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제자들은 원계서원을 유지하기 위해 동도계, 동참계 등을 만들어 시행하였다. 동도계는 공산을, 동참계는 송준필의 3남 송수근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계이다. 동도계는 100여 명의 제자에 의해 만들어져 199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현재 신입 회원은 없고 기존 회원들이 사망함에 따라 동도계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는 송준필의 후손들이 서원을 꾸려가고 있다. 『공산집』 판각도 송준필의 제자가 모든 비용을 댔다. 『공산집』을 판각한 사람은 창녕 사람 이근이었다. 향사례도 동도계에서 주관하였다. 당시 매년 향사례는 당일 입제로 초 3월 상정일에 시행되었다. 그러나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약 3년 전부터 당일 입제로 4월 넷째 주 공휴일로 날짜를 변경하였다. 목판은 안동에 위치한 국학진흥원에 기부하였다. 문중에서는 『공산선생문집』, 공산의 연혁을 기재한 『공산송선생사적』, 원계서원의 연혁과 구조, 송준필의 연혁과 송준필 사상의 특성을 기재한 『공산 송준필 선생과 원계서원』, 공산의 아들이자 독립운동가인 송수근의 문집인 『은포문집』, 송수근의 만세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국역 유림단독립운동실기[심중일기]』, [유림단독립운동실기 편찬위원회] 등을 발간하여 조상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송준필 선생 증손자인 송인수 씨가 2006년 성균관대에 고서 498종 1,178권을 기증했다. 책들은 대부분 공산 선생이 생전에 지니던 문집으로 선생이 직접 집필한 저서와 구한말 여러 유학자 문집이 다수 포함돼 있다. 송준필 선생은 1934년 도동서원 원장, 1935년 자동서원 원장, 1936년 임천서원 원장, 1938년 도산서원과 금오서원 원장, 1939년 옥동서원 원장, 동락서당 당장, 1941년 금호서원 원장을 역임하였다. 1943년 8월 28일 원계정사에서 별세 후 장례식에 1천여 명의 조문객이 모여 성주로 가는 장례 행렬이 2km에 달했다고 한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 정부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송준필 선생의 3남인 송수근(1896~1969년)은 성주 3.1만세운동을 주도하고 파리장서에 서명하였다.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0개월 언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 성주지회(星州支會)를 조직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였으며 군자금 모금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90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4. 송준필 선생의 사상과 저서 공산 송준필 선생은 한말 영남 유학의 석학들과 폭넓게 왕래 문학(問學)하면서 퇴계 이후 영남학파의 성리설을 수렴하여 종합하고 체계화했던 인물이다. 송준필 선생의 성리설은 주로 이황(李滉)의 심합이기설(心合理氣說)을 따른 장복추의 영향 속에 형성되었다. 송준필 선생은 이황의 『성학십도(聖學十圖)』 제6도를 심화시킨 『심통성정삼도발휘(心統性情三圖發揮)』(1928)에서 송대 성리설과 퇴계 학통의 성리설을 정연하게 체계화시키고, 나아가 자신의 성리설을 정립하고 있다. 이 저술은 20세기 초에 정리된 성리학설의 일대 집약이라 할 수 있다. 송준필 선생은 당시의 다양한 성리설에 대해 예리하게 분석하였다. 송준필의 선생의 성리설은 주로 이황(李滉)의 심합이기설(心合理氣說)을 따른 사미헌 장복추의 영향 속에 형성되었다. 송준필 선생은 성리설의 학통에서 대산 이상정(李象靖)을 중시하여 주자와 퇴계의 정맥(正脈)을 이상정이라고 밝혔다. 나아가 이황은 마음을 통합적으로도 설명하고 분별적으로도 설명한 데 반해, 이이(李珥)는 통합적인 파악을 내세워 분별적 이해를 공격했다고 지적하였다. 송준필 선생은 이현일(李玄逸), 권상일(權相一) 등은 분별적 설명을 강조하여 통합적 파악을 거부한 반면, 이상정은 이러한 대립된 견해를 통합하여 이황의 본래 의도를 발휘하였다고 본다. 공산은 심즉리설(心卽理設說)과 심즉기설(心卽氣說)의 일면적인 타당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심합리기설(心合理氣說)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진상의 심즉리설(心卽理說)은 보통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성인의 마음을 가리킨 것이라 지적하면서도, 마음과 본성을 일치시켜 마음이 기질과 결합된 사실을 외면하는 것은 일치시킬 줄만 알고 분별하여 이해할 줄은 모르는 것이라 비판한다. 또한 전우(田愚)의 성존심비설(性尊心卑說)은 본성을 이(理)로 보아 존중하는 것을 시인하면서도, 마음을 본성과 상대시켜 비하했는데, 송준필은 이러한 견해를 거부하였다. 성리학에 관한 저서로 『대산서절요(大山書節要)』, 『사물잠집설(四勿箴集說)』 등이 있으며, 예학에 관한 책으로 『육례수략(六禮修略)』이 있다. 또한 수양론 및 윤리서로 『오선생미언(五先生微言)』, 『정학입문(正學入門)』이 있고, 역사서로 『속속자치통감강목(續續資治通鑑綱目)』이 있다. 문집으로는 『공산집(恭山集)』 등 비중 높은 역작을 많이 남겼다. 원계서원을 지키고 있는 송준필 선생의 증손자인 송재인 씨에 의하면 서원의 보수에 대해 국가나 김천시의 지원이 없어 애를 먹고 있다고 하였다. 담장도 전통 담장이 아니고 시멘트 블록으로 보수하여 안타까웠다. 송준필, 송수근 2대에 걸쳐 독립투사를 배출한 명문가문의 원계서원을 김천시는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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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구국에 앞장선 양산의 광주 안씨 문중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소계서원과 임진왜란 공신 소계사(蘇溪祠)는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율리마을에 있다. 조선 후기인 1783년(정조 7년)에 광주 안씨(廣州 安氏) 문중에서 건립한 사당이다. 1866년(고종 5년)에 소계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 방침에 따라 철향(撤享)한 뒤 서당으로 바뀌었다. 1950년에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로 재건하고 이어 강당을 중건하였다. 소계사는 광주 안씨 판사공파(判事公派) 양산 문중(梁山 門中)의 파조인 조선 태종 때의 유학자인 안몽득(安夢得)과 아들인 계산 안우(安宇), 치암 안주(安宙), 광려 안택(安宅)을 주향(主享)으로 모시고 있다. 광주 안씨가 율리마을에 터를 잡게 된 것은 광주 안씨 판사공파 양산 문중의 파조 안몽득(安夢得德)의 손자 계산 안우(安宇) 공이다. 안우는 조선 초기 함안(咸安)에서 출생하여 1524년(중중 19)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여 개성 및 밀양, 선산, 평산 등지의 부사를 역임하고 재임 시에는 청백리로 청빈하게 생활하였다. 이후 양산군 상북면 소토리에 거주지를 옮겨왔다. 이곳에 집성촌을 이루어 살기는 약 500여 년이 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공신인 구암(龜庵) 안근(安瑾), 도훈도(都訓導) 안수(安琇), 주부(主簿) 안시명(安諟命), 첨사(僉使) 안이명(安以命), 매죽헌(梅竹軒) 안신명(安信命)을 배향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안근은 아들과 사촌 안수, 조카 안제, 종질 신명, 양산의 이수생, 이몽란, 이웃 마을의 정호인, 정호의 등과 함께 양산뿐만 아니라 경주, 울산, 서생포, 대구 등지에서 왜적에 대항하여 싸웠다. 안근은 왜적이 쳐들어오자 아들들과 집의 노비를 모아 군량과 병기를 정비하여 이웃 사람들과 일어나 수백 명의 의병을 모집하였다. 안근은 양산을 지키기 위하여 낙동강 하구를 거슬러 오르는 왜적을 구포와 금정산에서 맞아 수십 명을 베었고, 그의 종제 안수(安琇)는 동래 출신 김정서(金廷瑞)와 함께 동래전투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안근은 임진왜란에서 세운 공으로 선무원종 삼등공신에 책봉되었으며 관직은 주부(主簿)에 이르렀다. 아들 안시명은 임진왜란 중의 공적으로 교첩을 받았고, 선무원종 삼등공신에 책봉되었으며, 1603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셋째아들 안이명은 백호장군(白虎將軍)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정유재란 때에는 이충무공 휘하에서 당포만호로 있다가 훈련원정(訓練院正)에 승진되고 다시 가리포 첨사에 올랐다. 1597년(선조 30) 10월 16일 밤에는 해남에서 적 13명을 베었으며 왜적에게 투항한 송원봉의 목을 베어 왔다. 『난중일기(亂中日記)』의 1597년 2월 4일자에서는 안이명을 당포만호(唐浦萬戶)로 기록하고 있다. 선무원종공신 1등에 서훈되었다. 소계서원에는 광주 안씨의 3명의 현인, 5명의 충신 위패와 비를 안치하고 있다. 조선 태종 때 유학자인 안몽득(安夢得)과 후손인 안우(安宇), 안주(安宙), 안택(安宅) 3형제와 임진왜란 공신 안근(安瑾), 안수(安琇), 안시명(安諟命), 안이명(安以命), 안신명(安信命)을 가리킨다. 소계서원은 1866년에 중건, 1868년에 철향(撤享)된 뒤, 서당으로 바뀌었다. 1950년에 향중의 사론(士論)에 의하여 안몽득(安夢得)과 삼현오충(三賢五忠)을 향제하고 건물은 전학후묘의 형태로 재건하고, 이어 강당을 중건하였다. 소계사에는 양산군수를 지낸 이능화의 「양산삼현오충가(梁山三賢五忠歌)」와 안효진(安孝進)의 시가가 전해지고 있다. 소계사 입구에 있는 두 기의 비석은 양산군에 무기를 사도록 기금을 낸 여문조를 기리는 불망비, 양산군수 김여익의 선정비다. 2. 안씨 문중의 무과 교지 2002년 안전한 보관을 위해 통도사성보박물관에 임시로 기탁 보관하였던 양산시 소장 문화재 38건 153점이 2012년 12월 20일 유물전시관 수장고로 이관되었다. 이 중에서 대표적인 유물로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친 양산의 광주 안씨 문중의 안근, 안시명 공의 귀중한 교지(도유형문화재 제149, 150호)가 포함되어 있다. 신용철 양산시립박물관장이 밝힌 교지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안근의 교지는 1594년 무과 병과에서 118등으로 입격한 내용을 담고 있다. 또 다른 교지는 참봉인 안시명이 무과 병과에서 343등에 입격한 내용이다. 원래 무과는 갑 3명, 을 5명, 병 20명을 선발하지만 이들 교지를 통해 당시에는 임진왜란이 발생하고 또 전란이 막 끝난 후이기 때문에 많은 무과생들을 선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교지는 조선시대 국왕의 말씀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동시에 국왕이 관직 및 과거 합격 증서, 토지나 노비, 기타 특권을 내리는 문서 가운데 첫 행에 ‘교지’라고 적는 문서군을 통칭하는 용어로도 사용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왕지(王旨)’라는 용어가 사용되다가 1435년(세종 17년)에 교지를 사용하도록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이들 교지라고 지칭된 문서는 관직 임명 문서인 고신(告身, 사령장), 과거 합격 증서인 홍패(紅牌)・백패(白牌), 추증 교지(追贈敎旨), 시호 교지(諡號敎旨), 면역 교지(免役敎旨), 사패 교지(賜牌敎旨) 등이 있다. 무관 고신교지는 조선시대 무관 임명장이다. 즉 1594년(선조 27) 안시명이 받은 교첩(敎牒) 1점으로 교첩은 5품 이하의 관직에 대해 이조나 병조에서 왕명을 받아 발급하는 임명장으로 보면 된다. 문서의 내용은 향교생 안시명을 종9품 장사랑(將仕郞) 군자감 참봉으로 임명하는 것으로 발급 일자인 만력 22년(1594) 7월 옆에 군공(軍功) 때문에 임명한다고 적혀져 있다. 안시명은 임진왜란 때 아버지 안근을 도와 전쟁에 참전하였다. 다른 지역의 의병과 합세하여 울산, 경주 등지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전쟁을 치르는 도중에 교첩을 받았다. 안시명은 이후 1603년 무과에 합격하여 관직이 훈련주부에 이르렀다. 3. 안근이 참여한 문천회맹(蚊川會盟) 안근(安瑾)은 문천회맹에 참여하였다. 문천회맹(蚊川會盟)은 임진왜란 당시 영남 의병장들의 맹약이다. 문천(蚊川)은 경주의 남쪽을 흐르는 하천으로 남천이라고도 부른다. 문천회맹은 왜군에게 대항하기 위해 경주를 중심으로 경주부윤 윤인함과 판관 박의장을 필두로 영남 각지에서 의병장들이 1592년 6월 9일 경주 문천에 모여 말의 피를 나누어 마시고 민군이 합세하여 결사 항전을 다짐했던 회합이다. 1593년 2월 문경의 당교회맹(唐橋會盟), 1593년 10월 언양의 구강회맹(鷗江會盟), 1596년 3월 대구의 팔공산회맹(八公山會盟), 1597년 7월의 화왕산회맹(火旺山會盟)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실제로 문천회맹에 참여했던 의병장들 중 살아남은 다수가 구강회맹, 팔공산회맹과 화왕산회맹에 참여하였다. 죽계실기에는 양산지역 의병장들이 빠져있다. 문천회맹록(蚊川會盟錄)은 여러 본이 있는데, 동엄실기(東广實紀)에 따르면 양산의 의병장은 다음과 같다. 이몽란(李夢鸞), 안근(安瑾), 정호의(鄭好義), 정호인(鄭好仁), 최기(崔沂) 등이다. 문천회맹에는 많은 의병들이 참여하였다. 이들의 신분은 대개 지역의 유현(儒賢 : 유학에 정통하고 언행이 바른 사람)이지만 김호와 같은 전직 관리부터 백의의 상민과 천민은 물론 승려까지 다양했다. 연령도 60대의 노구를 이끌고 참전한 김응하에서부터 18세의 소년 장사 황희안까지 왜적을 물리치는 데 있어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4. 안시명은 구강회맹(鷗江會盟)에 참여 구강회맹은 임진왜란 당시인 1593년 영남 일대 의병장들이 울산 구강에 모여 논의한 전략 회의인데, 구강(鷗江)은 울산 동천(東川)이며, 구체적으로는 동천 하구에 있는 반구동을 의미한다.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 10월 26일 울산, 언양, 경주, 장기, 연일, 영천, 양산, 그리고 거주지를 알 수 없는 의병장들이 구강에 모였다. 울산의 김태허(金太虛), 윤홍명(尹弘鳴), 서인충(徐仁忠) 등 22명, 언양에 신전(辛荃) 등 3명, 경주에 권사악(權士諤), 김광복(金光福), 견천지(堅川至) 등 29명, 장기에 이대임(李大任) 등 2명, 연일에 김현룡(金見龍) 등 4명, 영천에 강일찬(姜日纘) 등 3명, 양산 안시명 1명, 거주 불명 오열(吳悅) 등 3명으로 모두 67명이다. 구강회맹에 참여한 의병들의 연령대를 보면 경주의 김응생이 16살로 가장 어렸으며, 김한걸 17살, 황희안 의병장은 18살로 십대가 3명이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의병장은 울산의 이응춘 의병장으로 52살. 3,900여 명의 의병이 결의를 다졌다. 윤홍명(尹弘鳴)의 『화암실기(花巖實紀)』 중 「구강동고록(鷗江同苦錄)」이라는 항목에 그 명단이 실려 있다. 명단은 먼저 이름을 쓰고, 세주(細註)로 자(字), 호(號), 본관(本貫), 시임 관직(時任官職), 시호(諡號), 녹훈(錄勳) 여부를 기록하였다. 『화암실기』는 선무원종공신을 책훈한 1605년(선조 38) 4월 이후에 작성한 것이다. 회맹 당시에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왜군이 서생포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간혹 울산, 경주에 출몰하는 등 전쟁이 소강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이 모임은 ‘회맹’보다는 왜군의 동정을 살피면서 이에 대처할 전략을 논의한 자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경주의 의병장 김득복은 종군록(從軍錄)에서 “구강에서 여러 의병장을 만나 동고록(同苦錄)을 닦았다. 적의 형세가 움츠러들었으나, 겁탈하고 노략질하는 도적이 아직도 제멋대로 날뛰고 있다. 참으로 슬프고 놀라운 일이다. 마땅히 각자 마음 속 깊이 맹세하자고 했다.”고 기록했다. 5. 안근은 아들과 함께 팔공산회맹 참여 윤홍명(尹弘鳴, 1565~?)은 임진왜란 당시 28세로 종횡무진의 큰 활약을 펼쳤다. 파평 윤씨로 자는 응시(應時), 호는 화암(花巖), 현감 윤응경(尹殷卿)의 증손이다. 울산의 의병은 3천여 명이었는데, 구강에서 모여 회맹하여 결사보국할 것을 다짐하였다. 윤홍명도 참여하였다. 윤홍명은 1592년 4월 23일 1차 개운포 전투에서 적을 무찌르는 데 앞장섰으며, 7월 18일 경주 의병을 도와 형산강을 거슬러 오르는 왜적을 쳤다. 1593년 2월 17일 남쪽에서 모화로 들어오는 왜적을 무찌르고, 곧 문경으로 달려가 전국의 의병들이 결전한 문경 당교(唐橋) 전투에 이경연과 함께 울산 의병을 대표해 참전했다. 1593년 10월 29일 울산 의병들이 모여 왜적을 쳐부술 것을 결사 다짐한 구강회맹을 앞장서 주도했다. 1595년 2월 12일 불국사로 쳐들어오는 왜적을 막았다. 2월 18일 무룡산의 고개 달현 전투에서 경주 의병과 합동작전에 참전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정유재란 때는 창녕의 화왕산성으로 달려가 곽재우 장군의 진중에서 함께 싸웠다. 임진왜란 후 윤홍명은 네 고을에서 벼슬을 했으며, 사후 형조정랑(刑曹正郎, 정5품)에 증직되었다. 윤홍명이 병신(丙申) 3월에 지은 화암실기(花巖實記)에 양산의 의병장인 안근과 아들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화암실기는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졌으나 분실되어 존재 유무를 아는 이도 몇 안 된다. 문중의 일원 중 한 사람이 송호일기, 인심재일기, 제월당실기 등에서 윤홍명 관련 글만 추출하여 편집・해석하여 화암실기라고 이름붙인 책이 전해지고 있다. 화암실기는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울산문화사 뿐만 아니라 조선 의병사 연구의 중요 자료가 되고 있으며, 일본에서도 중요기록으로 인용하고 있다. 대구 팔공산 동화사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 유정이 이끄는 승병의 지휘소가 됐다. 사명대사가 팔공산 일대에서 활약한 때는 1595년 무렵이다. 동화사 성보박물관에는 사명대사의 인장인 ‘영남도총섭인(嶺南都總攝印)’과 승군을 지휘할 때 불었던 소라나팔, 나무로 만든 밥통인 비사리구시가 보관돼 있다. 동화사 봉서루 뒷면 벽에는 ‘영남치영아문(嶺南緇營牙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영남치영아문은 영남지역 승병 본부 출입문이라는 뜻이다. 1596년 도체찰사 류성룡의 지시로 영남지역에 거주하는 의병장이 공산성에서 회맹을 했다. 팔공산 회맹은 6개월 뒤 다시 열렸는데, 전국 16개 지역에서 105명의 의병장이 참여하였다. 윤홍명이 쓴 화암실기에 나오는 양산 출신 의병장은 이수필(李秀弼), 이몽란(李夢鸞), 안근(安瑾), 안시명(安諟命), 안이명(安以命), 정호인(鄭好仁), 최기(崔沂), 정호의(鄭好義) 등이다. 의병장 곽재우 장군이 지킨 화왕산성의 ‘화왕성동고록(火旺城同苦錄)’에 안근 부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안근, 안시명(字 士明, 생년 乙丑), 안이명(字 士順, 丁卯), 이몽란, 이수필, 정호의[양산 개정(介井)]. 양산 광주 이씨 문중의 안근, 그의 아들인 안시명, 안이명, 사촌 안수, 조카 안제, 종질 안신명 등 집안 전체가 의병활동을 하였다. 전재산을 털어 무기를 준비하고 용감하게 구국의 길에 떨쳐나섰다. 왜적이 쳐들어오자 전국 곳곳의 관군은 지리멸렬하여 도망치기에 바빴지만 지역의 유현들과 일반 백성들이 과감하게 재산과 목숨을 바쳐 싸웠기에 왜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양산시민들은 양산의 명문 가문인 광주 안씨 일가의 공적을 알 수 있는 상북면 소토리 율리마을의 소계사를 참배하고 후세 교육의 귀감을 삼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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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화요칼럼]직지사사명대사 공원과 통도사 비교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직지사로 출가한 사명대사 김천시는 최근 직지사 입구에 거대한 사명대사 공원을 새로 조성하였다. 직지사 내부에는 사명대사를 기리는 사명각이 있다. 필자는 지난 5월 29일 직지사, 사명대사 공원을 방문하였다. 직지사의 사명각은 사명대사의 진영을 봉안하여 대사의 업적을 기리는 건물로 조선 정조 11년에 건립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975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원으로 중창한 것이다.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정면 3간, 측면 2간의 팔작지붕으로 가구식 기단 위 자연석 초석을 설치하였다. 일출목 이익공 양식이며, 부연을 덧달아 낸 겹처마 양식이다. 사명각의 벽면에는 사명대사가 일본으로 건너가 여러 가지 이적을 보이며 왜인들을 감복시키고 백성들을 구출해 오는 과정을 스토리텔링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관광객들은 벽화를 보면 사명대사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다. 사명 유정(1544~1610)은 조선 중기의 승려이자 승병장으로 활약하였다. 경남 밀양 태생으로 풍천 임씨(豊川 任氏)이며, 속명은 응규(應奎), 자는 이환(離幻)이다. 임수성(任守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증조부 효곤(孝昆)과 조부 종원(宗元)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지낸 사족(士族) 출신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는 7세에 이미 조부에게서 사략(史略)을 배웠다. 성사(聖師)의 법명은 법명은 유정(惟政), 호는 사명당(四溟堂) 또는 송운(松雲)이다.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로 불린다. 조선 명종(明宗) 15년 직지사에서 출가하여 신묵화상(信默和尙)의 제자가 되었다. 13세 때에 대구도호부사를 역임한 조부 임종원에 의해 황악산에 은거하고 있던 유촌 황여헌(黃汝獻)에게 유학을 오게 된다. 황여헌은 세종 때의 명재상 황희(黃喜)의 현손(玄孫)으로 당시 석학으로 문명이 높았던 인물이다. 어린 사명당은 과거공부를 하다가 14세 때에 모친을 여의고 15세 때 부친마저 돌아가시자 공부에 뜻을 접고 방황을 거듭한다. 부친을 여의자 직지사에 출가하여 신묵대사의 제자가 되었다. 신묵대사가 참선을 하던 중 꿈에 천왕문 옆 은행나무에 황용이 서려 있는 것을 보고 깨어나 그 자리에 가보니 한 소년이 자고 있었다. 신묵대사는 그 소년을 제자로 삼았는데 이 소년이 사명대사이다. 양친을 잃고 괴로워하던 사명은 신묵에게 출가하기를 소원한다. 신묵은 이 아이가 자신이 꿈에서 본 황룡임을 직감하고 거두어 제자로 삼았다. 당시 은행나무는 1800년 만세루가 불타면서 같이 타버렸고, 현재 천왕문 앞에 있는 돌은 소년 사명당이 낮잠을 자던 돌이라고 전한다. 1561년 18세에 승과(僧科)의 선과(禪科)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이후 당대의 거유 노수신 등에게 수학하며 학문의 깊이를 더하였다. 1573년 30세에 직지사 주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에 옛 스승인 황여헌의 딸이 직지사로 찾아와 만난 것을 다른 상좌승이 고자질해 산문출송(山門黜送 : 승적을 박탈당하고 절에서 쫓겨남)을 당하게 된다. 사명이 포행(布行) 수행 중 속세의 누나와 함께 온 여인들과 마주쳤으나 우연한 조우였다는 것이 봉은사 주지 보우(普雨)의 재판으로 밝혀져 허물없음으로 결론이 났다. 경남 남해 보리암에서 수행 정진하다가 1564년 20세에 직지사로 돌아온다. 사명당은 1572년 신묵대사의 뒤를 이어 마침내 직지사 주지가 된다. 사명당이 주지로 임명돼 지은 '귀향'(歸鄕)이라는 시(詩)는 당시 직지사의 사세와 자신이 출가했던 직지사에 대한 진솔한 소회가 잘 담겨 있다. 1575년 선종의 수사찰 봉은사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3년 동안 청허(淸虛) 서산대사 휴정(休靜)을 모시며 선지(禪旨)를 맛보았다. 서산대사는 사명과의 만남을 청허당집(淸虛堂集)에서 “사문(沙門)의 일척안(一隻眼 : 도를 보는 또 다른 눈)/ 그 안광(眼光)이 팔방(八方)을 비추니/ 위엄은 왕이 칼을 잡은 듯하고/ 허심(虛心 : 맑고 비어서 모든 사물에 즉응(卽應)하나 결코 거기 물들지 않는 경계)은 거울이 대(臺)에 있는 듯하네”라고 말했다. 서산대사의 제자가 되어 선리(禪理)를 참구하다가 43세 되던 해 옥천산의 상동암에서 마침내 무상(無上)의 법리를 깨달았다고 한다. 1589년에는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己丑逆獄)에 휘말려 투옥되었다가 무죄로 풀려났다. 금강산 보덕사, 팔공산, 청량산, 태백산 등지에서 수행의 깊이를 더하였다. 2.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 활약한 사명대사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을 조직해 승병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사명대사는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도하던 중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조정의 근왕문과 스승 서산대사 휴정의 격문을 받고 건봉사에서 150명의 승군을 모집하여 서산대사와 합세하였다. 사명당은 임진왜란을 맞아 출병하며 우국충정의 심정을 이렇게 읊었다. “하늘은 이미 추워지고 흰 눈은 하염없이 내린다/ 붉은 머리 왜적의 옷이니 승병들이 종횡으로 달려간다/ 어육(魚肉)이 된 백성이 노상에 송장되어 베개하고 누웠네/ 슬프고 슬픔을 통곡함이여 날은 저물고 푸른 산은 무성하기만 하구나/요해(遼海)는 어디메요 임 계신 곳 바라보니 하늘 끝이 아득하다.” 직지사는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불태웠다. 사명은 스승인 서산대사를 도와 부총섭과 도총섭으로서 평양성 전투와 울산, 순천 전투 등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1593년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된 사명대사는 승병 2천여 명을 이끌고 평양성 탈환작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그후 사명대사는 악견산성, 의숭산성, 용기산성, 팔공산성, 금오산성 등을 수축하고 왜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스승 휴정을 도와 승병을 일으키고 전장에서 큰 공을 세워 당상관(堂上官))에 올랐다. 의주 행재소로 피란한 조선 조정은 묘향산에 있던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静)을 초치해 세란(世亂)에서 나라를 구해줄 것을 당부하고 그에게 승군(僧軍)을 관장하게 하였다. 휴정은 전국 사찰에 격문을 보내 궐기할 것을 호소하는 한편, 스스로 모집한 승병 1,500명을 거느리고 순안 법흥사에 주둔했다. 당시 금강산에 머물던 사명은 의승(義僧)을 모으고 있었는데 휴정의 격문을 보고 법흥사에 합류했다. 사명대사는 승병을 이끌고 일본군이 점령한 평양성 인근에 주둔하였다. 이 무렵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의승군의 수는 무려 5천여 명에 이르렀다. 1592년 12월 명나라 원군이 도착하자 1593년 1월 관군과 사명의 승군이 합동으로 평양성을 공략해 평양성을 탈환했다. 평양성 탈환 후 개성까지 회복한 명나라의 원군과 관군은 한양 수복을 위해 일본군을 추격하였다. 벽제관(碧蹄館) 부근에서 전투를 벌이던 중 크게 패하였다. 사명대사가 이끄는 승병은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장군과 함께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에 대승을 거두고, 이어 노원평(蘆原坪) 전투에서도 승리하였다. 선조는 전공을 세운 사명대사에게 당상직(堂上職)에 오르게 하는 특혜를 베풀었다. 1594년(선조 27년)에는 서생포 왜성에서 외교 밀사로 일본군 선봉장 가토기요마사와 네 차례 회담하였다. 서생포 성은 바다와 육지를 잇는 길목으로 당시 일본군의 요새였다. 명나라와 일본의 비밀회담 내용을 탐지해 내 조선의 위기를 막아낼 수 있었다. 사명당은 득도(得道)의 경지에 이른 불승(佛僧)으로서 필담을 통해 가토기요마사를 압도하는 한편, 가토와 고니시유키나가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정보도 적절히 이용했다. 전쟁이 끝난 후 대마도를 거쳐 일본으로 가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강화를 협의하는 회담을 하여 외교성과를 거두었다. 사명대사는 일본의 새로운 통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1605년 2월과 3월 두 차례 후시미 성에서 만나 담판을 지었다. 사명대사는 3천여 명의 남녀 포로를 귀환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10여 년의 호국활동 후 64세에 세속의 일을 정리하고 해인사로 내려가 정양(靜養)하다가 광해군 2년 67세를 일기로 가야산 해인사 홍제암에서 입적하였다. 3. 김천시의 사명대사 공원과 직지문화공원 경북 김천시는 최근 직지사 바로 옆에 사명대사 공원, 김천시립박물관을 건립하여 관광객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직지사 앞에는 기존의 직지문화공원이 있다. 이와 연결되는 사명대사 공원, 김천 세계도자기박물관, 언론인 최석채 선생 기념비, 친환경생태공원, 조각공원, 시비, 분수대, 쉼터, 인공폭포, 거대한 장승, 둘레길, 김천시립박물관 등이 조화를 이루어 전체를 둘러보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직지문화공원에는 형제 작사가인 고려성(본명 조경환 1910~1956), 작곡가 나화랑(본명 조광환 1921~1983)의 형제 노래비가 있다. 고려성이 작사한 히트 가요는 나그네 설움, 어머님 사랑, 비오는 해관, 춘소화월, 마상일기, 금박댕기, 삼각산 손님, 자명고 사랑, 비에 젖은 주막집, 고향에 찾아와도, 아네모네 탄식, 해방가요 1호 사대문을 열어라 등이다. 나화랑은 고려성의 셋째 동생이다. 나화랑이 작사한 히트곡은 무너진 사랑탑, 울리는 경부선, 닐니리 맘보, 향기품은 군사우편, 뽕따러 가세, 가야금 타령, 청포도 사랑,비의 탱고, 이정표, 열아홉 순정, 님이라 부르리까, 정동대감, 울산 큰애기, 군가 멸공의 횃불 등 500여 편의 가요를 작곡하였다. 고려성 나화랑 형제는 김천시 봉산면 인의리에서 태어났는데, 이곳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고향 마을이다. 사명대사 공원 앞에는 시조 시인 백수 정완영(1919~2016)을 기리는 백수문학관이 있다. 사명대사 공원은 직지사 바로 앞인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92번지 일원에 부지면적 14만 3천 695㎡(약 4만 3천 400평), 건축 연면적 9천 624.42㎡(약 2천 900평) 규모로 조성하여 2021년 4월 준공되었다. 10년간에 걸쳐 총 사업비 816억 원을 투자한 문화・생태・체험형 관광지다. 김천시립박물관은 사명대사 공원에서 유일한 현대식 건물로 최근 완공되었는데, 연면적 5천 241㎡(약 1천 586평), 지상 3층 규모로 전시실, 어린이문화체험실, 강당 등이 있다. 사명대사 공원의 건물은 고풍스런 한옥을 설치하여 한국 고유의 멋을 자랑하고 있었다. 사명대사 공원을 살펴보고 굉장히 감동받았다. 한옥 숙박동은 5동으로 하루 숙박인원은 총 38명이다. 평화의 탑인 5층 목탑은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앞에는 연못이 조성되어 있어 운치가 있었다. 솔향다원, 건강문화원에서는 다도체험,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평화의 탑은 높이 41.5m. 국내에서 가장 높은 목탑이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목조 5층 탑이다. 규모와 위용에서 사명대사 공원의 랜드마크다. 시공사인 금진팀버E&C에 의하면, 평화의 탑 공사에 쓰인 목재의 양은 37만 3,261재 약 1,246㎡다. 단면이 가로 세로 각 1m인 목재 1.246㎞가 쓰였다. 이 길이를 아파트 높이로 계산해보면 460층을 넘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5층 목탑 옥개석 부분을 덮은 기와는 3만 6,134장, 전체 공사 기간은 7개월이었다. 김천 사명대사 공원에는 한옥마을 한복체험 성공 신화의 주인공 한복남 (대표 박세상)의 참여로 ‘낮’부터 ‘밤’까지 이어가는 체험과 힐링의 관광지로서의 사명대사 공원 리포지셔닝 전략을 펼칠 계획이다. 한복체험, 트래블스냅, 한옥체험, 야경투어 등 한문화 콘텐츠를 활용한 체험관광상품 상시 운영으로 자신만의 특별한 여행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MZ세대의 새로운 여행 놀이터가 될 전망이다. 김천시는 2021년 6월 현재 인구가 140, 283명으로 양산시 인구의 절반도 안 되지만 관광도시, 혁신도시로서 활력이 넘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김천시는 인구는 옆에 있는 대도시인 구미시로 많이 유출되었다고 한다. 김천 혁신도시에 이전한 공공기관은 한국도로공사, 국립종자원, 기상통신소, 농림축산검역본부,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교통안전공단, 우정사업조달사무소, 한국전력기술(주), 대한법률구조공단, 한국건설관리공사,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 등이다. 4. 양산시와 통도사가 벤치마킹할 점 사명대사 공원의 웅장하고 멋진 모습을 보고 나니 양산의 천년고찰 통도사가 자연스럽게 비교되었다. 통도사 근처에 김천처럼 창건주 자장율사 공원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산시는 관광 분야에서 시대의 흐름에 따르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에서 선정하는 100대 관광지에 양산은 한 번도 포함되지 못했다. 한국의 3대 사찰 중 으뜸인 통도사가 100대 관광지에 들어가지 못하는데, 합천 해인사가 선정되어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다른 지역에서는 관광 부문에 많은 투자를 하여 새로운 관광명소를 만들어내고 있는데, 양산의 관광은 좋은 여건을 지니고 있지만 신규 투자가 없어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 필자가 임경대 앞에 있는 물금 레미콘 공장을 매입하여 경기도 광명시의 광명동굴처럼 개발하자는 주장을 했지만 양산시에서는 반응이 없다.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과 함께 황산잔도 복원, 임경대 데크로드 추가설치, 임경대 인공폭포 설치, 임경대 출렁다리 설치, 낙동강변 절벽에 스카이워크 설치, 오봉산 연결하는 케이블카 설치 등을 제안하였으나 아무런 관심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필자는 영남삿갓, 양산숲길보전회 회원들과 함께 임경대에 꽃무릇을 식재하는 봉사활동을 하였다. 영남삿갓은 임경대에 키가 큰 억새도 이식하였다. 강원도 동해시는 해안 절벽 출렁다리, 도째비골 스카이워크 등을 설치하여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도째비골 스카이밸리’는 6월 25일 개장한다. 도째비는 도깨비의 사투리다. 동해시의 신성장 동력 발굴을 위해 조성중인 ‘도째비골 스카이밸리’는 하늘 산책로, 하늘광장, 아트하우스, 체험시설, 도째비숲, 편의시설 등이 들어설 예정으로 동해안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스카이사이클(하늘자전거), 자이언트 슬라이드 등 체험시설과 도깨비아트하우스(휴게음식점, 기념품 판매소), 매표시설 등의 편의 시설이 들어서게 된다. 양산시는 김천시, 동해시 등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통도사 역시 천년고찰, 세계문화유산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양산시와 협조하여 사명대사 공원 같은 창건주 자장율사 공원을 조성하고, 통도사 이미지와 걸맞은 한옥 숙박동도 건립하길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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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박사 화요칼럼] 단양강잔도와 황산잔도의 비교(와이뉴스)1. 대성공을 거둔 만천하스카이워크와 단양강 잔도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충북도의 2단계 균형발전사업으로 183억 원이 투입된 만천하 스카이워크는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 산 1-3 일대 24만 2,000여㎡ 부지에 조성하고 2017년 7월 13일 개장했다. 만천하스카이워크 인근에 있는 ‘단양강 잔도’와 ‘수양개 빛 터널’ 등도 전국적으로 큰 인기를 끌며 지역경제의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 만천하스카이워크가 큰 성공을 거두며 다양한 일자리 창출 효과가 나타났다. 만학천봉전망대는 원형으로 만들어져 소백산과 금수산, 월악산 등 백두대간 명산들을 동서남북 사면으로 감상할 수 있고, 남한강 수면 위 80m 높이에 전망대 맞은편 남한강을 향해 삼지창 모양으로 삐져나와 있는 하늘길에 올라서면 남한강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오며 구름 위를 걷는 듯한 아찔함을 경험할 수 있다. 전망대 밑에는 줄을 타고 산을 미끄러지듯 활강하는 ‘짚와이어’시설이 있다. 아름다운 풍광으로 이름난 금수산 지맥과 남한강 호반을 배경으로 만학천봉 출발지에서 활강하듯 980m 구간을 내려가도록 코스가 꾸며져 있으며, 스피드와 스릴 뿐만 아니라 사계절 서로 다른 천혜의 비경을 즐길 수 있다. 만천하스카이워크에 오르는 모노레일이 올해 5월 초에 정식 개장하였다. 단양군에서 2018년부터 50억 원을 들여 설치한 모노레일은 매표소와 전망대를 잇는 400m 구간에 만들어졌다. 상행과 하행 2개 라인을 갖추고 있으면 경사각은 28도, 최고 속력은 시속 4㎞로 오르내린다. 그동안 매표소와 전망대는 셔틀버스로만 이동할 수 있었지만, 모노레일 가동으로 관광객의 선택권이 넓어지게 됐다. 성인 기준 편도 2,500원에 이용할 수 있는 모노레일에는 동시에 최대 40명까지 탈 수 있다. 정식 개장 이후에는 10분 간격으로 운행될 예정이다. 8분여 운행 시간 동안 창밖의 단양강과 소백산 등 천혜의 절경을 눈에 담을 수 있다. 경사각이 커 여느 모노레일과는 다르게 아찔한 스릴감도 느낄 수 있다. 필자는 2019년 2월 6일 만천하스카이워크를 방문하였는데, 사방의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감동받았다.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남한강은 얼어 빙판을 이루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양산의 스가이워크 설치 후보지로는 임경대 근처의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절벽이 최적이다. 단양군은 2015년 국토교통부 지역 수요맞춤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국비 22억 5천만 원, 군비 33억 5천만 원 등 모두 56억 원을 들여 2016년 7월 단양군 잔도 공사를 착공했다. 2017년 9월 1일 개통한 단양강 잔도는 주변 자연경관과 잘 어울리도록 친환경 데크 로드 공법으로 조성되었다. 단양강 잔도 주변에는 만천하 스카이워크와 수양개 빛 터널, 선사유물 전시관 등 관광시설이 골고루 분포, 관람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단양강 잔도 입구에는 2009년에 조성한 장미터널이 있다. 단양고등학교부터 상진리 강변까지 1.2km 구간에 조성돼 다양한 색감과 꽃말을 가진 2만 그루의 장미로 해마다 5월이면 관광객과 주민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또한 봄에는 데크로드 앞 둔치에 유채꽃을 심어 포토존을 만들었다. 단양군은 ‘달빛 야간팔경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올 11월까지 총 15억 원의 사업비를 투입한다. 4월 말까지 거대 돛단배 경관조명을 설치하였다. 별곡리 나루공연장과 치매안심센터, 도전리 어린이공원과 시계탑 조형물, 상진리 돛단배 파고라 등 쏘가리 특화거리부터 상진리 관문까지 수변을 따라 2.8km 구간에 밤이 더 아름다운 동화 속 빛의 도시를 조성할 계획이다. 양산시는 영대교만 불을 밝히고 양산천 구름다리는 암흑으로 야간 관광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필자는 지난 5월 3일 단양강 잔도를 방문하였는데, 잔도의 규모가 웅장하고 거대하여 깜짝 놀랐다. 양산의 황산잔도는 방치되어 있는 것을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단양군의 5월 31일 현재 인구는 28,766명으로 채 3만 명이 되지 않지만 관광에 올인하여 크게 성공을 거두고 있다. 양산시 인구는 4월 1일 현재 353,291명으로 단양군에 비해 12.3배 정도 많은 편이다. 과연 인구 규모처럼 양산시 관광분야가 단양군보다 12배 이상 우수한가에는 의문이 들었다. 2. 단양군의 인기 있는 걷기 코스 단양의 명승지와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제대로 둘러볼 수 있는 단양느림보길은 느림보강물길과 느림보유람길, 소백산자락길로 구성돼 있다. 느림보강물길은 총 5개 코스 17.3㎞로 구성되어 있다. 1코스 삼봉길(단양생태체육공원 – 도담삼봉 옛길 – 이향정 – 도담삼봉)은 2km이다. 이 물길은 남한강 수운(水運)이 번창하던 때 소금 배, 뗏목들이 넘쳐났다. 조선시대 후기 한양의 경강상인(京江商人), 지방의 봇짐장수들이 대동미 운송, 양반들의 소작료 임운(賃運), 장사를 위헤 내왕했던 역사적 장소다. 도담삼봉 앞 삼봉나루는 단양, 정선, 영월의 뱃사공들이 모여 무사 운행을 기원하는 용왕제를 올린 남한강 수로 문화의 중심지였다. 2코스는 석문길(도담삼봉 석문 – 포토존 – 측백나무 군락지 – 하덕천리)은 3.8km이다. 남한강변의 산 능선을 따라 걷는 석문길은 다양한 트레킹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길이다. 도담삼봉, 도담리 일원, 멀리는 소백산을 바라보며 여유 있는 산행을 즐길 수 있다. 코스 자체가 너무 험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밋밋하지도 않은 것이 특징이다. 3코스 금굴길(고수재 정상 솔솔솔도토리숲 – 고수재 포토존 – 출렁다리 – 금굴)은 2.3km이다. 남한강의 물돌이 안쪽에 발달한 퇴적지대인 도담리에서 출발하여 산 능선을 올라 고수령 솔솔솔도토리 숲까지 이어지는 등산길이다. 4코스 상상의 거리(단양생태체육공원 – 성신양회사택 뒤편 수변로 – 다누리아쿠아리움 앞길 – 장미터널 – 단양보건소 앞길)는 6㎞이다. 상상의 거리는 단양읍을 관통하는 주요 도로를 따라 한가로운 도심의 풍경을 즐길 수 있는 길이다. 남한강변의 아름다운 경관과 다양한 문화 이벤트를 즐길 수 있다. ‘도시의 낭만을 걷는 길’이라는 주제로 구간별 투어도 가능하다. 5코스 수양개역사문화길()은 3.2km이다. 남한강 절경을 따라 깎아지른 절벽 벼랑을 끼고 강물 위를 걷는 단양강 잔도, 단양읍 시가지, 남한강을 발 아래로 굽어볼 수 있는 만천하 스카이워크, 이끼터널, 수양개선사유물박물관, 수양개 빛터널 등 멋진 볼거리가 풍부하다. 선사 유적지, 자연 관광자원, 현대적 위락시설이 조화를 이룬 코스로 가장 인기 있는 코스다. 양산의 둘레길은 특색이 없는 사업으로 진행되고 있어 문제다. 현재 도시바람숲길을 만들고 있는데, 단양강 잔도처럼 외지인을 불러모을 매력은 없다. 역사, 문화, 지역주민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황산잔도를 복원하자는 필자와 영남삿갓의 주장은 외면하고 있다. 오봉산 둘레길도 필자가 서쪽은 최치원 길로 명명하자고 주장하였지만 감감무소식이다. 단양강 잔도는 산사태와 낙석을 방지하는 철망과 지붕으로 덮여 있어 안전하게 걸어갈 수 있다. 절벽에는 각종 희귀식물들이 자라고 있어 걸으면서 관찰해보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혹느릅나무, 붉나무, 고욤나무, 돌단풍, 회양목, 물푸레나무, 싸리나무, 굴피나무, 굴참나무, 부처손, 생강나무, 구절초 등을 계절에 따라 볼 수 있다. 안내판도 잘 정비되어 있어 함부로 쓰레기를 강으로 던지지 말라는 경고문도 있다. 야생식물 채취 금지, 낙석주의, 음식물 반입 금지, “아름다운 단양강을 지켜주세요”, “잔도구간에는 쓰레기통이 없습니다” 등의 안내문도 있어 단양군이 환경보호에 힘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양군에는 지질공원 지오트레일이 있다. 삼봉길 2.0㎞구간은 단양강을 따라 도담삼봉까지 걷는 지질 탐방로로 하안단구와 카렌 등 하천의 지형을 관찰 가능하며 금굴을 볼 수 있다. 도담삼봉 옛길을 도보 및 자전거를 활용하여 탐방이 가능하다. 수양개역사문화길(단양강 잔도길) 중 단양강 잔도길은 그동안 접근하기 어려웠던 암벽을 따라 잔도가 있어 트래킹이 가능해졌다. 암벽에 발달한 석회 동굴과 석회암지대에서 자라는 호석회 식물의 관찰이 가능하다. 석문길 3.8㎞ 코스에서는 석회동굴이 붕괴하여 일부만 남아서 자연교를 형성한 석문과 고각의 석회암 지역에서 자생하는 측백수림의 관찰할 수 있다. 석문 사이로 바라보는 도담리에는 돌리네와 테라로사 등의 카르스트 지형을 볼 수 있다. 선암골 생태유람길(선암계곡길) 14.8㎞ 코스는 선암계곡을 따라 화강암과 사암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는 길이다. 전형적인 화강암 풍화, 침식 및 하천 지형을 보여주며, 소선암 부근에는 사암이 퇴적할 때 생기는 퇴적구조를 관찰할 수 있다. 월악산국립공원과 소선암휴양림 및 생태 관광이 가능하다. 단양군의 명품길은 소백산자락길도 있다. 소백산 자락을 한바퀴 감아도는 도보여행길로 전체 길이가 143km(360리)에 이른다. 열 두 자락으로 구성되어 있고, 모두 12개 코스 143km로 조성되었다. 이 중 단양군 구간은 3~7코스인 총 73km 구간이다. 3자락 죽령옛길 11km, 4자락 가리점마을옛길 13.4km, 5자락 황금구만냥길 15.8km, 6자락 온달평강로맨스길 13.8km, 7자락 십승지의풍옛길 18.2km로 개설되어 있다. 필자는 5월 8~9일 3자락 죽령옛길을 답사하였다. 단양군 가곡면 소백산자락길 6코스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2017년 ‘3월의 걷기 좋은 길 10선’에 이름을 올렸다. 이 코스에는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의 전설이 있는 온달산성이 있다. 필자는 5월 9일 온달산성을 답사한 바 있다. 3. 단양군 각종 관광분야 상 수상 단양 만천하 스카이워크는 2017년 7월 개장한 후 1년 6개월 만에 100만 명 이상이 방문하였으며, 2018년 12월 31일에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되어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만천하스카이워크 테마파크는 개장 이후 2017년 33만 4천여 명, 2018년 82만 2천여 명, 2019년 75만 3천여 명 등 총 19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을 유치하였다. 시설 입장료 수입은 2017년 11억 7천만 원, 2018년 33억 4천만 원, 지난해 40억 9천만 원 등 총 86억 원에 달한다. 2019년의 경우 단양의 전체 관광 수입 84억 6천만 원 중 만천하스카이워크 테마파크가 48%를 차지하여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였다. 잘 만든 관광시설 덕분에 단양군의 관광객 수와 관광수입은 급증하고 있다. 단양군은 짚와이어를 타는 관광객에게 지역 내 소비를 유도하기 위해 5천 원 상당의 지역 상품권을 무료로 준다. 그 결과 2019년 말까지 5억 원 상당의 상품권이 지역으로 환원됐다. 관광객들의 추가 지출을 고려하면 지역상품권의 경제유발 효과가 상당한 편이다. 단양군에 따르면 만천하스카이워크 테마파크의 성공에 힘입어 2019년 단양을 찾은 주요 관광지 방문객 수가 1천 67만여 명으로 역대 신기록을 기록했다고 한다. 이전 최다 기록인 2017년 1천 11만여 명보다 56만 명이 증가하였다. 단양군은 한국관광 100선 선정이 시작된 2013년부터 대표 관광명소인 도담삼봉(2013∼2014), 단양팔경(2015∼2020) 등이 5회 연속 한국관광 100선에 이름을 올리는 쾌거를 올렸다. 단양군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만천하스카이워크와 단양강 잔도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주관하여 2020년 말에 뽑은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한국관광 100선’에 나란히 선정되었다. 만천하스카이워크는 충청권 최초로 ‘2019년 한국관광의 별’ 본상을 수상한데 이어 한국관광 100선에 2회 연속 선정이라는 쾌거를 달성해 명실공히 전국적으로 큰 사랑을 받는 관광명소로 떠올랐다. 2020년 4월 ‘단양강잔도’와 ‘수양개빛터널’이 한국관광공사 선정 ‘야간관광 100선’에 선정되었다. ‘2020년 국내 여름휴가 여행지’와 2020 SRT어워드 ‘올해 최고의 관광지’ 1위로 선정되는 값진 결실도 거뒀다. 단양강 잔도는 한국관광공사가 2018년 뽑은 ‘5월에 가볼만한 곳’에 선정된 바 있다. 한국관광공사는 가족이 함께 여행이란 주제로 전국 관광 명소 6곳을 선정했다. 국토교통부는 지역정책 우수사례 공유를 통해 지자체의 사업 역량을 제고하고 지역정책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2019년 12월 10일부터 2일간 ‘2019년 지역정책 우수사례 경진대회’를 개최하였다. 단양군은 관광분야에서 ‘단양군의 명품길 수양개 역사문화길’로 최우수상을 수상하여 국토교통부장관상을 받았다. 2020년 지역개발 공모사업 신청 시 가점을 부여받는 혜택을 받은 바 있다. 단양군의 ‘D-CAMP 조성사업’이 문화체육관광부의 ‘계획공모형 지역관광개발사업’에 지난 5월에 최종 선정되었다. 이 사업은 다리안 관광지 내 노후화된 유스호스텔 시설을 마을호텔, 스튜디오, 체험프로그램 등 특화된 체류형 숙박시설로 재탄생시키는 사업이다. 선정된 전국 5개 기초자치단체 중 충청권에서는 단양군이 유일하게 선정됨으로써 단양군은 2024년까지 최대 60억 원의 국비를 지원받는다. 재정자립도가 빈약한 단양군청의 공무원들은 국비 공모사업에 집중하여 좋은 성과를 올리고 있다. 단양군에 비하면 천년고찰 통도사가 있는 양산시는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된 적이 없었다. 양산시의 관광정책에 근본적인 혁신과 변화가 필요하다. 필자가 밀양시의 영남대로 3대 잔도인 밀양시 삼랑진의 작천잔도, 경북 문경시의 관갑천잔도인 토끼비리를 소개한 바 있다. 이번에 새로 생긴 단양군의 단양강 잔도를 둘러보고 양산시의 관광은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양산시에서 전국적 수준의 관광명소를 만들어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양산팔경인 임경대, 물금철광산, 황산잔도 등을 테마로 개발하는 것이 시급하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임경대 옆에 위치한 물금레미콘 공장 부지를 매입하여 경기도 광명시의 광명동굴처럼 개발해야 한다고 누차 주장한 바 있었다. 물금읍과 원동면 화제리는 가야시대, 신라시대, 조선시대의 제철유적이 발견된 중요한 유적이 있으므로 제철 유적 전시관을 건립하고 테마 동굴로 만들어야 한다. 현재 채굴이 중지된 물금철광산을 매입하는 것을 우선으로 관광종합개발 마스터플랜을 수립해야 하겠다. 물금레미콘 공장의 대표도 양산시에서 부지를 매입하면 매각할 용의가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양산팔경인 임경대 주변의 암반 위로 흐르는 폭포가 비가 많이 오면 수량이 많아져 장관을 이룬다. 비가 오지 않을 때를 대비해 낙동강 물을 끌어올려 인공폭포를 조성하면 된다. 이 아이디어는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이 처음 제안하였다. 영남삿갓은 임경대에서 임경폭포로 내려가서 황산베랑길 자전거도로로 연결되는 둘레길을 사비를 들여 만들었다. 황산잔도 역시 풀을 베어내고 통행이 가능하도록 연결하는 봉사활동을 했다. 영남삿갓은 황산잔도 복원에 관해 청원서를 양산시청, 진영국도관리청 등에 제출하였는데, 답변은 매우 실망스러웠다. 황산역 복원과 함께 황산잔도를 복원한다고 하면서 2027년까지 기다리라고 하였다. 문경시의 계립령 옛길 복원은 1년 안에 한다고 하는데, 6년까지 미루어야 할 이유는 없다. 단양군은 인구 3만이 안 되는 낙후지역이지만 관광에서는 전국 제일로 앞서가고 있다. 존재하지 않았던 단양강 잔도를 새로 만들어 전국 관광명소로 만들었다. 양산시의 공무원들은 무사안일을 탈피하여 정부 공모사업 선정으로 관광사업을 추진하는 단양군 공무원들을 벤치마킹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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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화요칼럼] 영남대로 3대잔도중의 하나인 관갑천잔도 두번째 이야기1. 자연적, 역사적, 문화적인 관광자원이 조화를 이룬 명승 토끼비리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관갑천 잔도는 조선시대 영남대로 상에 있던 가장 위험하고 험난한 길로 양산의 황산잔도, 밀양시 삼랑진읍의 작천잔도와 더불어 3대 잔도로 알려져 있다. 관갑천 잔도는 토끼비리라고 한다. 원래 토끼비리의 길이는 2㎞가량 된다. 그러나 현재 다닐 수 있는 길은 석현성벽이 끝나는 지점에서 오정산 등산로까지 500m가량이다. 나머지 구간은 사람 발길이 끊어진 지 오래됐다. 경북팔경 선정은 일제강점기 때인 1933년 대구일보사에서 주최하여 투표로 결정된 경북의 경승지 중에서 진남교반 일원이 제1경으로 선정되었다. 그 당시 세워진 경북팔경비는 현재 진남교반 휴게소 건물 뒤쪽에 있다. 팔경비는 경북팔경 선정 후 5년 뒤인 1938년에 김성휘 문경군 마성면장에 의해서 1938년 세워졌다고 한다. 대구일보사에 의해 선전된 경북팔경은 제1경 진남교반(문경), 제2경 문경새재(문경), 제3경 주왕산(청송), 제4경 금오산(구미), 제5경 청량산(봉화), 제6경 보경사(포항), 제7경 희방폭포(영주), 제8경 빙계계곡(의성)이다. 경북팔경이 확정된 후에 문경군에 있는 진남교반, 문경새재를 홍보하는 엽서가 제작되어 널리 사용되었다고 한다. 진남교반 근처에 있는 관갑천 잔도 즉, 토끼비리는 2007년 명승 제31호로 지정되었다. 교통 관련한 역사적 유적이 잘 남아 있는 곳이다. 험난한 잔도의 자취가 남아있는 옛길로서 많은 답사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옛날의 길 문화 속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던 주막, 지나다니던 길손들의 안녕을 빌었던 성황당 등이 잘 보전되고 있다. 돌고개 마을에는 성균관 진사 서상복 영세불망비, 처사 서재우 영세불망비 두 기가 나란히 서 있다. 마을에는 주차장도 설치되어 있어 관광객이 접근하기 좋다. 이곳에 주차하고 돌고개 성황당, 고모산성을 둘러보고, 진남문으로 나가서 석현성 성곽을 좌측에 끼고 계속 가면 토끼비리가 나온다. 토끼비리를 갈 수 있는 또다른 코스는 진남교반 휴게소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폐철도 터널에 설치된 ‘오미자 테마 터널’을 구경하고, 터널 우측으로 고모산성으로 올라가면 된다. 도중에 신현리 신라시대 고분군이 있는데, 구분 주변으로 데크로드가 설치되어 있어 산책하기 알맞다. 현재 추가로 데크로드 설치 공사를 하고 있었다. 고분군에 흥미가 없는 관광객들은 고모산성으로 바로 올라갔다. 진남문으로 들어가 고모산성을 둘러본 후 다시 진남문으로 나와 석현성 성벽을 따라 토끼비리로 향하면 된다. 마지막 코스로 레일바이크가 출발하는 옛 진남역 앞에 주차를 하고 된섬교 다리를 건너가면 토끼비리 안내 표지판이 나온다. 좌측으로 올라가면 병풍바위가 나온다. 3번 국도가 발 아래로 잘 내려다 보이는데,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중간에 전망대가 있어 사진 찍기가 좋다. 계속 가면 토끼비리가 나온다. 토끼비리의 마지막 구간인 바위를 깨서 만든 길이 보인다. 여기서 토끼비리는 폐쇄되어 더이상 갈 수 없다. 여기서 오정산 올라가는 등산로 입구 데크로드가 보인다. 좌측으로 가면 토끼비리의 옛길 구간이다. 직진하면 석현성 성벽이 우측으로 나오고 조금 더 가면 고모산성으로 연결되는 진남문이 나온다. 좌측은 고모산성 가는 길이고 독바로 가면 복원한 주막, 성황당, 꿀떡고개가 나온다. 2. 성황당의 전설 문경시 귀농귀촌연합회(회장 이옥금)는 2018년 4월 7일부터 8일까지 이틀 동안 마성면 진남약수터 앞 하상 주차장에서 귀농인 가족과 지역민의 화합과 상생발전을 기원하는 ‘문경 토끼비리 축제’를 개최하려고 준비하였다. 토끼비리 축제는 30여개 부스를 설치해 귀농인 가족과 지역민이 함께하는 벼룩시장 개장과 전통놀이체험, 문경의 역사홍보 등 다양한 체험부스와 먹거리 장터를 운영하여고 계획하였다. 그러나 4월 6일 몰아친 폭풍우로 천막이 날아가고 파괴되어 모처럼 준비한 축제는 취소되는 아픔을 겪었다. 성황당 바로 앞 돌고개 고갯길을 꿀떡고개 혹은 꼴딱고개라고도 한다.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들이 이 꿀떡고개에서 반드시 꿀떡을 먹어야만 과거에 급제한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꿀떡같이 과거에 착 달라붙으라는 의미다. 꼴딱고개는 험한 토끼비리를 넘어오면서 숨이 턱밑까지 차올라 꼴딱고개라 했다고 한다. 코재나 깔딱고개와 비슷한 개념이다. 옛날 과거보러 가던 한 선비가 이곳 초가집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그 집에는 부녀가 살고 있었다. 부친은 그 선비의 인품이 범상치 않음을 알고 자기 딸을 맡아 달라고 간청했다. 선비는 며칠을 머물다가 과거길을 떠나며 급제한 후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처녀는 매일 치성을 올리며 기다렸으나 선비는 끝내 오지 않았다. 선비는 당당히 급제했으나 그 약속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수년을 보냈다. 아버지마저 죽고 선비를 기다리다 지친 처녀는 선비를 원망하며 자결한 후 큰 구렁이로 변했다. 그 후 이곳을 지나는 행인들이 구렁이에게 자주 피해를 본다는 소문이 사방으로 퍼졌다. 선비는 그제야 구렁이가 그 처녀의 원귀임을 알고,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제사를 올렸다. 천둥번개와 함께 구렁이가 나타나 눈물을 흘리며 사라진 뒤론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이 처녀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이곳에 성황당을 짓고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3. 승려들이 토끼비리 옛길 보수 관갑천 잔도 토끼비리는 바로 아래 영강 수면으로부터 20~30m 높이의 절벽의 바위를 깨고, 축대를 쌓아서 만든 매우 위험한 벼랑길이다. 겨울철에는 길이 얼어붙어 위험하다. 장마철이나 폭우가 내릴 때는 오정산 사면에서 쏟아지는 물로 길이 막힐 경우도 있다. 왕건이 기병을 이끌고 이 길을 처음 갈 때는 임시도로 형태로 길을 개척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이 토끼비리를 왕래하면서 길은 점점 안전해지고 개보수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나중에는 사람과 말의 통행을 위해 정기적인 보수작업이 필요했을 것이다. 옛날에는 백성들이 부역을 통해 길을 고쳤다. 우리나라도 1960년대 말까지 동네 주민들이 부역으로 도로를 보수하곤 했다. 조선시대 도로의 보수와 관리를 국가가 아닌 승려들이 맡았음을 여지승람의 기록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유럽에서는 알프스의 험한 길 보수를 가톨릭 수사들이 맡았다. 카라코룸의 천축로(天竺路)는 불교의 승려들이 인도를 오가는 스님, 대상, 여행자들을 위해 길을 개보수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산중의 험로에서 행려병자를 보살피고 길을 닦는 일을 승려들이 맡아 수행하였다. 고대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도로인 아피아가도는 로마와 이탈리아 남동쪽 지역에 위치해 있는 브린디시를 연결하였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영어 속담은 이 아피아 가도에서 유래하였다. 아피아 가도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로마에 관광객이 아피아가도를 걷기 위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양산의 황산잔로비(黃山棧路碑)는 경남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에 있는 비석이다. 2015년 7월 30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593호로 지정되었다. 잔로(棧路)는 잔도(棧道)라고도 하는데 가파른 벼랑길에 나무를 걸쳐 낸 길을 말한다. 이 비석은 강희 34년 갑술년(서기 1694년)에 세워진 뒤 홍수 등으로 인해 무너진 것을 도광 23년(서기 1843년)에 다시 세워진 것이다. 황산천(黃山遷: 황산 벼리)을 따라 건설된 영남대로의 3대잔도 중의 하나에 대한 중요한 역사적 증거가 되는 중요한 자료이다. 현재 비석은 용화사 경내에 있다. 황산베랑길 자전거도로에는 황산잔로비에 대한 안내판만 설치되어 있다. 항산잔로비는 오래 되어 글자가 거의 마모되어 알아보기 힘들다. 양산의 메기들에 설치되었던 수문비가 물금신도시 개발 때 발굴되어 증산성 공원에 설치되어 있다. 내용을 보면 황산역의 관리와 역졸, 스님들이 공사에 동원된 것이 나온다. 조선시대 스님들은 도로보수, 한지 만들기, 산성 수비 등 고된 노역에 많이 동원되었다. 문경시의 토끼비리는 국가 명승으로 지정되었고, 경치도 매우 수려하다. 진남교반 일원은 일제강점기 때 경북팔경 중 제1경으로 선정되었다. 폐역인 진남역에 레일바이크도 운영하고, 폐터널에는 오미자 테마 터널을 설치하여 관광객을 불러모으고 있다. 고모산성과 석현성, 신현리 신라시대 고분군도 있어 역사, 문화, 관광자원도 풍부하다. 양산의 황산베랑길도 용화사, 임경대, 부산시물문화관, 황산베랑길 자전거도로 등이 있어 옛길인 황산잔도를 복원하면 많은 관광객을 불러모을 수 있다.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이 복원을 청원하였으나 양산시 답변에 의하면 2027년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조속한 복원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