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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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태작곡가 와이뉴스음반이사의 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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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태 작곡가 와이뉴스 음반이사의 눈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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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와이뉴스 총괄이사,조선시대 역참제도 운영의 문제점1. 역참 운영을 위한 토지 지급 역참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경비 조달을 위해 역전(驛田)을 운영하였는데, 역토(驛土)라고도 한다. 역전은 사신 왕래 및 역사의 수리, 사무용품 등을 구입하는 역의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지급되었는데, 그 지급형태에 따라 공수전(公須田)·마위전(馬位田)·유역인전(有役人田: 長田·副長田·急走田)·아록전(衙綠田)·복호결 등으로 구분되었다. 조선시대 역전은 다음과 같다. 공수전(公須田)은 대로(大路) 20결(황해도 45결, 평안·함경도 40결), 중로(中路) 15결(평안·함경도 22결), 소로(小路) 5결(평안·함경도 8결)이었다. 마위전(馬位田)은 대마(大馬) 7결(緊路 8결), 중마(中馬) 5결 50부(緊路 6결), 소마(小馬) 4결(緊路 4결 50부)이었다. 유역인전(有役人田)은 마전(馬田) 2결, 부장전(副長田) 1결 50부, 급주전(急走田) 50부(緊路 1결), 아록전(衙祿田)은 5결이었다. 아록전은 각 주현의 수령과 서울 부근 각 도진(渡津)의 도승 및 좌·우 수참(水站)의 수운판관 등의 녹봉에 상응하도록 절급한 수조지이다. 이상의 각 아록전은 모두가 민전(民田) 위에 설정된 각자수세(各自收稅)의 수조지였으니, 당해 토지의 조세는 국가로 납입되는 대신 해당 관원이 거두어 쓰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유역인(有役人)의 하나인 역리에게는 역역의 반대 급부로서 인위전(人位田), 즉 장전(長田)의 형태로 2결씩을 지급하였다. 그것은 과전법에 입각한 토지분급제에 의하여 절급된 분급수조지(分給收祖地)로서, 수조권을 바탕으로 민전에서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토지의 성격을 띠었다. 반면에 역리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로서 사전(私田)의 성격을 띤 소경전(所耕田), 즉 소유권에 입각한 사전을 보유하고 있었다.이러한 역리전의 경영은 원칙적으로 직접 경작하는 것이었으나 점차 전주(田主)에게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수조권적 토지 경영 형태로 발전하였으며, 역리 소경전의 경우는 역리와 동거하는 자의 가족 노동이나 경작에 의해서 경영되었다. 그리고 역노비에게도 역역의 대가로서 토지를 지급하였는데, 전운·급주 노비에게 지급된 구분전(口分田)이 그것이다. 이 구분전은 1425년(세종 7)에 전운노비에게 50부, 급주노비에게 1결씩 지급되었으나 1445년(세종 27) 국용전(國用田) 설치와 함께 구분전이 폐지되자 『경국대전』 반포 시기에는 급주전 50부(긴요한 길에는 1결)를 지급하는 것으로 통일되었다. 그리고 이 구분전은 대체로 한전(閑田)과 진황전(陳荒田) 및 목장전이나 군자전(軍資田)으로써 나누어 주었다. 이 구분전 경영 역시 직접 경작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경작전을 지급하였으나 직접 경작할 수 없는 경우에는 다른 사람과 함께 하거나 맡겨서 세금을 받기도 하였다. 『경국대전』 시기에는 전답을 타인에게 맡겨 경영하고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토지 경영형태로 변화하게 되었다. 2. 역참 토지 제도의 문란 역전(驛田)은 운영은 법에 명시되어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제대로 시행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공수전은 비옥한 토지가 지급되어야 하는 데도 불구하고 측량이 오래된 하천 부지나 홍수로 무너지기 쉬운 척박한 토지를 지급하는 형편이었다. 조상 대대로 경작해 온 평민전의 일부를 지급함으로써 평민과 역리간의 토지경작 분쟁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에 이르면 하천으로 변해 버린 토지가 대량 발생하였으며 좋은 땅은 토호들의 점탈대상이 되어 역의 재정 확보에 상당한 차질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공수전의 경영은 초기에는 역리나 관군 등이 직접 경작하는 자경(自耕)이 원칙이었으나, 역노비나 일반 농민의 소작제(小作制)에 의해서 경작되어 세금을 받는 민전수세지(民田收稅地)의 성격을 띠었다. 마위전은 역마를 사육하여 각 역에 세우고자 하는 입마 대상자(초기에는 역호, 후기에는 마호)에게 지급된 토지로서 대마는 7결, 중마는 5결 50부, 소마는 4결씩 지급하였다. 마위전 역시 평민전이나 군자전 또는 공전(公田)을 지급하였다. 또 역 근처의 양전(良田), 즉 비옥한 토지를 지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마위전 역시 본역과 멀리 떨어진 곳의 토지를 지급받거나 돌이 많고 메마른 땅을 지급하여 하천이 터져 물이 논밭으로 흘러 모래땅이 된 토지가 된 경우가 많았으며, 심지어는 민전에 혼입(混入)되거나 토호 및 양반에 의해 탈취되는 실정이었다. 마위전의 경영은 자경무세지(自耕無稅地)로서 입마자의 자경에 의해서 경작되었다. 그러나 본역에서 먼 곳에 있거나 역역이 무거워 직접 경작할 수 없을 때는 타인에게 차경(借耕)하게 하여 세금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 이와 같은 역전의 경영에서 차경화(借耕化), 즉 소작제적 경영은 관군(館軍)에게 주어진 마위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마위전의 경영형태가 소작제적 경영방식에 의거 도조(賭租)를 수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마위전의 사사로운 전매, 그리고 토호의 수중에 들어감으로써 역제의 붕괴를 자초하는 요인이 되었다. 3. 황산찰방(黃山察訪) 조석목(趙錫穆)의 폐정(弊政) 개혁 상소문 양산시 물금읍 서부마을에 조선시대 영남대로의 중요한 역인 황산역이 있었다. 찰방은 역의 최고 책임자로서 조선 정조 4년(1780)에서 5년(1781)까지 황산찰방을 지낸 조공의 휘(諱)는 석목(錫穆), 자(字)는 원중(遠仲), 관향은 풍양(豊壤)이다. 공은 정조대 정언(正言), 이랑(吏郞), 지평(持 平), 장령(掌令), 헌납(獻納), 집의(義), 사간(司諫), 승지(承旨) 등의 요직을 거쳤다. 조석목은 황산역에 부임하여 역참 운영의 실태를 파악하여 문제점응 시정하고자 상소문을 올렸다. 조가(朝家)에서 역로(驛路)를 설치하는 것은 명령전달을 중하게 여김이다. 내가 이 우역 (驛)에 도임(到任)한 초기에 각 역의 민막(民瘼)을 채탐(採探)하여 보니 폐단이 불일하여 백성들이 편안히 보전될 수 없었다. 만약 그럭저럭 시일만 보내고 개정하지 않는다면 중국 의 병수(洴水)나 위수(渭水)와 같은 중요한 지역이 장차 공허하게 되는 환난을 불면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조가(朝家)에서 역을 설치한 본의가 아니므로 그 고폐(痼弊)중의 3,4개 조항을 추려서 참작 개혁, 영구한 정식으로 삼아 만일의 도움으로 삼으려 한다. 그리하여 하기(下記)와 같이 열거하여 절목으로 삼는 것이니 나중에 도임하는 군자는 혹 불긴(不緊)한 것으로 보지만 말고 영구히 폐기하지 않는다면 다행이다. 一. 춘추(春秋) 양등(兩等)으로 납부하는 소조(燒租)는 관청[공해(公廨) : 관아]에서 일년간에 쓰게 되는 시탄대(柴炭代)로 납부하는 물자인데 근래에는 금전으로 조(租)를 대납(代)하므로 받아들이는 대전(代錢)이 해마다 증가하여 매석(每石)의 값이 혹 삼량에 이르기도 하며 비록 풍년(豐年)이 든 해라도 또한 이냥 오·육전이란 다액으로 내려가지 않는다. 이는 실로 가격 외로 지나치게 받아 들이는 것으로서 그 폐단이 적지 않다. 금춘(今春) 으로부터 연사(年事)의 풍흉을 막론하고 소조 일석(一石)의 대전(代錢)을 일냥 사전씩 받아 들이기로 영구한 정식으로 삼을 것. 一• 각 역에서 수납하는 부연 세조(赴燕 貰租)는 북경으로 가는 마부들에게 지급하여 주는 물자이다. 그런데 이른바 세조가 모조리 하인배들의 개인 호주머니에 돌아가기 때문에 마부 등의 여비(資裝)에는 아무런 도움이 없게 되었다. 금년부터 이를 영구히 혁파 할 것이며 그 대신 매역에서 일냥 팔전 이분씩을 받아 부연 마부에게 주어 여비에 보태도록 할 것. 一. 각 역에서 매년 삭지(朔紙 : 관리, 성균관 유생에게 매달 주는 한지)를 납부하는 것은 이미 정수(數)가 있으므로 갑자기 가감할 수 없는 것인데 근래에 들어 갑자기 대전(代錢)으로 봉납(捧納)하며 더하여 매역(每驛)에서 내는 삭지의 대전(代錢)이 해마다 배증하여 8·9량(兩)이란 다액에 이르고 있다. 이것 또한 강제로 무리하게 억지로 받아 이는 하나의 폐단이다. 금년부터 매역 에서 내는 삭지의 대전을 가감없는 4냥씩으로 봉납하되 그 중에서 휴산역(休山驛 : 부산광역시 동래구 낙민동)과 소산역(蘇山驛 : 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두구동)은 매우 영세하므로 삼냥씩으로 봉납하는 것을 정식을 삼을 것. 一. 무흘(無屹驛 : 밀양시 삼랑진읍 대천마을)은 직도에 위치하여 있고 역에 거주하는 인물이 4,5戶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역역(役)이 배중(重)하고 공행(公行)의 왕래가 날마다 끊이지 않으므로 사람은 집에 있을 날이 없고 말은 우리에서 쉴 때가 없어 간신히 참(站)을 지켜가기 때문에 절참지경(絶站之境)에 이르러 각별히 생각하는 방도가 없을 수 없다. 금년의 춘등(春等)으로부터 소조(燒租)를 모두 혁파하며 유로전(錢) 이십냥내에서 오냥은 영구 히 감하여 줄 것. 一. 휴산역(休山驛)과 소산역(蘇山驛)은 변방의 관문에 위치하여 있고 역에 거주하는 인물이 다만 몇 집만이 남아 있으므로 책응(責應)에 난감함이 무흘(無屹)보다 십배나 된다. 양역(兩驛)의 형세는 자못 강노(强弩)의 끝과도 같으니 또한 돌 보아야 할 방도가 없을 수 없다. 휴산역은 그 소납所) 중에서 신연(新延)할 때의 마부 자장과 유로전을 아울러 영구히 혁파할 것이며, 소산역은 소납(所納)중에서 유로전 이십 오냥 내의 십냥을 영구히 감하여 주고 신연(新延)할 때의 마부자장 또한 영구히 혁파할 것. 一. 각 역에서 구피(狗皮) 이령(二齡)을 봉납하는 일이 있다 하나 이것은 용도의 명색이 없는 것이다. 비록 미세한 물건이라 할지라도 퇴각시키거나 개납(改納)시키거나 할 즈음에 그 폐단이 적지 않으니 이 또한 영구히 혁파할 것. 一. 유로전(留路錢) 4백냥은 곧 매년 각역에서 납부하는 물자인데 이는 관가에서 출행(出行)할 때의 용도와 공사(公事)로 심부름을 나가는 하인들에게 계정(計程)하여 지급하는 자량(資糧 : 자재와 양식)의 비목(備目)이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 범용(犯用)이 많아 관아에 머무는 객들이 원근간에 왕래할 때나 무상 출입할 즈음에 이 돈을 비용으로 쓰므로 일년에 쓰 는 것을 계상한 수가 부족하게 되는 폐단을 면하지 못하여 다음 해에 받을 것을 미리 당겨 쓰고 있다. 이는 예사로운 고막(痼瘼)이 아니다. 또 4백량 내에 3개역의 소감이 35량이란 다액에 이르고 있으니 준절히 쓰는 방도가 없어서는 안되겠다. 이 후로는 책방(冊房)의 원근(遠近) 행자(行)와 과외(課外)의 공비를 결코 이 돈에서 범용(犯用)하지 말 것을 정식으로 삼을 것. 一. 유산역(由山驛 : 양산시 화승R&A공장 앞 도로변)의 영세함은 다른 역과 다름이 없으나 본군(本郡)의 지척에 있기 때문에 대소 별성(大小 別星 : 奉命 使臣)이 입군(入郡)하여 유숙할 때에 허다한 인마(人馬)의 공궤(供饋 : 음식 접대)를 여기서 독당(獨當 : 혼자 담당)하고 있으니 그 돌보아 주어야 할 방도야말로 어찌 여타 역과 다르겠는가. 그 수납 중에서 부마 자장을 영구히 혁파할 것.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시대 역참 제도의 운영은 역전(驛田)의 확보와 지급에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각 역에 부과되는 다양한 세금도 많아 이를 견디지 못한 역리의 이탈과 도망으로 역참 운영은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황산찰방을 지낸 조석목은 황산역 운영을 하면서 문제점을 파악하고 이러한 폐정을 고치기 위하여 상소문을 올렸다. 황산역의 문제점은 전국의 다른 역도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폐단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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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와이뉴스 총괄이사의 화요칼럼, 위험한 황산역로의 보수1. 황산 잔로비 양산 황산잔로비(梁山 黃山棧路碑)는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에 있는 비석이다. 2015년 7월 30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593호로 지정되었다. 잔로(棧路)는 잔도(棧道)라고도 하는데 가파른 벼랑길에 나무를 걸쳐 낸 길을 말한다. 황산 비리, 황산 베리 등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대동여지도』에는 황산도(黃山道)로 표기되어 있다. 황산잔도는 밀양의 작원잔도, 문경의 토끼비리와 함께 영남대로의 가장 위험한 3대 잔도였다. 임경대에서 황산역에 이르는 비탈길을 일러 황산천(黃山遷; 황산베리) 또는 물금천(勿禁遷; 물고미잔로)이라고 한다. 밀양 검세리의 까치비리와 함께 낙동강 하류의 대표적인 비리길이다. 좁고 험하여 인마(人馬) 사고가 잦았는데, 이만도의 『양산군읍지』에 보면 황산천은 군 서쪽 20리에 있으니 서울에서 동래까지 이르는 큰길이라고 나와 있다. 험산 절벽의 바위 벼랑을 깎아 만든 길이어서 발아래로 낙동강을 굽어보면서 나아가는 매우 위험하였다. 뾰족한 바위 조각과 크고 험한 바위 길은 마차의 수레바퀴를 쉽게 망가뜨렸다. 말도 미끄러지게 하는 위험천만한 길이었다. 황산잔로비는 황산천(黃山遷: 황산 벼리)을 따라 건설된 영남대로의 3대 잔도 중의 하나에 대한 중요한 역사적 증거가 되는 중요한 자료이다. 황산 잔로비를 보호하기 위하여 용화사 경내로 이전하였다. 황산잔로비의 재질은 화강암으로 제작되었으며, 현재는 비신(碑身)만 남아 있다. 비신 전면과 후면에 작은 글씨로 비문이 음각(陰刻)되어 있는데, 육안으로 판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마모가 심한 상태이다. 특히 제액인 ‘황산잔로비(黃山棧路碑)’ 다섯 글자 가운데 ‘잔(棧)’은 거의 확인 불가능하며 나머지는 어느 정도 판독이 가능한 상태다. 비문의 대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전면에는 강희(康熙) 33년(1694) 황산잔로를 정비한 후 그 일의 시말에 대해 기록했다. 2. 황산 잔로와 작원 잔로의 보수 과정 『양산읍지 구지 梁山邑誌(舊誌), 1697년』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갑술년(甲戌年 : 숙종 20년, 1694년)에 군수(郡守) 권성구(權聖矩)가 승(僧) 탄해(坦海)와 별장(別將) 김효의(金孝義)를 시켜 재력(財力)을 모아 깊은 곳을 메우고 험한 곳을 깎아내어 거의 평탄한 도로(道路)를 만드니 여행자의 편익이 이에 더할 바 없어 그 공을 기리고자 비를 세워 사적을 기록하였다. 이 비석은 강희 34년 갑술년(서기 1694년)에 세워진 뒤 홍수 등으로 인해 무너진 것을 도광 23년(서기 1843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후면에는 황산잔로비가 어떤 연유로 인해 쓰러져 묻혀 있다가 1843년 주민들에 의해 다시 중수되어 세워진 일에 관해 밝혀놓았다. 따라서 전면과 후면의 내용은 각기 다른 것이며, 작성 시기도 150년 정도 시간 차이가 있다. 『양산군지(지보), 1878년』에 다음의 내용이 나온다. 갑술 후(甲戌 後) 42년 병진(丙辰 1736년)에 군수(郡守) 임진하(任震夏)가 승(僧) 학능(學能)에게 명하여 재원을 마련하게 하고 4년 후 기미(己未 1739년)년에 군수(郡守) 박규환(朴奎煥)이 밀양부사(密陽府使) 임수적(任守迪)과 합력(合力)하여 작원(鵲院), 황산(黃山) 양기도[兩機道 : 낭떠러지에 나무와 돌로서 괴고 쌓아 보공(補工)하는 길)를 수치(修治)하였다. 갑술기사비(甲戌記事碑)에 기록된 바를 보면, [군서(郡西)에 있는 석기도(石機道)는 구불구불 수 리를 연이어 있으면서 층암을 깎고 그 아래에는 큰 강을 굽어보니 접족(接足)하는 인축(人畜 : 사람과 가축)의 사상자가 허다하였다. 영가(永嘉)의 권성구(權聖矩)께서 도임하여 스님 탄해 (坦海)에게 명하여 재력을 모으고 별장(別將) 이효의(李孝義)와 더불어 직업없이 놀고 있는 자들을 고용하여 험한 곳을 깎아 내리고 깊은 곳은 메워서 평탄한 길을 만드니 행인에게 베푼 바 지대하도다. 아! 이 군이 시작됨으로부터 이 길이 있었으나 이제야 비로소 평탄한 길이 되었으므로 행인이 서로 칭하(稱賀)하게 되었으니 어찌 시대가 사람을 기다려서 그리됨이 아니리오. 때는 갑술년의 가을이라.] 기미기사비(己未記事碑)에 기록된 바를 보면, [양산과 밀양의 경계는 서로 상접하여 있는데 그 중에 석기도(石機道 : 돌과 나무로 낭떠러지를 보공(補工)한 길)가 있으니 황산(黃山)과 작원(院)이 이것이다. 옛날부터 평상시에 수치(修治)한 지 오래되어 경사져 무너진 곳이 많았으니 병진년에 군수 임진하(任震夏)가 권선문(勸善文)을 반포하고 사화주(四化主 : 승려)에게 명하여 중수하니 관찰사(觀察使) 민응수(閔應洙)가 물자를 보조해 주었다. 처음으로 그 무리들과 더불어 경기를 존봉(尊奉)하더니 이제 군수 박규환(朴奎煥)이 때맞추어 영을 내리고 순상(巡相) 이기(李箕)가 곡물(穀物)과 역부(役夫)를 도와주고 밀양부사(密陽府使) 임수적(任守迪)이 또 역정(役丁)을 도와주어서 시공한 지 삼개월만에 마치니 험하였던 곳은 평이하게 되고 위험하였던 곳은 안전해져 수레는 전복할 염려가 없고 마필(馬匹)은 뒤집힐 염려가 없으니 이것이 모두가 저 오대부(五大夫)의 주선(周旋)과 용력(用力)이 없었다면 양(梁)의 험산로(險山路)가 어찌 다시 개척될 수 있었으리요. 또 화주(化主 : 승려)들의 각고 노력 또한 기록하지 않 을 수 없다.] 지금와서 옛 일을 돌이켜 보면 전인(前人)의 통착(通鑿:뚫어서 통함)한 뜻 또 한 성대하도다. 살펴보건데 두 비(碑)는 모두 누가 찬술하고 세웠는지 알 수 없다. 『양산읍지 구지(梁山邑誌 舊誌), 1697년』에는 제언(堤堰)위에 있다고 하더니 이후 도로 확장시 들어가 버렸다. 황산 잔로비는 원래 용화사 대웅전 왼쪽에 있었는데, 주지스님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황산 잔로비 안내문은 비문 옆에 있지 않고, 황산베랑길 자전거도로에 있다. 용화사에도 관광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안내판을 설치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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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와이뉴스총괄이사 화요칼럼, 웅상 금수굴의 현황과 문제점1. 금수굴의 현 상황 웅상지역의 금수굴은 오른쪽 위의 작은 굴, 왼쪽의 큰 굴로 형성되어 있다. 오른쪽의 굴은 엉성한 돌 축대 위에 간신히 발을 딛고 굴 안을 들여다보면 석간수가 고여 있다. 입구에 술잔과 촛대가 놓여 있다. 자오천은 외부에서 보면 오른쪽 위에 큰 구멍이 있고, 아래쪽에는 작은 구멍이 있는데 작은 불상이 놓여 있다. 조선시대 추사 김정희 선생이 묘사한 바에 의하면 동해에서 해가 뜨면 금수굴 자오천에 비쳐서 황금색으로 물든다고 하였는데 이곳이 자오천인 것 같다. 왼쪽에 있는 큰 굴은 입구가 바위로 가려져 있고, 굴 앞의 공간에 무속인이 쌓은 것으로 보이는 낮은 돌 축대가 있어 햇빛이 들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잡다한 기도용품이 있는 곳을 지나 금수굴 입구에 서서 내부를 바라보면 금빛으로 빛나 부처님이 목욕한다는 상상 속의 설명은 현실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내부는 무속인이 마음대로 갖다 놓은 촛대, 향로, 조그마한 불상으로 무질서하다. 웅상의 천성산 금수굴은 역사적으로 추사 김정희 선생과 식산 이만부 선생의 굴속의 석간수가 금색으로 빛난다고 화려하게 묘사한 덕분에 유명해졌다. 그러나 현실은 무속인들의 기도처로 이용되고 있어 주변 환경이 오염되고, 생활 쓰레기가 널려 있어 환상을 갖고 방문한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있다. 왼쪽의 자오천 굴은 입구부터가 너무 지저분하다. 깔아놓은 장판은 햇빛을 오래 받아 찢어져 갈라졌다. 절할 때 사용하는 방석은 낡아서 조각조각 갈라졌다. 굴 안에는 왼쪽에 촛대 3개, 향로, 술잔, 작은 불상 3개 등이 흩어져 있다. 오른쪽에는 촛대 1개 향로 두 개가 보였다. 석간수는 고여 있었지만 외관상으로 봐서 마실만큼 깨끗하지는 않았다. 성불암 인근의 금수굴은 석간수도 깨끗하고 환경도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는 반면 웅상의 금수굴은 촛대, 술잔, 향을 피운 재 등으로 어지럽다. 조각난 기도용 방석 파편, 커다란 플라스틱 물통, 솥, 벽돌, 항아리, 고무신, 슬리퍼, 천조각, 비닐 장판, 잡다한 무속인들의 생활용품, 주거용 찢어진 천막, 천막 화장실 등이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심지어 건축용 자재, 베니어판 등도 방치되어 있다. 금수굴 옆에 암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자취를 알 수 없다. 2. 금수굴의 문제점 금수굴 오른쪽 언덕 위에는 간이 화장실 같은 것이 보였는데, 올라가 보니 안에 불상이 안치되어 있었다. 누군가 미신이라고 여겨 상반신을 때려부셔 파괴하였다. 자세히 보니 부처님이 아니고 산신령상이었다. 손에 인삼을 들고 있는 것으로 추정할 때 산신령임을 알 수 있었다. 근처에는 돌탑도 몇 기 있었다. 필자는 웅상의 금수굴을 여러 번 답사하였으며, 올해도 지난 5월 5일, 6월 13일, 12월 8일 세 번 다녀왔다. 초창기 천성산숲길보존회(양산숲길보전회 전신)에서 천성산 일원에 스토리텔링 안내판을 설치할 때도 자주 방문하였다. 황윤영 전 시의원이 확보한 예산으로 미타암, 금수굴, 삼형제 바위와 옥황상제 거시기바위, 잔치봉, 원적산, 큰바위 석굴 등의 스토리텔링 안내판, 표지판을 고 이채도 회장과 함께 설치한 기억이 새롭다. 6월 13일 방문했을 때 금수굴의 오른쪽 위 샘물은 금빛이 아니라 녹조 때문에 새파랗게 변하여 매우 놀랐다. 아침 해가 뜨면 금빛으로 물든다는 자오천이 녹조로 오염되어 파란색을 띠고 있었고, 또한 굴 안의 파란색 이끼도 확산되어 있었다. 12월 8일 답사했을 때는 기온이 떨어져 녹조는 사라지고 없었다. 물은 깨끗해졌으나 약간의 부유물이 떠 있어 마실 기분은 나지 않았다. 오른쪽 위 작은 굴의 샘물은 고여 있었고, 약간의 파란색이 남아 있었다. 봄에는 주된 기도처인 왼쪽의 큰 굴의 석간수에는 개구리가 헤엄치고 있었으며, 올챙이도 엄청나게 많았다. 굴 안쪽 물속에는 작은 불상이 하나 빠져 엎드려 있었다. 역설적으로 부처님이 불지(佛池)에서 목욕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금수굴은 험한 바위 절벽에 자리잡고 있어 등산로도 험난하며 접근성이 좋지 않다. 금수굴은 추사 김정희 선생이 예찬한 기이한 이품(異品)이 솟아나는 샘물이 아니고, 금가루를 뿌린 듯한 영롱하게 빛나는 석간수도 아니었다. 상시 거주하며 기도하는 사람이 없어 봄, 여름에는 자오천의 샘물은 청개구리와 올챙이가 주인공이었다. 겨울에 접어든 12월에는 찾아오는 이 없는 적막강산으로 변해 샘물도 줄고 을씨년스러웠다. 웅상의 금수굴은 양산시에서 관심을 갖고 공공근로 인력을 동원해서라도 노후화된 천막, 파괴된 산신령상, 화장실을 철거하고, 주변의 대형 건축 쓰레기도 대청소하여 환경정화를 할 필요가 있다. 천성산 깊은 산속이라 웅상 쪽 금수굴에 접근하는 것도 힘들고, 대형 폐기물을 들고 운반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환경 정비가 시급한 실정이다. 이렇게 환경 오염이 된 곳을 옛날 원효대사의 기도처라고 자랑스럽게 내세우기 부끄러우므로 긴급한 조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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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매일 김중걸편집위원, 오늘의 이슈 소개대학을 포함해 전체 대학 신입생 충원율은 91.4%로 100%를 채우지 못했다. 202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응시자(44만 7669명)는 2022학년도 수능시험 응시자보다 469명이 감소했다. 2021년부터 학령인구감소로 인한 대학 입학 정원 미달사태가 이어지고 있다. 이같은 현실에 따라 대학들은 대책에 부심하다. 지난 4일 한경대와 한국복지대가 통폐합해 내년 3월부터 한경국립대로 출범한다. 수원대와 수원과기대도 지난 9월 교육부에 통합계획서를 제출했다. 서울대는 사상 처음으로 베트남의 경제 중심지인 호찌민에 5년 내 분교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호찌민 캠퍼스에서 학부 과정을 밟은 베트남 우수 인력을 서울대 대학원생으로 유치하겠다고 한다. 저출산에 따른 학령 감소로 재정난을 겪고 있는 가운데 경남정보대학교가 12월 현재 기업 등에서 발전기금 38억 원을 약정해 놀라게 한다. 지난 2월 김대식 총장이 취임한 이후 역대 최고 수준의 발전기금을 유치했다. 지난해 35억 원의 발전기금을 유치했던 동아대도 올해는 40억 원을 넘길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최근 허남식 전 부산시장을 제9대 총장으로 맞이한 신라대도 지역 기업인들이 5억 원의 발전기금을 쾌척했다. 대학 감소가 능사는 아니다. 지역 경제계와 동문 등이 함께 나서야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경남매일 김중걸편집위원 http://www.gn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509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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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의 화요칼럼, 금정산 고모당1. 금정산 고당봉과 금샘 금정산(金井山)은 부산광역시 금정구, 북구와 양산시 동면과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이 산을 따라서 부산광역시와 양산시의 경계가 결정되며, 가장 높은 지점은 고당봉으로 해발 801.5 미터이다. 금정산은 태백산맥이 남으로 뻗어 한반도 동남단 바닷가에 이르러 솟은 명산이다. 부산의 진산(鎭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동래현 북쪽 20리에 금정산이 있고, 산꼭대기에 세 길 정도 높이의 돌이 있는데 그 위에 우물이 있다. 둘레가 10여 척이며 깊이는 일곱 치쯤 된다. 물은 마르지 않고, 빛은 황금색이다. 전설로는 한 마리의 금빛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그 속에서 놀았다고 하여 금정이라는 산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절을 짓고 범어사라는 이름을 지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금정은 금어(金魚)가 사는 바위 우물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금정은 우리 말로 하면 금샘이다. 범어사의 유래가 된 범어(梵魚)는 금샘에서 놀던 금어를 이르는 말이다. 금정산은 낙동강과 수영강(水營江)의 분수계가 되는데, 최고봉은 북쪽의 고당봉(801.5m)이다. 북으로는 장군봉, 계명봉(602m)이 뻗어 있고, 남으로는 원효봉(687m), 의상봉, 파리봉, 상계봉 등 600m 내외의 봉우리들이 백양산(白陽山, 642m)에 이어진다. 금정산의 정상 고당봉은 부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지만 26여 년 전까지만 해도 ‘본명’이 없었다. 조선 영조시대 <동래부 지도>에는 금정산 주봉을 ‘고암(姑岩)’으로 표기했고, 이외에도 고당봉(姑堂峰), 고당봉(高堂峰), 고당봉(姑黨峰), 고당봉(高幢峰), 고담봉(高潭峰), 고단봉(高壇峰) 등의 이름으로 불렀다. 제대로 된 고증 없이 사람마다 제멋대로 쓴 탓에 무려 7개의 이름이 사용되었다. 1994년 금정구청은 ‘금정산 표석비 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고당봉 고증 작업에 나섰다. 학계와 향토사학자, 사찰 관계자 등이 참여해 토론한 결과 두 개의 이름의 최종안에 오르게 되었다. 제1안은 ‘고당봉(姑堂峰)’, 제2안은 ‘고당봉(高幢峰)’으로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찬반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제1안의 ‘고당봉(姑堂峰)’ 근거는 “고려시대까지 내려오는 우리나라 모든 산신은 여신이었고, 금정산도 할미신이기 때문에 할미 고(姑), 집 당(堂) 자를 써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제2안 ‘고당봉(高幢峰)’은 “금정산이 범어사를 품고 있는 점과 원효봉, 의상봉 등 여타 봉우리 이름으로 볼 때 '부처님의 법문을 높은 깃대에 세웠다'는 뜻의 높을 고(高), 깃발 당(幢) 자를 쓰는 게 옳다.”는 주장이었다. 제1안은 민속신앙, 제2안은 불교적 관점의 주장이었다. 결론은 고당봉에 수백 년 동안 자리한 고모당(姑母堂) 당집 등이 제1안 주장의 유력한 근거로 인정받음으로써 금정산 정상의 공식 명칭은 ‘고당봉(姑堂峰)’으로 확정됐다. 같은 해 12월 비로소 본명을 새긴 ‘고당봉(姑堂峰)’ 표석을 세웠다. 2. 고당봉 고모영신이 된 화주보살 박씨 금정산 정상의 고당봉 명칭 결정의 근거가 된 고모당에는 어떤 사연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고당봉 정상 조금 아래에 산신각인 고모당(姑母堂)이 있는데, 범어사와 인연이 깊은 불심 돈독했던 화주보살 박씨 할머니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는 전설이 되지만 역사적 근거가 있는 사실은 기록에 의해 뒷받침되어 공식 인정을 받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에 밀양사람인 박씨가 결혼에 실패하고 불가에 귀의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잿더미가 된 범어사에서 화주보살이 되어 절의 살림을 꾸려 나가는데 신명을 바쳤다. 어느덧 나이가 많아 이보살이 큰스님께 “제가 죽으면 화장을 하고 저 높은 고당봉에 고모영신으로 모시는 당집을 지어 고모제를 지내주면 높은 곳에서 범어사의 수호신이 되어 절을 돕고 지키겠습니다.” 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이에 주지 스님께서는 박씨의 유언대로 박씨 사후에 고당봉에 고모당을 지어 1년에 두 번씩(음력 1월 15일, 5월 5일) 고모제를 지냈는데 이후 범어사는 화엄비보사찰로 사찰이 번창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찾아오는 사람들마다 “병원에서 못 고치는 마음의 병도 이 고모당에 와서 빌면 씻은 듯이 나아 마음이 편안해지며, 하는 일도 잘 풀린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고모당의 고모영신은 기도발 잘 받기로 소문이 나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빌기 위해 몰려든다. 특히 산신기도를 하기 위해 고모당을 찾는 무속인들의 성지가 되었다. 필자가 방문한 지난 11월 26일에 중년의 남녀가 기도하러 온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나가는 등산객도 호기심 차원에서 한 번씩 둘러보았다. 고모당은 크기가 매우 협소하며 문은 잠그지 않았다. 고양이, 쥐 등이 신당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기도하고 나갈 때 문을 꼭 닫으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가져온 음식도 가져가라는 주의사항 안내문이 있었다. 범어사에서 매일 사람을 보내 고모당을 관리하고 있다. 고모당은 자연석으로 쌓은 돌담장이 둘러쳐져 있다. 크기는 매우 협소하여 산신각 안으로 여러 명이 들어갈 수 없다, 산신각의 정식 명칭은 ‘금정산 산신각 고모영신당(金井山 山神閣 姑母 靈神堂)’이었다. 고당봉 큰 바위 아래에 콘크리트로 지어진 1평 남짓한 작은 당집 내부에는 위패가 두 개 모셔져 있는데, 왼쪽은 고모영신(姑母靈神), 오른쪽은 산왕대신(山王大神)이다. 촛대 2개, 향로 하나, 향꽂이, 위패가 있는 단 위에는 술잔 두 개, 조화를 꽂은 화분 두 개가 있다. 3. 범어사 스님들이 모시는 고모당 당제(堂祭) 고모당의 창건 연기는 “궤범어사기궤유전”(1902년) 산 축령에 기록이 되어 있다. 박씨 할머니는 금정산 담당하는 진호신(鎭護神)으로 모셔져 사람들에게 화재, 수재, 풍재 등 삼재(三災)가 발생되지 않도록 인간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선신(善神)으로 존경받아 왔으며 금정산을 지키는 산신(山神)으로 추앙되고 있다. 금정산 정상을 고당봉(故堂峰)이라 부르게 되었다. 매년 정월보름에는 인근의 주민들이 제물을 정성껏 준비하여 당제를 올리고, 양기가 가장 강한 오월 단오날에는 범어사 어른 스님과 강원 학인 스님들이 금정산 범어사를 수호하는 고당 할머니 고모영신(姑母靈神)전에 “세상 모든 중생들 무사안녕과 발보리심 하여지이다”라고 축문을 읽는다. 범어사 인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매년 정월 보름날 밤에 합동으로 제물을 준비하여 정성껏 고모영신(姑母靈神)전에 당제를 올린다. 육식을 금하고 목욕재계를 하고 맑고 깨끗하게 단장하여 고당제를 모신다. 한 해를 시작하는 정월달에 가족들의 건강과 가정의 행복을 고모영신께 기원하는 것이다. 한때 범어사의 젊은 스님들이 이곳에서 당제(堂祭)를 모시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고모당집을 훼손한 적도 있었다. 그 후부터 범어사에 좋지 않은 나쁜 일들이 자주 일어나자 범어사에서 고모당을 다시 고쳐 지었다고 한다. 고모당은 우리의 전통 신앙과 불교의 융합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상호간에 배척하지 않고 존중하는 결과로 보인다. 당제를 모시기 위해 스님들은 두 팀으로 나뉘어 범어사에서 출발하여 서로 다른 코스로 고모당까지 걸어간다. 범어사-원효암-사기표석-북문-고모당으로 올라간다. 다른 한 패는 범어사-내원암-사기표석-고당봉-고모당에 도착한다. 이것은 범어사의 지표를 확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산신에게 고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당제를 마치면 미륵사로 내려가 석간수를 마시고 범어사로 내려간다. 우리의 고유한 산신 신앙이 앞으로도 잘 계승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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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박제상 공 효충사를 정비한 황래성 회장1. 국가무형문화재 제124호 황수로 궁중채화장 황수로 회장은 2013년 국가무형문화재 제124호 궁중채화장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동국대 종신 석좌교수이며 경남도 문화재위원이다. 국가무형문화재 공개행사를 꾸준히 개최하였으며, 국외 전시 및 국내 전시를 통해 궁중채화 문화를 널리 알리고 보급하고 있다. 한국궁중꽃박물관 설립자이자 초대 관장의 본명은 황을순(黃乙順), 아호는 수로(水路)이다. 남편 최위경 박사의 은사인 향파 이주홍(이주홍, 1908~1996년) 선생이 지어주었다. 최위경 박사는 일본 도쿄대학에서 “한국 근해 어패류의 미생물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수로부인은 순정공(純貞公)의 부인이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향가(鄕歌)인 「해가(海歌)」와 「헌화가(獻花歌)」의 주인공이다. 한국궁중꽃박물관 야외에 「헌화가」 노래비가 있다. 수로부인과 황수로 화장(花匠)은 꽃을 지극히 사랑한 여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신라 성덕왕 때 순정공이 강릉 태수로 부임할 때 동행하다가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 곁에 높이가 천 길이나 되는 바위 위에 철쭉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수로부인이 그것을 보고 사람들에게 “누가 저 꽃을 꺾어다 주겠소?” 하고 물었으나 모두 안 되겠다고 하였다. 한 늙은이가 암소를 끌고 지나가다가 부인의 말을 듣고 그 꽃을 꺾어 가지고 와서는 「헌화가」를 지어 바쳤다. 황수로 화장(花匠)의 “한국 차의 유래와 그 예속에 관한 소고”는 근대 한국 차 문화의 발화점 중 하나가 되었다. 제4대 한국 차인(茶人) 연합회 이사장을 맡으며 차 문화 생활 운동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2. 만고충신 박제상 공이 황수로 회장의 꿈에 현몽 황수로 화장(花匠)은 남편 최위경과 일본에 유학 중이던 1968년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귀국 후 부산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 일맥 황래성 회장(1914~1997년)이 함께 갈 곳이 있다고 하며 자동차에 태워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양산천 앞에 차를 세웠다고 한다. 물은 깊고 돌다리는 낮아 양산천을 건널 수 없었다. 마을 청년과 아저씨들이 일행을 한 사람씩 업어서 양산천 둑에 건네주었다. 그 당시 소토리 마을은 짙푸른 밤나무 숲과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는 버려진 벌판이었다. 수로는 아버지에게 “저 여기 와봤는데요.”하고 말했다. “니가 언제 와봤단 말이고?” “며칠 전 꿈에 이 밤밭에 와봤어요. 마을 산 기슭에 장군의 사당이 있고요.” “이 아이가 참 희한한 소리를 하네. 이장 어른! 저 산기슭에 정말 사당이 있소?” 이장의 안내로 도착한 소토리 효충마을의 언덕 산기슭에 퇴락한 작은 사당이 잡초 속에 묻혀 있었다. 이장을 시켜 잡초를 쳐내고 사당의 녹슨 자물쇠를 열게 했다. 효충사(孝忠祠)라는 낡은 현판이 붙어있었다. “아버지! 여기는 장군님의 집이라예, 장군님이 꿈에 나타나 저에게......” 아버지는 급히 수로의 입을 막았다. 집에 돌아와 비로소 자세한 꿈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말씀드렸다. “아버지! 며칠 전 꿈에 무서운 장군 옷을 입은 장군들이 저를 찾아와 아까 본 그 사당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사당 안에는 당당한 큰 장군이 칼을 차고 앉아 있었고요. ’내가 부인을 부른 것은 청이 있어서요. 내 집이 비좁고 초라하여 부하들과 기거하기가 매우 불편하오. 집을 좀 고치고 길을 넓혀주시오. 그러면 부인께 보답하겠소,‘ 하면서 제게 흰 두루마리를 하나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참 신기한 일이다, 이 꿈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하지 말아라.” 하며 엄중히 당부하였다. 아버지는 따로 사비를 털어 효충사 인근 땅을 사들이고 3년여에 걸쳐 효충사 진입로를 넓히고 사당을 아늑하게 단장하는 공사를 했다고 한다. 증축 공사가 완료될 무렵 어머니의 꿈에 “부인의 수고로 우리 부하 장군들이 편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선몽하였다. 3. 황래성 회장이 사재로 정비한 효충사 효충사는 황수로 회장의 부친인 일맥 황래성 회장의 열정으로 정비를 하게 되었다. 효충사는 1960년대에 지역의 향토사 연구가 안종석이 사비를 들여 건립하고, 이후 해마다 유림에서 제를 올렸다고 한다. 1975년에 태창기업 황래성 회장의 협조로 담장을 정비하고, 1988년에 경상남도 기념물 제90호로 지정되었다. 황수로 화장(花匠)은 경상남도 문화재위원이었던 은사 정중환 박사에게 박제상 장군의 사당을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안종석은 1845년 양산군수로 재임했던 한긍인이 건립한 비문에 따라 이 지역이 박제상의 주거지라고 확정했다. 상북면 소토리는 과거에 소태, 소토, 소로, 수두라 부르던 것을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지금의 이름으로 정했다. 효충마을은 박제상 공의 출생지라고 추정하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2000년대 들어 양산시에서 이 지역을 역사 문화 공원으로 조성하려고 하자 일부 주민들이 문화재 지정에 따른 재산권 침해를 우려하면서 박제상이 효충마을 출신이라는 증거가 없다고 반박하고 나섰다. 이에 양산시는 경북대학에 의뢰하여 박제상 공이 삽량주(歃梁州) 간(干)으로 있을 당시 고향에 건립했다고 하는 징심헌(澄心軒)이 현재의 효충사 자리로 추정한다고 밝혔다. 박제상은 징심헌에서 『부도지(符都志)』 등이 수록된 『징심록(澄心錄)』을 썼다. 박제상 공은 신라시대 충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효충사 사당 안에는 박제상과 그의 아들 백결 선생 문량(文良)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박제상은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가 있던 눌지왕의 두 아우를 구출하기 위해 왕명을 받들어 고구려에 들어가 복호를 구출하였다. 이에 왕은 왜에 볼모로 가 있는 미해를 부탁하자 집에 들어가지 않고 곧장 왜로 향했다. 왜국에 들어 간 박제상은 계략을 세워 미사흔을 탈출시키고 자신이 불모로 남게 된다. 왜왕은 박제상에게 자신의 신하가 되어 줄 것을 회유하였으나 박제상은 “차라리 계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왕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고 거절하였다. 왜왕은 고문을 가하여 발바닥의 껍질을 벗기고 불태워 죽였다. 신라시대 만고충신 박제상 공의 사당이 옛날 퇴락한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황수로 회장의 꿈에 박제상 공이 나타나 사당과 주변 길을 정비해달라고 요청하였다. 황수로 회장은 부친인 일맥 황래성 회장에게 꿈 이야기를 하였다. 황래성 회장은 기꺼이 사재를 들여 효충사를 정비하였다. 현재의 ’박제상 효충공원‘이 있기까지의 초창기 공로자들인 황수로 회장과 그의 부친인 황래성 회장의 공적을 양산시민들은 잊지 말아야 하겠다. 울산광역시 울주군에 있는 박제상기념관은 잘 운영되고 있으나 양산시의 효충사는 운영이 원활하지 못하다. 문화관광해설사도 배치되지 않고, 당초 징심헌 내부에 전시관 설치를 계획했으나 실행되지 않고 있다. 전시관은 향후 별도 건물로 신축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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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 와이뉴스 총괄이사의 화요칼럼물금읍 서부마을과 용화사 둘레길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둘레길 개설 후의 보완점 물금읍 서부마을 끝에 있는 ‘카페 무이’에서 용화사까지 둘레길이 개설되었다. 기존의 황산베랑길과는 별개로 경부선 철도 안쪽으로 설치하여 새로운 길을 만들었다. 보행자 중심 둘레길로 데크 계단이 있어 자전거는 통행할 수 없다. 11월 21일에 둘레길을 답사하면서 살펴보니 안내판, 표지판이 설치되지 않아 초행자는 혼란을 겪을 수 있는 문제점이 있었다. 서부마을의 끝 지점인 카페 무어에서 시작되는 둘레길의 출발점은 심한 오르막으로 비가 오면 미끄러질 우려가 있으므로 야자 매트를 깔 필요가 있다. 현재 10여 미터 정도 설치된 야자 매트는 카페에서 전에 설치한 것으로 낡아서 너덜너덜하므로 교체해야 한다. 둘레길 초입의 전망대 데크는 크게 설치하여 벤치도 있어 쉼터로서 손색이 없다. 그러나 내려가는 급경사 구간에 흙을 깎아서 계단을 설치한 것은 매우 위험하기 때문에 보완이 필요하다. 엉성한 흙계단에서 미끄러지면 다치기 쉽고 왕복 교행이 어려울 정도로 좁은 것도 문제다. 튼튼하고 안전한 계단 설치가 시급한 실정이다. 중간에 계곡의 도랑이 있는 구간도 안전한 징검다리나 간이 다리를 설치하면 좋을 것이다. 둘레길에 안내판이나 표지판, 이정표가 없어 중간에 나오는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가야 하는데, 초행자는 오른쪽으로 올라가기 쉽다. 오른쪽 길은 1022번 지방도로로 올라가는 차도이므로 헛걸음하기 딱 알맞다. 물금읍 서부마을 끝의 무이 카페에서 출발하여 용화사까지 천천히 구경하며 걸어가면 20분 내외로 도착할 수 있다.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고, 경부선 철도가 있어 기차가 지나가는 모습을 사진 찍을 수 있다. 양산시는 농림부의 일반농산어촌개발사업 공모에 신청하여 선정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2020년부터 지방이양사업으로 전환 후 양산시는 5개마을을 선정해 지속적이고 계획적으로 마을만들기사업을 추진해왔다. 물금읍 서부마을 만들기사업에 사업비 5억 원을 투입해 서부마을과 용화사를 연결하는 둘레길을 조성하고, 이미 개설된 용화사에서 임경대까지의 둘레길과 연결하였다. 현재 연말까지 임경대 진입로를 무장애 통로로 만들기 위해 대대적인 공사를 하고 있어 용화사에서 임경대까지 개설된 둘레길을 이용하여 임경대로 올라갈 수 없다. 용화사에서 임경대로 가는 둘레길 구간 중 데크 로드가 너무 급경사로 설치되어 있어 올라가기에 불편이 따른다. 임경대에서 용화사로 가는 구간은 내리막길이어서 수월하게 걸을 수 있다. 용화사는 1022번 지방도로를 이용하여 차로 갈 수 있다. 용화사에서 임경대 방향으로 갈 수 있고, 경부선 철도 밑의 굴다리를 걸어서 통과하면 황산베랑길 자전거 도로와 연결된다. 황산베랑길 자전거 도로는 주말이면 통행자가 많아 위험하다. 새로 개설된 서부마을 용화사 둘레길을 이용하면 편리하다. 2. 용화사 석조여래좌상 용화사는 통도사의 말사로서 전통사찰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산신각, 요사채 2동,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석조여래좌상, 석주 등이 있다. 대웅전에 모셔진 석조여래좌상은 보물 제491호로 지정되어 있다. 용화사가 연중 가장 아름다운 시기는 봄철에 벚꽃이 필 때다. 커다란 두 그루의 벚나무가 있어 매년 4월 5일을 전후하여 만개하면 환상적인 극락정토의 세상이 펼쳐진다. 용화사는 1471년(성종 2년) 통도사의 승려 성옥(性玉)이 창건하였으며, 미륵당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진다. 창건 후의 연혁은 전하지 않으며, 1990년대에 산신각을 새로 짓는 등 불사를 일으켰다. 용화사 대웅전에는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는데, 이 불상이 용화사로 오게 된 사연이 전해온다. 600여 년 전인 14세기 무렵 강 건너 김해의 고암마을에 살던 한 농부가 낙동강에서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하는 물체를 건져 내니 이 불상이었다고 한다. 그때 김해시 상동면 감로리에 있는 옛 절터에 모셔둔 것을 이 절을 창건한 성옥이 옮겨왔다고 한다. 또 다른 소문에 따르면, 낙동강변에 나뒹굴고 있던 것을 1947년 용화사의 법당을 중수하면서 옮겨와 주존으로 봉안했다고 한다. 이 내용은 확인할 수는 없으나 용화사가 물금과 낙동강 건너편인 김해 상동 방면을 연결하는 나루와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석조여래좌상을 참배할 때 정면은 물론이고 옆에서도 살펴봐야 한다. 옆에서 친견하면 좌대, 광배를 잘 볼 수 있다. 좌대, 본존불, 광배가 조화를 이루어 석조여래좌상이 완성된다. 3. 김정한 소설 수라도 김정한 선생이 쓴 소설 수라도는 원동면 화제리, 용화사를 주 무대로 하고 있다. 용화사 경내에 소설 수라도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수라도는 김정한 선생이 1969년 6월 『월간문학』 8호’에 발표한 중편 소설이다. 이 작품은 구한말부터 광복 직후에 이르는 `가야부인`의 일생을 통하여 ‘허진사’ 가족의 역사와 한민족 수난의 역사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전지적 작가 시점의 소설이다. 가야부인은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고 미래의 희망을 보기 위해 미륵불에 의존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미륵불 신앙이 희망의 신앙으로 수용되어 폭넓게 전승되었다. 미륵불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든 뒤 56억 7천만 년이 지나면 이 사바세계에 출현하는 부처님이다. 민족의 수난사를 바라보고 직접 그 가운데 위치했던 가야부인의 일대기는 그야말로 ‘수라도’(악귀 세계)를 헤치는 고행의 연속이다. ‘수라도’라는 소설 제목은 우리 민족이 살아온 역경의 시공간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여성으로서 인고, 처절, 초월의 삶을 살아온 가야부인의 불교적인 역경 극복 방식을 암시하기도 한다. 4. 나무대원본존지장보살 대부분의 관광객은 황산잔로비에 집중하여 ‘나모ᄃᆡ원본존디장보살’(南無大願本尊地藏菩薩) 비석은 그냥 무관심하게 지나친다. 용화사의 황산잔로비 오른쪽에 더 큰 비석인 ‘나모ᄃᆡ원본존디장보살’이라는 조선시대 고어체가 있어 국문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임을 알 수 있다. ‘나모ᄃᆡ원본존디장보살’(南無大願本尊地藏菩薩)은 현대어로 고치면 ‘나무대원본존지장보살’이다.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이 그 비석을 살펴보더니 고어체로 적혀 있다고 알려주었다. 필자 역시 한자로 크게 보이는 南無大願本尊地藏菩薩은 다른 절에도 있는 평범한 비석으로 생각하고 한글로 적힌 글자는 못보고 그냥 지나쳤다. 조선시대 고어체로 ‘아래 아’자를 사용하고 지장보살을 디장보살로 써 놓았다. 오른쪽 옆면에서 확인 가능한 이름은 박춘동(朴春東), 박돌쇠(朴乭釗), 김씨 보현화(金氏 普賢花)였다. 김씨 보현화는 절에서 스님이 지어주는 법명이다. 박돌쇠라는 이름에 주목해보자. 돌쇠는 평범한 백성의 대표적인 이름으로 친근감이 있다. 지장보살은 모든 악업에서 해탈하게 하는 보살이며, 죽은 사람과 산 사람 모두를 이롭게 하는 보살이므로 박돌쇠라는 불자는 먼저 세상을 떠난 조상의 극락왕생을 빌거나 자기 가족의 공덕을 빌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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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와이뉴스 총괄이사] & 화요칼럼 ,양산에서 볼 수 있는 연리지양산에서 볼 수 있는 연리지 1. 연리지, 연리목, 연리근 가까이 자라는 두 나무가 맞닿은 채로 오랜 세월이 지나면 서로 합쳐져 한 나무가 되는 현상을 연리(連理)라고 한다. 두 몸이 한 몸이 된다고 하여 남녀 간의 애틋한 사랑과 흔히 비유했다. ‘연리(連理)’는 뿌리가 서로 다른 나무가 오랫동안 자라면서 뿌리가 엉키거나, 줄기, 가지가 비바람에 부딪히고 스치면서 껍질이 닳아 부대끼고 엉켜 세포가 서로 합쳐져 한 나무처럼 자라는 현상이다. 뿌리가 이어지면 ‘연리근(連理根)’, 줄기가 이어지면 ‘연리목(連理木)’, 가지가 이어지면 ‘연리지(連理枝)’라고 부른다. 연리목은 가끔 만날 수 있으나 가지가 붙은 연리지는 매우 희귀하다. 가지는 다른 나무와 맞닿을 기회가 적을 뿐만 아니라 맞닿더라도 바람에 흔들려 버려 좀처럼 붙기 어렵기 때문이다. ‘연리목’은 줄기와 줄기가 붙은 형태로 나무가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며, 종이 다른 나무일 경우 목질부는 불화합성이 있어 껍질은 붙은 것 같이 관찰되어도 목재는 붙지 않은 경우가 일반적이다. 연리지는 매우 드문 현상으로, 예전부터 연리지 나무를 금슬 좋은 부부의 사랑, 화목한 가족간의 사랑, 가슴 저미는 연인들의 사랑으로 비유해 ‘사랑나무’라고도 불린다. 연리지는 두 몸이 한 몸이 되기 때문에 남녀간의 애틋한 사랑을 상징한다. 연리지는 부부나무, 사랑나무, 형제나무 등으로 불려지고 있다. 2. 배내천트레킹길 연리지 양산시 원동면 대리에 있는 ‘배내천트레킹길’에서 매우 귀한 연리지 나무를 볼 수 있다. 배내천트레킹길은 희귀목 연리지 나무, 단장천으로 흐르는 물에 닳고 닳은 반들반들한 기암괴석, 영화 ‘달마야 놀자’ 촬영지인 통도골 선녀탕, 수백 년 된 밤나무 군락지, 돌배나무, 고로쇠나무 군락지 등을 볼 수 있는 멋진 둘레길이다. 연리지는 대팻집나무로 감탕나무과에 속한다. 목재로 쓰이며 단단하기 때문에 대팻집을 만드는 데 좋다고 하여 대팻집나무라는 이름이 붙었다.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감탕나무속에서 유일하게 겨울에 잎이 떨어지는 나무이다. 연리지 주변에 쉼터를 조성하여 벤치도 설치하고, 솟대도 있으며, 배내골에 거주하는 김성달 씨가 캘리그라피로 쓴 좋은 문구가 나무에 걸려 있다. 배내천트레킹길을 걸을 때 계속 김성달 씨의 아름다운 글씨의 좋은 문구를 감상할 수 있다. 김성달 씨의 지역 사랑이 대단함을 느낄 수 있다. 캘리그래피는 손글씨, 손멋글씨, 멋짓글씨, 솜씨체, 서예, 붓글씨 등으로 불려지며, 2004년 국립국어원은 신어 중의 하나로 캘리그래피를 선정하였다. 개성적인 글씨, 아름다운 글씨를 뜻하는 캘리그래피는 획일적이며 기하학적(幾何學的)인 선의 표현이 아닌 디자인과 서예의 적절한 조화가 요구된다. 3. 통도사 부속암자로 가는 길옆의 연리지 통도사에서 안양암을 지나 극락암, 자장암 방향으로 갈라지는 삼거리 전에 다리가 하나 있는데, 다리 건너기 전 길옆 왼쪽의 큰 나무가 바로 연리지 나무이다. 자세히 보면 아주 복잡하게 가지가 얽혀있어 신기하다. 도로 옆에 있어 그동안 연리지로 주목받지 못했는데 얼마 전 누군가가 연리지 나무에 대해 안내문을 프린트하여 코팅한 후 붙여놓았다. 연리지는 팽나무로 포구나무라고도 한다. 연리지 나무에 커다란 말벌집이 있었다. 팽나무는 느티나무처럼 1,000여 년 살지는 않지만, 500여 년을 예사로 사는 장수 종이다. 팽나무 속명 셀티스(Celtis)는 고대 희랍어로 ‘열매가 맛있는 나무’란 뜻으로, 열매가 달콤해서 새들이 무척 좋아한다. 오랜 세월 동안 한 장소에서 많은 새들을 먹여살리는 나무다. 팽나무는 물과 공기가 잘 통하는 모래자갈땅에서도 약간 비옥한 곳을 더욱 좋아한다. 느티나무 서식처와 중첩되기도 하지만, 느티나무는 내륙 쪽에 치우쳐 분포한다면, 팽나무는 바닷바람을 쐴 수 있는 곳에 치우쳐 산다. 우리나라 남부지역의 섬 지역이나 제주도에서 팽나무 노거수가 많이 서식하고 있다. 한글명 팽은 한자 憉木(팽목), 朴樹(박수) 등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달주나무라고도 하며, 한자로 靑檀(청단)이라고도 한다. 팽나무의 팽은 이삭이 패다, 꽃이 피다가 어원인 말이다. 팽나무는 영육의 생명 부양 나무로 다산과 풍요, 그리고 안녕을 보살피는 민속적 관계로부터 설명될 수 있다. 한자명 박수(朴树)는 샤먼(무당, 점(卜)을 치는 사람)의 나무(木), 또는 신령스런 나무라는 의미다. 박수무당(朴树巫堂)이라는 것도 팽나무(朴树)로 대표되는 마을 당산나무 아래에서 굿을 하는 남자 무당을 말한다. 이처럼 팽나무는 오래전부터 우리 인간에게 신목(神木)으로 인식되었던 민족식물이다. 4. 백거이(白居易)의 장한가(長恨歌)에 나오는 비익조, 연리지 唯將舊物表深情(유장구물표심정) / 오직 옛 물건으로 깊은 정을 표하려 하니 鈿合金釵寄將去(전합금채기장거) / 자개 상자와 금비녀를 보내겠다 말했지 釵留一股合一扇(채류일고합일선) / 비녀는 반 쪽씩, 자개함은 하나씩 釵擘黃金合分鈿(채벽황금합분전) / 비녀와 자개함을 반으로 나눴으니 但敎心似金鈿堅(단교심사금전견) / 두 마음 이처럼 굳고 변치 않는다면 天上人間會相見(천상인간회상견) / 천상과 인간세상 사이에서 다시 보게 되리라. 臨別殷勤重寄詞(임별은근중기사) / 헤어질 즈음 간곡히 다시 하는 말이 詞中有誓兩心知(사중유서량심지) / 두 마음만이 아는 맹세의 말 있었으니 七月七日長生殿(칠월칠일장생전) / 칠월 칠석 장생전에서 夜半無人私語時(야반무인사어시) / 깊은 밤 사람들 모르게 한 약속 在天願作比翼鳥(재천원작비익조) / 하늘에서 만난다면 비익조가 되기를 원했고 在地願爲連理枝(재지원위련리지) / 땅에서 만난다면 연리지가 되기를 바랐지 天長地久有時盡(천장지구유시진) / 하늘 땅이 장구해도 끝이 있건만 此恨綿綿無絶期(차한면면무절기) / 이 한은 끝없이 이어져 다함이 없네 장한가(長恨歌)는 당나라 때 백거이가 지은 장편 서사시로 당 현종 원화 원년인 806년에 지어졌다. 시가 너무 길어서 마지막 부분만 인용했다. 당 현종 이융기와 그의 비 양귀비와의 사랑을 읊은 노래이다. 장한가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부분은 양귀비가 총애를 받고,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 양귀비가 죽는 장면, 둘째 부분은 양귀비를 잃고 난 후의 현종의 쓸쓸한 생활, 셋째 부분은 죽어서 선녀가 된 양귀비와 만나보는 장면으로 되어 있다. 마지막 구절은 작가적인 상상력을 최대한 드러내 애절함을 고조시킨다. 지극한 사랑을 의미하는 말에 하늘엔 비익조(比翼鳥), 땅에는 연리지(連理枝)가 있다. 비익조(比翼鳥)는 암수의 눈과 날개가 각각 하나씩이어서 짝을 짓지 않으면 날지 못한다는 전설상(傳說上)의 새를 말한다. 이는 애정, 사랑, 그리움, 애틋함, 우정의 대명사를 한 마디 용어로 비유한 데서 만들어진 상징물들이다. 비익조는 암컷과 수컷의 눈과 날개가 하나씩이어서 짝을 짓지 아니하면 날지 못한다. 이는 부부 사이의 아름다운 사랑을 비유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연리지는 뿌리가 다른 나뭇가지가 서로 엉켜 마치 한 나무처럼 자라는 현상이다. 매우 희귀한 현상으로 남녀 사이 혹은 부부애가 진한 것을 비유하며 예전에는 효성이 지극한 부모와 자식을 비유하기도 하였다. 다음은 『후한서(後漢書)』 채옹전(蔡邕傳)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후한 말의 문인인 채옹(蔡邕)은 효성이 지극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채옹은 어머니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삼년 동안 옷을 벗지 못하고 간호해드렸다. 마지막에 병세가 악화되자 백일 동안이나 잠자리에 들지 않고 보살피다가 돌아가시자 무덤 곁에 초막을 짓고 시묘(侍墓)살이를 했다. 그 후 채옹의 방앞에 두 그루의 싹이 나더니 점점 자라서 가지가 서로 붙어 성장하더니 결(理)이 이어지더니 마침내 한그루처럼 되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채옹의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와 자식이 한 몸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절절한 사랑의 의미로 비익조, 연리지에 덧붙여 비목어(比目魚)도 있다. 비목어는 중국 당나라 노조린의 시에 나오는 전설의 물고기를 가리킨다. 태어날 때부터 눈 하나를 잃은 물고기가 있었는데, 어느날 자신처럼 한쪽 눈이 없는 물고기를 만나 서로 의지하며 살았다는 전설이다. 눈이 한 개뿐인 비목어는 암수가 짝을 지어야만 헤엄을 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이 하나를 이뤄야 비로소 온전해지니 참된 사랑, 진정한 부부를 비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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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산과 바위의 정기가 뭉친 아름다운 취운암 산신각산과 바위의 정기가 뭉친 아름다운 취운암 산신각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취운암의 역사 취운암은 통도사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산내 암자로 보타암에서 200m 떨어진 곳에 있다. 취운암은 효종 1년(1650) 우운대사가 처음 창건하였고, 정조 19년(1795)에 낙운대사가 중건하였다, 그 후 1969년 태일화상이 다시 중수하였다. 원래 취운암 법당 뒤쪽에는 많은 역대 고승들의 부도가 위치해 있었으나 지금은 통도사 부도전으로 모두 이전되었다. 취운암의 건물로는 주 법당을 중심으로 2층 강당과 요사, 종각 등이 있으며, 법당 뒤편으로 산신각이 있다. 건물은 모두 6동 128칸에 이르는 큰 규모이다. 취운암에는 1896년 동호 진철이 제작에 관여한 것으로 기록된 통도사 취운암 지장시왕탱이 문화재 자료 제364호로 지정되었다. 통도팔경 중의 하나인 취운모종(翠雲暮鐘)은 취운암의 저녁 종소리를 말한다. 통도팔경을 기대하고 취운암의 종각을 가보면 약간 실망하게 된다. 종각은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영축총림율원 건물과 통도사 보살선원 건물 사이에 있어 구경할 수는 있지만 제약을 받게 된다. 취운암 종각은 탁 트인 공간에 별도의 건물로 지은 다른 사찰의 종각과는 다르다. 2. 취운암 영축총림 율원 취운암에 영축총림 취운선원, 영축총림율원이 있다. 초대율주는 중산혜남(2007~현재), 율원장은 중산혜남(2005~2007), 2대 율원장은 우설덕문(2007~현재), 현재 강사진으로 율감은 정본스님, 강사는 무진스님이 맡고 있다. 율원은 종단 기본 교육과정을 이수한 비구, 비구니에게 율장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게 하며 청정 지계의 가풍을 확립하게 하는 교육기관을 말한다. 율원 2년(석사)과정과 연구원(박사) 3년 과정으로 교육기간이 설정되어 있으며, 율장의 전문적 연구습의와 예참의 올바른 전승과 율학을 전수할 율사의 양성을 교육 목표로 삼고 있다. 통도사 영축율학승가대학원의 연혁은 다음과 같다. - 불기 2549년(2005) 4월 29일 종단 전문교육기관인 영축율원으로 취운암에서 개원 - 불기 2551년(2007) 2월 율원 1회 졸업생 배출 - 불기 2551년(2007) 3월 연구과정 개설 - 불기 2552년(2008) 2월 2회 졸업생 - 불기 2553년(2009) 2월 3회 졸업생 - 불기 2554년(2010) 2월 연구과정 1회 졸업생, 전문과정 4회 졸업생 - 불기 2555년(2011) 2월 연구과정 2회 졸업생, 전문과정 5회 졸업생 - 불기 2555년(2011) 4월 교육원 법령에 의해 명칭이 영축율원에서 영축율학 승가대학원으로 변경. - 불기 2563년 (2019) 2월 연구과정 10회 졸업생, 전문과정 13회 졸업생 배출 3. 사찰과 산신각 산신숭배 전통은 우리나라에서 오래도록 자리를 지켜온 신앙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민간의 산신신앙이 점차 불교에도 수용되어 사찰 내에 산신각(山神閣)이라는 형태로 자리 잡았다. 사찰에서 산신각이라는 별도의 공간을 두고 산신을 모시는 것은 한국 불교만의 독특한 현상이고 우리 고유문화를 잘 반영하고 있는 모습이다. 한국 사람의 종교신앙적 뿌리는 산신령(山神靈) 신앙이다. 한국인의 고유 신앙은 산신령교이다. 대략 1만 년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산신령 신앙을 바탕으로 시루떡을 쌓듯이 불교가 들어왔고, 유교가 들어왔고, 기독교가 들어왔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기존의 토속신앙을 배제하지 않고 융합한 것이 산신령, 용왕, 칠성신 등이다. 사찰에는 토착신을 모신 명부전(冥府殿), 시왕전(十王殿), 산신각(山神閣), 칠성각(七星閣) 등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불교가 인도, 중국, 한국에 있어서 각국의 토착신앙과 융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산신을 모신 산신각은 우리 나라 토착신앙과 불교가 융화된 모습을 나타내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통도사에는 터를 지키는 신을 모신 가람각(伽藍閣)이 있다. 통도사 가람각은 통도사를 수호하는 신을 모신 곳이다. ‘가람’의 의미는 ‘승가람’의 약칭으로 범어로는 ‘상가라마’의 음역으로 ‘절’을 뜻한다. 가람각은 통도사 모든 것을 수호하고 보호하는 신장을 모신 전각이다. 절의 산문 근처나 사찰 입구에서 장승이나 돌무더기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산신각이나 사찰 입구의 장승은 한국사찰의 특징이며, 이는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융화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산신각은 불교와 상관이 없지만 웬만한 사찰에는 산신각이 있다. 산신은 원래 불교와 관계가 없는 토착신이나, 불교의 재래신앙에 대한 수용력에 의하여 먼저 호법신중(護法神衆)이 되었다가, 후대에 원래의 성격을 불교 안에서 되찾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차차 나타나기 시작한 산신각은 하근기(下根機) 사람들을 위한 방편으로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근기라는 것은 중생이 불법을 듣고 깨달아서 아는 능력을 말한다. ‘상근기’, ‘하근기’ 하는 것은 중생이 다겁생래로 겪어오면서 쌓인 번뇌와 업장의 차이를 의미한다. 부처님은 일체중생 모두 불성이 있으므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하고 하였다. 전생에 오랜기간 수행을 한 사람이면 이번 생에는 깨달음을 이루기 쉬운 상근기가 되고, 반면 전생동안 욕망, 번뇌에 이끌린 사람은 그 업 때문에 깨달음을 얻기 힘든 것을 하근기라 한다. 불교에서 산신의 연원을 찾아보면 『화엄경(華嚴經)』, 『지장경(地藏經)』 등 불교 경전에 호법신중(護法神衆)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처음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담당하다가 점차 독립적인 신앙으로 바뀐다. 이러한 산신신앙이 불교와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되었고 현재까지도 사찰에서 산신의례가 이루어지고 있다. 『불교상용의례집』에는 산신각에 대한 의례와 산신헌공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사찰 내에 산신신앙과 산신의례가 완전히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민간에서 이어져 오던 산신신앙이 불교에 수용이 되고, 그 안에서 다시 독립신앙이 되는 과정은 의례의 변화와 맥을 같이 한다. 현재의 산신은 가람수호신으로서의 기능과 함께 산속 생활의 평온을 비는 외호신(外護神)으로서도 받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불교 본연의 것이 아니라 하여 전(殿)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각(閣)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있다. 현재 이 산신각에서는 자식과 재물을 기원하는 산신 기도가 많이 행하여지고 있으며,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에는 산신각이 갖추어져 있다. 산신탱화는 크게 세 가지 형식이 있다. 도교적 탱화는 산신이 백발의 파초선을 든다. 유교적 탱화는 머리를 정좌관을 쓰고 지팡이를 든다. 불교적 탱화는 불경과 염주가 등장한다. 중국 도교의 칠성이 불교에 습합돼 칠성신앙이 생겨났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산신이 호법신중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전국토의 7할이 넘는 산을 갖고 있는 산악지형인 우리나라에서는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산악숭배 사상이 있었다. 이러한 산신신앙은 모든 자연물에는 정령이 있고 그것에 의하여 생성이 가능하다고 믿는 원시신앙인 정령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나라 상고사를 보면 단군이 죽어서 산신이 되었다고 나온다. 단군이 ‘당골’로 변하였다고도 한다. 애국자도 죽어서 산신이 된다고 믿었다. 이 나라 국토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애착이 있는 임금, 관리, 장군이 죽으면 산신이 되었다. 신라시대 김유신 장군, 고려 최영 장군도 산신이 되었다. 단군 신화에 따르면 환인의 아들인 환웅은 지상세계로 내려와 웅녀와 혼인하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단군은 고조선을 세운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스님이 특히 단군신화를 맨 첫머리에 실은 것은 단군신화를 통해 우리 민족의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학자들에 따르면 단군은 제사장을 뜻하는 터키, 몽고어의 ‘탱그리(Tengri)’와 동의어다. 안재홍에 따르면 하늘의 왕을 의미하는 몽고의 등거리, 돌궐의 탱그리, 여진어의 당걸, 당굴에서 유래한다. 우리가 ‘단군’, 즉 ‘당골래’라고 부르는 이름은 중앙아시아 사람들은 ‘탱그리’라고 부른다고 한다. 산신각은 불교 고유의 신격이 아닌 까닭에 산신각의 입지는 불전의 배후에 떨어져 산과 가까운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많은 사찰에서 산신각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에도 건물의 크기가 작은 이유는 산신 신앙의 개인성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와 같이 간결한 산신각의 모습을 통하여 산천 정기가 집약되고, 응축된 장소임을 강하게 나타내려는 상징적 의도가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산신각은 산천의 정기가 사찰 안으로 흘러 모여드는 입구이자 불교의 고유한 신앙체계가 무한한 산과 자연의 영역으로 확장되는 출구이기도 한 다목적 통로이다. 산신기도의 전통이 깊은 산사에서는 산신 하강일로 여기는 음력 3월 16일마다 기도를 올린다. 안으로는 조왕, 밖으로는 산신을 중시하는 ‘내호조왕(內護竈王) 외호산신(外護山神)’의 전통에 따라 매달 초사흘과 그믐에 각각 산신기도와 조왕기도를 올리기도 한다. 사찰에 따라 초하루부터 사흘간 하거나, 날짜가 초엿새나 보름인 곳, 3월 삼짇날과 9월 중양절의 산신기도로 정착된 곳 등 다양하다. 4. 취운암 산신각 취운암에는 거창한 전각들이 늘어서 있다. 영축총림선원과 영축총림율원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는 대흥루라는 큰 전각의 중앙으로 나 있는 통로의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 격인 취운전이 정면에 있다. 왼쪽에는 선원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율원이 있다. 영축총림율원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오른쪽 기둥에 대웅전, 산신각이라는 프린트하여 코팅해 붙여놓은 작은 안내 표지판이 있다. 무심한 방문객은 그냥 지나칠 수 있고, 눈 밝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표지판이다. 오른쪽에는 세로로 만들어 세운 플래카드 형태의 산신각 안내문도 있다. “산신기도 영험도량 취운암 산신각 신축불사 접수 받습니다.” 산신각은 이미 지었는데, 또 무슨 신축불사 인가? 하는 의문점이 생길 수도 있지만 아직 산신각 단청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불사가 필요한 것이다. 산신각은 취운전과 율원 사이로 들어가 왼쪽으로 가면 올라갈 수 있다. 물론 취운전 왼쪽으로 돌아가도 된다. 계단을 오르면서 산신각이 산 위에 보이고, 거대한 바위들이 나타난다. 이런 모습이 다른 사찰의 산신각과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기묘하게 생긴 웅장한 바위가 산신각을 떠받치고 있어 놀라움을 안겨준다. 기기묘묘한 바위 뒤로 단정하게 쌓은 축대 위에 새로 지은 산신각이 작게 보인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거대한 암반 틈새에 좌정한 산신령을 먼저 친견하게 된다. 실물처럼 모형으로 만든 호랑이 등에 걸터앉은 산신령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산신령 앞에는 공양물로 바친 과일, 과자, 술 등이 놓여 있다. 산신령님께 1차로 인사하고 기도를 드린 후에 계단을 계속 올라가면 진짜 산신각이 나타난다. 구부러져 자연스런 느낌이 나는 계단을 올라 산신각 입구에 도착하면 큰 나무가 두 그루가 서있다. 산신각 문은 활짝 열려 있어 벌써 산신령의 옆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림으로 그린 산신도가 아니고 조각을 한 산신도라서 입체적인 사실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산신도를 살펴보면 중앙의 바위 양옆으로 폭포수가 흐르고, 오른쪽의 소나무 아래에 호랑이가 엎드려 있고, 백발 수염의 산신령은 오른손에 단장을 들고, 왼손은 호랑이 머리 위에 올려놓고 앉아 있다. 시봉하는 작은 동자승 한 명은 꿇어앉아 손에 산삼을 들고 있고, 큰 동자승은 과일이 든 바구니를 들고 있다. 동자승 옆에는 아기 사슴 두 마리가 산신령을 쳐다보고 있다. 제물은 바나나, 포도, 사과 등 각종 과일, 시주금, 공양미, 과자, 초 등이 있다. 특이한 공양물로는 오이와 당근이 놓여 있었다. 산신령이 좋아하는 공양물은 메밀묵, 미나리, 오이, 당근, 호박, 당귀 같은 생야채, 백설기, 각종 과일 등이다. 필자도 시주함에 돈을 시주하고 삼배를 하며 산신령님께 기도하였다. 기도는 자신을 위해 하는 것보다 국가와 사회의 발전, 타인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기도발 잘 받는다고 한다. 일반 불자들은 스님들처럼 해탈하여 부처님이 되기는 어려우니 자신과 가족의 안녕을 위해 산신령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불자는 절을 찾아가 부처님께 기도하는 것은 기본이고, 부차적인 기도 대상으로 재물을 주는 산신, 자식과 수명을 관장하는 칠성, 복락을 선사하는 독성께 직접 공양하고 기도하는 것을 즐겨한다. 산신각 앞에 서서 취운암을 내려다보면 경치가 일품이다. 전각들이 한눈에 들어오고 통도사 보살선원 건물도 잘 보인다. 산신각 주변에는 우람한 금강송, 각종 거목들이 도열해 있고, 거대한 바위도 있어 산신령이 있을 만한 자연환경을 두루 갖추고 있다. 취운암이 깊은 산중도 아닌 낮은 야산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산신령이 거주할 분위기를 지닌 명당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불자가 산신령님께 시주금, 공양물을 정성스레 올리고 간절하게 기도하면 산신령님이 감응할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전국 사찰을 많이 답사하였지만 취운암 산신각처럼 주변환경과 조화를 이루면서 아름다운 산신각은 거의 보지 못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취운암 산신각을 방문하여 기도하고 소원성취하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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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박사 화요칼럼, 산과 바위의 정기가 뭉친 아름다운 취운암 산신각천성산 큰 바위 석굴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원효대사 기도처 ‘큰 바위 석굴’은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가 천성산에서 수행 정진할 때의 석굴 수도처 중 한 곳인 것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는 곳이다. 원효대사는 태종무열왕의 둘째 딸 요석공주와 3일간의 짧은 사랑으로 신라 십현(十賢) 중 한 사람인 설총(薛聰)을 낳았다. 그러나 원효는 실계(失戒)의 비탄을 속인의 옷을 걸치고 전국을 유랑하며 고행 수도(修道)로 달랬다. 삼국유사 등 기록으로 볼 때 원효는 각처의 수도처 중에서도 천성산에 가장 오래 머물렀던 것을 알 수 있다. 원효대사가 면벽 수도하던 석굴로는 미타암 석굴, 적멸굴, 반고굴 등이 있으며, 이와 함께 금수굴과 큰 바위 석굴도 원효대사가 수행했던 석굴이었던 것으로 구전에 의해 전해지고 있다. ‘큰 바위 석굴’ 아래 마을사람들에게는 이곳에서 치성을 드리면 소원성취한다는 성스럽고 영험한 기도처인 곳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평산동 마을 사람들은 예부터 음력 정월 대보름이면 온 동리 사람들이 모두 나와 이곳 큰 바위에 올라 달뜨는 시각에 맞춰 한 해의 무사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제를 올렸다. 그리고 마을로 내려가 풍년을 기원하며 달집태우기를 하였다. ‘큰 바위 석굴’ 안내판은 천성산숲길보전회(현재 양산숲길보전회 전신)에서 설치하였다. 천성산숲길보존회는 양산시 문화관광과 관광마케팅계와 업무 협조를 통해 천성산에 스토리텔링 안내판을 설치하는 사업을 실시한 바 있다. 스토리텔링이란, ‘스토리(story)와 텔링(telling)의 합성어’로 알리고자 하는 바를 재미있고, 생생한 이야기로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요즘 유행하는 문화융성복합시대에 걸맞게 양산시에서도 유서 깊은 역사문화의 현장인 천성산을 찾는 방문객들이 즐겁고 안전하게 등산을 할 수 있도록 안내판과 표지판 설치에 예산을 투입한 것이다. 황윤영 전 시의원이 예산 확보에 큰 힘을 썼으며, 에브라임기획(성만수 대표)에서 스토리텔링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2014년 10월에 천성산숲길보존회 임원진(회장 고 이채도 영산대 교수, 필자는 고문)과 양산시 송미진 관광마케팅 계장은 천성산 현장답사를 통해 스토리텔링 안내판을 설치할 곳을 선정하고, 안내판에 사용할 스토리 내용을 구상하고, 사진 촬영을 하면서 사전 준비를 하였다. 필자가 스토리텔링 안내판에 쓰일 사진을 찍었다. 완성된 스토리텔링 안내판과 표지판을 12월에 설치를 완료하고 2015년 1월 31일에는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 천성산숲길보존회 회원들과 함께 답사하였다. 새로 설치한 안내판은 기존 안내판과 차별화해 역사와 문화를 재미있는 이야기로 재구성해 친환경 소재인 목재로 제작했다. 요즘 천성산을 답사할 때 보면 그 당시 설치한 안내판이 ‘큰 바위 석굴’처럼 대부분 잘 남아 있다. 일부는 노후화되어 교체가 필요한 실정이다. 필자는 ‘큰 바위 석굴을’ 지난 10월 10일에 답사하였다. 석굴 안에는 기도하는 사람들의 흔적이 있었는데, 불전함, 대리석을 돌 위에 걸쳐서 만든 제단, 향꽃이 제단 두 개, 제물로 올린 술잔, 커피, 과일, 과자, 작은 불상 두 개가 있었다. 필자는 후레쉬를 갖고 갔기 때문에 선명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석굴 안에 물이 없어 장기간의 기도처로서는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석굴을 나와서 위로 올라가면 큰 바위가 떠 있어 틈이 있는 곳을 볼 수 있다. 2. 지명 유래 주민들에 의하면 큰바위는 일명 붓쇠바위로 불리기도 하였다. 여수바우 서북쪽에 있다. 여수바우는 삼각산 동쪽에 있는 바위로 여우굴이 있었다고 한다. 경상도 사투리로 말하면 바위는 바우다. 붓쇠바우는 불쇠바우로 불리기도 한다. 불쇠바우는 불을 붙이는데 사용하는 부싯돌이 많이 나서 얻은 이름이다. 부싯돌은 불을 일으키는 데 사용되는 돌로, 부싯돌은 석영의 일종으로 차돌이라고 한다. 몸이 아주 단단하고, 백색, 회색, 갈색, 흑색 등 여러 가지 빛깔이 있으며 반투명 또는 불투명하기도 하다. 불을 일으키기 위해서 선사시대에는 돌과 돌을 부딪쳤으나 철기시대 이후에는 쇳조각과 부딪쳤다. 불을 일으키는 도구는 부싯돌, 부시, 부싯깃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싯돌은 성냥, 라이터 떄문에 사라지고 말았다. 천성산 아래 마을인 평산동은 이 지역의 지대가 매우 평평해 평산(平山)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아리(阿里)골, 아리곡(谷)이라고도 했다. 1867년 큰 화재로 인해 마을 전체(현 한일유앤아이아파트에서 평산동 행정복지센터까지)가 폐허로 변했다. 화제 이후 이곳은 구터(옛터)라고 불렀다. 화재 이후 주민은 평산마을 자리로 이주하였다. 1828년 웅촌면 아리, 1867년 웅촌면 아리 개(改) 평산리, 1870년 웅촌면 평산리로 마을 이름이 변경되었다. 아리는 평산의 옛 지명으로 구터(옛터)가 있었던 곳에는 2000년대까지 집 경계의 감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아리골에는 아리사(阿里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현재 선우3차아파트 자리다. ‘큰 바위 석굴’로 가는 등산로는 평산동 한일유앤아이아파트 뒤 스크린골프장 가는 입구 옆에 있는 임도로 올라가면 된다. 평산 임도를 거쳐서 정자와 운동기구가 있는 쉼터에 도착하여 등잔산 전망대로 올라가 웅상지역을 조망하면 좋다. 등잔산은 등잔 모양으로 생겨서 붙은 이름이다. 옛날 전기가 들어오지 않을 때 밤이 되면 등잔불을 켜서 어둠을 밝혔다. 등잔산은 해발 479m로 높지는 않지만 웅상지역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다시 쉼터로 내려와 오른쪽 임도나 중앙 능선으로 올라가면 ‘큰 바위 석굴’이 나온다. 3. 큰바위 석굴로 가는 등산로 평산 임도 쉼터에는 커다란 정자가 세 개 있고, 벤치 주변으로는 각종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있다. 한일유앤아이아파트에서 쉼터까지 거리는 1.1km이다. 쉼터에서 등잔산 정상까지는 280m이다. 왼쪽 임도는 은수고개(3.4km) 임도로 샘터 근처에 가면 임도가 끝난다. 은수고개는 등산로로 계속 올라가면 된다. 정자와 운동기구가 있는 쉼터에서 ‘큰 바위 석굴’로 가는 등산로는 두 군데 있다. 쉼터에서 표지판을 따라 왼쪽 임도로 20m 정도 가서 묘지 옆으로 난 등산로를 오르면 중앙 능선을 따라 ‘큰 바위 석굴’로 갈 수 있다. 능선을 따라가면 소나무 숲길로 이어진다. 능선 중간에 웅상지역을 조망할 수 있는 멋진 바위 능선이 있다. 쉼터에서 오른쪽 평산 임도를 따라 올라가면 ‘큰 바위 석굴’로 갈 수 있는데, 한일유앤아이아파트에서 3.3km 지점에 있는 ‘큰 바위 석굴’ 200m라는 표지판 따라 산으로 올라가면 된다. 임도로 계속 올라가면 안 된다. ‘큰 바위 석굴’을 구경하고 계속 가면 철쭉제 제단으로 갈 수 있는 등산로가 있다. 미타암을 거쳐서 천성산 철쭉제 행사하는 철쭉제 제단을 지나 ‘큰 바위 석굴’로 가는 등산 코스가 있다. 철쭉제 제단에서 ‘큰 바위 석굴’로 가는 표지판이 있는데, 거리는 470m이다. 철쭉제 제단에서 미타암까지는 1.1km이다. 한일유앤아이아파트에서 평산 임도를 통해 올라가면 물레방아가 있고, 좀 더 올라가면 쉼터와 임도 갈림길이 나온다. 쉼터 주변의 등산로 안내판에는 큰바위 석굴을 안내하는 표지판은 없다. 평산 임도를 따라가면 ‘큰 바위 석굴’ 안내 표지판을 만날 수 있다. 중앙 능선을 따라가면 평산 임도와 만나는 근처에 ‘큰 바위 석굴 표지판’이 있다. 평산 임도를 계속 따라가면 안 되고 ‘큰 바위 석굴’ 표지판이 있는 산으로 올라가야 한다. 한일유앤아이아파트에서 올라가는 임도, 1.1km 거리에 있는 쉼터에서 ‘큰 바위 석굴’로 가는 안내 표지판 설치가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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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태작곡가 칼럼,(와이뉴스 음반이사) =뾰족한 마음,둥그런마음2022. 10. 28. 22:48 > 뽀족한 마음! 둥그런 마음! 나 어릴때 내마음은 뽀족하였다. 잘 못 했을때 뽀족한 마음이 내마음을 찔러 아파 울어었다 세월이 흘러 내나이 이만큼 먹었을땐 "뽀족한 마음"이 닳고닳아 죄짓고도 잘못인줄 모르고 벌받고도 반성없이 두리뭉실 "둥그런 마음"이 되어버렸다. 아하~ 서산마루에 걸려있는 황혼의 삶을 나 어릴때 별빛같은 마음으로 바라본다면 어떤 표상으로 보일까? 세월풍파에 시달려 둥글게 무뎌져 버린 이내 마음이 서글퍼 지는구나 옛말에 철없는 사람을 일컬어 "나이를 거꾸로 먹었나"란 속어가 있듯이 나이가 아닌 "마음 만큼은 거꾸로 먹어라"고 필자는 말하고싶다 순수하고 착한 어린마음이 되어 잘 못하고 죄 지어면 "뽀족한 마음"이 내가슴을 찔러 아파하고 눈물흘리는 "뽀족한 마음"을 그리며, 이글을 피력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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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 사천에어쇼2022 사천 에어쇼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양산에서도 열린 블랙이글스 에어쇼 사천의 대표 항공우주축제인 ‘2022 사천에어쇼’가 10월 20일부터 23일까지 나흘간 사천비행장에서 펼쳐졌다. 사천에어쇼는 경상남도와 사천시, 대한민국 공군, 한국항공우주산업(주)(KAI) 공동주최로 사천비행장 일원에서 총 9개 분야 110개 프로그램으로 진행하였다. 10월 20일 개막식을 시작으로 공군 특수비행팀 블랙이글스, 호주 민간곡예비행팀인 폴베넷에어쇼팀의 곡예비행이 관객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국내 생산 항공기인 KT-1의 축하 비행, T-50과 듀오드론의 시범비행, 전투 탐색구조, 고공강하 시범, 체험비행, 항공대회, 홍보전시관, 항공청소년의 날 등이 진행되었다. 이번 에어쇼에는 지상 전시를 포함해 KAI가 개발한 한국형 초음속 전투기 KF-21 보라매 전투기를 최초로 지상전시를 하였으며, 미국에서 들여온 최신 스텔스 전투기인 F-35A, 한국형 소형무장헬기 LAH, 고고도 정찰기인 글로벌 호크 등 다양한 항공기와 무기체계를 선보였다. 지금부터 6년 전인 2016년 4월 29일 오후 ‘함께 뛰는 행복양산! 함께 여는 미래경남’이라는 주제의 제55회 경남 도민체육대회 개회식 식전행사로 공군 특수비행팀 블랙이글스 축하 에어쇼가 양산종합운동장 상공에서 열린 바 있다. 양산에서 처음 선보인 에어쇼는 양산시민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사천시 사천읍에 위치한 사천공군비행장에서 열리는 에어쇼는 각종 전투기와 무기, 미사일을 현장에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필자는 사천 에어쇼를 매년 참관하였는데, 이번에는 10월 21일에 방문하였다.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3년 만에 열린 사천에어쇼는 정말 장관이었다. 미국에서 도입한 최첨단 전투기인 F35, KAI에서 개발 중인 국산 전투기인 KF-21전투기도 실물을 볼 수 있어 관람객의 인기를 끌었다. 2. 사천 제3훈련비행단 사천비행장은 민항기도 운항하지만 공군 비행장이다. 공군 제3훈련비행단이 위치하고 있는 군사 시설이다. 제3훈련비행단은 1968년 5월 10일 대구에서 창설되었다. 공군의 비행단 중 위도상으로 가장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공군의 비행교육과정 중 중추적인 역할인 중등비행과정과 공중기동기 고등비행과정을 담당하고 있다. 약칭은 3비이며, 3훈비라고도 불린다. 별칭은 토성대이다. 부대 연혁 - 1968년 5월 10일 제3훈련비행단 창설(대구) - 1973년 4월 제3훈련비행단 재창설(사천) - 1982년 10월 공군 최우수부대 선정 대통령 표창 수상 - 1992년 9월 T-59 고등훈련기 도입 - 2000년 9월 KT-1 기본훈련기 도입 - 2004년 5월 전 비행교육대대 KT-1 기종 전환 - 2004년 10월 제1회 사천에어쇼 개최 - 2012년 10월 국방부장관 부대표창 수상 프로펠러 훈련기만 있는 부대라서 다른 전투비행단에 비해서 매우 조용한 편이다. 독립전대인 제52시험평가전대와 예하비행대대인 제281시험평가비행대대가 사천기지에 함께 주둔하고 있으며, T-50과 KF-16 등 각종 항공기와 무기체계의 시험평가를 위한 비행을 하고 있다. 출신 성분에 따라서 비행훈련과정에 차이가 있다. 공군사관학교, 학사장교, 조종장학생 출신 학생조종사들은 공군사관학교 예하 제212비행교육대대에서 KT-100 초등훈련기를 이용해서 11주간의 초등비행과정을 수료하고 3훈비로 전입을 온 뒤 35주간의 중등비행과정을 받게 된다. 한국항공대학교, 한국교통대학, 한서대학교 항공운항학과를 졸업한 ROTC 출신 학생조종사들은 초등비행과정을 생략하고 중등비행과정부터 입교한다. 다른 출신 학생조종사들이 초등비행과정에서 평균 약 17시간 정도의 비행을 하고 넘어오지만 학군 출신 학생조종사들은 이미 대학교 3~4학년 때 학교에서 세스나 훈련기로 비행훈련을 통해 120~180 시간 정도의 비행시간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에어쇼 프로그램 2022 사천에어쇼는 앞으로 항공우주 시대를 이끌어 갈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데 목적이 있다. 또한 관람객들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선사하기 위해 다양한 체험과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공군은 항공우주산업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과 이해를 높이고 다양한 참여행사를 통해 국민들과 소통하기 위해 지난 2016년부터 사천에어쇼의 공동 주최기관으로 참여해 오고 있다. 개막일인 10월 20일에는 공군 특수비행팀 블랙이글스의 고난도 에어쇼가 펼쳐졌으며, F-35A, KC-330 다목적 공중급유 수송기 등 항공 전력 30여 대의 축하 비행도 선보였다. 호주 민간 곡예비행팀 폴베넷(Paul Bennett)의 비행과 국산항공기 T-50, KT-1의 시범 비행이 매일 진행돼 관람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21일에는 민관군 항공우주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뉴스페이스 시대, 우주산업의 비전을 말하다’는 주제로 공군의 미래를 조망하는 ‘민·군 협력 항공우주력 발전 학술회의’가 개최되었다, 항공우주에 대한 꿈을 키우는 학생들을 위한 항공우주 체험프로그램 ‘드림데이’와 ‘항공 청소년의 날’도 진행되었다. 22일에는 Space Challenge 2022 무인항공기 코딩 경연대회 결선대회가 개최돼 참가자들이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뽐냈다. 23일까지 열린 제6회 공군참모총장배 드론종합경연대회에서는 드론 클래쉬 종목과 드론 축구 종목이 진행되었다. 2022 사천에어쇼는 지난 7월 초도비행 성공 이후 한창 체계개발 중인 한국형 전투기 KF-21, 공군의 고고도 무인정찰기 RQ-4B, 미국에서 도입한 F35 등의 항공 전력을 지상에서 전시하여 실물을 보고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C-130과 CN-235수송기 체험비행, 항공우주전시관 및 체험장, ‘국방TV 위문열차’ 공연 등 관람객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4. 블랙이글스(Black Eagles) 영국 에어쇼 지난 7월 17일 대한민국 공군 특수비행팀 블랙이글스가 영국 리아트(Royal International Air Tatoo, RIAT)에 참가해 지난 2012년에 이어 10년 만에 다시 한번 최우수상(The King Hussein Memorial Sword)과 인기상(The ‘As the Crows Flies’ Trophy)을 수상했다. 블랙이글스는 주최측의 공식 초청으로 리아트에 참가했으며, 지난 15일(현지 시간)부터 17일까지 매일 1회 25분간 에어쇼를 펼쳤다. 리아트는 영국 글로스터셔(Gloucestershire)에 위치한 페어포드(Fairpord)에서 진행되는 세계 최대 군사에어쇼로, 코로나19로 인해 3년 만에 열렸다. 올해는 영국, 프랑스, 독일 등 17개국에서 200여 대의 항공기와 17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참여했다. 현장에서 에어쇼를 관람한 현지 교민들과 한국전 참전용사들은 블랙이글스의 화려한 에어쇼를 관람하고 높아진 대한민국의 위상에 감격하였다. 블랙이글스는 태극마크를 그리는 태극 기동과 8기의 항공기들이 하나의 비행기처럼 일치된 기동을 펼치는 웻지롤(Wedge Roll) 등 24개 고난도 기동을 선보이며 영국 현지 언론과 관람객들의 찬사를 받았다. 블랙이글스는 리아트 마지막 날인 지난 17일 영국 공군 특수비행팀 레드 애로우즈(Red Arrows)와 우정 비행을 선보이며 한·영 공군 간 우호를 증진했다. 5. 블랙이글스 폴란드 에어쇼 블랙이글스 비행팀은 지난 7월 27일(현지 시간) 폴란드 뎅블린 공군기지 일대 상공에서 고난도 곡예비행으로 국산 항공기 T-50의 성능을 뽐냈다. 우리나라의 우수한 무기인 ‘K방산’의 폴란드 수출 낭보가 전해진 당일 수도 바르샤바에서 남동쪽으로 120㎞ 떨어진 뎅블린 상공에는 한국 공군 특수비행팀 블랙이글스의 현란한 곡예비행이 펼쳐졌다. 에어쇼에 앞서 폴란드 정부는 국방부 청사에서 한국항공우주산업(KAI), 현대로템, 한화디펜스와 순서대로 FA-50, K2 전차, K-9 자주포 도입에 관한 기본 계약(Framework Agreement)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이날 블랙이글스 에어쇼는 FA-50 경공격기의 폴란드 수출을 지원하고자 추진됐다고 한다. 6. 블랙이글스 이집트 피라미드 에어쇼 블랙이글스는 지난 8월 3일 오전(현지 시간) 이집트 카이로 기자 대피라미드 인근에서 열린 ‘피라미드 에어쇼 2022’에 참가해 이집트 공군 특수비행팀 ‘실버스타즈(Silver Stars)’와 합동 비행도 선보였다. 외국 공군 특수비행팀의 피라미드 상공 에어쇼는 이번이 세계 최초라고 하였다. 45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피라미드 인근은 비행 허가가 까다로워 이집트 공군 외 외국군의 에어쇼가 열린 적이 없다고 한다. 이집트 측이 한국 공군을 첫 에어쇼 파트너로 선정한 건 조종사들의 실력과 항공기(T-50B)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한국과의 방산 협력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 공군 특수비행팀 ‘블랙이글스’가 피라미드 상공에 태극 문양을 수놓으며 이집트인들을 매료시켰다. 이번 비행은 국산 항공기의 수출을 지원하기 위해 공군과 제작사인 한국항공우주산업(KAI), FA-50 도입을 적극 검토 중인 이집트 공군이 공동으로 기획했다. 피라미드 에어쇼는 양국의 우호협력 증진을 넘어 ‘K-방산’의 해외 핵심 거점 마련에 목적을 두었다. 한국과 이집트는 올해 초 성사된 K-9 자주포 수출 협상 이래 물밑 교섭을 통해 FA-50 수출과 현지 공동생산 방안을 협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7. 2022 사천 에어쇼 사천 에어쇼는 블랙이글스가 비행장에 도열한 모습을 가까이 볼 수 있는 게 최대 장점이다. 에어쇼가 공식 시작되는 3시 25분 전에 정비사들이 조종사를 위해 준비를 하는 모습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드디어 조종사들이 등장하여 관람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조정석에 탑승하였다. 블랙이글스기 시동을 걸고 엔진의 굉음이 울리며 배기가스가 나올 때 관람객들은 기대감을 갖고 연신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에어쇼를 위해 블랙이글스가 활주로로 이동을 시작하면서 관람객들의 기대감은 커졌다. 활주로 끝에서 준비를 마친 블랙이글스는 연속적으로 여러 대가 이륙하는 묘기를 보여주면서 흥분을 고조시켰다. 사천 공군비행장을 무대로 펼쳐지는 블랙이글스의 에어쇼는 관람객의 바로 눈앞과 머리 위로 굉음을 내며 고속 기동을 하는 블랙이글스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에어쇼를 중계하는 사회자가 블랙이글스의 기동 방향을 알려주고, 어떤 쇼를 펼치는지 해설을 해주어 관람객은 미리 대비를 할 수 있었다. 워낙 빨라서 순간의 방심은 중요 장면을 보지 못하고 놓치게 된다. 고막이 찢어질 듯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블랙이글스가 하늘을 가를 때 스트레스가 확 달아났다. 서로 반대 방향에서 순간적으로 날아와 부딪힐 듯 교차 기동을 할 때는 스릴을 느낄 수 있었다. 구경하면서 휴대폰으로 사진도 찍고 한편으로는 동영상을 촬영하느라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블랙이글스는 마치 1대처럼 근접한 상태에서 다이아몬드 대형, 독수리 대형 등을 만들기도 했다. 항공기들이 수직으로 떨어져 마치 폭포수를 연상케 하는 ‘레인폴’ 기동, 8대가 정면으로 함께 날아오다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웨지 브레이크’ 기동 땐 관람객들이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스마트폰으로 찍었다. 흰색 연막을 내뿜으며 솟구친 항공기들이 태극 문양을 하늘에 수놓자 관중석에선 박수가 터져 나왔다. 에어쇼를 마치고 블랙이글스는 착륙하여 원래 주기되었던 관람석 앞으로 되돌아왔다. 조종사들은 비행기에서 내려 관람객들에게 인사를 하였다. 사천에어쇼는 자라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꿈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이 돋보였다. 조종사들은 관람객들에게 다가와 사인을 해주었다. 미리 준비된 블랙이글스 사진이 실린 엽서에다 일일이 아이들의 이름을 물어보고 사인을 해주었다. 관람객이 준비한 종이에 사인을 해주기도 하였다. 주최측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커다란 공책두 종류를 준비하여 무료로 나누어주었다. 작은 수첩 형태의 노트도 제공하였다. 사천에어쇼의 문제점은 행사가 끝난 후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셔틀버스가 매우 부족하였다는 것이다. 4시 반에 에어쇼가 끝나고 셔틀버스를 무려 2시간 40분을 기다려 간신히 탔다. 사천시의 셔틀버스 운행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8. 세계를 제패하는 한국의 육해공 무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전세계 무기시장은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한국 방산 무기의 인기가 급상승하는 이변이 연출되었다. 반대로 그동안 세계 무기시장을 장악해왔던 러시아의 첨단 무기는 성능이 뻥스펙으로 드러나 망신을 당하고 판매도 못하고 있다. 중국 역시 무기의 성능이 떨어져 사려고 하는 국가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미국 무기는 성능이 좋아 구매행렬이 줄을 잇고 있으나 미처 생산을 못해 고객을 놓치고 있다. 한국의 무기는 성능도 최첨단이고 가격도 미국보다 저렴해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K9자주포, K2전차, FA50 전투기는 전세계 여러 나라에서 구매 요청을 하고 있다. 미국 무기는 구매 신청 후 5년 이상 기다려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 무기는 빠르면 몇 달 안, 늦어도 2~3년 후면 받을 수 있다. 7월 27일 폴란드는 K2 전차 980대, K9 자주포 648문, FA-50 경공격기 48대 도입을 위해 계약을 맺었다. 20조 원으로 추산되는 총 계약 규모는 올해 폴란드의 전체 국방비(약 19조 원)를 웃돈다고 한다. 한국 무기가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게 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자주국방에서 비롯되었다. 총알부터 대포, 미사일까지, 소총에서 장갑차와 탱크, 함정, 잠수함, 항공기에 이르기까지 육해공 전반에 걸쳐 무기를 국내에서 생산할 수 있도록 정밀기계산업, 중화학공업을 육성시킨 박대통령의 공적이 절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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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천성산 화엄벌 억새와 철쭉꽃 동시 개화천성산 화엄벌 억새와 철쭉꽃 동시 개화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억새의 특징 억새는 한국, 중국, 일본에서 자라는 볏과의 여러해살이풀로. 높이는 1~2m이며, 잎은 긴 선 모양이다. 7~9월에 누런 갈색 꽃이 피는데 작은 이삭은 자주색이다. 잎을 베어 지붕을 이는 데나 마소의 먹이로 쓴다. 여러 가지 변종이 있다. 억새 숲은 억새가 무성하게 우거진 곳을 숲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억새 숲은 억새 군락지로 억새가 무리 지어 있을 때 그 아름다움이 돋보여 억새 축제를 개최하기도 한다. 억새 줄기는 원기둥 모양이고 마디가 있으며 약간 굵다. 잎은 길이 40~70cm의 줄 모양으로, 너비는 1~2cm이며 끝부분으로 갈수록 뾰족해지며 가장자리는 까칠까칠하다. 맥은 여러 개인데, 가운데 맥은 굵고 흰색이며 기부는 긴 잎집으로 되고 긴 털이 있다. 가을에 줄기 끝에서 산방꽃차례를 이루어 작은 이삭이 빽빽이 달린다. 잎이 은근히 예리해서 억새를 꺾다가 베이는 경우가 많다. 또한, 우리나라 남해안 지역에서 드물게 서식하는 여치베짱이의 주 먹이이기도 하다. 한가위 벌초할 때 성묘객을 가장 애먹이는 풀 중의 하나다. 뿌리도 억세고 굵은데 재생력도 강해서 겨울철에 약을 뿌려도 봄이 지나면 반드시 싹을 틔우는 매우 강인한 식물이다. 뿌리는 약으로 쓰고 줄기와 잎은 가축 사료, 지붕 잇는 데 쓴다. 이엉은 볏짚, 보릿짚, 풀잎, 억새, 갈대, 왕골, 창포, 삼대, 띠 등으로 엮어 만든 지붕재료 또는 그 지붕을 말한다. 볏짚의 밑부분으로 한움큼 정도의 분량을 새끼나 여러 가닥의 짚으로 엮어서 지붕면에 깔 수 있도록 가공한 것을 한줄엮기이엉이라고 한다. 지붕의 용마루에 얹혀지는 이엉은 용마름이라고 한다. 2. 억새로 덮인 태조 이성계 건원릉 봉분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1335~1408)의 건원릉 봉분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잔디 대신 억새가 식재돼 있어 유명하다. 아버지 이성계의 유언에 따라 셋째 아들인 태종 이방원이 고향인 함경도에서 가져온 흙으로 봉분을 만들고 함께 가져온 억새를 봉분에 심었다고 한다. 이성계는 자신이 죽으면 둘째부인 신덕왕후가 묻혀 있는 정릉에 합장하기를 원했다. 아들인 태종 이방원은 신덕왕후를 무척 미워했다. 이방원은 1차 왕자의 난 때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인 방번과 방석을 죽였고, 신덕왕후는 그 일로 인해 화병으로 사망했다. 이성계는 자신이 죽으면 태종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고향인 함경도 함흥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 하지만 태종은 왕조를 일군 태조를 멀리 함흥에 묻을 경우 제사를 지내기 어렵고, 아버지의 유언을 거스를 수도 없는 문제에 봉착했다. 이때 신하들이 타협점을 궁리해 냈다. 함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봉분을 덮는다는 것이었다. 잔디를 덮은 다른 왕들의 능은 1년에 5~6차례 벌초를 하지만 태조의 봉분은 매년 한식에만 한차례 벌초를 하고 있다. 잔디는 벌초해도 금방 다시 자라지만 봄부터 가을까지 성장을 계속하는 억새는 베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억새는 한자로 청완(靑薍)이라고 하는데, 건원릉의 억새를 자르는 행사를 ‘청완예초의(靑薍刈草儀)’라고 한다. 3. 억새와 갈대의 차이점 억새와 갈대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자세히 관찰해보면 차이점이 꽤 있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는 말을 비유적으로 사용하여 더욱 혼란을 부추긴다.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억새와 갈대는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면 비슷하게 보인다, 우리 주변에서 갈대보다는 억새를 쉽게 접할 수 있다. 갈대는 서식지가 강변, 호수, 바닷가 등 물이 있는 곳이고, 억새는 산과 들, 강변 둔치, 논두렁 등 육지로 서식지가 광범위하여 쉽게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주변에서 흔하게 보이는 억새를 갈대로 착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갈대가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린다는 것과는 달리 오히려 억새가 바람에 이리저리 잘 흔들린다. 억새는 집 주변의 논두렁과 들판, 동네의 야트막한 산, 해발 700m~1,000m 산악지대, 해발 천 미터 이상의 고산지대 등 곳곳에 무리 지어 하얀 꽃을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면서 깊어가는 가을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식물이다. 갈대는 한여름에서 가을까지 꽃을 피우지만 억새의 경우는 늦가을까지 꽃을 피운다. 그리고 갈대는 세계 온대 지역에 고루 분포하지만 억새는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한정으로 서식 범위가 제한되어있다. 억새와 갈대는 자생지역으로 구분하는 것이 가장 쉽다. 억새는 산이나 뭍에서 자란다. 산에 있는 것은 무조건 억새이다. 갈대는 산에서 자라지 못한다. 갈대는 습지나 물가에서 자란다. 물가에서 자라는 물억새도 있으나 산에 자라는 갈대는 없다. 억새는 은빛이나 흰색을 띤다. 가끔 얼룩무늬가 있는 것도 있다. 억새는 억새아재비, 털개억새, 개억새, 가는잎억새, 얼룩억새 등 종류에 따라 색깔이 다소 다를 수 있다. 갈대는 고동색이나 갈색을 띠고 있다. 억새는 대부분 키가 1m 20cm 내외이나 일조량이 풍부한 지역에서는 사람의 키만한 억새도 있다. 갈대는 키가 2m 이상 큰다. 또 다른 점으로는 억새의 뿌리가 굵고 옆으로 퍼져나가는 데 비해 갈대는 뿌리 옆에 수염같은 잔뿌리가 많고, 억새의 열매는 익어도 반쯤 고개를 숙이지만 갈대는 벼처럼 고개를 푹 숙인다. 4. 억새 제대로 감상하기 억새는 보는 방향에 따라 아름다운 은색 물결이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약간 검게 보이기도 하는 마술을 부린다. 해를 정면으로 보는 역광의 상태일 때가 은색 갈대의 모습을 온전히 볼 수 있다. 해를 등지며 억새를 바라보면 금새 은색은 사라지고 검은 색조를 나타내며 표변한다. 또한 억새꽃을 해가 넘어가는 낙조일 때 지는 해를 마주한 채 역광으로 보면 매우 아름답다. 억새가 낙조의 붉은 빛을 머금으며 역광으로 빛나는 모습이 장관을 연출한다. 저물어가는 가을의 쓸쓸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순간에 억새, 석양, 인생을 연관지어 관조할 수 있다면 인생을 잘 살아 온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위대한 대자연 앞에서는 작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억새는 자연발생적으로 자생하는 군락지가 대부분이다. 옛날 화전민들이 고산지대에서 산에 불을 질러 화전으로 농사짓던 곳에 나중에 억새 군락지가 형성된 곳이 많다. 천성산 화엄벌도 옛날 화전농업의 흔적이 있다고 한다. 억새 군락지를 인위적으로 조성하여 새로운 명소를 만들기도 한다. 요즘 볏과의 다년생 식물인 외래종 핑크뮬리를 심어 관광명소를 만드는 경우가 많은데, 환경부에서는 핑크뮬리를 2급 유해종으로 지정하였다. 양산의 천성산 화엄벌, 울산광역시 울주군 영남알프스 일원 신불산, 간월재, 밀양시 재약산 사자평, 창녕 화왕산, 합천 황매산, 부산광역시 승학산, 홍성군과 보령시의 오서산, 정선군 민둥산, 서울특별시 하늘공원 등의 억새 군락지가 유명하다. 온산을 뒤덮은 억새의 은빛 물결을 즐기러 온 등산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어 이들 산은 몸살을 앓고, 주변 도로는 극심한 교통체증을 겪는다. 5. 화엄벌 억새와 철없는 철쭉의 조화 천성산은 봄에 피는 철쭉이 아름다워 5월에 ‘천성산철쭉제’ 축제가 열린다. 축제가 열리는 곳은 화엄벌이 아니고 철쭉 군락지가 펼쳐져 있는 철쭉제단이 있는 곳이다. 미타암에서 1.1km 거리에 있으며, 화엄늪에서는 2.5km 떨어져 있다. 천성산 철쭉제단의 철쭉 군락지는 봄에 만개했을 때 축제를 열어 수많은 등산객이 방문하고, 화엄벌은 가을의 억새가 볼만하여 등산객이 몰린다. 철쭉과 억새는 봄과 가을을 대표하는 천성산의 명물인데, 피는 계절이 달라 이 둘을 한꺼번에 볼 수 없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계절을 거슬러 피는 철쭉꽃 때문에 철쭉꽃과 억새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이색적인 광경이 연출되고 있다. 지난 10월 8일 천성산 화엄벌을 답사했을 때 때아닌 철쭉꽃을 볼 수 있어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억새의 흔들거림 속에서 철모르고 피는 철쭉꽃, 철없이 피는 철쭉꽃 덕분에 눈이 호사를 누렸다. 제철을 만난 듯 피어난 철쭉꽃을 보려면 드넓은 화엄벌로 올라가야 한다. 철은 일반적으로 계절을 의미한다. ‘철 지난 옷’과 같이 쓰이는 ‘철’은 ‘알맞은 시절’을 뜻하는 ‘철’로 제철과 같은 의미다. ‘제철을 만난 가을 전어’, ‘제철 맞은 망둥어 낚시’, ‘철모르고 꽃망울 터뜨린 가을 벚꽃’, ‘철모르고 핀 코스모스가 하늘하늘’ 등이 시절과 연관된 고기잡이, 시절과 어긋나게 핀 꽃을 말할 때 철이 자주 사용된다. ‘철이 나다’, ‘아이들이 철이 너무 없다’, ‘나이 댓 살 위였으나 어려서는 그 뒤를 졸졸 쫓아다녔고 철이 들어서는 함께 모든 일을 의논했다.’와 같이 쓰이는 ‘철’은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힘’을 뜻하는 말이다. ‘사리를 분별하여 판단하는 힘이 생기다’를 뜻하는 표현으로 동사 ‘철들다, 철나다’, ‘철이 들다, 철이 나다’로 표현한다. ‘지각없이 굴던 사람이 정신을 차려 일을 잘할 만하니까 이번에는 망령이 들어 일을 그르치게 되는 경우를 비난조로 이르는 말’로 속담 ‘철들자 망령이다’를 써 왔다. ‘사리를 분별할 만한 지각이 없다.’를 뜻하는 표현으로 형용사 ‘철없다’, ‘철이 없다’를, ‘사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함부로’의 뜻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부사 ‘철없이’를 써 왔다. 천성산 화엄벌에서 양산 시가지, 하북면 통도사 입구 신평마을, 물금지역 낙동강, 부산 해운대, 광안리 등이 잘 보인다. 화엄벌에는 억새 틈 사이로 철모르고 핀 철쭉꽃뿐만 아니라 가을꽃인 구절초, 용담, 쑥부쟁이, 산국, 감국, 미역취, 산부추꽃 등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