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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명활성과 비담의 난을 진압한 김유신 장군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경주 명활성 경주 명활성(明活城)은 경북 경주시 보문동에 있으며, 면적은 895,706㎡, 사적 지정일은 1963년 1월 21일이다. 명활산성에서 경주 명활성으로 명칭이 변경된 것은 2011년 7월 28일이다. 경주의 동쪽 명활산 꼭대기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둘레 약 6㎞의 신라 산성이다. 토성과 석성이 함께 있다. 경주 명활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경주 역사유적지구 중 하나이다. 명활산은 보문동과 천군동에 이르는 높이 245m의 나지막한 산이지만 신라인들에게는 신령스런 산이었다. ‘삼국유사’의 ‘신라시조 혁거세왕’이다. 육부촌 “다섯째는 금산 가리촌(金山 加利村, 지금의 금강산 백률사의 북쪽 산)인데 촌장은 지타(祗沱)이다. 처음에 명활산으로 내려오니 한기부(漢岐部) 또는 한기부(韓歧部) 배씨(裵氏)의 조상이 됐다. (중략) 여섯째는 명활산 고야촌(高耶村)인데 촌장은 호진(虎珍)이다. 처음에는 금강산으로 내려오니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 되었다.” 진한 사로국 6부 시절에 6촌장 가운데 두 사람이 명활산에서 탄강했거나 살았다. 배씨의 시조 지타는 하늘에서 명활산으로 탄강해 왔다가 금산 가리촌으로 가서 그곳의 촌장이 됐다. 호진은 설씨의 시조인데 금강산으로 탄강했다가 명활산 고야촌에 자리를 잡았다. 명활산성은 신라 왕경(王京)의 동쪽에 있었으며 나성(羅城)의 구실을 하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405년(실성왕 4) 이전에 이미 축성되어 있어 나성의 기능을 가진 산성으로는 최초로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나성은 성밖에 겹으로 둘러쌓은 성을 말한다. 명활산성은 북쪽 봉우리 해발 268.7m의 힌등산과 남쪽 봉우리 해발 269m의 장군봉 등 2개의 산정을 감싸고 있는 석축산성이다 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에 신라 실성왕 4년(405)에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보이므로 그 이전에 만들어진 성임을 알 수 있다. 역사서인 『삼국사기』 곳곳에 ‘명활성’이 등장한다. 첫 기록은 권 제3 신라본기(新羅本紀) 제3, 18 ‘실성이사금(實聖尼師今) 사년(405)’조에 나온다. ‘사월에 왜병이 명활성으로 쳐들어오다가 패해 패주하므로 왕은 친히 기병을 거느리고 독산(獨山, 현 영일) 남쪽으로 나가 요충(要衝)지에 복병하고 있다가 다시 싸워 적을 격파하고 삼백여 명을 참획하였다. 성을 쌓는 방법에서도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한 신라 초의 방식을 보이고 있다. 명활산은 왜구가 동해로 상륙했을 때 대왕암이 있는 동해안 일대에서 수도인 서라벌을 연결하는 최단 거리에 있는 산이다. 따라서 신라 도성의 동쪽에서 왜구를 방어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십오년(431년)’조에는 ‘사월에 왜병이 동변으로 쳐들어와서 명활성을 포위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패주하였다. 이는 이 성이 신라의 수도인 금성을 지키는데 중요한 곳임을 말해준다. 자비왕 10년(475년)부터 소지왕 10년(488년)까지 이곳을 궁성으로 사용할 정도로 중요한 성이었다. 진흥왕 15년(544)에 다시 쌓았고, 진평왕 15년(593)에는 성을 확장했다. 지금은 대부분의 성벽이 무너져 겨우 몇 군데에서만 옛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진흥왕 12년(551년) 때의 ‘명활산성 작성비’가 발견되어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고 있다. 공사 총책임자, 실무자, 공사기간 등 당시의 축성에 관한 내용을 전해준다. 처음에 토성이었다가 이때 석성으로 고쳐 쌓은 것으로 여겨진다. ‘명활산성비’로 보이는 비석 조각이 안압지에서 발견되었다. 북쪽 성 외벽 아랫부분에서는 성 바깥 북쪽으로 약 13m 떨어진 지점에서 호안석축(호수나 하천 등의 벽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쌓은 돌벽)으로 추정되는 석축 일부가 확인되었다. 북쪽 성벽 일부 구간에 한정하여 축조한 것으로 월성해자와 같이 물을 쓰기 위한 연못으로 보고 있다. 성내에는 문지 7개소, 수구문지 4개소, 건물터로 추정되는 대지 6개소가 확인되었는데 문지와 수구문지는 성벽이 붕괴되면서 덮이거나 파손되어 원형을 알 수 없다. 건물터에도 초석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은 1개소뿐이며 나머지는 기와편과 토기편이 흩어져 있었다. 그 밖에 연못이 2개소 남아 있으나 현재는 매몰된 상태이다. 선덕여왕 때는 비담(毗曇)이 이 곳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유신이 평정하기도 했으며, 남산성, 선도산성, 북형산성과 함께 동해로 쳐들어오는 왜구에 대항하여 경주를 지키는 데 큰 몫을 한 곳이다. 2. 명활성 작성비 성벽은 길이가 약 5㎞인 토성과 약 4.5㎞인 석성(石城)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석성의 북서쪽 성벽에서 축조 당시의 기록이 적힌 명활성 작성비가 발견되었다. 비의 크기는 높이가 66.8㎝, 최대 너비 31.0㎝, 두께 16.5㎝이며 직사각형이다. 비문은 9행 148자로 앞면이 거의 꽉 차도록 각자(刻字)되었으며, 명문의 필획이 깊은 것으로 볼 때 글자를 새긴 것이 분명하다. 서체는 육조풍(六朝風)의 예의(隷意)가 있는 해서체이며, 자경(字徑)은 1.5∼2.5㎝이다. 1988년 8월 26일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전 56번지의 명활산성 성벽 터에서 농부 김규식(金奎植) 씨가 발견했으며,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김규식 씨(당시 59세, 경주시 보문동 432)가 1988년 8월 26일 명활산성 내 포도밭에서 발견하였다. 비문은 ① 작성 간지가 있는 서두, ② 축조 공사 총책임자의 이름, ③ 축성 공사 실무자의 인명 및 담당 거리, ④ 공사 담당 위치, ⑤ 작성 참가자의 수, ⑥ 공사 기간, ⑦ 글쓴이의 이름 등의 순으로 기재되어 있다. 비문을 쓴 사람은 □□□아척이다. 축성시 비석을 세우는 것은 책임 한계를 명백히 하고 축성에 참가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신라 영역에서 이러한 작성비는 591년의 「남산신성비」가 여러 개 발견되었으나 명활산성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이 비가 발견됨으로써 신라 중고기의 역역(力役) 동원 체제를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즉, 이 비석과 성격이 같은「남산신성비」에는 1개 비석에 1개 집단만 기록되어 있는데, 「명활산성작성비」에는 1개 집단이 3개의 소분단(小分團)으로 편제되어 있다. 비석에는 축성에 소요된 공사 기간이 35일로 기록되어 있어, 1개의 성곽을 축조하는 데 종래의 견해처럼 수개월이 걸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공사는 11월 15일에 시작하여 12월 20일에 완료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축성의 난이도를 감안해 볼 때, 이 기간을 명활산성 전체를 완성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높이 10보(步), 길이 14보 3척(尺) 3촌(寸)의 거리를 35일 만에 완성했다는 한정된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비에는 그때까지 알려져 있지 않던 ‘상인나두(上人邏頭)’, ‘장인(匠人)’, ‘서사인(書寫人)’ 등의 직명이 보이며, 특히 ‘군중상인(君中上人)’이라는 글자가 있어, 「남산신성비」 제2석에서 지금까지 판독하지 못했던 ‘군중□□(郡中□□)’을 완독할 수 있게 되었다. 상인나두에서 나두는 성·촌을 단위로 파견된 지방관으로, 상인은 ‘윗사람’이라는 의미로 여겨진다. 또, 장인은 지방민으로 축성을 담당하는 기술자, 서사인은 문자 해독능력을 바탕으로 문서를 담당하는 기술자, 군중상인은 다수의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의 윗사람 즉 촌주(村主)로 추정된다. 「명활산성작성비」와 「남산신성비」의 비교를 통해 551년에서 591년에 걸치는 40년 동안 신라의 촌락지배가 강화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신라가 촌락지배를 실현해 가는 수단으로 창출해 낸 것이 외위(外位)라는 지방민만을 대상으로 하는 관등체계였다. 외위는 복속세력의 질서를 신라적으로 전화하여 일원적인 촌락지배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6세기를 통하여 적절히 이용되었다. 「명활산성작성비」와 「남산신성비」는 외위 11등 체계가 거의 완성된 이후의 것인 점에서는 같지만 둘을 비교하면 재지세력의 외위 소지 양상은 다르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명활산성작성비」에 보이는 군중상인은 촌주이면서도 관등은 7등인 하간지(下干支)에 머물러 있다. 반면 591년의「남산신성비」에서 촌주는 5등인 찬간(撰干)이다. 또「명활산성작성비」에서는 2명의 하간지가 보이는 반면 「남산신성비」에서는 적어도 4명의 간군(干群) 소지자가 보인다. 이렇게 「명활산성작성비」에서는 간군이 소수인 점, 그 등급이 낮은 점, 그리고 관등 소지자의 수가 비교적 적은 점 등에서 보아 6세기 전반의 성격을 많이 지닌 반면, 「남산신성비」에서는 그와는 양상이 상당히 다르다. 「명활산성작성비」에서 외위체계가 지방 촌락지배에 이용된 초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면 「남산신성비」는 신라의 촌락지배가 급속히 강화되어 그 절정에 달한 시기의 모습을 보여준다. 3. 비담의 반란 진압한 김유신 장군 삼국사기 제41권 열전 제1(三國史記 卷第四十一 列傳 第一) 김유신 상(上)에 보면 ‘선덕왕 16년, 진덕왕 원년(서기 647년) 비담과 염종이 병사를 일으키다.’에서 비담의 반란을 심리전을 통해 진압한 내용이 나온다. 비담은 645년(선덕여왕 14)에 귀족회의의 의장인 상대등에 올라 귀족 세력을 대표하던 인물이다. 16년 정미(서기 647)는 선덕왕 말년이요, 진덕왕(眞德王) 원년이다. 대신(大臣)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이 ‘여왕이 정치를 잘하지 못한다.’하여 병사를 일으켜 폐위하려 하였다. 선덕왕은 안에서 이를 막아내었다. 비담 등은 명활성(明活城)에 주둔하고 왕의 군대는 월성(月城)에 군영을 두어 공방을 열흘간 하였으나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 한밤중에 월성에 별이 떨어지자 비담 등은 사졸들에게 말하였다. “별이 떨어진 곳에는 꼭 피를 흘리는 일이 있다고 들었다. 이것은 반드시 여왕이 패전할 징조이다.” 병졸들의 함성이 땅을 뒤흔들었다. 대왕이 이 말을 듣고 두려워 어쩔 줄을 몰랐다. 유신이 왕을 뵙고 말했다. “길하고 흉한 것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람이 하기에 달렸습니다. 그러므로 붉은 새가 모여 들었지만 주(紂)가 망하였고, 기린을 얻었어도 노(魯)나라가 쇠퇴했으며, 꿩의 울음으로 인해 고종(高宗)이 흥기했고, 용의 싸움으로 인하여 정공(鄭公)이 창성해졌습니다. 이로써 덕은 요사한 것을 이긴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별의 변괴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왕께서는 근심하지 마소서.” 그리고는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씨를 넣어 연에 실어 날렸다. 이는 마치 별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았다. 다음날 사람을 시켜 ‘어젯밤에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고 길거리에 말을 퍼뜨려 적군들이 의심하게 하였다. 또 백마를 잡아 별이 떨어진 곳에 제사를 지내며 다음과 같이 기원하였다. “천도(天道)에는 양(陽)이 굳세고 음(陰)이 부드러우며, 인도(人道)에는 임금이 높고 신하가 낮습니다. 만약에 이것이 바뀌는 경우에는 큰 난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 비담 등이 신하로서 임금을 도모하고, 아래에서 위를 범하려 합니다. 이는 이른바 난신적자(亂臣賊子)로서 사람과 신령이 모두 미워하는 바요,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못할 일입니다. 지금 하늘이 이 일에 무심하시어 도리어 왕성에 별의 변괴를 보인 것이라면, 신은 의혹됨이 있어 깨우치지 못하겠습니다. 오직 하늘의 위엄으로 백성들의 바람을 좇아 선(善)을 선하게 여기고 악(惡)을 미워하시어 신령의 부끄러움이 없게 하소서.” 그리고 모든 장졸들을 독려하여 그들을 들이쳤다. 비담 등이 패하여 달아나므로, 쫓아가 목을 베고 구족(九族)을 멸하였다. 이에 연좌되어 살해된 자가 30명이었다. 명활성의 초축연대는 알려진 바 없으나, 405년의 기록을 통해 그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마지막 기록은 647년 비담(毗曇), 염종 등이 반란의 근거지로 삼았다는 내용으로, 이후 기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로 인해 비담 난을 진압한 직후에 폐기시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주시는 지난 2007년 종합정비 기본계획을 수립한 이후 2013년에서 2014년 토지매입과 북문지 주변 성벽 정밀발굴조사를 마쳤다. 명활성의 북문지와 일부 성벽 구간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존속 시기를 추정해 볼 수 있게 되었다. 북문지에서는 철기류와 기와편, 토기편 등이 출토되었는데, 철기류 가운데 확쇠는 경주 지역에서는 처음 확인된 것으로 6세기 중반~후반으로 편년된다. 기와편은 단판선문타날(單板線紋打捺) 또는 무문(無紋) 등으로 7세기 전반으로 편년된다. 공반된 단각고배와 반원문 인화문토기 등은 7세기 전반으로 파악되고 있다. 김유신 장군의 탁월한 전략 전술을 통해 비담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별이 떨어진 장소에서 연에 불을 붙여 하늘로 다시 올려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킨 것은 치밀한 심리전의 일환이었다. 김유신 장군의 할아버지인 김무력 장군은 패색이 짙은 관산성 전투에서 구원병으로 출동하여 백제 성왕이 전선 사령관인 아들인 왕자 부여창을 위로하기 위하여 온다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였다. 길목에 군사를 매복시켜 밤에 기습공격을 하여 성왕을 사로잡아 참수하였다. 백제는 이때부터 국력이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신라는 국력이 강대해졌다. 백년 후 손자인 김유신 장군이 삼국을 통일하였다. 할아버지는 정보전에서 개가를 올렸고, 손자인 김유신 장군은 심리전을 펼쳐 반란군을 진압하여 신라 왕실을 보호하였다. 김무력 장군, 손자인 김유신 장군은 지략이 출중한 장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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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화요칼럼,김유신 장군 집 우물 재매정과 금입택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김유신 장군 집 우물 삼국사기 제41권 열전 제1(三國史記 卷第四十一 列傳 第一) 김유신 상(金庾信 上), ‘선덕왕 13~14년(서기 644~645년) : 김유신 백제에 크게 이기다.’에 김유신 장군의 집 우물 이야기가 나온다. 1976년 사적(제246호)으로 지정되었으며, 지정면적은 5,481㎡이다. 신라의 명장 김유신(金庾信)의 옛 집터로 현재 위치는 경주 흥륜사(興輪寺)터와 월성(月城)터의 중간에 있다. 1.5m 가량의 사각형 우물로 우물가에는 비각이 있는데, 이는 1872년에 세운 것이다. 재매정은 깊이가 5.7m, 가장 넓은 부분의 너비가 1.8m이고 바닥 지름이 1.2m로 벽돌같이 다듬은 돌로 만들었다. 우물 옆 비각에는 조선 고종 9년(1872년)에 경주부윤 이만운(李晩運)이 김유신의 거처임을 알리기 위하여 세운 김유신 유허비(金庾信 遺墟碑)가 있다. 삼국사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신은 압량주(押梁州) 군주로 있다가 선덕왕 13년(서기 644)에 소판(蘇判)이 되었다. 가을 9월에 왕이 상장군으로 임명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성열성(省熱城), 동화성(同火城) 등 일곱 개의 성을 치게 하니, 유신이 크게 이겼다. 이로 인하여 가혜(加兮)의 나루를 개설하였다. 을사년(서기 645) 정월에 돌아와 미처 왕을 뵈옵지도 못하였을 때, 봉인(封人, 국경을 지키는 관리)이 백제의 대군사가 매리포성(買利浦城, 경남 거창)을 공격한다는 급보를 전하였다. 왕은 다시 유신을 상주장군(上州將軍)으로 삼아 이를 막게 하였다. 유신은 왕명을 듣자 즉시 말을 몰았다. 처자도 만나지 않고 백제군을 맞받아쳐서 쫓아버리고 2천 명의 머리를 베었다. 3월에 돌아와 왕궁에 복명하고 아직 집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또 백제군이 국경선에 주둔하여 크게 군사를 내어 우리를 침략할 것 같다는 급보가 있었다. 왕은 다시 유신에게 말하였다. “공은 수고를 마다하지 말고 빨리 가서 적들이 오기 전에 방비하길 바라오.” 유신은 또다시 집에 들르지 못하고 군사를 조련하고 병기를 수선하여 서쪽으로 떠났다. 이때에 그 집안 사람들이 다 문 밖에 나와 기다렸는데, 유신은 돌아보지도 않고 지나쳤다. 오십 보쯤 지나 말을 세우고 집의 장(漿)물을 가져오라 하여 마시고는 말하였다. “우리 집의 물맛이 예전 그대로다.” 이에 군사들이 모두 “대장군도 이러한데 우리가 어찌 가족과 이별하는 것을 한스러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국경선에 이르니 백제인들이 우리의 진영을 보고 감히 다가오지 못하고 이내 물러갔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벼슬과 상을 더해 주었다. 2. 김유신 장군 집 재매정택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三國遺事 卷第一 紀異 第一) 진한(辰韓) 조에 금입택(金入宅) 내용이 나온다. 금입택(金入宅)은 금을 입힌 집 또는 금이 들어가는 집이라는 ‘쇠드리댁’ 또는 ‘금드리댁’을 직역한 말이다. 금입택은 신라 왕경(王京)에 거주하던 진골귀족(眞骨貴族)들의 호화스런 생활을 짐작하게 해준다. 김유신 장군의 집도 금입택이며, 재매정택으로 나온다. 금입택은 신라 말기에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고, 이미 중대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금입택 중에는 삼국통일의 원훈인 김유신(金庾信)의 종가로 짐작되는 재매정택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금입택은 신라 통일 후, 지방에 광대한 전장(田莊)을 소유하고 많은 노비와 사병(私兵)을 거느렸던 귀족들의 막대한 재력과 호사스러운 생활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귀족들은 화려한 주택을 지어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였는데, 이는 귀족들이 골품제(骨品制)의 원리에 따라 상대등(上大等) · 시중(侍中) · 병부령(兵部令) · 장군직을 독점하고, 국가로부터 식읍(食邑) 혹은 녹읍(祿邑)을 받으며, 또한 통일 전쟁의 군공에 따라 막대한 포상과 전리품을 분배받음으로써 이룩한 경제적 기반 위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다음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내용이다. 신라가 전성기일 때는, 수도에 178,936호(戶), 1,360방(坊), 55리(里), 39 금입택(金入宅)[부유한 큰 집이다.]이 있었다. 금입택은 남택(南宅), 북택(北宅), 우비소택(亐比所宅), 본피택(本彼宅), 양택(梁宅), 지상택(池上宅)[본래는 피부(彼部)이다.], 재매정택(財買井宅)[김유신(金庾信) 공(公)의 조종(祖宗)], 북유택(北維宅), 남유택(南維宅)[반향사(反香寺)의 하방(下坊)]. 대택(隊宅), 빈지택(賓支宅)[반향사의 북쪽], 장사택(長沙宅), 상앵택(上櫻宅), 하앵택(下櫻宅), 수망택(水望宅), 천택(泉宅), 양상택(楊上宅)[양부(梁部)의 남쪽], 한기택(漢岐宅)[법류사(法流寺) 남쪽], 비혈택(鼻穴宅)[위와 같다.], 판적택(板積宅)[분황사(芬皇寺)의 상방(上坊)]. 별교택(別敎宅)[내의 북쪽], 아남택(衙南宅), 김양종택(金楊宗宅)[양관사(梁官寺) 남쪽], 곡수택(曲水宅)[내의 북쪽], 유야택(柳也宅), 사하택(寺下宅), 사량택(沙梁宅), 정상택(井上宅), 이남택(里南宅)[우소택(于所宅)], 사내곡택(思內曲宅), 지택(池宅). 사상택(寺上宅)[대숙택(大宿宅)], 임상택(林上宅)[청룡(靑龍)의 절 동쪽에 연못이 있다.], 교남택(橋南宅), 항질택(巷叱宅)[본래는 피부(彼部)이다.], 누상택(樓上宅), 이상택(里上宅), 명남택(椧南宅)ㆍ정하택(井下宅) 등이다. 3. 김유신 장군 집터와 재매정택 발굴조사 재매정과 그 주변은 신라 삼국통일의 영웅 김유신의 옛집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일대의 정비와 활용 및 복원방안 마련을 위한 기초자료를 확보하기 위하여 1991년부터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결과 청동기시대 주거지 3동, 신라시대~고려시대 건물지 61개소, 재매정을 포함한 우물 19개소, 도로, 배수로 등을 확인하였다. Ⅰ구역에서 조사된 회랑식건물지로 보아 구역 내에 신라시대 최상류 계층의 가옥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며 특히 Ⅰ구역 1호 우물은 지금까지 왕경 도시유적에서 확인된 우물 중 가장 빠른 시기의 것으로 판단된다. II 구역에서는 도로와 배수로, 담장 등에 의해 구획된 신라왕경 도시유적이 존재하였음을 확인하였다. Ⅰ구역 2호 우물에서는 말머리뼈 4개체가 확인되어 의례행위가 있었던 것을 추측할 수 있다. Ⅰ구역은 11구역과 달리 하나의 대규모 단위가옥 영역임을 확인하였는데 가옥의 동서 길이는 110m, 남북 길이는 80m로 그 면적이 약 9,000㎡에 달하여 왕경유적에서 확인된 단위 가옥의 택지로는 가장 큰 규모이다. 하천과 접한 남쪽 부지는 휴식이나 풍류를 즐기는 공간으로 활용하였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러한 공간구성은 궁궐이나 사원과는 다른 것이어서 귀족계층의 저택, 즉 재매정택일 가능성이 있다. 1991년~1993년(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13년~2014년(신라문화유산연구원)에 걸쳐 5차 발굴조사를 하였다. 출토유물로는 토기류, 연화문수막새, 토우, 반월형 석도, 자기류 등이 있다. 이 중 신라인물상 토우는 신라 복식을 복원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김유신(595~673) 장군의 생가터로 알려진 경북 경주시 교동 재매정지(財買井址, 사적 제246호)에서 통일신라시대 당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비늘갑옷이 출토됐다고 경주시가 2017년 1월 12일 밝혔다. 현재까지 국내에서 출토된 갑옷은 삼국시대 사용한 것이 대부분이다. 통일신라 시기 갑옷은 경주 동궁과 월지에서 출토된 청동갑옷 조각을 제외하면 실물자료로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비늘갑옷(札甲)은 일정한 크기의 철판을 물고기 비늘처럼 잘라 가죽 끈으로 묶어 만든 갑옷이다. 비늘갑옷은 경주시와 (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이 재매정지 유적을 발굴조사하던 중 토기와 기와, 다른 금속유물 등과 함께 발견됐다. 길이 5~10㎝, 너비 2~3㎝ 안팎의 철판 700여 장으로 이뤄진 몸통 부위다. 투구와 목가리개 등 부속품은 발견되지 않았다. 제작 시기는 7~10세기 사이로 추정된다고 한다. 4. 황금의 나라 신라 5세기에서 6세기 전반 조성된 경주 대릉원 일대의 대형 고분에서는 금관과 함께 온갖 종류의 황금유물이 발굴되었다. 주검이 안치된 널 속, 부장품 상자 안팎에도 금빛 유물들이 쌓여 있었다. 관모와 관모장식(관식), 귀걸이, 목걸이, 반지, 팔찌, 허리띠, 금동신발, 그릇, 무기인 칼, 말 안장, 등자(발걸이) 같은 말갖춤 장식물 등도 금 장식이 많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비교해도 금 유물이 엄청난 양이다. 세계적으로도 찬란한 신라 금관은 유례가 드물다. 신라의 황금문화 절정기는 5세기~6세기 전반의 150여 년으로 이 시기 지배층 무덤들에서 금제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천마총, 금관총 같은 무덤의 주인공은 금관부터 귀걸이, 허리띠, 금동신발 등 온몸을 금빛 유물로 치장했다. ‘신라는 황금의 나라’라는 인식은 국제적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중세 아랍의 지리학자이자 여행가인 알 이드리시(1099~1166)는 『천애갈망자의 산책』에서 “신라에서는 황금이 너무 흔해서 심지어 개의 사슬이나 원숭이의 목테까지도 황금으로 만든다.”고 하였다. 아랍의 사학자인 알 마크디시(946?~1000?) 『창세와 역사서』에서 “신라인들은 집을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한다. 밥을 먹을 때도 황금그릇을 사용한다.”(고 하였다. 금입택은 신라 말기에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고, 이미 중대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금입택 중에는 삼국통일의 원훈인 김유신(金庾信)의 종가로 짐작되는 재매정택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금입택은 신라 통일 후, 지방에 광대한 전장(田莊)을 소유하고 많은 노비와 사병(私兵)을 거느렸던 귀족들의 막대한 재력과 호사스러운 생활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귀족들은 화려한 주택을 지어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였는데, 이는 귀족들이 골품제(骨品制)의 원리에 따라 상대등(上大等), 시중(侍中), 병부령(兵部令), 장군직을 독점하고, 국가로부터 식읍(食邑) 혹은 녹읍(祿邑)을 받으며, 또한 통일 전쟁의 군공에 따라 막대한 포상과 전리품을 분배받음으로써 이룩한 경제적 기반 위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삼국사기 제33권 잡지 제2(三國史記 卷第三十三 雜志 第二)에 보면 흥덕왕(826년 ~ 836년)은 사치를 금지하였다. 기용(器用, 기물)에서 신분에 따라 금의 사용을 금지했다. 진골은 금·은과 도금한 것의 사용을 금한다. 6두 및 5두품은 금·은과 도금(鍍金), 도은(鍍銀)의 사용을 금한다. 또한 호피와 모직 보료와 모포를 사용하지 않는다. 거기(車騎, 수레)에서 진골은 수레 재목으로 자단(紫檀)과 침향(沈香)을 쓰지 않고, 대모(玳瑁, 거북이 등딱지)를 붙이지 못한다. 또한 감히 금·은·옥으로 장식하지도 못한다. 소 굴레와 멍에끈은 거친 견포(絹布)를 사용하며, 고리에는 금·은·황동의 사용을 금한다. 말방울도 금·은·황동의 사용을 금한다. 또한 6두품이나 일반 백성에게도 사치를 못하게 금지하였다. 옥사(屋舍 : 집, 가옥)에서 진골은 방의 길이와 폭이 24자를 넘지 못한다. 당와(唐瓦, 중국 기와)를 덮지 못하며, 비첨(飛簷, 네 귀가 번쩍 들린 높은 처마)를 달지 못하며, 조각한 현어(懸魚, 물고기 모양 장식)를 달지 못하며, 금ㆍ은ㆍ황동과 오채(五彩)색으로 장식하지 못한다. 나머지 6두품, 5두품, 4두품, 일반 백성에게도 집에 관한 사치를 금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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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김유신 장군 무예 수련장인 중악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김유신 장군 무예 수련 터 단석산 단석산은 경주시에서 서남쪽을 바라볼 때 군소 산들을 넘어 검푸르게 멀리 바라보이는 산이다. 높이 827m로 경주 주변의 산중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단석산 남쪽은 넓은 대지가 펼쳐져 있고 그 한가운데에 큰 자연호수가 있어 화랑들이 말을 기르고 조련하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유신 장군의 무예 수련장으로 유명하다. 단석산은 신라시대 화랑들의 수련 장소로 이용되었던 산이다. 산 이름인 ‘단석산(斷石山)’은 바위를 잘랐다는 뜻으로, 김유신이 화랑이던 17세 때 이 산의 어느 동굴에서 수련하던 중 깨달음을 얻어 바위를 칼로 내리쳐 쪼갰다는 이야기가 삼국사기, 동국여지승람, 동경잡기 등에 기록되어 있다. 김유신이 쪼갰다는 바위는 지금도 정상에 있다. 경주국립공원 단석산 공원지킴터의 직원에게 김유신 장군이 칼로 자른 단석에 관해 물어보니 정상에 있는 잘린 바위가 아니고 정상을 넘어 천주암 방향으로 가면 송곳바위가 있는데, 그곳이 김유신 장군이 무예 수련을 하며 바위를 칼로 자른 곳이라고 알려주었다. 힘들게 송곳바위까지 가서 현장을 보니 반대쪽은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매우 위험하였다. 바위도 칼로 자른 것처럼 보였다. 무예 연마를 하며 담력을 키우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단석산은 경주에서 가장 높은 산이지만 말 그대로 노천 박물관 소리를 듣는 남산이나, 불국사와 석굴암이 있는 토함산에 비해서 인지도가 낮고 등산객도 약간 적은 편이다. 하지만 단석산에도 국보 제199호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등 전국의 흔한 산에서는 보기 힘든 문화재가 곳곳에 있다. 산 일대가 경주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전국의 산에서 비법정 탐방로가 매우 많은 산으로 알려져 있다. 박방룡 신라문화유산연구원장은 “지금 우리가 호칭하고 있는 ‘단석산’은 신라시대 ‘월생산’ ‘달내(래)산‘이었다”고 주장한다. “‘월생산(달내산)’이라는 이름은 조선 후기까지 존재했던 달내창(달천창)이라는 창고이름으로 남아 있었으며, 지금까지도 건천읍 서면 선동리 마을회관과 휴게 정자 건물 이름으로 남아있다”고 하였다. 단석산 쉰길바위는 아마 높이가 쉰길이나 된다고 하여 붙인 이름으로 보인다. 쉰길바위에도 칼로 자른듯한 단석이 있다. 쉰길바위는 높은 바위 벼랑으로 위험하지만 내려다 보는 전망은 매우 좋다. 거대한 바위 두 개가 서로 맞닿아 있으며, 그 사이는 매우 협소하였다. 신선사에서 쉰길바위를 거쳐 단석산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다. 등산로에는 진달래꽃 군락지가 있어 아름답다. 2. 김유신 장군의 무술 수련 삼국사기 제41권 열전 제1(三國史記 卷第四十一 列傳 第一)에 김유신 장군의 무술 연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중악은 단석산으로 추정되지만 김유신 장군의 탄생지인 충북 진천군에도 무술을 연마한 동굴이 있다. 또한 경북 영천군에도 지역에서 중악이라고 주장하는 곳이 있다. 김유신 장군이 경주에서 화랑도로 활동하였으므로 단석산이 중악으로 유력하다. 김유신 공은 15세 때 화랑이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기꺼이 따르며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다. 진평왕 건복 28년(서기 611) 신미, 공의 나이 17세였을 때, 고구려(高句麗)ㆍ백제(百濟)ㆍ말갈(靺鞨)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외적을 평정하려는 뜻을 품었다. 그리하여 혼자 중악(中嶽)의 석굴에 들어가서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였다. “적국이 무도하여 승냥이와 호랑이가 되어 우리의 영역을 침략하니 거의 편안할 해가 없습니다. 저는 일개 미약한 신하로서 재주와 힘을 헤아려보지 않고 나라의 환란을 없애기로 뜻을 세웠습니다. 하늘은 굽어 살피시어 저에게 힘을 빌려 주시옵소서.” 4일이 지나자, 홀연히 거친 베옷을 입은 한 노인이 와서 물었다. “여기는 독충과 맹수가 많아서 무서운 곳인데 귀한 소년이 여기에 와서 혼자 거처하다니, 도대체 무슨 일인가?” “어르신께서는 어디서 오셨으며, 존함을 들을 수 있을런지요?” “나는 일정한 거처가 없이 인연 따라 가고 머무나니, 이름은 ‘난승(難勝)’이라 하노라.” 공은 이 말을 듣고는 노인이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알아채고, 곧바로 두 번 절하고 다가가서 말하였다. “저는 신라 사람입니다. 나라의 원수를 보니 마음이 아프고 머리가 어지러웠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와서 누구라도 만나기를 바랐을 뿐입니다. 엎드려 비옵건대, 어르신께서는 저의 정성을 불쌍히 여기시어 방술(方術 : 신선도에서 방사가 행하는 갖가지 술법)을 가르쳐 주시옵소서.” 하지만 노인은 묵묵히 말이 없었다. 공이 눈물을 흘리면서 예닐곱 번이나 쉬지 않고 간청하니, 노인은 그제야 말하였다. “그대가 어린 나이에도 삼국을 병합하려는 뜻을 품고 있으니 장하지 아니한가!” 그리고는 곧바로 비법을 주면서 말하였다. “조심해서 함부로 전하지 말라! 만약 이를 불의한 일에 쓴다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이다.” 노인은 말을 마치자 작별하고 2리쯤 갔는데, 유신이 뒤쫓아가 바라보았지만 노인의 흔적은 없고 다만 산 위에 오색찬란한 빛이 서려 있을 뿐이었다. 3.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단석산 중턱에 이르면 거대한 암벽이 ㄷ자 모양으로 높이 솟아 하나의 석실(石室)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에 인공적으로 지붕을 덮어서 석굴 법당을 만들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바위면에는 10구의 불상과 보살상이 새겨져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동북쪽의 독립된 바위 면에는 도드라지게 새긴 높이 8.2m의 여래입상이 1구 서 있다. 둥근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며, 머리 위로 2단으로 된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작게 솟아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에는 U자형 주름이 선명하고, 트인 가슴 사이로는 띠 매듭이 보인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은 내려 손끝이 아래로 향하여 손바닥이 보이게 하고 있다. 동쪽면에는 높이 6m의 보살상이 새겨져 있는데, 상반신에는 옷을 걸치지 않았으며, 왼손은 들어서 가슴에 대었고 오른손은 몸 앞에서 보병(寶甁)을 쥐고 있다. 마멸이 심해서 분명하지는 않지만 남쪽면에도 광배(光背)가 없는 보살상 1구를 새겨서 앞의 두 불상과 함께 삼존상을 이루고 있다. 이 보살상의 동쪽면에는 400여 자의 글이 새겨져 있는데, ‘신선사(神仙寺)에 미륵석상 1구와 삼장보살 2구를 조각하였다’라는 내용이다. 북쪽 바위면에는 모두 7구의 불상과 보살상, 인물상이 얕게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왼쪽에서부터 여래입상, 보관이 생략된 보살입상, 여래입상, 반가사유상을 나란히 배치하였다. 반가사유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왼손을 동쪽으로 가리키고 있어 본존불로 인도하는 독특한 자세를 보여준다. 아래쪽에는 버선같은 모자를 쓰고 공양을 올리는 모습을 한 공양상 2구와 스님 한분이 새겨졌는데, 신라인의 모습을 추정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7세기 전반기의 불상 양식을 보여주는 이 마애불상군은 우리나라 석굴사원의 시원(始原) 형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클 뿐만 아니라, 당시 신앙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2022년 6월 30일 경주 The-K호텔에서 열린 ‘2022경북문화포럼’에서 서남영 덕성여대 교수는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의 해석과 의미’란 주제발표를 통해 “단석산에 위치한 마애불상군은 여래상 1구나 혹은 삼존불과 같이 단순한 구성으로 제작된 것이 아니라 10구가 연속적으로 배치돼 불상의 구성이 다수라는 점, 조상기에서 확인되는 주존의 존명이 미륵이라는 점, 그리고 수도인 경주 일대에서 제작됐다는 점 등에서 우리나라 마애불상의 계보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불교 조각사에서도 중요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서 교수는 “단석산 마애불상군은 미륵대불을 비롯한 삼존구성과 그 외 반가사유상과 공양자 상에서 확인되는 양식적인 특징을 삼국의 불상들과 비교해보면 제작 시기는 7세기 전후로 추정된다”고 추정하였다. “마애불상군이 위치해 있는 단석산과 신선사가 김유신을 비롯한 신라 화랑과 깊은 관련성이 있다는 점에서 삼국통일을 염원하고 이 땅에 미륵정토를 구현하려고 했던 신라의 기념비적 유적이라 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단석산은 경주국립공원에 속해 있어 등산로 입구에 공원지킴터가 있다. 이곳에 승용차 몇 대를 댈 수 있는 주차장이 있어 주차하고 걸어 올라가면 된다, 신선사까지 가는 임도가 있지만 길이 커브가 심하고 가파르며, 중간에서 차를 만나면 교행하기가 매우 위험한 구간이 대부분이다. 건천 쪽에서 오르는 등산로도 많이 이용하고 있다. 신선사에서 단석산 정상까지는 1.1km이다. 공원지킴터 가기 전에 있는 마을은 봄이면 꽃대궐을 이뤄 매우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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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흥무왕 김유신 장군 길상사와 도당산성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흥무왕 김유신 사당 길상사 길상사는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문진로 1411-38에 있으며, 충청북도 기념물 제1호이다. 이곳은 흥무대왕 김유신(595~673)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신라 때부터 사당을 세워 나라에서 봄, 가을로 향(香)과 축祝)을 내려 제사를 지냈으나, 조선 초부터는 소재관 (所在官. 진천 현감)이 제사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 불탄 후 철종 2년(1851)에 죽계사를 지어 제사를 지내다가 고종 원년(1864)에 없어졌다. 길상사는 도당산성 안에 있다. 고종 3년(1866)에 후손들이 계양묘(桂陽廟)를 지어 제사를 지내다가, 1922년 홍수로 무너지고, 1926년에는 후손 김만희의 주선으로 지금의 자리에 길상사를 다시 세웠다. 1959년에 개축하고, 1975년에 사적지 정화사업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김유신은 만노군(지금의 진천)에서 태수 서현(舒玄)의 아들로 태어났다. 15세에 화랑이 되고, 35세에 낭비성 전투에서 공을 세워 압량주 도독이 되었다. 53세에는 비담 등의 반란군을 물리치고, 60세에 김춘추를 태종무열왕이 되도록 도왔다. 왕과 함께 삼국 통일의 대업을 추진하여, 66세에 백제를, 74세에 고구려를 멸하여 통일을 완수하고 태대각간에 올랐다. 세상을 떠난 뒤에 흥무대왕으로 추봉되었다. 김유신이 이곳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군 내에는 김유신과 관련된 유적지가 많이 있다. 그의 탄생지와 태실은 사적 제414호로 지정되어 있다. 2. 길상사 사우 건립 내력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 이르더니 삼국통일의 원훈(元勳) 김유신(金庾信) 장군이 하늘의 영기(靈氣)와 이 고장 산천 정기(精氣)를 받아 진평왕(眞平王) 건복(建福) 12년 을묘(乙卯)에 만뢰산(萬賴山) 아래에서 나시어 진평왕으로 문무왕에 이르는 5대를 섬기는 동안 백제, 고구려를 통합하고 나라를 반석 위에 놓았더니 문무왕 계유(癸酉) 7월 1일 79세로 훙거하시매 나라의 예(禮)로 경주 금산원(金山原)에 장례모시고 흥덕왕대에 흥무대왕이라 추봉하였다. 이렇듯 거룩하시매 일찍이 태생지에 김서발사우(金發翰祠宇)를 세워 나라에서는 춘추향사에 향축(香祝)을 내리었고 고려조 또한 이에 따르더니 조선조 태조 8년에 그 고을의 관아에 맡기어 향화 받들게 고치었으되 전후 천년에 길상사(吉祥祠)의 제향은 매양 이어오며 임진 병자(壬辰 丙子)의 병화로 한때 멈추어졌다. 그 뒤 철종(哲宗) 신해(辛亥)에 정재취(鄭在聚), 박명순(朴命淳) 등이 재건을 꾀함에 전날의 빈터는 땅이 낮고 좁아서 백곡면(栢谷面) 가죽동에 옮겨 세워 죽계사(竹溪祠)라 이르고 때에 백파(栢坡) 조성(趙珹) 선생을 같이 모시게 되었다. 고종 갑자(高宗 甲子)의 쇄신에 죽계사 또한 헐렸다. 흥무왕(興武王) 사당(祠堂)의 재건운동은 잇달아 일던 중 어느 해인지 현감(縣監)의 현몽으로 벽암리(碧岩里) 소흘산(所訖山) 아래에 서발한사당(舒發翰祠堂)을 중건하여 관복(官服)하신 공과 지소(智炤) 부인과 장자 삼광 이식(三光 伊食) 부부의 목각영상(木刻靈像)을 모신 바 있는데, 서기 1922년 임술 7월의 큰 장마에 사우가 무너졌다. 이로 인하여 4년 후 병인(丙寅)에 사림파 후손의 모금 외에 김원근(金元根)의 성금으로 도당산성(都唐山城) 안에 사우를 세워 홍무왕 만을 모시던 차 서기 1949년 기축(己丑)에 사론(士論)이 다시 일어 김만희(金萬熙) 수창(首唱 : 제일 먼저 주창)으로 백파(栢坡) 공(公)을 같이 봉안하게 되었다. 다음 해 경인(庚寅) 6.25 공산군 남침으로 사우가 상하고 재실이 불타매 서기 1954년 갑오(甲午) 정태관(鄭泰觀) 군수의 주선과 고장의 성금으로 사우를 단청하고 재실을 다시 세우며, 이어 서기 1957년 정유(丁酉) 10월 도민의 뜻을 모아 신라개국공태대각간순충장열흥무왕(新羅開國公太大角干純忠壯烈興武王) 신성비(神聖碑)를 세워 면모를 갖추었다. 이윽고 1961년 신축(辛丑)에 백파(栢坡) 공(公) 위패를 옮겨오신 일로 사림이 갈월만뢰사(葛月萬賴祠)를 창건하여 임인년(壬寅年) 봄 백파 선생을 따로 모시고 같은 해 김상사 서재(西齋)에 유집의(柳執義) 공(公)을 모신 바 있었다. 서기 1974년 갑인(甲寅) 여름 오용운(吳龍雲) 지사는 선열 사적지 정화 보존 관리의 국가방침에 따라 흥무왕 출생지 정화계획을 세워 지성으로 재원의 확보와 역사(役事)를 추진하며 도문화재위원회의 사적 지정을 기다려 2만 8천여 평의 부지를 마련하니 정경모(鄭經模)·한성동(韓成東) 군수 전후하여 협력하고 새한건축문화연구소의 본전 설계와 기타 분야는 수도종합설계공사의 설계로 전일기업주식회사에 의하여 서기 1975년 을묘(乙卯) 본전 건조로부터 기공되었다. 이에 유집의 공은 본손이 모시기로 하고 다음 해 3월에는 흥무전(興武殿)이 준공되매 1976년 병진(丙辰) 10월 삼가 장우성(張遇聖) 휘호(揮毫)로 전복(戰服) 갖추신 장군의 영정을 봉안함에 이르렀다. 이제 공이 가신지 1300여 년이로되 오히려 그 높은 정신을 본받고자 길상사를 중건함에 그 사적(事蹟)을 적어 이를 길이 뒷날에 전한다. 3. 김만희(金萬熙) 존성 모선(尊聖 慕先) 비(碑) 공(公)의 휘(諱)는 만희(萬熙)요 호(號)는 유당(柳塘), 김해인(金海人)이라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 전대리에서 출생하여 진천군에 이주한지 60여 년을 존성(尊聖)한 공적과 모선(慕先)한 사업으로 마지막 생애까지 종사하였다. 존성사업(尊聖事業) 공은 진천군 향교 장의(掌議), 명륜회교화사(明倫會教化士), 진천군 향교 직원, 진천군 유도회장(儒道含長) 등으로 봉직한 바 있고, 단기 4283년 토지개혁으로 공부자(孔夫子) 제향위토(祭享位土)가 1평도 없게 되어 공은 존성하는 성의에 항시 불안하게 생각하여 본군 군수 정태관(鄭泰觀)과 민의원 정운갑(鄭雲甲) 의원에게 건의, 위토(位土) 20여 평을 매수하여 공부자(孔夫子) 제향을 거행하였다. 대성전(大成殿)과 동서무(東西廡)가 파괴되어 비바람을 막을 수 없어 본군 군수 한태석(韓泰錫)에게 진정하여 고적 수리비를 얻고, 일반 유림의 성금을 합하여 수선하였다. 모선사업(慕先事業) 공(公)은 흥무왕김유신장군(輿武王金庾信將軍)의 후예로서 김해 숭선전 참봉을 역임한 바 있다. 단기 4260년 병인(丙寅) 본군 도당산성 내에 사우(祠宇)를 건축하여 길상사(吉祥寺)라 칭하며 수차에 걸쳐 관비(官費)를 얻어 사우, 동서묘, 기타를 증축하며 흥무왕 김유신 장군 신성비(神聖碑)를 건립하였음은 공(公)이 민의원, 도지사, 군수, 교육감, 일반 유림에게 길상사우 실태를 세밀하게 건의한 열의의 결정(結晶)이며, 또 일반 유림과 김해 김씨 문중의 협조로 위토 20여 평을 매수하여 매년 2월 8일 중정(中丁)에 제향을 거행하고 있다. 이상 공(公)의 존성모선(尊聖慕先)하신 공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삼가 돌을 세우고 행적을 쓰노라. 단기 4296년 癸卯 2월 20일 추진위원회 건립 4. 도당산성 신라는 고구려에 이어 6세기 중엽 경에 진천 지역에 진출하였으며, 신주(新州)의 군주 김무력의 아들 서현을 진천의 만노군 태수로 임명할 정도로 신라 북진(北進)의 군사적 거점지역으로서 중요하게 여긴 것으로 보인다. 진천 지역의 지배와 북진의 군사적 거점으로서 신라가 축조하고 경영한 도당산성과 두타산성, 그리고 진천 지역에 분포하는 원덕리(교성리) 고분군을 포함한 다수의 신라 고분들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진천 지역에서 신라가 축조한 것으로 알려진 산성은 도당산성(都堂山城)과 두타산성이 있다. 진천 도당산성은 진천읍 벽암리 산 36번지 일대에 위치한 신라의 석축산성으로 잣고개를 통하여 진천에서 오창, 청주로 통하는 교통로의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다. 성벽은 남북방향으로 위치한 해발 201.6m와 195.8m의 두 개의 봉우리와 여기서 동쪽으로 뻗어내린 가지능선을 따라 축조하였으며, 동쪽의 계곡은 계곡 상단을 가로질러 축조하였다. 이러한 산성은 정약용의 우리나라 산성 분류안에 따르면 ‘사모봉형(紗帽峰形)’ 산성에 속하며, 청주 부모산성, 북이면 낭비성, 북일면 구라산성, 충주 남산성 등 신라의 북진 과정에서 축조된 산성들은 모두 이러한 유형의 산성들이라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성벽의 축조기법 역시 성 안팎의 벽을 모두 축조한 내외협축(內外夾築) 기법으로 축조하여 전형적인 신라 석축성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성벽의 둘레는 성 외벽의 추정 통과선을 기준으로 하면 850m 정도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1,836척을 포백척(布帛尺)으로 환산한 둘레와 거의 일치한다. 대체로 신라는 5세기 후반 이후 북진 과정에서 새롭게 편입된 지역의 거점에 거점성을 축조하여 지배와 북진의 기지로 삼았다. 이때 축조된 거점성들은 대부분 사모봉형의 유형에 둘레가 1㎞ 내외의 규모를 가지는 경향성을 보이고 있다. 이런 점에 비추어보면 도당산성은 만노군의 치소성이자 진천 지역의 군사적 거점인 거점성의 면모를 보이고있다고 할 수 있다. 성 안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선조문(線條文)이나 승문(繩文)이 타날된 신라 기와류, 동이·호·옹·완 등의 신라 토기편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유물의 양상은 이 석축산성의 축조 및 경영주체가 신라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대략적인 축조 시점은 반원점문(半圓點文)이 시문된 토기 뚜껑편 유물이나 삼각집선문(三角集線文) 원점문(圓點文)이 시문된 토기편을 통해 볼 때, 신라가 진천 지역에 진출한 6세기 중엽 이후의 어느 시점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주목되는 부분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신라 기와 및 토기편들 외에 1~2점에 불과하지만 한성 백제의 것으로 볼 수 있는 횡선부가평행선문이 타날된 토기편과 기와편, 그리고 고구려토기 뚜껑편으로 볼 수 있는 보주형꼭지가 달린 뚜껑편이 확인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유물은 신라의 석축산성 축조 이전에 백제나 고구려가 산성과 같은 방어시설을 축조하여 사용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어 향후의 조사가 기대되는 바이다. 두타산성은 진천군 초평면과 증평군 도안면 경계의 해발 598.3m의 봉우리와 그 동남쪽의 해발 596.4m의 봉우리, 그리고 북쪽의 계곡 상단을 두른 석축산성이다. 성의 둘레는 1,200m로 삼국시대 성으로는 큰 규모에 속하며, 성 내에는 넓은 평지가 형성되어 있다. 이런 이유로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산 위가 평탄하고 오목한 곳이 있어 1,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고 우물과 샘이 있다”라고 하였다. 성내에서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기와와 토기편이 출토되었다. 삼국시대 유물에 대한 구체적인 양상을 확인할 수 없으나, 보은 삼년산성-미원 낭성산성-미원과 북일 경계의 구라산성-북이 낭비성·노고성-증평과 진천 경계의 두타산성-진천 도당산성으로 이어지는 신라 북진 루트 상의 일렬로 연결되는 산성 가운데 하나임을 통해 볼 때 고구려와의 대치 국면에서 신라 북진의 군사적 거점성으로 판단된다. 진천군 지역에는 삼국~통일신라시대와 관련하여 각종 유물, 유적을 비롯한 다양한 사료들이 산재하거나 전해지고 있다. 덕산면 산수리에는 백제요지 유적(사적 제325호)이 있으며 이월면 삼용리에는 백제토기 유적(사적 344호)이 있다. 또한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진천읍의 신정리 걸미산성, 행정리와 사석리 및 문봉리 등에 걸쳐 있는 문안산성, 진천읍 성석리와 덕산면 경계의 대모산성, 초평면 영구리의 두타산성, 문백면 옥성리의 파재산성(일명 옥성산성), 백곡면 갈월리의 갈월산성 등이 있고 신라시대의 산성으로 연곡리 만뢰산의 만뢰산성, 진천읍 벽암리의 도당산성, 진천읍 상계리의 태령산성 등이 있는데 이들 산성들은 대부분이 비지정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진천읍 상계리와 백곡면 사송리 간에 위치하고 있는 태령산(胎靈山, 421m)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흥무왕 김유신 장군 태생지의 뒷산으로 산 정상에 장군의 태를 묻었다고 하여 명명되었다고 하며 산 아래에 길상사가 있어 길상산(吉祥山)이라고도 한다. 태령산의 길상사에는 김유신사(金庾信祠)가 있는데 신라 때에는 사우를 세우고 봄, 가을로 향촉을 내렸으며 925년(태조 8)에는 고을 관현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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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김유신 장군 생가터와 태실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김유신 장군 삼국통일 스토리 연재 필자는 와이뉴스 화요칼럼을 통해 김무력 장군의 관산성 전투와 관련된 스토리를 게재한 바 있다. 금관가야 구형왕은 국력이 약해져 도저히 나라를 지탱할 수 없어 평화적으로 신라에 항복하여 백성을 살리는 길을 택하였다. 구형왕과 왕자, 귀족들은 신분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으며 신라의 진골 귀족으로 편입되었다. 김무력 장군은 금관가야의 왕자로서 신라 진흥왕의 신임을 받아 신주의 군주로 임명되어 고구려와의 최전선인 오늘날의 한강유역을 지키고 있었다. 백제 성왕의 아들인 태자 부여창(후일 위덕왕)이 군사를 이끌고 관산성 일대를 공략하였다. 신라는 관산성이 함락되고 위험해졌다. 진흥왕은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신주 군주인 김무력 장군에게 구원을 명하였다. 김무력 장군은 철기병을 이끌고 신속히 남하하여 관산성(충북 옥천) 인근인 금강 유역으로 진군하였다. 백제 성왕은 태자인 부여창이 최전선에서 싸우다가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위로차 최전선인 관산성 근처로 출동하였다. 호위병을 겨우 50여 명을 거느리고 전선 시찰에 나선 백제 성왕의 동태는 김무력 장군의 첩보활동에 포착되었다. 야간에 병사를 매복시켜 성왕이 지나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기습 공격하여 성왕을 사로잡았다. 김무력 장군은 부하 고간 도도를 시켜 성왕을 참수하였다. 승세를 몰아 김무력 장군은 부여창을 공격하여 거의 괴멸시켰다. 백제, 가야, 왜 연합군을 물리친 신라는 이때부터 승승장구하여 국력이 신장되었다. 반면 백제는 국력이 약화되어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김무력 장군은 관산성 전투의 승리로 신라의 삼국통일 기반을 닦았다. 이후 백여 년 뒤에 김무력 장군의 손자인 김유신 장군이 삼국통일을 완수하였다. 필자는 김무력 장군의 군사 이동로인 주요 산성 수십 곳을 답사하며 스토리텔링을 한 바 있다. 이번에는 김무력 장군의 아들인 김서현 장군, 손자인 김유신 장군의 삼국통일과 관련된 스토리를 연재하고자 한다. 필자는 2021년~2022년에 김유신 장군 탄생지, 주요 격전지를 이미 답사하였다. 김유신 장군은 당시 세계 대제국인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완수하였다. 그 결과 우리는 한민족으로서 정체성과 문화를 확립하게 되었다. 일부 사학계에서는 외세를 끌어들였고, 고구려의 영토를 다 회복하지 못한 반쪽짜리 통일로 폄하하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평가다. 혹자는 고구려가 통일했으면 만주까지 다 차지했을 거라는 부질없는 주장을 한다. 역사는 엄연한 현실이고 가정을 한다는 것은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 백제는 의자왕의 사치, 충신의 간언을 듣지 않고 귀양보내는 어리석은 정치 끝에 몰락하였다. 신라가 공격해왔을 때 웅진성주 예식진 장군이 의자왕을 체포하여 항복하는 바람에 백제는 멸망하였다. 고구려는 대막리지인 연개소문의 아들 삼형제의 내분으로 자멸하고 말았다. 그리고 신라만 외세를 끌어들인 건 아니다. 이미 관산성 전투는 신라, 그리고 백제, 가야, 왜 연합군의 국제전이었다. 나당연합군의 백제 공략 때 백제는 왜국에 구원을 요청하여 왜군 4만여 명이 참전하였다가 백강전투에서 패배하였다. 신라를 도와준 당나라가 신라까지 지배하려고 하였을 때 김유신 장군은 결연히 항쟁하여 세계 제국인 막강한 당나라를 물리쳤다. 2. 충북 진천군 김유신 장군 탄생지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김유신길 170-4 일원인 계양마을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룩한 흥무대왕 김유신(595~673)이 탄생하고 성장한 곳이다. 사적 제414호로 지정되었다. 장군은 이 지역에서 태어나 화랑이 되었으며, 고구려와 백제의 침입을 막아냈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었으며,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 자주성을 지키는데 공헌하였다. 김서현(金舒玄) 장군의 아들로 진평왕 17년(595년) 진천읍 상계리 계양마을에서 출생하였다. 나이 15세 되던 609년(진평왕 31년)에 화랑이 되고 낭비성 싸움에 공을 세워 압량주 군주가 되었다. 선덕여왕 때 상장군(上將軍), 무열왕 7년(660년)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당군(唐軍)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후 나당연합군의 대총관(大摠管)이 되어 고구려를 정벌(668년)하고 태대각간(太大角干)이 되었다. 신라 역사상 가장 높은 관등인 태대각간[太大角干 :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이라고도 함]을 지냈고, 흥덕왕 10년에는 홍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되었으며 고려시대까지는 국가에서 주관하여 봄과 가을로 제사를 올렸다. 탄생지 일대에는 당시 식수로 사용하였다는 연보정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다. 태실은 태어날 때 나온 태를 따로 보관한 시설을 말한다. 김유신 태실은 자연석으로 둥글게 기단을 쌓고 봉토를 마련하였으며 태령산 꼭대기를 따라 돌담을 산성처럼 쌓아 신성한 구역임을 표시하였다. 이 태실은 「삼국사기」와 역대의 지리지에 김유신의 태를 묻은 곳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지금 남아있는 태실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태실 축조의 형식을 가진 것으로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태실은 생가터에서 연보정, 화랑정을 거쳐 가파른 등산로를 올라가야 한다. 이곳은 신라의 삼국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한 흥무대왕 김유신이 태어난 곳(탄생지)이다. 김유신은 만노군(萬弩郡 : 현재 진천군)의 태수로 있던 아버지 김서현 장군이 집무를 보던 곳에서 태어났는데, 그곳에 큰 담을 쳤다 하여 ‘담안밭’이라 불리었다. 주위에는 당시 식수로 사용했다는 연보정과 김유신의 태를 묻은 태실이 있다. 3. 진천군의 지명 변천 군은 고구려(高句麗)시대에 금물노군(今勿奴郡) 일명 만노군(萬弩郡) 혹(或) 이르기를 수지(首知), 신지(新知)라 하였으며 신라(新羅) 때에는 흑양군(黑壤郡)이라 고치고 통일 신라 시대에는 황양군(黃壤郡)이라 하였다. 고려(高麗)초에 이르러 청주현에 속해 강주(降州)라 한 후 다시 진주(鎭州)라 개칭하고, 성종(成宗)때 자사(刺使)를 두었다가 목종(穆宗)에 이르러 이를 파(罷)하였으며 현종(顯宗) 때까지는 청주(淸州)에 속하였다. 고종(高宗) 때에 와서 창의현(彰義縣)이라 바꾸고 현령을 두었다가 원종 (元宗) 때에 의령(義寧)이라 하고 군사(軍事)를 두었으며 조선(朝鮮) 때 와서 상산(常山)이라 고치고 그 후 진천 감무(監務)로 바꾸었다. 조선(朝鮮) 태종(太宗) 13년(1413) 계사년(癸巳年)에 진천으로 개명, 현감을 두었다가 그 후 연산군(燕山君) 11년(1505)을 축년(乙丑年)에 일시 경기도에 이속되었다가 중종(中宗) 초에 다시 충청도에 환원, 고종(高宗) 32년(1895) 5월 26일 칙령98호로 현감을 두었던 것을 군수를 두게하였다. 4. 충북 진천군 김유신 장군의 탄생 비화 김유신 장군이 태어난 이면에는 극적인 러브 스토리가 있다. 김유신이라는 역사적 위인의 탄생에 얽힌 비화는 삼국사기에 잘 나타나 있다. 김유신 장군의 잉태 기간은 일반인의 10개월이 아니라 무려 두 배인 20개월 만에 태어났다. 신라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로 왕족은 성골과 진골로 구분되고, 성골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나중에 성골이 없어 문제가 생기자 비로소 진골도 왕위에 올랐다. 김무력 장군, 아들 김서현 장군은 금관가야에서 신라로 귀순하여 진골 귀족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같은 진골이라도 신라계 진골 귀족에 비해서 보이지 않는 차별을 받았다. 만명공주의 아버지는 진흥왕의 동생으로 성골 집안이므로 가야계 진골인 김서현 장군을 사위로 맞아들일 마음이 없었다. 사랑은 국경도 없고 신분도 초월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 라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김서현 장군과 만명공주의 사랑은 세기의 로맨스라 할만 하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성골, 진골, 6두품, 일반 백성으로 나눈 계급이 모든 사회활동을 구속하였다. 부친은 딸과 김서현 장군을 떼어놓기 위해 집안에 가두었지만 탈출하여 만노군 태수로 부임하는 김서현을 따라갔다. 숙흘종은 딸의 사랑을 나중에 결국 인정하였다. 김서현은 결혼을 인정받고, 이후 지금의 합천군인 대량주의 도독, 지금의 양산시인 양주 총관직 등 지방직을 몇 차례 역임했다. 장군이 되어, 백제와 여러 차례 싸워 예봉을 꺾는 전공을 세웠고 진평왕 대인 629년, 김용춘 및 김유신 등과 함께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한 낭비성 전투에서, 5,000여 명을 참살하고 성을 함락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김서현과 만명부인이 야합하다. 삼국사기 열전 제1 김유신 상(上). 일찍이 서현이 길에서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아들인 숙흘종(肅訖宗)의 딸 만명(萬明)을 보고, 〔사랑하는〕 마음을 품어 눈짓으로 〔그녀를〕 꾀어 중매를 거치지 않고 야합(野合)하였다. 서현이 만노군태수(萬弩郡太守)가 되어, 〔만명과〕 함께 〔임지로〕 가려 하니, 숙흘종이 비로소 딸이 서현과 야합한 것을 알았다. 〔그녀를〕 미워하여 별채[別第]에 가두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별채의 문[屋門]에 벼락이 쳐서 지키는 사람들이 놀라 어지러워했다. 만명은 뚫린 구멍으로 빠져나와, 마침내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갔다. 갈문왕(葛文王)은 왕의 친부(親父)로서 왕위에 오르지 못한 사람, 왕비(王妃)나 왕모(王母)의 부(父), 왕의 친동생이나 친척이 갈문왕에 책봉되었다고 전한다. 야합(野合)은 야합은 정식 혼례를 치르지 않고 부부가 되는 것을 말한다. 만명부인(萬明夫人, 574년 ~ ?) 혹은 만명공주(萬明公主)는 신라의 명장 김유신의 어머니이다. 신라 진흥왕의 아우 숙흘종과 만호태후 김씨 사이의 딸이며, 김서현의 아내이다. 진평왕의 포매(씨 다른 누이)이기도 하다. 김유신이 태어나다(595년). 삼국사기 열전 제1 김유신 상(上). 서현이 경진일(庚辰日) 밤에 형혹성(熒惑星)과 진성(鎭星)이 자신에게 내려오는 꿈을 꾸었다. 만명 역시 신축일(辛丑日) 밤에 꿈속에서 황금 갑옷을 입은 어린 아이가 구름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얼마 안 있어 임신하고, 20개월 만에 유신을 낳았다. 이때가 진평왕(眞平王) 건복(建福) 12년이요, 수(隋)나라 문제(文帝) 개황(開皇) 15년 을묘(乙卯; 595년, 진평왕 17)였다. 〔서현이 아이의〕 이름을 지으려 할 때에 부인에게 말하기를, “내가 경진일 밤에 길몽(吉夢)을 꾸어 이 아이를 얻었으니, 이〔경진〕로써 이름 짓는 것이 합당하다. 그러나 날이나 달 간지(干支)로서 이름 짓는 것은 예(禮)가 아니다. 지금 경(庚)자는 유(庾)자와 〔글자 모양이〕 비슷하고, 진(辰)자는 신(信)자와 음성(音聲)이 근사하다. 더구나 옛 현인(賢人)으로 유신(庾信)이라 이름 지은 이가 있었으니, 어찌 그것으로 이름 짓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이름을 유신이라 지었다 만노군(萬弩郡)은 지금〔고려〕의 진주(鎭州)이다. 처음에 유신의 태(胎)를 고산(高山)에 묻었는데, 지금〔고려〕까지도 그것을 태령산(胎靈山)이라 부르고 있다. 5. 양산 북정동 부부총의 김서현 장군과 만명 부인 양산시 북정리 고분군의 부부총을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에서 강제 발굴한 결과 금동관을 비롯한 격이 높은 부장품이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경주에서나 볼 수 있는 고위 귀족급 신라식 무덤인데다 이 고분군이 가야 양식도 약간 섞여 있어서 김서현과 만명부인의 묘가 아니냐는 설이 제기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연대가 맞지 않아 부부총의 주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한편 부부총 주인공으로 떠오르는 다른 인물도 없는 실정이다. 출토품은 도쿄박물관에 있다. 양산의 주민들 사이에서는 부부총이 김서현 장군과 만명 부인의 무덤으로 전해져 왔다. 김해 김씨 양산 문중에서는 오래전부터 부부총을 벌초해 왔다. 무속인들이 김서현 장군과 만명 부인을 신으로 모시고, 초상화를 그려서 사당에 보존하였다. 민간의 신앙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랜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부부총의 주인공으로 인정해도 좋을 듯하다. 김서현 장군은 가야계 왕족 출신이고 만명 공주 역시 신라 성골이므로 화려한 부장품이 나온 부부총의 주인공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김서현 장군과 만명부인 사이에서 장남 김유신, 차남 김흠순, 딸 보희, 문희가 태어났다. 문희는 태종무열왕의 왕비가 되었다. 차남 김흠순도 형인 김유신 장군 휘하에서 삼국통일에 기여하였다. 만명부인이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 결혼이 아름다운 결실을 맺어 삼국통일의 주인공인 김유신 장군이 태어났다. 태종무열왕과 문명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태자 법민은 문무왕이 되어 삼국통일을 완성하였다. 양주 총관을 역임했다는 인연으로 양산에서는 조선시대부터 김서현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있었고 지금도 양산시 하북면 평산마을 취산재에서 영정을 모시고 제향을 지내고 있다. 양산의 춘추공원에는 김서현 장군의 기적비가 있다. 양산시립박물관에는 김해 김씨 양산 문중에서 기증한 김서현 장군 만명 부인 초상화가 있다. 김유신 장군의 할아버지인 김무력 장군의 묘소도 통도사 경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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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2023 양산천성산철쭉제 개최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철쭉제 행사 개요 2023 양산웅상회야제의 일환으로 열리는 천성산철쭉제는 양산천성산철쭉회 주관하에 ‘자연과 꽃과 사람의 어울림’이라는 주제를 내걸고 양산시지방보조금 사업으로 천성산 철쭉군락지 일원에서 2023년 5월 7일 11시부터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주요 프로그램으로 산신제, 축하공연, 아마추어 노래자랑 등이 열렸다. 행사 후원은 (사)한국가수협회양산지회, 양산시, 양산시의회에서 하였다. 웅상회야제는 5월 20일~21일 양일간 열리지만 철쭉제는 개화시기에 맞춰 5월 7일에 개최하게 되었다. 불의의 사고에 대비하여 Heart Saver 앰뷸런스(055-388-6119)가 대기하였다. 양산천성산철쭉회의 박종규 회장 박정범 부회장, 김산봉 사무국장, 고문, 일반 회원들의 봉사활동으로 축제는 비바람 속에서도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비와 함께 강풍이 몰아쳐 우산은 별 소용이 없었고, 우비를 입어야만 비를 피할 수 있었다. 철쭉회 회원들은 비바람이 불어도 굴하지 않고 사전 준비한 편육, 오징어무침, 팥시루떡, 국밥, 막걸리, 소주 등의 음식을 내빈, 등산객에게 대접하였다.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많은 등산객들이 축제장을 지나면서 철쭉꽃, 행사 공연 등을 구경하며 기념 사진을 찍었다. 비가 와도 예정된 등산을 강행하는 등산객의 열정에 놀랐다. 철쭉제 행사장은 다양한 등산 코스의 통과 지점으로 주말에는 많은 등산객으로 북적이는 곳이다. 화엄사, 미타암에서 철쭉제 제단으로 올 수 있고, 원적봉이나 잔치바위, 원효대사 기도처인 큰바위석굴, 회야강의 발원지인 은수고개, 천성산 정상, 천성산2봉 등으로 연결되는 핵심지역이다. 그동안 코로나 팬데믹으로 개최되지 못하다가 4년만에 모처럼 축제가 개최되었는데, 비바람이 몰아치는 악천후로 행사 진행에 지장을 초래하였다. 축제의 주인공인 철쭉꽃은 비바람에 꽃잎이 대부분 떨어져 버려 안타까웠다. 그래도 3일째 내리는 비와 강풍에도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철쭉꽃이 있어 기념사진은 찍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 전통 철쭉꽃인 연한 색깔의 연달래, 분홍색이 약간 더 진한 연달래 철쭉꽃은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줘 경탄을 자아냈다. 축제 행사장인 천성산 철쭉제 제단까지 행사에 필요한 물품, 철쭉회 회원, 내빈들의 이동 편의를 위해 ‘한일유앤아이아파트’ 뒷쪽의 평산임도를 차량이 통행할 수 있도록 임시 개방하였다. 임도 입구에 자원봉사자를 배치하여 일반 등산객 차량은 통제하였다. 2. 양산천성산철쭉제 축문 산신제는 비바람이 세차게 내리쳐 병풍은 펼칠 엄두도 못 냈고, 촛불을 켤 수 없었다. 제관들이 쓴 두건이 바람에 날아가기도 하였다. 초헌관 박종규 회장은 제단에 절하고 꿇어앉아 축문을 고하였다. 미리 준비한 축문은 바람에 날려 손에 꼭 쥐고 읽어나갔다. 제사상 앞에 놓인 축문은 바람에 날아가고 말았는데, 회원이 간신히 찾아왔다. 축문은 다음과 같다. “유세차 단기 4356년 서기 2023년 계묘년 5월 7일 ‘자연과 꽃과 사람의 어울림’ 양산천성산철쭉제를 거행함에 앞서 천지신명과 산신님께 엎드려 고하나이다. 전지전능하신 천지신명과 천성산 산신님이시여! 금일 우리는 선현의 발자취가 은은히 느껴지는 이곳 정상에서 지난 한해를 감사하고 반성하며, 내일의 번영과 도약을 다짐하기 위한 일념으로 전체 회원의 정성을 모아 성스러운 제를 올리나이다. 거듭 비옵건대 계묘년 한해도 서로 화합과 사랑이 넘치게 하여 주시옵고, 무사한 산행이 되도록 엎드려 고합니다. 천지신명이시여! 이 한 잔 술을 흠향하여 주옵소서.” “단기 4356년 서기 2023년 5월 7일 양산철쭉회 회원 일동 배상” 3. 철쭉제 축하공연 및 아마추어 노래자랑 축하공연 행사 사회자는 김수진 MC가 담당하여 우중 행사에도 불구하고 재미 있고 씩씩하게 진행하였다. 박종규 회장은 행사 서두에 인사말을 하였으며, 고문인 필자도 간략하게 축사를 하였다. 행사 출연진은 한금승 가수, 최정희 가수, 하운아 가수, 홍채희 가수, 정설아 가수, 최린 가수, 정인아 가수, 김상진 가수, 김장수 바라춤, 김소정 연화무, 이양옥 외 6인 색소폰, 김장수 외 3인 양산학춤, 이남조·선미임·김소정 한국전통민요, 김인영 벨리얀의 밸리댄스 등이었다. 행사 출연진은 쏟아지는 비에도 굴하지 않고 화려한 무대 복장을 차려입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흥을 돋우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비도 계속 쏟아져 손이 시릴 정도로 추웠다. 양복을 입은 가수가 노래를 끝냈을 때 옷은 온통 흠뻑 젖고 말았다. 한복을 입고 민요를 부르는 가수, 양산학춤을 추는 춤꾼들의 한복도 공연이 끝났을 때는 모두 젖었다. 색소폰 연주자들은 우비를 입고 연주하였다. 밸리댄스를 추는 무희들은 노출이 심한 복장이어서 매우 추웠을 것이다. 공연자들의 프로의식은 대단하였다. 공연자들의 대기실은 트럭 짐칸, 승합차 내부였다. 출연자들은 차량 속에서 무대 의상을 갈아입으며 수고를 하였다. 우중 공연을 무사히 마친 출연자 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바이다. (사)한국가수협회양산지회 강민지 회장이 주관하는 철쭉노래자랑은 평산음악공원, 회야강 둔치 노래자랑에서 예심을 거쳐 최종 9명이 결선에 진출하여 5월 7일 천성산 철쭉군락지 옆의 철쭉제 무대에서 실력을 겨루었다. 우비를 입지 않고 공연을 지휘하는 강민지 회장의 복장도 온통 비에 젖었다. 철쭉제 산상 노래자랑 심사위원은 (사)한국가수협회양산지회 최린 가수분과위원장, 하운하 가수, 김갑용 위원장, 강민지 지회장이 담당하여 공정하게 심사하였다. 아마추어 가수들도 우비를 입지 않고 비를 흠뻑 맞고 노래하면서 정면 승부하는 투혼을 발휘하였다. 철쭉제 산상 노래자랑 대상 이관석, 금상 최승림, 은상 전병철, 장려상 최금자, 특별상 김미주, 입상자에 대해 대상은 가수인증서와 트로피 온누리상품권 20만 원, 금상은 가수인증서와 트로피 온누리상품권 10만 원, 은상·특별상·장려상은 5만 원, 참가상은 3만 원을 시상하였다. 4. 철쭉제 행사를 빛내준 내빈들과 향후 과제 철쭉제는 빗속에서 강행하여 아무 사고 없이 잘 진행되었다. 철쭉제 행사를 격려하기 위하여 비바람이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천성산철쭉제 무대까지 찾아온 내빈들이 많았다. 양산문화원 박인주 원장, 최미옥 부원장, 이상우 감사 등 문화원 임원들이 방문하였다. 제일 먼저 찾아온 정치인은 송은영 시의원으로 산신제 제단에 참배하며 엎드려 절을 하였다. 김석규 시의원, 김판조 시의원, 박일배 시의원, 박인 도의원, 허용복 도의원, 성용근 시의원 등도 연이어 방문하였다. 국민의힘 갑지구 박성철 사무국장은 윤영석 국회의원 대신 참석하여 철쭉제 축하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필자는 매년 천성산철쭉제에 참여하는데, 올해처럼 정치인들이 대거 찾아온 해는 처음이었다. 지난 철쭉제 행사 때는 박인 도의원이 매년 참석하는 열정을 보였다. 정치인들의 뜨거운 관심 덕분에 철쭉제 행사가 해를 거듭할수록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다. 정치인들의 깊은 관심에 감사드린다. 양산천성산철쭉제 행사가 악천후 속에서도 아무 차질 없이 진행된 것은 천성산철쭉회의 박종규 회장, 박정범 부회장, 김산봉 사무국장, 고문, 일반 회원들의 헌신적인 봉사와 열정 덕분이었다. 앞으로의 과제는 천성산 철쭉군락지 환경정화 활동을 통해 철쭉을 추가로 식재하고, 잡목을 솎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양산시의 예산지원이 있어야 하겠다. 양산시의원, 도의원들이 철쭉제 현장의 문제점을 파악하여 여러 가지 지원 시책을 강구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동안 천성산 철쭉 군락지에 약간 추가 식재를 했으나 앞으로 대규모로 식재하여 명소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특히 우리나라 고유 토종 철쭉인 연달래를 집중적으로 심어야 한다. 옥의 티인 영산홍은 철쭉 군락지에 어울리지 않으므로 제거해야 한다. 다른 지역의 진달래 군락지, 철쭉 군락지도 매년 추가 식재를 하고 있다. 중앙동행정복지센터와 주민들의 노력으로 새롭게 조성하여 명소를 만들고 산신제도 거행하는 양산의 동산 철쭉 군락지는 벤치마킹 사례가 될 수 있다. 천성산철쭉회를 구심점으로 하여 웅상지역의 덕계동, 평산동, 소주동, 서창동 행정복지센터와 주민들이 힘을 합쳐 철쭉 군락지를 가꾸어 나가야 하겠다. 철쭉 추가 식재에 필요한 연달래, 철쭉 헌수 운동에 웅상지역 사회단체, 기업인들의 동참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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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화요칼럼,통도사 구하 스님의 금강산 관상록 네 번째 이야기1. 보덕굴과 화룡담 동쪽 절벽 위에는 보덕굴(普德庵)이 있으니, 고려 성종 원년인 임오년(982)에 회정 선사(懷正 禪師)가 창건한 사찰이다. 내를 건너고 비탈길을 돌아서 암자에 올랐다. 바로 밑의 돌층계를 통하여 전각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겨우 한 사람만 통과할 수 있다.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 나아가니 백의관음 입불(白衣觀音 立佛)이 불단 위에 모셔져 있었다. 분향 배례(焚香 禮拜)하고 암자의 모양을 둘러보니, 굴 입구 좌우로 쇠줄을 두르고 암석에 못을 박아 위태로운 곳과 기울어진 곳을 붙잡아 매어 놓았다. 밑에서 큰 기둥 하나를 세워 암자 전체를 받치고 있는데, 그 기둥은 대나무 모양으로 열아홉 개의 마디가 있다. 누각에서 구부려 보면 「普德窟」 세 글자가 보이는데, 이는 구지원(具志願)이 쓴 글씨이다. 이 암자에는 매일 기도가 끊이지 않는다. 그때는 서울에 사는 여사가 와서 기도하는 중이었다. 보덕암에서 돌아 나와 진주담(眞珠潭)으로 향하였다. 그곳의 「眞珠潭」 세 글자는 윤사국(尹師國)의 필적이다. 또 시냇가로 몇 걸음 나아가니 송우암(宋尤庵)의 시가 새겨져 있었다. 맑은 시내와 흰 돌은 구별하기 어려운데 밝은 달과 맑은 바람 다시 따로 전하누나 세상 밖인 여기서도 제멋대로 노닐거늘 인간 세상 어느 곳이 시끄럽지 아니하리 길 왼편의 커다란 바위에는 길이가 72척이나 되는 「법기 보살(法起 菩薩)」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또 그 사이에 초서로 새겨 놓은 「천하기절(天下奇絶)」과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은해강 김규진(海岡 金主鎭)의 글씨이다. 화룡담(火龍潭)에 이르니 담의 북쪽 허리에 사자석(獅子石)이 있었다。동쪽으로 머리를 둔 엎드린 모양이 기이하게도 사자와 닮았는데、한 편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못된 짐승이 물과 고개를 넘어 내금강산에 들어왔을 때、사자가 훌쩍 뛰어 울부짖으니, 그 짐승이 앞 왼발을 헛디뎌 절벽에서 떨어질 위기에 처하였다. 그때 법기봉 위에서 크게 화룡담의 용을 부르는 사람의 소리가 갑자기 울려 퍼졌다. 그러자 화룡담의 용이 거인으로 변하여 남쪽 절벽의 긴 바위 하나를 취하여 받쳐 지탱함으로써 그 짐승을 구해 주었다는 것이다. 현재 남쪽 절벽에는 흠집은 없는 구멍이 뚫려 있다. 마치 칼로 베어낸 듯한데, 아래의 바위를 그 구멍에 맞추어 보면 꼭 맞는다고 한다. 또 당시 용을 부른 이는 봉 우리 위에 있는 법기 보살이었다고 한다. 2. 마하연사 화룡담 옆 길가에는 장경암(藏經巖)이 있는데, 이 바위 모습 또한 기이하다. 이 골짜기를 돌아 들어가니 돌빛이 깨끗하기 그지없었다. 계곡물은 비로봉으로부터 여러 골짜기를 흘러 이 골짜기로 모여들고 있다. 그 경치를 보고 있자니, 「일천 바위가 빼어남을 다투고 일만 봉우리가 흐름을 다툰다」는 말을 능히 실감할 수 있었다. 또 한 채의 판잣집이 보이니、바로 마하연사(摩訶衍寺)이다. 마하연사에 들어가니 주지 이화응 화상(李華應 和尙)이 반갑게 맞이하였다. 옛날 건물을 모두 헐고 새로 오십아홉 칸의 큰 전각을 세웠는데, 실로 굉장하였다。아마 사찰 한 동의 건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클 것 같았다. 마하연사의 사찰 토지에서 거두어들이는 세는 240여 석(石 : 한 석은 한 말의 열배)에 이른다. 중건 공사비 총액은 1만 2천 원, 공사 인부 총수는 1만 2천 명이었다. 경오년(1930)에 새로 거두어들인 토지수입세가 1백 7십 석(石)이었다. 현 주지 이화응 선사가 공사를 시작하면서 절 앞에 임시로 거처할 집을 지었는데, 이 집 또한 계속 사용하고 있다. 암자의 터는 약간 평평하고 중향성(衆香城)이 암자의 뒤쪽을 보호하고 있다. 맞은편 절벽 봉우리에는 자연적으로 된 불상이 서쪽 향로봉(香爐峰)을 향해 앉아 있으니, 이 불상이 바로 법기 보살(法起 菩薩)이라 한다. 신라시대에 의상 조사(義湘 祖師)가 중향성으로 들어가 법기 보살의 주처(住處)를 보고 만 이천 보살 권속들에게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널리 설하였으므로[衍說] 이 암자를「마하연(摩訶衍)」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금강산 가운데에는 성스러운 일이 두 가지 있으니, 하나는 53불(佛)이 인도에 서 온 것이요, 두 번째는 담무갈(曇無竭) 보살과 살타파륜(薩埵波崙) 보살의 일이다. 이 산이 백금(白金)으로 본체를 이루었다고 한 것은 『화엄경소(華嚴經疏)』에서, 『금강산이라 한 것은 그 산 모양이 깎아 세운 듯하고, 백금으로 본체를 이루었다』고 한 것과 관련이 있다. 도선국사(道詵國師)는 이 산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글을 지었다. 구름 위에 솟아 바다에 닿으니 황룡 형국이요 골 속의 세 곳에는 특별히 평평한 곳 있도다 평평한 한 곳은 부처님께서 계신 불국토요 복판의 두 언덕은 사람들이 사는 성(城)이라네 오늘날의 마하연 불지(佛地)는 바로 이 시 속의 평평한 한 곳이라 한다. 마하연사의 보물로서, 호봉 대교사(虎峰 大敎師)가 직접 쓴 『화엄경』은 당나라 판본과 글자의 모양이 조금도 다르지 않으며, 혈서(血書) 『법화경』 칠축(七軸 : 종이를 세는 단위. 한 축은 한지는 열 권, 두루마리는 하나)은 만허 화상(滿虛 和尙)이 써서 감추어 놓았던 것이다. 호봉 선사는 도광 27년 정미(1847) 유월에 시작하여 함풍 6년 을묘(1855) 삼월 삼일에 필사를 마쳤다. 권수는 66권이고、필사할 때 족제비가 와서 털을 주고 갔다고 한다. 스님의 법명은 응규(應奎), 법호는 호봉(虎峰), 속성은 이씨이다. 운판(雲板)은 강희 56년 정유(1717) 사월 사일에 만들었는데, 덕온 공주(德溫 公主) 이씨가 시주를 한 것이다. 마하연의 창건 연대는 신라 문무왕 16년 병자(676)에 의상 조사가 창건하였는데, 그때는 동남향으로 지었다. 순조 31년 신묘(1831)에 월송(月松) 선사가 남향으로 고쳐 중건하였고、소화 7년 임신(1932)에 화응(華應) 선사가 동남향으로 삼창을 하였다. 3. 의상 조사 구하 스님이 언급한 의상 조사는 흔히 의상 대사라고 한다. 부석사의 홈페이지에 의상 대사와 선묘 낭자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나온다. 의상 대사는 원효 대사와 함께 당나라 유학을 위해 요동 방면을 통해 당나라로 가려고 하였으나 고구려 병사에게 체포되어 신라로 되돌아왔다. 두 번째 유학 시도는 육로가 아닌 배편을 이용하기 위해 서해안의 당항성(현재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으로 향했다. 폭풍이 심하여 마침 길가의 토굴 속에서 하루를 머물게 되었다. 원효 대사는 목이 말라 고여 있는 물을 마셨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들은 옛 무덤의 해골 사이에 누워 있었다. 원효 대사는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먹기 나름이요. 만법이 오직 생각 탓으로 생기는 것이라, 마음 밖에 따로 법이 없는 것을 무엇 때문에 법을 따로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며 유학을 포기하였다. 의상 대사는 굳은 각오로 물러서지 않겠다고 하며 당나라로 향하는 배를 탔다. 당나라 등주(登州) 해안에 도착하여 한 불자의 집에 머물렀다. 집주인은 대사의 뛰어남을 알아보고 머무르게 하였다. 얼마 후에 고운 옷을 입고 아름답게 화장을 한 주인집 딸인 선묘(善妙)란 처녀가 사랑을 고백하였다. 그러나 마음이 돌과 같이 굳은 의상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자 도심(道心)을 일으켜 그 앞에서 대원(大願)을 발하여 말하였다. “내세에 태어나 스님께 귀명하고 대승을 배우고 익혀 대사를 성취하여 반드시 신도가 되어 돕겠다.”고 맹세하였다. 의상은 그 뒤 장안(長安)의 종남산(終南山)에 가서 지엄 삼장(智嚴 三藏) 밑에서 『화엄경』을 배웠다. 대사는 극히 미묘한 도리를 이해하고, 전체의 흐름을 알고 그 행함에 절도가 있었다. 배움에 있어 가히 삼장의 바다에 기꺼이 노닌다는 평가를 들었다. 귀국을 결정하고 등주에 있는 신도 집에 다시 들렀다. 대사는 수년에 걸친 뒷바라지에 감사를 표하였다. 인사를 마친 후 상선을 타고 신라로 귀국하게 되었다. 뒤늦게 대사의 출발을 알게 된 선묘 낭자는 대사에게 드릴 법복과 여러 가지 집기를 들고 해안가로 달려갔다. 그러나 대사가 탄 배는 이미 항구를 떠나 멀리 가고 있었다. 그녀는 기도하였다. “내 본래의 참뜻은 법사를 공양하는 데 있습니다. 원컨대 이 의복을 담은 함이 저 배에 날아 들어가기를 기원합니다.”고 하며 파도 위로 함을 던졌다. 때마침 거센 바람이 불더니 함은 새털같이 날라 배 위에 떨어졌다. 선묘는 다시 맹세하기를 “이 몸이 큰 용(龍)으로 변하여 저 배의 선체와 노를 지키는 날개가 되어 대사님이 무사히 본국에 돌아가 법을 전할 수 있게 하리라.”고 하였다. 옷을 벗어 던지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진정한 원력은 통하는 바가 있어 마침내 그녀의 몸은 용이 되어 물 밑에서 배를 안전하게 이끌어 나갔다. 의상 대사는 귀국 후 대화엄의 가르침을 펼칠 명산대천을 찾다가 현재의 부석사 자리에 이르렀다. 거기에는 이교도의 무리가 차지하고 있어 의상 대사의 수행을 방해하였다. 의상을 항상 따라다니며 지키던 선묘 용(善妙 龍)은 대사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허공에서 대변신을 일으켜 커다란 바위로 변했다. 가람의 정상을 덮고 막 떨어질 듯 말 듯 하니 많은 이교도 무리들이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마침내 대사는 절 안에 들어가 『화엄경』의 가르침을 펴기 시작하였다. 의상 대사의 설법을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국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전답과 노비를 하사하였으나 대사는 거절하고, 의복, 병(甁), 발우(鉢盂)의 세 가지 외에 아무것도 몸에 지니지 않았다. 의상 대사는 큰 바위가 공중에 떴다고 해서 절의 이름을 ‘부석사(浮石寺)’라고 지었다. 지금도 부석사 무량수전 뒤에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선묘 낭자의 화신이라고 전한다. 의상 대사를 한 인간으로 연모한 당나라 처녀 선묘의 애틋한 마음이 영원히 깃든 이름이다. 부석사에는 선묘 낭자의 스토리를 증명이라도 하듯 ‘선묘각’이 세워져 있고 선묘 낭자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4. 통도사 구하 스님, 김규진 글씨 일주문 앞 2개의 돌기둥에는 구하 스님의 글이 쓰여 있다. 구하(九河) 스님이 쓴 ‘이성동거필수화목(異姓同居必須和睦)’, ‘방포원정상요청규(方抱圓頂常要淸規)’ 글이 있다. 이성동거필수화목은 ‘각성들끼리 모여 사니 화목해야 한다.’ 방포원정상요청규는 ‘가사 입고 삭발했으니 규율을 따라야 한다.’는 뜻으로 통도사 스님들이 지켜야 할 일종의 계율이다. 현재 통도사에는 구하 스님이 언급한 해강 김규진의 글씨가 남아 있다. 통도사 일주문 주련을 해강 김규진이 썼다고 한다. 일주문 편액인 영축산통도사(靈鷲山通度寺)는 흥선 대원군의 글씨라고 한다. 일주문 기둥의 주련인 불지종가(佛之宗家), 국지대찰(國之大刹)은 김규진이 썼다. 불지종가는 절 중에서 종가집, 국지대찰은 나라에서 가장 큰 절이란 의미이다. 이 글은 통도사의 위상, 사격(寺格)을 말한다. 통도사 대웅전의 편액은 동서남북 방향에 따라 이름이 다르다. 적멸보궁(寂滅寶宮)은 구하 스님의 글씨라고 한다. 통도사 주지실 앞의 일로향각(一爐香閣) 편액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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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숲길보전회 증산 차나무군락지 답사와 차 체험활동1. 증산둘레길 야생차나무 양산숲길보전회에서 4월 23일 물금읍 증산둘레길 야생차나무 군락지를 답사하였다. 8시 30분 양산종합운동장 집결, 8시 45분 물금읍 물금중부공원 도착 후 주차, 인원점검 및 회비 만원 걷은 후 천년나무아파트 앞으로 이동, 물금남부공원 앞에서 심상도 회장의 답사 코스 설명, 간단한 준비운동 후 증산둘레길로 출발하였다. 참석자 명단, 심상도 회장, 이다겸 재무, 최춘실, 권동억, 김민주, 이해령, 이순옥 이사, 신국환, 김종수, 변종길, 양은자, 지미리, 최미애, 박순희, 신재향 시의원, 김주은, 이지안, 조연희, 조국영 도예가 겸 향토사학자 19명. 답사에 협찬한 회원을 보면 김희숙 부회장이 떡, 김광민 부회장이 5만 원 찬조, 이순옥 이사가 찐 계란, 신국환 회원 생수 두 박스, 심상도 회장 유산균 막걸리 두 병, 권동억 대표는 케익을 협찬하여 차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 조국영 도예가에게 증정하였다. 양산시 산림과에서 인위적으로 차 씨앗을 뿌려서 조성한 차나무 서식지에서 조국영 도예가겸 향토사학자와 만나 둘레길 옆 대나무 숲에 있는 차나무를 구경하면서 이동하였다. 다방동에는 신우대가 있는데, 증산에는 큰 대나무가 많이 서식하고 있어 둘레길 가까운 곳에는 그늘을 형성하여 죽로차를 자라게 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으나 깊숙이 들어갈수록 대나무가 빽빽하게 자리잡고 있어 차나무가 자랄 수 없는 환경이 되었다. 동아중삼거리에서 시루능선 오거리로 올라가는 양쪽에도 야생 차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다방동과 다른 점은 증산에는 차나무 서식지가 군데군데 흩어져 있고, 차나무 크기도 작았다. 조국영 도예가의 설명에 의하면 증산에는 두 종류의 차나무가 있다고 하였다. 오르막길 오른쪽에 있는 처음 묘지로 들어가면 차나무가 약간 보인다. 울창한 대나무 숲에 작은 차나무가 서식하고 있었다. 두 번째 묘지, 세 번째 묘지에도 차나무가 있는데, 성묘객들이 벌초 때 차나무도 베어버리는 것 같았다. 올라가면서 둘레길 주변에 있는 차나무를 구경하였다. 증산의 차나무 군락지는 산발적으로 넓은 면적에 흩어져 있고, 큰 대나무가 울창하게 자라고 있어 필자가 볼 때 환경정화 활동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다방동 차나무 군락지의 면적도 3천~4천 평 정도의 엄청난 면적이지만 비교적 집중적으로 모여 있어 차나무 칡덩굴 제거 작업이 쉬운 편이다. 필자는 2월~3월에 연속적으로 혼자 한 달 이상 매일 환경보호 활동을 하였다. 4월에도 자주 방문하여 칡덩굴을 제거하고 쌓인 낙엽을 털어내었다. 증산둘레길 답사에서 변종길 회원이 접는 낫과 전지가위를 가져와 혼자 칡덩굴과 잡목을 제거하는 환경보호 활동을 하였다. 필자는 사전에 증산둘레길 차나무 서식 환경을 파악해 두었기 때문에 이번 답사에서는 차나무 보호활동을 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래도 변종길 회원의 열의 덕분에 약간의 작업을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감사드린다. 조국영 도예가겸 향토사학자는 둘레길을 걸으면서 야생 차나무 해설을 하였으며, 증산 왜성에 관하여 성곽 위치를 설명해주었다. 시루봉 능선 방향으로 올라가면 증산왜성 안내판이 나온다. 이곳에서 정상을 향해 올라가면 왜성이 나온다. 튼튼하게 쌓은 돌이 보인다. 안내판에서 오른쪽 1시 방향으로 가면 맷돌 바위가 나온다. 맹메이바위라고도 한다. 맷돌 바위 위에 올라가면 증산마을과 남평마을이 잘 보인다. 낙동강과 부산쪽도 잘 보이는 전망좋은 곳이다. 맷돌바위에는 성형 흔적이 몇 개 있다. 여성들이 아들 낳기를 소원하며 작은 돌을 맷돌바위에 갈며 간절히 소원을 빌던 곳이다. 맷돌바위를 보고 되돌아나와 증산둘레길 귀암삼거리로 내려갔다. 귀암은 일명 귀신바위로 불린다. 이다겸 재무가 귀암을 두 팔 벌려 안고 기를 받다가 필자가 귀신바위라고 외치니 움찔하며 물러났다. 조국영 도예가가 귀 모양의 바위라서 귀암이라고 부연 설명하니 이다겸 재무는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귀암삼거리에서 증산마을, 미륵원 방향으로 내려가는 오른쪽 작은 계곡에 차나무 군락지가 있다. 조국영 도예가의 말에 의하면 동아중 삼거리에서 시루봉 방향으로 올라오는 둘레길에도 백년 넘은 차나무가 있었는데, 둘레길 개설하면서 인부들이 베어버렸다고 하였다. 미륵원으로 내려가는 둘레길을 만들면서 차나무를 많이 베어냈다고 하였다. 양산시 산림과에서는 둘레길을 새로 개설하여 야자 매트를 깔고 차나무를 보호하는 조치를 뒤늦게 취했다. 2. 조국영 도예가 증산 야생차나무 군락지는 조국영 도예가겸 향토사학자가 일찍부터 관심을 갖고 지역 언론에 기고하며 그 중요성을 널리 알려왔다. 필자와 함께 양산의 역사 유적지를 방문하며 공부도 하고, 새로운 사실 발견도 하고 있다. 도예작가로서 양산, 일본 등지에서 많은 전시회를 여는 유명 작가이다. 와이뉴스 이사로 필자와 함께 활동하고 있다. 또한 부산요포럼에서 양산 법기요, 부산요에 관한 도자기 관련 많은 논문 발표를 하고 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문헌연구를 통해 새로운 자료를 최초로 발표하는 논문을 여러 편 써왔다. 조국영 작가는 작품을 주로 차 사발 위주로 만들고 있다. 법기요, 부산요에서 나온 파편을 주워 분석하고, 재현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법기요나 부산요에서 조선의 도공들이 만든 도자기를 재현하고 더욱 발전된 제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부산요에서 출토된 도자 파편, 도자 제작 도구 등을 발견하여 연구에 활용하고 있다. 부산요 포럼을 통해 논문발표를 하고 있다. 부산시에서 부산요를 연구하고 답사도 하는 단체가 몇 개 있지만 조국영 도예가가 주도하는 부산요를 따라올 단체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조국영 도예작가는 필자와 친구로서 자주 대화하고 답사도 다닌다. 필자도 궁금한 내용이 있으면 친구에게 물어보곤 한다. 양산의 차 역사에 관한 자료도 많이 얻고, 야생 차나무 서식지 답사도 함께 하고 있다. 조국영 도예작가는 차를 직접 만드는 다인이기도 하다. 필자는 조국영 도예가가 증산에서 채취한 찻잎으로 직접 만든 녹차를 마시기도 하고, 선물 받은 것도 있다. 다방면으로 다재다능한 재주를 갖고 있다. 조국영 도예작가의 작품은 가격이 매우 높아 일본에서도 고가로 팔리고 있다. 필자는 양산숲길보전회의 정회원으로 열심히 활동하는 회원들에게 조국영 도예작가의 작품을 기증받아 기관장상 부상으로 수여한 바도 있다. 이번 기회에 귀중한 작품을 기증해준 친구에게 다시한번 감사드리는 바이다. 2. 신재향 시의원 참석 신재향 시의원이 참석하여 매우 놀랐다. 신재향 시의원은 지난 2월 26일 다방동 야생차나무 군락지 환경보호 활동에도 참석하여 열심히 칡덩굴 제거작업을 한 바 있어 감동을 안겨준 바 있었다. 신재향 시의원은 양산의 문화, 역사, 관광 등에 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으며, 배우고자 하는 열의도 대단하다. 이번 증산둘레길 답사는 지역구가 아니지만 물금읍 증산에도 야생차나무 군락지가 있다고 하여 현황 파악을 위하여 참석했다고 얘기했다. 시의원은 자신의 지역구가 우선이지만 동시에 양산시민을 대표하여 집행부를 견제하고, 전체 양산시 예산, 추경 예산을 심사해야 하므로 당연히 양산시 전체에 대해 잘 알아야 하며, 이해도가 높아야 한다. 신재향 시의원은 지난 4월 2일 원동면 가야진사에서 열린 가야진용신제에도 참석하여 필자와 반가운 인사를 나누었다. 신재향 시의원은 참석한 정치인과 어울려 덩실덩실 춤을 추며 풍물패를 격려하였다. 필자는 매년 가야진용신제에 참석해왔는데 정치인들이 풍물패와 어울리는 것은 처음 보았다. 신재향 시의원은 다방동 패총 발굴 현장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이며, 양산의 문화, 관광 분야 행사에 많이 참석하고 있었다. 4월 22일 중앙동행정복지센터에서 양산시 도시재생지원센터 주관으로 열린 천년의 역사 양주골축제, 당산제에도 참석하였다고 하였다. 필자는 오후에 축제에 가서 근대문화유산인 77공사 건물을 깨끗하게 리모델링한 원도심 아카이브 전시회 작품을 감상하였다. 주민들이 자신의 동네 주요 건물과 풍경을 그린 그림 솜씨가 매우 뛰어났다. 현장에서 최영호 도의원, 우현욱 주민자치연합회 회장과 반갑게 만나 기념사진을 찍었다. 최영호 도의원은 양산시 도시재생지원센터에서 발간한 스토리텔링 북인 "천성산을 품은 양산이야기 1"을 들고 있어 물어보니 공부할 내용이 많아 받았다고 하였다. 이 책에는 필자가 쓴 스토리와 생생한 사진이 실려있어 양산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우현욱 회장은 북안마을 천년 느티나무에 대해 필자에게 물어 보았는데, 스토리텔링 북에 북안 할배나무와 할매나무 스토리를 써놓았다고 답변하였다. 신재향 시의원은 틈만 나면 양산의 많은 행사에 참석하며 주민과 소통하고, 현안을 파악하여 의정활동에 활용하고 있어 좋은 인상을 받았다. 신재향 시의원의 4월 17일부터 25일까지 지역행사 참가 내역은 다음과 같다. 그라운드 골프대회, 상공회의소 방문, 제43회 장얘인의날 행사, 시의회 의원 직원 청렴교육, 김해문화재단 벤치마킹, 양산문화예술회관 상주공연단 후궁박빈 공연, 중앙동 양주골축제당산제, 북정동 악취예방 대나무숲 조성, 양산숲길보전회 증산 차나무 군락지 보존방안찾기. 3. 증산 왜성 증산은 원래 ‘시리산’, ‘시루산’으로 불렀다. ‘시리산’이란 독메로 꼭 시루를 엎어 놓은 것 같은 형상이라 이름한 것이다. 현재 증산(曾山)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이는 증산(甑山)의 잘못이라고 한다. 이 근처에 증산왜성이 있다. 여기서 조금만 올라가면 왜성의 석축이 보인다. 부근에 차나무는 없고, 공동묘지, 신우대가 자리잡고 있다. 증산왜성이 경남문화재 자료 276호로 남아 있다. 이달정종(伊達政宗)이 쌓았다고 해서 이달성지(伊達城地)라고도 한다. ] 왜성에 이용된 돌은 황산역(黃山驛)의 석축을 허물어 나온 돌이라고 한다. 수비를 맡은 구로다 나가마사는 다음해 3월 13일 도요토미 히데요시[豊信秀吉]의 명령에 의하여 본성에서 철수, 감동포성(甘同浦城)으로 옮겨 갔다. 현재는 석축이 대부분 무너진 채 성곽 일부가 남아 있으나, 이 일대가 공동묘지로 사용되면서 성내·외는 민묘(民墓)로 가득 차 있다. 성의 총 둘레는 약 1.5㎞이고, 높이는 12.8m이며, 남쪽 성지는 높이가 9m이고, 둘레가 300m이다. 증산은 임진왜란 당시에 왜적이 쌓은 성이 있어 증산왜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왜성은 1597년(선조 30년) 왜군이 남해안까지 후퇴 후 이곳의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방위선을 구축하기 위하여 왜장 모리히데모토(毛利秀元)와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가 축성하였고, 구로다나가사마(黑田長政) 군대가 일시적으로 머물렀던 곳이다. 현재 증산마을 뒤편과 남부마을 뒷산 능선으로 이어진 곳에 옛날 신라시대 우리 성 터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을 뿐, 정유재란 당시 정상 부위와 남쪽 등성에 왜인들이 왜성을 축조하면서 거의 훼손되었다. 또 경부선 철도 부설 시 마지막 남은 서쪽성 일부가 모두 허물어졌다. 그러나 정상부 서쪽성 기단층에는 신라성의 흔적이 보이며 그 기초 위로 왜성을 쌓은 흔적이 보인다. 조국영 도예가에 의하면 증산마을 쪽에서 도로를 내면서 증산왜성 유적이 일부 파괴되었다고 한다. 아무리 왜군이 쌓은 성일지라도 우리의 역사 일부이기 때문에 잘 보존해야 한다. 자라나는 2세들에게 치욕의 역사 현장을 보여주며 교훈을 가르쳐야 한다. 증산왜성은 동서로 양쪽 봉우리에 아성(芽城)을 두고 그 봉우리을 잇는 부곽을 설치하고 남북으로 문은 낸 주성(主城)과 그 아래 남쪽 등성을 이용한 부성(附城)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쪽으로는 군마훈련 장소로 비정되는 넓은 평지가 있다. 양산시는 양산시 물금읍 증산리 696번지와 구 증산 교회 일대의 부근 필지에 도시계획에 의한 계획도로 개설을 위한 측량과 기초적 수목제거 작업을 하여 증산왜성이 일부 파괴되었다. 주민들에 의하면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곳에 도로를 개설하여 유적을 파괴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증산동네에도 개설이 필요한 도로가 있는데, 엉뚱한 곳에 도로를 내었다고 주장하였다. 양산시 공무원들도 역사 공부가 필요하며, 도로 개설시 주민여론 수렴을 충분히 해야 한다. 반일, 반미는 아주 위험하다. 우리나라의 경제가 발전하여 일본과 대등하게 되었으므로 일본 청년들과의 교류도 넓히고 미래지향적으로 나가야 한다. 6.25한국전쟁 때 미국과 유엔군의 지원으로 간신히 실아났고, 이승만 대통령 덕분에 미국과의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안보를 튼튼히 하는 바람에 세계에서 유례없는 경제발전을 이룩하였다. 단군 이래 가장 잘 사는 나라를 만들었다. 친북, 친중은 더욱 위험하다. 4. 조국영 도예가의 차 체험 프로그램 운영 조국영 도예가의 집에서 차를 만드는 시범을 보여주었다. 찻잎을 햇볕에 말려서 양산숲길보전회 회원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조국영 도예가의 자택은 매우 넓고, 텃밭도 있으며, 울창한 대나무 울타리도 있다. 창문으로 내다보면 낙동강도 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조국영 도예가의 집은 전지현, 차태현 주연의 영화 ‘엽기적인 그녀’ 촬영을 한 곳이다. 옥상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옥상에서 오봉산을 바라보며 촬영했으며, 원동으로 가는 1022번 도로변에서도 찍었다고 하였다. 물금읍 서리단길 마을 안내판 옆에 영화 엽기적인 그녀 안내판도 있다. 그런데 조국영 도예가의 집에서 촬영했다는 설명문은 없다. 또한 낙동강변 물금나루터에서도 비오는 장면을 찍었다고 조국영 도예가는 설명해주었다. 조국영 도예가의 집은 도자기 만드는 작업장과 거주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다. 집에 들어가면 많은 작품을 볼 수 있다. 진열장에 일부 작품을 전시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도자기 작품은 방바닥에 늘어놓았다. 작품을 많이 만들어 놓아 전시할 공간이 부족하다. 방에는 차를 시음하고 손님을 맞이할 수 있는 다실 역할을 하는 공간도 있다. 차를 만드는 첫 번째 과정은 찻잎을 큰 비닐봉지에 넣어 흔들었다. 조국영 도예가가 시범을 보인 후 양산숲길보전회 회원들이 차례대로 흔들었다. 두 번째 과정은 무쇠로 된 가마솥에 찻잎을 덖는 차례였다. 가마솥은 100년 이상 된 골동품으로 조국영 도예가가 경매에서 구입하였다고 설명했다. 가마솥을 화장지로 깨끗이 닦아내고 준비를 하였다. 휴대용 가스레인지에 가마솥을 올려놓고 열을 가했다. 조국영 도예작가가 손으로 찻잎을 덖었다. 세 번째 과정은 보자기 천에 찻잎을 넣어서 감싼 후 탁자 위에서 누르며 찻잎의 수분을 짜내었다. 천은 명주가 좋지만 이날은 나이론 천을 사용하였다. 필자도 체험을 해보았다. 네 번째 과정은 보자기에 싼 찻잎을 풀어 손으로 고루 펴는 작업을 하였다. 마지막 과정은 건조기에 놓고 찻잎을 건조시키는 차례였다. 시간이 걸리는 관계로 건조기에 찻잎을 넣은 장면을 보는 것으로 차 체험 프로그램을 마쳤다. 찻잎을 따서 일련의 과정을 거쳐 녹차를 만드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면서 찻잎의 변신 과정을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 조국영 도예가가 미리 만들어놓은 녹차를 회원들과 함께 여러 잔을 마시며 맛을 음미하였다. 술을 좋아하는 회원들도 녹차의 특이한 맛에 반하였다고 소감을 피력하였다. 녹차는 건강에 매우 유익한 성분이 포함되어 있어 건강 유지에 큰 도움이 된다. 술꾼들은 술을 끊고 차를 대신 마시며 건강을 챙길 필요가 있다. 법기도자차문화원의 김태희 회원이 오후에 바로 조국영 도예작가의 집으로 왔다. 맛있는 빵을 사와서 차와 함께 마시니 색다른 맛이 났다. 김태희 회원은 다도에 조예가 깊어 능숙한 솜씨를 차를 우려내어 참석자들에게 따라주는 서비스를 하였다.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다담이 끝나자 김태희 회원은 재빠르게 찻잔을 씻고 뒷마무리를 깔끔하게 하였다. 다담을 나눌 수 있도록 수고한 김태희 회원에게 감사드린다. 조국영 도예가가 양산숲길보전회, 법기도자차문화원 회원들과 함께 한 차 체험프로그램을 통해 최종 완성한 녹차를 사진찍어 4월 28일에 보내왔다. 일련의 과정을 거쳐 멋지게 만든 차 맛이 궁금해진다. 조국영 도예가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 조국영 도예가겸 도자사 연구자, 향토사학자 프로필 ▶ 개인전 2021.11 조선시대 찻사발 : 오기(吳器)다완'과 이라보(伊羅保)다완, 미래디자인융합센터(양산) - 2001 신라갤러리 (대구) - 2000 메사갤러리 (부산) - 1997 메사갤러리(부산) - 1997 일본 아이비 공방(쿠라시키) - 1996 메사갤러리(부산) - 1996 인공갤러리(대구) - 1995 인공갤러리(대구) - 1994 인공갤러리(대구) - 1983 남산화랑(부산) - 1983 천군농장 야외전(경주) - 1982 이목화랑(대구) - 1982 KBS대구방송국 기획(경주) - 1981 현대화랑 (부산) - 1979 암곡미술관(서울) - 1978 예총화랑 (서울) ▶ 그룹전 - 2006 대구MBC Total Art Set(M갤러리) 2006 대구 중견작가 신년초대전(두산아트센터) - - 2005 두손갤러리 개관기념 대구현대미술의 위상 - 2004 송년그림전 스페이스 129 - 2004 대구미술 다시보기, 대구문화예술회관 - 2004. SUM of the Contemporary Art, 대구문화예술회관 - 2003 현대미술 영상. 설치전-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 기념전 (대구문화예술회관) - 2003 대구 아트 엑스포 (대구전시컨벤션 센터) - 2003 뉴프론티어전(대구문화예술회관) - 2003 금수현대미술제 - 2002 Works on Paper 전 스페이스 129 - 2001 대구현대미술시선전, 대구문화예술회관 2000 변화를 위한 모색전-대구문화예술회관 - 1999 대구미술가협회전 대구문화예술회관 1999 Private Drawings, 스페이스 129 - 1998~2000 사이즈 A4전 스페이스 129 - 1994 갤러리메사한일3인전(조국영, 三宅康浪, 황옥련) - 1985 앙데팡당전 서울미술회관 - 1983 10인의 입체전(대구 수화랑) - 1980 부산현대화랑 2인전(조국영, 김옥배) - 1978 한일문화교류전 ▶ 조형물 제작 및 시공 - 2012 낙동강 프로젝트 을숙도 생태통로 조형물 제작 - 2011 인천광역시 청라지구 한반도 조형물 제작 - 2010 의령군 관문 벽화 조형물 제작 - 2009 김해교 불암지하교차로 벽화타일 조형물 설계 및 제작 시공 - 2007-2008: 부산 수영 1호교 고래조형물, 파타일조형물 제작시공 - 2004 기장군 고리 비학마을 전사 벽화 제작 - 2003 부산 아시안게임경기장장애자올림픽 엠블럼 제작시공 - 2002 부산차이나타운조성 조형물 및 바닥벽화타일 제작시공 - 2002 부산 텍사스거리 바닥 타일화 제작시공 - 2002 대구 월드컵 경기장 VIP실 조형물 - 2002 울산 문수경기장 도자벽화 제작시공 - 2001 부산아시안게임경기장(앨벌럼타일화제작시공) - 2001 김해내동지하도 도자벽화 제작시공 - 2001 부산우동성당 부조 12사도상 제작시공 - 1999 경남양산물금성당 조형물 조성 ▶ 행사 주관 경력 - 1998 경주세계문화엑스포 도자책임큐레이터 - 1994 프랑스, 일본, 한국 국제교류전 진행위원 ▶ 수상 및 감사장 - 부산동구청장감사패 : 2002 부산동구차이나타운 조형물 제작공로 - 행정자치부장관표창 : 1999 '98경주세계문화엑스포 책임큐레이트 수행 - 천주교부산교구 주교공로패 : 1999 경남양산물금성당 조형물설치 공로 - 양산시장 공로패 : 2014 양산시 체육발전 ▶ 논문 및 보고서 - 2023.3.16, 부산요(釜山窯)에 공급되었던 도자기 원료 수급에 관하여, 부산요포럼, (사)동북아시아문화허브센터 부산지회 2022.10.27, 부산시 광복동 부산요 추정 도요지 출토품의 성격에 관하여 : 부산요와 양산 법기리 요지의 관계성 중심으로, 부산요포럼, (사)동북아시아문화허브센터 부산지회 2022.8.25, 부산요와 조선 사기장(沙器匠)그리고 일본 도공(陶工), 부산요포럼, (사)동북아시아문화허브센터 부산지회 2022.4.21., 부산요의 도자사적 의미와 가마운영에 관하여, 부산요포럼, (사)동북아시아문화허브센터 부산지회 - 2003 양산시 웅상읍 우불산성, 주남리 고분군 문화재 지표조사보고서(경상남도 도기념물지정) - 2001 박제상 사료 논총(양산문화원 간행) 엮음 - 1998 물금읍지 공동 엮음 - 1996 양산원동면 화제리 녹청자 도요지 발견조사보고서(경상남도기념물 195호지정) - 1996 양산동면 가산리 조선조 분청도요지 발견조사보 고서(경상남도기념물 196호지정) - 1995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용전리 분청사기요지(낙동강사람들) - 1995 낙동강 유역 도요지 탐사 보고서 - 1993 경남 양산군 동면 가산리 분청사기요지(낙동강사람들) - 1992 양산군 원동면 화제리 고려요지(낙동강사람 들)외 수편의 문화재에 관한 보고서 발표 양산숲길보전회와 법기도자차문화원의 많은 참석자들에게 녹차를 만들어 시음 기회를 제공하고, 증산에서 채취한 찻잎을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차를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시범적으로 보여준 조국영 도예가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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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화요칼럼, 통도사 구하 스님의 금강산 관상록 세 번째 이야기1. 표훈사 표훈사로 들어가니 이전 주지인 최원허(崔圓虛) 화상과 추산 선객(秋山 禪客)이 즐겁게 맞이해 주 었다. 점심 공양을 마치고 표훈사 전당(殿堂)을 참배하였다。이 절은 신라 문무왕 1년(670)에 표훈 조사(表訓 祖師)가 창건하였으며、전각과 보물 등은 다음과 같다. 전각 – 능파루(凌波樓), 관풍영빈관(關楓迎賓舘), 어향각(御香閣), 설선당(説禪堂), 극락료(極樂寮), 극락전(極樂殿), 종각(鐘閣), 반야보전(般若寶殿), 영산전(靈山殿), 칠성각(七星閣), 명부전(冥府殿). 보물 – 대증(大甑, 큰 시루솥, 27말을 찔 수 있음, 세조대왕 하사품), 향합[香盒, 원(元) 지정(至正) 12년 : 1352년], 향합(香盒, 원 지정 28년 : 1368년), 고경[古鏡, 3개(사명대사가 일본에서 가져온 것], 고경 1개(원 지정 연간), 화첩[畫帖, 정운붕(丁雲鵬) 그림], 어필(御筆 : 세조대왕). 부속암자 - 정양사(正陽寺), 돈도암(頓道庵), 신림암(神林庵), 청련암(靑蓮庵), 내원통(內圓通), 마하연(摩訶衍), 불지암(佛地庵), 만회암(萬灰庵) 수미암(須彌庵) 선암(船庵). 표훈사의 전각과 보물들을 모두 둘러본 다음 금강산을 탐승한 기념으로 월봉 화상(月峰 和尙)과 능파루(凌波樓)에 올라 함께 시를 읊었다. 월아산(月牙山) 월봉의 시(詩) 곧바로 금강산의 제일봉을 오르니/ 육대주 어느 산도 비할 바가 아닐세/ 봉래산 신선을 여러 번 만난 듯한데/ 새벽녘 남은 꿈속으로 종소리 들려 오네. 영축산(靈鷲山) 구하(九河)의 詩 비로소 금강산 만이천봉에 오르니/ 峰들과 돌들이 모두 참된 모습이네/ 담무갈(曇無竭) 보살님이 중생교화 원(願)을 발해/ 동방에서 높이 솟아 큰 종을 울리네. 2. 만폭동(萬瀑洞) 오월 칠일、원허(圓虛)와 월봉(月峰) 두 선사와 더불어 금강문(金剛門)을 지나 만폭동으로 들어가니 왼쪽에는 청학봉(靑鶴峰)、오른쪽에는 오선봉(五仙峰)이 있었다. 서로 마주한 두 봉우리에는 쭉쭉 뻗은 바위들이 서 있어, 그야말로 푸른 절벽 속에 숨겨져 있는 하늘 같았다. 또한 가히 수백 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의 크고 넓은 바위가 있었고, 홍의영이 쓴 여덟 자의 글이 있었다. 「동구 트여 더없이 시원하고 부는 바람은 맑고 맑도다(洞冷冷風琊淸淸). 또 양봉래는 여덟 자의 큰 글씨를 써 놓았다. 「봉래산 풍악산이 으뜸가는 洞天으로 화하였네(蓬萊楓嶽 元化洞天)」 이 여덟 글자는 마치 용이 하늘을 날아오르는 듯한데, 속전(俗傳)에 의하면 이 글을 쓴 뒤 삼일 동안 산이 울었다고 한다. 길옆 반석에「가락국의 운직겸이 놀았다(游洛國 雲稷廉).」는 여섯 자를 새겨 놓은 곳에서 몇 걸음 정도 가면「금강(金剛)」두 자가 새겨져 있는데, 그 옆에 「영남 군위 소란정 김씨 동자가 구세에 씀. 임오.」라는 글씨가 있다. 근년에는 해강 김규진 씨의 아들이 구세에 「산(山)」자를 이어서 새겼다. 반석 밑에서는 두 물줄기가 합류하는데、한 줄기는 북천(北川)으로 내원통암(內圓通庵) 골짜기요, 다른 줄기는 동천(東川)으로 보덕굴(普德窟)골짜기이다. 우리는 북쪽으로 올라가 찻집에서 맑은 차를 한 잔씩 마셨다. 다시 조금 더 나아가자 길 옆 바위에 「천하제일명산(天下第一名山)」여섯 자가 있는데、이는 나옹 화상이 직접 쓰고 새긴 것이라고 한다. 또 시에 가로되 노승은 바랑을 베고 누워/ 꿈속에서 금강산을 오르는구나/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 소리에/ 놀라 깨어 보니 가을 산에 해 저무네/. 또 수백 보를 더 나아가니 계곡 속에 가운데가 움푹 파인 바위가 있다. 이는 보덕 관음(普德 觀音)이 머리를 감던 세숫대야라고 한다. 다리 위에서 사진을 찍고 조금 나아가니 영아지(影娥池)가 나타났다. 이는 회정(懷正) 선사가 보덕 각시를 뒤쫓아가다가 이 못가에서 잠시 쉬었는데, 보덕 각시가 석굴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못의 물에 비친 곳이다. 이에 회정 선사는 보덕 각시가 관세음보살의 화신임을 깨닫고 보덕암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조금 나아가니 백룡담 다리 건너편에 있는 옛길 옆에 반쯤 누운 듯한 석벽이 보였고, 그 석벽에는 매월당(梅月堂)의 시가 있었다.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함은 인지상정이거늘/ 나는 산에 올라서도 울고 물에 임해서도 우니/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하는 흥취가 없도다/ 울고 또 울어도 무궁한 슬픔은 다하지 않으니/. 「기축년(1469년) 중추절, 44세에 금강산에 들어와서 짓다」라고 적어 놓았다. 읽다 보니 의분이 복받쳐 슬픔을 금할 수가 없었다. 3. 여덟 개의 담(潭) 1리가량 지나니 한줄기 물이 층층을 이루며 흘러내려 여덟 개의 潭을 이루고 있다. 첫째 흑룡담(黑龍潭). 둘째 비파담(琵琶潭), 셋째 벽파담(碧波潭), 넷째 분설담(噴雪潭)、다섯째 진주담(眞珠潭), 여섯 째 구담(龜潭), 일곱째 선담(船潭), 여덟째가 화룡담(火龍潭)이다. 이 중 흑룡담에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중국의 사신 정동(鄭同)이 금강산에 와서 보고 서원하였다. 「이곳이 진정 불계(佛界)로구나。원컨대, 여기서 죽어 영원히 조선 사람이 되어 불제자가 되리라.」 그리고는 흑룡담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 또, 반석에 시 한 수가 새겨져 있다. 굽이굽이 기이한 담(潭) 누가 이름 지었는가? 동천의 기세는 자연적으로 이루어졌고/ 만폭동의 원류까지는 멀고도 멀건마는/ 구룡담은 대등하고 조화가 공평하도다/ 교묘한 선담과 구담은 장대함을 띠었고/ 분설담과 진주담은 그 정취가 그윽하며/ 푸르른 벽파담은 바람이 사랑스럽고/ 비파담에 들어가면 폭포 소리 다함 없네/ 이 시는 이암(異庵) 거사가 지은 것이다. 그림 같은 산악들이 다투어 일만 폭포를 뿜어내니 가슴이 확 트여 상쾌하기 그지없다. 송용재는 두 번째로 금강산에 들어와서 용담(龍潭) 위에다 여덟 글자를 새겨 놓았다. 「일천 바위가 거울처럼 빼어나고 일만 봉우리가 흐름을 다투는구나(千岩鏡秀 萬壑 爭流).」 이 여덟 개의 담은 그야말로 용이 서로 싸우는 듯하고 거북이 엎드린 듯하며, 분설담은 눈을 뿜어내듯、진주담은 구슬을 흩어 놓는 듯한 기세를 드러내고 있고, 비파담도 또한 그 모양을 본떠서 이름을 지었다. 이들 중 분설담이 가장 기이하고 고우며, 화룡담이 제일 웅대하다. 분설담의 폭포 아래에는 만상암(萬像岩)이 있는데, 그 위에 「네 신선이 비를 쉬게 하다(四仙憩雨).」라는 네 자가 새겨져 있고, 옆에 茶店이 있다. 4. 양봉래 위 글 내용은 통도사에서 발간한 『금강산관상록』에 있다. 『금강산관상록』은 통도사 구하 스님이 쓴 금강산 유람기이다. 구하 스님이 양봉래라고 한 사람은 양사언(楊士彦)을 말한다. 양사언[1517년(중종 12) ~ 1584년(선조 17)])은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 완구(完邱), 창해(滄海), 해객(海客)이다. 주부인 양희수(楊希洙)의 아들이다. 형 양사준(楊士俊), 아우 양사기(楊士奇)와 함께 글에 뛰어나 중국의 삼소(三蘇: 소식, 소순, 소철)에 견주어졌다. 아들 양만고(楊萬古)도 문장과 서예로 이름이 전한다. 양사언은 안평대군, 김구, 한호와 함께 조선 전기 4대 명필 중 하나로 해서체, 초서체에 뛰어났다. 회양 군수로 있을 때 금강산에 자주 들어가 대자연을 즐겼고 금강산 만폭동(萬瀑洞)의 바위에는 지금도 그가 새긴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이라는 글귀가 남아 있다. 1546년(명종 1) 문과에 급제하여 대동승(大同丞)을 거쳐 삼등(三登: 평안남도 강동 지역), 함흥(咸興), 평창(平昌), 강릉(江陵), 회양(淮陽), 안변(安邊), 철원(鐵原) 등 8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안변 군수로 있으면서 큰 못을 파고 마초(馬草)를 저장하였다. 이듬해에 북쪽에서 변란이 일어나서 많은 군대가 북송될 때 다른 고을에서는 마초와 물이 없어서 관리나 백성들이 책임을 추궁당하여 사형을 받는 자까지 있었으나 안변만은 아무 걱정 없었다. 그의 앞을 내다보는 지혜에 누구나 탄복하였다. 그러나 지릉(智陵: 이성계 증조부의 묘)에 화재가 일어나자 책임을 지고 해서로 귀양을 갔다. 2년 뒤 유배에서 풀려나 돌아오는 길에 세상을 떠났다. 시조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는 지금도 널리 애송되고 있다. 가사(歌辭)로는 「미인별곡(美人別曲)」과 을묘왜란(乙卯倭亂) 때 군(軍)을 따라 전쟁에 나갔다가 지은 「남정가(南征歌)」가 전한다. 5. 매월당 구하 스님이 위의 글에서 매월당의 시를 읽다 보니 의분이 복받쳐 슬픔을 금할 수가 없었다고 한 매월당은 생육신 김시습을 말한다. 김시습(金時習, 1435년 ~ 1493년)은 조선 초기의 문인, 학자이자 불교 승려이다.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등극한 세조에 반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한성부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경상도 김해를 거쳐 강원도 강릉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의 본관은 강릉, 자(字)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 동봉(東峰), 벽산청은(碧山淸隱), 췌세옹(贅世翁), 불교 법명은 설잠(雪岑)이다. 충순위(忠順衛)를 지낸 김일성(金日省)의 아들이다. 21세 때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성삼문, 박팽년 등의 학자들을 학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책을 불사르며 통탄했고 끝내 방랑의 길을 떠났다. 은둔생활을 하다 승려가 되었으며,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일설에는 그가 사육신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경기도 노량진(현재의 서울 노량진 사육신 공원)에 암장했다고도 한다. 1493년 조선 충청도 홍산군 무량사에서 병사하였다. 생후 8개월에 글뜻을 알았다 하며, 3세에 유모가 맷돌로써 곡식을 빻는 모습을 보고 스스로 글을 지을 정도로 천재적인 재질을 타고 났다 한다. 5세 때 이미 『중용』. 『대학』에 통하여 신동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집현전 학사 최치운(崔致雲)이 그의 재주를 보고 경탄하여 이름을 시습(時習)이라 지어 주었다. 어린 시절 세종대왕이 그의 천재성을 듣고 5세의 김시습을 불러다가 글을 짓게 하자 바로 글을 지었다. 그 내용에 감동한 세종대왕이 문학에 재능이 있는 그에게 칭찬하며 비단을 선물하자, 그 비단들을 끝을 묶어서 가져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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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통도사 구하 스님의 금강산 관상록 두 번째 이야기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명경대 주변 풍경 가장 먼저 명경대(明鏡臺)를 찾아가다가 지장암(地藏庵)이 있어 들어가 보니, 수원에 사는 신도가 기도하는 중이었다. 명경대 계곡 속으로 들어서니 지장봉(地藏峰), 관음봉(觀音峰) 등이 무리지어 우뚝 솟아 있고, 석가봉(釋迦峰)이 그 앞에 뾰족하게 솟아 있었다. 여기서부터 여러 봉우리들은 칼과 창이 서로 마주하고 있듯이 연이어 서 있었다. 한 봉우리를 지나자 또 하나의 골짜기가 나타났으니, 모든 계곡물들이 서로 세차게 부딪쳐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었다. 위를 보니 물오리 형상을 띤 마고석(麻姑石)이 있고、8, 9리 남짓 더 들어가니 다점(茶店)이 하나 있었으며、거대한 바위가 공중으로 우뚝 솟아 있었다. 높이는 수백 척이요 정면은 갈아놓은 듯한데, 흑색 또는 황색을 띤 천연석이 바로 앞에 높이 솟아 있으니, 이것이 바로 명경대(明鏡臺)이다. 명경대 앞에는 숭정(崇禎) 7년 갑술년(634)에 조철구(趙徹求)가 쓴 「주송벽립(朱宋壁立)」 네 자가 새겨져 있었다. 또 십여 명이 앉을 수 있는 평평한 바위가 있으니 이름하여 업경대(業鏡臺)라 하고, 업경대 아래에 있는 황류담(黃流潭)은 달리 황천강이라 부른다. 업경대 서쪽에는 천진봉(天眞峰)과 지옥문과 죄인봉이 있고, 죄인봉 남쪽 멀리에는 시왕봉(十王峰)과 사자봉(使者峰)이 보인다. 또한 황류담 남쪽에는 무너진 석성(石城)이 있으니, 신라의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몸을 숨긴 곳이라 한다. 예전에는 문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길조차 보이지 않는다. 명경대 뒤쪽으로 돌아가면 황사굴(黃蛇窟), 흑사굴(黑蛇窟)이 있고, 조금 더 나아가니 입을 벌린 듯한 문이 있다. 몸을 구부려야 겨우 지나갈 수 있으니, 곧 금강문(金剛門)이다. 금강문 오른쪽에는 허리를 굽힌 채 머리를 들고 계곡 쪽을 향해 엎드린 구암(龜巖)이라는 큰 바위가 있다. 여기서부터 경치는 더욱 그윽하고 절경을 이룬다. 해탈봉(解脫峰)을 바라보며 동쪽으로 가니, 숲은 울창하고 돌에는 이끼가 끼어 황량한 옛터가 나타났다. 이곳이 바로 마의태자의 궁궐이 있던 곳이라 한다. 그 앞의 계곡 암석에 새겨진 「서라벌의 의열(義烈)과 북방의 뛰어난 경치(東京義烈 北地英風)」는 마의태자가 직접 쓴 글씨이다. 2. 영원암 또 원각문(圓覺門)을 지나 계곡 하나를 건너면 왼쪽에 태자가 말을 묶었다는 바위가 있다. 이곳은 태자의 윗궁전 자리라고 한다. 그곳에서 3리 가량 가면 두 갈래로 길이 나누어지는데, 동쪽으로는 망군대(望君臺)와 백탑동(百塔洞)이 있고、남쪽으로는 영원암(靈源庵)이 있다. 계곡 을 벗어나자 초목이 울창하여 길이 희미해졌으므로 심히 길을 찾기가 어려웠다. 다행히 먼저 간 사람들이 길가 바위 위에 주먹만한 돌을 쌓아 놓았으므로 이를 보고 길을 찾아 나아갔다. 암자에 올라 보니 주위 경관이 그야말로 절묘하고 빼어났다。주지인 상월(霜月) 선사는 매일 오후불식(午後不食)하고, 서울의 비구니인 홍상근(洪祥根) 씨는 백일기도 중이었다. 기흔(琪昕) 사미가 안내를 맡아 설명을 해주었다. 암자의 동쪽에는 영원 조사(靈源 祖師)의 배석대(拜石臺)가 있는데, 그곳에서 바라보니 공중에 우뚝 솟아 있는 지장봉(地藏峰), 관음봉(觀音峰), 석가봉(釋迦峰)이 한눈에 들어왔다. 영원 조사께서 예배드렸던 반석이 예전에는 갈라져 있었는데 지금은 합쳐진 자국이 완연하였다. 그 옆에는 동자석(童子石)이 서 있고 삼인봉(三人峰)이 있다. 서쪽으로는 옥초대(沃焦臺)가 있는데、그곳에서 바라보니 남쪽으로 염라봉(閻羅峰). 시왕봉(十王峰). 판관봉(判官峰). 죄인봉(罪人峰). 사자봉(使者峰). 우두봉(牛頭峰). 마면봉(馬面峰)이 줄지어 서 있있다. 명경대 계곡과 이곳은 그야말로 명부세계(冥府世界) 그대로였다. 영원암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그 역사를 들으니, 고려 충혜왕 4년 계미년(1343)에 굉변(宏卞) 대사가 창건한 이래 580여 년이 되었다고 한다. 3. 망군대와 백탑동 5월 6일, 돌아가는 길에 망군대(望軍臺)로 향하였다.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매일 궁궐 뒤쪽의 봉우리에 올라 군왕(君王)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금치 못했다고 하여 망군대라 하였다는 것이다. 몇 리를 더 나아가 상하 수렴동(水簾洞)에 이르렀는데, 경치가 참으로 장관이었다. 차츰 높은 봉우리를 향해 올라가니 길은 더욱 험준하였고, 오른쪽으로 경사진 곳 왼쪽에 폐허가 된 도솔암 터가 있다. 그곳에서 마신 물은 맑기가 그지없었다. 조금 더 위쪽의 수십 길이나 되는 곳에 나무로 짜서 만든 184 층계를 올라, 우뚝 솟은 망군대 정상에 도달했다. 사방을 돌아보니 금강산이 한눈에 보였고, 비로봉 또한 마주 서 있었다. 망원경으로 주위를 두루 감상하고 몇 시간 후 되돌아 내려왔다. 길이 매우 위험하였으므로 근근이 평지에 이르러 백탑동(百塔洞)으로 나아가니, 몇 개의 천진탑(天眞塔)과 두 개의 문탑(門塔)이 나란히 서 있었다. 자연 암석이 겹쳐져 봉우리를 형성한 것들이 대부분 탑의 모양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백탑동이라 한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백성욱(白性郁) 박사가 안양암(安養庵)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 보았더니, 청년 십여 명을 데리고 하루에 한 끼만 먹으며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을 암송하고 참선도 한다. 4. 장안사에서 표훈사로 가는 길 5월 6일、다시 만폭동(萬瀑洞)으로 향하였다. 장안사에서 3, 4리 정도 나아가니 명연담(鳴淵潭)이 있었다. 명연담 아래에는 하나의 큰 돌이 누워 있고, 그 옆으로 세 개의 돌이 마치 사람이 꿇어앉거나 엎드리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나란히 있었다. 누운 돌은 금동 거사(金洞 居士)요, 나란히 있는 세 돌은 금동 거사의 아들이라고 한다. 명연담 왼쪽의 일직선으로 된 돌길 옆은 절벽으로, 양쪽 절벽에는 나무다리가 가로놓여 있다. 이 다리를 건너 수리를 가자 몇 채의 승촌(僧村)이 보이고, 승촌을 지나자 영선정(迎仙井) 위로 경성의 민영휘(閔泳徽) 씨 별장인 청학관(靑鶴觀)이 나타났다. 가서 보니 집 모양이 매우 묘하고, 마시는 물이 맑고도 시원하였으며, 좌우로는 기이한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성당(惺堂)의 서폭과 용구(用求)의 필법과 관재(貫齋)의 살아 있는 듯한 그림이 벽들을 황홀하게 수놓고 있었다. 다시 영선교(迎仙橋)를 건너 표훈사 동천(表訓寺 洞天)으로 들어갔다. 길가에 우뚝 선 바위 앞면에 새겨 진 세 분 부처님은 나옹 조사(懶翁 祖師)의 조각이요, 뒷면의 육십불(六十佛)은 금동(金洞) 거사의 조각이며,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도 같은 때에 조각하였다고 한다. 또한 「삼불암(三佛岩)」 글씨는 윤사국(尹師國)의 필적이다. 백화암(白華庵) 옛터에는 청허(淸虛) 선사 등 고승의 진영(眞影)을 모신 수충영각(酬忠影閣)과 승려들의 초막집 몇 채가 있었다. 조금 더 나아가니 청허 선사와 평양 풍담(楓潭) 선사의 비석이 있고、옛 조사의 부도 몇 기가 남아 있었다. 그곳에서 조금 더 가니 함영교(含影橋)가 보이고、다리를 건너자 표훈사가 나타났다. 5. 마의태자에 대한 필자의 해설 마의태자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56대 경순왕의 태자인 왕자이다. 생몰년은 미상이다. 935년(경순왕 9)에 경순왕이 더이상 국가를 보전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고려에 나라를 넘기고자 했다. 경순왕은 후백제 견훤(甄萱)과 고려 왕건(王建)의 세력에 눌려 더이상 국가를 보전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935년(경순왕 9) 나라를 들어 고려에 귀부(歸附)하고자 하였다. 이에 마의태자는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天命)이 있으니 힘을 다하지 않고 1000년 사직을 가벼이 남에게 넘겨줄 수 없다고 하여 반대하였다. 그러나 경순왕은 무고한 백성을 더이상 죽일 수 없다 하여 시랑 김봉휴(金封休)를 시켜 국서를 보내어 고려에 항복하였다. 마의태자는 통곡하며 왕을 하직하고 개골산(皆骨山 : 금강산의 겨울 이름)으로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초식으로 연명하며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마의태자’라는 명칭은 그가 베옷을 입고 일생을 보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의 미륵사지는 도로 옆에 자리한다. 절이 산에 있지 않고 길가에 자리한 셈이다. 그 까닭은 길에 있다. 우리나라 문헌에 처음 기록된 길은 신라 아달라왕이 156년에 연 계립령(525m), 지금의 하늘재다. 하늘재는 미륵사지에서 곧바로 연결된다. 미륵사지 바로 위에는 고려 시대 원 터가 자리한다. 미륵대원은 당시 사람들이 왕래하던 길가에 세운 숙소이다. 미륵사지에는 보물 95호인 미륵리 오층석탑과 보물 96호인 미륵리 석불입상 등이 그 터에 있으며,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전설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현재 법주사의 말사인 미륵세계사가 위치하고 있다.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와 딸 덕주공주는 나라가 망하자 금강산으로 떠났다. 도중에 덕주공주는 월악산에 덕주사(제천시 한수면 송계리)를 지어 남쪽을 바라보게 마애불을 만들었고, 태자는 미륵대원지에 석굴을 지어 북쪽 덕주사를 바라보게 했다는 전설이다. 실제로 석불은 남쪽을 등지고 북쪽으로 덕주사를 품은 월악산을 바라본다. 경주를 떠난 마의태자는 양병을 위한 장소를 오대산으로 정하고 길을 떠났다. 계속 북상하다가 산간협곡에 숙박 야영지를 마련하고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그날 밤 태자는 꿈에 관음보살을 만난다. 보살은 “이곳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서천에 이르는 큰 터가 있으니 그곳에 절을 짓고 석불을 건조하고, 그곳에서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는 자리에 영봉을 골라 마애불을 이루면, 억조창생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으니 포덕함을 잊지 말라”고 했다. 잠에서 깨어난 태자는 덕주공주에게 꿈 이야기를 하니 같은 시간에 공주도 그와 같은 현몽을 받았다고 하였다. 다음날 새벽 서쪽을 향해 고개를 넘어가던 중 고개마루턱에 한 권의 포경문을 담은 책이 있었다. 고개를 넘어 현몽한 대로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는 최고봉을 확인하고 그 자리에 석불입상을 세우고, 마주 보이는 영봉 밑에 마애불상을 조각했다고 한다. 『삼국사기』 경순왕조의 마의태자 기록은 다음과 같다. “왕자가 말하였다. 나라의 존속과 멸망은 반드시 하늘의 운명에 달려있으니, 다만 충신 의사들과 함께 민심을 합하여 스스로 굳건히 힘을 다한 뒤에 망할지언정, 어찌 1천 년의 사직을 하루아침에 가벼이 남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 왕자는 통곡하면서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그 길로 개골산(皆骨山 : 금강산)으로 들어가,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삼베옷을 입고 풀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금강산에는 마의태자와 관련된 전설이 담긴 장소가 많은데 태자성(太子城), 용마석(龍馬石), 삼억동(三億洞) 등이 있다. 비로봉 정상에서 외금강으로 내려가는 서남쪽 비탈길에 무덤이 있는데 이 무덤을 마의태자릉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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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통도사 구하 스님의 금강산 관상록1. 구하 스님의 일생 근현대의 고승으로 호는 구하(九河), 자호는 축산(鷲山), 성은 김씨이다. 본관은 경주로 울주군 두동면 봉계리에서 출생했다. 구하 천보(九河 天輔·1872∼1965)스님의 부친은 김한술(金漢述) 선생. 본관은 경주. 모친은 신씨(申氏)였다. 법명은 천보(天輔), 법호는 구하(九河)이다. 축산(鷲山)이란 자호(自號)를 사용했는데, 통도사의 영축산(靈鷲山)을 상징한다.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부모에게 출가하겠다고 하고 집을 나섰다. 이때가 1884년 겨울로 갑신정변이 일어난 해였다. 13세가 되던 1884년 천성산 내원사에서 출가하여 행자생활을 시작했고, 경월도일(慶月道一)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이듬해인 1890년 예천 용문사에는 용호해주(龍湖海株)스님 문하에서 경학과 참선을 공부하고 1896년 구족계를 수지했다. 같은 해 성해남거(聖海南巨)스님의 전법제자가 되어, 구하라는 법호를 받았다. 수행을 거듭하여 1905년 통도사 옥련암에서 정진하다 오도의 경지를 맛본다. 1908년 명신학교를 비롯해 입정상업학교(지금의 부산 해동고등학교, 1932년)와 통도중학교(지금의 보광중학교, 1934년)를 설립하여 교감, 교장을 역임하면서 어려운 절 살림과 암울한 일제치하의 시대 속에서도 인재양성에 힘썼다. 또한 통도사 주지로서 1910년 한일합방 후 30본산 주지가 되었으나 사규가 점차 무너짐을 보고는 후진으로 물러나 있었다. 1911년 11월부터 1925년 8월까지 통도사 주지를 역임했고, 1917년 1월부터 3년간 삼십본산연합사무소 위원장을 지냈다. 불교중앙학림(지금의 동국대학교) 학장을 맡아 후학 양성에 힘썼다. 포교의 중요성도 강조하며 마산 포교당 정법사(1912), 진주 포교당 연화사(1923), 창녕 포교당 인왕사(1923), 물금 포교당(1924), 언양 화장사(1927), 창원 구룡사(1929), 의령 수월사(1930), 부산 연등사(1932), 울산 포교당 해남사(1936), 양산 포교당 반야사(1940) 등 많은 포교당을 설치하여 부처님의 전법을 전하는 데 힘을 쏟았다. 또한, 역경사업에도 힘써 통도사. 해인사. 범어사 3곳이 힘을 모아 해동역경원(海東譯經院)을 설립하기도 했다. 2. 구하 스님의 독립운동 구하 스님은 일제강점기 한국불교를 대표했기에 친일행적에 대한 논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스님은 1917년 이회광, 강대련 등과 함께 일본을 방문하면서 이곳에서 일본을 칭송하는 발언을 하는가 하면 1920년대 중후반 ‘조선불교총보’ 등에 친일 성향의 글을 발표해 불자들의 친일을 선동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구하 스님은 친일 행적 때문에 해방 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친일파 명단에 올랐다. 통도사 주지를 역임한 현문 스님을 비롯한 구하 스님의 제자들은 스승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자료를 찾기 위하여 유품을 정리하다가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전달하고 받은 영수증을 발견하였다. 이런 영수증 때문에 친일파 명단에서 삭제되고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구하 스님은 일본의 신문물을 배우러 일본에 드나들었지만 실제로는 상해임시정부에 많은 독립운동자금을 대는 큰 자금줄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독립운동 행적을 감추기 위하여 겉으로 친일활동을 한 것이다. 구하 스님의 독립자금 영수증은 양산시립박물관에서 양산의 항일투쟁 특별전을 할 때 공개되어 양산시민들에게 큰 감동을 안겨주었다. 구하 스님은 나라를 잃은 상태에서 수행 정진하며, 겉으로는 친일활동을 했지만 실제로는 국권을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에 은밀하게 자금 지원을 하였다. 후세들은 현재의 가치 기준에 입각하여 선조들의 행적을 함부로 친일로 단죄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전적으로 잘못된 판단이다.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목숨을 유지하며, 장기적 안목에서 인재를 육성하고 불교 교단을 수호하는 것도 하나의 독립운동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구하 스님은 통도사의 재정으로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자금을 지원했다.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인 안창호가 보낸 밀사에게 5천 원, 경성 「화신공보」 사장 초월동조(初月東照)에게 2천 원, 지암 종욱(鍾郁)이 군자금을 모집할 때 3천 원, 독립운동가 정인섭에게 1천 원 등 모두 1만 3천 원의 독립자금 지원 영수증이 발견되었다. 조선총독부는 구하 스님이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주지에서 쫓아내려고 한 적도 있었다. 통도사가 독립운동 자금을 댄다는 소문이 나자 일본 형사들이 절의 재정 상태를 조사하였다. 구하스님은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하여 사제인 경봉스님과 함께 절 밑 사하촌의 기생집에서 일부러 며칠을 머무르곤 하였다. 통도사의 자금 지출이 독립자금이 아니라 기생집에서도 발생했다는 것을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구하스님 말년에 시봉을 들었던 통도사 주지였던 현문(玄門) 스님은 “독립운동 자금을 받으러 오는 사람은 항상 걸인 행색을 하고 구하스님 방 앞에서 행패를 부리면 구하스님이 데리고 들어가 슬며시 자금을 건넸는데, 어찌나 은밀하고 눈 깜짝할 새 건네지는지 바로 옆에 있던 시자 스님들도 전혀 눈치챌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상해에서는 그와 성월 등이 함께 대한승려연합회 대표자 12인 선언서에 서명하는 등 항일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어린이 교육에도 힘써 마산 대자유치원, 진주 연화사 유치원, 울산 동국 유치원 등을 설립하였다. 그 외에도 1912년 11월 대한승려연합회 독립선언서 발표 동참, 백산상회 안희제와 범어사 김상호를 통해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 제공, 1920년 3월 의춘상회(의춘신탁)를 설립해 독립자금 마련, 1920년 4월 동아불교회를 설립해 항일불교운동을 시도하는 등 조국해방을 위해 힘을 쏟았다. 1949년에는 중앙불교 총무원장을 역임하고, 1965년 10월 3일 원적에 들었다. 세수 94세. 법랍 81세였다. 제자는 전 종정 월하(月下) 스님 등 30여명의 출가 제자가 있다. 문손들에 의해 구하스님의 시문과 금강산을 유람하고 쓴 기행문인 『축산문집(鷲山文集)』과 『금강산관상록(金剛山觀相錄)』이 1998년에 출간되었다. 3. 금강산 가는 길 임신년(1933년) 4월 17일, 통도사를 출발하였다. 양산읍을 지나서 물금역에 도착하여 역장과 요금을 교섭하니, 역장은 단체의 경우에는 4할, 개인 왕복은 3할, 편도는 할인해 주지 않는다고 하였다. 내금강역까지의 요금은 11원 68전이었다. 경성역에 도착하였으나 벗들을 찾아보지 않고 곧바로 경원선 열차를 바꾸어 타고 철원역에 도착하니、「금강산전철도(金剛山電鐵道)」라는 글씨를 철로써 크게 써 놓은 표지와 금강산행 전차를 타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인형을 만들어 세워 놓았다. 잠시 동안 철원역을 둘러본 다음 전철을 타고 금강산 입구로 향하였다. 잠깐이면 금강산에 도착할 줄 알았는데, 십여 역을 정차하고도 계속 지나갔다. 전차 속에서 철원의 신개척지를 살펴보니 평원과 광야가 대단히 넓게 펼쳐져 있었다. 김화역을 지나니 해가 저물었으므로, 금성역에서 내려 홍복선의 여관에 투숙하였다. 5월 2일, 다시 전차를 타고 단발령 터널을 통과하였다. 산을 뚫고 길을 만들어 전기를 통하게 한 것이 경상남도 성현 터널보다 훨씬 뛰어났다. 또한 굴 안에 전등을 연속으로 밝혀 마치 별들이 펼쳐져 있는 듯하였다. 굴을 지나 길게 굽이진 길로 나아가는 것도 굉장하였다. 이를 두고 「돈이 있으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다.」고 한 것인가? 단발령역에 도착하자 저 멀리 금강산이 보이는 듯하더니, 마침내 말휘리역을 지나 내금강역에 도착하였다。이곳은 원래 장안사 탑거리였으나 지금은 정거장이 되었다. 내금강역은 우리나라식의 단청을 찬란하게 하였으며, 온 마을은 불빛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각 여관의 안내자들은 서로 다투어 손님을 모시고자 하기에 말하였다. 『나는 운주문에 있는 여관으로 가겠노라.』 이에 유일여관의 안내자가 와서 나의 행장을 찾은 다음 자동차를 탈 것을 권하였다. 잠깐 주위를 둘러보았더니 일본인이 경영하는 부지화여관(不知火旅館)이 있고、「금강각(金剛閣)」이라 는 공회당, 전철회사 사장인 구미민지조(久米民之助) 씨의 유골비가 있었으며、우리나라 사람이 경영하는 여관과 인가들도 몇 채 있었다. 자동차를 타고 장안동천으로 들어서니 좌우에 명산품을 파는 상점들, 우리나라 사람과 일본 사람이 경영하는 여관과 호텔, 사진조합 등이 가득하였다. 큰길 옆에는 노송나무, 측백나무, 소나무 등이 울창하였고, 바위 사이로 흘러내리는 물은 그지없이 희고 맑아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고 있었다. 운주문 이윽고 운주문의 유일여관에 도착하여 보니, 여관 주인은 장안사에서 법무 일을 맡아 보는 배금봉(裵錦峰)의 은사인 이운허(李運虛) 스님이었다. 일찍이 서로 만난 적이 있어 반가이 환영해 주었다。행장을 방에 들여놓고 발을 씻은 다음 옷을 갈아입고 운주문을 구경하니, 그곳에는 해강 김규진(海岡 金奎鎮) 선생의 글이 있었다. 오로지 한산에 머물며 모든 일을 쉬었더니 잡된 생각 다시는 마음에 걸림이 없도다 한가로이 저 석벽에 시구들을 적으면서 매여 있지 않은 배를 마음대로 운전하네 나(구하 스님)도 한 수의 시를 지었다. 지금에야 유명한 금강산에 도착하니 금강산이 나를 위해 洞門을 열었다네 산과 산 물과 물 세상 티끌 없는 이곳 깊은 구름 푸른 숲 속에는 절이 있도다 운주문 앞을 두루 둘러보다가, 다행히 장안사에 있는 금운 화상(錦雲 和尙)을 만나게 되었다. 일찍이 서로의 명성을 들어 알고 있었으므로 잠깐 대화를 나눈 다음 법의를 입고, 함께 만천교(萬川橋)를 건너 장안사로 들어갔다。주지인 현의룡(玄懿龍) 화상을 방문하여 금강산에 들어와 피서를 하게 된 까닭을 말하고、여관으로 돌아와 투숙하였다. 장안사 이튿날인 5월 3일 이른 아침에 주지 스님과 법무를 맡아보는 스님이 함께 찾아와 장안사로 갈 것을 청하였다。하룻밤의 숙박비를 지급하였으나 유일여관 주인은 기어이 받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포기하고 장안사로 들어가니 강대련의 스승인 진허(震虛) 대선사께서 거처했던 화엄각(華嚴閣)을 숙소로 정해 주었다。더욱이 진주 청곡사(靑谷寺)의 전 주지인 최월봉(崔月峰) 화상이 네 번째 금강산 순례에 함께하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었다. 5월 4일에는 편안히 휴식하고 5일에 장안사를 구경하였다. 이 절은 신라 법흥왕 때 창건하여「장안(長安)」이라 하였다. 「나라의 큰 행복이 길이 이어질 수 있도록 성인의 존상을 봉안한다(永長邦家之洪祚 奉安聖人尊像).」는 뜻이다. 고구려의 석혜량(釋惠亮) 대사가 창건하였고, 고려 충혜왕 4년(1343)에 고려 출신의 여인으로 원나라 순제(順帝)의 왕후가 된 기씨(奇氏)가 중건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쳤고, 근세에 또다시 퇴락하자 총독부에서 4만 원을 출자하여 대웅보전(大雄寶殿), 범왕루(梵王樓), 해광전(海光殿), 수정문(水晶門) 등을 중수하였다. 전각은 17동에 246칸이 있으며、새로 지은 집이 15칸이다。대문 옆에는 우체국과 주재소(駐在所)가 있다. 주요 전각은 다음과 같다. 水晶門(일명 萬水亭) 四聖之殿(宏卞 大師 친필), 梵王樓, 海光殿, 大雄寶殿 (高正普 친필) 篆香閣, 梵鐘閣, 神仙樓(豐恩 大監 친필), 極樂殿, 毘盧殿, 冥府殿(宏卞 大師 친필), 大香閣, 御香閣, 보물 羅漢像(십육나한 및 시자, 나옹 스님께서 친히 만든 작품), 華嶽(書幅、秋史의 예서체), 菩提達摩像 (雪翁 道人 明福의 그림), 造玉像, 香爐, 香盒 (大明 宣德 年號). 부속 암자 안양암(安養庵), 장경암(長慶庵), 중관음(中觀音), 보문암(普門庵) 영원암(靈源庵), 옥천암(玉泉庵), 지장암(地藏庵) 화엄각(華嚴閣) 장안사에서는 옛날의 선원제도(禪院制度)에 의거하여 수좌들이 좌선을 하고 있다. 공양과 예불은 대중 모두가 참여하여 한곳에서 행하지만、결혼을 하였거나 여관을 경영하는 승려는 예외로 삼고 있다. 주지 스님은 설명하였다. 「만천교(萬川橋) 바깥에 대해서는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지만, 만천교 안에서는 선규(禪規)에 따라 행합니다.」 우리는 대중과 함께 선규를 지키며 지내게 되었다。이날 금강산을 보고 감상하는데 필요한 도구들, 밀짚모자와 지팡이, 점심, 그리고 망원경 등을 챙겨 어깨에 메고 월봉(月峰) 화상과 함께 산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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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화요칼럼,통도사 자장율사의 계보를 이어온 주지 스님1. 자장율사가 수행한 자장암과 금와보살 자장암은 통도사 창건주인 자장율사가 수행하던 곳이다. 통도사를 창건하기 전에 이곳에서 기도하였다. 자장암은 명당자리인 거북 모양의 바위를 그대로 살려서 관음전을 건립하였다. 관음전 앞에는 거북의 꼬리, 바로 뒤에는 거북 머리, 바위 절벽에 금와공이 있다. 이 바위 구멍에 금와보살이 있다. 법당 오른쪽에는 앞으로 약간 기울어진 자연 암벽을 살려 마애불을 조성하였으므로 온통 바위에 둘러싸여 있다. 바위에서 좋은 기운이 나와 기도발을 잘 받는 곳으로 유명하다. 금와보살 친견을 위해 전국에서 불자와 관광객들 많이 찾고 있다. 법당인 관음전 뒤쪽에는 암벽에서 맑은 석간수(石間水)가 흘러나오고, 그 위의 석벽에는 엄지손가락이 들어갈 만한 작은 구멍이 있다. 자장율사가 수도하고 있을 때 두 마리의 개구리가 물을 혼탁하게 하므로 신통력을 사용하여 손가락으로 바위에 구멍을 뚫고 개구리가 들어가 살도록 하였다고 전한다. 참배객들이 금와보살이라고 칭하면서 보기 위해 방문한다. 금와공 속의 개구리를 보는 사람도 있고 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서 이로써 불심(佛心)을 헤아리기도 한다. 금와보살을 친견하면 행운이 따른다는 얘기가 회자 되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금와보살을 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많은 불자와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있지만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필자는 지난 3월 27일 자장암을 방문하였다가 운 좋게 금와보살을 친견하였다. 자장암의 보살 한 명이 금와공 앞에서 지키며 찾아오는 불자와 관광객들의 질서를 바로잡았다. 오래전에 금와보살을 친견할 때는 금와보살이 금와공 속에 깊이 들어가 있어 잘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금와보살이 입구 가까운 곳에 있어 잘 보였다. 금와보살을 친견한 분들은 모두가 기쁜 마음을 지니고 귀가하는 것으로 보였다. 자장암은 자장율사(慈藏律師)가 통도사를 짓기 이전에 이곳의 석벽 아래에서 움막을 짓고 수도하였으며 나중에 통도사를 창건하였다. 옛 이름은 자장방이라 하여 통도사 경내 칠방의 하나였으며, 자장율사의 제자들이 수행하던 곳이다. 통도사사적약록(通度寺事蹟略錄)에 나오는 통도사 칠방은 동서남북으로 구분해볼 때 동쪽은 조일방, 서쪽은 자장방, 명월방, 남쪽은 적운방, 호응방, 북쪽은 백운방, 곡성방이 있었다. 자장방은 현재의 자장암과 이름이 같아서 쉽게 알 수 있다. 북쪽의 백운방, 곡성방은 현재의 백운암, 극락암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통도사사적약록(通度寺事蹟略錄)은 한때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通度寺舍利袈裟事蹟略錄)’으로 오인되기도 하였으나, 이것은 이 책을 구성하는 첫 장의 제목이고, 이 책의 정식 명칭은 ‘통도사사적약록(通度寺事蹟略錄)’이다. 본문은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通度寺舍利袈裟事蹟略錄), 사리영이(舍利靈異), 가사희기(袈裟稀奇), 사지사방산천비보(寺之四方山川裨補), 서천지공화상위사리가사계단법회기(西天指空和尙爲舍利袈裟戒壇法會記), 통도사창조자장행적(通度寺創祖慈藏行蹟) 등의 내용을 수록하고 있어 자장율사가 창건한 이래 통도사의 사적이 잘 정리되어 있다. 자장암은 연대는 미상이나 회봉(檜峰)이 중건하였고, 1870년(고종 7)에 한 차례의 중수를 거쳐 1963년에 용복(龍福)이 중건하였으며, 1987년부터 1993년까지 현문화상이 감원실, 금와당, 취현루 등을 건립하였다. 자장암은 국내 사찰 중 전망이 좋기로 유명하다. 프랑스 르몽드지 사장이 자장암의 다실에서 바라보는 영축산 경치에 최고의 찬사를 보낸 적이 있었다고 한다. 자장암에서 영축산 정상을 바라보는 풍광이 매우 아름다우며, 정면으로 보이는 영축산에서 이어지는 능선도 한 폭의 동양화처럼 펼쳐져 있다. 자장암의 아름다운 낙락장송을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다. 요즘 자장암에 벚꽃, 진달래꽃이 만발하였다. 자장암은 8월 7일까지 자장동천에 바로 이어서 문화재관리소 및 휴게소 건립공사를 하고 있다. 2. 영축산의 그림자가 비치는 극락암의 영지 통도사 극락암의 극락영지(極樂影池)와 홍교(虹橋 : 무지개다리)는 유명하다. 작은 극락영지에 영축산의 그림자가 비치기 때문에 불자들이 신기하게 여긴다. 연못인 '극락영지’는 통도 팔경 중의 하나이다. 봄이면 한그루의 벚나무가 극락영지를 장식하고, 여름이면 연꽃(요즘은 수련)으로 장엄하고, 가을이면 단풍 물든 영축산이 잠기고, 겨울이면 맑은 하늘 구름이 노닐다 간다. 극락영지를 가로질러 놓은 무지개다리인 홍교는 삼독(三毒)인 탐진치(貪瞋痴) 를 버리고 극락을 가는 다리로 경봉 스님이 71세 때인 1962년에 만들었다. 탐욕(貪欲)과 진에(瞋恚)와 우치(愚癡), 곧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 노여움, 어리석음 이 세 가지 번뇌는 열반에 이르는 데 장애가 되므로 삼독(三毒)이라 한다. 통도사의 구하 스님, 경봉 스님, 경하 스님이 쓴 시가 있다. 극락영지(極樂影池) - 구하스님 一杖徘徊數步立(일장배회수보립) 지팡이 짚고 몇 걸음 배회하다 우뚝 서니, 慤憨水國現山容(은근수국현산용) 연못 속에 은근히 산 그림자 비치네. 團團花葉承金露(단단화엽승금로) 둥근 연꽃잎은 금빛 이슬 머금었고, 秦樂法音散翠峰(진악법음산취봉) 연주하는 법음소리 푸른 봄에 흩어지네. 극락연지 (極樂蓮池) - 경봉스님 古庵佳景幾人逢(고암가경기인봉) 옛 암자의 멋진 풍경 몇이나 맛보았나. 碧水紅蓮鍊玉容(벽수홍련연옥용) 푸른 물에 홍련이 옥같이 피어나네. 風送香聲開錦谷(풍송향성개금곡) 바람이 향기 소리 보내 비단 골에 펼치니. 野來秋色倒金峰(야래추색도금봉) 들엔 가을빛 오고 연못엔 금빛 봉우리 잠기네. 극락영지 (極樂影池) -경하스님 極樂庵前池聳出(극락암전지용출) 극락암 앞의 연못에는 맑은 물이 솟는데, 虹橋橋下日遲遲(홍교교하일지지) 홍교 아래 해는 느릿느릿 넘어가네. 山橫水面魚遊 (산횡수면어유수) 산이 수면에 어리는데 물고기 한가로이 헤엄쳐 놀고. 松倒波心鳥睡枝(송도파심조수지) 소나무 넘어질듯 물결에 흔들려도 새는 가지에 앉아 잠들어 있네. 3. 통도사의 주지 스님 계보 불보사찰(佛寶寺刹)인 통도사는 천년가람으로서 자장율사, 환성지안(喚醒志安, 1664~1729), 구하, 경봉 선사 등 큰스님들이 연이어 주석하며 사격(寺格)을 높이고, 수행법을 반듯하게 해왔다. 통도사에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전통이 있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예절, 사형(師兄)과 사제(師弟) 사이의 우애(友愛)가 남다르다. 근세에 성해(聖海南巨, 1854~1927) 선사는 큰 제자 넷을 두었다. 구하천보, 경봉정석, 제하법성(霽河法晟), 경하달윤(鏡河達允)이다. 그중 구한말 일제 식민지 시절의 구하(九河天輔, 1872~1965) 스님은 단신(短身)이지만 기상이 출중하고 통솔력이 뛰어났다. 경봉 선사는 20살 많은 사형(師兄)인 구하 스님을 속가의 맏형 섬기듯 했다. 스승인 성해 노스님은 공사(公私)를 엄격히 구분하여 어린 사미들에게 이르기를, “출가인이 성취대도(成就大道)는 못하더라도 물질로 인한 죄과(罪過)를 범하지 말라. 항상 공부하는 수좌외호(首座外護)에 힘써야 한다.”고 했다. 성해 스님은 구하 스님에게 통도사를 운영하게 하고, 경봉 스님에게 제방을 유력하며 공부에 힘쓰게 했다. 제자들은 1925년에 통도사로 돌아온 성해 스님을 안양암에서 공부에만 전념하게 해 1927년 극락암 화엄산림법회 도중 마침내 대도를 성취하게 후원했다. 성해 스님은 1928년 1월 19일(음력 12월 27일)에 열반에 들었다. 이후 통도사는 구하 문도와 경봉 문도가 서로 번갈아 가며 주지 소임을 맡았다. 경하 스님과 법성 스님은 이를 보좌하는 형국이었다. 경하 스님은 통도사 성해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당대 선지식 경봉, 구하, 제하 스님과 법을 나눈 사형사제지간으로 계율 수행하면서 평생을 정진과 후학양성에 매진했다. 제29대 통도사 주지를 지낸 영배(英培) 스님은 경하(鏡河) 스님의 제자로 당호가 향전이다. 어릴 때 불가와 인연을 맺은 동진(童眞) 출가자이며 1966년 사미계를 받았다. 동국대학교 이사장, 불교신문 사장, 불교방송 상무 등의 소임을 두루 역임하였다. 현재 통도사 주지인 현문 스님은 10대 초반 어린 나이에 시자 소임을 맡아 구하 대종사를 1년 3개월 가량 시봉하며 대종사의 노년을 생생하게 지켜보았다고 한다. 현문 스님은 “시대를 앞서간 구하 대종사의 역사 의식과 현실 인식은 지금의 한국사회와 한국불교에도 유효한 가르침”이라고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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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박사 화요칼럼,양산의 벚꽃 명소1. 양산에서 가장 빨리 피는 벚꽃 양산시 충렬로 123 양산 유산일반산업단지에 있는 ‘유광화성’의 벚나무는 양산에서 가장 빨리 꽃을 피운다. 2020년에는 3월 15일에 만개하였고, 2021년에는 3월 14일에 활짝 만개하였다. 2022년에는 3월 16일에 일부 개화하였고, 3월 17일에 70% 정도 피었다. 유광화성의 벚나무는 수령이 20년이 넘는다고 하였다. 유광화성의 또 하나의 벚나무는 일반 벚나무처럼 늦게 핀다. 빨리 피는 이 벚나무는 품종이 특이한 것으로 보인다. 올해는 3월 19일 저녁에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보니 벚꽃이 만개하였다. 20일에 사진을 찍기 위해 유광화성을 방문하였다. 벚꽃 필 때마다 방문하면 만나는 직원 금동화 씨가 나와서 반갑게 인사를 하고 서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지난 금요일인 17일에 만개하였다고 알려주었다. 올해 벚나무는 가지치기를 많이 하여 수형이 축소되어 전처럼 화려하지는 안 했지만 봄 소식을 전해주는 데는 손색이 없었다. 유광화성의 벚나무와 함께 양산에서 가장 빨리 피는 벚나무 가로수가 있다. 필자가 2021년에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발견하여 사진을 찍었다. 증산역로 주변의 작은 가로수 벚나무가 2021년에는 3월 12일부터 꽃을 피웠다. 3월 14일에는 완전 만개하여 보기 좋았다. 올해는 3월 20일에 방문했는데, 예상대로 활짝 피어 있었다. 골목 안에 차를 주차하고 걸어가면서 살펴보니 벚꽃이 많이 떨어진 나무도 있었다. 인도 위로 하얀 벚꽃 잎이 떨어져 있었다. 증산역로변 가로수는 ‘양산물금 양우내안애아파트 PARK AVENU’ 앞에 4그루가 만개하였다. 증산역로1 다섯 그루, 기영이숯불두마리치킨 앞, 하삼동커피 앞, 그램골프피팅 앞 1그루, DENT HERO 앞 2그루, 해림꽃게찜 부근 3그루가 각각 피었다. 벚꽃이 일찍 피는 또 다른 곳은 물금 신도시 부산대학로변 부산대학교 기숙사 앞, 녹색국토물관리연구소 건너편 화단에 있다. 2021년 3월 14일 저녁 무렵에 방문하여 살펴보았는데, 양산부산대학교 벚꽃은 부산대학로변 가로수가 아니고 부산대학 울타리 안의 화단에 있었다. 2. 제주도 왕벚나무 벚꽃은 매년 봄이면 화려한 꽃을 피워 전국적으로 벚꽃 축제가 많이 열린다. 제주도의 왕벚꽃축제, 진해군항제, 경주벚꽃축제 등은 엄청난 관광객이 몰린다. 전국의 지자체에서 가로수로 벚나무를 식재하여 매년 새로운 명소가 탄생하고 있다, 그러나 벚나무는 일본 사람들이 좋아하고, 일제 식민지 시절 많이 식재되었기에 일부 우리나라 사람들이 싫어하기도 한다. 벚나무가 일본이 원산지로 잘못 알려졌으나 제주도에 왕벚나무 자생지가 있어 한국이 원산지임이 확실하다. 1908년 4월 15일. 서귀포시 서홍리 소재 성당에 와 있던 프랑스 출신 타케(Emile Joseph Taquet) 신부가 제주도에서 채집된 표본을 당시 벚나무 종류 분류의 권위자인 독일의 베를린 대학 쾨네(Koehne) 박사에게 보냄으로써, 제주도가 왕벚나무 자생지임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그 후 미국의 하버드 대학 윌슨 박사가 일본에서 왕벚나무 자생지를 찾으려 했으나 실패하자 산벚나무와 올벚나무의 교배에서 생긴다는 잡종설을 발표하여 일본학자들의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1933년 4월 일본 교토 제국대학 고이즈미 겐이치 박사가 한라산 남쪽 숲속에서 왕벚나무를 찾아내고 확인, 발표해 오랫동안 학계에서 논쟁대상이 되었던 것을 해소시켰다. 제주도에서 현재까지 왕벚나무 자생지로 알려진 곳은 한라산 북쪽 지역이며, 이곳의 왕벚나무 중에서 가장 큰 나무의 높이는 10m가 넘는다. 제주도에는 여러 종의 벚나무가 자생하는데 이들을 구별 없이 제주어로‘사오기’ 또는‘사옥’이라고 부른다. 국립산림과학원 난대·아열대연구소는 해발 607m 높이의 제주시 봉개동 개오름 남동쪽 사면에서 265살 된 왕벚나무를 발견했다고 2016년 5월 3일 밝혔다. 제주 산간에서 최고령 왕벚나무가 발견되어 학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 나무의 나이는 목편을 추출·분석해 추정했다. 이 나무는 연평균 2.85±0.96㎜씩 생장한 것으로 분석됐다. 나무의 높이는 15.5m, 밑동 둘레는 4.49m다. 이 역시 지금까지 알려진 왕벚나무 중 최대 크기다. 이전까지 알려진 가장 크고 오래된 왕벚나무는 천연기념물 159호인 봉개동 왕벚나무 자생지의 3그루 중 한 그루다. 이 나무는 높이 15m, 밑동 둘레 3.4m, 수관폭 15m, 추정 나이 200살이다. 제주특별자치도에서 천연기념물(1964년 01월 31일 지정)로 지정된 왕벚나무는 제주시 명림로 584(봉개동)에 있다. 봉개동에 있는 왕벚나무 자생지는 면적 1,322㎡. 현재 이곳에는 동서로 100m쯤 떨어져 두 그루가 있는데 높이는 10m 정도이다. 전남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산24-1번지에 해남 대둔산 왕벚나무 자생지가 있다. 지정 면적은 32,397㎡, 1966년 1월 13일에 지정되었다. 대둔산 왕벚나무 자생지는 대흥사 뒷편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왕벚나무 수령은 알 수 없으며 나무의 높이는 15m, 둘레는 0.8m이다. (사)제주와미래연구원, (사)제주환경문화원, (사)서귀포문화사업회, 제주참여환경연대, 제주생태사진연구회는 2022년 4월 12일 공동으로 보도자료를 내고 논란이 된 국립수목원의 ‘왕벚나무 유전체 해독’ 연구와 관련해 “산림청장은 왕벚나무 생물주권을 포기한 국립수목원에 대해 즉각 진상조사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이들 단체들이 함께 목소리를 낸 데는 지난 4월 6일 국립산림과학원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장을 지낸 김찬수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 소장이 “국립수목원이 왕벚나무의 자생지를 폄훼하며 한국 고유 식물인 왕벚나무의 생물주권을 포기하고, 왕벚나무 자생지인 한라산의 위상을 떨어뜨렸다”고 주장한 기자회견이 발단이 됐다. 김 소장의 주장은 지난 2018년 9월 국립수목원이 발표한 ‘세계 최초 제주도 자생 왕벚나무 유전체 해독’이라는 보도자료 내용 중 ‘일본 왕벚나무와 제주 왕벚나무는 기원이 다르고 종도 다르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일본의 주장을 수용한 허위 발표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5개 단체는 “제주가 왕벚나무 원산지임을 부정하고, 일본의 왕벚나무로 인정한 것으로, 왕벚나무 생물주권을 포기한 것”으로 규정한 뒤 “이는 왕벚나무 자생지인 한라산의 위상을 격하시키는 한편 제주도민과 국민의 자존감을 흔드는 것”이라며 “실로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분개했다. 국립수목원의 ‘왕벚나무 유전체 해독’ 연구로 촉발된 제주 왕벚나무 자생지 논란이 급기야 한·일 양국의 자존심이 걸린 ‘생물주권’ 문제로까지 확전되며 국가 차원의 종합적 연구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벚나무는 높이 20m, 지름 1m까지 자라며 비중이 0.62 정도이고 잘 썩지 않는 성질을 갖고 있다. 조각재, 칠기, 가구, 공예재료, 인쇄용 목재 등으로 널리 쓰인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려팔만대장경 경판도 벚나무 목재를 사용하였다. 벚나무는 악기로도 쓰였다. 『악학궤범(樂學軌範)』에 보면 ‘나무의 잎사귀를 말아서 풀피리를 만드는데 지금은 벚나무 껍질을 쓴다.’고 했다. 한국의 옛 활인 국궁(國弓)은 벚나무와 뽕나무 목재로 만들었는데, 길이가 짧고 휴대하기 쉬웠다. 재질이 단단한 벚나무와 탄력 좋은 뽕나무가 만나 국궁이 태어났고, 작아서 휴대하기 쉬워, 달리는 말 위에서 활시위를 당길 수 있었다. 3. 양산의 유명한 벚꽃 명소 물금읍 황산공원 벚꽃축제가 4월 1일(토) 저녁 7시에 개막식을 연다. 물금읍 행정복지센터가 주최하고, 물금읍 주민자치회가 주관하는 축제이다. 벚꽃이 만개하면 엄청난 관광객과 차량이 밀려들기 때문에 물금읍 서부마을에서 벚나무가 늘어선 황산공원 낙동강 제방 도로에서 차량 통제가 이루어진다. 양산에서 통도사 방향으로 가는 35번 국도면 하북면 지역의 가로수 벚꽃길도 아름답다. 통도파인이스트CC 골프장 진입로변에 늘어선 가로수 벚꽃길 터널도 환상적이다. 수령이 오래된 벚나무가 늘어서 장관을 이룬다. 주차장 입구에는 벚꽃이 지고 나면 겹벚꽃이 피어 색다른 풍경을 연출한다. 진입로변에 주차하고 사진을 찍을 곳이 중간에 딱 한군데 있어 드라이브하면서 벚꽃을 감상할 수밖에 없다. 상북면 석계리 원적산 봉수대가 2022년 경남 기념물 제118호에서 국가 사적으로 승격되었다. 문화재청에서 경기 성남시부터 경남 양산시에 이르는 16개 봉수 유적을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사적 명칭은 ‘제2로 직봉’(第2路 直烽)이다. 양산의 원적산봉수대는 ‘제2로 직봉 양산 위천(渭川)봉수유적’이란 이름으로 포함됐다. 원적산 봉수대에 전망대가 있고, 주변은 아름다운 벚꽃으로 장식된다. 석계일반산업단지에서 봉수대로 올라가는 길도 벚꽃길이다. 우정공원 식당 주변에도 벚꽃이 아름답게 피어난다. 양산시 하북면 양산대로 2025-43, 하북면 용연리 801-1에 있는 향어회 전문식당이다. 독립된 방갈로에서 맛있는 향어회를 먹을 수 있다. 커다란 양어장이 있어 고기를 구경할 수 있다. 벚꽃의 명소는 끝없이 늘어선 가로수 벚꽃터널이 대부분이지만 천년고찰 통도사의 벚꽃도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산문에서 제2주차장으로 가는 자동차 전용 길에 작은 벚나무가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제2주차장에도 고목 벚나무가 여러 그루가 있으며, 경내 곳곳에도 벚나무가 많이 있다. 고색창연한 전각과 조화를 이룬 벚꽃은 불자와 관광객의 감탄사를 자아낸다. 통도사 부속암자인 극락암에도 고목이 된 벚나무가 환상적인 경치를 연출한다. 극락영지(極樂影池)라고 하여 영취산의 봉우리가 비치는 자그마한 연못이 있는데, 그 못 위에 경봉선사가 홍교(虹橋 : 무지개다리)를 가로질러놓아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었다. 영지 바로 옆에 있는 수령이 오래된 두 그루의 벚나무가 만개하면 많은 불자와 관광객이 방문한다. 고찰에서 특별한 사진을 찍기 위해 전문 사진작가와 모델이 오기도 하여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원동면 원리 원동역 근처는 매화꽃이 지면서 벚꽃이 바로 피어난다. 물금에서 원동면 원리로 이어지는 1022번 도로변 벚나무 가로수가 꽃을 피우면 매화꽃에 이어 연속적으로 꽃길이 이어진다. 벚나무 아래 조팝나무꽃도 함께 피어 장관을 이룬다. 원동면 원리에서 배내골로 연결되는 국지도 69호선도 벚나무와 키가 작은 조팝나무로 조화를 이뤄 꽃길로 단장된다. 배내골 고점교 단장천 주변 도로는 벚꽃길로 유명한데, 양산시내보다 기온이 낮아 벚꽃이 약간 늦게 핀다. 고점교에서 쌍미륵사 방향으로 벚나무 가로수가 늘어서 있다. 원동면 1022번 지방도, 69호 국지도의 가로수를 벚나무로 식재한 것은 박말태 전 시의원의 노력덕분이었다. 양산시 동면의 법기수원지는 일제강점기 1932년에 조성되었는데, 키가 큰 히말라야시다(개잎갈나무), 편백나무, 벚나무가 많아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국가보안시설로 상수원보호를 이유로 79년간 사람들의 접근을 차단하다 2011년 일부 개방했기 때문에 오염되지 않은 저수지와 숲으로 이루어진 청정환경을 보존하고 있다. 수원지 안의 벚꽃이 필 무렵에는 저수지 주변의 산이 온통 흰색과 분홍색의 산벚나무꽃이 피어 일대 장관을 이루어 상춘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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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박사, 화요칼럼, 2023 원동매화축제 평가1. 원동매화축제 재개 영남권을 대표하는 원동매화축제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중단되었다가 4년만에 재개되어 성공적으로 개최되었다. 화사한 매화꽃을 즐기는 관광객은 교통 체증에도 불구하고 원동면으로 몰려왔다. 주차장 부족으로 주차를 못한 관광객은 가야진사로 발길을 돌리는 안타까운 사연도 있었다. 경부선 원동역에 기차가 도착하면 많은 관광객이 쏟아져나왔다. 가야진용신제 보존위원회 사무국장인 박홍기 상쇠가 지휘하는 농악대가 원동역에서 관광객을 환영하였다. 철도를 이용하는 관광객이 너무 많아 농악대는 원동역을 마지막으로 빠져나오는 관광객까지 환영의 풍악을 울리지 못할 정도였다. 농악대는 공연하느라 금방 땀에 흠뻑 젖어서 중간에 잠시 휴식을 취할 수 밖에 없었다. 양산시의 대표축제로 외지 관광객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2023 원동매화축제는 3월 11일(토) ~ 12일(일) 양일간 원동면 소재지 원동주말장터 일원(원동면 원리 857-18번지 외), 신흥사가 있는 영포매화마을(원동면 원동로 2220)에서 열려 매화꽃을 보러온 관광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순매원은 매화꽃, 경부선을 달리는 기차, 시원하게 펼쳐진 낙동강의 모습을 동시에 사진에 담을 수 있어 외지 관광객이 방문하는 명소로 유명하다. 순매원 매화꽃 전망대는 최근 포토존도 새로 설치되어 면모를 일신하였다. 이 전망대는 방송국 카메라 기자가 필수로 들르는 코스이다. 필자가 토요일 전망대에서 기차 사진을 찍을 때 바로 옆에 MBC 방송국 카메라 기자 두 명이 와서 촬영하였다. 또한 필자가 순매원 입구로 갔을 때 채널A 방송 카메라 기자 두 명이 촬영하고 있었다. 한편 전국에서 온 많은 사진가들이 전망대를 점령하고 사진을 찍었다. 일반 관광객도 매화꽃, 기차, 낙동강을 휴대폰으로 연신 찍었다. 가족단위 관광객, 연인들은 순매원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열심히 찍었다. 전망대 데크가 아주 크게 확장되었지만 사진 촬영 명소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꼼짝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다. 전망대에서 순매원을 내려다 보니 많은 관광객들이 돗자리를 갖고와 매화나무 밑에 펼쳐놓고 앉아 쉬고 있었다. 순매원 정문과 후문으로 연신 관광객이 오르내렸다. 봄의 전령사인 매화꽃이 원동면 순매원 일대에 피기시작하면 아름다운 매화꽃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경부선 철도를 달리는 새마을호 기관사가 쓴 수필을 보면 경부선 철도에서 가장 먼저 매화꽃이 핀다고 하였다. 기차에서 보면 순매원의 매화꽃이 가장 먼저 피는 것으로 보이지만 양산시에서 가장 빨리 피는 매화꽃은 천년고찰 통도사의 자장매이다. 자장매는 한겨울인 1월 초순부터 꽃망울이 맺히고 중순부터 꽃이 피기시작한다. 2. 축제장 원동매화축제는 매화꽃의 명소가 두 군데로 나뉘어져 있어 이러한 사정을 잘 모르는 외지 관광객은 순매원만 보고 가는 경우가 많다. 메인 축제장은 원동 주말장터 일원이고, 또다른 축제장은 천년고찰 신흥사가 있는 영포리 일원이다. 무대는 원동주말장터에 설치되었고, 영포리에는 공연 무대가 설치되지 않았다. 영포리의 쌍포매실다목적광장 주차장은 잡상인들이 천막을 치고 점유하였다. 순매원은 봄이 되어 매화꽃이 피면 전국의 방송에 자주 소개되는 너무나 유명한 명소로 관광객이 넘쳐 주차할 곳이 없어 문제다. 반면 영포리는 매화꽃 명소지만 순매원에 비해 홍보가 덜 되어 조용하게 매화꽃을 감상하기에 좋다. 필자는 축제 첫날인 토요일에 원동면 원리의 주차장에 9시 40분경 주차를 하고, 무료 셔틀버스를 이용하여 영포리에 갔다. 이때는 관광객이 많지 않아 셔틀버스에 몇 명 타지 않았다. 영포리에는 명품 매화산책로가 있다. 매화산책로에 바로 올라가니 영포리 계곡의 앞산, 뒷산은 매화꽃 천지였다. 법관사 주변은 파란색 대나무, 하얀 매화꽃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웠다. 매화산책로에는 아직 관광객이 거의 없어 조용하였다. 유모차를 끌고 온 가족 두 팀이 아기 사진을 열심히 찍고 있었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의 모습이 귀여웠다. 산책로 주변에는 주민들이 매실 엑기스, 봄나물 등을 펼쳐놓고 팔고 있었다. 연세가 많은 한 할머니는 유모차에 팔 물건을 싣고와 난전을 펼치고 있었다. 축제의 필수 요소는 볼거리 즐길거리, 먹거리이다. 원동매화축제의 먹거리는 원동미나리, 원동딸기, 원동 토종 매실 엑기스 등이 있다. 원동매화축제가 열리기 전부터 원동미나리축제가 시작되어 매화축제가 끝난 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배내골에서 나는 고로쇠 약수도 특산품이다. 원동면에서는 딸기도 많이 재배하고 있는데, 딸기농장에서 딸기따기 체험도 할 수 있다. 평소에 원동딸기는 양산시종합농수산물센터, 탑마트 등에서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원동매화축제의 인기 요인은 청정미나리와 삼겹살을 먹을 수 있다는 점이다. 전에는 멀리 청도군 한재 미나리를 먹기 위하여 원정을 가야만 했다. 원동청정미나리는 청정 지하수로 미나리를 재배하기에 논미나리의 거머리가 없다. 원동매화축제는 먹거리가 다양하고 풍성하여 인기를 끌고 있다. 영포리의 매화꽃을 감상하고 셔틀버스를 타고 원리 삼거리에서 내려 축제 부스가 펼쳐진 마을로 들어갔다. 원리마을은 벽화마을로도 유명하다. 원동면사무소 근처에 차려진 축제장 부스를 사진찍으며 가다가 양산시 도시재생 지원센터 부스를 만났다. 도시재생 사업을 관광객에게 열심히 홍보하고 있었다. 김남용 센터장과 인사를 나누고 직원들과 반갑게 만났다. 김건우 연구원이 기념품으로 칫솔 세트와 컵을 선물로 주었다. 주차장에서 축제장으로 오는 제방둑에는 양산시 마을만들기지원센터에서 제작한 원동면 이야기가 각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를 담아 플래카드로 전시하고 있었다. 지나가면서 연로한 주민들의 옛날 추억담을 들어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원동마을 노명수 주민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남편 고향이 원동이라 50년 전에 여길 왔지. 남의 일도 하고, 나물 같은 거 캐다 팔고, 산에 가서 풀 뜯어다 팔고, 양산장에도 가고, 구포장에도 가고, 원동장도 가고, 진짜 닥치는대로 오만 거 하고 살았데이.” 원동역으로 올라가다가 이종희 양산시의회 의장, 정숙남 양산시의회 기획행정위원장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의장 전속 사진 기자가 필자의 휴대폰으로 기념사진을 잘 찍어주어 감사드린다. 3. 순매원, 기차, 낙동강 사진찍기 순매원 전망대에서 끈질기게 기다리며 기차가는 모습을 사진찍었다. 날씨가 더워서 땀이 줄줄 흐를 정도였다. 주말이라 그런지 기차가 주중보다는 자주 지나가서 다행이었다. 원동매화축제 기간 중에는 코레일에서 임시열차를 편성하여 더 자주 기차가 지나갔다. 과거에 KTX열차가 모두 원동역을 지나갈 때는 순매원 근처에서 KTX 열차 상행선과 하행선이 교행하는 희귀한 모습을 찍을 수 있었다. 이제는 울산통도사역으로 KTX열차가 주로 운행하기에 교행 모습은 더 이상 보기 힘들게 되었다. KTX 열차는 편성이 길기에 사진도 잘 나왔다. 요즘 무궁화호 열차는 편성이 짧아져 좋은 사진을 찍기가 힘들다. 순매원을 지나는 상행선 열차 기관사가 기적을 울리면서 지나갔다. 기적소리는 원동매화축제를 축하해주는 기쁨과 행운을 가져오는 소리였다. 어떤 기관사는 기적소리에 관광객이 좋아서 손을 흔드니 답례로 또 한번 기적을 울렸다. 원동매화축제 때문에 주말에 증편된 열차가 원동역에서 정차할 때 열차를 꽉 메운 관광객이 내리고 타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ITX 상행선 열차는 순매원 옆에서 서행을 하다가 결국 멈춰섰다. 매년 원동매화축제 기간 중 사진을 찍으면서 순매원 옆에서 열차가 정차한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열차에 탑승한 관광객과 일반 승객들도 순매원의 아름다운 매화꽃을 감상하기에 좋았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아무래도 열차가 빨리 통과하면 매화꽃을 순간적으로만 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다음에 상행선 KTX도 평소보다 약간 느리게 운행하였다. 열차가 서행하는 모습은 거의 보기 힘든 광경이다. 덕분에 사진을 마음껏 찍을 수 있었다. 전망대에서 사진을 많이 찍은 다음 순매원 정문으로 이동하였다. 순매원 입구 언덕에서 내려다 보며 사진 찍기 좋다. 기차가는 모습을 찍기 위해 계속 기다렸다. 마침 옆에는 젊은 부부가 어머니를 모시고 나와 매화꽃을 구경하고 있었다. 상행선 기차는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순매원을 지나간다. 하행선 열차도 갑자기 나타나 미리 준비하고 있지 않으면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 없다. 저멀리 가야진사 쪽을 쳐다보면 하행선 열차의 모습이 보인다. 마침 길게 꼬리를 무는 KTX 열차가 내려오고 있어 사진 찍을 준비를 하였다. 이제 원동역 근처로 접근하고 있을 때 옆에서 구경하는 젊은 부부에게 열차가 온다고 사진 찍을 준비를 하라고 미리 알려줬다. 열차가 지나간 뒤 사진을 잘 찍었느냐고 물어보니 남편은 잘 찍었다고 대답하였고, 부인은 어머니를 위해 양산을 들고 있다가 잘 찍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래도 알려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면서 자리를 떠났다. 오래 기다리며 기차 사진을 많이 찍고 순매원 안으로 내려갔다. 관광객들은 국수, 파전, 탁주를 사먹기 위해 길게 줄서고 있었다. 활짝 만개한 매화나무 밑의 탁자에 앉아 맛있는 음식을 먹고있는 관광객들은 행복해보였다. 매화꽃 사진을 찍으며 순매원 후문 쪽으로 올라갔다 .반대로 후문에서 내려오는 관광객이 많아서 걸어가는데 시간이 지체되었다. 다양한 색깔의 매화꽃이 피어 아름다웠다. 가족단위 관광객은 돗자리를 펴고 앉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4. 원동매화축제 문제점 축제의 가장 큰 문제점은 교통 접근성, 주차장, 셔틀버스 운행 등을 들 수 있다. 원동매화축제의 교통문제는 매년 되풀이 되는 지적 사항으로 개선되는 점이 보이지 않아 안타깝다. 양산시 물금읍에서 원동면 소재지로 연결되는 1022번 지방도로는 굴곡이 심해 위험한 구간이 많아 속도를 제대로 내기 힘들다. 화제리에서 원리까지 직선도로를 개설하는 계획은 김일권 시장 당시에 중단되어 현재까지 진척이 없어 아쉽다. 나동연 시장 재임 기간에 해결되어야 한다. 관광객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순매원 바로 옆에는 경부선 원동역이 있어 교통 문제의 숨통을 터주고 있다. 코레일에서는 축제 기간 중에는 임시 열차를 증편하여 관광객을 대량으로 실어날라 다행이다. 부산시민, 양산시민, 밀양시민, 대구시민, 수도권 시민들은 기차를 타고 오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정숙남 양산시의회 기획행정위원장은 물금역에서 기차를 타고 오니 5분 정도 걸렸다고 하였다. 만약 승용차를 타고 오면 정체가 심해 몇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러나 요즘의 관광 대세는 승용차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주차장 확보도 중요하다. 교통 지체를 뚫고 천신만고 끝에 도착하여 임시주차장으로 갔는데, 이미 만차가 되어 주차를 못해 애를 먹는 관광객도 많다. 축제를 벌여놓고 관광객 수용태세가 갖춰지지 않으면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주차장을 확보하는 방안을 수차례 제시하였는데, 1022번 도로의 굴곡이 심한 구간을 직선화 하면서 산을 깎아내어 순매원 가까운 곳에 주차장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 화제리에서 원리까지 직선도로를 신설하기 전에 경남도비를 확보하여 주차장을 마련하였으면 좋겠다. 필자가 축제 전에 지적한 순매원 전망대 아래 버려진 쓰레기도 축제 때 치우지 않고 그대로였다. 관광객이 던져버리는 쓰레기를 자주 수거해야 하겠다. 순매원 바로 뒤의 매화나무가 칡덩굴을 뒤집어쓴채 꽃을 피우지 못한 것도 그대로였다. 칡덩굴을 제거하고, 나무가 죽었으면 제거하고 새로 심어야 하겠다. 양산시에서 좀 더 신경을 쓰면 순매원 부근의 매화꽃을 더 오래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주차장이 순매원 축제장에서 멀어 걸어가는 구간도 길어 불편을 초래하였다. 영포리는 셔틀버스를 내리면 바로 매화산책로와 연결된다. 축제 전에 인터넷을 살펴보니 주차장에서 주차료, 셔틀버스 이용 요금을 받는다고 소개되어 있었는데, 전부 무료였다. 일부 블로거의 잘못된 정보로 양산시의 이미지만 나쁘게 되었다. 축제장인 원동주말장터에서 주민들이 운영하는 식당은 요금이 요즘 양산시내 일반 식당과 비슷하게 비싼 느낌이 들었다. 소고기국밥 만 원, 미나리파전 만 원, 오뎅 한 개 1천 원, 순대 1인분 5천 원, 막걸리 5천 원, 거기다 카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반면 순매원은 국수 5천 원, 파전 5천 원, 어묵 한 개 2천 원, 탁주 4천 원이었다. 원동매화축제 운영본부/ 안내에서 관광객 만족도 설문조사를 하고 있었다. 과연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 토요일 축제 구경을 하고 오후에 집으로 돌아올 때 물금쪽으로 가는 1022번 지방도는 정체가 예상되기에 영포리, 에덴밸리스키장으로 가는 도로를 이용하였다. 영포리 축제장에 가까워질수록 차량 정체가 심해졌다. 30분 이상 지체되었는데, 원인이 영포리 축제장 앞 도로에 양쪽으로 주차한 차량 때문에 교행이 쉽지 않아서였다. 또한 영포리에 승용차를 이용한 관광객도 많아서 주차할 곳을 못찾아 정체가 가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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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양산팔경 임경대 무장애 관광지 개통'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임경대는 휠체어, 유모차 접근이 제한되어 불편 양산팔경 중 제7경인 임경대는 한반도 지도처럼 보이는 낙동강의 시원한 모습, 아름다운 낙조를 볼 수 있어 수많은 관광객, 사진동호인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양산의 명소가 즐비한 원동면 배내골, 화제리, 신흥사, 매화꽃 명소인 순매원, 영포리를 방문하는 관광객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있어 임경대는 항상 관광객으로 붐빈다. 일반인들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조금 걸어가면 임경대 정자로 쉽게 갈 수 있지만 장애인의 휠체어, 유모차는 접근이 어려웠다. 산책로는 경사가 심하고 데크 계단이 있어 휠체어는 아예 접근이 불가능했다. 유모차는 산책로가 박석으로 포장되어 돌과 돌 사이가 틈새가 있어 유모차 밀기가 힘들었고, 잠자는 아기도 이동 중 요동이 심해 잠에서 깨어날 수 있어 문제였다. 천년고찰 통도사는 일찌감치 장애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무장애 접근로를 개설하여 대웅전까지 누구나 쉽게 관람할 수 있었다. 무풍한송로도 황토로 포장하여 휠체어가 이동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필자가 오래전에 가본 유명한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 숲길도 무장애 관광지로 조성되어 있었다. 양산시민과 외지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는 양산8경 임경대는 휠체어 접근이 불가능하여 많은 민원이 제기되었다. 임경대는 2012년 역사문화공원으로 지정돼 ‘장애인, 노인, 임산부 등의 편의 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에 따라 편의시설이 의무적으로 설치되어야 하는 곳이었지만 양산시가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임경대 주차장에는 대형차량 주차 5면, 일반차량 주차 30면이 설치되어 있었다. 장애인 주차구역은 페인트가 벗겨져 잘 보이지 않았고 산책로는 장애인들의 휠체어 이동이 불가능하여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빗발쳤다. 양산시 문화관광과에서 2022년 7월부터 임경대의 접근성을 개선함으로써 장애인과 유모차를 이용하는 가족단위 관광객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하여 전면적인 공사에 착수하였다. 12월 18일 개통을 목표로 무려 6개월간 임경대 접근을 완전 차단한 채 공사를 하였는데, 예상치 못한 난관으로 공사는 해를 넘겨 2023년에도 계속되었다. 1월 말에 개통한다고 예고하였다가 또 연장하여 2월 중순, 그리고 최종적으로 3월 1일에 개통한다고 하였다가 결국 3월 4일에야 정식 개통하였다. 필자는 임경대, 용화사 둘레길,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이 만든 임경대 폭포와 황산베랑길 자전거도로를 연결하는 둘레길, 임경사지, 이연상 군수 묘소, 양산숲길보전회에서 심은 꽃무릇 등을 보기 위해 수시로 임경대를 방문하곤 하였다. 공사가 벌어지고 난 후에는 입장을 차단하였기에 자유롭게 가볼 수도 없어 몹시 궁금하였다. 공사가 쉬는 날에 잠깐 들어가 보니 엄청난 규모의 대공사가 벌어지고 있어 깜짝 놀랐다. 2. 임경대 접근로 개설 공사와 꽃무릇 훼손 걱정 양산팔경 임경대를 사랑하는 양산숲길보전화에서는 임경대를 아름답게 단장하기 위하여 꽃무릇을 대량 식재하였다. 꽃무릇은 군락을 이루어야 아름답기 때문에 심상도 회장,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 조상현 사무국장, 일반 회원들이 합심하여 꽃무릇을 곳곳에 많이 심었다. 임경대 입구 담장 밑, 시비 주변, 화장실 옆과 데크 로드 사이 공터 등에 심었다. 또한 임경대 내부, 산책로 주변 담장 내외부 등에도 많이 심었다. 심상도 회장은 용화사 가는 방향과 임경대폭포로 가는 개울 주변에도 꽃무릇을 심었다.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은 임경폭포 주변, 황산베랑길로 내려가는 둘레길에도 곳곳에 꽃무릇을 심었다. 영남삿갓은 금낭화, 매화나무, 나리꽃도 심었다. 또한 황산잔도 옛길 주변, 동래부사 정현덕 공 송덕비 주변, 경파대 주위에도 꽃무릇과 나리꽃을 심었다.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식재하였기에 2023년에는 아름다운 꽃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임경대 무장애 통로 개설 공사로 차단한다는 플래카드를 봤을 때 꽃무릇이 걱정되었다. 처음 추측으로는 양쪽 진입 산책로를 휠체어가 갈 수 있도록 공사하는 줄로만 알았다. 공사 상황이 몹시 궁금하여 공사 쉬는 날에 들어가 보니 공사 규모가 엄청나게 커서 꽃무릇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공사는 양쪽 진입로는 물론이고 임경대 직전의 대나무 숲도 다 벌채하고 옆으로 길게 땅을 파놓았다. 왜 중간을 파헤치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공사 완료 후에 보니 휠체어가 안전하게 경사 없이 지그재그로 임경대 전망대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공사였다. 3월 1일에 완료한다는 공사 안내문을 보고 3월 2일에 임경대를 방문하니 역시 폐쇄되어 있었다. 김태정 문화관광해설사로부터 임경대를 개방했다는 반가운 연락이 왔다. 3월 7일에 임경대를 방문하여 입구 화장실 옆 공터, 담장 밑부터 심어놓은 꽃무릇을 살펴보니 잘 살아있어서 다행이었다. 사진을 찍은 다음 안내소에 가니 이형분 문화관광해설사가 근무하고 있어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공사가 완료되어 입구로 들어가면서 살펴보니 예상했던 것보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데크 로드가 완성되어 있었다. 일반인이 갈 수 있는 통행로와 장애인 휠체어, 유모차가 갈 수 있는 길로 구분되어 있었다. 필자는 꽃무릇의 안부가 궁금하여 최치원 선생의 시비부터 소나무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다행히 시비 주변은 공사 흔적이 없고 꽃무릇도 잘 살아 있었다. 산책로 주변 빈 공간에 양산시 문화관광과에서 심은 꽃무릇이 많이 보여 칭찬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데크 로드 개설로 양산숲길보전회에서 심은 꽃무릇이 없어진 곳도 많았지만 문화관광과에서 곳곳의 빈 땅에 꽃무릇과 다른 화초를 심어놓았다. 문화관광과 담당 직원의 센스가 덧보여 감탄사가 나왔다. 임경대 무장애 관광지 공사를 진행한 양산시 이창헌 문화관광과장, 담당 직원에게 감사드리는 바이다. 앞으로 데크 로드 사이 빈 땅이 있으므로 문화관광과에서 계속 심었으면 좋겠다. 임경대를 꽃무릇 명소로 만들면 꽃무릇 축제도 가능하다. 3. 양산숲길보전회에서 임경대에 꽃무릇 식재 임경대에 꽃무릇을 식재한 주요 활동 내용은 다음과 같다. 2020년 10월 25일, 양산숲길보전회 임경대 정기답사 때 심상도 회장, 조상현 사무국장과 회원들,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 곽종포 시의원이 함께 하여 꽃무릇을 심었다. 2021년 2월 9일 심상도 회장과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이 임경대에 꽃무릇을 심었다. 2021년 4월 15일~16일 심상도 회장과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이 임경대에 꽃무릇을 심었다. 2021년 4월 21일 심상도 회장,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 곽종포 시의원, 이기주 원동면장, 물금읍 거주 김미지 회원, 정덕유 회원, 원동면 주민들이 함께 꽃무릇을 심었다. 2021년 8월 30일 심상도 회장,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 김태정 문화관광해설사가 함께 곷무릇을 심었다. 2021년 9월 3일에는 심상도 회장과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이 꽃무릇과 금낭화를 식재하였다. 2021년 11월 13일에 심상도 회장,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 정덕유 회원은 임경대 입구 담장 사이에 키가 큰 억새를 심었다. 정덕유 회원이 낙동강 억새를 싣고 오는데 트럭을 제공하였다. 2021년 11월 28일 양산숲길보전회 심상도 회장과 회원,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이 임경대에 꽃무릇을 심었다. 4. 임경대 무장애 관광지 공사 후 과제 임경대 무장애 관광지 조성 공사가 완료되어 지난 3월 4일부터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해졌다. 2022년 7월부터 거의 8개월간 임경대를 폐쇄하고 출입을 금지하였다. 공사가 잘 마무리 되어 장애인과 유모차를 끌고 오는 가족단위 관광객도 편하게 임경대 정자까지 가서 한반도 지형처럼 생긴 낙동강의 시원한 모습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공사 전에는 전망대에서 낙동강을 조망하며 사진을 찍을 때 키가 큰 소나무 몇 그루가 전방 시야를 가렸는데, 이번에 보니 제거되어 전망이 확 트여서 좋았다. 그러나 아직 키가 큰 소나무가 두 그루가 시야를 가리는데, 이 소나무는 그대로 두고 윗부분만 약간 잘라내면 시야가 완전히 확보될 것으로 보였다. 전망대 밑에 명품 소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공사 중 전지를 너무 심하게 하여 솔가지를 대폭 잘라내 미관상 좋지 않게 보였다. 앞으로는 이런 식의 전지를 하면 절대 안 된다. 필자는 통도사 자장매, 홍매화, 수양매의 전지에 대해 누차 지적한 바 있다. 현재 소나무 모습은 앙상한 뼈대만 드러내고 있어 미관상 좋지 않다. 데크 로드 상단에 붙어 있는 주의 슬로프/ 계단 갈래길, 슬로프와 계단구간 이용시 주의 바랍니다. 이 표지판이 너무 작아서 정상인이 판별하기도 쉽지 않다. 크기를 대폭 확대하여 다시 제작하여 부착해야 하겠다. 휠체어에 앉은 장애인이나 유모차 이용자, 일반인 모두 쉽게 식별할 수 있도록 제작하여 슬로프 갈림길마다 붙여야 하겠다. 그동안 양산숲길보전회 심상도 회장과 회원들,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 곽종포 시의원, 이기주 원동면장, 정덕유 회원, 김미지 회원 등이 정성 들여 심은 꽃무릇이 이번 무장애 공사로 일부 훼손되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공사 기간 내내 마음 졸이며 꽃무릇의 안위를 걱정했는데, 3월 7일에 방문해보니 훼손되었지만 양산시 문화관광과에서 새로 꽃무릇을 심어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데크 로드 사이에 아직 빈 공간이 있으므로 꽃무릇, 금낭화 등을 심어주었으면 좋겠다. 양산숲길보전회에서는 임경대 꽃무릇 축제도 계획하고 있다. 금낭화도 개화 기간이 길기 때문에 식재하면 관광객들의 포토존으로 활용될 것이다. 이미 심상도 회장과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이 일부에 심어놓았다. 이번 무장애 관광지 공사에 수고한 양산시 이창헌 문화관광과장, 담당 직원에게 감사드리며, 향후에도 꽃무릇, 금낭화 등을 추가로 심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임경대 공원의 주인공인 최치원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전국을 유람할 때 임경대에 들러 아름다운 경치에 반하여 시 한 수를 읊은 것이 계기가 되어 양산팔경 임경대가 탄생한 것이다. 시비 공원의 주인공 최치원 선생 시비는 크기가 작고 볼품이 없다. 후세의 시인 시비가 더 큰 돌로 우람하게 만들어졌다. 주객이 완전 전도된 모습이다. 제일 큰 멋진 돌로 다시 제작하여 세워야 한다. 그리고 최치원 선생의 동상도 건립하여 세웠으면 좋겠다. 사천시는 최치원 선생 유적에 동상을 건립하였다. 최치원 선생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둘레길 이름도 ‘최치원 선생 둘레길’이라는 명칭을 붙였으면 좋겠다. 예를 들면 오봉산 둘레길 중 임경대 쪽인 서쪽의 둘레길을 ‘최치원 선생 둘레길’이라고 하면 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