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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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주군 삼남읍 상천리 통도사 국장생 석표/심상도 박사 화요 칼럼<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1. 장승의 의미 양산시청 쪽으로 가는 남부사거리의 화단에 양산의 도로원표가 있다. 양산으로부터 부산, 서울 등지로의 거리가 표시되어 있다. 옛날에 이러한 의미의 도로원표 구실을 한 것이 장승이라 할 수 있다. 장승은 통나무나 돌에 사람의 얼굴 모양을 새겨 마을 입구나 길가에 세운 목상이나 석상을 가리키는 신목(神木)이다. 마을의 수문신이나 수호신 역할을 한다. 또는 사찰이나 지역간의 경계표, 이정표(里程標) 등의 구실을 하며,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다른 명칭으로 장생(長栍), 후(堠), 장생우(長栍偶), 장선주(長先柱), 장선(長先, 長仙)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필자가 가본 경기도 연천군 군남면 옥계마을에는 전통적인 나무 장승, 현대적인 이정표가 공존하고 있었다. DMZ 접경지역 4개 시군을 잇는 대한민국 최북단 걷는 길인 ‘평화누리길’이 옥계마을을 경유하고 있었다. 전통테마마을로 지정된 옥계3리는 마을의 문화복지회관을 ‘평화누리길’ 도보여행자를 위해 게스트 하우스로 제공하고 있었다. 도로변에 있는 연천군에서 세운 평화누리길 이정표는 서울 64km, 신의주 313km, 두만강(선봉군) 550km, 강릉 166km, 한라산 530km 등으로 적혀 있었다, 신라, 고려시대에는 장생(長生), 장생표주(長生標柱), 목방장생표(木傍長生標), 석적장생표(石蹟長生標), 석비장생표(石碑長生標), 국장생(國長生), 황장생(皇長生)이라는 기록이 나타난다. 장승의 기원은 고대의 남근숭배(男根崇拜)에서 유래설, 사찰의 토지 경계 표시에서 나온 것이라는 장생고표지설(長生庫標識說), 솟대, 선돌, 서낭당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고유민속 기원설, 비교 민속기원설 등이 있다. 국장생 석표는 절 땅의 구역을 표시하는 경계표의 구실을 하였으며, 풍수지리 사상의 영향을 받아 모질고 사나운 운수를 막는 구실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시대에는 절의 경계 안에서는 생명 있는 동물의 사냥, 사람 죽이는 일을 금지했다. 석장생 석표는 단순한 절 경계 만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아울러 신성한 지역으로 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장승의 시원으로 알려진 장생표주가 보물로 지정된 것은 양산시의 통도사 국장생 석표(보물 제74호)가 유일하다.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것으로는 통영시 문화동 벅수(제7호), 통영시 삼덕리 부락제당 벅수(제9호), 나주시 불회사 석장승(제11호), 나주시 다도면 운흥사지의 석장승(제12호), 실상사 석장승(제15호)이 있다. 그리고 부안군 서문안 당산(제18호), 부안군 동문안 당산(제19호)의 장승, 남원시 서천리 당산(제20호)의 석장승, 영암군 도갑사 석장생(제21호), 순창군 충신리 석장승(제101호), 순창군 남계리 석장승(제 102호) 등이 있다. 전남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산114-4번지에 있는 죽정 국장생(지방민속자료 제18호)은 장방형의 자연 석재를 거칠게 다듬어 사용한 ‘사각 석비형’의 입장생이다. 군서면 구림리에서 도갑사 쪽으로 1km 쯤 되는 곳의 굽은 길 북쪽 숲속에 위치한다. 현재 장생의 위치는 도갑사의 옛길로 전하고 있어 절의 경계를 표시하는 기능을 위해 세워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중앙에는 해서체로 ‘國長生’이 음각되어 있다. 세로로 새겨진 이 국장생의 국자 크기는 26×27cm이다. 그리고 우측에는 대안6년(大安六年), 땅에 묻힌 하부에는 석표4좌(石標四坐)가 음각되어 있다. 이 국장생은 『동국여지승람』(1486년), 이중환의 『택리지』(1753년)에도 나온다. 전남 영암군 군서면 동구림리 433-3번지에 있는 소전머리 황장생(지방민속자료 19호)은 동구림리의 영암, 목포, 도갑사가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도갑사 방향 오른쪽 400~500m 거리 소전머리 대나무 밭에 위치하고 있다. 뒷면 모서리가 약간 떨어져 나가, 사각 석비형 입장생인 이 황장생은 높이가 1.2m,로 전면에 ‘황장생(皇長生)’이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다. 황장생(皇長生)의 접두사인 ‘皇’은 임금을 의미한다. 이것은 신라 고려시대에 왕명, 국명으로 세워지던 격이 높은 장생에 붙던 접두사이다. 이는 도갑사와 관련되는 도선국사가 신라 말기, 고려 초의 양 시대에 걸쳐서 역대 임금에게 생전, 사후에 지극한 존대를 받았음을 생각할 때 가능한 일로 추론되고 있다. 2. 넓은 농토 한가운데 세워진 울주 상천리 통도사 국장생 석표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남읍 상천리 산37-15에 있는 국장생 석표는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제 제2호로 지정되었다. 이 돌 비석은 통도사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세운 장생(長生 혹은 長栍)으로 장승이라고도 한다. 국장생이라고 한 것은 국가의 명으로 세워진 장생이라는 뜻이다. 통도사에서는 1085년(고려 선종 2년)에 석표 12개를 세웠으며, 현재까지 울주군 삼남읍 상천리와 양산시 하북면 백록리 국장생 석표 2기가 남아 있다. 상천리의 국장생 석표는 기다란 자연석의 앞면을 깎아 글을 새겼는데, 윗부분은 잘려나가 원래의 모습은 알 수 없다. 앞에 새겨진 글은 이두문으로 1085년(을축년) 5월에 상소한 대로 석표를 세우라는 나라의 명에 따라 그해 12월에 세웠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백록리와 상천리의 석표의 내용은 유사하다. 필자는 2020년 9월 3일에 상천리 통도사 국장생 석표를 답사하였는데, 그 당시 안내판은 글자가 대부분 지워져 있어 알아보기 힘들었다. 올해 2월 2일에 다시 방문해보니 안내판을 새롭게 설치하여 글자가 잘 보였다. 국장생 석표 뒤는 아담한 언덕이 있고, 몇 기의 묘가 보인다. 바로 옆에는 울타리를 경계로 ‘울산돼지인공수정센터’가 있다. 국장생 석표로 들어갈 때는 센터의 진입로 옆의 왼쪽 밭 가장자리로 들어가면 된다. 별도의 주차장은 없지만 도로변 갓길에 여유 공간이 조금 있어 바짝 붙여 놓으면 다른 차의 양방 통행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 석장생 석표의 경계선은 많은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정면 일부를 제외하고 거의 무너져 돌은 흩어져 있다. 천 년 전에 세운 석표답게 돌의 색깔은 고색창연하여 오래된 티가 났다. 울주군에서 세운 낮은 문화재 보호 철제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다. 석표 주변은 밭으로 넓은 평야지대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밭으로 전용하는 농토도 있고, 밭작물, 벼농사를 번갈아 하는 논도 있다. 석표와 도로변 사이의 농토는 지난 가을 옥수수를 심었다가 가을에 목초를 심었다. 석표 반대쪽의 도로 건너편에는 보리밭이 보였다. 석표에서 멀리 영축산 정상의 봉우리가 잘 보인다. 지도를 검색해보니 근처에 있는 농사용 저수지가 많았는데, 가장 가까운 곳에 밭고개지가 있으며, 약간 떨어진 곳에 상천지는 두 곳, 원종장지, 아주 큰 심천지, 새삼곡지, 사촌지가 있고, 삼동낚시터도 있다. 근거리에 마을 집, 상천마을회관, 상천노인회관, 몇 개의 공장이 있었다. 석장생 석표 반대쪽 도로변에서 멀리 눈에 잘 보이는 ‘재남농장’이 있다. 2007년 1월 오우회가 세운 재남농장의 돌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여기 친구의 꿈이 펼쳐진 곳 축산부국의 보금자리 다섯 친구 오우회가 대남농장 이름 돌을 세우니 그것은 또한 오우회의 변함없는 우정을 새김이라’. 만 14년이 경과하고 그동안 축산업의 어려움이 가중되었지만 오우회 농장은 아직 건재한 것으로 짐작된다. 상천리 석장생 석표가 처음 세워졌던 천 년 전이나 현재의 주변 모습은 물론 변화가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대부분이 농토라는 점은 여전하다. 통도사 산문에서 이곳 울주 상천리 통도사 석장생 석표가 세워진 곳까지 모조리 통도사 소유였던 것은 아니다. 통도사 사원전이 많았던 상천리의 중심에 석장생 석표가 세워졌을 수도 있다. 3. 울주 상천리 통도사 국장생 석표의 소개 글에서 나타난 오류 인터넷, 블로그의 여러 가지 글을 보니 통도사에서 하북면 백록리 통도사 국장생 석표까지의 거리가 4km, 2km 등으로 조금씩 다르게 나와 있었다. 필자는 확실한 거리를 직접 측정해보기로 했다. 백록리에서 통도사 산문까지 차량 네비게이션으로 운전하며 측정해보니 2.5km였다. 물론 네비게이션은 복잡한 하북면 순지리 시가지를 통과하도록 안내하였다. 필자는 네비게이션 안내를 따르지 않고 최단거리이며 편한 길인 35번 국도를 거쳐 하북교 다리에서 ‘착한고기식당’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양산천 강변길을 따라 산문으로 가는 코스로 재보니 2.5km였다. 성보박물관 앞 주차장까지는 4km였다. 백록리 석장생 석표에서 상천리 통도사 석장생 석표까지 네비게이션 안내 거리는 7.1km였다. 통도사 산문에서 상천리 통도사 석장생 석표까지는 5.6km였다. 통도사와 석장생 석표까지의 상호간 거리를 측정해서 글로 쓰는 것은 필자가 최초다. 옛날의 전통 농업시대 부자들은 농토를 많이 가진 땅부자들이었다. 그래서 부자들을 지칭하기를 집에서 다른 곳으로 출타할 때 자신의 땅만 밟고 간다는 말로 광대한 땅을 약간 과장하여 표현하였다. 300년간 부자를 지속한 경주 최부자도 역시 넓은 경주를 돌아다닐 때 자신의 땅만 밟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농토를 보유하고 있었다. 고려시대 통도사 스님들도 통도사에서 언양, 양산 방면의 상북면 쪽으로 탁발하러 다닐 때 통도사 땅만 밟고 다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도 통도사는 영축산 자락의 수백만 평의 너른 땅을 보유하고 있다. 통도사 말사인 내원사 역시 천성산의 대부분인 수백만 평의 땅을 소유하고 있다. 통도사 석장생 석표가 사천포천산에 2기를 세웠다는 고려시대 기록의 신빙성이 매우 높음을 알 수 있다. 포천산은 천성산을 말하는 것이다. 필자가 전에 친견한 내원사 주지 스님은 내원사 땅이 통도사보다 넓다고 말씀하였다. 필자가 사진에서 소개한 석비 앞의 하얀 둥근 물체는 곤포 사일리지라고 부른다. 사료작물을 곤포에 진공 저장 후 발효시킨 것이다. 곤포 사일리지는 1970년대 유럽에서 시작되었으며 사일로(silo)가 없는 농가에서 사료 저장방법으로 이용되었다. 한국에서는 2003년부터 등장한 작물 포장법으로 주로 사료작물을 재배하여 봄철에 수확하여 제조하거나 가을에 추수 후 볏짚을 말아서 만든다. 곤포 사일리지 제조에 적합한 작물은 보리, 목초, 생 볏짚 등으로 소먹이로 쓰인다. 역사 유적지를 답사할 때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만 볼 것이 아니라 역사적 의미와 배경, 현재와의 연관성을 연결하여 그 의미를 파악해보면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알 수 있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먼저 소개한 글에서 현재는 상황이 달라진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 상천리 통도사 석장생 석표는 대부분 주소를 울주군 삼남면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삼남면이 2020년 11월 1일 읍으로 승격되었으므로 삼남읍의 오류다. 또한 전에 쓴 어떤 글은 상천리 석장생 석표 주변에 축사가 많아 악취가 심하다고 소개하고 있는데, 필자가 2020년 9월 3일, 2021년 2월 2일에 방문했을 때 악취가 전혀 나지 않았다. 주변의 많았던 축사가 요즘은 대부분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유적지를 답사할 때 항상 발로 뛰며 세밀하게 관찰하고, 사진을 많이 찍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도 하면서 궁금증을 해소한다. 양산의 초중고생, 대학생, 양산시민들이 필자의 글을 읽어보면 우리 고장 양산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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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산성과 성황사의 공존/심상도 박사 화요 칼럼1. 서낭의 어원 유래와 도당굿 서낭의 어원에 대해서는 정확한 유래를 알 수 없지만 산왕(山王), 천왕(天王), 상왕(上王) 등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서낭당의 명칭은 지방에 따라 다양하다. 중부지방에서는 서낭당, 선왕당, 경북 영천 등지에서는 천왕당이라고 부른다. 영덕, 포항 등지에서는 골매기당을 ‘골매기서황’ 또는 ‘서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누석단(돌무더기)과 당나무 형태의 서낭당을 평안도 지방에서는 국수당, 함경도 지방에서는 국시당이라고 각각 부른다. 산왕설(山王說)은 서낭이 산신인 산왕에서 유래한다는 설이다. 산왕에서 음운변화 현상에 의해 점차 서낭이라는 말로 자연스레 변화되었다는 설이다. 상왕 역시 이와 유사한 맥락을 내포하고 있다. 이 설은 서낭의 어원을 밝히면서 단순한 낱말의 의미뿐만 아니라 서낭신앙이 산신신앙과 관련된 것임을 역설하는 것이다. 또한 서낭당을 천왕당이라고 하는데 산신신앙이 천신신앙에서 연유한 관계로 산신신앙과 계통이 같은 서낭당을 천왕당이라고 부르게 된 것으로 파악된다. 중국의 성황신앙과 한국의 서낭신앙은 중요한 내용이 다르지만 성황과 서낭이라는 발음의 유사성으로 인해 한문을 잘 아는 식자층에서 서낭을 한자어인 성황(城隍)으로 표기하고, 백성들은 서낭으로 쓰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이들 신앙이 혼재하여 서낭신앙과 성황신앙은 결국 의미가 같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성황 문제는 서낭을 한자로 표기할 때 중국의 성황을 차용한 것으로 보여 성황은 식자층에 의한 한자 표기에 중점을 두었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서낭신앙 내용에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조선시대 각 고을에서 관 주도로 이루어진 성황신앙에는 중국의 성황 요소가 일부 도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도당(都堂)은 중부 지역의 마을굿인 도당굿에서 모시는 마을 신이다. 도당은 마을주민을 수호하고 마을의 안녕, 농사의 풍년을 관장한다. 마을 사람들의 대동단결을 도모하며, 병환을 퇴치하고, 남녀의 성생활을 관장하기도 한다. 굿거리에서 나타나는 도당은 굿을 하는 집이 속해 있는 마을의 수호신 기능을 하는 지역신이다. 이때는 지역신(地域神)뿐 아니라 팔도의 산신을 모두 모시기도 한다. 경기도에서는 도당굿, 동해안에서는 별신굿, 남부지역에서는 당산굿, 황해도에서는 대동굿, 강화도에서는 고창굿이라고 하여 지역에 따라 명칭이 다르다. 도당(都堂)이란 당을 높여서 부르는 말로 으뜸이 되는 곳을 상징하기 때문에 마을에서 최고의 신격이 거처하고 있다. 경기도에서도 같은 마을굿이지만, 도당굿 외에 다른 이름으로 불리어지는 곳도 있다. 용산에서는 도당을 부군당이라고 부르고, 이곳에서 하는 굿도 ‘부군당굿’이라고 한다. 보광동 부군당굿 등이 이러한 유형에 속한다. 강화도 외포리에서는 ‘곶창굿’이라고 한다. 도당의 명칭은 경우에 따라 부군(府君)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도당과 부군이 같은 성격임을 의미한다. 도당은 주로 한강변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마을에서 모시는 신을 일컫는다. 반대로 한강변에 있는 마을에서 모시는 마을 신은 부군이라고 한다. 당을 일컫는 용어 역시 도당할아버지, 도당할머니, 산도당할아버지, 산도당할머니, 산도당, 부군님, 부군할아버지, 부군할머니, 산도당부군님, 도당산신, 도당천신, 부군마지 등 도당과 부군 두 갈래이다. 도당은 마을의 당에 모시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신체(神體)는 터줏가리 형태가 많다. 터줏가리는 일반적으로 서너 되들이의 옹기나 질그릇 단지에 벼를 담고 뚜껑을 덮은 다음 그 위에 원추형 모양의 짚을 틀어 엮어 씌운 형태를 취하고 있다. 더러 터주단지 안에 ‘토지지신(土地之神)’이라고 쓴 위패 또는 지위를 꽂아 놓거나 겉에 붙여 놓기도 한다. 보통 뒤뜰 장독대 한쪽에 놓여 있다. 2. 성황사와 성황신 성황신(城隍神)은 민간에서 숭배하는 마을의 수호신을 고려 때는 각 고을의 수령(守令), 향리(鄕吏)로 하여금 관내의 성황신을 제사하도록 제도화하였다. 제수 비용을 충당하는 위전(位田)을 지급하기도 하였는데, 전쟁에서 승리하였을 때 성황신에게 사례하는 제사를 올리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음사(淫祀)로 규정됨에 따라 점차 민간 신앙으로 정착하였다. 마을 어귀의 고갯마루에 있는 고목이나 돌무더기로 신을 상징하고 숭배하였으며, 옆에 당(堂)을 짓기도 하였음. 해당 고을의 지방관이나 연고가 있는 인물이 죽은 후 그를 성황신으로 모시기도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9권, 36장 뒤쪽에 전라도 곡성현 인물인 신숭겸에 대해 “세간에 전하기를 신숭겸은 죽어서 현의 성황신이 되었다고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신숭겸은 고려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된 공신이다. 성황(城隍)은 국방상의 요지(要地)에 축성(築城)하는 것을 말한다. 도성(都城)의 신(神)인 성황신(城隍神)의 이름으로 도시의 수호신(守護神)을 의미하기도 한다. 성황사는 성황신을 모시는 당우(堂宇)로서 성황당이라고 하며, 성황신묘(城隍神廟). 성황신사(城隍神祠)로 부르기도 한다. 중국의 경우 성황신의 제사는 남방 연안 지방에서 지방적 풍속으로 시작되면서 널리 보급되었다. 제사는 매년 5월 21일을 성황신의 탄생일로 하여 성대한 제사를 올렸다. 중국의 『진서(陳書)』 권제97 5장 뒤쪽 열전 67 마한조(馬韓조)에 나오는 우리나라 고대 삼한의 하나였던 마한의 사례는 다음과 같다. “국가에 부역이 있거나 성황을 수축할 적에 용감하고 건강한 젊은이는 모두 등가죽을 뚫고 그 구멍에 큰 밧줄을 꿰어, 막대기로 그 줄을 흔들며 하루 종일 소리를 지르면서 힘껏 일하는데, 이를 아프게 여기지 않는다.” 진서는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 사마의 시절부터 동진 공제 때 동진이 멸망할 때까지 진나라 역사 기록을 담은 역사서로 24사 중의 하나다. 당나라 태종이 명하여 방현령 등 21명의 학자가 646년에 편찬을 시작하여 648년에 완성하였다. 성황사(城隍寺)라는 사찰도 있다. 전북 부안군 부안읍 서림공원길 92에 있는 조계종 사찰로, 전북 고창군 선운사(禪雲寺)에 소속된 말사(末寺)이다. 성황산(城隍山) 기슭 서림공원 내에 있으며 전라북도 전통사찰 34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 충숙왕 때인 1314년에 처음 지어져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는 오랜 전통의 사찰로 지금의 법당은 1870년 이후 4번의 중건(重建)을 거쳐 건립되었다. 사찰로 들어서는 일주문 입구에는 '성황산 성황사(城隍山 城隍寺)'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사찰로 들어서는 법당의 대웅전 앞에는 삼층석탑, 요사채가 있고, 대웅전 뒷편에는 산신각이 있다. 조선 『중종실록』 중종 11년 6월 3일(계축) 두 번째 기사에 불도, 도교, 음사(淫祀) 중 성황당의 문제점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참찬관(參贊官) 김안로(金安老)가 아뢰기를, “음사라는 것은 외방(外方 : 지방)의 성황당(城隍堂) 같은 것입니다. 때때로 성황신(城隍神)이 내려왔다는 말이 나면 한길을 메우도록 사람이 몰려드니, 어찌 이와 같이 이치에 없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소격서는 예전부터 설치된 것이기는 하나, 모름지기 쾌하게 혁파해야 합니다.” 기사관(記事官) 유성춘(柳成春)이 아뢰기를, “근자에 이미 기신재를 혁파하여 모든 좌도에 관계되는 일이 다시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안로가 아뢴 것처럼 외방의 성황당의 일은 매우 허망한데도, 성황신이 내려온다는 때에는 사족(士族)의 남녀까지도 모두 모여듭니다. 그 중에서도 나주(羅州) 금성산(錦城山)의 성황이 더욱 심합니다. 신의 처의 아비 김숭조(金崇祖)가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있다가 갈려 온 뒤에, 금성산 성황사(城隍祠)에 내주는 쌀 60여 석을 거두어들이지 말 것을 청하여 윤대(輪對)에서 아뢰었는데, 아직도 시행하지 않습니다. 나라에서 성황당사(城隍堂祠)에 쌀을 내주면서 어찌 민속(民俗)의 폐단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신하들은 폐지를 건의하는데 왕은 반대하였다. 성황사 민속신앙은 백설들 사이에 널리 행해졌으며, 그 뿌리가 깊음을 알 수 있다. 3. 신기산성과 성황사 성황사(城隍祀)는 신기동 신기마을 뒤편 성황산(城隍山)에 위치한다. 성황산에는 신라시대에 쌓은 신기산성이 있다. 이 산을 북산(北山) 또는 서낭산[城隍山]이라고도 하기 때문에 이 산성을 ‘서낭산성[城隍山城]’이라고도 한다.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294호로 지산리 부부상을 촬영한 사진을 모시고 있다. 성황사는 성황산 정상부 바로 아래에 있으며, 지역의 수호신을 모시는 신사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양산군 산천조(山川條)에는 고려 태조 때 문하시중(門下侍中) 김인훈(金忍訓)이 죽어 성황사신(城隍祀神)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부터 신라말, 고려초에 양산의 대표적인 호족(豪族)이었던 김인훈이 성황사에 배향되었던 신임을 알 수 있다. 1906년(고종 43년)에 지역인인 배기윤(裵基允)이 사재를 들여 지붕을 수리했고, 1938년에 신기마을 출신으로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지낸 박상률(朴尙律)이 의연금을 모아 중수했으며, 박천수의 중수기명(重修記名)이 전해지고 있다. 1991년 지역 주민들의 진정으로 허물어진 사당을 개수했다. 성황사는 1년에 한 번씩 지역민들이 제향을 지내면서 지역주민의 정신을 결집하는 구심체 역할을 하고 있다. 박천수(朴天銖)의 『중수기』에 성황사와 관련한 다음과 같은 글이 전한다. “사신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본 산은 군 동쪽에 있는데, 군 동쪽의 5리라고 한 것은 성황이 아닌 듯하다. 만일 성황 같으면 반드시 신사의 기록문이 있을 터인데 증거하는 글이 아무것도 없고, 또 사신 김인훈 장군의 초상이라 하나 확실하지 않다.” 신기산성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성황사가 있는 양산 신기리 산성은 사적 제97호로 지정되었다. 양산시 동북의 성황산(해발 330.6m) 정상부에 띠를 두르듯이 돌로 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양산군 동북방 5리 되는 곳에 있다고 한다. 거리와 방위로 보아 이곳으로 추정된다. 신기산성은 둘레 4,368척, 높이 6척으로 성안에 우물과 6개의 연못, 2개의 군창(軍倉)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신기산성의 약수터는 양산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필자도 답사를 가면 반드시 약수를 마신다. 정확한 축조연대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없으나, 『삼국사기』에 463년(자비왕 6년) 왜구가 삽량성(歃良城)에 침입하였다가 패퇴한 사실과 673년(문무왕 13)과 687년(신문왕 7년)에 삽량주(歃良州 : 현재의 양산)에 축성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는 신기산성을 명확히 가리키는 내용은 아니지만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기산성과 성황사는 잘 어울리는 양산의 전통 민속신앙이다. 성황사 누석단은 성황사 아래 쪽에 형성되어 있는데, 돌무더기가 크지는 않다. 유교국가인 조선시대에 성황신, 서낭신 숭배는 억압을 받았지만 없어지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성황사, 신기산성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므로 아끼고 보호해야 마땅하다. 신기산성 내부는 일부 시민들이 농사를 짓고 있어 원형이 많이 파괴되었다. 성벽은 곳곳에 많이 남아 있는데, 복원도 고려해야만 하겠다.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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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상지역의 최고 수령 은행나무를 당산목으로 모신 용당마을/심상도 박사 화요 칼럼1.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끈질기게 이어져 온 서낭당 서낭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퍼져있는 대표적 민속신앙으로 그 기원이 오래되었다. 민초들이 의지하고 믿어왔던 서낭당은 현실적인 욕구의 발현이었다. 살고 있는 마을의 수호, 가정의 안녕, 개인의 복을 비는 발복, 병의 치료를 기원하는 치병 등의 간절한 소망이 반영되었다. 마을공동체의 행복과 더불어 개인의 평안을 기원하는 서낭당은 민중과 가장 밀착되어 있었다. 문명발달에 따른 근대화로 인하여 서낭당은 차츰 미신으로 치부되어 타파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은 농촌개발의 성공으로 현재까지 외국에서도 벤치마킹하고 있다. 반면 농촌지역의 전통적인 서낭당 신앙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고유의 민족 전통인 서낭당은 근대화의 물결에 휩쓸려 차츰 없어졌다.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주민들이 대거 도시로 이주하는 이농현상으로 주민이 감소하는 바람에 마을 공동체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도시에 집중된 사람들도 먹고살기 바빠 이웃에 누가 사는지 관심도 없었고, 새로운 도시지역의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으니 서낭당은 관심사에서 자연스레 밀려났다. 조사에 의하면 1970년대, 1980년대에 마을주민들이 마을의 당산목을 모시고 올리는 제례인 동제가 많이 없어지고 당집도 사라졌다. 강릉시 사천면 미노리 본동 서낭당의 당집과 신목인 소나무가 최근 사라지고 대신 태양광 집열판이 들어섰다고 한다. 동제를 지내지 않은 이후 마을에서 사고가 빈발하고 젊은 사람들이 죽는 경우도 있어 동제를 다시 지내는 마을도 있다. 어떤 마을에서는 동제를 주민들이 지내는 대신 인근의 사찰에 돈을 주고 부탁하기도 한다. 그래도 동제는 마을사람들이 돈을 걷고 정성을 들여 지내는 것이 마을 단합에 도움이 된다. 시골의 서낭당들은 동제를 주관할 수 있는 마을의 어르신인 노인 계층이 감소하면서 당집도 버려지거나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마을의 젊은이가 동제를 이어가기 힘든 절차가 번거로운 유교식 제의는 없애고, 누구나 자유롭게 절하는 방식으로 간소화할 필요가 있다. 축문 같은 것도 딱딱하고 알아듣기 힘든 한문 투의 문장을 버리고 마을주민의 소원을 한글식의 소원문으로 만들어 낭독하는 것도 권장할만하다. 마을의 젊은 세대를 동제의 주관자로 참여시키는 것이 매우 절실하다. 2. 수난을 겪은 당산나무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서낭당의 신목들이 도로구역에 포함되어 수난을 겪기도 했다. 당산나무와 함께 마을이 없어지기도 하였다. 양산에서도 북안마을의 당산목인 느티나무 노거수가 잘려 나갔다고 한다. 현재의 발전된 조경기술로는 다른 곳으로 이전하여 살릴 수 있었지만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될 당시 1960년대말에서 1970년대 초반에는 나무를 보호하겠다는 의식도 약했고, 기술과 예산도 부족하였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건국 이래 최대 건설 사업이었던 만큼 희생자도 많았다. 특히 충북 청원군 옥산면에서 옥천군 청성면 묘금리까지 이어지는 대전공구 70㎞ 구간이 난공사였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는 ㎞당 평균 1억 원이 들었다. 대전공구는 평균 1억 2천만 원, 대전에서 묘금리 구간은 1억 7천만 원의 공사비가 들었다. 당재터널 공사는 가장 난공사 구간이었다. 옥천군 금강휴게소 동남쪽 28㎞ 지점에 있는 당재터널 공사 지역은 토사로 된 연약한 퇴적층으로 발파작업을 하면 토사가 쏟아져 내려 공사가 지연되었다. 처음 20m가량 뚫고 들어갔을 때 바위가 떨어져 3명이 사망하고 1명이 중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조선일보에 의하면 당재터널 공사 현장 인근 마을주민들이 신령스런 나무로 모시던 당산나무인 느티나무를 벤 고속도로 공사에 파견나온 군 장교 책임자가 사고를 당하자 겁에 질린 작업자들이 도망가는 일이 있었다. 터널 입구에 있던 느티나무를 벤 조재삼 감독관이 사흘 뒤 교통사고를 당하자 괴담이 돌았다고 한다. 낙반 사고는 13차례나 이어져 모두 11명이 사망했다. 상하행선 합쳐서 1.1㎞밖에 되지 않는 짧은 구간이었지만 공사는 해를 넘겼다. 공사가 위기에 봉착하자 다급해진 현대건설의 정주영 회장은 공사 이익을 포기하고, 단양 시멘트 공장 라인 가동을 중단시키고 조강(早强) 시멘트 생산을 지시했다. 조강 시멘트는 가격이 세 배지만 48시간이면 굳는다. 이틀에 한 번 발파 작업이 가능해졌다. 또 운송 시간이 긴 열차 대신 비싼 트럭으로 시멘트를 날랐다. 근로자 수를 두 배로 늘리고 전표 대신에 현금으로 노임을 지불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근대화의 상징이 된 경부고속도로는 박정희 대통령의 치밀한 계획과 강한 의지, 정주영 회장을 비롯한 공사 현장 책임자와 근로자들의 노력과 희생 덕분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부실공사를 방지하기 위하여 공사 감리단에 현역 군인을 투입하여 규정과 원칙대로 공사를 진행하도록 지휘한 덕분에 최소한의 예산으로 짧은 기간에 경부고속도로를 완성하였다. 두 번째 당산나무 수난 이야기는 용계리 은행나무다. 임하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처했던 안동시 길안면 용계리 744번지에 있던 천연기념물 제175호(지정일 1966년 1월 13일)인 추정 수령 700년의 은행나무는 죽지 않고 극적으로 살아났다. 무려 23억 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4년간의 공사로 나무가 있던 자리에서 그대로 15m 정도 들어 올려 수몰을 피했다. 용계리의 당산나무였던 은행나무가 마을 사람들의 투철한 보호정신 때문에 살아난 이야기에 흥미를 느껴 필자도 몇 년 전 직접 방문하여 구경한 적이 있었다. 원래 용계리 은행나무는 용계초등학교 운동장에 있었던 당산나무로서 주민들이 의지하여 살아온 소중한 나무였다. 은행나무는 높이 37m, 가슴높이 둘레 14.5m에 달한다. 이 나무는 가슴높이 둘레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나무이며, 암나무다. 조선 선조 때 훈련대장이었던 탁순창(卓順昌)이 이곳에 낙향한 다음 은행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뜻있는 사람들과 행계(杏契)를 조직하여 매년 7월에 이 나무 밑에 모여서 하루를 즐겁게 보냈다고 한다. 탁씨의 후손들은 아직도 이 나무를 관리하고 있으며, 매년 한 번씩 간단한 제를 드린다고 한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밑부분의 속이 썩고, 윗부분에서도 썩은 가지를 통하여 빗물이 들어가 나무가 상하기 시작하였으므로 1982년에 외과수술을 실시하였다. 1987년 임하댐 건설로 이 나무의 9m 정도가 수몰될 처지가 되어 위기가 도래하였다. 마을주민들은 수몰을 피해 높은 곳으로 이주하였지만 은행나무는 물속에 잠길 판이었다. 주민들은 나무를 살리기 위하여 관계 당국에 청원하였다. 끈질기게 이어진 주민들의 간절한 청원 끝에 공사를 맡은 한국수자원공사는 정부의 지원을 얻어냈고 나무 이식 공사를 결정했다. 고규홍에 의하면 1990년부터 1993년까지 4년간에 걸쳐 높이 15m에 이르는 흙을 쌓아올려 제자리에서 들어올리는 공사를 하여 나무를 구했다. 다른 곳으로 옮겨 가는 이식(利殖)이 아니라 높이만 들어 올리는 상식(上植) 공사였다. 상식 공사는 H빔 공법을 이용해 나무를 조금씩 들어 올리는 방식으로 시작됐다. 나무는 원래 있던 자리에서부터 15m 높이까지 들어 올려졌고 나무 주변에는 자연스레 인공 산이 쌓였다. 나무를 들어 올리는 공사를 하면서 불가피하게 상당 부분의 뿌리와 나뭇가지를 잘라서 은행나무는 원래보다는 왜소해졌다고 한다. 나무를 살리기 위하여 23억 원의 많은 예산을 투입하고 4년간의 긴 공사 끝에 성공적으로 살려낸 것은 조경업계 세계 최초의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용계리 천연기념물 은행나무를 살린 것은 획기적인 일로 이후 노거수 보호와 이식에 관한 표준이 되었다. 3. 양산의 편들마을 당산제 양산시 용당동 1187번지에 있는 용당마을 당산나무인 은행나무는 수령 729년(2020년 현재)으로 웅상지역의 최고령 당산나무다. 보호수 고유번호는 12-14-2로 1982년 11월 10일에 지정되었다. 은행나무 높이는 22m, 나무둘레 6.3m로 노거수다. 관리는 용당마을 주민회에서 하고 있다. 은행나무는 고려말경에 심어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매년 정월 대보름 자시(밤 11시에서 1시 사이)를 기해 국태민안, 마을의 발전과 대동단결, 풍년기원, 권선징악을 위해 제를 올린다고 한다. 성역의 표시로 왼쪽으로 꼰 새끼줄을 당산나무와 당집에 두르고 잡귀를 쫒기 위하여 대나무 잎과 제를 올릴 소지 종이를 그 새끼줄에 묶어둔다. 옛날에는 자식이 귀한 가정에서 당산 어른께 정성들여 제를 올렸으며, 일제강점기 이후로는 마을에서 동중계를 조직하여 제를 올렸다. 디지털양산문화대전에 의하면 양산시 용당동 편들마을 당산의 당명은 야제당으로, 당집은 용당리 북쪽에 남향으로 1칸짜리 기와집으로 세워져 있다. 안에는 밤나무로 만든 목조상과 제기가 있다. 신목은 높이 15m, 둘레 4m의 은행나무인데, 밑 둘레에 돌무더기 제단은 없다. 용당주신, 산신을 모시고 있으며, 당집에서 기원하면 자식을 낳게 된다고 한다. 제관은 부정이 없고 맑은 사람에 한하여 뽑으며, 제일 일주일 전부터 목욕 재계하고 부정을 피한다. 보통 일반적인 제사와 형식은 동일한데, 제가 끝난 다음날 음복을 하고 회의를 한다. 제일은 음력 정월 14일 밤 12시에 하며, 제수로 술, 과실, 백병, 백반, 소고기를 준비한다. 경비로 각 호당 5,000원씩 갹출한다. 필자가 11월 28일에 방문했을 때 당집 앞에는 소주, 생수, 막걸리가 놓여 있어 마을주민들이 정성껏 모시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웅상지역의 7번국도 우회도로인 ‘통신사로 용당교차로’가 당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용당교차로에서 나온 차량들이 7번국도로 접속하는 도로가 2차선으로 정체가 심해 현재 4차선 확장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당집 바로 앞으로 4차선 확장이 끝나면 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은행나무를 쉽게 볼 수 있게 되어 접근성은 좋아지나 소음이나 매연공해가 당산나무에 약간 영향을 끼칠 것으로 전망된다. 은행나무는 유주가 발달하여 7개 정도 달려 있었다. 유주(乳柱)란 ‘젖기둥’이라는 뜻으로 모양이 마치 여인의 젖가슴과 닮았다고 해서 붙여졌다. 당산나무 밑에는 쉼터, 정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바로 옆에 빈집 창고가 있어 당산나무와 당집의 미관을 해치고 있다. 양산시에서 매입하여 건물을 철거하고 은행나무의 시식환경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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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국지도 60호선의 노선 변경에 대한 견해 / 양산화제인, 영남삿갓 시인 이시일양산시를 통과하는 국지도 60호선 노선 변경에 대해 요즘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양산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국지도 60호선은 교통 흐름이 원활하도록 많은 예산을 투입하여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경부고속도로 구 양산IC에서 양산천을 횡단하고, 유산공단을 지나 오봉산 터널을 관통하여 화제리 토교마을에서 낙동강대교를 건너 김해 상동지역으로 연결되는 매우 중요한 도로다. 낙동강대교 공사는 지금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이 길은 장래 양산의 교통 소통을 고려할 때 쉽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다. 이미 지나간 일은 덮어두더라도 앞으로 새로 건설할 도로는 신중하게 접근해야만 한다. 원래 이 길은 자동차 전용도로로 계획되었는데, 일부 주민의 반대로 베데스다병원에서 유산공단까지는 기존 도로를 이용하게 되어 교통정체가 발생하고 있다. 애초의 계획대로 자동차 전용도로로 만들었다면 대형 차량들도 막힘없이 이용할 수 있었지만 현재 상태로 건설되면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양산의 시가지를 동서로 관통하는 길에 남북의 간선도로와 만나 몇 개의 교차로가 생겨 소통이 원활하지 않다. 노선을 제대로 바로잡지 않으면 이 길은 영원히 굳어지고 제 역할을 못하게 된다. 충분한 고려 없이 지금 빨리 할수록 그 이후의 문제는 고스란히 양산의 몫으로 남는다. 화제리를 통과하는 길에 나들목이 세 곳 정도 생긴다고 한다. 하나만 있어도 되는데, 여러 곳이 생기면 토지수용도 많이 해야 하고 농토 역시 잠식되며 보상비도 증가한다. 월평오거리에서 원동면 화제리 구간 전체가 자동차 전용도로로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 국토의 효율적인 이용 차원에서 터널과 산지를 이용함이 마땅하다. 이시일 시인이 작성한 노선도 여기 제시한 노선도는 양산시내 구간은 고가도로로 건너고, 다음 오봉산에는 터널을 뚫어 낙동강대교를 연결하는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 이미 경남도 차원에서 준비가 다 되고, 토지보상에 들어가기 직전이라 하지만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연기할 필요가 있다. 2~3년 늦추더라도 바르고 쓸모있는 길을 만들어야 한다. 이 일은 양산의 국회의원, 양산시장, 도의원, 시의원이 앞장서고 양산시민들이 협조해 나가야 한다. 현재 진행 중인 기존 노선에 반대하는 모임에 가보면 객관성이 없다. 자신의 주장, 지역 이기주의식으로 회의 결론을 몰고 간다. 그래서 엉뚱한 결과를 내놓고 이렇게 해달라고 한다. 이건 우리의 길이 아니다. 우리를 위해 만드는 길도 아니다. 전체의 중지를 모아 가장 합당한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양산의 경부고속도로 아래로 나오는 곳부터 약간의 오름 고가교를 세워서 연결하면 바로 앞의 교차로 높이는 4m 이상이 될 것이고, 유산교 앞의 교차로는 경전철을 넘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약간의 내림과 휘어져서 쿠쿠전자 길을 들어가면 옛 양동마을에서 오봉산 터널을 뚫으면 된다. 화제 쪽에서는 오봉산 중턱의 산자락으로 낙동강대교와 연결하는 방법이 좋을 것이다. (화제인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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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금읍 남부마을의 당집을 수호하는 나비보살/심상도 박사 화요 칼럼1. 민속문화의 중요성 민속은 한 집단 구성원들이 주어진 여건에 알맞게 살아온 전통적 생활양식이라 할 수 있다. 민속문화는 우리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수많은 문화유산 가운데 주민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또한 민속문화는 주민들의 의식주 생활 외에도 사상과 신앙에서부터 산업, 예술, 풍속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 걸친 가장 소박한 민족의 문화적 근원이다. 지역문화의 특성이 고스란히 담긴 민속문화는 급격한 사회변동, 산업화의 물결에 휩쓸려 점차 소멸되어 왔다. 지역에 전래되는 민속문화를 발굴하고 귀중한 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역주민들에게 올바른 생활문화를 전승시켜나가기 위해서 민속문화를 체게적으로 연구하는 요구된다 하겠다. 양산의 각 마을마다 남아있는 당집과 신목을 잘 보호해야 이유는 마을 서낭당이 마을 주민들의 화합과 단합을 상징하는 문화 요소이기 때문이다. 경북 봉화군에 있는 ‘백두대간수목원’에 살던 호랑이 ‘두만’(2001년 5월생)이 지난 12월 20일 자연사 했다고 한다. 호랑이 평균 수명은 20살로 국내 사육 호랑이 중 가장 장수했다고 한다. 호랑이는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전통 신앙에서 산신령으로 대접받아왔다. 산신 신앙과 산악 숭배가 고대 북방계열의 사회에서 지켜진 것이 중국 사료인 후한서 동이전 예조(後漢書 東夷傳 濊條)에 나온다. ‘그 풍속은 산천을 존중한다. 산천은 각기 부계가 있어서 함부로 서로 간섭할 수 없었다.’ ‘범에게 제사를 드려서 그것을 신으로 섬긴다.’ 범을 산신과 동일시하여 숭앙한 원류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호랑이를 산신령으로 모시는 신앙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산이 지닌 위용, 신비감, 하늘로 치솟은 모양 등이 사람들 마음속에 자리 잡아 산악을 숭배하는 신앙이 싹텄다. 산악이 대부분인 우리나라에서 산은 신성한 곳이고 보호자이며, 죽은 후에 묻히는 곳이었다. 단군신화와 수로신화는 전형적인 산악 신앙의 전형적인 사례다. 우리나라의 산신 신앙은 수렵문화 단계에 이미 출현했다. 산신은 산의 일체를 관장하는 자연의 주인이다. 신체(神體)는 호랑이였는데, 동예의 호랑이 신 숭배는 이러한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단군신화에서 단군이 마지막에 아사달 산신으로 좌정했다는 기록을 보면 고조선 시대에도 산신 신앙이 유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골맥이 서낭 골맥이는 마을굿이나 동제를 지낼 때 풍년, 풍어를 기원하고, 액을 물리치는 것을 기원하는 마을 신이다. 어원의 유래를 보면 ‘골(谷)’, ‘액운을 막다,’ ‘마을을 수호하다.’라는 뜻을 지닌 ‘막다’가 전성된 ‘막이’가 합해진 형태다. ‘맥이’는 막이의 한글모음 ‘ㅣ(이)’ 모음이 역행동화된 것이다. ‘골맥이 서낭’, ‘골매기’, ‘골맥이 할배’라고도 하는 골맥이는 주로 경상도 지방에서는 쓰이는 말이다. 골맥이는 마을굿의 신앙의 대상이지만 동해안 지방에서는 각 마을의 신으로서 동제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골맥이신은 마을의 입향시조(入鄕始祖), 또는 죽어서는 마을의 수호신이 된 존재다. 김씨 할매, 이씨 할매 등으로 성이 붙어 인격신의 형태를 띤다. 할배나 할매는 조부(祖父)나 조모(祖母)의 뜻이 아니라 조상이라는 의미다.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골맥이신에 대해 마을 사람들은 나무, 바위, 당집 등에 신이 존재한다고 믿고 모시고 있다. 마을에 따라 골맥이신은 웃당(상당), 아랫당(하당), 중당이 있는 곳도 있다. 포항지역의 경우에는 웃당이 주로 소나무다. 포항에서는 매년 동제나 별신굿을 지낼 때 마을 안에 새로운 소나무 가지로 아랫당을 만들기도 한다. 이는 마을 신의 생산력을 높이는 행위로 보인다. 별신굿을 할 때 항상 굿당을 깨끗하게 하는 부정굿을 한 다음에 청좌굿을 한다. 골맥이를 모시는 굿은 이 굿거리부터 시작한다. 청좌굿을 무당들은 ‘골맥이 청좌굿’이라고도 한다. 청좌굿은 마을 당신(堂神)인 골맥이를 굿당에 맞이하는 굿거리이며, 부정굿과 함께 별신굿 전체의 도입부에 해당된다. 별신굿 전체를 청신(請神 : 신을 부르는 것), 오신(娛神 : 신을 찬양하고 즐겁게 하는 것), 송신(送神 : 신을 보내는 것)으로 구분할 때 청신 부분에 해당한다. 무속인들이 굿을 할 때 하는 본풀이 속에는 신앙이나 종교라는 관념을 넘어서서 인류가 남겨놓은 위대한 서사문학이 자리 잡고 있는 문학의 보고다. 고대 그리스의 일리아드나 오딧세이아처럼 고전적 값어치를 지닌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3. 남부마을 당집을 보호하고 전통을 잇는 나비보살 증산의 남쪽에 위치한 남부마을 당집은 증산 둘레길 바로 옆에 있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당집은 겉모습이 증산마을의 깔끔한 한옥 기와집과 달리 대충 지은 시멘트 건물로 지붕이 낮았다. 당집 근처 숲속에 슬레이트 조각이 쌓여 있었는데, 아마 당집의 지붕에 이었던 것으로 보였다. 석면 슬레이트 지붕은 비가 새고 인체에 해로운 공해물질을 함유하고 있어 인조 기와로 교체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당집은 자물쇠 두 개로 굳게 채워져 있었고, 문에는 한지에 한자로 쓴 국태민안, 입춘대길이 붙어 있었다. 나라가 태평하고 국민의 평안, 마을주민의 안녕을 기원하는 글이다. 남부마을 당집의 성격을 잘 알 수 있는 글이었다. 당집 주변은 낮은 돌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당집 바로 옆 외부에 작은 제단이 별도로 조성되어 있는 것이 다른 마을의 당집과는 달라 특이했다. 신목은 큰 소나무로 당집 왼쪽 뒤에 있었다. 당집 뒤에는 큰 바위 여러 개가 천연 담장을 이루고 있었다. 당집 뒤에 있는 소나무는 옆으로 쓰러져 작은 바위 위에 걸쳐 있었다. 당집의 오른쪽 숲속에는 여러 개의 바위가 있어 당집을 신성스럽게 만들었다. 둘레길에는 남부마을 당집이라는 안내 표지판이 붙어있는데, 백호봉과 정상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있다. 당집 뒤로 연결되는 등산로는 오르막으로 야자매트가 깔려 있다. 등산로로 올라가면 정상 못미처 최근에 건립한 2층 정자가 있는데, 계단을 따라 2층에 오르면 전망대로 황산공원과 증산마을, 남평마을 방향이 잘 보인다. 정자에서 백호등으로 올라가면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쌓은 증산성 잔해인 성벽돌이 흩어져 있다. 증산 둘레길에서 남부마을로 가기 위해 대나무 숲속의 오솔길로 내려갔다. 마을로 연결되는 길이 있었는데, 왼쪽으로 가니 전통우물이 나왔다. 오른쪽으로 가면 남부마을의 골목길이 연결되었다. 첫 번째 집에 오색천이 걸려있고, 커다란 대나무에 역시 흰색과 빨간 천이 걸려있어 무속인이 살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골목길로 계속 내려가니 남부마을의 집들이 나타났고, 새로 지은 카페 건물이 두 채 나타났다. 첫 번째 카페가 커피웰스, 두 번째는 카페MOM이었다. 4층 건물의 카페MOM은 임대라는 팻말이 붙어있었다. 남부마을 당집을 세 번 방문하여 사진을 찍었다. 남부마을의 무속인에게 당집에 관해 궁금한 점을 물어보기 위해 동짓날에 다시 방문하였다. 마침 집에 들어가니 손님 여러 명이 팥죽을 먹고 있었다. 필자에게도 먹으라고 권했지만 점심 약속이 있어 사양하였다. 집 옆에 신을 모신 단이 있었고, 불상도 보였다. 나비보살에게 우물에 관해 물어보니 옛날 우물이 원래 있었지만 사용하지 않고 방치되어 있었는데 새로 정비하고 돌담도 쌓았다고 설명해주었다. 나비보살은 7년째 이곳에 살고 있다고 하였다. 남부마을 당집에 관해 물어보았더니 역시 자신이 잘 모시고 있다고 하였다. 음력 섣달그믐 자시에 혼자 제를 올린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남부마을 주민대표가 참석했는데 최근에는 참석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나비보살이 모시는 신은 ‘국사당 깨비 작두신장’이라고 하였다. 나비보살에게 사주풀이와 신수를 보았다. 작은 깃발을 들고 점사를 보고, 신이 내려 몸을 잠시 떨며 풀이를 하였다. 필자의 살아온 내력을 귀신같이 잘 맞추고 미래를 예언해주었다. 인상 깊은 말은 운명을 개척하는 것은 조상탓을 하면 안 되고 자신의 노력에 달렸다고 하였다. 나비보살이 거주하는 곳은 물금읍 남부마을길 23이다. 차로 가면 카페MOM 앞의 도로변에 주차하고 걸어 올라가면 된다. 남부마을 당집 앞마당에는 어린 차나무가 8그루 정도 있었다. 누가 심었는지 궁금해서 물었더니 바로 나비보살이 심었다고 대답하였다. 나비보살은 증산에 있는 야생차나무 잎을 따서 차를 만들어 당집의 신에게 차공양을 한다고 하여 깜짝 놀랐다. 야생 차나무 보호에 앞장서는 나비보살이 고마웠다. 다방동, 증산의 야생차나무는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할 귀중한 생태자원이다. 양산시 산림과에서 보호 안내 표지판을 세웠으면 좋겠다. 양산시 공무원이 남부마을 부녀회장에게 당집에 관해 물어보았다고 하였다. 나비보살에게 당집이 다른 마을에 비해 초라하다고 느낌을 말하며 옆 동네 증산마을 당집처럼 깔끔한 한옥으로 개축해야 한다고 얘기하였다. 양산시에서 관심을 갖고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남부마을 당집을 새로 건립해주었으면 좋겠다. 마을의 발전을 기원하는 구심체 역할을 하는 당집을 통해 마을주민들이 단합하고 화합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오랫동안 마을주민과 함께 해온 당집은 전통문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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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의 독립운동 지사 안정섭선생/조국영 향토사 위원장양산독립기념공원 조성 및 기념관 건립사업이 양산시민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 모든 행정절차와 준비를 마치고 조만간에 착공을 앞두고 있으나 양산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야 할 자료나 소장되어야 할 사료들이 매우 부족하다, 윤현진 선생, 서병희 의병장 등 많은 양산지역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오늘의 영광이 있었지만 아직 서훈받지 못한 많은 독립운동 열사들의 자료를 발굴하고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안정섭(安廷攝) 선생은 자는 재정, 호는 송강이며, 관외부 주사를 역임하였다. 1886년 3월 17일에 양산군 물금면 물금리 406-72번지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고, 성년이 된 뒤에도 자택에서 화춘한의원을 경영하며 인술을 베풀어 지역주민들에게도 명망이 높았다. 흉년에는 어려운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구휼하였다고 한다. 양산독립운동사와 물금읍지에 의하면 화룡 출신 정규영(鄭圭永), 심상욱(沈相郁)과 함께 독립운동운동 군자금을 모금하였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이 사건은 흥업단(興業團) 국내 독립운동 군자금 조달에 관한 활동이다. 1920년 초 만주 길림성 무송현에 있는 군정서 부속 흥업단이 군자금 모집 계획을 세우고, 그해 11월 흥업단 단장 김호와 외교부장 김성규가 이만준(李萬俊)에게 20만 원의 군자금 조달을 위한 국내 거점 확보를 명하였다. 이만준은 경상도와 충청도 사정이 밝은 김인제, 최성기, 황문익과 함께 권총 3정, 탄약 90발을 가지고 순차적으로 국내에 잠입하여 대구, 밀양, 양산 등지에서 국내 거점을 마련하였다. 이때 손기성, 이재술, 김연환, 최명해, 심상욱, 박사숙, 정낙산, 손재현 등을 가입시켜 독립운동의 뜻을 모았다. 원동 출신 심상욱은 이만준과 함께 화룡 출신 정규영, 물금 출신 안정섭, 원동 출신 박대희, 양산면 출신 정순모 등과 뜻을 같이하였다. 1921년 4월 하순 우흥기, 이만준, 김인제, 김상욱, 안모 외 성명 미상 두 명과 함께 경상남도 밀양군 단장면 고례동 뒷산에서 비밀리에 만나 김인제, 심상욱, 안모 등이 시례동 부자인 손모 씨에게 군자금 헌납 모금계획을 세웠다. 세 사람은 손모 씨 자택을 습격하여 권총 2발을 발사하였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이때 참여한 안모 씨가 안정섭이란 이야기가 전해진다. 심상욱과 안정섭은 막역한 친분으로 오랫동안 교류하면서 심상욱이 만주로 망명할 때까지 관계는 계속되었다. 심상욱과 같은 원동 선리 출신 박대희는 1921년 약종상인 정남서에게 군자금을 권유하다가 말을 듣지 않아 권총을 쏘아 총상을 입히기도 하였다. 일제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박대희는 심상욱과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으로 활약하였다. 그 사건 이후 안정섭 선생은 지속적으로 은밀하게 군자금 조달에 협력하였다. 1941년경 군자금 모금책인 물금면 가촌 김모 씨에게 비밀리에 군자금을 전달하였는데, 김모 씨 검거로 인해 자금 출처가 밝혀져 자택에서 체포되어 양산경찰서에서 대구 고등경찰로 이감되었다. 일제 경찰들의 혹독한 고문으로 인하여 허리와 다리가 골절되어 하반신 불구가 되었다. 더이상 수감이 어려워지자 석방되었으나 귀가한 지 7일 만인 1941년 음력 5월 7일 자택에서 운명하였다고 유족은 전한다. 순국하기 전 마지막 영정사진을 찍을 때도 가족이 부축하여 겨우 사진을 촬영하였다고 한다. 장지는 어곡으로 정하여 상여가 출상하였는데, 장례에 따르는 조문객 수천 명이 길을 메웠다. 일제 경찰은 조문객을 따라다니며 감시하였다고 한다. 일제로부터 독립한 해방 이후 선생의 자부인 윤정년 여사가 시부모를 잘 봉양한 공으로 효부상을 받았다고 한다. 양산군 물금면 어곡리 덕호동 좌상에 안장하였다. 2007년 어곡공단 확장으로 인해 신불산 공원묘지에 이장하였다. 후손으로는 손자 안영태 씨가 서울에 살고 있다. 안정섭 선생은 자신의 목숨과 재산을 바쳐 독립운동을 하였지만 입증자료 미비로 아직까지 독립투사로 서훈받지 못하여 후손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루빨리 서훈받아야 마땅하다. 와이뉴스 향토사위원장 조국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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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금읍 증산마을의 차나무로 둘러싸인 서낭당 / 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1. 우리나라의 성주 신이 된 중국의 강태공 성주는 집 지키기 신 가운데 으뜸 신으로 집안의 길흉화복을 관장한다. 집안의 으뜸 신답게 그 자리도 보통 집의 중심이 되는 대들보에 자리 잡는다. 그래서 상량신(上樑神)이라고도 한다. 한자로 성주(城主), 성조(成造)라고 표기한다. 우리나라 성주 가운데는 중국의 강태공이 등장하기도 한다. 중국에서도 성주는 주로 강태공(姜太公)으로 상량에는 강태공재차대길(姜太公在此大吉), 강태공재차제신퇴위(姜太公在此諸神退位) 등의 문구를 적는다. 그 뜻은 강태공이 상량에 깃들어 있어 길한 일이 많이 생기고, 강태공이 머무르고 있으니 모든 잡귀들은 물러가라는 뜻이다. 강태공의 본명은 강상(姜尙)으로 선조가 여(呂) 땅을 식읍(食邑)으로 받았다고 하여 여상(呂尙)이라고도 불린다. 주나라 문왕이 강태공을 초빙하며 선왕 태공이 바라던(望) 성인(聖人)이라고 일컬었기 때문에 ‘태공망(太公望)’이라는 이름도 얻었다. 강태공은 젊어서는 공부에 힘쓰고 도무지 집안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늘 그런 상태이니 가정형편이 매우 어려웠다. 극진(棘津)이라는 나루터에서 지내며 하는 일이라고는 독서와 낚시뿐이었다. 강태공의 아내는 이런 남편을 바라보고 살다가 지쳐서 달아나고 말았다. 강태공은 일흔두 살이 될 때까지 매우 빈곤하게 살았다. 낚시를 하면서 고기를 잘 잡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드리운 낚시에는 바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목적은 물고기를 낚는 데 있지 않고 세월을 낚았던 것이다. 강태공이 낚시를 하는 목적은 물고기를 잡는 게 아니라, 기회를 기다린 것이었다. 자신의 능력을 알아주는 귀인을 만나서 자신의 포부를 마음껏 펼쳐 세상을 다스릴 기회. 시간을 얻기 위해 오랜 기간 인내를 하였다. 강태공은 자신의 능력을 알아보고 발탁해줄 제왕을 만나기 위해 기나긴 인고의 세월을 견딘 것이다. 강태공의 능력과 명성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 소소한 출세의 기회는 있었지만 출사를 하지 않고 학문에 힘썼다. 생활의 궁핍함을 견디며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드디어 기다린 보람이 있어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다. 백수로 지내며 낚시를 하던 중 그 근처에서 사냥을 하던 서백(西伯) 창(昌), 즉 훗날의 주나라 문왕의 눈에 들어 벼슬자리에 얻게 되었다. 서백은 자신을 보좌할 인재를 구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다가 어느 날 사냥을 가기 전에 점쟁이에게 점을 쳤는데, 이런 점괘가 나왔다. “이번 사냥에서 사로잡을 것은 용도 이무기도 아니며, 호랑이도 아니고 곰도 아닙니다. 임금을 보좌할 신하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냥길에 나선 서백이 도중에 강태공을 만났다. 두 사람은 첫 만남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눈 끝에 드디어 의기투합했다. 강태공은 그길로 서백의 신하가 되어 훌륭하게 보좌하였다. 강태공은 그 뒤 서백 창이 은나라의 주왕에 의해 유배되자 미녀를 바치라는 조언을 하여 유배에서 풀려나게 하는 등의 활약을 한다. 후에 서백은 주 문왕이 되었다. 강태공은 문왕과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무왕까지 계속 섬기며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하여 나라를 융성하게 하였다. 나이가 여든을 넘긴 뒤에도 임금과 신하들을 독려하며, 은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4만 5천 명의 병력으로 은나라 72만 대군을 격파했다고 한다. 그는 그 공로로 동쪽 땅 제(齊)나라를 다스리는 제후에 봉해졌는데, 길쌈을 장려하고 생선, 소금을 유통시켰으며, 인적 교류를 활성화하여 제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2. 서낭당의 신이 된 강태공의 처 마씨 서낭신앙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중국 강태공의 처 마씨와 연관되는 전설도 있다. 서낭당의 돌무더기는 돌무덤이라고도 한다. 서낭당이 중국 주나라 강태공의 부인 마씨(馬氏)가 숨진 뒤 만들어진 무덤이라는 유래담도 있다. 강태공이 일도 하지 않고, 오로지 책만 읽으며 낚시에 빠져 있을 때 부인인 마씨가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집안을 돌보지 않고 한량처럼 사는 남편 대신 아내가 살림을 책임졌다. 수십 년이 지나도 돈을 벌어오지 않는 남편의 무책임에 참다못한 아내는 집을 나가버리고 말았다. 강태공이 불우할 때 가출한 그의 처 마씨는 남편이 주나라 재상이 되어 입신출세하자 멀리서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남편을 찾아가 어려운 처지를 호소하며 함께 살기를 간청하였다. 그러나 태공은 마씨를 냉정하게 대했다. 하인에게 물을 한 그릇 떠오라고 시켰다. 마씨가 보는 앞에서 일부러 물을 쏟아버렸다. 마씨에게 엎지른 물을 그릇에 다시 담아보라고 요구하였다. 마씨는 얼굴을 붉히며 다시 담을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태공은 일단 엎지른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고 면박을 주며 함께 살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마씨는 모욕을 당하자 심한 수치감에 몸을 떨었다. 엎질러진 물은 다시 그릇에 담을 수 없다는 의미로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이라는 고사성어가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한 번 저지른 일은 되돌릴 수 없다는 의미다. 마씨는 강태공과 함께 끝까지 고생을 하지는 못했으나 오랜 기간 살림살이를 도맡아 한 공은 있다. 강태공은 마씨가 미웠지만 남자로서 전처가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돈을 주어 배려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어려울 때 함께 한 조강지처로서 분하고 애절한 마음을 참지 못한 마씨는 죽어서 서낭당의 신이 되었다고 한다. 마씨가 엎지른 물을 담지 못하고 숨졌기 때문에 그녀의 기갈(飢渴 : 배고픔과 목마름)을 풀어 주기 위해 서낭당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돌을 던져 탑을 쌓고, 침을 세 번 뱉는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강태공과 마씨 부인의 전설은 서낭당의 누석단 형태나 신앙 의식에 기반을 두고 그럴듯하게 꾸며낸 것으로 추정된다. 마씨 부인과 관련된 전설이어서 서낭당을 마씨 사당이라고도 한다. 3. 둘레길 때문에 분주해진 증산마을 당집 양산시 물금읍 증산리의 마을 사당은 동부마을 서낭당과는 확연하게 대비된다. 동부마을의 서낭당은 서낭당의 모든 특징적인 요소를 골고루 갖추고 있는데, 증산마을 서낭당은 당집과 신목으로 단순하게 구성되어 있다. 신목은 여러 그루의 거대한 소나무가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다. 해발 133m의 나지막한 증산은 물금 신도시의 한가운데에 있다. 자칫하면 신도시 조성할 때 없어질 뻔했으나 용케 살아남았다. 물금 신도시는 모래 성분이 많은 땅으로서 지반이 약하기 때문에 논과 밭을 매립하여 성토 후에 아파트를 건립하였다. 매립에는 엄청난 토사가 필요하므로 오봉산 중턱의 야산을 깎아서 매립토로 사용하였다. 증산은 신도시 바로 옆에 있어 산을 깎으면 매립토로 사용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동원과기대 부지정리사업에서 나온 둘과 토사도 물금 신도시 공사의 매립토로 사용하였다. 증산이 살아남은 것은 산신령, 서낭신의 도움으로 여겨진다. 물론 증산마을 주민들도 증산 보호에 앞장섰을 것이다. 증산을 둘러싸고 우후죽순처럼 아파트가 들어섰다. 신도시 완성 후 입주한 아파트 주민들은 증산의 둘레길을 걸으며 휴식을 취하고 건강을 다지고 있다. 물금 신도시가 들어서기 전의 증산마을 당집 앞은 깊은 산속의 한적한 곳이었다. 현재는 물금 주민들이 하루종일 산책하는 인기 둘레길로 변신하여 당집 앞을 무수히 지나다니고 있다. 증산은 증산마을 사람들의 공동묘지 역할도 하고 있다. 옛날 증산 산자락과 그 아래 평지에 터전을 잡고 농사지으며 평생 살던 주민들이 사후에 증산에 묻히게 되었다. 증산 정상으로 나있는 등산로는 공동묘지 옆을 지나가게 되어 기분이 스산해진다. 산 중턱으로 나있는 둘레길은 공동묘지가 드물게 나타난다. 증산은 임진왜란 당시에 왜적이 쌓은 성이 있어 증산왜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왜성은 1597년(선조 30년) 왜군이 남해안까지 후퇴 후 이곳의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방위선을 구축하기 위하여 왜장 모리(毛利秀元)와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가 축성하였고, 구로다(黑田長政) 군대가 일시적으로 머물렀던 곳이다. 증산마을 당집은 지난 9월 3일의 태풍 마이삭, 9월 7일의 태풍 하이선의 연이은 내습으로 당집에 있는 신목 소나무 가지가 부러지는 피해를 입었다. 현재도 부러진 소나무가 누렇게 변해 나무에 그대로 달려있다. 태풍 때문에 당집의 오른쪽 기와지붕도 일부가 무너졌는데, 아직까지 수리를 하지 않고 있어 문제다. 하루빨리 당집 기와를 원상 복구하길 바라는 바이다. 당집은 철망으로 보호받고 있는데, 주변은 야생 차나무가 많아 보호해야만 한다. 철망 안에 있는 차나무는 증산마을 주민들이 모두 베었지만 뿌리가 살아있어 매년 다시 자라고 있다. 당집 오른쪽 철망 밖에는 많은 차나무가 자라고 있다. 신우대와 대나무도 밀생하고 있다. 야생 차나무는 증산의 자랑이자 매우 귀중한 생태자원이다. 신기산성 산책로에 삼성동행정복지센터와 주민들이 힘을 합쳐 녹차산책길을 만든 것처럼 증산마을 당집 주변, 둘레길 주변의 차나무를 적극적으로 보호할 필요가 있다. 증산의 물금LH천년나무아파트 바로 뒤의 증산둘레길 중 남부공원삼거리 부근에 차나무를 식재하여 공원을 만들었다. 옆에는 털머위를 심어 환경미화를 하였다. 둘레길 위 대나무 숲속에 야생 차나무가 자라고 있다. 증산의 차나무는 기후와 환경여건에 알맞기 때문에 잘 자라고 있다. 차나무를 잘 보호하여 생태자원화 하고 관광 명물로 만들어야 하겠다. 신기산성 산책로처럼 증산 둘레길에도 식재하고, 안내판을 설치하여 적극적으로 홍보할 필요가 있다. 증산마을 당산 주변의 차나무는 마을 주민과 둘레길을 걷는 아파트 주민들이 잘 보호해야만 한다. 당산에 제를 올릴 때도 이곳에서 자라는 찻잎으로 차를 만들어 술과 함께 올리는 것은 금상첨화라 할 수 있다. 당산을 단순한 미신으로 치부하지 말고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 신앙으로서 마을 공동체의 안녕과 주민화합을 도모하는 순기능을 인식해야 한다.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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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금읍 동부마을 서낭당의 중요성1. 서낭당, 성황당의 역사와 유래 서낭당은 한자어 성황당(城隍堂)에서 나온 말이다. 서낭당은 첫 번째로 마을 어귀나 고갯마루, 산허리 등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신앙의 대상이 되는 돌무더기를 말한다. 둘째, 오래된 나무에 당집이 결부되어 있거나 당집 단독으로 서낭당을 삼아 마을공동체 신앙의 수호신으로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 돌무더기는 오래된 나무와 함께 서낭당을 이루기도 한다. 이러한 형태는 거의 사라지고 있어 보기 드물다. 돌무더기로서의 서낭당과 마을 당집 형태의 서낭당은 신앙 형태에서 차이가 있다. 돌무더기가 있는 서낭당은 주로 개인의 기복을 비는 신앙이다. 이곳을 지날 때는 그 위에 돌 세 개를 얹고 세 번 절을 한 다음 침을 세 번 뱉으면 잡귀가 따라붙지 않고 재수가 좋다는 속신이 있다. 돌무더기로 이루어진 서낭당은 마을의 경계를 표시하거나 전쟁이 터졌을 때 외적을 물리치기 위한 석전(石戰)에 대비하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도 있다. 마을 제당의 당집 형태의 서낭당은 마을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는 신앙이다. 마을 당집에서는 마을 전체 주민의 무병장수와 행운을 빌고, 가뭄과 홍수와 같은 천재지변, 역병(요즘의 코로나 19 같은 전염병) 등의 피해를 막기 위해 제례를 지냈다. 마을 외부에서 들어오는 액(厄), 질병, 재해, 호환(虎患 : 호랑이에게 당하는 화) 등을 막아주는 마을수호, 주민의 현실적인 생계 문제 해결에 목적이 있었다. 서낭제는 가정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지내는 제로 주부가 주관하는 경우도 있었다. 정초에 마을 근처 서낭당에 떡과 과일 등의 제물을 바치고 정화수(井華水)를 떠 놓고 초저녁에 지낸다. 마을에 사는 무속인이 서낭제를 맡아서 지내기도 하였다. 어떤 마을에서는 노인회가 주관하기도 하였으며, 마을에 오래 거주한 대표적인 가문에서 맡아 지내는 경우도 있다. 우리 나라에 서낭신앙이 전래된 것은 고려 문종 때 신성진(新城鎭)에 성황사(城隍祠)를 둔 것이 서낭의 시초라 한다. 그 뒤 고려에서는 각 주부현(州府縣)마다 서낭을 두고 이를 극진히 위하였다. 고려 고종은 중국의 원나라가 침략했을 때 이를 물리친 것이 서낭신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여겨 극진히 모셨다. 서낭신앙의 기원에 대해서는 특히 외형적 특색을 보이는 돌무더기 형태와 명칭에서 크게 두 가지로 생각되어 왔다. 우리나라에서 고유의 민속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보는 자생설, 몽골이나 중국에서 전파되어 온 것으로 보는 전래설이다. 조선시대에 서낭신은 국가와 마을의 수호신으로서 신앙의 대상이었다. 조선시대 서낭은 나라에서 행하는 국행(國行)과 민간 신앙으로 구분하여 거행하였다. 국행 서낭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호국(護國)이라는 글자를 붙였다. 태조 이성계는 왕이 된 후에 전국 산천의 서낭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태종은 백악(白岳)서낭, 송악(松岳)서낭을 신도(新都)서낭으로 모셨다. 조선시대의 이름난 서낭으로는 해주, 괴산, 현풍, 양산, 신성(新城), 밀양, 전주, 고성 서낭 등이 있었다. 태조 이성계는 양산의 우불산 앞을 지나가다가 산신령에게 왕이 될 수 있도록 기원하였다. 후일 왕에 등극 후 감사의 의미로 나라에서 향촉을 내려 우불신사에서 매년 정기적으로 제례를 올리도록 하였다. 우불신사는 신라 시대부터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제를 지낸 제당이다. 조선말까지 지방관인 울산 수령이 나라에서 내리는 향과 축문을 받아 봄과 가을, 일년에 두 차례 지역의 방호와 국태민안을 위하여 향사를 지내왔다. 1991년 12월에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187호’로 지정됐으며 지금도 정기적으로 제를 올리고 있다. 2. 동부마을 서낭당 김태곤은 서낭당의 형태를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하였다. 첫째, 서낭나무에 잡석을 무질서하게 쌓아 올린 누석단이 있고, 이 신령스런 나무에 백지나 청・홍・백・황・녹색의 오색 비단 헝겊을 잡아맨 형태, 둘째, 잡석을 무질서하게 쌓아 올린 누석단 형태, 셋째, 서낭나무에 백지나 오색 비단 헝겊을 잡아맨 형태, 넷째 서낭나무와 당집이 함께 있는 형태, 다섯째, 입석 (立石)형태 등이다. 다섯 가지 유형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이 첫 번째 형태이며, 두 번째 형태는 첫 번째 형태의 서낭나무가 퇴화되거나 길옆에 누석단이 먼저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세 번째의 형태는 수목신앙에 후기적으로 서낭나무에 오색 비단 헝겊을 잡아매는 헌납속(獻納俗)이 복합되거나 또는 처음부터 서낭당의 신수(神樹) 헌납속만 강조된 형태로 볼 수 있다. 다섯째 입석 형태는 높이 120~200cm 안팎, 폭 90~120cm 가량의 자연석을 세워놓고 수구매기(水口막이), 돌서낭, 선돌 등으로 부르는데, 우리나라의 중부, 남부 지역에서 간간이 발견된다. 신수에 당집이 복합된 넷째 형태는 중부 내륙 산간지역과 태백산맥 동쪽의 영동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양산시 물금읍 동부마을의 서낭당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물금에서 원동으로 가는 1022번 도로에서 삼전무지개아파트 근처에서 오봉산 자락으로 올라가면 서낭당이 있다. ‘허공마당’이라는 식당 주차장에서 한참 걸어 올라가면 나온다. 주변은 밭으로 정리되어 서낭당이 잘 보인다. 서낭당은 커다란 팽나무 다섯 그루가 당집을 둘러싸고 있는데, 뒤쪽의 팽나무 두 그루는 밑둥이 붙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집과 팽나무는 높은 철망으로 둘러싸여 있어 내부를 들여다보거나 사진 찍는 것이 쉽지 않다. 당집은 기와집이며, 벽은 하얀색 회벽, 문은 나무 문으로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데, 한옥으로 잘 지어 깔끔한 느낌이 난다. 당집 양쪽과 뒤쪽에는 낮은 축대를 쌓았다. 당집 현판은 사철나무 잎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주산령제당(主山靈祭堂)’이라는 당집 현판이 붙어있다. 당집 오른쪽에 낮은 돌담장이 있으며, 그 앞의 나무 밑에 돌을 쌓아 놓은 누석단이 보인다. 당집 뒤의 팽나무에 오색천이 걸려있다. 서낭당의 다섯 가지 형태 중 마지막의 입석만 없고 네 가지 형태를 갖추고 있는 매우 희귀한 사례다. 동부마을 당집은 마을에서 떨어져 외따로 있으며, 주민들이 다니는 통행로와 멀다. 팽나무는 아직 푸른 잎이 일부 남아 있으며 까맣게 변한 팽나무 열매도 나무에 달려있고, 땅에 떨어진 것도 보였다. 과거에 서낭당은 마을마다 있었으나 1970년대 새마을사업을 하면서 미신타파라는 이유로 많이 없어지고 현재 남아 있는 곳은 얼마 되지 않는다. 물금읍 동부마을의 서낭당은 전통 민속신앙을 잘 간직하고 있는 사례로 보존할 가치가 있다. 동부마을의 오랜 역사와 함께해온 서낭당은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 동부마을은 물금 신도시와 인접한 곳에 있는 마을로 바로 옆에는 현대적인 신도시가 개발되어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반면 상대적으로 낙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물금역 근처에 있는 동부마을과 서부마을은 신도시에 비해 발전이 없고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주민들의 소외감과 박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주민들이 원하는 숙원사업을 우선적으로 해줄 필요가 있다. 주민들이 요구하는 도시계획도로를 먼저 개설하여 교통 소통과 주차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서부마을 주민들은 도시계획 도로를 개설해주면 부산의 해운대 ‘달맞이고개’ 같은 관광 명소를 만들겠다는 의욕을 갖고 있다. 황산베랑길을 찾는 자전거 동호인들이 동부마을과 서부마을을 방문하여 카페, 식당을 이용할 수 있도록 편의시설을 개발한다면 주민 소득 증가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다. 이런 주민들의 숙원사업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활용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서부마을에는 조선시대 영남대로에서 가장 큰 황산역이 있었는데, 현재 복원이 논의 중이다. 곽종포 시의원은 서부마을에서 용화사까지 기존 황산베랑길 반대편 경부선 철도를 따라 둘레길을 개설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1022번 지방도는 국지도 60호선 낙동강대교가 완성되면 4차선으로 확장해야 한다. 이러한 역사와 문화, 관광이 조화를 이룬 개발을 지속하면 물금읍 동부마을과 서부마을은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게 된다.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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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상지역 7번 국도 우회로를 ‘통신사로’로 명명 / 심상도 박사 화요 갈럼1. 양산시 7번 국도 우회로 도로명주소 ‘통신사로’로 확정 양산시는 2018년 11월 부산∼양산∼울산을 잇는 7번 국도 우회 신설도로 중 12.6㎞ 구간에 대해 행정안전부로부터 ‘통신사로’ 도로명이 확정됐다고 밝혔다. 행정안전부로부터 통신사로 도로명을 부여받은 것은 양산시의 도로명 제안과 시민들의 의견 수렴 등 발 빠른 노력에 의한 행정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양산시가 울산시와 연계한 도로명을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단을 소개하고자 한다. 양산시청에서 2018년 2월 1일 양산시 공무원 대상 직원 소양 특강이 있었는데, 강사는 고려대학교 학장, 행정대학원장을 역임한 이명훈 교수였다. 제목은 ‘역사와 경제 : 양산 스토리텔링의 부가가치’였다. 이명훈 전 교수는 학성 이씨 후손으로 울산의 ‘이예로’에 대해 설명하며 양산시 7번 국도 신설 우회노선을 통신사로로 설정하는 당위성에 대해 강의하였다. 필자는 당시 학성 이씨 후손인 이정걸 양산신문 대표의 요청으로 특강에 참석한 후 울산시의 ‘이예로’와 연계한 도로명 주소 부여에 대한 내용으로 양산신문에 이와 관련한 칼럼을 쓴 바 있다. 필자는 별 특징이 없는 도로명으로 정하기보다는 역사적인 유래와 지역 특성을 살린 도로명 부여는 전국적인 대세라 할 수 있으므로 다른 지역의 좋은 선례는 빨리 벤치마킹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였다. 울산시는 2017년 4월 20일 도로명주소위원회를 열어 3개 광역도로의 도로명을 부여하면서 울산 도심을 남북으로 연결할 옥동∼농소 신설도로 이름이 ‘이예로’로 확정하였다. 옥동∼농소 도로는 총 연장 16.9㎞, 왕복 4차로로 2개 구간으로 나눠 공사를 진행하여 2구간(8.9㎞)은 2017년 6월 30일, 1구간(8㎞)은 2019년 말 각각 완공되었다. 울산시는 옥동∼농소(남부순환도로∼중구 성안동∼북구 오토밸리로) 구간은 ‘이예로’로 정했다. 남부순환도로(옥동)∼테크노산업단지∼청량천변로 구간은 '테크노산업로', 청량 IC 교차로∼남구 신항만 구간은 '신항로'로 확정됐다. ‘이예로’는 조선 전기 대일외교에서 눈부신 활약을 한 충숙공 이예(李藝·1373∼1445년) 선생의 이름에서 따왔다. 울산 학성 이씨의 시조인 이예 선생은 28세부터 71세까지 44년 동안 왕의 사절로 일본을 오가면서 667명의 조선인 포로를 협상으로 구출한 독보적 외교관이다. 600여 년 전 40여 차례나 일본과 대마도, 오키나와를 왕래하며, 조선통신사로 활약하였다. 그야말로 조선-일본 관계에 평생을 바치며 위대한 외교관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 전후기에 걸쳐 일본 국왕에게 파견된 사행(私行)은 모두 30회이다. 이예는 이중 6회의 사행에 참여했다. 또한 통신사란 명칭이 최초로 사용된 사행에도 참여했다. 조선 전기 200년간 대마도, 일기도, 유구국에 대한 사행은 40회였다. 이예는 이 중 7회의 사행에 참여했다. 아전생활을 하며 벼슬길을 시작하여 정2품에 해당하는 동지중추원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1396년(조선 태조 5년) 12월 3천 명의 왜구들이 울주포에 침입하여 군수 이은 등을 포로로 잡아갔다. 다른 관리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모두 도망갔는데, 이예는 자진해 군수를 따라가 끝까지 군수를 보필하여 왜적을 감복시켰다. 후일 조선에서 파견한 통신사의 중재로 이예는 군수와 함께 무사히 귀국하였다. 조정에서는 이예의 충성심을 가상히 여겨 아전의 역을 면제하고 벼슬을 내렸다. 중인계급을 탈피하는 파격적인 승진을 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예는 아전 신분에서 벗어나 사대부 양반으로서 전문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되었다. 2. 학성 이씨 이겸수 선생의 임진왜란 때 활약 양산시 7번 국도 우회로가 울산시의 ‘이예로’와 연계하여 ‘통신사로’로 명명된 것은 그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이겸수 선생은 학성 이씨로 충숙공 이예의 7세손이다. 이겸수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웅상지역에서 출생하여 의병장으로 활동하며 왜군을 물리치고, 외교적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 뛰어난 활약을 하였다. 양산시 소주동에 있는 남강서원은 죽재 이겸수 선생을 제향하고 있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를 수행하여 왜장 가토 기요마사와 강화 협상을 한 이겸수 선생은 위험을 무릅쓰고 서생포 왜성의 적정을 탐지하였다. 또한 적장인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간의 이간을 기획하여 왜군의 분열을 조장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겸수 선생의 활약상은 남붕대사의 분충서난록, 정탁 선생의 용사잡록, 선조실록 등에 기록되어 있다. 사명당과 가토 기요마사간의 회담은 임진왜란 중 서생포왜성에서 네 차례 진행되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사명당이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것을 그의 법손(法孫)인 남붕(南鵬)이 모아 책으로 꾸민 『송운대사(松雲大師)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에 잘 나타나 있다. 제1차 회담은 선조 27년(1594) 4월 초에 있었는데, 『분충서난록』에 ‘청정영중탐정기(淸正營中探情記)’라는 제목으로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강화회담에 사명당의 수행원으로 참여한 이겸수 선생의 기록이 분충서난록에 나온다. 선조 27년(1594) 2월 무렵부터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의 요청에 의해 가토를 상대하는 외교 교섭이 시도되었는데, 도원수 권율에 의해 적임자로 추천된 이가 바로 사명당 유정(惟政)이었다. 가토 키요마사 등 왜장들은 대부분 한자를 알지 못하였고, 한자를 알고 있는 자는 수행하는 승려들이었다. 조선, 명나라, 왜군 사이에 오가는 서찰의 번역과 초안은 승려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불제자인 사명당은 왜군들이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4월 12일, 사명당은 경상좌병사 고언백의 군관 이겸수(李謙受)의 길 안내로 통역관 김언복(金彦福), 승려 등 20여 명과 함께 경주에 임시로 진(陳)을 마련하고 있던 좌병영을 나섰다. 이겸수는 가등청정이 총애하는 왜의 부장(副將) 희팔랑(喜八郞)에게 접근하여, 적절한 논변과 거동으로 적의 불필요한 의심을 해소하는 한편, 충심으로 적진의 동태를 살펴 화친의 진위를 가리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7월 10일부터 16일까지 제2차 회담이 열렸으며, 제3차 회담은 11월 23일에 있었는데 기요마사의 오해에 의한 거부로 직접 만나지는 못하였다. 제4차 회담은 기요마사의 요구로 정유재란이 재개되기 직전인 선조 30년(1597) 3월 18일부터 19일까지 열렸다. 이겸수 선생은 1594년 5월부터 사명대사와 함께 11차례에 걸쳐 왜의 적진에 파견되어 양국간 강화회담의 안내자 역할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수뇌부의 한반도 삼도 분할 구상을 간파하고, 왜군 내부의 이간책을 시도해 협상을 조선에 유리하게 이끌어내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명나라 장수 유정이 이겸수를 “충성된 붉은 피는 양국을 위해 섬기는 바로구나!”라고 일컬었다고 전한다. 이겸수 선생은 가토와의 외교담판 기회를 적정 정탐의 호기로 활용함으로써 왜군 성(城)의 구조, 군기, 군수물자 등을 두루 살펴 우리나라가 군사전술 및 전략상의 대책 마련을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학성 이씨 주남 문중은 2013년 3월 13일 선조로부터 대대로 전수된 이겸수 장군의 보검(寶劍)을 양산시 유물전시관에 기탁했다. 이겸수 보검은 길이 65㎝의 작은 검으로 손잡이 부분이 남아있지 않지만 검신의 훼손이 없고 명문이 새겨져 있어 조선시대 무신들이 사용했던 무기를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이겸수 선생은 임진왜란 당시 어머니의 권유로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관군에 들어갔다. 사명대사와 함께 왜적의 적진으로 파견되어 강화회담을 안내하고 협상을 유리하게 이끄는 데 공을 세워 정주판관에 제수되었으나 곧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원종훈삼등공신 책록되었으며, 남강서원에 제향되었다. 3. 조선통신사 노정과 숙식 제공 조선시대 통신사가 한양을 거쳐 일본으로 가거나(하행) 반대로 일본에서 동래로 돌아와 한양으로 올라가는(상행) 노정(路程)은 사행마다 약간씩 다르게 나타난다. 1420년 회례사행(回禮使行)에 정사(正使)로 파견된 송희경(宋希璟)의 하행 노선은 한양-이천-안평-가흥-충주-문경-유곡-상주-덕통-선산-성주-청도-밀양-금곡-제포-김해-동래로 이어졌다. 1590년 통신사행(通信使行)에 부사로 참여한 김성일(金誠一)의 사행 노정은 한양-조령-문경-안동-신녕-경산-성현-양산-동래로 나온다. 통문관지(通文館志)의 <선문식(先文式)>에 나타난 통신사의 노정 중 하행은 한양-양재-판교-용인-양지-죽산-무극-숭선-충주-안보-문경-유곡-용궁-예천-풍산-안동-일직-의성-청로-의흥-신녕-영천-모량-경주-구어-울산-용당-동래, 상행은 동래-양산-무흘-밀양-유천-청도-오리원-상주-함창-문경-안보-숭선-죽산-용인-한양으로 연결된다. 조엄의 해사일기에 나오는 사행 노정은 한양-양재역-용인-죽산-무극촌-숭선촌-충주-안보역-새재-문경-유곡역-용궁-예천-풍산관-안동부-일직참-의성-의흥현-신녕-영천-모량역-경주-구오역-울산-용당창-십휴정-동래-부산이다. 숙박하지 않고 중간에 쉬는 곳도 포함하였다. 통신사 정사인 조엄의 귀로는 동래-사배야고개-양산-무흘-밀양-유천역-청도-경산-대구-송림-인동-선산-상주-함창-문경-조령-연풍-괴산-음성-무극역-음죽-이천-경안역-광주-하산-송파나루-동관묘-동문-낮에 3사가 모여 경희궁에 가서 임금에게 복명하였다. 통신사가 한양에서 동래로 오는 하행, 동래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상행의 노정이 달랐다. 조정에서는 3사가 다른 길을 택해 돌아오도록 명령하였다.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정사(正使), 부사(副使), 종사관(從事官)이 다른 노정을 택하기도 하였다. 조엄은 가운데 길을 택하여 대구로 향하고, 부사는 오른쪽 길인 경주를 선택하고, 종사관은 동래의 왼쪽 길인 김해를 거쳐 올라갔다. 통신사가 이동하는 지역에서 접대에 필요한 인원 동원, 물자의 제공은 큰 부담이 되었다. 웅상의 용당창, 동래에 머무는 통신사 일행을 접대하는 고을은 양산, 김해, 언양, 밀양, 장기, 흥해 등이었다. 웅상지역의 용당창은 일본으로 향하는 약 500명의 조선통신사 일행이 한양을 출발하여 부산 동래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하루를 머물렀던 장소였다. 용당창은 웅상지역의 조세를 현물로 받아 보관하던 창고로 사행이 머무는 숙박시설도 있었다. 용당창에 모은 조세는 회야강을 통해 온양의 남창, 동래로 이송하였다. 일본 역시 조선통신사 접대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었다. 손승철에 의하면 에도 막부는 500여 명에 이르는 통신사 일행의 잠자리와 음식을 마련하느라 1년 예산에 가까운 100만냥을 썼다고 한다. 조선 정부는 임진왜란을 일으켜 신뢰를 깬 일본에 전쟁 이후에만 12차례 사절단을 보냈다. 조선통신사는 사행을 파견하면서 조선과 일본 정부에 경제적으로 큰 부담을 안겨주었다. 조선과 일본 사이의 우호친선에 기여했으나 500여 명의 통신사 일행을 보내고 맞이하는 데는 재정적으로 많은 비용이 들었다. 양산은 특히 통신사가 오가는 길목인 물금의 황산역, 웅상지역의 용당창이 있어 접대하는 데 힘들었다. 황산역은 말과 역졸을 제공하였고, 용당창은 숙식을 책임졌다. 양산군은 통신사의 접대와 이동에 필요한 모든 편의를 제공하느라 시달렸다. 양산시 서창동 행정복지센터에 통신사 일행이 지나간 것을 기념하는 표지석이 2007년 4월에 세워졌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연이 있는 통신사가 지나간 7번 국도 우회로를 울산의 ‘이예로’와 연계하여 ‘통신사로’로 명명한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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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력장군의 활약과 전사 / 심상도 박사 화요 칼럼1. 금관가야, 신라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비밀 금관가야의 건국신화는 『삼국유사』에 수록된 구지가와 얽힌 6개의 알 신화가 유명하다. 서기 42년, 김해는 본래 9명의 간(干)이 추장으로서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구지봉에서 사람들이 모여 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자 하늘에서 알 6개가 내려왔고, 그 알 중 가장 먼저 깨어난 이가 수로왕이며 나머지 5개의 알에서 태어난 아이가 각자 나머지 5개 가야소국의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건국신화를 분석해보면 기존 세력(9간)을 바탕으로 이주민 세력(수로왕)이 추대를 받았고, 6가야연맹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42년에 200~300명의 무리가 9명의 간(干, 족장)과 함께 구지봉에 모였는데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사람의 목소리가 구지봉에서 들려왔다. 그 소리가 “여기에 사람이 있는가” 라고 하자 사람들은 “네, 저희들이 있습니다.” 라고 하자 “그럼 내가 있는 곳은 어디인가”라고 했더니 “구지봉입니다” 라고 다시 말하자 “하늘이 나에게 너희들의 왕이 되라고 명하셔서 이렇게 왔노라 그러니 너희는 지금 내가 시키는 대로 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어라” 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기뻐하며 구지가를 불렀더니 하늘에서 자주색 줄이 내려오고 줄 끝에는 황금색 상자가 있었고 그 안에는 6개의 황금 알이 있었다. 그 상자를 귀하게 여겨 12일 동안 아도간의 집에 놔두었더니 12일 후에 사내아이로 바뀌고 10일이 다시 지나자 사내아이 중 키가 9자인 아이가 태어났고 그달 보름달에 왕위에 올랐는데 처음 나타냈다는 뜻으로 수로왕 혹은 수릉 이라고 했다. 이사부에 의해 532년 금관가야는 역사에서 사라지지만, 마지막 임금 구해왕(구형왕)의 자손들은 왕족의 대우를 받으며, 신라의 고위 관리직을 맡아 신라의 영토확장과 삼국통일에 크게 기여했다. 금관국의 구해왕은 치열한 최후 저항 없이 왕자들과 함께 항복하여 양왕이라 부른다. 금관가야가 세력이 약화되어 신라에 의지하여 주변의 가야 소국의 침략을 물리치면서 동맹관계였다. 금관가야 왕실과 신라 왕실은 혼인으로 서로 교류하며 우호관계를 다졌다. 주변 국가를 무참하게 정복하며 국력을 키워온 신라가 이러한 복합적인 연유로 인하여 금관가야의 구해왕과 그 가족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정복국가인 신라가 금관국을 합병하면서 왕족에 대해 특별 예우를 하였다. 법흥왕은 구해왕에게 최고관직인 상대등 자리를 주고, 금관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했다. 구해왕의 왕자들도 진골 대접을 받는다. 김해 김씨, 경주 김씨의 선조들은 같은 조상을 두었으나 서로 다른 나라를 만들어 경쟁하면서 나라를 발전시켰다. 국력이 약화된 금관가야가 항복하자, 신라 김씨 쪽에서 화해정책을 구사하여 포용하였다. 신라와 금관가야의 조상은 중국에서 이주하여 온 세력으로 한뿌리에서 나왔다는 핏줄 의식이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와 가야의 김씨들은 모두 몽골 고원에서 기원해 한반도 남쪽 끝으로 이동한 흉노족의 후예라고 한다. 신라 김씨 왕족과 금관국 김씨 왕족은 모두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벼슬을 한 흉노족 휴도왕(休屠王)의 태자 김일제(金日磾)의 후손이다. 신라 문무왕의 비문에는 ‘□侯 祭天之胤傳七葉(□후 제천지윤 전칠엽)’이라는 글귀가 있는데, 여기서 글자가 해독하기 어려운 □를 '秺'로 읽으면 투후 김일제의 7대손이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가 됐다고 해석할 수 있다. 신라의 건국신화가 수록되어 있는 문헌은 『삼국유사』, 『삼국사기』, 『제왕운기』로 『삼국유사』에 의하면 박혁거세는 알에서 탄생하였다. 진한(辰韓) 땅의 여섯 마을 우두머리들이 군왕을 정하여 받들고자 하여 알천 상류에 모였다. 양산 기슭에 있는 나정이라는 우물가에 흰말이 엎드려 절하고 있었다. 찾아가니 그곳에 자줏빛 알이 있었고 그 알을 깨뜨리자 사내아이가 나와 성장 후 왕으로 추대하였다. 건국신화는 외래 세력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산동성 제후가 된 김일제는 흉노 3만 명을 산동성으로 이주시켰고, 그의 후예들이 나중에 한나라 조정의 실권을 잡는다. 김일제의 증손인 김당은 서기 8년 이모부인 왕망(王莽)을 도와 한나라(전한)를 멸망시키고, 신(新)나라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다. 한(漢) 왕조의 유(劉)씨 세력들이 전국에서 힘을 결집해 신(新)나라를 멸망시키고, 다시 유씨 왕조(후한)를 세우자, 김일제 후손들이 대거 한반도로 내려와 신라와 가야의 왕족이 됐다. 따라서 신라의 김알지, 미추왕, 내물왕, 금관국의 김수로왕이 모두 흉노 휴도왕의 태자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경주김씨의 시조 김알지에 관한 신화는 『삼국유사』 기이(紀異) 제2 김알지 탈해왕대조(金閼智脫解王代條)와 『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이사금조(脫解尼師今條)에 수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에는 호공이 밤에 월성(月城) 서리(西里)를 지나다가 큰 빛이 시림 속에 비침을 보았다. 황금 궤짝이 나무 끝에 걸려 있었고, 흰 닭이 그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왕에게 이를 아뢰자 왕이 숲으로 가서 궤를 여니 어린 남자가 누워있었다. 박혁거세의 옛일과 같아 알지라 이름을 지으니, 알지는 곧 우리말의 어린애를 뜻한다.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씨라 하였다. 금관가야, 신라 건국신화, 경주 김씨 탄생신화는 모두 강력한 외부세력이 이주해와 토착인들이 수용, 융합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새로운 지배세력의 등장 비밀이 건국신화에 담겨 있다. 2. 김무력 장군의 활약 김무력 장군(金武力, 518년 ~ 579년 10월 16일)은 가락국의 마지막 제10대 왕인 구형왕의 3남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난 왕자였다. 구형왕을 따라 신라 진골에 편입되었으며, 군인이 되어 6세기 중반 진흥왕 때 장군으로 활약하였다. 관산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백제의 국세를 위축시켜 신라의 삼국통일 기반을 닦았다. 후일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김유신 장군의 할아버지다. 관직은 각간에 이르렀다. 첫 부인 박씨는 법흥왕 비 보도부인의 동생으로 법흥왕의 동서였다. 신라 진흥왕 때 신라가 한창 영토를 넓히던 시기 신라의 장군이 되어 전쟁에서 공을 수립하였다. 550년경 백전노장 이사부의 부관으로서 단양 적성 전투에 참여했고,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유역 공략에 참여해 큰 공을 세웠으며, 삼국사기, 단양 신라 적성비에 김무력의 이름이 나온다. 이후 553년에 신라가 백제를 공격해 새로 신라가 차지한 한강 유역에 설치한 신주(新州) 지역의 초대 군주가 되었다. 국경을 수호하는 전투부대의 장군인 군주(軍主)를 맡아 고구려, 백제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며, 국토 방위와 영토 확장에 기여하였다. 김무력 장군은 금관가야의 철기병을 활용하여 백제,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법흥왕 11년(524년)에 세워진 울진 봉평신라비에는 실지군주(悉支軍主, 실직주인 삼척)와 실지도사(悉支道使)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501년(지증왕 2년)과 503년(지증왕 4년)에 각각 세워진 포항 중성리비와 영일 냉수리비에 지방행정관을 의미하는 도사(道使)라는 표현이 나온다. 신라는 외직을 임명할 때 군사직과 행정직을 나눠 운용했다. 도사(道使)는 현지에서 세금을 걷고 백성을 관리하는 행정직이고, 군주는 외적의 침공을 막고 때론 공세적으로 주변을 공략하는 전투조직의 수장을 의미한다. 신라는 영토를 확장하면서 서라벌 왕경인(王京人) 출신의 행정관을 보내 직할통치를 했다. 새로 개척한 국토에는 신라인, 정복지의 가야인을 이주시켜 국경을 안정적으로 지배하였다. 김무력 장군의 용맹한 가야 철기병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나제동맹 결렬의 보복으로 백제의 성왕은 대가야, 왜의 연합군을 결성하여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위기에 빠진 신라군은 총동원령을 내렸다. 김무력 장군의 철기병을 이끌고 전속력으로 남하해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을 전사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과 좌평 4명을 죽이고, 3만여 명의 백제군을 섬멸한 공로로 김무력 장군은 신라 조정에서 탄탄한 입지를 구축하였다. 김무력 장군이 자신의 나라인 금관가야를 멸망시킨 주인공인 이사부 장군의 부장이 되어 국경선의 전투 현장을 누빈 이유는 같은 조상을 둔 내력 때문인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가야연맹체의 많은 소국들이 신라에 병합당하면서 망했지만 금관가야의 왕족들처럼 후한 대접을 받고 신라의 고위관리로 활약하며 공을 세운 경우는 거의 없다. 이사부도 성은 김씨로 김무력 장군과 같은 조상을 두었기 때문에 서로 반감이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3. 김무력 장군의 전사 김무력 장군의 전사는 김해 김씨 족보인 『숙종병인보』에 의하면 진평왕 원년(579년) 10월 16일로 나온다. 이 기록을 검증할 수 있는 다른 역사 기록은 없다고 한다. 어떤 나라와 전투를 하였고, 어떤 상황에서 전사하였는지 상세한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숙종병인보』에 김무력 장군의 아들인 김서현 장군에 대한 기록을 통해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 김서현은 시중도독에 임명된 부친과 함께 임라가라(任羅加羅)를 공격하는 것으로 기록이 나온다. 이 시기가 바로 진평왕 무렵이다. 김무력 장군의 전사한 시기가 진평왕 원년이고, 아들이 출전했다고 나오므로 김무력 장군이 임라가라와의 전투에 출전했다가 전사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한국 나이로 62세에 백전노장답게 전쟁터에서 전사한 김무력 장군은 마지막 순간까지 평생을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였다. 신라시대의 평균 수명을 현재와 비교해 본다면 현저히 짧았을 것이다. 62세라면 노인으로서 전투 현장에서 은퇴하여 안전한 서라벌에서 노후를 보내야 할 나이지만 전쟁터를 거침없이 누볐다. 진지왕 3년과 4년 2년 동안 산산성(蒜山城), 마지현성(麻知峴城), 내리서성(內利西城), 알야산성(閼也山城), 웅현성(熊峴城) 등지에서 치열한 전투가 있었으나 김무력 장군이 이끄는 잘 훈련된 군사에 의하여 백제의 8개 성주가 백기를 들고 항복하였다. 신라의 영토확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조정에서는 김무력 장군의 장렬한 전사 소식에 탄식하며 슬퍼하였다. 끝까지 충성을 다한 공을 받들어 취서산(현재 영축산) 자락의 명당자리에 예를 갖추어 국장을 치렀다. 오늘날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뒷산인데, 이 일대 토지를 국가에서 사패지로 하사하였다. 금관가야의 왕자로 태어나 나라가 신라에 투항하자 진골 귀족으로 편입되어 신라의 영토확장 전투에 앞장서서 용감하게 싸우며 큰 공을 세워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아들 김서현 장군은 신라 소판, 삽량주 도독을 지냈다. 양산의 신기산성에 주둔하며 왜적의 침략을 방비하며 양산을 수호하였다. 양산군민이 1925년 세운 김서현 장군의 기적비가 춘추공원에 있다. 훗날 김무력 장군의 손자인 김유신 장군이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하북면 지산리에 있는 취산재는 김무력 장군 내외, 아들인 김서현 장군과 만명부인을 모시고 있는데, 김무력 장군의 묘소를 관리하기 위하여 김해 김씨 문중에서 건립하였다. 종친들의 성금으로 1986년 10월 12일에 착공하여 12월 20일에 건물만 완공하였다. 현판은 후손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글씨를 동아인쇄 김종완 대표가 받아와 1987년 4월 13일에 봉행하였다. 취산재 준공 행사에 양산군수, 향교 전교, 유림, 양산군민, 종친들이 모여 축하를 하였다. 김무력 장군은 무장답게 전쟁터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김무력 장군, 김서현 장군, 김유신 장군의 3대가 신라의 삼국통일 기반을 닦고, 백제와 고구려의 침략을 막아내고 최종적으로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양산시는 역사에 기록된 위대한 김무력 장군과 그 후손들의 업적을 선양하는 사업에 나서야 한다. 김무력 장군의 관산성 전투에서 빛나는 승리는 우리나라 역사를 바꾸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필자는 김무력 장군의 관산성 전투와 관련된 역사유적을 답사하기 위해 충북 옥천군, 보은군, 대전시 등의 험준한 산성 30여 곳을 직접 답사하였다. 산성 답사하다가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하고, 무너진 성벽 돌을 밟다가 넘어져 다칠 뻔한 적도 많았다. 벌레에 쏘여 팔다리 피부가 탈이 나고, 나무와 가시덤불에 스쳐 피부에 상처도 많이 났지만 답사를 성공리에 마쳤다. 와이뉴스의 화요칼럼을 쓰기 위해 김무력 장군이 거쳐간 마을도 방문하였다. 양산의 김무력 장군 묘소도 수차례 답사하고, 김무력 장군이 쌓은 영축산 정상의 단조성도 다녀왔다. 김무력 장군의 전투현장을 모두 탐방한 것은 전국에서 필자가 최초였다. 김무력 장군의 라이벌인 백제 성왕의 유적지를 찾아 공주, 부여도 답사하였다. 패장인 성왕은 전사 현장인 옥천군 군서면에 성왕교, 도로명주소 성왕로가 있고 부여 시가지에 성왕 동상도 있었다. 반면 승장인 김무력 장군에 대한 추모사업이 양산시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은 없다. 도로명주소에 ‘김무력장군로’를 만들고 동상도 세워 역사적 위업을 기려야 하겠다. 후손에게만 맡겨둘 일이 아니다. 그동안 필자의 화요칼럼을 애독해주신 전국의 독자, 양산시민들에게 감사드리며 김무력 장군의 스토리텔링은 이번 회로 마감하고 다음 주부터 다른 스토리로 쓸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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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가야진용신제 거행 , 11월22 가야진사에서 봉행1. 가야진용신제 개요 및 절차 가야진용신제 행사가 11월 22일 10시 가야진사에서 봉행되었다. 코로나 19 때문에 봄에 행사가 열리지 못하고 이번에 거행되었다. 감염병을 방지하기 위하여 무관중 행사로 진행되었다. 황산베랑길 자전거도로를 이용하는 자전거 동호인들이 풍물소리를 듣고 간간이 들렸다. 행사 참가자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시연하였다. 날씨가 바람이 불고 몹시 쌀쌀하였지만 출연자들은 개의치 않고 열연을 하였다. 가야진사는 1983년 경남도 민속문화재 제7호로, 가야진용신제는 2004년 경남도 무형문화재 제19호로 각각 지정됐다. 조선시대 말까지 행해진 국가 제례는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로 나눠 전국 50여 곳에 이른다. 이 가운데 현재까지 이어지는 제례는 대사(大祀)인 사직, 종묘, 영령전 세 곳의 제사와 가야진용신제가 유일하다. 특히 대사(大祀)는 조선시대 국가 제례인 점을 고려하면 가야진용신제는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온 국내 유일의 최장수 제례이자 민속놀이인 셈이다. 양산시는 2005년 지역의 대표적인 정신문화인 가야진용신제 계승을 위해 전수관을 건립, 운영하고 있다. 이번에 가야진용신제 보존회에서 가야진용신제 전시관을 건립하여 개관하였다. 양산시민, 관광객들이 가야진사를 방문하였을 때 가야진용신제의 전통과 제례의식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였다. 제례의식 모형도가 설치되었고, 가야진용신제 삼룡 전설의 만화가 그려져 있어 어린이들도 만화를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원하는 배경사진으로 나만의 멋진 사진을 찍는 전자장치가 설치되어 있어 가족단위 관광객들에게 인기를 끌 것으로 예상된다. 가야진용신제의 절차는 제를 올리기 전 부정을 쫓아내는 의식을 치르는 ‘부정가시기’를 시작으로, 칙사(국가제의를 지내기 위해 파견된 고위관리 - 초헌관)를 모시고 제단으로 향하는 ‘칙사영접굿’, 칙사가 제당에 당도하면 삼용신에게 제를 올리는 ‘용신제례’, 나룻배에 돼지를 실은 뒤 낙동강 용왕에게 제물로 바치는 ‘용소풀이’, 제례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춤을 추면서 제단으로 돌아오는 ‘사신풀이’등 다섯 마당 순으로 진행된다. 2. 가야진사 4대강 정비사업으로 복원 1300년의 전통을 가진 가야진용신제(伽倻津龍神祭)를 지내는 제례공간인 ‘가야진사(伽倻津祠)’가 이명박 대통령의 4대강 정비사업으로 처음에는 수몰될 위기에 처했지만 천만다행으로 이전하지 않고 원래의 위치에 보전하게 되었다. 원동면 일대 낙동강을 준설해 강폭을 넓히기 위한 공사 때문에 이전 필요성이 제기되고, 2006년 가야진사 인근에 10억여 원을 들여 건립한 가야진용신제 전수관도 건립 3년 만에 철거될 위기에 빠졌지만 결과적으로 모두 보존하게 되었다. 4대강 정비사업은 환경단체와 시민단체가 많이 비난하였지만 가야진사는 이들의 우려와 달리 현 위치에 보존하게 되었다. 낙동강의 강 바닥 모래를 준설하여 물 그릇을 키운 결과 낙동강변 원동면 지역, 물금읍 지역의 홍수를 방지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까지 여러 번의 태풍과 홍수가 양산시를 강타하였지만 4대강 정비사업 때문에 낙동강의 홍수로 인한 큰 피해는 없었다. 2010년 발굴조사를 통해 가야진사 건물터, 제사 유적, 제기 등을 발굴하는 성과가 있었다. 가야진사 유적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된 유물들은 양산시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2016년 2월 4일 경상남도의 유형문화재 제594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알려진 제기는 대부분이 전세품으로 절대연대를 알려줄 편년자료가 부족한 실정에서 양산 가야진사 출토 제기들은 매우 귀중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세종실록』 「오례」, 『국조오례의』 제기도설에 실려 있는 도설을 바탕으로 제작된 유물들이자 일괄로 출토된 예가 드문 희귀한 자료들이다. 특히 15세기에 지방의 주요 제례 중 하나인 중사를 행하던 가야진사에서 실제로 사용된 제기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도자사 연구에 편년적인 자료를 제공해 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3. 국가지정문화재 승격 필요 2019년 12월에 국가지정문화재 승격이 유력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양산 원동면 용당리의 ‘가야진 용신제’가 2015년에 이어 결국 두 번째 시도에서도 탈락하였다. 양산시는 문화재청으로부터 가야진 용신제의 국가 중요 무형문화재 단체종목 지정을 위한 ‘지정 가치 지표조사’ 결과 ‘국가 문화재로서의 지정 가치가 없다’는 공문을 받았다고 한다. 가야진 용신제는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 말까지 지낸 국가 제례의식으로 ‘용신’에게 뱃길의 안전과 국가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던 행사이다. 일제 강점기 때 홍수로 제단이 휩쓸리고 일제에 의해 제례가 금지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지만, 국가가 아닌 원동 주민들에 의해 그 맥이 이어져 오고 있다. 용신제는 과거 흥해(동), 공주(서), 가야진(남), 한강(북) 등 4대 강 유역에서 치러졌으나 현재 가야진 용신제만 남아있다. 특히 가야진 용신제는 가야진사(경남도 민속자료 제7호)에서 해마다 민속놀이와 제의가 결합된 독특한 양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가야진용신제 보존회 박홍기 사무국장(예능보유자)에 의하면 옛날에는 가야진용신제가 국가 주관의 제례의식이었지만, 조선 시대 때 나라에서 이를 포기하였다고 한다. 원동면 용당리 지역주민에 의해 제례의 명맥이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민속놀이가 결합된 것이라고 하였다. 옛날부터 전해지는 민속문화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 변형되기도 하고 단절되기도 한다. 신라시대부터 이어져 오던 가야진용신제는 일제강점기 때 큰 홍수로 인해 사당이 헐리고 일제 경찰에 의해 용신제를 금지당하는 어려움에 처했다. 하지만 고 이장백(1914~1998)을 위시한 용당리 당곡마을 주민들은 일제 감시의 눈길을 피해 마을 인근 천태산 비석골에 사당을 모시고, 밤중에 지게를 지고 제수를 운반하여 제사를 모시며 명맥을 이어왔다. 이러한 문화의 본질과 변화를 외면하는 문화재청 문화재위원들의 고루한 사고방식은 타파되어야 마땅하다. 요즘 일반 가정에서도 전통적인 유교의식의 제사가 점점 없어지고 있는 추세이므로 이와 같은 독특한 전통문화는 계승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낙동강 정비사업 때 출토된 제기는 중요한 유물로 인정받고 있다. 가야진사 가야진용신제는 이러한 전통적 국가제례와 주민들의 민속문화가 융합된 보기 드문 사례로 앞으로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문화재청에서 주민들의 노력을 고려하여 국가지정문화재로 반드시 지정해야 마땅하다. 윤영석 국회의원의 관심과 협조가 필요하다.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Y뉴스 총괄위원장, 관광경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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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력 장군이 관산성 전투 승리 후 쌓은 영축산 단조성/심상도 박사 화요 칼럼 - 와이뉴스1. 김무력 장군이 울주군 언양에 주둔하며 쌓은 단조성 단조성(丹鳥城)은 영축산 정상의 평평한 분지형에 자리 잡고 있다. 김무력 장군이 충북 옥천의 관산성 전투에서 승리한 후 귀향하여 울주군 언양에 주둔하면서 성을 쌓았다고 전해진다. 관산성 전투를 통해 백제, 왜, 가량의 국제 연합군의 공격으로 위기에 빠진 신라를 구한 김무력 장군은 군사를 이끌고 서라벌 남쪽인 태화관(太和關)으로 이동하였다. 태화관은 현재의 언양 석남사 인근의 배내고개 부근으로 추정된다. 김해 김씨 족보인 『숙종병인보』의 내용을 바탕으로 양산대학의 엄원대 교수가 해석한 내용을 정리하면 김무력 장군은 태화관으로 귀환한 후 교산윤산성(轎山輪山城)을 쌓았다고 한다. 이 산성은 영축산 정상에 있는 단조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단조성이 있는 산은 현재 영축산 또는 취서산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울주군 언양읍, 상북면 등의 지명에 신라시대 군사기지가 있었던 곳이 여러 군데 나온다. 상북면의 마을 유래에 군과 연관된 지명이 많다. 울주군 상북면 행정복지센터의 마을 유래를 살펴보면 다양한 군대 관련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가지산, 석남사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태화강의 상류가 된다. 이 근처에는 살터, 궁근정 등 군사기지와 관련되는 지명이 남아 있다. 울주군 상북면에는 궁근정리(弓根亭里), 궁평(弓坪), 마두배기(말을 길렀던 곳), 흥진(興陳 : 군사들이 진을 쳤던 곳), 사시야(射矢野 : 활쏘던 곳), 장성(長城 : 궁근정리 새터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성이 있었음) 등 군사와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 지명이 존재하고 있다. 고헌산은 상북면 궁근정리 소호리와 두서면 차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 1,033m이다. 옛날 헌양의 진산으로 현의 이름을 따서 ‘고헌산’이라 호칭했다고 한다. 황정자는 궁근정 남쪽 1km 지점에 흥진이 있고 여기서 서쪽 0.5km 지점에 황정자가 있다. 황정자는 옛날 한양으로 가는 길목으로 모든 선비와 행인이 쉬어갔다고 한다. 회약골, 화약골, 화약고는 군사 무기와 관련된다. 사시들 사시야, 마두벽회약골은 고헌산 밑 골짜기에 있다. 여기서 동남간 2km 지점에 사시들이 있고, 마두벽은 궁근정 북쪽으로 경북청도군과 경주시 산내면을 다니는 고갯길이다. 울주군 상북면 궁근정리의 지명유래를 보면 옛날 활나무 정자가 있다 하여 궁근정이라 하였다. 한편 통일신라 이전에 군사 무기였던 활과 살을 만들고, 그 만든 무기로 훈련을 하였다는데서 궁근정이라 호칭했다고도 한다. 궁근정리는 상북면의 서쪽 4km 지점에 위치하고, 밀양시와 경주시로 갈라지는 분기점이며, 24호 국도와 접해있다. 우만은 옛날 이 마을에 힘센 사람이 많이 있어 항우 같은 장사가 살았다 하는 의미로서 우만이라 호칭하였다. 발랑말은 지내리에 있는 ‘골새’(대리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에서 서쪽으로 산 중턱에 있는 마을인데, 옛날 말을 타고 놀며 활 쏘기를 하였다는 곳이다. 덕현리는 운문고개란 큰 고개 아래에 있다 하여 덕현리라 불리었다. 석남은 큰 바위 남쪽에 있다 하여 석남이라 하였다. ‘깐치말리’는 까치가 많이 모여드는 곳이라 하여 생겼다. 삽재, 삽리의 유래는 삽리라는 부락에서 활을 쏘면 이 마을 고개에 꽂혔다 하여 살제라하고 한자의 의미로서 삽리라고도 호칭하였다. 소야정은 정자나무가 있었다 하여 ‘소야정’이라 하였다. 길천리의 유래는 이마을 중앙에 행화정이란 조그마한 우물이 있어 그 우물에서 흘러가는 내가 물이 맑고 좋아서 좋은 내라 하여 ‘길천리’라 호칭하였다. 옛날 신라시대에 거지화현 소재리라 하여 지화라 불리우며, 또한 이불이라고도 호칭하였다. 거지화는 지금의 언양인데 신라 경덕왕 l6년에 거지화현을 개칭한 것이다. 거지화의 치소가 바로 이곳이었다. 만당은 지화와 천전리에 걸쳐 있는 넓은 들이다. 신라시대 이불마을 거지화현에 현령이 있어 이 만당에 집이 만채가 있었다 하여 만당이라 호칭하였다. 산전리의 궁평마을은 생긴 모양이 활과 같이 생겼다는 데서 궁평이라 하였다. 만당걸은 도동 남쪽에 있는 내로서 신라 때 하천 하부에 인구가 많이 살고 있었다 하여 만당걸이라 불렀다고 한다. 2. 군사기지로 중요한 단조성 울주군 행정복지센터의 마을 유래를 보면 등억리에서 단조산성이 나온다. 등억리는 지형이 등어리처럼 생겼으므로 등어리 또는 등억 혹은 곶으로 양쪽으로 내가 흐르므로 곶내라 하였다. 옛날 이 주위에 백화가 만발하여 꽃잎이 앞내에 흘러갔다 하여 화천이라 불리우고 있으며, 일설에 의하면 옛날 이 마을이 가장 빈곤할 적에 어떤 도승이 지나가다 마을 이름을 등억리라 하면 부자가 날 것이라 하여 등억리라 불렀다고 한다. 단조성은 천전리와 등억리를 연결하는 해발 900m가 되는 간월산의 소 구릉상에 있는 산성이다. 주위 약 1.5km의 토축성지이나 대부분 붕괴되고 흔적만 남아 있다. 석축으로 주위가 사천 오십척이고, 성안에 천지가 있어 비가 오나 가뭄에도 물의 증감이 없다 하였다. 산성으로 안양읍성과 같이 짝을 이루어 외적으로부터 언양을 방어하였다. 영조 3년(1727) 박문수 암행어사가 영남을 순행할 때 이 성에 올라보고 탄복했다고 하며, 당나라 장수가 바라보고 마치 천상성(天上城)과 같다고 하였다. 임진왜란 때 단조성 안에서 아군이 포위되어 대거 희생당했다고 한다. 두산백과에서 단조성을 경남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芝山里)에 있는 신라시대 산성으로 소개하고 있다. 울산시 울주군 삼남면 방기리(芳基里)와 연결되어있다. 영축산(靈鷲山) 위의 절벽을 이용하여 지은 테뫼식 석축 산성이다. 통도사 8경 중 하나로 꼽히며 ‘단성낙조(丹城落照)’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때 단조산성에서 조선군이 왜군들과 싸웠다는 사료가 있다. 지금은 대부분 붕괴되어 산성의 흔적만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이천리 단조산성(梨川里丹鳥山城)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일원에 위치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영축산의 정상부에 해당하는 곳이다. 조선시대 언양 지역 주민들의 피난을 위한 성곽으로 추정된다. 이천리 단조산성의 성곽 내외에서 채집된 토기와 자기 파편으로 미루어 볼 때 조선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천리 단조산성의 성벽은 자연석을 이용해서 담장처럼 쌓았는데 성벽의 잔존 높이는 50~70㎝, 너비는 70~250㎝ 가량 남아 있다. 18세기 언양읍지인 『헌산지(獻山誌)』에는 ‘둘레가 4,050자이고 연못이 한 곳인데 언제 쌓았는지 알 수 없으나 동, 서, 북은 무너졌고 남쪽만 그대로’ 라고 기록되어 있다. 해발 940m~970m의 능선부 신불평원에는 약 250만㎡의 광활한 억새군락지와 고산 습지가 형성되어 있다. 이 늪지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단조산성터다. 억새군락지 너머로 긴 띠를 풀어놓은 듯한 석성터는 신라시대 때 축조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북상을 저지하던 단조성이다. 이곳 지형이 단지 모양을 이룬다 하여 단지성(丹之城)이라고도 하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취서산고성(鷲棲山古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이 성을 지키던 의병들은 왜군의 기습을 받아 수많은 인명이 전사하였고, 그들이 흘린 피가 못을 이룰 정도였다고 한다. 조선 영조 때 암행어사 박문수가 단조성에 대한 보고서에서 ‘산성의 험준함이 한 명의 장부가 만 명을 당할 수 있는 곳’이라 격찬했다고 한다. 두산백과에서는 단조성의 위치를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에 있다고 소개하고,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일원이라고 소개하여 행정구역이 다르게 나오고 있다. 남부지방산림청장이 영축산 정상에 세운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 안내판의 보호구역 주소는 양산시 원동면 선리 산1-1, 산1-2, 산1-3으로 나온다. 고시면적은 3,385,054㎡로 무려 100만 평 정도의 광대한 면적이다. 단조성은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에도 속해 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단조성은 양산시 하북면, 원동면,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등에 걸쳐 있다. 영축산 정상에는 단조성, 고산습지인 단조늪이 있다. 단조성은 성벽돌이 그대로 남아 있어 역사 문화적, 환경 생태학적으로 중요하며 잘 보호해야만 한다. 3. 단조성과 통도팔경 향토 경승지는 과거 놀이 문화를 많이 향유하였던 양반과 선비들에 의하여 창조되고 팔경(八景), 구경(九景), 십경(十景), 십이경(十二景) 등으로 명명(命名)되었으며 그중에서도 팔경이 가장 많다. 양산시에는 양산팔경이 있는데, 양산팔경은 제1경 영축산 통도사, 제2경 천성산, 제3경 내원사 계곡, 제4경 홍룡폭포, 제5경 배내골, 제6경 천태산, 제7경 오봉산 임경대, 제8경 대운산 자연휴양림 등으로 2000년 7월 선정되었다. 양산팔경 중 제1경인 통도사를 양산시청 홈페이지에서 보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영축산 속에 자리한 통도사는 천년 고찰로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우리나라 3보 사찰 중 불보종찰로 꼽히는 명찰이다. 당나라에 수도를 떠난 자장율사가 석가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와서 신라 27대 선덕여왕 15년(646년)에 창건하였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1400여 년 동안 법등이 꺼진 적이 없는 사찰로 대웅전 안에 불상을 모시지 않고 불단만 마련해 놓고 있으며 대신 대웅전의 금강계단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것이 이 사찰의 특징이다. 또한, 통도사는 우리나라 사찰중 유형불교 문화재를 가장 많이 보유(43종)하고 있으며, 1999년 4월 15일 신축 개관한 통도사 성보박물관은 세계박물관을 통틀어 가장 풍부한 불교 유물을 자랑하는 국내 유일한 불교회화 전문 박물관이 있다. 특히, 절 주위 영축산 기슭 울창한 숲 속에 20개 암자가 자리 잡고 통도사를 앞섶에 싸듯이 안고 병풍을 두른 듯한 연봉 사이로 기암괴석의 절벽과 어우러진 영축산을 찾는 등산객이 많아 등산코스로도 이름난 곳이기도 하다. 통도사는 2018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울산광역시에는 울산 12경이 있다. 태화강 국가정원과 십리대숲, 대왕암공원, 가지산 사계, 신불산 억새평원, 간절곶 일출,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각석, 강동・주전 몽돌해변, 울산대공원, 울산대교 전망대에서 바라본 야경, 장생포 고래문화마을, 외고산 옹기마을, 대운산 내원암 계곡이다. 울산 12경 중에서 영축산 단조성과 연결되는 경치는 신불산 억새평원이다. 울주군 상북면과 삼남면 경계에 걸쳐 있으며 간월산, 영축산과 형제봉을 이룬다. 영축산 사이 약 3km 구간에는 넓고 평탄한 능선이 이어지면서 억새밭이 펼쳐진다. 억새를 보며 등산의 백미를 느낄 수 있고 패러글라이딩도 즐길 수 있는 전국 최대의 억새평원으로 꼽힌다. 봄이면 억새밭의 파릇파릇한 새순을, 가을이면 은빛 물결이 일렁이는 억새를 보기 위해서 수많은 등산객이 몰려든다. 단조성은 신라 때 김무력 장군이 축조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지만 대부분의 등산객은 역사적 유래를 잘 모르고 등산을 하고 있다. 김무력 장군이 관산성 전투에서 승리 후 현재의 울주군 언양으로 금의환향하였다. 언양은 경주의 남쪽에 위치하여 수도를 방어하는 중요한 외곽기지였다. 김무력 장군은 언양에서 가까운 천험(天險)의 요새인 영축산 정상에 단조성을 쌓았다. 울주군 언양과 단조성은 교통의 요충지로서 서라벌을 굳게 지키고, 또한 가야를 공략할 수 있는 기지 역할을 하였다. 김무력 장군이 사후에 영축산 자락에 묻힌 것도 보통 인연이 아니다. 울주군 상북면의 지명 유래에 김무력 장군이 주둔했던 군대와 관련된 것이 많이 나온다.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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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박사 화요 칼럼, 김무력 장군의 관산성 전투 승리의 배경과 성과 -와이뉴스1. 신라의 영토 확장과 백성의 이주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 12년 3월에 왕이 순수하여 낭성에서 묵었는데, 우륵과 그의 제자 이문이 음악에 정통하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그들을 불렀다. 왕이 하림궁에 머물며 그들에게 음악을 연주하게 하니, 두 사람이 각각 새 노래를 작곡해 연주하였다. 이보다 앞서 가야국 가실왕이 열두 줄의 거문고를 만들어 열두 달의 음률을 상징하고, 곧 우륵을 시켜 그 곡을 짓게 하였다. 우륵이 그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악기를 가지고 우리에게 투신해 오니, 그 악기를 가야금이라 하였다. 우륵은 가야국 가실왕(嘉實王) 때 악사로 활약한 가야금의 시조, 우리나라의 3대 악성 중의 하나이다. 가야국이 매우 혼란해지자 신라로 망명한 우륵을 진흥왕은 국원(國原 : 지금의 충주)에 살도록 하였다. 왕이 거칠부 등에게 명해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고, 승세를 몰아 10개 군을 빼앗았다. 진흥왕 13년에 왕이 계고와 법지와 만덕 등 세 사람에게 명해 우륵에게 음악을 배우게 하였다. 우륵은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가르치고, 법지에게는 노래를 가르쳤으며,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학업을 다 이루자 왕이 그들에게 연주하게 하더니, “지난 번 낭성에서 들은 연주와 다르지 않구나!” 하고 후하게 상을 주었다. 진흥왕 14년(553)에 백제의 동북지역인 남한강 상류 충주 일대를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금관가야 사람들을 옮긴 다음 금관가야 최후 왕인 구형왕의 막내왕자 김무력(金武力)을 그 군주로 임명하였다. 15년(554)에는 백제 성왕의 3만 대군을 관산성(옥천)에서 대파하고 성왕 이하 백제군을 괴멸시킴으로써 금강 상류 지역까지 진출하고, 16년(555) 10월에는 한강 하류 지역까지 장악하여 북한산을 순행하고 이곳으로 국경을 정한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紀異) 제1 진흥왕 조에 다음 내용이 나온다. 승성(承聖) 3년(554) 9월에 백제(百濟) 군사가 진성(珍城)을 침범하여 남녀 3만 9,000명과 말 8,000필을 빼앗아갔다. 이보다 먼저 백제가 신라와 군사를 합쳐서 고구려를 치려고 했었다. 이때 진흥왕은 말하기를,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하늘에 매여 있다. 만일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감히 고구려가 망하기를 바랄 수 있겠느냐!” 했다. 그리고 이 말을 고구려에 전하게 하니 고구려는 이 말에 감동되어 신라와 평화롭게 지냈다. 이런 때문에 백제가 신라를 원망하여 침범한 것이다. 신라는 동쪽으로는 동해안을 따라 구경을 확장하여 진흥왕 17년(556) 7월에 현재의 함경남도 안변에 비열홀주(比列忽州)를 둔다. 18년(557)에는 강원도 영서의 북원, 즉 원주를 소경(小京)으로 삼고 신주를 폐하며 북한산주를 둔다. 그리고 22년(561) 2월 1일에는 5가야의 중심지역인 비사벌(比斯伐; 혹은 比自火), 지금의 창녕(昌寧)에 최초의 진흥왕 순수비를 세웠다. 진흥왕 29년(568) 정월에는 연호를 대창(大昌)으로 바꾸고 진흥왕은 그동안 확장한 영토를 순수하며 함경남도 이원의 마운령비와 함흥의 황초령비, 서울의 북한산비 등 순수비를 세웠다. 신라는 정복한 지역의 토착 지배층을 강제로 다른 지역에 이주시켜 살게 함으로써 토착세력의 힘을 효과적으로 분산시키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신라가 체제를 정비하고 영역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조처가 뒤따랐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소경 설치로 나타났다. 통일신라 이전에는 이미 아시촌 소경(阿尸村小京, 514)과 국원소경(충주, 557) 및 북소경(강릉, 639)이 각각 설치되었다. 이들 소경의 지배체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신라 왕경 6부의 진골을 비롯한 주민들이 집단으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진흥왕대에 활발한 국토 확장, 귀족과 백성의 이주로 통치기반 확보, 우륵과 같은 가야인 포용정책으로 민심 안정을 도모하였다. 김관가야인의 충주 이주로 김무력 장군의 주력 부대인 가야 철기병 운영도 원활하게 되었다. 충주 칠금동 제철유적은 충주시 칠금동 탄금대 인근에 위치한 백제시대의 제철유적이다. 이 지역을 장악한 신라는 충주의 풍부한 철을 활용하여 무기를 제조할 수 있었다. 2. 한강 유역 확보와 서해 교통로 확보로 중국과 교섭 신라의 한강유역 점유는 인적・물적 자원의 획득과 함께 서해를 거쳐 중국과 교류할 수 있는 문호를 확보하였다. 백제는 전쟁에 패한 이후, 귀족들의 정치적 발언권이 강해지면서 동성왕 이후 강화되었던 왕권이 동요되고 국왕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졌다. 김무력 장군이 신주의 군주로서 새로 확보한 영토를 굳게 지켰다. 또한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사로잡아 죽이고 3만여 명의 백제・가야・왜의 주력군을 섬멸함으로써 백제 연합군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은 단순한 영토의 확장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한강 유역의 인적・물적 자원을 얻어 신라가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동시에 서해를 거쳐 직접 중국과 통할 수 있는 해상 교통로를 얻게 되었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계기는 중국 당나라와 동맹을 맺은 데서 비롯되었다. 후일 세계적인 제국인 당나라를 상대로 외교적 교섭을 성공리에 진행하여 든든한 우군을 확보하였다. 김무력 장군의 한강 유역 점령은 신라 주도 통일사업의 밑거름이 되었다. 관산성 전투 승리 후 100여 년이 지나 김무력 장군의 손자인 김유신 장군이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하였다. 진흥왕 25년(564)에는 강화만을 통해 북제에 직접 사신을 보낼 수 있게 되니 북제 무성제(武成帝)는 다음 해(565년) 2월에 진흥왕을 사지절동이교위낙랑군공신라왕(使持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으로 봉한다. 한강유역을 모두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옥저와 예맥(濊貊)의 옛 땅인 함경남도와 강원도 일대를 모두 차지하고 있는 실력을 인정하여 낙랑군공을 봉했다. 고구려왕은 요동군공, 백제왕은 대방군공으로 봉한 것과 비교해 보면 이 당시 삼국 중 신라의 위상이 높게 평가받았음을 알 수 있다. 남조 진(陳) 문제(文帝)는 신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을 보내며 석씨경론(釋氏經論; 불교의 경전과 논장) 1700여 권을 보냈다. 중국은 서해 교통로를 통해 중국의 선진 문물을 빠르게 흡수하여 제도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함으로써 국력을 신장시켰다. 3. 신라의 축성 기술과 책임제 신라의 축성 기록과 기술은 남산신성비, 삼년산성 등에 나타나 있다.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는 경주 남산의 남산신성을 쌓고 세운 비석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남산신성은 진평왕(眞平王·재위 579~632) 13년(591)에 처음 축성했다. 그 둘레가 2,854보(步)에 달했다고 하였다. 남산신성은 박물관 남쪽에 위치한 남산 해목령(蟹目嶺 : 바위가 게 눈처럼 튀어나와 붙여진 이름)을 둘러싸고 있는 둘레 3.7㎞의 돌로 쌓은 성(石城)인데, 지금은 쇠락(衰落)해 성벽 대부분이 무너졌다. 남산신성비는 1934년 10월 경주 남산 식혜골(食慧谷)에서 발견된 이래 2000년까지 총 10개의 비석이 발견됐다. 그 내용은 맹세의 글, 축성에 참여한 인물, 그리고 각각의 집단이 쌓은 거리를 기록하고 있다. 이 비석은 어떻게 성을 쌓았는지는 물론 국가가 대규모 국책사업에 어떻게 백성들을 동원했는지, 당시의 시대상은 어떠했는지를 알려주는 귀중한 역사자료다. ‘남산신성비’ 비문에서 눈여겨볼 것은 축성공사를 담당한 신라 관리, 백성들이 본인들의 이름을 새기고 자신들이 맡은 공구가 완공 후 3년 이내 무너지면 그 죄를 달게 받겠다고 맹세한 내용이다.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뭉쳐진 신라인들의 의지를 새긴 비석으로 현재의 공사 실명제와 같은 것이다. 경상북도 경주시 탑정동 식혜골에서 발견된 591년에 세운 경주남산신성비 제1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해년(辛亥年) 2월 26일, 남산신성(南山新城)을 지을 적에, 법에 따라서 (성을) 지은지 3년이 지나서 붕파(崩破)한다면 죄를 내릴 것이라 교사(敎事)하였으니, 교를 알려서 이를 서사(誓事, 맹세)토록 한다. 아량나두(阿良邏頭)인 사훼(沙喙)의 음내고(音乃古) 대사(大舍), 노사도사(奴舍道師)인 사훼(沙喙)의 합친(合親) 대사(大舍), 군상촌주(郡上村主)인 아량촌(阿良村)의 금지(今知) 찬간(撰干), 장척(匠尺)인 아량촌(阿良村)의 말정차(末丁次) 간(干), 문척(文尺)인 죽생차(竹生次) 일벌(一伐), … 11보(十一步) 3척(三尺) 8촌(八寸)을 받았다. 축성기록이 확실한 고대산성인 삼년산성은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 산 1-1번지에 있다. 이곳은 삼국이 쟁패한 국경의 요충지로 축성시기와 축성기간, 동원된 인력, 성곽 전의 기록에 이르기까지 소상하게 알려진 유일한 고대산성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자비왕 3년(470)에 삼년산성을 쌓았는데, 삼년(三年)이라 한 것은 3년이 걸렸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라 하였다. 소지왕 8년(486)에 이찬 신분이었던, 실죽장군(實竹將軍)이 일선군(一善郡 : 경북 선산)의 장정 3천 명을 징발하여 고쳐 쌓은 구체적인 기록이 보인다. 삼년산성은 둘레가 1,8㎞ 내외로, 오정산(烏頂山)의 계곡을 둘러싸는 능선을 따라 축조한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이다. 산성은 마치 금성탕지(金城湯池)와 같은 천연지세를 이용하면서 이곳에 수직에 가까운 성벽을 높게 쌓아, 난공불락의 성곽으로 마련하였다. 금성탕지는 ‘쇠로 만든 성(城)과 끓는 물을 채운 못’이란 뜻으로 매우 견고(堅固)한 성(城), 해자(垓子)를 의미한다. 축성에 사용된 성돌은 절리가 발달된 점판암으로, 장방형으로 납작하게 가공하여 한 층씩 가로세로 교대로 정교하게 수직에 가깝게 쌓아 올렸다. 성벽의 규모는 위치에 따라 다소 높이의 차이를 보이기는 하나, 성벽은 대개 하부 폭 10m, 상부 폭 8m, 높이는 무려 14~16m에 이르는 구조이다. 또한 삼국시대의 성곽으로 유일하게 여장 유구까지 조사되었다. 이와 같은 높은 성벽의 엄청난 하중이 성벽의 기저부에 집중되어 성벽의 약화를 막고자 성벽하단에는 덧대어 석축을 한 보축을 하였다. 이러한 보축시설은 본성의 축조에 버금가는 물자와 공력을 필요로 하는 보강시설이었다. 이러한 축성기법은 5세기의 신라인이 이루어 낸, 상상을 초월하는 세계적으로도 가장 우수한 축성술을 보여주고 있다. 김무력 장군이 이끈 관산성 전투에서 보은의 삼년산성에 주둔한 병사들이 큰 공을 세웠다. 김무력 장군은 첩보작전을 통하여 백제 성왕이 관산성 전투 현장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삼년산성에서 달려온 고간 도도에게 주요 길목에 매복하도록 지시하였다. 밤에 호위병 50명을 이끌고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 구진벼루를 지나가는 성왕, 좌평 4명을 사로잡아 참수하였다. 성왕이 전사하자 백제군은 사기가 크게 떨어졌고, 김무력 장군이 지휘하는 신라군은 승승장구하여 관산성 전투의 최후 승자가 되었다. 필자는 관산성 전투가 벌어진 충북 옥천군, 대전시, 보은군 등을 답사하였다. 백제와 신라가 대치하였던 당시 국경선에 설치되었던 수많은 산성을 답사하면서 우리 선조들의 우수한 축성 기술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삼국시대의 왕이나 왕자, 군 지휘관들은 영토를 확장하기 위하여 안전한 후방에 머물지 않고 최전선에서 군대를 지휘하였다. 백제의 성왕과 아들인 부여창, 진흥왕, 김무력 장군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특히 진흥왕은 금관가야에서 귀순한 왕자인 김무력 장군을 과감하게 기용하여 영토 확장에 성공하였다. 진흥왕은 새로 개척한 국경을 방문하여 순수비를 세웠다. 이 순수비에 김무력 장군의 기록이 나온다. 진흥왕의 적극적인 포용정책으로 가야인을 받아들여 인재를 활용하였다. 김무력 장군의 활약과 성공 배경에는 이러한 요인들이 작용하였다.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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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력 장군의 관산성 전투 승리가 미친 영향/심상도 박사 화요 칼럼1.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가 패한 원인 관산성 전투에 관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이 간략하게 나와 있어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일본서기에는 관산성 전투에 관한 내용이 비교적 소상하게 나와 있다. 일본서기는 역사에 대한 왜곡이 있어 전적으로 믿을 바는 못 되지만 세부 항목에서는 참고할만한 내용이 있다. 일본서기의 내용을 보면 관산성 전투를 시작할 때 백제의 대신들이 반대하였다. 여창(餘昌)이 신라(新羅)를 정벌할 것을 계획하자 늙은 재상이 “하늘이 함께 하지 않으니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라고 간하였다. 여창이 “늙었구려. 어찌 겁내시오. 우리는 대국(大國)을 섬기고 있으니 어찌 겁낼 것이 있겠소.”라 하고, 드디어 신라국(新羅國)에 들어가 쿠다무라노소코(久陀牟羅塞)라는 보루를 쌓았다. 관산성 전투 초기에는 백제가 우세하였으나 신라의 신주 군주인 김무력 장군이 지원병을 끌고 달려온 이후에 전세는 일거에 역전되었다. 이와 반대로 신라는 관산성 전투 초기 성이 함락되고 전세가 불리하였으나 이후 후속 지원군을 총동원하여 대처하였다. 신라가 일치단결하여 총력을 기울인 반면 백제는 귀족들의 동의를 얻지 못해 지원병력이 부족하였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귀족들의 반대에도 전쟁을 주도했다 참패당하고, 부왕의 죽음까지 자초한 태자 여창은 즉위하지 않고 출가해 부왕의 명복이나 빌고자 했다. 대신과 백성들의 만류로 출가해 수도하려던 여창의 계획은 철회됐지만, 성왕의 죽음으로부터 위덕왕의 즉위까지는 몇 년의 공백이 있다. 관산성 패전의 충격이 그만큼 컸다. 관산성 전투가 벌어진 충북 옥천군에 있는 제2의료기기 산업단지(충북 옥천군 옥천읍 서대리 431번지 일원) 부지 내 유적에서 7세기 신라 고대 도로가 발굴되었다. 확인된 도로는 남동-북서 방향으로 진행하며 산 정상부근 사면과 계곡부를 이어지면서 노면을 조성한 것으로, 약 320m가 넘게 확인됐다. 노면의 폭은 약 5.6m에 달하고 도로의 표면에는 수레바퀴 자국과 수레를 끌었던 짐승의 발자국도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이 도로는 1886년경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목적으로 작성한 지형도에도 ‘소로(小路)’로 표시돼 있다. 도로 발굴 과정에서 7세기 신라토기, 기와부터 조선 전기에 해당하는 백자 등이 출토되었다. 이 도로는 신라에서 조선 전기까지는 교통과 군사상 도로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관산성 전투 이후에 조성된 도로이지만 당시 신라의 영토확장 의지를 알 수 있다. 2. 관산성 전투의 주역인 백제 성왕과 왕자 부여창의 리더십 부족 삼국사기 제26권 백제본기 제4에 의하면 백제 성왕은 재위기간(523년~554년) 중 많은 업적을 남겼다. 성왕(聖王)의 이름은 명농(明穠)이다. 무령왕(武寧王)의 아들이다. 지혜와 식견이 뛰어났고 일을 처리함에 결단성이 있었다. 무령왕이 돌아가시고 왕위를 잇자 나라 사람들이 성왕이라고 불렀다. 가을 8월, 고구려 병사가 패수(浿水)에 이르자, 임금이 좌장 지충(志忠)에게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싸우게 하니 그가 적을 물리쳤다. 3년(서기 525) 봄 2월, 신라와 서로 예방하였다. 4년(서기 526) 겨울 10월, 웅진성(熊津城)을 수리하고 사정(沙井)에 목책을 세웠다. 7년(서기 529) 겨울 10월, 고구려왕 흥안(興安, 안장왕)이 직접 병사를 거느리고 침범하여 북쪽 변경의 혈성(穴城)을 함락시켰다. 임금이 좌평 연모(燕謨)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오곡(五谷) 벌판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 16년(서기 538) 봄, 도읍을 사비(泗沘, 부여)[소부리(所夫里)라고도 한다.]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고 하였다. 18년(서기 540) 가을 9월, 임금이 장군 연회(燕會)에게 명령하여 고구려의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26년(서기 548) 봄 정월, 고구려왕 평성(平成, 양원왕)이 예(濊)와 공모하여 한수 이북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해오자, 임금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왕이 장군 주진(朱珍)을 시켜 갑옷을 입은 병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출발하게 하였다. 주진은 밤낮으로 행군하여 독산성 아래에 이르러 고구려 병사들과 일전을 벌여 크게 이겼다. 28년(서기 550) 봄 정월, 임금이 장군 달기(達己)를 보내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공격하게 하여 빼앗았다. 3월, 고구려 병사가 금현성(金峴城)을 포위하였다. 31년(서기 553) 가을 7월, 신라가 동북쪽 변경을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겨울 10월, 임금의 딸이 신라로 시집 갔다. 32년(서기 554) 가을 7월, 임금이 신라를 습격하고자 몸소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혼전 중에 임금이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聖)이라 하였다. 위덕왕의 재위기간(554년~598년) 중의 중요 전쟁을 삼국사기를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원년(서기 554) 겨울 10월, 고구려가 대대적으로 병사를 동원하여 웅천성(熊川城)을 침공했으나 패하고 돌아갔다. 위덕왕은 561년부터 부왕(父王)인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참수당한 치욕을 복수하기 위하여 신라를 자주 침략하였다. 후속 공격은 관산성 전투 때만큼 위력이 없었으며, 계속 실패해서 신라가 새로 정복한 땅을 영토로 굳히는 것을 막지 못했다. 관산성 전투에서 국왕 직속의 정예부대가 큰 손실을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덕왕 8년(서기 561) 가을 7월, 임금이 병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침범하였다가 신라군의 반격으로 패하였다. 죽은 자가 1천여 명이었다. 위덕왕 24년(서기 577) 겨울 10월, 신라 서쪽 변경의 주와 군을 침범하였는데, 신라의 이찬 세종(世宗)이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우리를 쳐부수었다. 3. 백성을 우선시하는 신라 진흥왕의 부국강병책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 진흥왕(眞興王)조에 보면 백성을 중시하고 국토 확장에 치중하는 활약상이 잘 나와 있다. 원년(서기 540) 8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고 문무관(文武官)의 관작을 한 등급씩 올려 주었다. 5년(서기 544) 봄 2월, 흥륜사(興輪寺)가 완성되었다. 3월, 사람들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어 부처를 받드는 것을 허락하였다. 6년(서기 545) 가을 7월, 이찬 이사부가 아뢰어 말하였다. “나라의 역사는 임금과 신하의 선악을 기록하여 좋은 것 나쁜 것을 먼 후손에게까지 보이는 것입니다. 역사를 편찬하지 않으면 후손들이 무엇을 보겠습니까?” 임금이 진심으로 그렇다고 여겨 대아찬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명하여 문사들을 널리 모아 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9년(서기 548) 봄 2월, 고구려가 예인(穢人)과 함께 백제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자 백제가 구원을 청하였다. 임금은 장군 주령(朱玲)을 보내 도와주었었다. 11년(서기 550) 봄 정월,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빼앗았다. 3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함락시켰다. 임금은 두 나라의 병사가 피로해진 틈을 타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병사를 내어 공격하게 했다. 두 성을 빼앗아 증축하고, 병사 1천 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12년(서기 551) 3월, 임금이 지방을 돌아보다가 낭성(娘城)에 묵으며, 우륵(于勒)과 그의 제자 이문(尼文)이 음악을 잘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특별히 불렀다. 임금이 하림궁(河臨宮)에 머무르며 음악을 연주하게 하니, 두 사람이 각기 새로운 노래를 지어 연주하였다.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우륵은 악기를 가지고 우리에게 귀순하였기에, 그 악기의 이름을 가야금(加耶琴)이라 하였다. 임금이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였는데, 승세를 타고 10개 군을 취했다. 14년(서기 553) 가을 7월,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武力)을 군주로 삼았다. 겨울 10월, 임금이 백제왕의 딸을 맞아들여 작은 부인으로 삼았다. 15년(서기 554) 가을 7월, 명활성(明活城)을 보수하여 쌓았다. 백제 왕 명농(明穠, 성왕)이 가량(加良)과 함께 관산성(管山城)에 쳐들어왔다. 군주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金武力)이 주의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어우러져 싸웠는데,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도도(高干都刀)가 빠르게 공격하여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싸워서 크게 이겼다. 좌평(佐平) 네 명과 병사 2만 9천 6백 명의 목을 베었으며, 돌아간 말이 한 마리도 없었다. 16년(서기 555) 봄 정월, 비사벌(比斯伐)에 완산주(完山州)를 설치하였다. 겨울 10월, 임금이 북한산(北漢山)에 순행하여 영토의 국경을 정하였다. 11월, 임금이 북한산에서 돌아왔다. 임금이 거쳐 지나온 주군(州郡)의 일 년간 세금을 면제해 주고, 그 지방의 죄수 가운데 두 가지 사형 죄를 제외하고는 모두 풀어주었다. 17년(서기 556) 가을 7월, 비열홀주(比列忽州)를 설치하고 사찬 성종(成宗)을 군주로 삼았다. 4. 관산성 전투 패배로 인해 백제의 영향력 약화와 대가야의 멸망 562년 가야가 멸망할 당시 백제는 위덕왕 재위 8년이며, 신라는 진흥왕 재위 22년이다. 진흥왕 9월 가야가 신라에 대반란을 일으키므로, 이사부(異斯夫)를 보내어 무력으로 가야국을 완전히 정복하였다. 진흥왕 19년(서기 558) 봄 2월, 귀족 자제와 6부의 부유한 백성을 국원으로 옮겨 그곳을 채웠다. 나마 신득(身得)이 포노(砲弩, 돌을 쏘도록 만든 무기의 일종)를 만들어 바치니 그것을 성 위에 설치하였다. 23년(서기 562) 가을 7월, 백제가 변방의 백성을 노략질하였다. 임금이 병사를 내보내 막아 싸우게 하였다.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9월,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이 이사부에게 명하여 토벌케 하였는데, 사다함(斯多含)이 부장(副將)이 되었다. 사다함은 5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달려갔다. 전단문(栴檀門)에 들어가 흰 기(旗)를 세우니 성 안의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사부가 병사를 이끌고 다다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전공을 논함에 사다함이 으뜸이었다. 임금이 좋은 밭과 포로 2백 명을 상으로 주었으나 사다함은 세 번이나 사양하였다. 임금이 강하게 권하자 포로를 받았으나, 풀어주어 양민이 되게 하고 밭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니,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찬미하였다. 삼국사기 제44권 열전 제4 사다함(斯多含) 열전을 보면 진골 계통으로 내밀왕(奈密王, 내물왕)의 7세손이요, 아버지는 급찬 구리지(仇梨知)이다. 본래 높은 가문의 귀한 자손으로서 풍채가 깨끗하고 준수하며 뜻과 기백이 방정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화랑으로 받들기를 청하므로 마지못해 화랑이 되었다. 그를 따르는 무리가 무려 1천 명이나 되었는데 사다함은 그들 모두의 환심을 얻었다. 사다함은 애초에 무관랑(武官郞)과 생사를 같이하는 벗이 되기를 약속하였는데, 무관이 병들어 죽자 너무 슬프게 울다가 7일 만에 죽었다. 나이가 17세였다. 김무력 장군이 관산성 전투의 승리는 국가의 운명을 바꾸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김무력 장군은 뛰어난 리더십으로 백제군 3만 명을 괴멸시키고, 이후 신라의 영토 확장에 큰 공을 세웠다. 관산성 전투 당사자인 신라의 진흥왕, 백제의 성왕과 아들 부여창의 리더십을 비교해보면 백제는 한순간의 판단착오로 패배를 자초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왕이 부하 50명을 데리고 이동하다가 포로가 된 것이 결정적 패인이었다. 김무력 장군은 첩보작전을 통해 성왕이 전쟁터에 온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기민하게 대처하여 승기를 잡았다. 성왕에 이어 부여창은 위덕왕이 되었으나 진흥왕의 위세에 밀려 큰 업적을 남기지 못하고 내리막길을 걸었다. 반면 진흥왕은 위험한 국경지방을 순시하며 영토 확장에 공을 들이고 백성들을 위로하여 민심을 얻었다. 관산성 전투에 참전했던 대가야는 신라의 보복을 받아 결국 멸망하였다. 김무력 장군의 관산성 전투 승리의 여파는 대단히 커서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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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력 장군의 기습공격으로 백골이 산처럼 쌓인 백골산성 / 심상도 박사 화요 칼럼1. 3만 명 백제군 시신이 산처럼 쌓였던 백골산성의 평범한 안내문 백골산성에 오르면 산성 안내판이 있는데, 김무력 장군의 기습공격으로 죽은 백제군의 시체가 쌓여 백골이 산을 이루었다는 치열한 전투의 역사와 내력은 적혀 있지 않으며 평범하게 산성의 현재 모습, 성의 전략상 위치 등만 소개하고 있다. 백골산성 안내문은 다음과 같다. 백골산성의 위치는 대전광역시 동구 산하동 산13번지이며, 대전시 기념물 제22호로 1991년 7월 10일에 지정되었다. 이 산성은 해발 340m의 백골산 정상부에 테뫼식으로 쌓은 석축산성이다. 성벽은 산 정상부에 지형에 따라 축조하였고, 성 둘레는 약 400m이다. 성벽은 현재 가파른 지형에 축조된 관계로 완전히 무너져내린 상태로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기에는 어렵다. 지형학적으로 볼 때 성의 북쪽으로는 백제의 전략 거점인 계족산성이, 동쪽으로는 신라의 유명한 관산성을 끼고 있으며, 현재 150만 대전시민의 식수인 대청호가 자리잡고 있지만, 성이 축조될 당시만 해도 신라를 마주보고 금강이 흐르고 있어 육로와 수로를 지키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저광역시 동구청의 백골산성 소개 역시 백골산성 정상의 안내문과 거의 유사하게 거의 3만 명의 백제군이 전사한 백골산성의 치열하고 처연한 전투 내용은 아무런 언급이 없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골산성은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쌓은 산성으로 둘레는 400m이다. 이곳 백골산성은 정상부를 둘러싸고 있는 테뫼식(성곽의 축조 지형이 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하여 산의 7~8부 능선을 따라 거의 수평 되게 한 바퀴 둘러 쌓은 방식)의 석축산성으로 성벽의 대부분은 허물어져 원래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고, 1991년 7월에 시(市)기념물 제 22호로 지정됐다. 특히 이곳 산성은 옛 군사적 요충지로, 서쪽으로는 백제의 전략 거점인 계족산성이 있고, 동족으로는 신라의 유명한 관산성을 끼고 있어 백제가 신라로 들어오는 유일한 길목을 지키는 초소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소개한 백골산성 정상의 안내판, 대전시 동구청의 백골산성 유래와 소개는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고 일반적인 산성 소개로 그치고 있어 아쉽다. 식장산 답사에서 필자가 만난 대전시민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어 김무력 장군 이야기를 들려주니 학교의 역사 시간에 배운 바가 없으며 처음 듣는 소리라고 하였다. 역사의 진실은 외면하고 감춘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2. 백골산성은 대청호 둘레길 5구간 낭만길 성곽은 적의 침입이나 이동을 빨리 인지해야 하므로 주변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야 한다. 또한 적이 쉽게 공격하지 못하도록 성곽이 들어선 지역들은 대개 전망도 좋고, 아름다운 산과 하천으로 둘러싸여 있어 여행 명소가 될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백골산성 역시 이와 같은 조건을 충족하는 전략적 요충지며 산성에서 대청호를 내려다보는 경치가 일품이다. 대청호 오백리 둘레길에 백골산성이 포함되어 있다. 전망을 가리는 잡목을 제거해야 잘 보이는데, 대전시의 둘레길 관리가 소홀하여 잡목이 앞을 가려 사진 찍기 힘들었다. 손자병법 중 작전 편에는 식량 현지 조달의 중요성이 나타난다. 적에게서 빼앗은 식량이 아군 식량의 20배의 값어치를 한다는 뜻이다. 청야 전술(淸野 戰術)은 주변에 적이 사용할 만한 모든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없애 적군을 지치게 만드는 전술이다. 견벽청야(堅壁淸野)라고도 한다. 공격받는 방어측이 자발적으로 사용하는 초토화 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손자병법을 통해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적으로부터 식량을 빼앗아 현지에서 조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청야 전술로 적의 자급자족을 막는 것은 적에게 막대한 피해를 안겨줌과 동시에 치명적인 식량 문제를 발생시킨다. 역사 속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청야전술은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 중 살수 대첩에서 을지문덕이 사용하였다. 을지문덕은 30만이 넘는 수나라 군대가 고구려를 공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수양제의 별동대를 상대하였다. 을지문덕은 요동의 방어를 부하들에게 맡기고 명림답부 이래 고구려에서 사용해 오던 청야전술을 펼쳤다. 수나라 군사들이 고구려 영토 안에서 식량을 얻지 못하도록 전쟁터 주변의 사람들과 먹을 것을 전부 치워 버리고 산성으로 이동하였다. 수나라 군사들은 고구려 깊숙이 쳐들어오면서 가져온 식량이 점점 떨어져 전체적으로 부족해졌다. 병사들은 날이 갈수록 식량부족 때문에 굶주림에 지쳤다. 피로한 적을 살수까지 유인하여 수나라 군대를 궤멸시켰다. 대청호 오백리길은 호수 주변을 걷는 편한 구간이지만, 백골산성이 포함된 5구간은 산을 타야 한다. 대전 동구 ‘바깥아감 버스정류장’ 부근에서 등산을 시작해야 한다. 낭만과 어울리지 않는 이름의 백골산이 포함되어 있지만 역사의 내력을 상세하게 해설해주는 안내판이 없어 답사객들은 막연하게 백제와 신라의 전쟁터였다는 사실만 짐작할 뿐이다. 강살봉, 꾀꼬리봉을 지난 산성까지 가는 길은 나무가 무성하여 대청호를 조망할 곳이 별로 없다. 필자는 진고개식당 입구에서 등산을 시작하였다. 백골산성 안내 표지판이 잘 되어 있어 길을 찾기 쉬웠다. 올라가면서 계곡을 유심히 보니 바닥의 바위가 마치 핏빛으로 물든 것처럼 시뻘건 일부 구간이 있었다. 필자는 백골산성 전투에서 죽은 백제군의 피가 흘러내려 계곡에 핏자국이 생긴 것이 아닌지 잠시 상상하며 사진을 찍었다. 물론 과학적으로 따지면 바위에 철 성분이 많아 산화작용으로 붉게 변하였다고 하면 간단하다. 그러나 백골산성의 치열한 전투 상황을 스토리텔링하면 관광객의 상상과 흥미를 유발할 수 있다. 전북 남원시의 이성계 장군 황산대첩지인 인월 방향으로 가면 왜구가 죽어 흘러내린 피로 얼룩진 피바위가 있다. 달오름마을 들어가는 다리 근처의 피바위를 볼 수 있다. 남원시에서 ‘황산대첩지 피바위’라고 써서 세운 안내판이 있어 찾기 쉽다. 이성계 장군이 죽인 왜구가 1만여 명이다. 백골산성에서 흘러내린 계곡의 피바위는 규모가 크지 않다. 계곡을 거쳐 능선길을 따라 올라가면 백골산(해발 340m) 정상 직전의 구부러진 소나무가 있는 곳이 대청호 조망의 명소다. 대청호를 내려다볼 수 있는데, 백골산성에서는 대청호가 남해 바다의 다도해처럼 보인다. 백골산 정상에 있는 백골산성은 성벽이 거의 허물어져 흔적이 잘 보이지 않는다. 1500여 년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당국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성곽은 무너졌다. 성벽의 돌은 역사의 유래를 잘 모르는 등산객의 발길에 밟히며 무심한 세월을 보내고 있어 안타까웠다. 3. 처절하게 패배한 백골산성의 전투의 진실이 담긴 지명 유래 삼국시대의 고구려, 백제, 신라간의 영토 확장 전쟁은 삼국이 통일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서로 국경을 마주 보고 높은 고지에 산성을 쌓고, 서로 돌아가며 동맹을 맺고, 배신과 복수의 전쟁이 끊임없이 발생하였다. 마치 적의 적은 우리 편이자 동맹으로 여겨 이합집산이 일어났다. 동맹은 국내에 국한되지 않고 외세를 끌어들여 사활을 건 전쟁을 통해 적을 물리치기 위해 몰두하였다.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군은 가야와 왜군과 동맹을 맺어 신라를 공격함으로써 국제전이 벌어졌다. 후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당나라와 동맹을 맺어 통일 전쟁에 외세를 이용했다고 비난받았지만 생존을 위한 국가간의 전쟁에서 힘의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은 무한대로 이어졌다. 백제 성왕은 자신의 딸인 공주를 진흥왕에게 시집을 보내 신라를 안심시키면서 뒤로는 왜군에게 지원을 요청하는 이중성을 보였다. 신라 역시 백제와의 관산성 전투 초기 전세가 불리 하자 신라 진흥왕은 고구려와 밀약을 맺어 고구려와의 국경인 한강 유역에 주둔하던 신주의 군주인 김무력 장군의 군사를 관산성 전투 현장으로 급하게 호출하였다. 신라는 운이 따라 김무력 장군 휘하의 주력군을 지원군으로 불렀지만 고구려군은 북쪽에서 중국과의 전쟁에 치중하느라 신라의 국경을 넘볼 여유가 없었다. 개인이든 국가든 최선을 다한 노력을 하고, 운이 따르면 성공하게 된다. 대전시 동구 산하동 절골마을은 대청댐 건설로 일부 수몰되고 남은 구절골, 수몰되어 없어진 마을 사람들이 이사하여 부근에 새롭게 정착한 신절골이 있다. 옛날에는 큰 절이 있었다던 장터 동쪽으로 백골산 북쪽에 위치한 마을을 절골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스님이 바랑을 지고 가는 형국이라 하는데, 오래 전부터 전해지는 마을의 유래가 있다. 절골식당 앞의 벽화에 백골산성 전투의 유래가 적혀 있었다. 역사 연구에서 현장 답사가 중요하고 마을 이름의 유래를 추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필자는 대전시와 옥천군의 마을 유래, 전설 등을 연구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관산성 전투의 실마리를 찾아내었다. 절골식당의 주인 부부가 필자의 질문에 친절하게 응답해주어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삼국시대에 백제와 신라가 여러 차례 큰 싸움을 하여 죽은 병사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있었다고 한다. 그때 사비성 근처에서 입문 수도하던 한 스님이 죽은 병사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이곳에 와서 절을 짓고 병사들의 시구(屍軀 : 죽은 사람의 몸)를 묻으며 일생을 보내다가 그 스님이 죽자 절도 없어지고 대신 이곳을 떠나 극락세계로 가는 지형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그곳을 바라보고는 스님이 배낭을 지고 극락세계로 가는 그 모습이라고 하여 절골 지형을 향하여 기도를 드린다고 한다. 절골 또는 사동(寺洞)이라고도 부른다. 백골산 전투에서 죽은 병사들의 시신과 유골을 묻어주며 일생을 보낸 스님이 공덕을 쌓은 후 성불하여 서방 극락정토로 간 아름다운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삼국시대의 불교가 전쟁에서 죽은 병사의 시신과 유골 처리를 담당하여 망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역할을 했다. 시신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르고 귀신이 나올지 모르는 유골이 산더미처럼 쌓인 곳에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속세를 초월하여 도를 닦는 스님밖에 없다. 오늘날에도 불교계에서 사후에 영혼을 극락세계로 인도하기 위하여 49재를 지내고 있다. 백골산성 전투가 관산성 전투의 대미를 장식하였다. 관산성 전투의 초기에 성이 함락되고 신라는 위기에 봉착하였다. 이후 총력체제로 돌입하여 한강 유역에서 고구려군을 방어하던 신주의 김무력 장군이 급히 지원병력을 이끌고 내려왔다. 김무력 장군 휘하의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백제 성왕이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매복해 있다가 성왕과 좌평 4명을 사로잡아 참수함으로써 벡제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김무력 장군은 철기병을 대동하고 신속하게 이동하여 백골산성 앞의 금강변 절골마을 평지에 주둔하고 있던 백제군을 기습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옥천 방면의 신라군은 백제 왕자 부여창의 군대가 주둔한 환산성(고리산성)을 공격함으로써 백제군은 퇴로가 차단되어 29,.600여 명의 병사가 전사하고 백제 왕자인 부여창만 겨우 탈출하였다. 환산성에서 백골산성은 연결된다. 백골산성 전투에 패배한 백제는 내리막길을 걷고 반대로 신라는 영토 확장을 거듭하여 국운이 융성하게 되었으며 후일 김무력 장군의 손자인 김유신 장군이 삼국통일을 하였다.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김무력 장군의 공 덕분에 후일 삼국통일이 가능해졌다.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