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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와이뉴스 총괄이사의 화요칼럼, 위험한 황산역로의 보수

기사입력 2022.12.28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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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산 잔로비

양산 황산잔로비(梁山 黃山棧路碑)는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에 있는 비석이다. 2015년 7월 30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593호로 지정되었다. 잔로(棧路)는 잔도(棧道)라고도 하는데 가파른 벼랑길에 나무를 걸쳐 낸 길을 말한다. 황산 비리, 황산 베리 등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대동여지도』에는 황산도(黃山道)로 표기되어 있다. 황산잔도는 밀양의 작원잔도, 문경의 토끼비리와 함께 영남대로의 가장 위험한 3대 잔도였다.

 

임경대에서 황산역에 이르는 비탈길을 일러 황산천(黃山遷; 황산베리) 또는 물금천(勿禁遷; 물고미잔로)이라고 한다. 밀양 검세리의 까치비리와 함께 낙동강 하류의 대표적인 비리길이다. 좁고 험하여 인마(人馬) 사고가 잦았는데, 이만도의 『양산군읍지』에 보면 황산천은 군 서쪽 20리에 있으니 서울에서 동래까지 이르는 큰길이라고 나와 있다.

험산 절벽의 바위 벼랑을 깎아 만든 길이어서 발아래로 낙동강을 굽어보면서 나아가는 매우 위험하였다. 뾰족한 바위 조각과 크고 험한 바위 길은 마차의 수레바퀴를 쉽게 망가뜨렸다. 말도 미끄러지게 하는 위험천만한 길이었다.

황산잔로비는 황산천(黃山遷: 황산 벼리)을 따라 건설된 영남대로의 3대 잔도 중의 하나에 대한 중요한 역사적 증거가 되는 중요한 자료이다. 황산 잔로비를 보호하기 위하여 용화사 경내로 이전하였다.

황산잔로비의 재질은 화강암으로 제작되었으며, 현재는 비신(碑身)만 남아 있다. 비신 전면과 후면에 작은 글씨로 비문이 음각(陰刻)되어 있는데, 육안으로 판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마모가 심한 상태이다.

특히 제액인 ‘황산잔로비(黃山棧路碑)’ 다섯 글자 가운데 ‘잔(棧)’은 거의 확인 불가능하며 나머지는 어느 정도 판독이 가능한 상태다. 비문의 대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전면에는 강희(康熙) 33년(1694) 황산잔로를 정비한 후 그 일의 시말에 대해 기록했다.

 

2. 황산 잔로와 작원 잔로의 보수 과정

 

『양산읍지 구지 梁山邑誌(舊誌), 1697년』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갑술년(甲戌年 : 숙종 20년, 1694년)에 군수(郡守) 권성구(權聖矩)가 승(僧) 탄해(坦海)와 별장(別將) 김효의(金孝義)를 시켜 재력(財力)을 모아 깊은 곳을 메우고 험한 곳을 깎아내어 거의 평탄한 도로(道路)를 만드니 여행자의 편익이 이에 더할 바 없어 그 공을 기리고자 비를 세워 사적을 기록하였다.

 

이 비석은 강희 34년 갑술년(서기 1694년)에 세워진 뒤 홍수 등으로 인해 무너진 것을 도광 23년(서기 1843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후면에는 황산잔로비가 어떤 연유로 인해 쓰러져 묻혀 있다가 1843년 주민들에 의해 다시 중수되어 세워진 일에 관해 밝혀놓았다. 따라서 전면과 후면의 내용은 각기 다른 것이며, 작성 시기도 150년 정도 시간 차이가 있다.

 

『양산군지(지보), 1878년』에 다음의 내용이 나온다. 갑술 후(甲戌 後) 42년 병진(丙辰 1736년)에 군수(郡守) 임진하(任震夏)가 승(僧) 학능(學能)에게 명하여 재원을 마련하게 하고 4년 후 기미(己未 1739년)년에 군수(郡守) 박규환(朴奎煥)이 밀양부사(密陽府使) 임수적(任守迪)과 합력(合力)하여 작원(鵲院), 황산(黃山) 양기도[兩機道 : 낭떠러지에 나무와 돌로서 괴고 쌓아 보공(補工)하는 길)를 수치(修治)하였다.

 

갑술기사비(甲戌記事碑)에 기록된 바를 보면, [군서(郡西)에 있는 석기도(石機道)는 구불구불 수 리를 연이어 있으면서 층암을 깎고 그 아래에는 큰 강을 굽어보니 접족(接足)하는 인축(人畜 : 사람과 가축)의 사상자가 허다하였다.

 

영가(永嘉)의 권성구(權聖矩)께서 도임하여 스님 탄해 (坦海)에게 명하여 재력을 모으고 별장(別將) 이효의(李孝義)와 더불어 직업없이 놀고 있는 자들을 고용하여 험한 곳을 깎아 내리고 깊은 곳은 메워서 평탄한 길을 만드니 행인에게 베푼 바 지대하도다. 아! 이 군이 시작됨으로부터 이 길이 있었으나 이제야 비로소 평탄한 길이 되었으므로 행인이 서로 칭하(稱賀)하게 되었으니 어찌 시대가 사람을 기다려서 그리됨이 아니리오. 때는 갑술년의 가을이라.]

 

기미기사비(己未記事碑)에 기록된 바를 보면, [양산과 밀양의 경계는 서로 상접하여 있는데 그 중에 석기도(石機道 : 돌과 나무로 낭떠러지를 보공(補工)한 길)가 있으니 황산(黃山)과 작원(院)이 이것이다.

 

옛날부터 평상시에 수치(修治)한 지 오래되어 경사져 무너진 곳이 많았으니 병진년에 군수 임진하(任震夏)가 권선문(勸善文)을 반포하고 사화주(四化主 : 승려)에게 명하여 중수하니 관찰사(觀察使) 민응수(閔應洙)가 물자를 보조해 주었다.

 

처음으로 그 무리들과 더불어 경기를 존봉(尊奉)하더니 이제 군수 박규환(朴奎煥)이 때맞추어 영을 내리고 순상(巡相) 이기(李箕)가 곡물(穀物)과 역부(役夫)를 도와주고 밀양부사(密陽府使) 임수적(任守迪)이 또 역정(役丁)을 도와주어서 시공한 지 삼개월만에 마치니 험하였던 곳은 평이하게 되고 위험하였던 곳은 안전해져 수레는 전복할 염려가 없고 마필(馬匹)은 뒤집힐 염려가 없으니 이것이 모두가 저 오대부(五大夫)의 주선(周旋)과 용력(用力)이 없었다면 양(梁)의 험산로(險山路)가 어찌 다시 개척될 수 있었으리요.

 

또 화주(化主 : 승려)들의 각고 노력 또한 기록하지 않 을 수 없다.] 지금와서 옛 일을 돌이켜 보면 전인(前人)의 통착(通鑿:뚫어서 통함)한 뜻 또 한 성대하도다. 살펴보건데 두 비(碑)는 모두 누가 찬술하고 세웠는지 알 수 없다. 『양산읍지 구지(梁山邑誌 舊誌), 1697년』에는 제언(堤堰)위에 있다고 하더니 이후 도로 확장시 들어가 버렸다.

 

황산 잔로비는 원래 용화사 대웅전 왼쪽에 있었는데, 주지스님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황산 잔로비 안내문은 비문 옆에 있지 않고, 황산베랑길 자전거도로에 있다. 용화사에도 관광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안내판을 설치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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