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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박사 화요칼럼] 영남대로 3대 잔도 중의 하나인 관갑천 잔도

기사입력 2021.05.18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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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토끼비리와 고려 태조 왕건

 

 

잔도(棧道)는 원래 중국에서 외진 산악 지대 벼랑을 통과하는 길로 만들었다. 험한 벼랑 같은 곳에 선반을 매달아 놓은 듯이 만든 길이다. 절벽에 구멍을 낸 후, 그 구멍에 받침대를 넣고 받침대 위에 나무판을 놓아 만들었다. 중국 최초의 잔도는 전국 시대(기원전 476년~기원전 221년)에 만들어졌으며, 진나라가 고촉과 파를 침략하는 데에 쓰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도 잔도가 있는데, 조선시대 한양에서 동래에 이르는 영남대로(동래로) 상에 가장 험난한 구간으로 3대 잔도가 있다. 양산시의 황산잔도, 밀양시 삼랑진읍의 작천잔도, 경북 문경시의 관갑천 잔도(토끼비리)를 말한다. 석현성 진남문에서 오정산과 영강으로 이어지는 산 경사면에 개설된 천도(遷道 : 하천변의 절벽을 파내고 건설한 길)이다.

 

 

관갑천(串岬遷) 잔도(棧道)인 토끼비리는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 산41번지, 산42번지 등 43,067㎡의 면적에 걸쳐 있는데, 2007년 12월 17일 국가 명승 제31호로 지정되었다. 관갑천 토끼비리라고 한다. 비리는 벼랑의 문경 사투리다. 주변이 매우 아름다운 곳으로 명승답다.

 

양산의 ‘황산베랑길’에서 베랑은 벼랑의 양산(경상도) 사투리다. 황산잔도는 일제강점기 때 경부선 철도 부설로 많이 파괴되었지만 경파대, 정현덕 동래부사 영세불망비, 낙동강을 오르는 돛단배를 밧줄로 끌어올리던 고딧꾼들이 남긴 바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황산잔도를 복원하여 양산시민들과 관광객들이 옛길을 걸을 수 있다면 소중한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

 

 

토끼비리와 관련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고려 태조(왕건)가 남하하여 이곳에 이르렀을 때 길이 없었는데,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면서 길을 열어주어 갈 수가 있었으므로 토천(兔遷)이라 불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토끼비리가 토천에서 유래한 지명임을 보여준다. 고려 태조 왕건이 남하하다 이곳에 이르러 길이 막혀 헤매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토끼가 벼랑을 타고 달아나는 것을 보고 이를 쫓아 길을 냈다.

 

 

토끼비리는 고려 태조 10년(927) 9월에 후백제 왕 견훤이 근품성을 빼앗고서 신라의 서울인 경주에 육박하니 신라의 경애왕이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청했다. 왕건이 청을 받은 뒤 생각해보니 보병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어 정예기병 5천으로 달려갔다. 영강의 물은 넘쳐 건널 수 없고, 고모산성에서 길이 막혀 고민하던 중 토끼 한 마리가 바위 절벽 중간을 가로질러 나가는 게 보여 군졸들이 토끼가 지나간 길을 따라 길을 새로 개척하여 험로를 통과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문경시 마성면의 석현성(石峴城) 진남문(鎭南門) 아래 성벽을 따라가다 보면 오정산과 영강으로 이어지는 산의 경사면에 개설된 문경 토끼비리를 만날 수 있다. 오정산이 영강의 벼랑과 접하는 험한 벼랑의 바위를 깎아서 선반처럼 만든 길이다. 겨우 한 두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고 험하다.

 

 

‘진남교반(鎭南橋畔)’은 경북 8경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는 곳이다. 영강의 물줄기와 오정산의 산줄기가 태극 형상으로 어우러진 가운데 철교와 3개의 교량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오정산 자락에는 4세기 말 신라가 축성한 고모산성이 진남교반을 내려다보고 있다. 고모산성 바로 옆에 조선시대에 세운 석현성 진남문이 있다. 이 석현성벽이 끝나는 지점에서 토끼비리가 이어진다. 토끼비리는 영강 수면에서부터 30~60m 위의 벼랑에 나 있다.

 

 

2. 역사적 기록에 나오는 관갑천 잔도

 

조선 초기 문신이었던 면곡(綿谷) 어변갑(魚變甲)은 관갑잔도를 지나면서 매우 험난하고 힘든 모습을 ‘관갑잔도(관갑의 사다리길)’라는 제목의 시로 남겼다. “요새는 함곡관처럼 웅장하고,/ 험한 길 촉도 같이 기이하네./ 넘어지는 것은 빨리 가기 때문이요./ 기어가니 늦다고 꾸짖지는 말게나.”

 

 

어변갑[1380년(고려 우왕 6년)~1434년(조선 세종 16년)]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자는 자선(子先), 호는 면곡이다. 현령(縣令) 어연(魚淵)의 아들로 1399년(정종 1년)에 생원(生員)이 되고, 1408년(태종 8년) 식년 문과(式年 文科)에 장원급제하였다. 교서관(校書館)의 부교리(副校理)로 발탁된 뒤 성균관(成均館) 주부(主簿)를 거쳐 사간원(司諫院) 좌정언(左正言)・우헌납(右獻納)을 역임하였다. 충주판관일 때 아버지 어연은 하양현감이었는데, 부자의 직책을 바꿔달라 상소하여 태종은 어연의 직급을 올려주었다.

 

 

1420년(세종 2년) 새로 발족한 집현전(集賢殿) 응교(應敎)로서 지제교(知製敎)・검토관(檢討官)과 춘추관 기주관을 겸임하였다. 1424년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다. 배불숭유(排佛崇儒) 사조(思潮)가 약해져 가던 1424년(세종 6년) 벽불소(闢佛疏)를 내어 성리학으로 국시(國是) 관을 정착시키는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늙은 어머니 봉양을 위하여 관직을 버리고 함안으로 돌아갔다. 조정에서 어변갑의 행동과 의리를 아껴 김해부사, 사간 등의 벼슬을 내렸으나 취임하지 아니하고 세상을 마쳤다. 뒤에 좌찬성에 추증되고 고성의 면곡서원(綿谷書院)에 제향되었다.

 

 

고려말과 조선초의 학자이자 문신이었던 권근(權近 : 1352~1409년)의 견탄원(犬灘院) 기문(記文)에 관갑천 잔도에 관한 내용이 전한다. 권근의 본관은 안동. 자는 가원(可遠), 사숙(思叔). 호는 양촌(陽村).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367년(공민왕 16) 성균시(成均試)를 거쳐 이듬해 문과에 급제, 춘추관 검열이 되었다. 우왕(禑王) 때 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거쳐, 성균관 대사성・예의판서(禮儀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창왕(昌王) 때 좌대언(左代言)・지신사(知申事)를 거쳐 밀직사첨서사(密直司僉書事)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친명정책을 주장하였다. 조선 개국 후, 사병 폐지를 주장하여 왕권확립에 큰 공을 세웠다. 길창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대사성 · 세자좌빈객 등을 역임하였다. 문장에 뛰어났고, 경학에 밝아 사서오경의 구결을 정하였다. 저서에는 『입학도설』, 『양촌집』, 『사서오경구결』, 『동현사략』이 있다. 견탄원은 관리들의 숙소가 있던 곳으로 현재의 문경시 호계면 견탄리다. 견탄원 기문은 다음과 같다. 견탄은 우리 말로 개여울이다.

“경상도는 남쪽에서 가장 크며, 서울에서 경상도로 가려면 반드시 큰 재가 있는데, 그 재를 넘어서 약 백리 길은 모두 큰 산 사이를 가야 한다. 여러 골짜기의 물이 모여 내를 이루어 곶갑(串岬)에 이르러 비로소 커지는데, 이 곶갑이 가장 험한 곳이어서 낭떠러지를 따라 사다리 길로 길을 열어서 사람과 말들이 겨우 통행한다. 위에는 험한 절벽이 둘러 있고, 아래에는 깊은 시내가 있어 길이 좁고 위험하여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떨고 무서워한다. 몇 리를 나아간 뒤에야 평탄한 길이 되어 그 내를 건너는데, 그것이 견탄(犬灘)이다.”

 

3. 권신응의 봉생천 그림에 묘사된 토끼비리

 

조선시대 권신응이 그린 ‘봉생천(鳳生川)’이라는 그림에 당시 토끼비리를 지나다니던 사람들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권신응은 조부인 옥소 권섭(權燮)의 권유와 지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문경십승(聞慶十勝)』은 옥소 권섭(權燮 : 1671-1759년)이 소장한 화첩인 『모경흥기첩(暮景興寄帖)』에 수록된 『십팔명승(十八名勝)』 중 일부로 그린 사람은 권섭의 손자 권신응이다.

 

권섭의 소장품 대부분이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이거나 이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손자 권신응의 그림들은 권섭이 젊은 시절부터 교유한 겸재 정선(鄭敾 : 1676-1759년)의 진경산수화 화풍을 따라 그렸다.

 

문경지역에 존재했던 실경을 정선의 진경산수화법을 본받아 그린 것이고, 그림은 전체적으로 부감법을 사용하였다. 소나무 등 나무의 표현은 겸재의 필법을 본받았으나 묵법에 가까운 방법으로 표현하였고, 필치는 약간 거친 듯하고 부분적으로 굵은 미점을 사용하였다. 거친 필치에도 불구하고 실경을 표현하고자 한 노력은 경물이나 구도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권신응은 할아버지인 옥소의 교육에 따라 당시 유행했던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충실하게 추종하는 노력을 보였으나 그림의 전반적인 수준은 정선에 미치지는 못했다.

 

권섭은 직접 그린 그림이 없으면서 그림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 이유는 『공회첩(孔懷帖)』에 수록된 겸재 정선의 작품 ‘반구盤龜’와 ‘옹천(甕遷, 그의 손자인 권신응(權信應 1728-1787)이 그린 화첩 『모경흥기첩(暮景興寄帖)』, 『기회첩(寄懷帖)』, 『영모인갑첩(翎毛鱗甲帖)』, 『몽화(夢畵)』를 소장했다는 점 때문이다.

 

권섭은 국문학사에서 위치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데 충북 단양군 소금정공원에 동상(흉상)이 있다. 권섭은 국문 작품으로 송강(松江) 정철(鄭澈: 80여 수),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 67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75수) 등에 비견할 수 있는 75수의 시조 작품을 남겼다.

 

조선시대 전국을 유람한 문인으로 유명한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교산(蛟山) 허균(許筠), 난고(蘭皐) 김병연(金炳淵),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과 함께 5대 탐승가에 포함될 만큼 산천경개 탐승에 한평생을 보냈다. 옥소가 벼슬을 하지 않고 전국을 유람하며 산천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여행을 지원할 수 있는 친척들이 전국 각지에 관료로 있었기 때문이다.

 

문학에서 한시, 시조, 가사 외에도 유행록(遊行錄), 기몽설(記夢說) 등 광범위한 분야를 다루었고, 유고 『옥소고(玉所稿)』에 기록된 방대한 분량의 기문과 발문, 제화시를 통해 서화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중년 이후 전국의 명승지를 유람하였으며, 보고 겪은 바를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사람들의 무관심으로 버려졌던 토끼비리를 조사하여 세상에 널리 알린 사람은 고려대 최영준 명예교수(지리교육학과)였다. 최 명예교수 덕분에 토끼비리가 영남대로의 중요한 옛길이었던 것이 새삼 주목을 받게 되고 후일에 국가 명승 제31호로 지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옛길이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다.

 

양산의 황산잔도 역시 버려진 옛길로 남아 있었으나 요즘 다시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 덕분이다.

 

필자는 문경의 토끼비리를 답사하면서 황산잔도 복원을 대비하여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일제강점기 때 선정된 경북팔경 중 제1경으로 선정된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남역을 지나 된섬교를 건너 병풍바위를 지나 토끼비리를 걸어가면서 절벽 아래로 펼쳐진 절경을 감상하였다. 토끼비리도 왕복하면서 길을 낸 선조들의 지혜를 살펴보았다.

 

관갑잔도는 토끼비리로 친근하게 불리는데, 문경시에서 관광객들이 안전하게 걸어갈 수 있도록 데크와 안전난간을 설치하였다. 토끼비리가 끝나는 길목에는 데크 설치공사를 위한 자재가 많이 쌓여 있었다. 우리의 조상들이 짚신을 신고 험한 벼랑길의 바위를 반질반질하게 닳도록 다닌 것을 보고 감회가 새로웠다. 양산의 황산잔도에도 이런 흔적이 있다. 토끼비리 주변에 옛길과 연관된 관광자원이 많아 다음 회에 나머지를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토끼비리와 고려 태조 왕건

 

잔도(棧道)는 원래 중국에서 외진 산악 지대 벼랑을 통과하는 길로 만들었다. 험한 벼랑 같은 곳에 선반을 매달아 놓은 듯이 만든 길이다. 절벽에 구멍을 낸 후, 그 구멍에 받침대를 넣고 받침대 위에 나무판을 놓아 만들었다. 중국 최초의 잔도는 전국 시대(기원전 476년~기원전 221년)에 만들어졌으며, 진나라가 고촉과 파를 침략하는 데에 쓰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도 잔도가 있는데, 조선시대 한양에서 동래에 이르는 영남대로(동래로) 상에 가장 험난한 구간으로 3대 잔도가 있다. 양산시의 황산잔도, 밀양시 삼랑진읍의 작천잔도, 경북 문경시의 관갑천 잔도(토끼비리)를 말한다. 석현성 진남문에서 오정산과 영강으로 이어지는 산 경사면에 개설된 천도(遷道 : 하천변의 절벽을 파내고 건설한 길)이다.

 

관갑천(串岬遷) 잔도(棧道)인 토끼비리는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 산41번지, 산42번지 등 43,067㎡의 면적에 걸쳐 있는데, 2007년 12월 17일 국가 명승 제31호로 지정되었다. 관갑천 토끼비리라고 한다. 비리는 벼랑의 문경 사투리다. 주변이 매우 아름다운 곳으로 명승답다.

 

양산의 ‘황산베랑길’에서 베랑은 벼랑의 양산(경상도) 사투리다. 황산잔도는 일제강점기 때 경부선 철도 부설로 많이 파괴되었지만 경파대, 정현덕 동래부사 영세불망비, 낙동강을 오르는 돛단배를 밧줄로 끌어올리던 고딧꾼들이 남긴 바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황산잔도를 복원하여 양산시민들과 관광객들이 옛길을 걸을 수 있다면 소중한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

 

토끼비리와 관련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고려 태조(왕건)가 남하하여 이곳에 이르렀을 때 길이 없었는데,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면서 길을 열어주어 갈 수가 있었으므로 토천(兔遷)이라 불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토끼비리가 토천에서 유래한 지명임을 보여준다. 고려 태조 왕건이 남하하다 이곳에 이르러 길이 막혀 헤매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토끼가 벼랑을 타고 달아나는 것을 보고 이를 쫓아 길을 냈다.

 

토끼비리는 고려 태조 10년(927) 9월에 후백제 왕 견훤이 근품성을 빼앗고서 신라의 서울인 경주에 육박하니 신라의 경애왕이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청했다. 왕건이 청을 받은 뒤 생각해보니 보병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어 정예기병 5천으로 달려갔다. 영강의 물은 넘쳐 건널 수 없고, 고모산성에서 길이 막혀 고민하던 중 토끼 한 마리가 바위 절벽 중간을 가로질러 나가는 게 보여 군졸들이 토끼가 지나간 길을 따라 길을 새로 개척하여 험로를 통과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문경시 마성면의 석현성(石峴城) 진남문(鎭南門) 아래 성벽을 따라가다 보면 오정산과 영강으로 이어지는 산의 경사면에 개설된 문경 토끼비리를 만날 수 있다. 오정산이 영강의 벼랑과 접하는 험한 벼랑의 바위를 깎아서 선반처럼 만든 길이다. 겨우 한 두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고 험하다.

 

‘진남교반(鎭南橋畔)’은 경북 8경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는 곳이다. 영강의 물줄기와 오정산의 산줄기가 태극 형상으로 어우러진 가운데 철교와 3개의 교량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오정산 자락에는 4세기 말 신라가 축성한 고모산성이 진남교반을 내려다보고 있다. 고모산성 바로 옆에 조선시대에 세운 석현성 진남문이 있다. 이 석현성벽이 끝나는 지점에서 토끼비리가 이어진다. 토끼비리는 영강 수면에서부터 30~60m 위의 벼랑에 나 있다.

 

2. 역사적 기록에 나오는 관갑천 잔도

 

조선 초기 문신이었던 면곡(綿谷) 어변갑(魚變甲)은 관갑잔도를 지나면서 매우 험난하고 힘든 모습을 ‘관갑잔도(관갑의 사다리길)’라는 제목의 시로 남겼다. “요새는 함곡관처럼 웅장하고,/ 험한 길 촉도 같이 기이하네./ 넘어지는 것은 빨리 가기 때문이요./ 기어가니 늦다고 꾸짖지는 말게나.”

어변갑[1380년(고려 우왕 6년)~1434년(조선 세종 16년)]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자는 자선(子先), 호는 면곡이다. 현령(縣令) 어연(魚淵)의 아들로 1399년(정종 1년)에 생원(生員)이 되고, 1408년(태종 8년) 식년 문과(式年 文科)에 장원급제하였다. 교서관(校書館)의 부교리(副校理)로 발탁된 뒤 성균관(成均館) 주부(主簿)를 거쳐 사간원(司諫院) 좌정언(左正言)・우헌납(右獻納)을 역임하였다. 충주판관일 때 아버지 어연은 하양현감이었는데, 부자의 직책을 바꿔달라 상소하여 태종은 어연의 직급을 올려주었다.

 

1420년(세종 2년) 새로 발족한 집현전(集賢殿) 응교(應敎)로서 지제교(知製敎)・검토관(檢討官)과 춘추관 기주관을 겸임하였다. 1424년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다. 배불숭유(排佛崇儒) 사조(思潮)가 약해져 가던 1424년(세종 6년) 벽불소(闢佛疏)를 내어 성리학으로 국시(國是) 관을 정착시키는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늙은 어머니 봉양을 위하여 관직을 버리고 함안으로 돌아갔다. 조정에서 어변갑의 행동과 의리를 아껴 김해부사, 사간 등의 벼슬을 내렸으나 취임하지 아니하고 세상을 마쳤다. 뒤에 좌찬성에 추증되고 고성의 면곡서원(綿谷書院)에 제향되었다.

 

고려말과 조선초의 학자이자 문신이었던 권근(權近 : 1352~1409년)의 견탄원(犬灘院) 기문(記文)에 관갑천 잔도에 관한 내용이 전한다. 권근의 본관은 안동. 자는 가원(可遠), 사숙(思叔). 호는 양촌(陽村).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367년(공민왕 16) 성균시(成均試)를 거쳐 이듬해 문과에 급제, 춘추관 검열이 되었다. 우왕(禑王) 때 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거쳐, 성균관 대사성・예의판서(禮儀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창왕(昌王) 때 좌대언(左代言)・지신사(知申事)를 거쳐 밀직사첨서사(密直司僉書事)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친명정책을 주장하였다. 조선 개국 후, 사병 폐지를 주장하여 왕권확립에 큰 공을 세웠다. 길창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대사성 · 세자좌빈객 등을 역임하였다. 문장에 뛰어났고, 경학에 밝아 사서오경의 구결을 정하였다. 저서에는 『입학도설』, 『양촌집』, 『사서오경구결』, 『동현사략』이 있다. 견탄원은 관리들의 숙소가 있던 곳으로 현재의 문경시 호계면 견탄리다. 견탄원 기문은 다음과 같다. 견탄은 우리 말로 개여울이다.

“경상도는 남쪽에서 가장 크며, 서울에서 경상도로 가려면 반드시 큰 재가 있는데, 그 재를 넘어서 약 백리 길은 모두 큰 산 사이를 가야 한다. 여러 골짜기의 물이 모여 내를 이루어 곶갑(串岬)에 이르러 비로소 커지는데, 이 곶갑이 가장 험한 곳이어서 낭떠러지를 따라 사다리 길로 길을 열어서 사람과 말들이 겨우 통행한다. 위에는 험한 절벽이 둘러 있고, 아래에는 깊은 시내가 있어 길이 좁고 위험하여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떨고 무서워한다. 몇 리를 나아간 뒤에야 평탄한 길이 되어 그 내를 건너는데, 그것이 견탄(犬灘)이다.”

 

3. 권신응의 봉생천 그림에 묘사된 토끼비리

 

조선시대 권신응이 그린 ‘봉생천(鳳生川)’이라는 그림에 당시 토끼비리를 지나다니던 사람들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권신응은 조부인 옥소 권섭(權燮)의 권유와 지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문경십승(聞慶十勝)』은 옥소 권섭(權燮 : 1671-1759년)이 소장한 화첩인 『모경흥기첩(暮景興寄帖)』에 수록된 『십팔명승(十八名勝)』 중 일부로 그린 사람은 권섭의 손자 권신응이다.

 

권섭의 소장품 대부분이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이거나 이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손자 권신응의 그림들은 권섭이 젊은 시절부터 교유한 겸재 정선(鄭敾 : 1676-1759년)의 진경산수화 화풍을 따라 그렸다.

문경지역에 존재했던 실경을 정선의 진경산수화법을 본받아 그린 것이고, 그림은 전체적으로 부감법을 사용하였다. 소나무 등 나무의 표현은 겸재의 필법을 본받았으나 묵법에 가까운 방법으로 표현하였고, 필치는 약간 거친 듯하고 부분적으로 굵은 미점을 사용하였다. 거친 필치에도 불구하고 실경을 표현하고자 한 노력은 경물이나 구도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권신응은 할아버지인 옥소의 교육에 따라 당시 유행했던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충실하게 추종하는 노력을 보였으나 그림의 전반적인 수준은 정선에 미치지는 못했다.

 

권섭은 직접 그린 그림이 없으면서 그림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 이유는 『공회첩(孔懷帖)』에 수록된 겸재 정선의 작품 ‘반구盤龜’와 ‘옹천(甕遷, 그의 손자인 권신응(權信應 1728-1787)이 그린 화첩 『모경흥기첩(暮景興寄帖)』, 『기회첩(寄懷帖)』, 『영모인갑첩(翎毛鱗甲帖)』, 『몽화(夢畵)』를 소장했다는 점 때문이다.

 

권섭은 국문학사에서 위치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데 충북 단양군 소금정공원에 동상(흉상)이 있다. 권섭은 국문 작품으로 송강(松江) 정철(鄭澈: 80여 수),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 67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75수) 등에 비견할 수 있는 75수의 시조 작품을 남겼다.

 

조선시대 전국을 유람한 문인으로 유명한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교산(蛟山) 허균(許筠), 난고(蘭皐) 김병연(金炳淵),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과 함께 5대 탐승가에 포함될 만큼 산천경개 탐승에 한평생을 보냈다. 옥소가 벼슬을 하지 않고 전국을 유람하며 산천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여행을 지원할 수 있는 친척들이 전국 각지에 관료로 있었기 때문이다.

 

문학에서 한시, 시조, 가사 외에도 유행록(遊行錄), 기몽설(記夢說) 등 광범위한 분야를 다루었고, 유고 『옥소고(玉所稿)』에 기록된 방대한 분량의 기문과 발문, 제화시를 통해 서화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중년 이후 전국의 명승지를 유람하였으며, 보고 겪은 바를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사람들의 무관심으로 버려졌던 토끼비리를 조사하여 세상에 널리 알린 사람은 고려대 최영준 명예교수(지리교육학과)였다. 최 명예교수 덕분에 토끼비리가 영남대로의 중요한 옛길이었던 것이 새삼 주목을 받게 되고 후일에 국가 명승 제31호로 지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옛길이 문화재로 지정된 것이다. 양산의 황산잔도 역시 버려진 옛길로 남아 있었으나 요즘 다시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 덕분이다.

 

필자는 문경의 토끼비리를 답사하면서 황산잔도 복원을 대비하여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일제강점기 때 선정된 경북팔경 중 제1경으로 선정된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남역을 지나 된섬교를 건너 병풍바위를 지나 토끼비리를 걸어가면서 절벽 아래로 펼쳐진 절경을 감상하였다. 토끼비리도 왕복하면서 길을 낸 선조들의 지혜를 살펴보았다.

 

관갑잔도는 토끼비리로 친근하게 불리는데, 문경시에서 관광객들이 안전하게 걸어갈 수 있도록 데크와 안전난간을 설치하였다. 토끼비리가 끝나는 길목에는 데크 설치공사를 위한 자재가 많이 쌓여 있었다. 우리의 조상들이 짚신을 신고 험한 벼랑길의 바위를 반질반질하게 닳도록 다닌 것을 보고 감회가 새로웠다. 양산의 황산잔도에도 이런 흔적이 있다. 토끼비리 주변에 옛길과 연관된 관광자원이 많아 다음 회에 나머지를 소개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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