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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박사 화요칼럼]부산명지의 소금생산과 황산베랑길에 남아있는 고딧줄 자국 

기사입력 2021.04.27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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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낙동강에서 고딧줄을 끌어당기던 사람들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낙동강 하구둑이 건설되기 전에는 남해의 바닷물이 낙동강을 타고 거슬러 올라왔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는 말이 있다. 부산의 하단, 구포의 소금 배들이 바다에서 들어오는 밀물을 타고 상류로 올라가면 쉽게 갈 수 있었다. 낙동강의 바닷물은 밀양의 삼랑진까지 올라갔다. 물 때를 잘 맞추면 소금배들이 양산의 물금까지는 수월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양산천을 통해서는 구 통도사관광호텔까지 바닷물이 올라갔다고 한다.

 

 

황산베랑길 바위에는 돛단배들이 역풍을 만나거나 조류 때문에 상류로 오르기 힘들 때는 배를 밧줄로 끌어당기는 고딧줄꾼이 필요했다. 고딧줄을 당기는 일은 사공들이 직접 했지만 양산의 물금이나 원동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돈을 받고 배를 끌기도 했다. 부산에서는 돛대에 매단 고딧줄(삼줄로 엮어 만든 굵은 줄)로 양쪽 강둑에서 어깨 걸어 잡아당기며 부르던 ‘고딧줄 소리를 기억하던 연로한 어른들도 세상을 떠나서 소리가 사라져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엄창석 소설가의 ‘새들의 저녁’에 고딧줄이 나온다. 서석림은 솜을 받친 두툼한 두루마기를 입고 뱃머리에 앉았고, 계승은 돛대 밑 배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횡목에 엉덩이를 걸쳤다. “돛을 올릴까요?” “올릴 거 없네. 물이 흐르는 데로 가게 둬.”

 

 

사공 방씨는 배 꽁무니에 서서 긴 노를 좌우로 조금씩 틀며 배가 내려가는 물살을 자연스럽게 타도록 했다. 겨울이지만 눈이 많이 내려 수량은 풍부했다. 다행이었다. 수심이 얕으면 배 밑이 솟아오른 강바닥에 걸릴 때가 있었다. 그러면 얼음 같은 강물에 뛰어들어 고딧줄을 당겨야 한다. 배에는 삼으로 엮은 굵은 고딧줄을 준비해 놓았다.

 

 

낙동강이 남해와 만나는 곳은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기수역으로 각종 어류가 풍부하게 서식하고 철새의 낙원이었다. 낙동강 하구둑이 만들어짐으로써 이런 장점은 사라졌다. 근래 하구둑을 허물고 바닷물을 유통시켜야 한다는 환경단체의 주장에 따라 일부 시험적으로 바닷물이 들어오게 하였다. 농토에 염분이 스며들면 농사를 망치게 되는 농민들은 강하게 반대하고 있어 하구둑 개방은 쉽지 않다.

 

양산의 황산베랑길 바위에는 돛단배를 끌어올리던 고딧줄 자국이 여러 군데 생생하게 남아 있다. 배를 통해 소금, 곡식, 생활용품 등을 운반하던 사공들은 배가 노를 젓거나 돛을 이용하여 앞으로 전진할 수 없을 때 배에서 내려 고딧줄을 통해 배를 끌었다. 조선시대 세곡을 운반하던 조운선들은 백성을 부역에 동원하여 배를 끌기도 했다.

 

 

황산베랑길 옛길을 복원한다면 이런 이야기를 담은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은 황산베랑길 복원에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필자와 함께 4월 20일 임경대에 꽃무릇을 심고, 황산베랑길에도 심었다. 동래부사 정현덕 공 영세불망비, 경파대 근처에도 심었다. 바위를 살펴보던 영남삿갓은 바위에 박힌 쇠못을 발견하였다. 쇠못의 크기로 보아 나룻배나 작은 배가 쉬어갈 때 밧줄을 매던 곳으로 짐작되었다. 필자가 본 임진강 황포돛배 선착장의 배를 계류시키는 쇠못은 바다의 부두에 있는 것처럼 거대했다.

 

 

부산에서 올라가는 소금배는 양산, 삼랑진, 수산, 남지 등을 지나 합천 밤마리와 현풍을 거쳐 대구와 왜관을 차례로 들른 다음 구미 비산나루에 도착하였다. 부산에서 비산나루까지는 열흘쯤 걸렸다고 한다. 이곳에서 장을 보고 물 때가 좋으면 밤에라도 배를 띄워 상주의 낙동진을 거쳐 안동까지도 올라갈 수 있는데, 대개는 비산나루에서 하루를 쉬어가며 묵었다고 한다.

 

 

경기도 파주시 임진강 두지리나루에 가면 조선시대 원형을 살려 운항하는 황포돛배가 있다. 필자는 임진강 황포돛배 체험을 위하여 경기도 파주시를 방문하였다. 조선시대 주요 운송수단이었던 황포돛배를 임진강 두지리에서 자장리까지 띄워 투어를 하고 있다. 요금은 9천 원이고 파주시 적성읍 주민에게는 8천 원을 받고 있다. 임진팔경을 가까이서 볼 수 있으며, 80만 년 전에 형성된 임진강 적벽을 볼 수 있어 인기를 끌고 있다. 50년간 민간인 출입이 금지되었던 임진강을 유람할 수 있다.

 

부산에서 양산시 물금읍 황산공원 나루터까지 운항하는 낙동강 생태탐방선은 교통편 때문에 인기가 별로 없다. 경기도 파주시처럼 양산시 자체로 낙동강에 황포돛배를 제작하여 물금선착장에서 타고 내리게 운항한다면 양산시민이나 외지 관광객에게 큰 관심을 끌 것으로 보인다.

 

2. 경상감사 영세불망비 명지소금공원으로 이전 필요

 

 

경상감사 김상휴 공과 경상감사 정재철 공의 영세불망비가 있는 곳은 구 부산시 강서구 명지파출소 앞의 담장 밑에 바짝 붙어있다. 두 비석은 나란히 있다. 파출소가 다른 곳으로 이전한 후 돌보는 사람이 없어 잡풀이 무성하고 나뭇가지가 비석을 덮고 있다.

 

 

필자가 다른 곳을 방문하였다가 고속도로에서 차가 밀려 저녁 늦게 여기에 도착했다. 사진을 찍고 있으니 마을 주민이 나와서 필자에게 부탁을 했다. 현재 비석의 관리상태가 부실하니 바로 앞에 있는 ‘명지소금공원’으로 이전했으면 좋겠다고 강서구청에 요청해주기를 당부했다. 비석을 많은 시민들이 잘 볼 수 있는 널찍한 공원으로 옮겨 잘 관리했으면 좋겠다.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백성들의 세금을 가혹하게 징수하는 것은 민란의 원인이 되기도 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다. 가렴주구를 일삼는 관리들과 아전들은 백성을 수탈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조선시대 동학혁명의 원인을 제공한 고부군수 조병갑은 역사에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얼마 전 갑자기 오른 과중한 부동산 세금 문제 등으로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선거에서 여당이 참패하는 원인의 일부를 제공했다. 경상감사 김상휴 공과 정재철 공은 백성을 사랑하여 세금을 감면해주고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이들의 공을 기리고 후세에 전하는데 소홀함이 없어야 하겠다.

 

 

경상감사 김상휴 영세불망비는 경상도 관찰사 김상휴 공이 소금을 굽는 염민들을 위해 선정을 베푼 공을 보답하고자 염민들이 세운 비다. 김상휴 감사는 순조 22년(1822년) 1월 9일 경상감사로 발령받았으며, 순보 23년 12월 10일 공조판서로 전임되었다. 순상국 김상휴 영세불망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개 소금 굽는 곳 염하(鹽下)의 여러 가지 패단은 소금 굽는 백성(鹽民)의 책임자에게 있으므로 소임을 영원히 없앤다.

 

당초 소임의 폐단은 또한 산창(蒜倉)의 감독에게서 유래하였으므로 감색에게도 엄중히 타일러 이 뒤로부터 일을 시킴에 있어서는 조선(漕船)과 공선(公船)의 사공 및 각 군청의 장무(掌務)와 어금군(御禁軍)이 염민들을 침범하지 말라는 새로 새긴 절 목에 한가지로 따르도록 할 것이다.

 

또 을유년 절목에 주사군(舟師軍)이 섬 주민을 침해하지 말라는 것과 강 연안의 각 읍에서 배를 잡아 놓는 폐단에 대한 매년의 관문 규칙 또 그 전후에 절목으로 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 바르게 하여 길이 시키도록 할 것이므로 이에 돌에 새긴다.”

 

영세불망비를 세운 서기 1824년은 순조 24년으로 안동 김씨의 세도가 절정에 달하였으며 삼정이 문란하여 백성들의 세금과 부역으로 인한 고통이 심했다. 그러나 김상휴 공은 선정을 베풀었다. 이 송덕비는 그가 경상감사를 떠난 이듬해에 세워졌으므로 명지 주민들의 자발적 성의가 확인된다. 송덕비의 머리글은 김상휴 관찰사에 대한 고마움을 잘 담고 있다. “어려움을 살펴 덕을 베푸시니 그 은혜 염민까지 미쳤네. 일거에 어려움이 해결되니 이제야 살았네.”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 영강 마을에 순상국 홍재철(洪在喆) 영세불망비가 있다. 이 비는 경상감사 홍재철 공이 명지 소금 굽는 백성에게 베푼 고마운 선정을 보답하고자 세운 비다. 조선 영조 을축년(1754) 공설 염전을 설치할 때 염전이 많이 줄고 땔감 사정은 더 나빴다. 홍재철(1799~사망년도 불명)은 경상 감사로 부임한 이듬해 신축년(1841) 가을에 백성들이 공염(公鹽)으로 바쳐야 할 소금에 땔감 값을 보태어주었다. 비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비의 앞면에는 ‘순상국 홍공재철 영세불망비(巡相國洪公在喆永世不忘碑)’라는 비제(碑題)와 함께 “삼천 냥의 자금을 출연하시어/ 염민들의 어려움을 구해 주셨네. 천년 백년 후에까지/ 한 조각 비석은 전해 주리라”고 적혀 있고,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영조 을축년에 처음 공염을 설치하였을 때 72개의 솥을 건 염전을 두었는데, 점차 축소되어 37개의 솥만 남았고, 게다가 지금 땔감을 귀하기가 금과 같다. 연례로 공염 3,000석을 바치는데, 한 석의 원가가 한 냥 5전이니 합 4,500냥이고, 그 외 임자년에 정한 한 석의 땔감 값이 5전으로, 합이 1,500냥이지만 거의 만에 하나 정도 채울 뿐이라고 한다.

 

우리 관찰사께서 남쪽으로 오신 이듬해 신축년 가을에 걷어야 할 소금 1,000석을 한 석당 열 냥으로 땔감 값을 보태어 채워 주되 1,000냥을 먼저 내려 주시며, 춘등염(春等鹽) 2,000석에 땔감 값 2,000냥을 응당 시행할 전례로 만드셨다. 그래서 매년 3,000냥으로 바로잡아 주셨으니, 이전 수백 년 동안 없었던 은혜요, 뒤로 몇백 년 동안 썩지 않을 은택이다. 그러므로 썩지 않을 돌에 새겨 둔다. 숭정 기원 후 주상 8년 신축년 10월에 세우다.

 

홍재철(1799~?)은 1840년(헌종 6년) 9월부터 1842년(헌종 8년) 4월까지 경상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교리에도 경상 관찰사 홍재철(洪在喆) 영세불망비가 있다. 조세를 경감해 준 홍재철의 선정을 기려 재임 중에 주민들이 세웠다.

 

3. 부산 명지도 자염 생산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소금은 인류역사와 함께 해왔다. 우리나라 소금 생산기록은 삼국사기, 중국 위지동이전에 고구려, 신라 시대의 소금이 언급되고 있다. 부산시 명지도에서 소금 생산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나온다. ‘김해 도호부에 염소가 두 곳이 있으며, 모두 부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고려말 조선초에는 명지도를 포함한 낙동강 하구 일대에서 소금이 생산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지도에서 염전이 크게 발전한 것은 조선 영조 때 정부가 흉년 구제를 위해 자염(煮鹽)을 제조한 것이 계기였다. 1731년(영조 7년) 경기와 삼남 지방에 큰 흉년이 들자, 박문수는 구휼미를 마련하기 위한 차원에서 국가가 나서서 소금을 생산하는 공염(公鹽) 제도를 명지도에서 시행할 것을 적극 건의하였고, 왕명으로 이를 주관하게 되었다. 그 결과 6개월 만에 공염 1만 8,000석을 얻었고, 이를 팔아 경기도 백성을 구제하는 데 사용하였다고 한다.

 

소금의 원료에는 암염(巖鹽), 천연 함수(鹹水), 해수(海水)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해수(海水)에서 소금을 생산한다. 바닷물에서 얻는 소금으로는 자염(煮鹽), 천일염(天日鹽)이 있다. 자염은 바닷물의 염도(鹽度)를 높인 뒤에 끓여서 만드는 소금이다. 자염은 화염(火鹽), 전오염(煎熬鹽), 육염(陸鹽)이라 부르기도 한다. 천일염은 해수를 끌어들인 뒤에 바람과 햇볕으로 수분을 점차 증발시켜서 결정시킨 소금이다.

 

명지도에서 자염을 생산하던 역사적 유래는 현재의 마을 이름으로 남아 있다. 부산시 강서구 대저2동 염막(廉幕)마을은 소금과 연관된 지명이다. 염막은 발을 많이 생산한 발막섬과 염전이 있었던 염밭섬이 합쳐 생겼다. 작지 부락 남쪽 진부선 국도를 따라 송백까지 뻗어 있는 맥도의 끝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마을이 염막1구이다.

 

자염 생산은 보통 3월에 시작해서 10월에 끝난다. 자염 생산이 가장 활발한 시기는 4~6월이다. 7~8월에는 장마로 소금 작업이 어렵다. 천일염의 생산시기도 비슷하다. 천일염도 5~6월에 가장 많은 생산량을 보인다. 이것은 한반도의 기후가 봄철에 강수량이 적고 증발량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과거 소금의 소비량은 늦가을부터 겨울까지 제일 많았다.

 

건강에 좋은 자염은 만드는 과정이 힘들고 땔감이 많이 소요되어 이제 없어졌다. 최근 전통적 자염 제조 방식을 통해 소금을 생산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다. 소금배와 세곡을 실은 조운선이 오가던 황산강, 고딧줄 흔적이 남아 있는 바위의 이야기를 잘 기억하고 관광자원으로 활용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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