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상세페이지

심상도 박사 화요칼럼,황산강의 범선과 황산베랑길 바위의 밧줄 자국

기사입력 2021.04.20 11:32

SNS 공유하기

fa tw ba ka ks url

 

1. 해운과 수로의 역사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배를 의미하는 한자는 무려 240여 가지에 달하여 배의종류가 많음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인 의미로 쓰이는 배는 선(船), 주선(舟船), 선박(船舶), 선가(船舸) 등이다. 인류의 문명은 나일강,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 인더스강, 황하 유역 등 물과 깊은 인연을 맺으며 발달해왔다. 강을 이용하기 위해 자연적으로 배도 등장했다.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 문명은 동양과 서양을 아울러 인류 최초의 문명발상지로 주목받고 있다. 이 문화에 기초하여 그리스, 로마를 거쳐 서양 문화가 발전하게 되었다또한 인도문명과 함께 동양문화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도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한강, 낙동강, 금강, 영산강, 대동강, 압록강, 두만강 주변에 고구려, 부여, 백제, 신라, 발해, 고려, 조선 등의 나라가 건국되고 명멸해왔다.

 

 

역사 이래로 해상 교역을 장악하고 이용한 시대에는 국력이 강성해지고, 반대로 외국과의 교역을 금지하고 국내로 위축될 때는 국력이 약화되어 백성들의 고통이 커졌다. 신라시대의 해상 실크로드의 활용, 해상왕 장보고 시절에는 중국, 일본과의 해상무역을 장악하여 크게번성하였다. 장보고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중국당나라, 일본, 신라의 교역을 독점하여 국력을 신장시켰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태조 왕건은 육군과 수군을 잘 활용하여 통일대업을 이루었다. 예성강에 위치한 벽란도는 고려 시대의 최대 무역항으로 명성을 떨쳤다. 고려는 중국 송나라, 중동의 아라비아 등과 교역하였다.

 

 

이 무렵 아라비아 상인들과 교류하면서 고려란 이름이코리아(KOREA)라고 불리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는 외국과의 통상을 제한하고 원거리 항해를금지함으로써 경제발전이 정체되고 위축되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망국의 원인이 되었다. 배의 이용은 세곡을 한양으로 운반하는 조운선의 연안 항해 위주였다.내륙의 강인 낙동강, 한강 등의 수로를 통해 세곡을 배로 실어날랐다. 내륙 수운의 주요 통로였던 낙동강은 옛날에는 황산하, 황산강이라고 불렀다.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실천하며 수출지상주의를 내걸고 조선공업, 자동차산업, 철강산업, 전자, 반도체, 기계공업, 중화학공업을 육성하였다. 월남전에 참전하여 외화를 획득하고, 한진그룹이 진출하여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대외개방을 통해 중동의 건설현장에도 진출하여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였다. 정주영 회장, 이병철 회장, 박태준 회장,구인회 회장 등 기업인들도 박대통령과 호흡을 맞추며한국경제를 도약시켰다.

 

 

박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경인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 철도 등을 건설하여 물류와 사람의이동을 편리하게 하였다. 부존자원이 없는 우리나라는 박대통령의 경제개발 덕분에 국내의 이동이 편리해지고, 해외로 진출하여 대외개방 지향적으로 세계사에유례없는 성공을 거두었다.

 

 

반면 북한은 자력갱생, 폐쇄적인 경제 정책으로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하였다. 국내외 해운과 수로의 이용, 교통망의 혁신, 대외개방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사례다.

 

 

인류가 처음 배를 움직이게 하는 데 쓴 것은 물갈퀴였다. 막대기 끝에 손바닥 모양의 평평한 토막을 매단 물갈퀴는 지금도 카누와 같은 원시형태의 배에서 사용되고 있다. 물갈퀴 다음으로 사용된 도구가 노이다. 노에는 앞뒤로 밀고 끌어당기는 서양식 노와 배의 뒤편에서 옆으로 밀고 당기는 동양식 노의 두 종류가 있다.

 

 

우리나라의 재래식 배에서는 동양식 노가 사용되어왔다. 인류가 인력 대신에 돛을 사용하여 바람의 힘으로 배를 추진하게 된 것은 선사시대부터였으며, 초기에는노와 돛을 함께 쓴 범요선(帆橈船)의 형태였다.

 

 

인력을 완전히 탈피한 범선은 13세기경부터 일반화되기 시작하여 19세기까지 범선시대를 이루게 되었다.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이고 내륙에도 하천이 많은 한반도에서 거주하는 우리의 선조들은 일찍부터 우수한 배를 만들어 다방면으로 활용해 왔다. 삼한시대에 이미 해로를 이용하여 중국 대륙의 여러 나라와 외교와 통상을을 하였다.

 

 

철의 왕국 가야시대에 선박을 이용하여 일본에 철을 수출하였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수군(水軍)을 양성하고 전선을 이용하여 전투를 하였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견당선(遣唐船)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문물을 교환하였다.

 

2. 황산강의 황포돛배

 

낙동강은 삼국시대에는 황산하(黃山河), 황산강(黃山江), 황산진(黃山津)으로 불렸다. 고려, 조선 시대에는낙동강, 낙수(落水), 가야진(伽倻津) 등으로 불렸다.『동국여지승람』에는 낙수로, 『택리지』에는 낙동강으로 기록되어 있다. 황산강에는 세곡, 소금, 곡물을 실

은 황포돛배가 운행되었다. 노를 젓는 뱃사공의 힘, 바람의 힘을 이용한 돛단배가 황산강을 운행하였다.

 

필자가 사진에서 제시한 황포돛배는 경기도 연천군 고랑포구 역사문화공원에서 찍은 것이다.

 

본래 낙동이란 가락(駕洛)의 동쪽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 『연려실기술』에 보면 가락국의 땅이었던 ‘상주의동쪽으로 흐르는 강’이란 뜻으로 낙동강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지리전고(地理典故)』 편에도 ‘낙동강은 상주의 동쪽을 말함이다’라고 했다. 낙동강은 가락국(가야)의 동쪽을 흐르는 강을 의미한다. 옛날 가야의 터전이었던 경상북도의 고령과 상주, 선산, 경상남도의 합천, 의령, 함안, 고성 지방은 모두 낙동강의 서쪽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이들 지역에서 보면 낙동강은 동쪽 편에 위치한다.

 

황산강 옆의 물금읍 서부마을에 황산역이 설치되었다. 황산역은 조선 세조 때 만든 40개 찰방역 가운데 하나며, 11개 속역을 두었다. 이후에는 11개 속역 외에 동래, 언양, 밀양 등지에 16개 역을 관할하였다. 종6품으로 역의 업무를 관할하는 찰방을 비롯해 역리, 역졸, 역노 등 약 8,800여 명이 속해있던 엄청난 규모의 역이었다. 황산역은 조선시대 주요 간선도로인 영남대로, 낙동강을 이용한 수로와 결합되면서 영남을 대표하는 역참으로 발달했다. 황산역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주로 황산베랑길을 이용했다.

 

낙동강은 한반도의 간선 수운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통하여 낙동강은 영남지방의 산물, 세미(稅米) 등의 운송로로 이용되었다. 세곡을 실어나르는 배를 조선(漕船), 조운선(漕運船)이라고 한다. 지방의 조세미(租稅米)와 공물(貢物)을 주창(州倉)에서 경창(京倉)으로 실어 나르던 나라의 배를말한다.

 

성주에 모인 조세미는 다시 육로를 이용하여 충주의 경원창(慶源倉)에 운반하고, 배편으로 남한강 수로를 따라 한양으로 운송하였다.

 

낙동강 하구에서 소금배가 출발하는 주요한 포구는 하단이었다. 하단은 낙동강에서 내려오거나 올라가는 기점이었다. 소금배는 양산, 삼랑진, 수산, 남지, 현풍을 거쳐 대구, 왜관, 구미, 상주, 안동까지 올라갔다.

 

대구는 명지산 소금이 가장 많이 유통되던 곳이다.낙동강의 주요 나루터는 김해의 감동포, 양산의 동원진,밀양의 수산진과 뒷기미나루터, 의령의 정암진, 창녕의우산진, 현풍의 답곡진, 대구의 사문진, 성주의 동안진,상주의 회촌진, 용궁의 하풍진, 안동의 대항진 등이었다. 낙동강 하구에서 출발한 운송선은 소금, 어물(고기,갈미조개, 김), 젓갈(게젓) 등을 가지고 올라갔고, 내려올 때는 내륙의 곡류를 싣고 왔다.

 

영남지방에서 거둔 조세미를 고려시대에는 개경까지,조선시대에는 한양의 서강나루까지 운송하였다. 낙동강 유역에서 거둔 세곡을 한양으로 옮기기 위해서 낙동강 하구를 지나 서해 태안반도의 안흥량을 우회하고, 강화도의 손돌목을 거쳐 밀물과 때를 맞춰 한강을 거슬러올라서 마포의 서강 나루에 도달하였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1세기 동안 서남해안에 출몰했던 왜구들을 피하려고 내륙수로와 육로를 연결하여 운반했다. 내륙수로는 낙동강 연안의 김해, 창원, 밀양 등에서 지류별로 조세미를 집하(集荷)한 뒤, 다시 뱃길을 이용하여 상류로 거슬러 올라 상주까지 옮겼다.

 

3. 황산강의 범선 운영에 필요한 사공과 밧줄

 

황산강에는 황포돛배가 오르내렸다. 낙동강 하구인 구포나 하단에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갈 때는 순풍을 이용하기 위해서 돛을 달고 운행하였다. 물살이 빠른 곳은은사공이 노를 아무리 저어도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모래톱에 배가 얹혀 좌초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사공이 내려서 배에 밧줄을 맨 다음 육지에 올라가 배를 끌어당겨 위기를 탈출했다. 낙동강의 운하기능은 강물이 불어나는 시기인 장마철부터 늦가을까지주로 운행되었다. 비가 적게 오는 갈수기 때에는 강바닥이 드러나서 배를 운행할 수 없다. 한편 매년 홍수가 질때마다 상류로부터 쓸려온 토사들이 강바닥을 메워 운항이 어려울 때도 있었다. 그리고 배에다 화물을 과적하면 운항 중에도 모래톱에 얹혀 좌초된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는 고딧줄꾼이 구세주였다. 고딧줄꾼이란 좌초된 배를 밧줄을 연결하여 모래톱에서 끌어내는 인부들로 그들이 작업할 때 부른 노동요가 전해온다.돛단배가 부산에서 낙동강 상류로 올라갈 때는 힘겹게게 노를 젓거나 돛을 이용했다. 반대로 내려올 때는 사공들은 순풍에 돛을 올리고 물살의 흐름에 맡겨 손쉽게 내려왔다. 상류로 올라가는 배는 대구, 상주, 예천, 안동까지 운항하였다. 물살을 거스르기 위해서는 특별한조치가 필요했다.

 

작은 배에는 2~3명, 큰 배는 6~7 명의 기운 센 젊은이들이 밧줄을 가지고 배에 올랐다. 물살이 거센 낙동강강물을 거슬러 오를 때는 이들이 배에서 내려 배에 연결한밧줄을 끌어당겨 배를 전진시켰다.

 

필자가 황산강의 바위에 밧줄 흔적이 있다는 얘기는 조국영 와이뉴스 향토사위원장에게 들은 바 있었다. 밧줄자국이 있는 현장은 황산베랑길인데, 차단되어 들어갈수가 없어 직접 보지는 못했다.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이 황산베랑길 복원을 주장하며양산시청, 양산시의회, 부산지방국토관리청 진영국도관리사무소 등에 복원을 희망하는 시민들의 서명을 받아제출하였다.

 

청원에 그치지 않고 황산베랑길에 들어가 잡풀과 덩굴을 제거하고, 길이 끊긴 곳에는 나무다리를 놓아서 통행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영남삿갓 덕분에 황산베랑길 현장을 볼 수 있었다. 영남삿갓은 이곳에 매화나무, 꽃무릇을 심을 계획도 갖고 있다. 황산베랑길의 바위에 있는 잡풀을 제거한 영남삿갓의 수고 덕택으로 바위를 자세히 관찰하며 밧줄 흔적을살펴볼 수 있었다. 영남삿갓에게 감사드리는 바이다.

 

멀리 떨어진 황산베랑길 자전거도로에서 건너다볼 때는 전혀 보이지 않던 바위 위의 밧줄 자국이 바로 옆에서 살펴보니 확연하게 드러났다.

 

뱃사공들이 배를 상류로 끌어올리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노동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배에 연결된 밧줄을 바위에 의지해서 발을 확고하게 딛고 끌어당기면 손쉽게배를 움직일 수 있었다.

 

단단한 바위 위에 밧줄 자국이 나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 동안 반복적으로 바위에 걸치고 끌어당겼을 것이다.뱃사공의 애환을 느낄 수 있는 험난한 삶의 체험 현장이었다.

 

황산베랑길은 황산역과 함께 2027년까지 복원하는데,별도로 빨리 추진했으면 좋겠다. 황산베랑길에는 정현덕 동래부사 영세불망비, 경파대, 배를 끌어올리는 밧줄 자국, 일제강점기 때 만든 경부선 철도, 철도 수로에서 나오는 간이폭포, 옛날 벼랑길 축대, 철도 토관, 용화사의 황산잔로비 등 옛 유적과 근대문화유산이 있어 역사 공부하기 좋은 현장이다.

 

황산베랑길은 원동면 화제리 주민들이 물금장에 장보러가던 장터길, 물금동아중에 다니던 학생들의 통학길,김정한 소설가 ‘수라도’의 등장인물들이 걸어간 소설 속의 길, 영남대로의 황산잔로(황산잔도) 역사길, 유생들이 한양으로 과거시험 보러가던 장원급제길, 황산역에서 조달한 말을 타고 간 관리의 출장길, 보부상이 오가던 교역의 길이 복합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얽힌 역사의 길이다.

 

유적에 대한 스토리텔링이 필요하고 안내판 설치, 안전한 통로 개설이 되면 양산의 명물 관광자원으로 인기를 끌 것으로 전망된다.

 

backward top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