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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력 장군의 관산성 전투 승리가 미친 영향/심상도 박사 화요 칼럼

기사입력 2020.11.03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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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가 패한 원인

 

관산성 전투에 관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이 간략하게 나와 있어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일본서기에는 관산성 전투에 관한 내용이 비교적 소상하게 나와 있다. 일본서기는 역사에 대한 왜곡이 있어 전적으로 믿을 바는 못 되지만 세부 항목에서는 참고할만한 내용이 있다. 일본서기의 내용을 보면 관산성 전투를 시작할 때 백제의 대신들이 반대하였다.

 


여창(餘昌)이 신라(新羅)를 정벌할 것을 계획하자 늙은 재상이 “하늘이 함께 하지 않으니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라고 간하였다. 여창이 “늙었구려. 어찌 겁내시오. 우리는 대국(大國)을 섬기고 있으니 어찌 겁낼 것이 있겠소.”라 하고, 드디어 신라국(新羅國)에 들어가 쿠다무라노소코(久陀牟羅塞)라는 보루를 쌓았다. 관산성 전투 초기에는 백제가 우세하였으나 신라의 신주 군주인 김무력 장군이 지원병을 끌고 달려온 이후에 전세는 일거에 역전되었다.

 


이와 반대로 신라는 관산성 전투 초기 성이 함락되고 전세가 불리하였으나 이후 후속 지원군을 총동원하여 대처하였다. 신라가 일치단결하여 총력을 기울인 반면 백제는 귀족들의 동의를 얻지 못해 지원병력이 부족하였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귀족들의 반대에도 전쟁을 주도했다 참패당하고, 부왕의 죽음까지 자초한 태자 여창은 즉위하지 않고 출가해 부왕의 명복이나 빌고자 했다. 대신과 백성들의 만류로 출가해 수도하려던 여창의 계획은 철회됐지만, 성왕의 죽음으로부터 위덕왕의 즉위까지는 몇 년의 공백이 있다. 관산성 패전의 충격이 그만큼 컸다.

 


관산성 전투가 벌어진 충북 옥천군에 있는 제2의료기기 산업단지(충북 옥천군 옥천읍 서대리 431번지 일원) 부지 내 유적에서 7세기 신라 고대 도로가 발굴되었다. 확인된 도로는 남동-북서 방향으로 진행하며 산 정상부근 사면과 계곡부를 이어지면서 노면을 조성한 것으로, 약 320m가 넘게 확인됐다. 노면의 폭은 약 5.6m에 달하고 도로의 표면에는 수레바퀴 자국과 수레를 끌었던 짐승의 발자국도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이 도로는 1886년경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목적으로 작성한 지형도에도 ‘소로(小路)’로 표시돼 있다. 도로 발굴 과정에서 7세기 신라토기, 기와부터 조선 전기에 해당하는 백자 등이 출토되었다. 이 도로는 신라에서 조선 전기까지는 교통과 군사상 도로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관산성 전투 이후에 조성된 도로이지만 당시 신라의 영토확장 의지를 알 수 있다.

 

 

2. 관산성 전투의 주역인 백제 성왕과 왕자 부여창의 리더십 부족

 

삼국사기 제26권 백제본기 제4에 의하면 백제 성왕은 재위기간(523년~554년) 중 많은 업적을 남겼다. 성왕(聖王)의 이름은 명농(明穠)이다. 무령왕(武寧王)의 아들이다. 지혜와 식견이 뛰어났고 일을 처리함에 결단성이 있었다. 무령왕이 돌아가시고 왕위를 잇자 나라 사람들이 성왕이라고 불렀다.

 


가을 8월, 고구려 병사가 패수(浿水)에 이르자, 임금이 좌장 지충(志忠)에게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싸우게 하니 그가 적을 물리쳤다. 3년(서기 525) 봄 2월, 신라와 서로 예방하였다. 4년(서기 526) 겨울 10월, 웅진성(熊津城)을 수리하고 사정(沙井)에 목책을 세웠다.

 


7년(서기 529) 겨울 10월, 고구려왕 흥안(興安, 안장왕)이 직접 병사를 거느리고 침범하여 북쪽 변경의 혈성(穴城)을 함락시켰다. 임금이 좌평 연모(燕謨)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오곡(五谷) 벌판에서 막아 싸우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

 


16년(서기 538) 봄, 도읍을 사비(泗沘, 부여)[소부리(所夫里)라고도 한다.]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고 하였다. 18년(서기 540) 가을 9월, 임금이 장군 연회(燕會)에게 명령하여 고구려의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26년(서기 548) 봄 정월, 고구려왕 평성(平成, 양원왕)이 예(濊)와 공모하여 한수 이북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해오자, 임금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왕이 장군 주진(朱珍)을 시켜 갑옷을 입은 병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출발하게 하였다. 주진은 밤낮으로 행군하여 독산성 아래에 이르러 고구려 병사들과 일전을 벌여 크게 이겼다.


28년(서기 550) 봄 정월, 임금이 장군 달기(達己)를 보내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공격하게 하여 빼앗았다. 3월, 고구려 병사가 금현성(金峴城)을 포위하였다. 31년(서기 553) 가을 7월, 신라가 동북쪽 변경을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겨울 10월, 임금의 딸이 신라로 시집 갔다.


32년(서기 554) 가을 7월, 임금이 신라를 습격하고자 몸소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혼전 중에 임금이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聖)이라 하였다. 


위덕왕의 재위기간(554년~598년) 중의 중요 전쟁을 삼국사기를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원년(서기 554) 겨울 10월, 고구려가 대대적으로 병사를 동원하여 웅천성(熊川城)을 침공했으나 패하고 돌아갔다. 위덕왕은 561년부터 부왕(父王)인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참수당한 치욕을 복수하기 위하여 신라를 자주 침략하였다. 후속 공격은 관산성 전투 때만큼 위력이 없었으며, 계속 실패해서 신라가 새로 정복한 땅을 영토로 굳히는 것을 막지 못했다. 관산성 전투에서 국왕 직속의 정예부대가 큰 손실을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덕왕 8년(서기 561) 가을 7월, 임금이 병사를 보내 신라의 변경을 침범하였다가 신라군의 반격으로 패하였다. 죽은 자가 1천여 명이었다. 위덕왕 24년(서기 577) 겨울 10월, 신라 서쪽 변경의 주와 군을 침범하였는데, 신라의 이찬 세종(世宗)이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우리를 쳐부수었다.

 

3. 백성을 우선시하는 신라 진흥왕의 부국강병책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 진흥왕(眞興王)조에 보면 백성을 중시하고 국토 확장에 치중하는 활약상이 잘 나와 있다. 원년(서기 540) 8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고 문무관(文武官)의 관작을 한 등급씩 올려 주었다. 5년(서기 544) 봄 2월, 흥륜사(興輪寺)가 완성되었다. 3월, 사람들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어 부처를 받드는 것을 허락하였다.


6년(서기 545) 가을 7월, 이찬 이사부가 아뢰어 말하였다. “나라의 역사는 임금과 신하의 선악을 기록하여 좋은 것 나쁜 것을 먼 후손에게까지 보이는 것입니다. 역사를 편찬하지 않으면 후손들이 무엇을 보겠습니까?” 임금이 진심으로 그렇다고 여겨 대아찬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명하여 문사들을 널리 모아 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9년(서기 548) 봄 2월, 고구려가 예인(穢人)과 함께 백제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자 백제가 구원을 청하였다. 임금은 장군 주령(朱玲)을 보내 도와주었었다. 11년(서기 550) 봄 정월,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빼앗았다. 3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함락시켰다. 임금은 두 나라의 병사가 피로해진 틈을 타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병사를 내어 공격하게 했다. 두 성을 빼앗아 증축하고, 병사 1천 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12년(서기 551) 3월, 임금이 지방을 돌아보다가 낭성(娘城)에 묵으며, 우륵(于勒)과 그의 제자 이문(尼文)이 음악을 잘한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특별히 불렀다. 임금이 하림궁(河臨宮)에 머무르며 음악을 연주하게 하니, 두 사람이 각기 새로운 노래를 지어 연주하였다.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우륵은 악기를 가지고 우리에게 귀순하였기에, 그 악기의 이름을 가야금(加耶琴)이라 하였다.


임금이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였는데, 승세를 타고 10개 군을 취했다. 14년(서기 553) 가을 7월,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武力)을 군주로 삼았다. 겨울 10월, 임금이 백제왕의 딸을 맞아들여 작은 부인으로 삼았다.


15년(서기 554) 가을 7월, 명활성(明活城)을 보수하여 쌓았다. 백제 왕 명농(明穠, 성왕)이 가량(加良)과 함께 관산성(管山城)에 쳐들어왔다. 군주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金武力)이 주의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어우러져 싸웠는데,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도도(高干都刀)가 빠르게 공격하여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싸워서 크게 이겼다. 좌평(佐平) 네 명과 병사 2만 9천 6백 명의 목을 베었으며, 돌아간 말이 한 마리도 없었다.


16년(서기 555) 봄 정월, 비사벌(比斯伐)에 완산주(完山州)를 설치하였다. 겨울 10월, 임금이 북한산(北漢山)에 순행하여 영토의 국경을 정하였다. 11월, 임금이 북한산에서 돌아왔다. 임금이 거쳐 지나온 주군(州郡)의 일 년간 세금을 면제해 주고, 그 지방의 죄수 가운데 두 가지 사형 죄를 제외하고는 모두 풀어주었다. 17년(서기 556) 가을 7월, 비열홀주(比列忽州)를 설치하고 사찬 성종(成宗)을 군주로 삼았다.

 

4. 관산성 전투 패배로 인해 백제의 영향력 약화와 대가야의 멸망

 

562년 가야가 멸망할 당시 백제는 위덕왕 재위 8년이며, 신라는 진흥왕 재위 22년이다. 진흥왕 9월 가야가 신라에 대반란을 일으키​므로, 이사부(異斯夫)를 보내어 무력으로 가야국을 완전히 정복하였다. 


진흥왕 19년(서기 558) 봄 2월, 귀족 자제와 6부의 부유한 백성을 국원으로 옮겨 그곳을 채웠다. 나마 신득(身得)이 포노(砲弩, 돌을 쏘도록 만든 무기의 일종)를 만들어 바치니 그것을 성 위에 설치하였다. 23년(서기 562) 가을 7월, 백제가 변방의 백성을 노략질하였다. 임금이 병사를 내보내 막아 싸우게 하였다.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9월,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이 이사부에게 명하여 토벌케 하였는데, 사다함(斯多含)이 부장(副將)이 되었다. 사다함은 5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달려갔다. 전단문(栴檀門)에 들어가 흰 기(旗)를 세우니 성 안의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이사부가 병사를 이끌고 다다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전공을 논함에 사다함이 으뜸이었다. 임금이 좋은 밭과 포로 2백 명을 상으로 주었으나 사다함은 세 번이나 사양하였다. 임금이 강하게 권하자 포로를 받았으나, 풀어주어 양민이 되게 하고 밭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니,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찬미하였다.


삼국사기 제44권 열전 제4 사다함(斯多含) 열전을 보면 진골 계통으로 내밀왕(奈密王, 내물왕)의 7세손이요, 아버지는 급찬 구리지(仇梨知)이다. 본래 높은 가문의 귀한 자손으로서 풍채가 깨끗하고 준수하며 뜻과 기백이 방정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화랑으로 받들기를 청하므로 마지못해 화랑이 되었다. 그를 따르는 무리가 무려 1천 명이나 되었는데 사다함은 그들 모두의 환심을 얻었다. 사다함은 애초에 무관랑(武官郞)과 생사를 같이하는 벗이 되기를 약속하였는데, 무관이 병들어 죽자 너무 슬프게 울다가 7일 만에 죽었다. 나이가 17세였다.


김무력 장군이 관산성 전투의 승리는 국가의 운명을 바꾸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김무력 장군은 뛰어난 리더십으로 백제군 3만 명을 괴멸시키고, 이후 신라의 영토 확장에 큰 공을 세웠다. 관산성 전투 당사자인 신라의 진흥왕, 백제의 성왕과 아들 부여창의 리더십을 비교해보면 백제는 한순간의 판단착오로 패배를 자초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왕이 부하 50명을 데리고 이동하다가 포로가 된 것이 결정적 패인이었다. 김무력 장군은 첩보작전을 통해 성왕이 전쟁터에 온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기민하게 대처하여 승기를 잡았다. 성왕에 이어 부여창은 위덕왕이 되었으나 진흥왕의 위세에 밀려 큰 업적을 남기지 못하고 내리막길을 걸었다. 반면 진흥왕은 위험한 국경지방을 순시하며 영토 확장에 공을 들이고 백성들을 위로하여 민심을 얻었다. 관산성 전투에 참전했던 대가야는 신라의 보복을 받아 결국 멸망하였다. 김무력 장군의 관산성 전투 승리의 여파는 대단히 커서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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