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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세출의 독립투사 이규홍 선생의 독립 유공자 서훈 문제

기사입력 2019.04.22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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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이 배출한 위대한 독립투사 백농 이규홍 선생이 여태까지 독립 유공자로 서훈받지 못하여 후손들이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노력을 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손자 이경우 씨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안타까운 마음에서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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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농 이규홍 선생의 일생과 공적

백농 이규홍 선생은 상북면 대석리(현재 죽림산방이 생가)397번지에서 천석꾼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 한학을 배운 후 일본 명치대학 법학부에 유학했다. 

대학 졸업 후 1919년 상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법무부 위원, 임시정부 학무차장, 내무차장, 재무총장, 외무총장까지 역임했다. 제8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경상도 선출 의원, 임시의정원 부의장, 국무원, 외무장, 헌법기초의원 등 쟁쟁한 요직에서 활동했다.

양산과 경남 출신 중에서 임정의 최고 요인으로 활동하며 독립자금도 거금을 희사하였다. 한국 전체로 따져도 쟁쟁한 독립투사로 백범 김구 선생, 도산 안창호 선생 등과 교류하며 함께 대한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였다.

백농은 민족문재연구소가 펴낸 친일파 명단에도 오르지 않았다. 손자 이경우 씨의 숙부 이종훈 씨가 동아일보 도쿄지사장에게 부탁하여 일본 외무성 자료를 검색했는데, 요시찰 인물로 기록되어 있었고, 변절 기록은 없었다.

● 이규홍 선생이 도산 안창호 선생에게 보낸 편지

임시정부 긴급 유지비 후원은 이규홍 선생이 적극 노력하겠다는 내용이 나와있다.

伊之先生 回鑑
惠椷을 奉讀하옵고 여러 가지로 늑김이 만핫슴니다. 여러 가지로 艱難한 것이 만흔에 모든 것을 犧牲하고 局에 나아가신 吾兄과 밋 여러분 兄等을 對하야 感謝함을 말지 안이함니다.


弟가 現 時局을 爲하야 생각할에 心神이 漠然함니다. 當局하신 여러분은 極한 勞憔 中에 잇을 줄을 알고도 援助하기 不能하오니 自身의 庸劣한 것을 스스로 責望할임니다.

 

그러나 이 어려운 것을 잘 참고 견면 成功잇을 것을 밋슴니다. 形便의 大槩와 臨時政府에 對한 愚見을 春山 海天君 兩兄回答할에 말쌈하얏셧는데 兄 다 써야 㒰一한 말삼이겟기로 그 片紙를 난호 보실쥴 밋고 煩告치 안이함니다.


臨時政府 救急 維持費를 後援함에 對하야는 弟가 極力하겟슴니다. 그러나 春山에게 보낸편지 中에도 말삼하얏거니와 이곳 形便이 어려운 境遇가 만흔가운  近日에는 內地飢饉同胞救濟金을 것는 時干(間)이라 金錢辦備는 더욱 어렵슴니다. 


趙畹(琬)九씨 一人의 聲明書가 遠東方面에는 別影響을 쥼이 업슬듯 하나 美夏(미국과 하와이를 말함인 듯)에 在留하는 李博을 擁護하는 同胞들에게는 影響을 쥬는 것이 不少하겟슴니다. 압흐로 되어가는 일을 잘 가르처 쥬심을 바라옵니다.

1925년 4월 17일.

● 백농 이규홍 법정 전염병인 결핵 감염

상해에서 임정 요인으로 활동하다가 법정 전염병인 폐결핵에 걸려 고향인 양산으로 귀국하여 일본 경찰에 의해 요시찰 인물로 주목받으며 가택연금을 당해 집에서 요양하였다. 상북면 대석리 397번지 본가에서 요양하며 외부 출입과 활동이 금지되었다.

본가의 별채에 일본 경찰과 경찰보조원(한국인)이 상주하며 감시를 하였고, 방문자를 검문, 검색하였다. 결핵 치료는 양산읍내 병원에서 의사와 간호사가 자택을 방문하면서 진행하였다.

지금은 폐결핵이 약을 꾸준히 복용하면 쉽게 완치가 되지만 그 당시는 의료기술이 낙후되어 폐결핵은 중병으로 인식되었다. 전염성이 강하여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폐결핵 환자로부터 나온 미세한 침방울 혹은 비말핵(droplet nuclei, 기침이나 재채기를 하면 결핵균이 들어 있는 입자가 공기 중에 나와 수분이 적어지면서 날아다니기 쉬운 형태로 된 것)에 의해 직접 감염된다.

결핵은 기원전 7천년 경 석기 시대의 화석에서 그 흔적이 발견된 이래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생명을 앗아간 감염 질환으로, 1882년 독일의 세균학자 로버트 코흐(Robert Koch)가 결핵의 병원체인 결핵균(mycobacterium tuberculosis)을 발견하여 같은 해 3월 학회에 발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과거 결핵을 치료할 수 있는 효과적인 약물이 없던 19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결핵 환자들은 깨끗한 공기가 있는 시골에서 요양을 하거나 혹은 감염된 폐를 강제로 허탈시켜서 폐 속에 있는 결핵균이 공기와 접촉하지 못하게 폐쇄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던 적도 있었다.

● 위생경찰

일제 강점기 때 총독부는 위생경찰 개념을 도입했다. 19세기말 일본에 위생경찰의 개념이 수입되었다. 일본은 국가중심의, 경찰중심의 위생체제를 받아들였다. 일본은 의사경찰이라는 이름 대신에 위생경찰이라는 말을 썼으며, 그들은 보건, 의료, 방역, 가축방역에 관한 일체 사무를 담당했다.

위생경찰은 조선 총독부 경찰의 가장 중요한 업무였다. 업무 범위는 매우 넓어서 환경상태, 전염병관리, 의약인 단속, 식품위생 등을 망라했다. 사상범의 경우 특정인을 범죄의 대상으로 삼는 데 그쳤지만 위생사범의 경우 전 국민 모두를 대상으로 삼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위생경찰은 매우 효율적인 통치수단이었다.

● 이규홍 선생 가택 연금은 이중의 격리책

백농은 독립투사로서 결핵에 걸려 귀국하였다. 상해 임시정부 요인이었기에 바로 투옥감이었다. 하지만 결핵 환자였으니 수감하면 동료 죄수와 간수들에게 감염 우려가 농후하기에 자택 격리시킨 것이었다.

백농의 생가 앞에 선 손자 이경우 씨

 

 
일제강점기 때의 총독부 위생경찰은 권한이 막강하였다. 독립투사이자 결핵 환자로서 자택격리의 두 가지 요인이 있었다. 치료약이 없어 소극적으로 요양하며 낫기를 바랐다. 전염성이 강해 일제 경찰은 환자를 일반인과 강제로 격리를 시켰다.

일제 경찰이 상주하며 감시했던 별채
 
 
● 백농의 손자 이경우 씨 조부 명예회복 활동

4월 16일 이경우 씨는 양산을 방문하여 필자와 함께 더불어민주당 서형수 국회의원 사무실을 방문하여 독립운동 관련자료를 제출하고 협조를 당부하였다.
 
서형수 국회의원은 의정활동으로 부재 중이어서 김성민 비서를 만나 면담을 하며 억울한 사연을 전했다.
 
 
 
벌써 올해 두 번째 방문이었다. 첫번째 방문도 필자가 동행한 바 있었다. 김성민 비서는 최대한 독립유공자 서훈을 도와주기로 약속하였다. 표병호 도의원과 전화 통화를 했는데, 경남도의회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돕기로 하였다.

독립 투쟁 관련 자료를 모두 취합하여 보훈처에 여러 번 제출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그 이유는 백농이 귀국 후 사업을 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귀국 후 가촌토지주식회사 사장, 환영자동차합자회사 무한책임사원 근무 기록이 남아 있어 친일활동으로 의심받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백농 선생의 이름이 올라간 것은 재산을 상속받지 못한 아들인 이종문씨가 처남 지영대 씨와 사업을 같이 하면서 형식상 요건을 갖추지 못해 부득이 부친인 백농의 이름을 올린 것으로 유추되고 있다. 생계유지를 위해 사업한 것을 친일로 보는 것도 문제다.

백농은 1919년 상해 임정으로 합류하기 전부터 백산 안희제 선생의 백산상회 맞은 편에 일광상회라는 무역회사를 경영하며 독립자금을 상해 임시정부에 보냈다. 귀국 후 가촌토지주식회사와 환영자동차합자회사를 설립, 운영한 것은 생계 유지 차원도 있지만 주된 목적은 상해 임정으로 보낼 독립자금 조달이었다.

백농은 독립투사이자 결핵환자로 이중의 일제 경찰 감시망 굴레에 갇혀 사회활동을 할 처지가 못되었다. 손자의 할아버지 명예 회복 신청이 단지 일제시대 사업을 한 이유로 보훈처가 거절함으로써 장벽에 부딪쳐 있다.

● 독립자금 기부

백농 이규홍 선생 집안은 천석지기 부자였다. 또한 사업을 통해 돈을 벌어서 독립자금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상해 임시정부로 꾸준히 보냈다. 필자는 이경우 씨와 함께 죽림산방을 방문하였다.
 
 
현재 상북면 대석리 죽림산방 자리의 본가 뒤에 있는 대나무 숲속에 땅을 파고, 항아리를 묻어서 독립자금으로 보낼 돈을 은밀하게 보관하였다. 이 돈은 집안의 전답을 팔고, 사업을 통해 벌이들인 돈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죽림산방 대표인 권민경 씨가 4월 16일 면담에서 증언해주었다.

재산과 사업에서 번 돈을 모아두었다가 이경우 씨 부친 이종문 지말봉 부부, 외삼촌 지영대 부부, 외사촌 지유용 씨가 환영택시를 타고 구포역 근처의 인산병원에 가 임정 첩보 요원에게 전달하였다. 독립자금은 검문을 대비해 허리에 전대를 차거나 주전자에 넣어 운반하였다.

독립자금을 숨긴 대나무 숲속 앞에 선 이경우 씨
 
 
증언해준 죽림산방 권민경 대표
 
 
이경우 씨와 권민경 대표의 면담
 
 
권민경 대표는 백농 선생 생존시에 집안 살림을 맡았던 할머니에게 직접 들었다고 하였다. 작년 3.1절 EBS 방송에서 백농을 다룬 특집을 방영했을 때도 증인으로 출연하였다. 권대표는 이경우 씨를 만나자 아직도 서훈을 못 받았느냐고 물으며 안타까움을 표시하였다.

대석리 대석저수지는 백농의 아들 이종문 씨가 농민을 위해 사재를 털어 축조한 바 있다. 수리조합을 운영하며 만들었는데 지금은 한국농어촌공사 소유로 넘어갔다.

부친이 사재를 털어 만든 대석저수지를 가리키는 이경우 씨
 
 
 
국가와 양산을 위해 독립투쟁, 농민을 위한 저수지 축조 등 좋은 일을 한 백농 이규홍 선생, 부친 이종문, 모친 지말봉 씨 부부, 외삼촌 지영진 씨, 지영대 씨 부부, 외사촌 지유용 씨는 하루빨리 독립유공자로 일괄 서훈해야 마땅하다.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재산 대부분, 목숨까지 바친 백농 이규홍 선생의 독립유공자 서훈은 빨리 되어야 하겠다. 양산시민들의 응원과 지지 협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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