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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력 장군의 관산성 전투와 연관된 닭재와 계현산성

기사입력 2020.09.22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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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김무력 장군이 신라의 주요 군 지휘관으로 등장한 계기 

 

 

김무력 장군은 『삼국사기』에 신라본기에 등장한다. 진흥왕 14년(553년) 7월,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을 군주로 삼았다. 진흥왕 15년(554년) 신주 군주 김무력이 주의 병사를 이끌고 싸웠는데,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도도(高干都刀)가 빠르게 공격하여 백제 왕을 죽였다.

 

 

할아버지인 무력(武力)은 신주도(新州道) 행군총관이었는데, 일찍이 병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백제왕과 그 장수 4명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의 목을 벤 일이 있었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조> 신라 진흥왕 11년(550년) 이사부가 고구려와 백제가 도살성과 금현성을 놓고 뺏고 뺏기는 치열한 혈투를 감행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두 나라 군대가 힘이 빠졌을 때 두 성을 빼앗는 어부지리 작전을 취하였다. 이때 이사부의 군사 행동의 원칙은 나제(羅濟)동맹을 깨는 것이었다.

 

 

『삼국사기』는 진흥왕이 이사부에게 두 성을 빼앗으라고 명했다고 기록하였다.  다음 해에 진흥왕이 친정체제를 수립하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진흥왕은 죽령 이북의 고구려 땅에 대해 침공을 명하면서 이사부가 아닌 거칠부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러면서 백제와의 동맹을 복원한다. 젊은 진흥왕은 왕권강화 차원에서 권력의 핵심에 있던 노령의 이사부를 배제하고 신진세력인 거칠부, 김무력 장군을 중용하기 시작하였다. 

 

 

『삼국사기』 〈열전 거칠부조〉에 따르면 진흥왕은 거칠부와 여덟 장군을 시켜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치도록 명령했다. 백제가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는 사이에 신라의 거칠부 군대는 강원도 영서 일대를 일거에 점령하였다. 이사부에 의해 깨졌던 나제동맹이 한해 사이에 복원됐다. 이와 같은 번복 과정에서 동맹을 깬 이사부는 권력의 이선으로 후퇴하고, 나제동맹 복원을 주장하는 거칠부 등이 진흥왕을 설득해 고구려의 서쪽은 백제가, 동쪽은 신라가 공격하는 협공전략을 채택해 성공하였다. 

 

 

도살성, 금현성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신라는 소백산맥을 넘어, 충청북도의 남한강 중류를 장악하게 됐다. 남한강 수운은 삼국시대에 대량의 물자를 수송하는 주요 교통로로 이용되었다.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 목재 등 임산물이 물길을 따라 이동했다. 남한강 주변의 평창, 단양, 충주, 여주, 양평 등의 요지를 확보함으로써 한강유역으로 진출할 계기를 마련하였다. 

 

 

남한강 중상류를 장악한 이후 신라는 한강 하류와 경기도 일대에 대한 공세에 나선다. 이사부에 이어 진골 출신의 거칠부, 금관가야 왕자인 김무력 장군이 주요 지휘관으로 권력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진흥왕은 새롭게 확보한 영토를 순방하고, 점령지 백성을 위로하고 복속시키면서 활동내용, 공을 세운 측근 세력의 이름을 비석에 남겼다. 그것이 바로 진흥왕 순수비, 단양 적성비다. 

 

 

나제동맹은 겨우 복원됐지만 오래 지속하지 못하였다. 2년 후인 553년, 김무력 장군은 진흥왕의 명에 따라 백제 동북지역의 옥토인 한강 유역을 공격해 영토를 확장하였다. 진흥왕은 그 땅을 신주(新州)라 이름 붙이고 김무력 장군을 군주로 임명하였다. 혼란 속에서도 백제 성왕은 딸을 진흥왕에게 시집보내 결혼동맹을 외관상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한편 비밀리에 왜국에 사신을 보내 군대 파견을 요청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이 전사함으로써 신라와 백제의 동맹관계는 파탄이 되었다. 

 

 

소백산 이남 지역에 배치된 신라군이 작전에 동원돼 죽령을 넘어 적성을 함락한 것은 신라 영토 확장의 성공적인 전초전이었다. 김무력 장군과 한강 전투의 주역 비차부는 경상도 북부 지역의 군주로 군을 정비한 다음, 이사부의 지휘 아래 죽령을 넘어 적성 전투에 참가하고, 이후 지휘봉을 이어받은 거칠부 아래서 한강 유역과 관산성에서 백제, 고구려와 패권 싸움을 벌여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2. 김무력 장군의 형인 세종의 활약 

 

단양 적성비에 나오는 대아찬 내례부(內禮夫)가 학계에서는 적성비의 『삼국사기』, 『삼국유사』, 진흥왕 순수비에서 노리부(弩里夫), 세종(世宗), 노종(奴宗), 노부(奴夫), 내부(內夫) 등 다양하게 표기된 사람과 동일인이라는 주장이 있다. 노리부는 음을 표기한 것이고, 세종(世宗)은 이름의 뜻을 표기한 것이라고 한다. ‘세(世)’는 ‘누리’를 뜻하고, ‘종(宗)’은 높은 사람의 이름 뒤에 붙이는 어미격으로 ‘부(夫)’와 일치한다. 이사부를 태종(苔宗), 거칠부를 황종(荒宗)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노종, 내부, 내례부 모두가 음과 뜻을 혼용하면서 쓴 동일인물의 다른 이름이라는 해석이다. 

 

이렇게 여러 이름으로 나오는 인물은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해왕(『삼국유사』에선 구형왕)의 맏아들이다. 『삼국사기』에선 노종, 『삼국유사』에선 세종이라고 표현했다. 『삼국사기』엔 그의 활동이 여러 차례 나타난다. 이 사람은 바로 김무력 장군의 형이다. 가야 왕자들이 신라의 영토 확장에 큰 공을 세운 것이다. 

 

노부(奴夫)는 삼국시대 신라의 거칠부 등과 고구려를 침공하여 한강 상류지역 10개군을 점령한 장수로 관등은 파진찬(波珍飡)이었다. 『삼국사기』 열전 <거칠부>에 다음 내용이 나온다. 551년(진흥왕 12년)에 거칠부(居柒夫) 및 대각찬(大角飡) 구진(仇珍), 각찬(角飡) 비대(比臺), 잡찬(迊飡) 탐지(耽知), 비서(非西), 파진찬 서력부(西力夫), 대아찬(大阿飡), 비차부(比次夫), 아찬(阿飡) 미진부(未珍夫) 등과 더불어서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략하여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 : 강원도 철령) 이내의 10개 군(郡)을 빼앗았다. 

 

진흥왕의 명을 받아 고구려를 쳐서 죽령 이북 10개 군을 확보할 때 거칠부 휘하의 장군 가운데 한사람이 파진찬 노부(奴夫)다. 진지왕 2년(577년) 10월, 백제가 서쪽 변방의 주와 군에 침입하자, 임금이 이찬 세종(世宗)에게 명해 군대를 내, 일선 북쪽에서 그들을 공격해 쳐부수고 3천 7백여 명의 목을 베었다. 

 

진평왕 원년(579년)에 이찬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으로 삼았고, 10년(서기 588년)에 상대등 노리부가 죽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노리부는 적성비에서 대아찬으로 시작해 파진찬을 거쳐 상대등까지 승진한다. 아버지 구해왕이 항복과 동시에 상등(上等)의 직위를 받았다.

 

구형왕의 맏아들 노종도 영토확장에 공을 세워 상대등 벼슬을 했다. 관산성 전투의 주역인 동생 김무력 장군은 각간, 김무력 장군의 손자인 김유신이 태대각간에 올랐다. 가야 왕족의 후예들이 각자 능력을 발휘하여 4대에 걸쳐 신라에서 재상을 맡았다. 

 

3. 김무력 장군이 성채를 세운 계산과 닭재의 연관성 

 

동원과기대 엄원대 전 교수는 김무력 장군, 김서현 장군, 김유신 장군 등 김무력 가문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였다. 한문 전공자로 양산의 금석문, 고문헌 해석을 주로 하면서 다양한 연구 업적을 남긴 양산의 독보적인 학자라 할 수 있다.

 

김해 김씨 조선시대 『숙종병인보』에 실린 김무력 장군의 활동상을 엄원대 교수가 해석하였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박식한 한문 실력, 이두문 활용, 여러 가지 전거 인용 등을 통해 해석하였기에 수긍이 된다. 족보에 나온 내용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김무력은 무술생이다. 삼형제가 모두 낙동강 너머〔김해〕의 장사로서 아버지(금관가야 구형왕)의 명을 좇아 신라를 도와 출전하였다. 신미년에 거칠부가 고구려를 침공하여 10개 성을 빼앗고 팔관소를 설치하였다. 갑술년에 백제 성왕이 스스로 10만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삼성(삼년산성 : 삼년산군, 현재의 충북 보은)을 포위하였다. 

 

양주 공이 남쪽을 치는 대원수가 되어 월봉 아래 장춘에서, 군대가 주둔할 때 세우는 영채(營寨 : 작은 성, 성채) 30동을 지었다. 백제의 모과해가 (신라) 왕의 진영을 에워싸고 어지럽게 했다. (김무력) 공이 이를 듣고 노하여 창과 한필의 말로 백제왕을 격파하고 10만 병사를 멸하였다. 환군하여 태화관에 영채 36동을 지었으며, 교산에 윤산성을 축조하였다. 

 

골포, 칠포, 감문, 초팔, 사벌이 투항하여 왔다. 진평왕 원년 10월 16일에 싸우다 순절하였다. 벼슬은 각간으로 금관대군주에 봉해졌다. 묘는 취산 아래 계좌에 있으며, 석물을 갖추었다. (왕이) 장지가 있는 산 안에 취선사를 세워 묘를 수호하도록 포고문을 내렸다. 뒷날 박씨 부인과 파도부인을 공과 함께 합장하였다. 

 

이상의 족보 내용을 보면 10만 이라는 군사는 과장된 표현이고, 한 자루 창을 들고 말에 올라 적을 격파했다는 내용에서 기병을 활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엄원대 교수는 해석할 때 신라와 백제가 싸운 곳에는 월봉(月峰)이란 지명이 없다고 하였다.

 

월봉을 달뫼로 읽어지며, 달뫼가 다시 한자화 되면서 계산(鷄山)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다. 이를 토대로 관산성 인근을 살펴보면 충남 금산군, 추부면 성당리, 충북 옥천군 군서면 금산리, 행정리, 사정리에 실제 계산이 위치한 것을 발견하였다. 이곳은 충북 영동군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라고 주장하였다. 

 

필자는 이 내용에 따라 충북 옥천군, 충남 금산군, 대전시 삼괴동을 현장 답사를 하였다. 성왕이 머물렀던 옥천군의 성치산성, 말과 관련된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 추부면 성당리, 서대산 개덕사, 계산(鷄山)과 관련된 닭재, 계현산성(鷄峴山城)을 둘러보았다. 

 

계현산성은 대전광역시 동구 삼괴동 덕실마을 닭재 위의 북쪽 봉우리를 감싸고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1991년 7월 10일 대전광역시의 기념물 제24호로 지정되었다. 엄원대 교수의 주장처럼 계산인 닭재, 계현산성 등 달과 관련된 지명과 역사유적이 있어서 매우 반가웠다. 닭재는 고개가 험하지 않아 대전 동구 삼괴동에서 옥천군 군서면 사양리로 군사이동이 쉬운 곳이다. 계현산성은 성벽이 많이 무너졌으나 아직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김무력 장군이 백제의 태자 부여창이 이끌던 주력군이 머물렀던 백골산성, 대청호반을 기습 공격하여 백제군을 섬멸하였다. 이후 닭재를 넘어 옥천으로 행군하였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지난번에 소개했던 대전의 성치산성과 이름이 같은 옥천군의 성치산성은 닭재와 계현산성과 그리 멀지 않았다.

 

성치산성은 금산군 추부면에서 옥천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는 산성이었다. 백제 성왕이 성치산성에서 나와 태자인 부여창을 만나러 가다가 구진벼루에서 신라군 매복에 걸려 전사하면서 전쟁의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충남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는 옛날부터 말을 사고팔던 마장이 있었고, 백제군의 말을 기르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옥천을 점령했던 백제군을 신라군이 사방에서 포위했는데, 김무력 장군은 백제군의 배후를 기습하며 백골산성 전투에서 대승하여 백제군 주력이 궤멸되었다. 닭재와 계현산성은 백제군 진영에 있었지만 김무력 장군 부대가 점령하여 일시 주둔했을지도 모른다. 관산성 전투와 관련된 신라와 백제의 성이 옥천군, 금산군, 대전에 많지만 이번에 주요 성을 직접 답사하면서 김무력 장군과 연관된 지명과 전투현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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