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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박사 화요 칼럼/김무력 장군의 신분 상승과 관등제도 및 군사제도  

기사입력 2020.09.15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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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신라의 골품제도에서 진골이었던 김무력 장군 

 

신라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로서 성골, 진골, 6두픔 등으로 엄격하게 구분하여 왕이 되거나 벼슬을 할 때 최우선적으로 고려되었다. 신라 제29대 왕인 태종무열왕은 진골(眞骨) 출신으로 이찬(伊飡)에 이르기도 했던 김용춘(金龍春)과 진평왕의 차녀 천명공주(天明公主)의 아들이다.선덕여왕, 진덕여왕에 걸쳐 국정 전반이나 외교 문제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진덕여왕 때는 이찬(伊飡)에 이르게 되고 진덕여왕 사후 대리청정으로써 국인의 추대를 받은 알천의 사양으로 진골 출신 최초의 신라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세계적 대제국을 이뤘던 로마는 초창기에 대단히 위계적이며 계급을 의식하는 사회였다. 최하층은 노예, 그 위로는 피해방인(해방노예), 그리고 위에는 자유 시민이 있었다. 자유 시민은 또 일정한 계층으로 분류되었다. 로마 역사 초기 계층은 로마 창건을 이끈 100명의 가부장 출신의 귀족과 나머지 평민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공화정 시대에 일부 평민 가문이 부유해져 정계에 진출하고, 귀족 계급이 몰락하기도 하면서 이 구분의 중요성은 떨어지게 되었다. 귀족이건 평민이건 누구나 자신의 가족에서 집정관에 오르면 신귀족으로 인정받았다. 

 

 

로마는 일부 동맹국에는 라티움인의 권리를 보장했는데, 이 권리는 완전한 로마 시민권과 외국인의 중간 수준의 신분을 의미했다. 로마법이 이 지위를 보장했고, 이들 나라의 최고 정무관들은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 라틴인의 권리에는 여러 층위가 있는데, 주된 구분은 ‘투표권이 있는 시민권’(민회 참석)과 ‘투표권이 없는 시민권’으로 나눌 수 있다. 일부 로마의 이탈리아 동맹국은 기원전 91~88년의 동맹국 전쟁 이후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 기원후 212년 카라칼라의 칙령으로 제국내의 모든 자유 시민에게 로마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신라의 관등제도는 골품제도(骨品制度)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관등제도는 법흥왕(6세기 초) 때에 완성되었는데 경위(京位 : 서라벌 거주 왕경인) 17등과 외위(外位 : 지방인) 11등의 이원적 체계로 구성되었다. 진골은 최고 상한선인 이벌찬까지 승진할 수 있으나, 6두품은 6위인 아찬까지, 5두품은 10위인 대나마까지, 4두품은 12위인 대사까지 승진의 한계가 제한되어 있었다. 하한선은 없어 진골 출신도 다른 두품과 같이 17위에서 출발하였다.  

 

 

엄격한 골품제도하에서는 신분에 따라 유능한 인재라도 출세에 제한을 받았고, 일상생활의 의식주도 차별을 두었다. 혼인도 대체적으로 같은 골품끼리 하는 것이 관례였다. 다른 골품과 결혼하면 그 소생은 어머니의 골품에 따라 신분이 정해졌다. 일종의 모계사회적인 요소가 강했다. 골품을 유지하기 위하여 근친결혼이 유행되었지만 부작용이 많았으며 성골이 단절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골품제도의 모순에 불만을 가진 계층은 6두품과 당나라 유학생들이었다. 이들은 골품제에 반기를 들고 지방 호족들과 연합하여 반사회적 집단으로 화하였다. 외위는 촌주를 포함한 지방의 유력자를 중앙에 포섭 편입시키면서 왕경인과 구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7세기 중엽에 와서는 유력한 지방의 촌주층에 대한 군공포상책으로 경위 관등을 개방함에 따라 외위는 자연히 소멸되었다. 

 

 

신라는 로마제국과 달리 신분차별이 극심하여 발전에는 한계가 있었다. 김무력 장군은 멸망한 금관가야의 왕자로서 진골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신라의 원래 진골들과는 차별이 존재하였다. 김무력 장군의 아들인 서현 공이 성골인 갈문왕의 손녀 만명공주와 결혼할 때 가족의 반대가 심하였다. 그러나 김무력 장군은 관산성 전투에서 빛나는 전공을 세워 신라왕실의 신임을 받게 되고 벼슬도 차츰 높아지게 되었다. 마지막에 각간(角干)으로 대우받았다. 

 

 

각간은 신라 때의 최고 관위(官位)로 이벌찬(伊伐飡), 이벌간(伊伐干), 우벌찬(于伐飡), 각찬(角粲) 등 다른 이름이 많으며, 처음에는 주다(酒多)라 하였다. 진골만이 하는 벼슬로서 신라 17관등제와는 별도로 제정되었다. 중대(中代)에 이르러 이 위에 대각간, 태대각간 등의 상위 관등을 두어 김유신처럼 국가에 특별한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이 관등을 주었다. 

 

 

2. 신주 군주였던 김무력 장군과 신라의 군사제도 

 

550년경에 세워진 ‘단양적성비’에 아간지란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신라의 17관등 중 6번째인 아찬(阿粲)을 의미한다. 561년에 세워진 ‘창녕진흥왕척경비’에는 ‘무력지 잡간’으로 적어놓았는데, 잡간은 신라 17관등 중 세 번째 등위에 해당한다. 관산성전투에서 빛나는 전공을 세운 김무력 장군은 인정을 받아 승진하였다. ‘북한산 신라진흥왕 순수비’에서도 김무력의 등위는 그대로 잡간의 등위를 유지하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 진흥왕 본기, 15년(서기 554) 가을 7월, 명활성(明活城)을 보수하여 쌓았다. 백제 왕 명농(明穠)이 가량(加良 : 대가야)과 함께 관산성(管山城)에 쳐들어왔다. 군주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 보면 초기 관산성 전투에서 신라의 고위 관직인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의 참전이 확인된다. 이 두 사람은 나중에 역사 기록에 등장하지 않아 패전의 책임을 졌거나 전사했을지도 모른다. 

 

김무력 장군은 관산성 전투가 발발하자 왕의 명령에 따라 신주(현재의 경기도 광주)에서 급속 행군하여 관산성 전투 현장으로 달려왔다. 군주는 지방관직인 도독(都督)으로 2등급인 이찬, 잡찬, 파진찬, 대아찬, 아찬(6등급)이 맡을 수 있는 벼슬이었다. 김무력 장군은 그 당시 6등급의 관직인 아찬이었다. 

 

신라는 초기에 6부(部)의 장정을 징발하여 편성한 6부병(六部兵)이 수도를 수비하였다. 신라의 군사제도는 삼국간의 항쟁이 격화된 진흥왕 때부터 본격적으로 정비되기 시작하였다. 삼국항쟁이 격화된 544년(진흥왕 5) 6개의 부대를 통합하여 대당(大幢)을 편성하였다. 

 

이는 통일 이전 신라 군사력의 기본이 되는 6정(六停)의 효시로 그 뒤 550년대에 영토의 비약적인 확장과 더불어 점령지에 주를 설치했다. 주마다 군단을 설치한 결과 종전의 대당 이외에 진흥왕의 영토확장과 더불어 설치된 상주정(上州停 : 552), 한산정(漢山停 : 604)과 문무왕 때 우수정(牛首停 : 673), 무열왕 때 하서정(河西停 : 658), 신문왕 때 완산정(完山停 : 685) 등 6정(六停)을 편성, 각주에 배치하였는데, 주의 이동과 함께 그 소재지가 이동되었다. 대당을 제외한 나머지 5개의 정은 모두 지방민을 징발하여 편성하였다. 

 

『삼국사기』의 기록은 탈해왕 8년(64) 이후에 왕경에서 출동하는 신라의 군사조직이 보병과 기병으로 편성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2세기경 경주고분에서 활, 철제 창, 환두대도, 쇠도끼 등과 함께 재갈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3세기경의 정래동 토광묘에서 출토된 단갑은 당시에 신라군이 갑주로 무장하였음을 보여주며, 4세기 후반에 철제 등자와 함께 출토되는 금동제 갑주와 마갑주는 신라에 중장기병이 출현하였음을 알려 준다. 5세기대의 대형 적석목곽분에서 금관을 비롯한 금제·은제·금동제 장신구가 부장되었다. 철제 갑주의 사용이 하위신분으로 확산되면서 철제 갑주가 거의 부장되지 않고 소형분에만 나온다. 

 

5세기 중반 이후에는 개마와 기병용 갑주의 무장이 귀족들에게 보편화되고, 보병도 상당수가 갑판으로 무장하였다. 이는 6세기 초에 개마(介馬)와 기병용 갑주의 무장이 좀 더 낮은 신분으로 확대되면서 중장기병부대가 출현하게 된 것을 암시한다. 이 중장기병부대가 지방으로 이동, 배치되면서 10정 가운데 이화혜정(伊火兮停)이나 음리화정(音里火停)이 되었으며, 단갑으로 무장한 왕경의 보병은 6정 가운데 왕경에 배치된 대당의 병졸로 편성되거나 지방에 배치된 6정의 군단본부 병력이 되었다. 

 

군사작전의 수행은 기본적인 군사조직을 단위로 이루어졌다. 왕경, 소경, 군, 성, 촌(혹은 현)에 편성된 법당은 해당지역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전투를 수행했다. 군주(軍主 : 뒤에는 도독)라 하더라도 왕의 명령 없이는 함부로 이동시키거나 출동시키지 못했다. 군주의 병력 동원은 6정 군단의 자체 병력과 주치에 편성된 법당에 한정되었다. 그러나 왕의 명령이 있을 경우에는 6정의 군단장인 군주는 군·성·촌의 법당을 동원하여 전투를 수행하였다. 신주 군주 김무력 장군이 왕명에 의거 삼년산군의 병력과 합세하여 관산성 전투에서 승리했다. 

 

3. 백제의 관등제도와 군사제도 

 

백제는 16개의 관등체제를 만들었다. 그 중에서 1등급에 해당하는 1품에 좌평을 6명 둔 것이 6좌평제이다. 1품 좌평 6명, 2품 달솔 30명, 3품 은솔, 4품 덕솔, 5품 한솔, 6품 내솔, 7품 장덕, 8품 시덕, 9품 고덕, 10품 계덕, 11품 대덕, 12품 문독, 13품 무독, 14품 좌군, 15품 진무, 16품 극우, 은솔 이하는 정원이 없다. 

 

6좌평이 하는 일은 내신좌평(內臣佐平) ; 장선납사, 왕명의 출납, 왕의 명령에 관련된 일, 내두좌평(內頭佐平) ; 장고장사, 재정업무, 국가와 궁궐의 재정과 관련된 일, 내법좌평(內法佐平) ; 장례의사, 의례관례, 국가의 행사, 왕과 관련 된 공식행사주관, 위사좌평(衛士佐平 ) ; 장숙위병사, 왕궁 숙위, 궁궐의 수비, 왕의 경호, 조정좌평(朝廷佐平) ; 장형옥사, 형벌권, 법률의 개정, 사면권을 관장, 병관좌평(兵官佐平) ; 장내외병마사, 군사권, 국방, 안보에 관한 일. 6좌평은 오늘날의 장관급이다. 

 

관산성 전투에서 김무력 장군이 성왕, 4명의 좌평을 포함한 군사 50명을 사로잡았다. 좌평  4명이 성왕을 수행했다가 잡혀 목숨을 잃었다.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 구진벼루 근처가 군사가 주둔했던 군전이었다고 한다. 성왕 사절지 옆의 서하천 성왕교를 건너면 염쟁이 마을이라고 부른다. 성왕, 좌평, 백제군 시신을 수습했던 곳이다.    

 

중앙의 군사조직으로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수도 5부에 배치된 부대들이다. 이 5부의 부대에는 각각 500명의 군사가 배치되어 달솔의 관등을 가진 자가 지휘하였다. 따라서 이 왕도 5부는 군관구로서의 성격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지방에 주둔한 군사조직으로는 5방의 방성(方城)에 배치된 부대를 들 수 있다. 『한원(翰苑)』 백제조에 의하면 5방의 방성은 석축으로 이루어져 있고, 여기에는 700∼1,200명의 군사가 배치되어 있었다.  

 

이 군대를 지휘하는 자는 방의 장관인 방령(方領)이었다. 방령은 달솔의 관등을 지닌 자가 맡았다. 방성 외에 군의 치소인 군성(郡城)에도 군부대를 배치하였다. 군사작전은 거점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거점성은 5방의 중심지인 방성이나 군의 중심지인 군성, 현에 해당하는 성들이다. 이러한 거점성들의 군사들은 여기에 파견된 지방관이 관할하였다. 

 

관산성 전투의 중요한 싸움이 벌어졌던, 옥천군의 이성산성, 저점산성, 대전시 동구 성치산성, 노고산성 등을 답사하였다. 백제의 산성은 험한 산에 있고, 신라의 산성은 논밭이 있는 평야지대에 있어 군량미 조달과 지원군을 부르는데 유리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전투의 승패에 결정적이었다. 백제군은 귀족의 반대로 분열상을 보여 지원군을 부르지 못했지만 신라군은 총력전을 벌였다. 현대전도 마찬가지로 국민이 단합하고 군사력,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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