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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력 장군의 관산성 전투 승리 전후의 삼국관계  / 심상도 박사 화요 칼럼

기사입력 2020.09.08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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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나제동맹 성립과 강화 

 

관산성 전투가 발발하기 전의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의 관계는 화해, 긴장, 전쟁의 연속이었다. 동맹이 지속되다가 깨어지기도 하며 삼국은 치열한 생존경쟁에 나섰다. 나제동맹(羅濟同盟)은 신라와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南進)을 막기 위해 체결한 동맹으로 433년(고구려 장수왕 21년, 신라 눌지왕 17년, 백제 비유왕 7년)에 우호관계를 맺으며 성립하였다.  

 

백제 비유왕(毗有王, 재위 427∼455년)은 제20대 왕으로 신라, 왜, 중국 남조의 송(宋) 등과 우호관계를 형성하여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맞서려 했다. 비유왕은 성은 부여(夫餘)이고 이름이나 시호 등은 전해지지 않는다. 『송서(宋書)』에는 백제왕 ‘여비(餘毗)’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부여비(夫餘毗), 여비(餘毗)는 별칭이다. 

 

 

비유왕 2년(428년) 왜국에서 50여 명에 이르는 사신 일행이 백제로 왔으며, 백제는 비유왕 7년(433년) 7월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했다. 이듬해 신라와 백제는 서로 예물을 주고받으며 우호관계를 돈독하게 했다. 그리고 백제는 비유왕 3년(429년), 비유왕 4년(430년), 비유왕 14년(440년)에 중국 남조의 송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이는 중국 남북조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형성하고 남하정책을 추진하던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비유왕이 죽은 뒤에 맏아들인 개로왕(蓋鹵王)이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은 427년에 평양으로 천도하고 남진정책을 추진하였다. 고구려는 군사적 우위를 보이며 백제와 신라에 공세를 취하였다. 장수왕(63년)은 먼저 백제를 침략하여 475년에 백제의 수도 한성을 점령하고 개로왕(21년)을 죽이며 한강유역을 차지했다. 고구려왕 거련(巨璉 : 장수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한성을 포위하자 개로왕은 성문을 굳게 닫고 나와 싸우지 않았다. 이에 고구려군은 군사를 4도로 나누어 협공하고, 화공으로 성문을 불태웠다.  

 

 

성내 사람들은 두려워하여 나와 항복하는 자가 있었으며, 왕도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수십 기를 거느리고 성문을 빠져나와 서쪽으로 달아나다 고구려 군사에게 사로잡혔다. 고구려 군사는 북성(北城)으로 침입하여 7일 만에 이를 함락하고 남성(南城)으로 옮겨 공격하여 성을 함락하고, 백제 개로왕은 아차성(阿且城)으로 묶여 보내져 살해되었다. 

 

 

신라는 1만의 구원군을 보냈다. 백제, 문주왕이 신라의 구원병 1만 명을 얻어 한성에 돌아왔으나 이미 성은 함락되고 개로왕이 전사하였으므로, 왕위에 오르고 도읍을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고구려는 현재의 서울 중심으로 북한산군을 설치하고, 북한성에 남평양(南平壤)이라는 별도(別都)를 두었다. 

 

481년에 고구려는 신라를 공격하여 7성을 점령하였고 미질부(彌秩夫 : 경북 흥해)까지 진출하여 신라를 위협하였다. 이 당시에는 백제가 신라를 도와 고구려의 위협을 방어하였다. 493년에 백제 동성왕이 신라 이벌찬 비지의 딸과 혼인하면서 433년에 시작된 두 나라의 동맹관계는 더욱 그 기초를 공고히 하였으며 551년에는 양국 연합군을 구성하여 고구려를 공격, 한강유역을 빼앗았다. 

 

 

2. 나제동맹의 균열 

 

신라 진흥왕 9년(548년) 봄 2월, 고구려가 예인(穢人)과 함께 백제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자 백제가 구원을 청하였다. 임금은 장군 주령(朱玲)을 보내었다. 주령은 굳센 병사 3천 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여,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11년(서기 550) 봄 정월,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빼앗았다. 

 

 

진흥왕 11년(550년) 3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함락시켰다. 임금은 두 나라의 병사가 피로해진 틈을 타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병사를 내어 공격하게 했다. 두 성을 빼앗아 증축하고, 병사 1천 명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웅진시대 초기 백제의 정세는 귀족들의 반란까지 겹쳐 불안한 상태였다. 그러나 동성왕(東城王, 479∼501)과 무령왕(武寧王, 501∼523)대를 거치면서 점차 안정되어갔고, 성왕(聖王, 523∼554)대에 이르러서는 국가제도의 정비와 왕권강화가 이루어지면서 사비(泗沘)로의 천도(遷都)가 단행되었다.

 

사비천도를 전후해 성왕은 내외의 제반 통치제도와 불교교단을 정비하는 등 체제정비를 도모함으로써 웅진시대의 혼란을 극복하고 중흥을 이룩하게 되었다. 사비천도를 통해 중흥을 이루자 성왕은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의 회복을 꾀하였다.

 

 

551년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북진군은 백제군을 주축으로 하여 동맹관계에 있던 신라군과 백제의 영향권에 있던 가야군으로 구성된 연합군이었다. 이 시기의 고구려는 안장왕(安藏王, 519∼531)의 피살, 양원왕(陽原王, 545∼559)대 외척 사이의 내분으로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틈타 북진군은 백제군이 먼저 평양(平壤)을 공격, 고구려군을 격파함으로써 승세를 잡았다. 고구려에게 빼앗겼던 한강 하류의 6군을 회복했고, 신라는 한강 상류의 죽령 이북 고현(高峴) 이남의 10군을 점령했다. 

 

 

553년 신라 진흥왕(眞興王)은 백제의 한강 하류지역을 점령하고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이로써 나제동맹은 깨지고 백제와 신라는 적대적인 관계로 돌아섰다. 553년, 한강 상류를 차지했던 신라의 진흥왕이 역으로 하류로 내려와 백제 측이 점령했던 한강 유역을 단독으로 모두 차지하게 된다. 이에 관해 진흥왕이 백제의 뒤통수를 치고 기습적으로 무력점령했다는 설이 정설이지만, 현재는 일본서기 기록에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백제가 방어 및 관리 능력의 부재로 한강 유역에서 철수했고, 신라가 이 틈을 타서 무력충돌 없이 접수했다는 설도 있다. 

 

고구려 서부 국경선에서 북제(北齊)가 외교적, 군사적 압력을 가해오고, 이어 신흥세력인 돌궐(突厥)이 유연을 격파하고 동쪽으로 밀려오면서 고구려에 적극적인 공세를 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고구려는 미처 남쪽을 돌볼 여력이 없어 신라와 밀약을 맺고 한강 유역에 대한 신라의 지배권을 인정하였다. 

 

진흥왕 때문에 백제의 염원인 한강 유역 회복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성왕은 신라가 한강을 차지한 지 3개월 후 자신의 딸을 신라 진흥왕에게 시집보내며 나제동맹을 다시 굳건히 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는 성왕이 신라를 크게 치기 전에 신라를 방심하게 만들기 위해 딸 하나를 희생하는 수를 쓴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신라 왕실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염탐의 성격도 있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의하면 553년 정월에 백제 성왕은 상부(上部) 덕솔(德率) 과야차주(科野次酒)와 간솔(杆率) 예색돈(禮塞敦) 등을 일본에 보내 군병을 요청하고 일본은 6월에 전쟁물자를 백제에 보내주었고 554년 초에도 일본이 구원군, 말, 배를 백제에 보내주고 백제는 역박사, 의박사, 음악가, 승려 등 선진문물을 일본에 답례로 보내주는 등 신라와의 결혼동맹은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서일 뿐 은밀히 전쟁 준비를 계속하고 있었다.  

 

3. 관산성 전투의 발발과 승패의 결정 

 

7살에 왕위에 등극한 신라 진흥왕은 551년 마침내 성년이 됨으로써 왕태후의 섭정을 벗어나 친정을 시작하였다. 18세의 청년 군주 진흥왕에게 백전노장이자 그간 권력의 핵심에 있던 이사부는 다루기 벅찼을 것이다.

 

젊은 혈기의 진흥왕은 노련한 이사부를 권력에서 배제하였다. 552년 이후 사서에서 이사부의 이름이 사라진 것은 이런 연유가 있다. 이사부는 약 10년 후 진흥왕의 권력이 공고해진 후 다시 중용되었다.  

 

진흥왕은 군부를 재편하면서 노장 이사부를 배제하고 33세인 김무력 등 젊고 패기 넘치는  신진 장수들을 기용하였다. 김무력은 이사부의 부장이었지만, 내면적으로 서먹한 관계일 수밖에 없었다.

 

김무력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의 아들로 왕자였다. 금관가야를 멸망시킨 인물이 바로 이사부였다. 552년 이후 김무력은 신라군의 주력을 자주 지휘하게 된다. 553년 진흥왕의 명을 받아 한강 유역을 접수하였다. 신주를 설치한 진흥왕은 김무력 장군을 군주로 임명하였다. 

 

이러한 신라 군 수뇌부의 교체는 백제 성왕이 볼 때는 무리한 인사이동으로 보였을 것이다. 상대하기 거북하고 산전수전 다 겪은 이사부가 일선에서 물러난 것은 성왕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이제 갓 성년이 된 진흥왕, 용맹하지만 아직 전쟁경험이 부족한 젊은 장수 김무력이 신라를 이끌게 되었다.  

 

진흥왕은 성왕의 아들인 태자 부여창(성왕 사후 위덕왕)보다도 나이가 어렸다. 이사부를 대신하여 신라군을 최전방에서 이끌게 된 인물은 신라에게 반감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가야왕자 출신의 김무력 장군이었다. 그러나 진흥왕의 인물을 알아보는 안목은 탁월하였다. 김무력 장군을 파격적으로 발탁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김무력 장군이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상왕을 사로잡아 참수하고 승리한 것은 신라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획기적인 업적이었다. 반면 패전한 백제는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결혼 동맹 직후인 554년 1월, 성왕은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럽게 신라를 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켰다. 이 신라 정벌군에는 규모 미상의 대가야군과 1천 명의 일본 지원군도 합세함으로써 국제전이 벌어졌다. 

 

신라 진흥왕 16년(서기 555) 봄 정월, 비사벌(比斯伐)에 완산주(完山州)를 설치하였다. 겨울 10월, 임금이 북한산(北漢山)에 순행하여 영토의 국경을 정하였다. 11월, 임금이 북한산에서 돌아왔다. 임금이 거쳐 지나온 주군(州郡)의 일 년간 세금을 면제해 주고, 그 지방의 죄수 가운데 두 가지 사형 죄를 제외하고는 모두 풀어주었다. 

 

진흥왕 22년(561)에 세워진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 진흥왕 29년(568)경에 건립된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와 「마운령신라진흥왕순수비」, 「단양신라적성비」에서 김무력 장군의 이름과 관직이 나온다. 김무력 장군은 진흥왕과 함께 국토를 확장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진흥왕을 호위하여 국경을 순시하며 금석문에 중요한 역사적 기록을 남겼다. 

 

필자는 김무력 장군의 관산성 전투 승리 요인을 알아보기 위하여 옥천군, 보은군, 대전시 등에 있는 산성을 답사하였다. 신라의 성은 옥천군의 삼성산성(관산성), 삼거리 토성, 삼양리 토성, 서산성, 보은군의 삼년산성은 마을과 가까이 있어 접근성이 양호하였다. 백제의 산성인 환산성(고리성), 백골성은 군인들이 올라가기 힘든 험한 산에 위치하고 있었다. 백성들과 가까이 있는 신라군은 군량미 조달, 구원군이 달려오기 쉬운 곳에 있어 전쟁에 유리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왕, 부여창의 안이한 판단착오, 김무력 장군의 탁월한 리더십이다. 유리한 지형지물을 활용하는 능력의 차이에서 전쟁의 승패는 결정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관산성 전투 초반에는 백제군이 승세였으나 김무력 장군이 백제군 배후를 기습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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