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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박사 화요 칼럼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은 김무력 장군 예우 문제 

기사입력 2020.08.18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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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사로잡은 김무력 장군 

 

김무력 장군은 금관가야(金官伽倻) 구형왕(仇衡王)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532년(법흥왕 19)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자 553년(진흥왕 14) 아찬(阿)으로 신주(新州, 현재의 廣州)의 군주(軍主)가 되었다.  

 

 

『삼국사기』 진흥왕 14년(서기 553) 기록에 의하면 가을 7월,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武力)을 군주로 삼았다. 15년(서기 554) 가을 7월, 명활성(明活城)을 보수하여 쌓았다. 

 

 

『삼국사기』 진흥왕 15년, 백제 왕 명농(明穠, 성왕)이 가량(加良)과 함께 관산성(管山城)에 쳐들어왔다. 군주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金武力)이 주의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어우러져 싸웠다.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도도(高干都刀)가 빠르게 공격하여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싸워서 크게 이겼다. 좌평(佐平) 네 명과 병사 2만 9천 6백 명의 목을 베었으며, 돌아간 말이 한 마리도 없었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조의 기록은 할아버지인 무력(武力)은 신주도(新州道) 행군총관이었는데, 일찍이 병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백제왕과 그 장수 4명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의 목을 벤 일이 있었다고 나와 있다. 필자는 관산성인 옥천의 삼년산성, 성왕 사절지를 답사한 바 있다. 

 

 

김무력 장군은 지금의 충북 옥천의 관산성이 함락되어 위기에 처하자 진흥왕의 명령에 따라 급히 신주에서 옥천으로 전속력으로 행군하여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였다.

 

 

전쟁은 단순히 신라와 백제의 전쟁이 아니라 국제전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백제군이 대가야, 왜의 원군을 합친 연합군으로 기세 좋게 신라를 공격하는 대규모 전쟁이었다.

 

 

전쟁 초반은 신라군의 참패였다. 원군인 김무력 장군의 지원이 없었다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었다. 

 

 

김무력 장군은 전략 전술에 뛰어난 장군으로 자신의 주력부대를 끌고 오면서 주변의 병력도 합류시켰다. 삼년산성의 병력인 비장 고간 도도가 바로 성왕을 참수한 주인공이다.

 

관산성은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가 지키다가 백제 왕자인 부여창에 의해 함락되어 후퇴한 상황이었다. 김무력 장군은 백제군이 포진한 배후인 금강 방면의 구릉지로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김무력 장군이 성왕을 죽음으로 몬 것은 정보의 힘이었다. 성왕이 전쟁터에 친히 온다는 소식을 접한 신라군은 세작(細作), 즉 간첩을 보내 성왕이 지나갈 길을 탐지하였다. 주요 길목에  군사를 매복시켰으며, 책임자인 도도로 하여금 복병을 이끌게 했다. 

 

 

성왕의 아들인 부여창은 전투의 후유증과 과로로 인하여 몸져눕게 되었다. 아버지인 성왕은 아들의 건강을 염려하는 한편 격려를 하기 위하여 아들을 만나러 왔다.

 

성왕의 호위병, 신하는 보병과 기병을 포함하여 겨우 50명이었다. 단출한 소부대를 이끌고 전선 시찰에 나선 것이 결정적 잘못이었다.

 

성왕은 별다른 의심없이 달려왔으나 신라군 복병은 때를 기다리고 있다가 기습공격을 하여 성왕의 호위병을 제압하고 성왕을 생포하였다. 

 

장기간의 전투에 지친 아들을 위로하고 향후 대처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오다가 매복에 걸려 포로가 된 것이다. 김무력 장군이 사전에 성왕의 이동 상황을 파악한 것은 철저한 사전 준비 덕분이었다.

 

김무력 장군의 조국이었던 김해의 금관가야는 가야 연맹체의 일원이었기에 대가야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과거에 다양한 인맥을 맺어두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전쟁에서 적의 첩보를 파악하는 것은 최고 사령관의 우선적인 관심사이며, 그 첩보를 분석하고 활용하는 것은 장군의 능력과 직결된다. 최전방에서 백제 성왕을 생포했다는 부하의 보고를 받은 김무력 장군은 참수하여 머리는 본진으로 보내고, 몸은 백제군으로 보내라고 명하였다.

 

이 또한 현명한 판단으로 산채로 호송하다가 정보가 백제군으로 새어나가면 백제군이 전력을 다하여 구출하러 올 것이 예상되므로 상황에 맞는 판단을 한 것이다. 

 

백제는 우세한 병력으로 전쟁에 패배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주된 이유는 백제귀족들이 병력지원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공주에서 부여로 수도를 천도한 지 얼마 되지 않은상황에서 성왕은 지역의 토착 귀족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성왕은 대안으로 왜, 대가야와 연합하여 대처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왜, 대가야에서 후속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반면 신라는 신주의 김무력 장군 휘하의 막강한 지원 병력을 신속하게 동원하였다.

 

후속 지원병력의 유무로 백제는 신라에게 패배하였다. 현재의 우리나라도 미국의 동맹에만 의존하면 안 되고 자주국방에 힘써야만 할 것이다. 

 

2. 김무력 장군의 벼슬과 신라 왕실의 신임 

 

550년경에 세워진 `단양적성비`는 영토를 넓힌 척경비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적성비에 나오는 인물 중 사서에 뚜렷하게 나오는 인물이 이사부, 비차부(比次夫), 무력(武力)이다.

 

적성비에는 `무력지 아간지(武力智阿干支)`라 기록되어 있다. 아간지란 신라의 17관등 중 6번째인 아찬(阿粲)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벼슬이다.

 

단양신라적성비 축조연대는 진흥왕 6~11년(545~550)으로 보고 있다. 

 

아찬은 신라시대의 관등. 17등 관계(官階) 중의 제6등 관계로서, 일명 아척간(阿尺干), 아찬(阿粲)이라고도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유리이사금 때 제정되었다고 하였으나, 520년(법흥왕 7)의 율령 공포 때에 제정된 것으로 보인다. 아찬은 진골 이외에 육두품도 받을 수 있었으나, 동시에 육두품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관등이었다. 그런데 신라의 관직제도에 있어서는 대아찬(大阿飡) 이상만이 중앙의 제1급 행정관부의 장관이 될 수 있었으며, 아찬은 차관직에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등이었다. 

 

관산성전투에서 보여준 김무력 장군의 활약은 기록을 보면 그에 걸맞게 인정받은 것을 알 수 있다. 561년에 세워진 `창녕진흥왕척경비`에는 `무력지 잡간(武力智?干)`으로 적어놓고 있는데, 잡간은 17관등 중 세 번째 등위에 해당한다.

 

대가야 마지막 왕으로 보이는 도설지(道設智)의 경우 그 등위가 `단양신라적성비`에서는 급간지로 9등위, `창녕진흥왕척경비`에서는 사척간으로 8등위임에 비하면 김무력의 승진이 매우 바른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김무력의 등위는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에서도 그대로 잡간으로 나와 등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북한산진흥왕순수비에는 `사돌부 출신인 무력지가 잡간`이라고 적었는데, 잡간은 신라 17관등 중에서 3등급에 해당하는 고위직이다.

 

김무력은 한강유역을 확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장군으로 550년 무렵에는 5등급인 아간지였으나 창녕비의 내용으로 보아 561년 이후에는 잡간으로 승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김무력 장군은 각종 전투에서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신라의 각간(角干)을 지냈다. 각간은 신라 경위(京位)의 17관등 가운데 최고 관등이다.

 

신라 17관등 중의 최고 관등인 “이벌찬(伊伐湌)”의 다른 이름으로, 일명 “이벌간(伊伐干)”․“우벌찬(于伐湌)”․“각찬(角湌)”․“서발한(舒發翰)”․“서불한(舒弗邯)”, “주다(酒多)”라고도 하였다. 

 

김무력 장군은 가야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장군으로 활약하여 신라 왕실의 신임을 받았다.

 

그의 아들 김서현은 신분 차별이 엄격한 신라사회에서 신분 격차를 뛰어넘어 갈문왕의 손녀 만명을 사랑하게 되었다. 만명공주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충북 진천으로 도피하여 삼국통일의 주인공인 김유신을 낳았다. 김유신은 화랑이 되어 삼국을 통일하였다. 

 

3. 백제 성왕이 전사한 사절지와 추모사업 

 

충청북도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에 백제국 26대 성왕 유적비(百濟國 二十六代 聖王 遺跡碑)가 있다.

 

2010년(경인년) 8월 16일 군서면 월전리 리장 정자현, 옥천영동축산업조합장 홍성권이 건립하였다. 비석 앞에는 추진위원 류제구가 기념식수한 주목 두 그루가 있었다. 유적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백제 성왕 戰死記 이곳은 서기 554년 7월 백제, 신라의 국운을 건 관산성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성왕(명농왕)은 신라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 장군이 이끄는 신라군과 전투중인 아들 여창(餘昌, 위덕왕)을 격려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러나 어찌하랴! 성왕은 매복중인 신라군에 의해 이곳 구진벼루에서 사로잡혀 참수당하고 말았다. 이로써 평생 대업인 백제 중흥은 물거품이 되었다.

 

이곳은 성왕의 원혼이 잠든 유서깊은 역사 현장이다(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 2008년 12월 15일 학술대회 고증). 문헌자료(삼국사기 백제편, 일서기 열전편), 향토사가 유제구, 『일본서기』에는 신라군이 백제 성왕이 움직인다는 첩보를 듣고 곳곳에 매복했다고 나와 있다. ‘신라는 명왕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백제 성왕을 사로잡은 이는 천한 노비였다. 백제 성왕을 사로 잡은 ‘고도’는 두 번 절하면서 말했다. 

 

​“천한 노비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를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제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 명왕(성왕)이 “왕의 머리를 노비의 손에 줄 수 없다”하니, 고도가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비의 손에 죽습니다.” 

 

그러자 성왕은 모든 것을 체념하고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라고 하면서 호상에 걸터앉아 차고 있던 칼을 내주었다. 그렇게 백제 성왕은 구진벼루에서 참수당했다. 

 

4. 김무력 장군 추모사업으로 동상 건립 

 

관산성 전투에서 패배한 성왕은 충북 옥천, 부여 등지에서 추모사업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성왕이 전사한 사절지인 충북 옥천군 구진벼루에는 성왕유적기념비도 있고, 바로 옆의 다리는 성왕교라 부르고 있다.

 

또한 옥천군에는 도로명 주소에 성왕로가 있으며 부여에 동상도 있다. 

 

양산의 통도사 뒤에 있는 김무력 장군의 묘소에 양산숲길보전회 회원들과 전에 답사하였으며, 필자는 어제인 8월 17일에도 다녀왔다.

 

김무력 장군이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을 사로잡아 참수하고 전쟁에 이겨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는 기반을 닦았다. 그의 아들 김서현 장군, 손자인 김유신 장군이 태종무열왕, 문무왕과 협력하여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다. 

 

양산시에서 김무력 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아무런 조치도 없었다. 앞으로 김무력 장군의 동상도 건립하고, 도로명 주소에도 ‘김무력장군로’를 만들어야 하겠다.

 

김무력 장군 추모사업도 다양하게 추진하고, 묘소에는 안내판도 건립하고 적극적으로 시민들에게 홍보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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