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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년에 백성의 목숨을 구한 동래부사 민영훈 공 거사비/심상도 박사 화요 칼럼

기사입력 2020.05.05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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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학 박사 심 상 도

 

1. 동래부사 민영훈 거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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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부사를 지낸 민영훈은 1775년(영조 51년)에 출생하여 36세 때인 1810년(순조 10) 식년시에 진사 2등 7위로 합격하였다. 1814년(순조 14) 인정전(仁政殿)에서 유생을 대상으로 치른 시험에 제술(製述) 수석을 차지하여 초시를 면제받고 전시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같은 해 식년시에 응시하여 갑과 2위로 40세에 문과 급제하였다. 자(字)는 성여(聲汝), 호(號)는 단고(檀皐),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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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부는 민사윤(閔師尹)이고, 조부는 민이세(閔頤世)이며, 부친은 진사(進士) 민종길(閔鍾吉)이다. 외조부는 최일제(崔一濟)이고, 처부는 이효상(李孝相)이다. 4형제 중 장남으로, 동생은 민병훈(閔秉勳)‧민정훈(閔定勳)‧민응훈(閔應勳)이다. 1835년(헌종 1년) 9월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1년 6개월만인 1837년(헌종 3년) 3월 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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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슬은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 양주목사(楊州牧使) 등을 역임하였으며, 1828년(순조 28년)에 홍문관(弘文館)의 관원 후보자를 선발하는 도당록(都堂錄)을 시행할 때, 부제학(副提學) 김난순(金闌淳), 응교(應敎) 이경재(李景在) 등이 참여한 자리에서 4점(四點)을 얻었다. 1853년(철종 4년) 향년 79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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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부사 민영훈 공 거사비(東萊府使 閔永勳 公 去思碑)는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곡2동 255번지 공수물공원에 있으며, 금정구 향토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었다. 이 비석은 조선 헌종 4년(1838년)에 동래부사 민영훈이 동래, 양산 지방의 극심한 기근 때 진휼(賑恤)하여 많은 백성의 목숨을 구한 은공을 칭송하고자 부산시 금정구 노포동과 양산시 사송마을 경계인 지경고개에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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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훈 공은 1835년에 동래부사로 부임해 1년 6개월간 재임 중 만민구명(萬民救命)의 선정을 베풀어 그가 떠난 뒤 마을 주민들이 그 은공을 기려 거사비(去思碑)와 함께 사단(祠壇)을 세워 해마다 제사를 지내왔다.

 

양산 사송마을의 바위에 만인구명(萬人救命)의 각자를 새겼다. 1970년대 도로공사로 만인구명 바위는 파손되고, 방치되어 있던 거사비 비석을 노포동 작장마을 주민이 모셔와 보존해 왔다고 한다. 거사비를 1993년 7월에 공수물공원에 옮겨와 새로운 커다란 비석을 세우고, 그 옆에 원래의 거사비를 모셨다.

 

거사비는 높이 73cm, 너비 43cm 크기로 비석의 좌측에는 “내진내견(迺賑迺蠲) - 심한 흉년으로 부민이 굶어죽어 가는데 곡식을 풀어 진휼하고/ 비석의 우측에는 설둔거막(設屯祛瘼) - 세금을 탕감하여 병폐를 제거하고,/ 활만인명(活萬人命)- 만인의 생명을 살린/ 백세가영(百世歌詠) - 그 은혜를 칭송한다.“ 라고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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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한 흉한 흉년으로 백성이 굶어 죽어가는데 동래부사 민영훈 공이 곡식을 풀어 백성을 진휼하고, 세금을 탕감하며, 병폐를 제거하여 만인의 생명을 살린 은혜를 칭송하였다. 뒷면의 비문은 두구, 작장, 남산의 삼동민을 구제한 사실을 다소 구체적으로 기록하였다. 삼동민이 힘을 합하여 공로상(公路上)에 이 비석을 세운 사연을 말하였다. 8.15해방 후 도로확장 공사 후 파손되어 버려진 것을 뜻있는 사람들(박용진 씨)이 노포동사(老圃洞舍) 앞에 보관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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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그만 비석으로 인하여 동래부 관내에 거사단(去思壇)이 있었던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거사단비는 본래 남문 밖의 휴산(休山) 또는 농주산(弄珠山)에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동래 학소대(鶴巢臺) 앞의 유치원 경내에 옮겨 세워져 있다. 민부사의 비에는 생사(生祠)란 말을 쓰고 있는데. 여기에 배향된 분으로는 이항(李沆) 부사, 한배하(韓配夏) 부사, 강필리(姜弼履) 부사, 윤필병(尹弼秉) 부사, 민영훈(閔永勳) 부사 등 오공(五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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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양산과 민영훈 부사의 인연

 

1835년 민영훈은 동래부사로 재임할 때 대흉년이 들어 백성들은 살기가 힘들었다. 지경고개 넘어 양산 동면 사송․여락마을 주민들은 고을이 달라 식량 보급이 없게 되자 야밤을 틈타 동래로 넘어와서 지어 놓은 밥을 통째로 훔쳐갔다. 

 

그러자 당시 좌수 백달경이 동래부사에게 간곡한 소지를 올려 벼 수십 석을 얻어 사송․여락마을 주민들에게 나누어줘 아사를 면하게 했다. 그 뒤 사송․여락마을 주민들은 민부사의 은혜를 잊지 못해 사송마을 앞 큰 바위에 만인의 목숨을 구했다는 만인구명(萬人救命) 각자를 새겼다. 이 바위는 도로확장 공사시 파괴되었다.

 

양산과 부산의 경계인 지경고개 마루에는 3기의 비석이 있어 조선시대 지역의 역사를 알 수 있는 현장이었다. 비석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비석들이 손상되었다. 도로 확장 공사할 때 동래부사 민영훈거사비는 공수물소공원으로 옮겼다. 동래부사 강로선정비는 사라졌다. 지금 가선대부 양유하 이혜불망비만 지경고개에 남아 있다. 

 

이 불망비는 양유하 공이 1731년부터 3년간 대흉년 때 동래, 양산 주민을 진휼한 공을 기려 주민들이 양산과 동래 경계지점의 언덕에 세웠던 송덕비다.

민영훈 동래부사가 대흉년에 식량을 베풀어 굶주린 백성을 구한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이임할 때 부사가 가는 길인 동래의 대낫들이 길에 백성들이 적삼을 벗어 길에 깔아 민부사는 그들의 적삼을 밟고 걸어갔다고 한다. 최고의 예우로 이른바 레드 카펫이 갈린 것이다. 당시 주민들이 민부사의 진휼 정책에 얼마나 감복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3. 동래부사의 역할

 

동래부 동헌 앞에는 ‘동래독진아문(東萊獨鎭大衙門)’이라고 쓰여진 문이 있다. 동래부는 임진왜란 첫 격전지였다. 전쟁 후 동래는 왜구의 침략을 대비하는 방어 진지로 구축되었다. 원래 동래부의 군사권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경상좌병) 관하의 경주진관에 속하였다. 동래가 요충지임을 고려하여 1655년 경주진관에서 분리되어 동래에 독진(獨鎭)을 형성하고, 그 관련 유물이 동래독진아문이다.

 

왜적이 침범하면 진관의 통제를 받기 위해 병력을 이동하지 않고, 독자적인 병력 운용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동래부 뒤쪽에는 금정산성을 쌓아 이중의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동남 해안에도 많은 수군 진지가 구축되었다. 경상좌수영, 부산진, 다대진 등 10개의 수군 주둔군이 있었다.

 

양쪽 기둥에는 진변병마절제(鎭邊兵馬節制營), 교린연향선위사 (交隣宴餉宣慰司)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 현판은 조선후기 동래부가 ‘방어와 교류의 도시’라는 위상과 동래부사의 지위를 알려준다. 진변병마절제은 동래가 변방을 지키는 군이란 뜻이다. 교린연향선위사는 교린 국가에서 외교사절이 왔을 때 이들을 맞이하는 관청이라는 뜻이다. 

 

전쟁 이후에는 일본 사절이 서울로 가지 못하고 부산 왜관에서 머물며 동래부사와 부산첨사의 접대를 받고, 외교 업무를 받았으므로 동래부의 외교적 위상이 높았다.

 

조선의 수령은 고을의 규모에 따라 그 직책이 결정되었다. 고을의 규모는 주, 부, 군, 현으로 나뉘고, 수령도 종2품에서 종6품에 이르는 부윤, 도호부사, 목사, 도호부사, 군수, 현령, 현감으로 구분되었다. 수령은 부임하면 반드시 해야 하는 7가지 임무인 수령칠사가 있었다. 농업을 일으키는 것, 학교를 세워 교육을 장려하는 것, 백성의 억울함을 해소시켜 소송․재판을 줄이는 것, 아전의 비리를 척결하여 간사하고 교활한 것들을 없애는 것, 군역을 바로 세우는 것, 인구를 늘이는 것, 부역을 균등히 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공직자 의무와 유사하다.

 

수령칠사는 수령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지만, 관찰사(감사)가 수령을 평가하는 기준이기도 하였다. 수령칠사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면 평가를 낮게 받아서 교체되거나 파직당하였다. 조선 후기 동래부의 중요성이 높아가면서 종3품의 아문이 되었으며, 1601년(선조 34) 일본과의 강화교섭을 고려하여 부사는 정3품 당상관 문관이 임명되었다. 

 

동래부사는 대상자를 이조(吏曹)에서 추천하여 임금이 임명을 최종 결정하였다. 동래부의 위상이 높아지자 이조에서는 비변사에서 동래부사를 추천하도록 하였다. 조선후기에 들어 비변사는 군사 업무뿐 아니라 의정부의 업무까지도 수행하는 중요 정책기구의 역할을 했다.

 

4. 코로나 19로 초래된 비상시국의 공직자 역할

 

민영훈 부사가 근무할 당시의 상황을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살펴보면 극심한 흉년, 전염병의 확산으로 기근이 심함을 알 수 있다. 왕실에서는 백성들을 진휼하기 위하여 각종 세금을 탕감해주고, 왕실에 공납하는 물품도 대폭 줄이는 각종 대책을 시행하였다.

 

헌종 3년 3월 10일 우의정(右議政) 박종훈(朴宗薰)이 임금에게 "영남좌도(嶺南左道)의 백성들의 형세가 진실로 제도(諸道)에서 가장 황급합니다. 이는 대개 흉년이 들어서 먹을 것이 없고 목화(木花)도 흉년이 들어서 입을 것이 없는데, 진구(賑救)하는 일을 바야흐로 거행하고 있으나 창고가 이미 텅 빈 데다가, 여역(癘疫 : 전염병)이 더욱 치성(熾盛)하여 죽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고 아뢰었다.

 

헌종 3년 7월 1일 경상 감사 윤성대가 진휼을 마치고 장계(狀啓)하였다. "공사(公私) 간에 진구(賑救)한 위급한 기민(飢民)이 1백 11만 4천 9백 71구(口)이고, 각종 곡식이 13만 9천 6백 18석(石)이었습니다." 하였다. 요즘의 전국민 긴급재난지원금 지급과 비슷한 진휼책이다.

 

민영훈 동래부사가 재임할 무렵의 동래와 양산, 경상도, 조선 백성들의 삶은 연속되는 자연재해와 전염병으로 인하여 곤궁하였다. 민부사가 흉년을 대비하여 전라도에서 입도선매한 식량 천 포대를 동래, 양산 백성들에게 베풀어 구휼하였다. 

 

코로나 19 전염병으로 한국을 포함한 전세계 국가들이 위기에 빠진 현재 정치인들이 세금 감면, 세금 납부 연기, 재난 지원금 지원, 취업 대책 등 적극적인 정책을 시행하여 국민들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하겠다.


양산시 동면 사송신도시 개발이 한창인데, 조선시대 영남대로의 일부인 황산도 길을 연결하여 안내 표지판을 세우고 1077번 도로변에 인도를 만들어 걸어갈 수 있도록 하면 역사유적 답사와 관광객 유치에 도움이 될 것이다. 

 

사송신도시에 일정한 공원을 조성하여 부산과 같이 동래부사 민영훈 공 만인구명바위와 거사비, 양유하 공 이혜불망비, 동래부사 강로선정비 등을 복원하여 국가적 재난과 위기를 극복한 역사적 사례를 시민들에게 알려 애국심, 애향심을 북돋워야 할 것이다. 정치인, 공직자들은 위기 극복에 재산 기부, 봉사활동을 통해 모범을 보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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