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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립박물관에서는 "아름다운청년 윤현진"에 대한 현악콘서트가 열린다.

기사입력 2019.03.27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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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30일 오후 2시부터 박물관 대강당에서 '그날의 봄날'을 주제로 한 '4계 4색 콘서트' 그 첫번 째 공연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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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서트는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4계절에 맞는 음악과 특별전시를 연계한 역사문화를 공유하기 위해 열리는 올해 첫 양산시립박물관의 감성콘서트로 주목받고 있다.

 

이번에 진행되는 '봄' 콘서트에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양산시립합창단의 창작뮤지컬 '아름다운 청년 윤현진'을 선보인다.

 

[윤현진 독립운동가 소개, 출처 : 국가보훈처 공식블로그]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신 윤현진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재무차장으로 취임하여,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분입니다.


▲ 윤현진 선생


윤현진 선생은 1892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났습니다. 1909년 선생은 중국 상하이와 베이징을 탐방한 뒤, 신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일본 유학을 떠났습니다.


선생은 메이지 대학에서 수학하며 재일 한인 유학생들이 모여 만든 단체인 조선유학생학우회와 신아동맹당에서 활동하며 반일운동에 앞장섰습니다.


▲ 조선유학생학우회에서 발행한 『학지광』 창간호 속표지 (출처: 독립기념관)


1916년 귀국한 윤현진 선생은 약 3년 동안 대동청년단, 백산무역주식회사, 의춘상행(宜春商行), 기미육영회 등과 관계를 맺고, 우리 민족이 일제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게끔 비밀결사운동, 경제적 자립운동, 교육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 백산무역주식회사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1919년 3월 21일. 3.1운동이 일어난 직후 윤현진 선생은 상하이로 망명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위원과 경상도위원을 맡았고, 국내 항일세력과 연락을 위한 의용단을 조직하고 독립신문을 만드는 등 임시정부의 중심인물로 부상하였습니다. 


▲ 1920년 1월 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신년축하회 (출처: 독립기념관)


또한, 윤현진 선생은 1921년 2월 임시정부의 중책인 재무차장이 되어 살림을 책임지게 됩니다.

독립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선생은 안타깝게도 같은 해 9월, 과로로 인해 29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였습니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기념사진(왼쪽 뒷줄 2번째) (출처: 독립기념관)


아마도 위의 사진은 보신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이는 1919년 10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임시정부의 행정부) 성립을 기념하기 위해 촬영된 것인데요, 4월의 독립운동가 윤현진 선생은 안창호 선생의 뒤편, 왼쪽 뒷줄 2번째에 있습니다. 


위 사진의 윤현진 선생이 유난히 다른 분들에 비해 앳된 모습인 걸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진을 찍을 당시, 선생은 27세의 젊은 나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글을 보는 분들에게 어리거나 많은 나이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분명한 점은, 젊은 나이에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는 것입니다.


▲ 상해임시정부 국장으로 치러진 윤현진 선생의 장례식 (출처: 독립기념관)


선생의 장례는 임시정부의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160여명의 내빈들이 모여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선생을 추모했습니다.


정부는 1962년 윤현진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선생의 큰형 윤현태가 한글 자필로 비석을 세운 윤현진 선생의 묘 (출처: 독립기념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무차장으로서 젊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투신한 4월의 독립운동가, 윤현진 선생을 함께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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