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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문화박사의 "양산숲길보전회 천성산 원효대사 기도처 호계마을 석굴암 답사 제1부"storytelling

기사입력 2019.07.29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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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8일 양산숲길보전회 정기답사는 원효대사 기도처인 호계리 천성산 자락의 석굴암에 있는 반고굴이었다.
 

양산종합운동장에서 8시 30분 집결, 석굴암 도착은 9시였다. 가는 도중 연구실 냉장고에 넣어둔 울금노랑막걸리를 가져갔다. 모세스 이대섭 대표가 협찬한 울금노랑막걸리다.
 
 
 
석굴암 도로명 주소를 밴드에 소개했더니 다들 잘 찾아왔다. 신국환 회원님이 생수 3박스를 협찬하였으며, 이기천 회원님이 초코파이 1박스를 협찬하였다.
 
 
답사에 29명이 참가하였는데 무더위를 감안하여 많이 걷지 않는 코스로 설정하였다. 숲길을 걸어가는 도중에 시원한 계곡도 포함되어 있어 땀을 식힐 수 있었다.
 
 
이기천 회원이 협찬한 초코파이
 
 
회원들에게 점심식사비로 1만 원의 회비를 걷었다. 회원들이 29명이 참석하였다. 답사하기에 아주 알맞은 날씨였다. 엊저녁에 천둥 번개와 함께 폭우가 쏟아졌는데, 오늘 날씨는 좋았다.
 
 
● 석굴암 주지 무정 스님 30년 중창불사, 원효대사 기도처 발견

호계마을에 위치한 석굴암은 신라시대 원효대사의 수행처인 반고사지(磻高寺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석굴암에는 마애불과 굴법당인 반고굴(석굴암)이 있다. 석굴암 주지인 무정 스님이 중창불사를 30년 동안 하면서 원효대사 기도처인 굴법당과 사람이 거주했던 온돌 시설을 발견하였다.

오로지 무정 스님의 원력에 의하여 원효대사 기도처가 온전한 암자로서 번듯하게 가꾸어졌다. 올라가는 가파른 길을 깎고 확장하여 승용차가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하였다.

암자의 요사채, 법당 등이 들어서고, 주차장도 확장되었다. 석굴암에서 산막일반산업단지가 훤하게 내려다 보인다. 석굴암 주변에는 거대한 바위들이 많은데, 굴법당 자체도 거대한 바위로 만들어진 자연스런 기도처다. 바위가 많은 곳은 기도처로 안성맞춤이다. 좋은 기가 바위에서 발산되기 때문에 기도발이 잘 받게 된다.

● 원효대사 기도처 반고굴 굴법당 윤해원 스님 인증

대승불교원효종해원사 주지 윤해원 스님은 원효대사 성지 156산사 순례 지도법사 스님이다. 윤해원 스님은 원효대사 수행성지 '반고굴'의 정확한 위치가 양산 호계리 마애불 (석굴암)과 설악산 계조암이 혼동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윤해원 스님은 1990년 무정스님에 의해 발견된 마애불(석굴암)의 동굴법당은 위치와 역사로 볼때 정확한 원효대사 수행성지 반고굴로 여겨진다고 인정하였다.

경남 양산은 경주와 가까운 곳으로 원효대사와 깊은 인연이 있는 암자와 역사 유적지가 많은 곳이다. 천성산(예날에는 원적산)을 무대와 배경으로 한 원효대사의 신비한 이적(異蹟)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천성산 곳곳에 원효대사가 수행하던 암자와 사찰이 89개가 있었다고 한다. 원효대사는 중국에서 건너온 천 명의 제자를 수용하고 불법을 전하기 위하여 천성산에 89암자를 지었다고 한다.

현재 천성산에는 원효대사와 관련된 대표적인 사찰인 내원사를 필두로 홍룡사, 원효암, 미타암 등의 천년 고찰이 있다.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활동하던 시절 불교는 왕실에서 공인한 종교로 전성기를 맞았다.

원효대사가 당나라 태화사가 장마로 매몰될 위기에 처하자 큰 판자를 하늘에 날려 1천명의 대중을 구했다. 목숨을 구한 이들이 원효대사를 찾아왔다. 원효대사는 이들이 머물 곳을 찾아 나섰는데 용연마을 입구까지 산신령이 마중을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내원사 입구 주차장 심성교 건너자마자 왼편의 산신각의 위치에서 홀연히 사라져 이 곳에 산령각을 세웠다고 한다.
 
 
 
 
 
 
 
●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설총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러브 스토리는 고려시대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에 나올 정도로 유명하다. 
 
원효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면 하늘 받칠 기둥을 찍는다는 노래를 저자거리에서 부를 때 아무도 그 뜻을 몰랐으나 태종은 그 뜻을 알고 과부가 된 요석공주와 맺어주었다.

설총을 낳은 요석공주는 남편을 찾아와 양산 산막리에 천막을 치고 기다렸다. 일제시대 이광수가 쓴 소설에 나오는 경북 의성군 빙계계곡 풍혈과 빙혈에 비슷한 스토리가 전해지고 있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러브 스토리는 고려시대 고승인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의 제4권 의해 제5(三國遺事 卷第四 義解 第五) 원효불기(元曉不羈 : 원효대사는 얽매이지 않는다.)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법사가 어느 날 평시와 다른 이상한 행동을 하며 거리에서 이렇게 노래하였다. "그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 주려는가? 나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라!"

사람들은 그 노래의 뜻을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태종 무열왕이 이 노래를 듣고 말하였다."이 법사는 아마도 귀부인을 얻어 어진 아들을 낳으려는 것 같구나. 나라에 위대한 현인이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겠는가?"

이때 요석궁(瑤石宮)에 과부가 된 공주가 있었다. 그래서 궁의 관리에게 칙명을 내려 원효를 찾아서 데려오게 하였다. 관리가 칙명을 받들어 원효를 찾으려고 하였는데, 원효는 벌써 남산(南山)에서 내려와 문천교(蚊川橋)를 지나오고 있어서 곧 만나게 되었다.

원효는 일부러 물에 빠져서 옷을 적셨다. 관리는 원효를 요석궁으로 인도하여서 옷을 벗어 말리게 하자 그곳에 머물렀다. 
 
요석공주는 과연 임신을 해서 설총(薛聰)을 낳았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지혜롭고 영민하여 경서와 역사를 두루 통달하였으며 신라의 열 명의 현인 중 하나가 되었다.

설총은 우리말로 중국과 신라의 풍속과 물건 이름 등에도 통달하여 육경과 문학을 풀이했으니, 지금도 우리나라에서는 유교 경전으로 과거공부를 하는 사람은 이를 전수하여 끊어지지 않고 있다.

원효는 이미 계를 어겨 설총을 낳은 후에는 세속의 옷으로 바꿔 입고 스스로를 소성거사(小姓居士)라고 하였다. 우연히 광대들이 춤출 때 사용하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괴상하였다.

그래서 그 모양에 따라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華嚴經)』의 한 구절인 "일체 무애인(無碍人, 장애가 없는 자유로운 사람)은 한 번에 생사에서 벗어난다."라는 구절에서 따서 무애(無碍)라 이름 짓고,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일찍이 이 무애를 가지고 수많은 마을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시키고 읊조리며 다녔으니, 가난한 사람들과 산골에 사는 무지몽매한 자들까지도 모두 다 부처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모두들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되었으니, 원효의 교화는 위대하다 할 것이다.
 
 
● 양산의 산막리 지명 유래와 요석공주, 설총

신라시대의 원효대사는 요석공주와 의도적으로 부부의 연을 맺고 설총을 잉태한 요석공주 곁을 홀연히 떠나서 파계에 대한 속죄를 하며 더욱 수도 정진에 몰두하였다.

양산의 반고굴에서 치열한 수행을 하는 원효대사를 찾아서 요석공주는 시녀와 수행원을 거느리고 현재 산막공단이 있는 곳에서 임시 산막을 설치하였다. 
 
원효대사를 기다렸지만 끝내 스님은 나타나지 않았다. 유사한 설화가 경기도 동두천 소요산 자재암에도 전해지고 있다.

양산의 산막리에는 요석공주와 설총이 시녀와 시종을 거느리고 원효대사를 찾아와 천막을 치고 기다렸다는 연유로 동네 이름이 산막리로 불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산막리는 현재 천지개벽을 하여 공장이 들어선 산막일반산업단지로 바뀌었다.

산에 임시 거주지로 막을 쳤다는 것은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천막을 말한다. 요즘은 천막을 외래어로 텐트라고 한다. 
 
짧은 부부간의 사랑을 뒤로 하고 야속하게 떠난 님을 찾아온 요석공주의 슬프디 슬픈 러브 스토리가 양산의 산막리(산막동)에 전해지며 마을 이름이 되었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아들인 설총이 얽혀있는 산막리의 지명은 석굴암 반고굴이 원효대사의 기도처라는 것을 역사적으로 입증해주고 있다. 
 
양산숲길보전회에서 야생차나무 군락지가 있는 곳을 답사하여 그 중요성을 알린 바 있다.

이번에는 산막리와 원효대사 기도처인 반고굴을 답사함으로써 그 중요성을 양산시민들에게 널리 알리게 되었다. 
 
이번에 답사에 참가한 29명의 회원들은 대부분 이곳이 초행길이고 이렇게 멋진 곳인줄 처음 알았다고 하였다.
 
 
동굴법당에는 석간수도 흘러나온다.
 
 
굴법당 내부는 꽤 넓고, 전날 비가 많이 내렸지만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석굴암 주지 무정 스님이 동굴법당을 잘 관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부처님께 한 회원이 참배하고 있다. 필자도 불자는 아니지만 시주함에 만 원을 넣고 삼배를 올렸다. 
 
천주교, 기독교 등 다른 종교의 신자라 할지라도 이곳에 들러 원효대사의 자취를 구경하고 둘러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굳이 절은 하지 않아도 부처님께 합장으로 두 손을 모으면 된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초파일에 절에 가서 불교식 합장을 하지 않아 큰 비난을 받았다. 
 
대권을 꿈꾸거나 정치에 뜻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타종교를 존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대권 후보자들은 선거철만 되면 본인 종교가 무엇이든 반드시 통도사를 참배하고 주지 스님을 친견한다. 
 
불교 신자가 그만큼 많다는 의미다. 내 종교가 중요하면 다른 종교도 존중해야 한다. 이슬람교도들은 개종을 금지한다.

일본은 8만 이상의 다양한 신을 믿고 사는 다신교도지만 세계적 경제 강국이다. 일본인은 태어나서 살아가는 동안 신도를 믿고, 죽을 때는 불교에 귀의하여 화장을 한다. 
 
일본은 기독교와 카톨릭 비중이 아주 미미하다. 다른 나라의 문화를 반드시 인정하고 존중해야만 한다.

한국인들은 종교의 차이가 있어도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이술람교도들은 종파만 달라도 적대시 하고 무차별로 자살폭탄 공격을 한다. 역사적으로 종교 전쟁 때문에 죄없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서양에 성지순례를 가면 대부분 카톨릭 유적지가 많다. 자신이 천주교 신자가 아닌 사람도 종교 유적지를 찬찬히 살펴보고 즐거운 마음으로 관광을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타 종교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인 국보, 보물, 문화재 등 80% 이상이 불교문화재다. 타종교를 우상숭배라고 비하해서는 안 된다. 
 
이른바 광신도들은 타종교를 무시하는데 그치지 않고 불상, 벽화, 종 등 귀중한 문화유산을 훼손하는 경우도 간혹 있어 국민의 지탄을 받곤 한다.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96호 호계리 마애석불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천성산으로 가는 임도로 걸어갔다.
 
 
 
 
계곡에 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바위 틈으로 흘러내리는 계곡물
 
 
 
안내 표지판, 여기서 천성산 정상은 6.1km, 우리가 걸어온 석굴암은 1.1km
 
 
 
 
 
 
 
 
김미향 회원이 즐거워 하고 있다.
 
 
거대한 바위에 뿌리를 턱 하니 내린 신비한 노간주나무, 인간이 나무에도 본받을 점이 많다. 수분이 없는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우리도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굳건한 의지로 극복해나가야 한다.

OECD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2017년 한 해 동안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은 1만 2,463명에 달한다. 우리나라 자살률은 10만명당 24.3명인데, 이는 OECD 전체 평균 11.6명을 배 이상 웃도는 놀라운 수치다.

최재천 교수의 조선일보 칼럼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1874년 파리에서 출판된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 샤를 달레(Charles Dallet)의 '조선 교회사' 서문만 따로 번역한 '벽안에 비친 조선국의 모든 것'이라는 책이 있다.

무려 1000쪽에 달하는 '조선 교회사'는 서문만 192쪽이나 된다. 1668년 출판된 '하멜 표류기'의 부록 '조선국기'보다 조선의 지리, 역사, 제도, 풍습, 언어, 종교 등이 훨씬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그 책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고 한다. "조선 사람들은 대개 완고하고, 까다롭고, 성내기 쉽고, 복수를 좋아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 울화통이 터졌을 때는 이상하리만큼 쉽게 목을 매달거나 물에 빠져 죽는다. 
 
사소한 불쾌한 일이나, 한마디 멸시의 말이나, 아무 것도 아닌 일이 그들을 자살로 이끌어간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높은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고, 나쁜 역사적 유래와 전통이 있었다. 자! 이제부터 강한 바위에 뿌리내리고 사는 노간주나무를 닮아보자. 
 
쉽게 성 내고 자살하는 한국인 성향은 옛부터 근원이 있었다. 난관을 돌파하는 굳은 의지를 지니면 고진감래가 된다.

종교에서는 자살을 죄악시 하고 있다. 사회 문화적으로 봐도 자살하면 남겨진 가족에게는 자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게 된다. 자살을 미화하면 절대로 안 된다.
 
 
 
 
 
 
 
 
 
 
 
 
 
 
 
 

날씨가 더운 관계로 1.5km 정도 걷고 전환점에서 단체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번에는 시원한 계곡수가 흐른 곳에서 단체 사진
 
 
이곳에서 휴식하며 간식을 먹었다.
 
제2부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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