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상세페이지

심상도박사,화요칼럼=열박산 김유신 기도장에 대한 최남주 선생과 양주동 박사 논쟁

기사입력 2024.05.15 13:55

SNS 공유하기

fa tw ba ka ks url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열박산 김유신 장군 기도처 심상도의 답사

 

열박산 김유신 장군 기도장에 대해 양주동 박사와 최남주 선생이 조선일보를 통해 위치 논쟁을 벌인 것을 소개하기로 한다. 필자는 2023년 10월 24일 자 와이뉴스(YNEWS) 화요칼럼 ‘김유신 장군 기도처 열박산 동굴’에서 이 주제를 다룬 바 있다. 필자는 2023년 10월 17일에 열박산인 백운산, 분수령인 삼강봉을 답사하였다.

 

그 당시 필자는 삼백육십오일사라는 절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탑골을 통해 태화강 발원지 탑골샘을 거쳐 백운산을 등산하였다. 탑골샘까지는 이정표가 있었으나 백운산으로 올라가는 도중에는 안내 표지판이 없어 대충 짐작으로 정상으로 향했다. 산속을 헤매다가 간신히 등산로를 발견하고 백운산 정상(해발 893m)에 도착하였다.

 

김유신 장군 기도처 동굴도 안내 표지판이 없었지만 등산객들이 매달아 놓은 등산 리본을 통해 위치를 파악하고 산 아래로 약간 내려가니 동굴이 금방 나타났다. 김유신 장군 기도처를 답사한 후 분수령인 삼강봉(해발 845m)을 답사하며 사진을 찍고 주차장으로 원점 회귀하기 위해 능선따라 내려갔다. 삼백육십오일사로 내려가는 안내 표지판도 없어 계속 내려갔다. 임도를 따라 갔지만 절과는 다른 방향으로 점점 멀어졌다.

 

결국 포장도로까지 내려가서 사찰 방향으로 걸어가는 도중 날이 어두워졌다. 배낭에 후레시를 넣어왔기 때문에 밤길을 1시간 이상 걸어 삼백육십오일사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왼쪽 등산화가 약간 작아서 발이 아팠다. 집에 돌아와 엄지발가락을 발톱을 보니 약간 검게 변하였는데, 결국 며칠 후에 발톱이 빠졌다. 그 후로 현재까지 7개월이 지났는데, 엄지발가락 발톱이 많이 자라 회복되고 있다.

 

2. 최남주 선생 소개

 

평생을 명리(名利)와 이재(理財)를 멀리하고 문화재 발굴과 보존을 위해 헌신한 석당(石堂) 최남주(崔南柱) 선생은 민간문화재 보호단체의 효시인 경주 고적보존회 활동을 시작으로 현 국립경주박물관 창설에 참여하였고, 고고학자인 스웨덴의 구스타프 황태자와 서봉총 발굴에 동참했다(한국박물관학회, 『석당 최남주 선생 탄생 102주년 기념 박물관학보』, 2007년).

 

그가 발견한 주요 유물은 화랑도의 맹세를 새긴 임신서기석, 경주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경주 남산 철와곡 석불두(鐵瓦谷 石佛頭), 흥덕왕릉 비편 등이 있다. 또한, 사재(私財)를 들여 무열왕릉 비각을 건립하기도 했다.

 

최남주 선생은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 스웨덴 왕실로부터 동양인 최초로 바자훈장 기사장을 수훈(受勳)했다. 이후, 칼 구스타프 현 국왕의 초청으로 스웨덴 왕실을 방문하여 국위를 선양하였다. 경주시민들은 문화유산 보전에 대한 그의 공로를 기념하여 2001년 석당공원에 추송비(追頌碑)를 세웠다.

 

1) 석당(石堂) 최남주(崔南柱) 선생 약력 및 업적

 

- 1905년 4월 1일 경주시 성건동에서 출생

- 1923년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

- 1923년 해월 최시형의 장남 최동희(당숙)를 따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망명이 좌절된 후 황해도 평산군 소재 평상초등학교 교편

- 1924년 경주 건천초등학교 교편

- 1925년 경주박물관의 모체인 재단법인 경주고적보존회 촉탁

- 1926년 경주박물관 창설에 참여

- 1926년 스웨덴 구스타프 6세 아돌프 황태자와 함께 서봉총(瑞鳳塚) 금관 발굴에 참여

- 1926년-1939년 한국 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南山) 불적(佛蹟) 조사에 한국인 최초로 참여하여 수많은 불교 문화재를 발굴, 경주박물관에 전시

- 1929년 경주 노서리 서봉총 쌍분인 데이빗드총(塚) 발굴 참여

- 1932년 경주 원원사 석탑 복원

- 1934년 신라 고대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인 남산(南山) 신성비(新城碑) 1차 발견

- 1936년 화랑도의 맹세인 임신서기석 발견, 일본인 경주박물관장이 공적 가로챔

- 1938년 한국 미술사학계 개척자이신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 선생과 문무대왕의 해중릉(海中陵)이 있는 동해구(東海口) 유적 학술답사

- 1940년 경주 동방리 폐석탑 발견, 사자사지 신라 폐석탑 발견, 현재 경주역 광장에 복원

- 1945년 건국준비위원회 여운형 위원장으로부터 경주박물관장 임명받음

- 1945년 광복 후 경주문화재 보존 연구에 전념, 수많은 문화재를 찾아서 신라사 연구 및 고고학계에 공헌

- 1952년 경주 소재 육군 예비사관학교 한국사 초빙교수 역임

- 1961년 동아대학교 박물관 창설

- 1962년 한국 – 스웨덴협회 창설 및 창립발기인

- 1963년 문교부 문화재관리국 경주조사연구원 역임

- 1968년 경주 서면 건천리 작원마을에서 김유신 장군 군기간주석(軍旗干柱石) 발견, 김유신 장군 군영의 깃발을 꽂았던 돌

- 1969년 경주 외동읍 괘릉리 감산사지 남쪽 1km 지점에서 임진왜란 당시 경주성 탈환작전에 사용된 최신 병기인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제조하였던 주물지를 발견, 우리나라 무기 역사와 임란사 연구의 중요 사료 제공

- 1970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 서훈

- 1970년 원광법사 부도 발견, 코리아 해럴드 1974년 9월 15일 소개(5男 최정대)

- 1971년 스웨덴 왕실 최고훈장 바자 훈장 기사작(騎士爵) 서훈

- 1971년 1월 경주 열박산에서 『삼국사기』에 기록된 김유신 장군 통일 기도장(祈禱場) 발견, 양주동 박사와의 논쟁에서 문헌연구와 현지 주민 증언 제시, 현장답사 증거 제시로 승리

- 1975년 스웨덴 국왕 칼 구스타프 16세의 초청으로 스웨덴 왕실 방문, 스웨덴 고고학계 시찰

- 1980년 2월 향년 75세로 성건동 자택에서 환원(還元 : 천도교에서 사망을 의미), 묘소는 경주시 충효동 김유신 장군 묘소 서편 선산

- 2001년 5월 19일 경주시 충효동 김유신 장군 묘소 입구 석당공원에 최남주 선생을 추모하는 추송비(追頌碑) 건립, 대한민국 학술원 위원 무의자(無衣子) 권옥연(權玉淵)이 제자(題字)를 쓰고 석장(石匠) 윤만걸(尹晩杰)이 새김

- 2005년 5월 29일 경주시 충효동 석당공원에서 탄생 100주년 기념식

- 2006년 9월 24일 한국박물관협회 김종규 회장으로부터 우리나라 박물관 발전,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세계에 알린 특별 공로로 감사패 받음

 

2) 주요 고고학적 발견

 

- 1935년 무열왕릉 비단석 발견

- 1935년 성덕왕릉 비편 발견

- 1935년 황복사지 비단석 발견

- 1935년 경주 숭복사지 비단석 발견(최치원 선생의 ‘사산비명’ 중 한 곳)

- 1936년 경주 남산사지에서 창을(倉乙) 비편 발견

- 1937년 낭산 11면 관음보살상 불두 발견

- 1937년 흥덕왕릉 제1차 비단석 발견

- 1940 경주 삼랑사(三郞寺) 비편 발견

- 1942년 경주 벽도산 석불상 발견

- 경주 남산 보리사 마애석가여래좌상 발견

- 1947년 경주 남산 미륵곡 마애석불좌상 발견

- 1957년 경주 단석산 상제암 마애여래좌상 발견

- 1957년 경주 흥덕왕릉 제2차 비단석 발견

- 1961년 경주 남산 철화곡 ‘신라 최대 석불두’ 발견, 현재 경주박물관에 전시

- 1962년 경주 남산 동정곡 약사여래좌상 발견

- 1962년 경주 남산에서 신라시대 최대 일석(一石) 석관 발견

- 1962년 경주 천북면 동산리 신라 토기요지 발견

- 1962년 경북 경산군 하양면 공산 환성사에서 신라 당간지주 발견

- 1962년 경북 경산시 와촌면 불국사지 3층석탑 및 석불 발견

- 1962년 경북 군위군 고로면 동정골 약사여래좌상 발견, 현재 인각사 경내로 옮김

- 1965년 경주 내남면 망성리 신라 토기요지 발견, 서울대 김원룡 교수와 학술 조사

- 1967년 경주 안강읍 근계리 무능산 아래에서 신라 석불좌상 1구, 보탑석불입상 발견

- 1968년 경주 서면 용명리 명장마을에서 고려 조선시대 ‘명장도요지’ 발견

- 1970년 현곡면 소현리 신라 효자 손순 집터인 홍효사(弘孝寺) 발견

- 1971년 원원사 안혜대사 부도와 범어금석문 발견

- 1971년 경북 영일면 기계리 운주산 정상에서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 ‘혜숙사지’ 발견

- 1972년 경주 남산 용장사지 계곡에서 신라불상광배 발견

- 1972년 양북면 장항리 탑정계곡에서 장항리 석불광배 발견

 

3. 열박산 양주동(梁柱東 博士) 소론(所論)에 대한 최남주 선생의 논박(論駁)

 

조선일보 1971년 1월 15일 자 ‘열박산(咽薄山)은 따로 있다’라는 제하 양주동 박사(梁柱東 博士) 소론(所論)을 관심 깊게 읽었으나 양박사의 착오에서 비롯된 것 같기에 이 글을 쓰니 사계(斯界)와 양박사의 심심한 이해가 있기를 바란다.

 

열박산(山)은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비롯하여 고기(古記)에 의하여 신라통일(統一) 전의 김유신장군(金庾信將軍)의 기도장(場)과 병법연구장(兵法研究場)이라는 사실(史實)에 필자(筆者)의 관심과 학계의 주목이 대단했던 것은 사실이다.

 

필자가 평소에 이 열박산(咽薄山)을 가장 주목한 원인은 학계(學界)의 전연 미개지(未開地)요 미답지(未踏地)인, 단석산(斷石山)의 수도장이 『三國史記』에 나오는 중악(中岳)으로 단정하기 전에는 (金庠基 박사는 李弘稙 박사의 회갑논문집에서 단석산을 中岳으로 봄) 이 열박산이 김유신 기도장과 결부된 『삼국사기』에 나오는 유일한 기사인 점이다.

 

필자가 말하려는 백운산(白雲山), 즉 열박산(咽薄山)에 관한 기사로 『삼국사기』 제41 열전 제1 김유신 상(上) 조에 진평왕 건복 28년(서기 611) 신미, 공의 나이 17세였을 때, 고구려(高句麗)ㆍ백제(百濟)ㆍ말갈(靺鞨)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외적을 평정하려는 뜻을 품었다. 그리하여 혼자 중악(中嶽)의 석굴에 들어가서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였다.

 

...... 중략, 건복 29년(서기 612), 이웃 나라 적군들이 점점 더 압박해왔다. 공은 더더욱 비장한 마음이 격동되어서 보검을 차고 홀로 열박산(咽薄山) 깊은 골짜기에 들어갔다. 향을 피우고 하늘에 고하며 기도하기를 중악에서처럼 하였다.

 

여지승람(輿地勝覺) 권21 경주산천(慶州山川) 조에 ‘열박산(咽薄山) 재부남삼십오리(在府南三十五里) 언전(言傳) 김유신휴보검입심학(金庾信携寶劍入深壑) 소향고천(燒香告天) 기도병법처(祈禱兵法處)’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위의 기사(紀事)는 『동경잡기(東京雜記)』에도 나오고 있다.

 

몇 가지 특기할 사실은 필자가 답사한 ① 열박산 즉 백운산은 고기[(古記 : 여지승람(輿地勝覺), 동경잡기(東京雜記 등)]에 나오는 재부남삼십오리(在府南三十五里)에 해당하는 지점이 틀림이 없다. 즉, 지금의 행정구역인 경남(慶南) 울주군 두서면 내와리(蔚州郡 斗西面 內瓦里)의 백운산(白雲山)인 것이다. 일정 초기까지도 이 지역이 경주에 속해 있었다.

 

동경잡기(東京雜記)와 동경지(東京誌)에 실린 ‘서천(西川 : 필자 註 현 경주 서천임) 재부서사리(在府西四里) 유삼원일출(有三源一出) 열박산일출묵장산지화곡산(咽薄山一出墨匠山只火谷山) 합류입형산포(合流入兄山浦)’ 라는 기록을 보더라도 필자가 백운산 정상에서 발견한 ‘삼강수암(三江水岩)’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삼강수암의 유래는 백운산 고노(古老)들의 구술(口述)과 옛부터의 구전(口傳)에 의하면 삼강수암에서 솟은 물이 살래로 각각의 형산강[(兄山江), 필자 주 경주서천은 형산강 상류임], 태화강(太和江), 낙동강(洛東江)으로 떨어져 흘렀기에 삼강수암(三江水岩)이라고 전한다.

 

또 동경통지의(東京通誌)의 기록을 보면 ‘열박산재부남산삼십오리자복안산래(咽薄山在府南山三十五里自伏安山來) 김유신소향운운(金庾信燒香云云) 묵장산재부남산십리자열박산래墨匠山在府南山十里自咽薄山來) 일지위고위산(一枝爲高位山) 일지위치술령운운(一枝爲致述嶺云云) 복안산재부남이십리자울산래(伏安山在府南二十里自蔚山來)’ 라고 기록되어 있음을 볼 때 필자가 추정하는 백운산(白雲山)이 열박산임에 틀림이 없다.

 

월생산(月山)을 단석산(石山)의 아랫마을에 거주하는 고노(古老)들은 모르는 것처럼 이 열박 산(咽薄山)의 산(山)이름도 잊혀진 것이며 전기 고기(前記 古記)의 기록이 말해주듯이 백운산(白雲山) 즉, 열박산(咽薄山)을 중심으로 복안산(伏安山)이 북동으로 10리, 묵장산(墨匠山)이 동으로 20리, 치술령(致述嶺)이 동으로 30리, 열박령(悅朴嶺)도 동으로 가까운 거리에 연(沿)해 있다.

 

복안산(伏安山) 현(現) 울주군 두서면 복안리(蔚州郡 斗西面 伏安里)에 속해 있다. 그리고 백운산(白雲山)을 속칭으로 노박산(艣泊山)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열박령(悅朴嶺)이라는 것과 또 ‘열박재’ 로부터 북으로 10리 지점에 있는 박달리(朴達里)라는 동명(洞名) 등은 이 열박산(咽薄山)에서 유래(由來)되었을 것으로 필자는 추측(推測)하는 바이다. 본보 1월 10일 자의 열박산(山)의 위치도(位置圖)는 사실과 상이(相異)함을 밝혀둔다(筆者가 제시한 위치도 참조).

 

②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오는 열박산(咽薄山)의 ‘심학중(深壑中)’의 기사가 필자가 답사, 발견한 백운산 (雲山) 정상(頂)의 속칭 ‘감투바위’ 관모암(冠帽岩) 하부(下部)에 뚫린 석굴(石窟)과 이 석굴로부터 2백m 아래의 5백평 가량의 무술 연마지와 또 그부근 계곡(溪谷) 입구의 사지(寺地)를 부정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이 지역의 고노(古老)들은 소위 ‘감투바위’에서 옛날 장군(將軍)들이 향을 피워 하늘을 보고 빌었으며 지금도 가물 때는 기우제(祈雨祭)를 이곳에서 지낸다고 함은 김유신장군(金庾信將軍)의 기도장(祈禱場)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또 필자(筆者)가 반세기(世紀) 동안이나 경주(慶州)를 중심하여 답사한 산 가운데에는 이 열박산의 계곡(溪谷)이 제일 험하고 깊었음을 부언(附言)한다.

 

양(梁)박사가 백운산(白雲山)을 부산[(富山). 일명 주사산(朱砂山)]으로, 필자가 발견한 백운산(白雲山)의 유적(遺蹟)들을 부산(富山)의 김유신장군 호군처(호軍處)로 바꾸어 생각하여 고기(古記)(與勝, 東雜)를 인용한 것은 순간적인 착각으로 밖에 필자는 생각하지 않는다.

 

③ 부산(富山)은 고기(古記)의 기록대로 「재부서삼십리(在府西三十里)」에 해당하는 경북 월성군 서면 송선리(慶北 月城郡 西面 松山里)에 따로 있다. 김유신(金庾信)장군이 보리를 갖다 놓고 술을 빚어 군리(軍吏)를 향연하였다는 ‘지맥석(持麥石)’과 복두암(幞두岩), 그리고 문무왕(文王) 3년(서기 633년)에 세워졌다는 부산산성(富山山城)과 부속유지(附屬遺址)는 지금도 부산(富山) 즉, 주사산(朱砂山)에 남아있으며 필자도 근 50년을 두고 이곳을 답사(踏査)해 왔다.

 

여기에 대한 고구(考究)는 동빈 김상기(金庠基) 박사가 이미 이홍직(李弘稙) 박사의 회갑논문집에 발표하였기에 약(略)하기로 하며 백운산(白雲山)의 김유신(金庾信史蹟)에 대해서는 훗날 따로 논(論)하기로 한다.

 

끝으로 부언(附言)할 것은 양(梁)박사와 필자(筆者)와는 평소에 일면식(一面識)도 없지만 우리나라 국학계(國學界)에 끼친 양박사의 공적은 筆者가 존경(尊敬)하고 있는 터이다. 열박산(咽薄山)에 보여준 열의(熱)와 관심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表)한다.

 

열박산(咽薄山)의 표음(表音)은 필자도 양(梁)박사의 고견(見)과 동감(同感)이기에 ‘인’ 자(字)아닌 ‘열’ 자(字)로 표음할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본고(本稿)를 끝맺으며 무명(無名)의 일촌노 (一村老)에게 선학제위(先學諸位)의 질정(叱正)있길 바라는 바이다.

 

4. 열박산에 대한 양주동(梁柱東) 박사의 주장

 

양주동 박사는 유명한 국문학자로 향가 해석의 권위자였다. 양주동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맥박』, 『조선고가연구』 등을 저술한 학자이다. 1903년에 태어나 1977년도에 사망하였으며 경기도 개성 출신으로 호는 무애이다. 잡지 『문예공론』(1929)을 발간하고, 시집 『조선의 맥박』(1930)도 발표하였다. 그의 업적은 고시가에 대한 해독 및 주석에 대한 연구이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42년에 향가 25수 전편을 해독한 『조선고가연구』를 간행하였는데 뒤에 『고가연구』라는 제목으로 바꾸었다. 향가 25수 전편에 대한 해독은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처음이다. 광복 후에는 향가의 해독과 고려가요의 주석을 정정·보충하였다.

 

다음은 김유신 장군 기도장인 열박산 위치에 대해 최남주 선생과 논쟁을 벌이며 표명한 양주동 박사의 견해이다(追記 梁柱東).

 

① 앞서 내가, 백운산(白雲山)을 부산(富山)」으로 추정했었음은 문헌의 우합(合)에 기인(起因)된 나의 실고(失考)), 부산(富山)은 현 월성군 서면 송선리에 있음이 적실(的實)함.

 

② 그러나 ‘열박산(咽薄山)’ 현지는 崔선생의 백운산(白雲山) 삼강수원(三江水源)의 보설(補) 에도 불구하고 의연(依然)히 의문. ‘재부남(在府南)35리’가 문제. ‘열박령(咽薄領)’과 함께 요재 고(要再考), 답사(踏査).

 

③ 이번 이슈를 통한 나의 학적소감(學的所感)은 평범하나마 또 다음과 같다. ‘문헌(文獻)에 뒷받침 되지 않은 답사(踏査)의 추정(推定)은 숫제 엉성하고 실지답사(實地踏査)를 짝하지 않는 문헌(文獻)만으로의 단정(定)은 매양 위험하다.’

 

이로서 ‘열박산(咽薄山)」문제를 두른 나의 준조(樽俎)를 넘었던 관설(關說)을 끝막는다. 최(崔)선생께 다사(多謝)’

(조선일보 1971년 1월 31일)

 

5. 결론

 

국문학자 양주동박사는 석당 최남주 선생의 ‘김유신 장군 통일 기도장(祈禱場) 발견’이라는 조선일보 보도기사에 대하여 반론 논문을 기고한 바 있다. 그러나 최남주 선생이 이에 대해서 자신이 발견한 유적은 ‘김유신장군 통일기도장 발견’ 임을 재고증(再考證)하는 논문을 다시 조선일보에 발표한 후에 양 박사는 자신의 과오를 시인하고 최 선생에게 상기의 추기 사과문을 게재하였다. 이 논쟁으로 열박산의 김유신 장군 통일 기도장 유적이 학계에 많은 관심을 끌었다.

 

열박산(咽薄山)의 표음(表音)은 최남주 선생은 인박산이라고 하였으나 양주동 박사의 열박산이라는 견해에 동조하였다. 양주동 박사는 경주 현지를 답사하지 않고 『삼국사기』 등의 문헌연구를 통해 부산(富山)이라고 주장하였다. 반면 최남주 선생은 50여 년에 걸친 경주 지역 답사, 백운산과 분수령인 삼강봉 현지 조사, 현지 주민들의 의견 청취 등을 통해 타당한 주장을 하였기에 양주동 박사를 납득시킬 수 있었다.

 

최남주 선생의 6남인 최정간(崔楨幹, 도예가) 선생이 서라벌신문(2019년 6월 13일)에 기고한 칼럼에 김유신 장군 수도장인 열박산 기도장 발견 이야기가 나온다. 일제강점기 시절 신라사를 연구하던 일본인 학자 이마니시류(今西龍) 등도 열박산 유적지를 찾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모두 허사로 끝났다고 언급하였다. 자신의 선친이 발견하여 조선일보에 보도됨으로써 많은 관심을 받았다고 얘기하였다.

 

필자도 김유신 장군 유적지를 여러 곳 답사하면서 현장을 살펴보고 사진도 많이 찍은 후 스토리텔링을 하여 와이뉴스(YNEWS)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글을 쓸 때 문헌연구를 통해 쓸수도 있지만 반드시 현장답사 후에 종합하여 정리하면 독자들의 이해를 도울 수 있다.

 

필자가 와이뉴스(YNEWS)에 김유신 장군과 화랑도 관련 글을 시리즈로 쓰면서 최남주 선생을 알게 되었다. 필자는 석당 최남주 선생의 업적인 임신서기석 발견에 관한 글을 세 편 게재하였다. ① ‘화랑도의 충성 맹세 임신서기석(2024년 2월 14일)’, ② ‘화랑서기석 최초 발견자 최남주 선생’(2024년 2월 21일 자), ③ ‘임신서기석이 발견된 석장사지(2024년 2월 27일 자)’.

 

이 글을 읽어 본 최남주 선생의 자제인 4남 최정표(崔楨表, 선덕여중 교장 역임) 선생이 4월 23일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 선친의 업적을 잘 소개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와이뉴스에 글을 쓴 보람이 있었다. 최정표 선생은 한국박물관학회에서 선친의 탄생 102주년 기념으로 발간한 ‘박물관학보’를 보내주겠다고 말씀하였다. 동생인 5남 최정대(崔楨大) 대광상사 대표(코리아 해럴드 칼럼리스트)가 책을 보내주었다. 두 분에게 감사드리는 바이다.

backward top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