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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화요칼럼] 임진왜란때 작원관전투를 지휘한 밀양부사 박진1. 작원관 복원사업에 토지를 기증한 검세리 주민들의 애국심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작원관은 영남지방의 동과 서, 남과 북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에 세운 숙박과 검문을 위한 시설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공무를 위해 여행을 하던 관원들의 숙소를 원(院)이라 하고, 출입하는 사람과 화물을 검문하는 곳을 관(關)이라 하였다. 작원관은 관원의 숙소와 일반인의 검문을 위해 지은 시설로 남해에서 올라오는 왜적의 방어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낙동강가의 작원진(鵲院津)이라는 나루터를 오르내리는 사람과 화물도 검색하였고, 임진왜란 때 밀양부사 박진이 왜적을 맞아 결사적으로 싸웠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원래는 터를 표시하는 비석만 남아 있었으나 1995년에 작원관의 성문을 복원하여 세웠다. 1990년 11월 12일 작원관을 복원할 때 토지를 기증한 주민들의 이름이 적힌 송덕비가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당시 호국영령들의 거룩한 희생을 기리기 위한 작원관지 성역화 사업에 토지 7,934㎡를 기증하여 초석을 다지게 하였으니 베푸신 은혜가 하해와 같아 그 고마운 뜻을 후세에 길이 빛내고자 이 비를 세웁니다.” 기증자는 작원(깐촌)마을 주민 강갑득, 강말순, 강명득, 강삼득, 강인득, 김기동, 김도섭, 문석보, 문종수, 박명화, 박춘자, 서영순, 양이근, 오우기, 오정희, 오태환, 이경우, 이삼현, 이용덕, 이용재, 이종호, 윤중근, 윤중환, 장길형, 주경자 25명이었다. 삼랑진읍민 일동이 세운 작원관 복원 기념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곳 작원관은 원, 관, 진의 역할을 겸하던 곳으로 교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으며, 임진왜란 때는 군관민(軍官民) 300여 명이 왜적 1만 8천 7백 명을 상대로 결사항전(1592년 4월 17일)을 벌였던 전적지로서 구국충혼(救國忠魂)들이 잠들어 있는 성지이며, 수백 년 동안 피땀을 흘린 지역민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유서 깊은 곳이었다. 그러나 경부선 철도가 개설되면서 원래의 자리에서 밀려나 낙동강변에 그 터를 잡았으나 1936년 대홍수에 휩쓸려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이를 복원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이는 경운(耕雲) 송만술(宋萬述) 선생이었다. 선생께서는 작원관의 역사적 의미와 그 중요성을 깨닫고, 작원관을 복원하는 일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왔으나 그 복원을 보지 못하고 타계하셨다. 뒷날 선생의 작원관에 대한 깊은 사랑과 지역민의 노력으로 지금과 같이 우뚝 서게 되었으니, 이를 기념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조국과 민족사랑을 몸소 실천하신 선조들의 거룩한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한 작은 의지로 이 비를 세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에 적극적으로 항쟁한 밀양의 조선군과 의병들의 후예답게 정부의 복원사업에 토지를 기증한 주민들의 애국심은 상찬받아 마땅하다. 요즘은 정부사업의 감정가 토지매입에 반대하고 시가 매입을 주장하는 주민들이 많은데, 무상 기부한 밀양시 삼랑진읍 검세리 주민들의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은 높이 사야 마땅하다. 2. 작원관 비각 작원관 비각 안에 보관된 보관되어 있는 작원관원문기지비(鵲院關院門基址碑), 작원대교비(鵲院大橋碑), 작원진석교비(鵲院津石橋碑)이다. 작원관을 당초 위치에서 떨어진 현 위치에 복원하면서 작원관 옛터에 있던 비석도 이곳으로 옮기고 비각을 지어 보존하고 있다. 비각의 중앙에 있는 비석이 ‘작원관원문기지비’이고, 그 좌우에 있는 비석이 ‘작원진석교비’, ‘작원대교비’이다. 작원관원문기지비는 1939년 작원관 옛터에 세웠던 것으로 작원관의 본래 위치와 그후 이전관계를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이 비의 높이는 145cm이며, 사각형 받침돌 위에 비석 위를 육각형으로 다듬어 비석의 몸돌을 세운 것이다. 비석 정면에 한자로 ‘작원관원문기지비(鵲院關院門基址碑)’라고 새겨놓았으며, 측면에는 소화 14년 10월 일이 음각되어 있다. 소화 14년은 1939년으로 이해 10월에 만들어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작원대교비’는 본래 삼랑진읍 검세리 13번지 작원 선창가, 작원진석교비는 검세리 2번지의 작은 비석거리에 각각 있었다. 1971년에 ‘작원관원문기지비’(검세리 3번지) 옆에 옮겨 세웠다가 다시 현 위치로 가져와 보존하고 있다. 높이가 140cm인 ‘작원대교비’는 숭정기원15년(崇禎紀元十五年)이라고 새겨진 명문으로 보아 1642년에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작원대교는 영남대로가 지나던 율동리와 청룡리 사이 우곡천에 돌다리로 추정되며, 이 비는 작원대교를 건설하고 그에 관한 사실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3. 처자교 전설 작원진석교비는 영남대로가 통과하던 삼랑진읍 안태리에 있던 석조 홍예교를 지은 기념으로 기념하여 1690년(康熙二十九年)에 대리석으로 만든 것이다. 이 비의 높이는 124cm이며 비문의 내용은 안태리 주민 200호가 1690년 2월부터 8월까지 7개월간 노력해서 홍예교를 놓았다는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이 홍예교는 2011년에 발굴되었으며, 구조와 형식미를 인정받아 경남기념물 제281호로 지정되었으나 보존상의 어려움으로 다시 흙을 덮어 보호하고 있다. 이 다리는 일명 처자교로 알려져 있으며 재미있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매장문화재 발굴역사문헌 내용 중 1530년 중종 때의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작원관 앞 사포교, 『밀주징신록』에서 ‘승교, 처자교’, 『밀양지』에서 ‘숙종 때에 세운 아치형으로 처녀교, 승교’의 기록이 있다. 밀양지명고에서 작원관 근처의 작은 절에 한 스님이 살았는데, 근처 마을에 사는 미모의 한 처자를 연모했다. 그러던 어느 해에 두 남녀는 서로 사랑을 걸고 다리놓기 시합을 했다. 통행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사랑놀음이었던 것이다. 스님은 행곡천 다리를 맡았고, 처자는 우곡천 다리를 맡아 작업을 시작했다. 처자의 연약한 노동력을 깔본 스님이 교만한 마음에 빠져 게으름을 피고 있는 사이 처자가 다리를 완성했다. 이를 부끄러워한 스님이 낙동강에 빠져 죽자(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설도 있다.), 처자도 따라서 죽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스님이 만든 다리는 승교(僧橋), 처자가 만든 다리는 처자교(處子橋)로 불려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4대강살리기 사업 현장에서 발굴된 처자교는 조선시대 영남대로상에 남아있는 보기드문 쌍홍예교로 세워진 교량으로 그 규모는 폭 4.25m, 길이 25.3m, 높이 3.2m의 교량이다. 당시의 건축 및 토목 기술을 알 수 있는 역사적으로 귀중한 자료이다. 처자교는 2011년 6월 발굴 후 낙동강 물에 의한 훼손 및 유실 방지를 위하여 현재 자리(우곡천 하류)에 매립하여 보존하고 있다. 사대강 정비사업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던 환경단체, 시민단체들은 4대강 사업이 완성된 후에도 끈질기게 비판하며 4대강 보를 부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4대강 보 주변의 주민들은 홍수를 막아주고 농업용수를 제공하는 보 철거를 결사반대하고 있다. 낙동강 정비사업에서 양산의 가야진사도 발굴하여 현 위치에 보존했고, 작원관잔도 역시 보호하였다. 밀양의 처자교는 발굴 후 매립하였다. 밀양시에서는 처자교를 발굴하고 안전하게 작원관 옆의 오토 캠핑장 근처로 이전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면 좋을 것이다. 4. 작원관 전투에서 패배한 밀양부사 박진 임진왜란 때 왜적들이 타고 온 배가 대마도에서 부산포 앞에 이르는 바다를 가득 메워 그 끝이 보이질 않았다. 절영도로 사냥을 나갔던 부산진 첨절제사 정발은 왜적의 침략을 보고 받자 경상좌수사 박홍에게 수군으로 기습하자고 했으나 박홍이 반대하였다. 정발 첨사는 성으로 들어와 군민과 함께 분전하였으나 전사하였다. 경상좌수사 박홍은 적의 세력에 질려 동래성에 들어갔다가 송상현 부사를 돕지 않고 도망쳤다. 다대포 첨사 윤홍신 또한 목숨을 걸고 싸웠으나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경상좌병사 이각은 울산에서 동래성을 지원하기 위하여 동래성으로 왔다. 동래부사 송상현이 이각에게 자신과 함께 성을 지키자고 제안했으나 이각은 압도적인 왜군에 놀라 핑계를 대고 도주했다. 송상현은 자리에 앉은 채 한 치도 움직이지 않고 왜적의 칼에 찔려 죽었다. 양산군수 조영규도 송상현 부사와 함께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동래성에 머물던 밀양부사 박진(1560년~1597년)은 이각과 소산역에 방어진을 쳤으나 이각이 먼저 도망가자 할 수 없이 후퇴했다. 박진은 작원관을 방어하려 했다. 조영규 군수가 없는 양산에 무혈 입성하고 작원관으로 왜적이 몰려오자 3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분전하였다. 작원관은 양산의 험준한 천태산의 바위로 형성된 암산에서 고야산을 거쳐 불끈 치솟다 낙동강에 내리꽂힌 바위산 한 굽이의 돌을 깨고 관도를 열고 고려시대부터 요새를 설치하였다. 산이 높고 험하여 날짐승만 넘나들 수 있다 하여 까치 작(鵲)자를 따오고, 여행하던 관원이 쉬어가던 역원이 있어 원(院)자를 취하였으며, 나루터(津)와 관문의 기능을 갖추었던 곳이라 이 권역을 작원관(鵲院關)이라 이름하고, 문을 한남문(捍南門), 누(樓)를 공운루(拱雲樓)라 편액(扁額)하였다. 작원관은 한 사람의 군사가 지키면 만 명의 군사를 막을 수 있다는 요새였다. 1592년 임진년 4월 17일 아침에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의 왜병 제1군 1만 8천 7백 명의 병력이 동래를 출발하여 양산을 거쳐 침입해왔다. 부장 마쓰우라(松浦鎭信)의 지휘로 오후 들어 작원관 산의 위쪽 방향에서부터 내려다보고 조총으로 사격을 가하며 달려들었다. 일본군은 작원관에 관한 정보를 미리 입수하고 험난한 잔도를 통해 대부대가 진격하기는 어려운 것을 알고 양동작전을 취하여 양산에서 우회하여 천태산을 통해 작원관을 공략하였다. 양산의 황산잔도 역시 아무 방어 병력이 배치되지 않아 무사통과하였다. 영남대로의 험난한 3대 잔도는 황산잔도, 작원잔도, 문경의 토끼비리였다. 신립장군은 문경새재에서 왜적을 막지 않고 충주의 탄금대 앞 남한강에서 배수의 진을 쳤다. 왜군 척후병은 험난한 문경새재를 미리 염탐하였으나 방어 병력이 없는 것을 알고 노래부르고, 춤을 추며 넘었다고 한다. 신립장군과 병사들은 말과 병사가 원활하게 움직이기 힘든 늪지에서 싸우다 전멸당했다. 명나라 이여송 장군은 후일 문경새재를 지나다 신립 장군은 병법을 모른다고 지적하였다. 작원관을 방어하던 밀양부사 박진을 비롯한 군관 이대수(李大樹), 김효우(金孝友) 등이 관병, 민병 등과 함께 분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여 군관 이대수, 김효우를 비롯한 병사 300여 명이 전사하였다. 포위되었던 밀양 부사 박진은 간신히 밀양성으로 도망쳐 병기와 창고를 불사른 다음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김해 부사 서예원도 도망쳤다. 순찰사 김수는 진주성에서 침략 소식을 접한 후 서부지역으로 도망쳤다. 결국 온 고을은 텅텅 비게 되었고 적의 진격에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밀양부사 박진은 항왜의 대표격인 사야가(김충선 장군)가 조선에 투항할 때, 그 투항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좌선봉장으로 군사 3,000명을 인솔하고 한반도로 쳐들어왔다가 경상도 병마절도사(慶尙道兵馬節度使) 박진에게 항복하여 여러 번 전공을 세웠다. 사야가는 박진에게 강화서에서 “이 나라의 예의문물과 의관 풍속을 아름답게 여겨 예의의 나라에서 성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라고 썼다. 5.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박진 장군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박진(朴晋) 장군이 경주를 수복하였다. 박진이 1차 공격에서 패하였다가 다시 군사를 모집하여 안강현(安康縣)에 주둔하다가 밤에 몰래 군사를 다시 진격시켜 성 밖에서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성안으로 발사하여 진안에 떨어뜨렸다. 적이 그 무기를 몰랐으므로 다투어 구경하면서 서로 밀고 당기며 만져보는 중에 조금 있다가 포(砲)가 그 속에서 터지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쇳조각이 별처럼 부서져 나갔다. 이에 맞아 넘어져 즉사한 자가 20여 명이었는데, 온 진중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신비스럽게 여기다가 이튿날 드디어 성을 버리고 서생포(西生浦)로 도망하였다. 박진이 드디어 경주에 들어가 남은 곡식 만여 석을 얻었다. 일이 알려지자, 가선대부로 승진시켰다. 비격진천뢰는 옛날에는 없었는데, 화포장(火砲匠) 이장손(李長孫)이 처음으로 만들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선조는 양피(羊皮)로 만든 옷 한 벌을 경상 병사 박진(朴晉)에게 특별히 하사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좌의정 윤두수, 이조판서 이산보, 호조 판서 이성중, 대사헌 이덕형(李德馨), 예조 판서 윤근수 등 신료들이 함께 아뢰기를, “박진(朴晉)이 영좌(嶺左)를 수복한 공로는 이순신의 공과 다름이 없는 것으로 영좌에 자못 생기가 돌고 있습니다. 박진은 색깔이 있는 말을 탔었는데 처음에는 적이 알아볼까 염려하여 진흙으로 발라 말의 색깔을 없앴다가 지금은 명성이 이미 적들에게까지 났기 때문에 일부러 말의 색깔을 내보여 적이 보기만 하여도 놀라게 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선조는 “박진(朴晉)은 국사(國事)에 자신을 잊고 부지런히 애썼으니 특별히 한 자급을 가자(加資)해 주라”고 하였다. 선조는 “관유격(毌遊擊)이란 자가 심유경(沈惟敬)의 말을 듣고 왜적을 비호하여 박진(朴晉) 등 네 장군을 묶어다가 곤장까지 치고 온갖 치욕을 보였다고 하니 통분함을 견딜 수 없다.”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사간(司諫) 윤경립이 또 아뢰기를, “박진(朴晉)의 사망은 중국 장수에게 구타를 당해서입니다. 죽은 뒤에 보니, 가슴뼈가 부러져 있었다 합니다. 국가의 일로 죽은 것이니, 다른 사람에 비하여 더욱 참혹합니다. 지난번에 홍계남(洪季男)의 노모(老母)에게 음식물을 하사하도록 명하자, 중외(中外)가 모두 감격했었습니다. 박진이 홍계남과 어찌 다르겠습니까. 그에게도 노모가 있으니 구휼하는 은전(恩典)이 내려져야 할 것입니다” 특진관(特進官) 신점이 아뢰기를, “박진을 구타한 중국 장수는 누승선(婁承先)입니다.” 하자, 집의(執義) 한준겸이 아뢰기를, “박진의 뼈가 부러진 곳을 신도 보았습니다. 그는 병으로 사직하고자 하였으나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는 것을 피하려 한다는 혐의가 있으므로 감히 신병을 말하지 못하다가 죽음에 이른 것입니다.” 박진 장군은 경상도의 육군을 지휘하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와 전라도 및 황해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으며, 군사를 총괄하는 병조의 참판(국방부 차관)에 올랐다. 정유재란 와중인 1597년 명나라 장군 누승선의 구타로 인해 병을 얻어 억울하게 38세의 한창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전쟁터를 누비다 왜적의 총칼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니라 오만한 명나라 지원군의 장군에 의해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다. 나라가 약하면 백성 모두가 피해자가 된다. 사후에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영조시대에 의열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박진 장군 묘소는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두일리 산149-2번지에 있다. 민간인 통제선 내 밀양박씨 묘역에 위치한다. 1987년 2월 12일에 경기도 기념물 제110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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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박사 화요칼럼] 천 길 낭떠러지에 바위를 깨고 길을 낸 작원잔도1. 고대의 도로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잔도(棧道)는 험한 벼랑 같은 곳에 선반을 매달아 놓은 듯이 만든 길을 의미한다. 일명 잔로(棧路)라고 한다. 양산의 황산잔도, 밀양의 작원잔도, 경북 문경의 관갑천잔도는 동래에서 한양으로 가는 영남대로 중에서 가장 험하기로 이름났던 곳이다. 우리나라의 지형은 남북이 길고 동서가 짧다. 그리고 3면이 바다로 둘려 있는 데다가 산지가 많다. 한반도의 남북을 달리는 높은 산맥이 많고, 그 사이에는 큰 강들이 놓여 있어서 남북을 종단(縱斷)하는 교통로는 제대로 발달할 수가 없었다. 역사 이래 중국, 일본으로부터의 침략이 빈번하였기 때문에 정치적, 군사적 측면에서 방어를 위해 도로를 개설하지 않은 이유도 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군사적 목적으로 도로망을 정비하였다. 계립령(鷄立嶺)은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와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사이에 있는 고개로 신라 아달라왕 3년(서기 156년)에 개통되었는데, 죽령(竹嶺)보다 2년 빠르다고 한다. 조선 시대부터 하늘재(해발 525m)라 불렀다. 문화재청(청장 김종진)의 허가를 받아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원장 장준식)이 2017년 6월부터 2018년 8월까지 조사한 옥천 제2의료기기 산업단지 부지 내 유적인 옥천군 옥천읍 서대리 431번지 일원에서 7세기 신라 고대 도로가 확인되었다. 확인된 도로는 남동~북서 방향으로 진행하며 산 정상 부근 사면과 계곡부를 이어 조성되었다. 길이는 약 320m가 넘는다. 노면 폭은 약 5.6m에 달하고, 도로의 표면에는 수레바퀴 자국과 수레를 끌었던 짐승의 발자국도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충북 보은군 삼년산성의 성문지의 돌에도 신라시대의 마차바퀴 자국이 발견되었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이유 중의 하나로 도로의 건설과 수송과 이동에 편리한 마차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것도 들 수 있다. 신라 진흥왕 때 옥천군 관산성 전투에서 김무력 장군이 백제 성왕을 사로잡아 참수하고 대군을 물리침으로써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신라는 관산성전투에서 백제, 대가야, 왜의 연합세력에 대승을 거두었다. 신라는 승전 이후 삼국통일의 길로 승승장구하기 시작하였고, 반대로 백제와 대가야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관산성전투 이후 대가야는 신라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백제 역시 국토가 축소되고 국력이 쇠퇴하였다. 김무력 장군이 한강 유역의 신주 군주로 있을 때 관산성 전투가 벌어져 초기에는 신라군이 백제 왕자 부여창에 패배하여 전세가 불리하였다. 진흥왕의 긴급 호출을 받은 김무력 장군은 철기병을 이끌고 신속하게 남하하여 현재 금강 유역인 대전, 옥천군 지역으로 이동하여 백제 연합군 배후를 기습 공격하여 관산성 전투의 최종 승자가 되었다. 그 당시 신라가 도로망을 잘 정비하고 이용하였기 때문에 대규모 군사가 신속하게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도로를 중요도에 따라 대로(大路), 중로(中路), 소로(小路)로 구분하고, 도로 폭은 대로 12보, 중로, 9보, 소로 6보로 정하였다. 그러나 지역 실정, 환경 여건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전국적으로 역도(驛道)가 조성되었으며, 이러한 교통 통신망이 조선시대로 이어져 더욱 발전하였다. 2. 황산잔도, 작원잔도, 관갑천잔도는 영남대로 3대 잔도 우리나라의 옛길은 산길과 하천을 따라 생긴 굽은 길이 많았다. 산길은 산봉우리와 산봉우리를 빠져나가는 꼬부랑길이며, 하천을 따라서는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이 대부분을 차지하였으므로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는 계절에는 내왕이 끊기는 등 불편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양산군의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동래(東萊)에 이르기 11리, 서쪽으로 김해(金海)에 이르기 17리, 남쪽으로 동래(東萊) 임내(任內) 동평(東平)에 이르기 29리, 북쪽으로 언양(彦陽)에 이르기 33리이다. 호수는 4백 25호, 인구가 9백 37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15명, 진군(鎭軍)이 43명, 선군(船軍)이 1백 31명이다. 역(驛)이 3이니, 황산(黃山), 위천(渭川) [예전에는 우천(亐川)이다.], 윤산(輪山)이다. 대저도(大渚島) [군(郡) 남쪽에 있는데, 육지와의 거리가 1백 60보이다. 국농소(國農所)가 있었는데, 지금은 혁파되어, 백성들이 들어가 산다.]. 영남대로에서 황산잔도는 조선시대 부산 동래와 한양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였다. 조선시대 양산 물금 지역의 낙동강을 황산강이라 불렀다. 황산강 옆으로 난 길을 따라서 밀양으로 연결되었다. 이 구간의 다니기에 위험하고 험난한 구간에 개설된 길을 황산잔도라고 하였다. 양산시에서 황산역과 황산잔도를 아울러 복원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2027년까지로 너무 늦게 진행되고 있다. 황산잔도는 별도로 신속히 복원하였으면 좋겠다.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도 황산잔도 복원을 위해 양산시민의 서명을 받아 각계에 진정서를 제출한 바 있다. 영남삿갓은 황산잔도의 잡풀을 제거하고 위험구간에 나무로 임시 다리를 설치하여 통행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필자는 영남삿갓 덕분에 황산잔도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영남삿갓은 경파대 바위에 새겨진 글자도 모래를 제거하여 잘 보이도록 하였다. 필자는 영남삿갓과 함께 황산잔도에 꽃무릇을 심었다. 밀양시 삼랑진읍에 있는 작원잔도는 동래에서 한양으로 가는 영남대로 중에서 가장 험하기로 이름났던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작원 밀양부의 동쪽 41리에 있다. 원으로부터 남으로 5~6리 가면 낭떠러지를 따라 잔도가 있어 매우 위험하다. 그 한 구비는 돌을 깨고 길을 만들었으므로 내려다보면 천 길 연못으로 물빛이 짙은 푸른 빛이라 사람들이 모두 마음을 졸이고 두려운 걸음으로 지나간다고 한다. 까마득한 절벽에 걸린 외줄기 길과 그 길을 떠받친 석축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적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작원의 남쪽으로 5~6리를 가면, 낭떠러지를 따라 잔도가 있어 매우 위험한데, 그 한 굽이는 돌을 깨고 길을 만들었으므로 내려다보면 천 길의 연못인데 물빛이 푸르고, 사람들이 모두 마음을 졸이고 두려운 걸음으로 지나간다. 예전에 한 수령이 떨어져 물에 빠진 까닭에 지금까지 원추암(員墜岩)이라 한다”고 나와 있다. 『대동지지』에는 잔도위험(棧道危險)이라 써놓았을 정도로 위험한 길이었다. 관갑천잔도는 문경 가은에서 내려오는 영강(穎江)이 문경새재에서 내려오는 조령천과 합류되는 곳에서부터 산간 협곡을 S자 모양으로 돌아 흐르면서 생성된 벼랑에 난, 길이 약 3㎞ 정도의 천도(遷道: 하천변의 절벽에 건설한 길)이다. 문경시 마성면의 석현성(石峴城) 진남문(鎭南門) 아래 성벽을 따라가면 이 길이 나온다.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고 험하다. 관갑천잔도(串岬遷棧道:관갑의 사다리길)는 토끼비리라고도 한다. 이 길은 조선시대 주요 도로 중 하나였던 영남대로 옛길 중 가장 험난한 길로 알려져 있다. ‘비리’란 강이나 바닷가의 위험한 낭떠러지를 말하는 ‘벼루’의 경상도 사투리로, 927년(고려 태조 10) 왕건이 남쪽으로 진군할 때 이곳에 이르러 길이 없어졌는데 마침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는 것을 보고 따라가 길을 내게 되었다 하여 ‘토천(兎遷)’이라 부른 데서 유래한다. 토끼비리를 걸어보니 바위를 깨뜨려 길을 내거나 축대를 쌓은 구간도 있었다. 토끼비리 아래는 바로 절벽 아래 영강으로 굴러떨어지면 죽을 정도로 위험한 길이다. 3. 작원잔도 답사 필자는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과 작원잔도 답사에 나섰다. 영남삿갓은 자전거를 타고 삼랑진읍이나 밀양까지 가는 경우가 많아서 작원잔도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자전거도로를 따라서 걸어가며 낙동강, 경부선철도를 구경하며 걸어갔다. 주중이라 자전거 타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는데, 영남삿갓에 의하면 주말이면 많은 자전거 동호인들이 몰려나온다고 한다. 작원잔도는 바로 양산시와 밀양시의 경계면에 있었다. 양산시 구간에도 잔도가 일부 연결되어 있었다. 돌로 축대를 쌓거나 세로로 기둥을 세워서 위로 돌을 놓아서 길을 만들었다. 자전거도로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작원잔도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극히 일부 이용자만 안내판을 읽어보거나 기념사진을 찍었다. 영남삿갓은 통찰력이 뛰어나 새로운 발견을 잘한다. 작원잔도에서도 바위 벼랑에 난 커다란 구멍을 보고 설명을 해주었다. 이 구멍에 기둥을 박아서 길을 내었다고 하였다. 필자가 자세히 보니 풀이 나있 고 흙이 덮인 곳이 있어서 풀을 뽑으니 역시 도로 기둥 구멍이었다. 바위를 깨거나 돌 축대로 선반 모양의 길을 내었기 때문에 아주 위험한 길이었다. 길에서 실수로 발을 헛디디거나 미끄러지면 바로 깊은 낙동강 물속으로 추락할 위험이 있었다. 옛날 사또가 지나가다가 추락하여 죽었다는 말이 실감났다. 작원잔도에서 눈여겨볼 것은 경부선 철도였다. 영남삿갓이 알려준 경부선 터널 외부 절벽의 축대를 보니 실로 놀라웠다. 거의 수직에 가까운 큰 절벽에 낙석방지를 위해 돌을 붙여놓았다. 요즘 현대적 고층건물의 외벽에 붙인 타일이 떨어져 자주 문제가 되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만든 터널, 다리, 낙석방지 시설물이 100년이 넘어도 여전히 건재하고 있다. 일본의 토목기술과 성실 시공은 오늘날에도 되새겨 볼 만하다. 우리나라의 고질병인 부실시공은 없어져야 마땅하다. 작원잔도는 양산과 삼랑진읍의 작원관에서 접근하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양산에서 자전거도로를 따라가는 것이 삼랑진읍 작원관 쪽에서 가는 것 보다는 약간 멀다. 그러나 양산에서 삼랑진읍에 있는 작원관을 가기 위해서는 천태산으로 나 있는 1022번 지방도의 험한 길을 가야만 한다. 양산에서 작원관까지 함한 길을 왕복하는 바에는 양산 쪽의 자전거도로를 따라가는 것이 훨씬 낫다. 황산잔도를 하루빨리 복원하여 조선시대 옛길을 양산시민들이 걸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문경의 토끼비리는 명승 31호로 지정되어 있어 많은 답사객이 방문하고 있다. 황산잔도는 일제강점기 때 철도부설로 많이 파괴되었지만 경파대, 정현덕 동래부사 영세불망비, 배를 끌던 바위 위의 고딧줄 흔적, 사람들이 밟아서 반들반들해진 바위 등이 일부 남아 있어 조상들의 발자취를 더듬어볼 수 있다. 황산잔도를 복원하여 양산의 명물 관광자원으로 만들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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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박사 화요칼럼]부산명지의 소금생산과 황산베랑길에 남아있는 고딧줄 자국1. 낙동강에서 고딧줄을 끌어당기던 사람들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낙동강 하구둑이 건설되기 전에는 남해의 바닷물이 낙동강을 타고 거슬러 올라왔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는 말이 있다. 부산의 하단, 구포의 소금 배들이 바다에서 들어오는 밀물을 타고 상류로 올라가면 쉽게 갈 수 있었다. 낙동강의 바닷물은 밀양의 삼랑진까지 올라갔다. 물 때를 잘 맞추면 소금배들이 양산의 물금까지는 수월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양산천을 통해서는 구 통도사관광호텔까지 바닷물이 올라갔다고 한다. 황산베랑길 바위에는 돛단배들이 역풍을 만나거나 조류 때문에 상류로 오르기 힘들 때는 배를 밧줄로 끌어당기는 고딧줄꾼이 필요했다. 고딧줄을 당기는 일은 사공들이 직접 했지만 양산의 물금이나 원동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돈을 받고 배를 끌기도 했다. 부산에서는 돛대에 매단 고딧줄(삼줄로 엮어 만든 굵은 줄)로 양쪽 강둑에서 어깨 걸어 잡아당기며 부르던 ‘고딧줄 소리를 기억하던 연로한 어른들도 세상을 떠나서 소리가 사라져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엄창석 소설가의 ‘새들의 저녁’에 고딧줄이 나온다. 서석림은 솜을 받친 두툼한 두루마기를 입고 뱃머리에 앉았고, 계승은 돛대 밑 배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횡목에 엉덩이를 걸쳤다. “돛을 올릴까요?” “올릴 거 없네. 물이 흐르는 데로 가게 둬.” 사공 방씨는 배 꽁무니에 서서 긴 노를 좌우로 조금씩 틀며 배가 내려가는 물살을 자연스럽게 타도록 했다. 겨울이지만 눈이 많이 내려 수량은 풍부했다. 다행이었다. 수심이 얕으면 배 밑이 솟아오른 강바닥에 걸릴 때가 있었다. 그러면 얼음 같은 강물에 뛰어들어 고딧줄을 당겨야 한다. 배에는 삼으로 엮은 굵은 고딧줄을 준비해 놓았다. 낙동강이 남해와 만나는 곳은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기수역으로 각종 어류가 풍부하게 서식하고 철새의 낙원이었다. 낙동강 하구둑이 만들어짐으로써 이런 장점은 사라졌다. 근래 하구둑을 허물고 바닷물을 유통시켜야 한다는 환경단체의 주장에 따라 일부 시험적으로 바닷물이 들어오게 하였다. 농토에 염분이 스며들면 농사를 망치게 되는 농민들은 강하게 반대하고 있어 하구둑 개방은 쉽지 않다. 양산의 황산베랑길 바위에는 돛단배를 끌어올리던 고딧줄 자국이 여러 군데 생생하게 남아 있다. 배를 통해 소금, 곡식, 생활용품 등을 운반하던 사공들은 배가 노를 젓거나 돛을 이용하여 앞으로 전진할 수 없을 때 배에서 내려 고딧줄을 통해 배를 끌었다. 조선시대 세곡을 운반하던 조운선들은 백성을 부역에 동원하여 배를 끌기도 했다. 황산베랑길 옛길을 복원한다면 이런 이야기를 담은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은 황산베랑길 복원에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필자와 함께 4월 20일 임경대에 꽃무릇을 심고, 황산베랑길에도 심었다. 동래부사 정현덕 공 영세불망비, 경파대 근처에도 심었다. 바위를 살펴보던 영남삿갓은 바위에 박힌 쇠못을 발견하였다. 쇠못의 크기로 보아 나룻배나 작은 배가 쉬어갈 때 밧줄을 매던 곳으로 짐작되었다. 필자가 본 임진강 황포돛배 선착장의 배를 계류시키는 쇠못은 바다의 부두에 있는 것처럼 거대했다. 부산에서 올라가는 소금배는 양산, 삼랑진, 수산, 남지 등을 지나 합천 밤마리와 현풍을 거쳐 대구와 왜관을 차례로 들른 다음 구미 비산나루에 도착하였다. 부산에서 비산나루까지는 열흘쯤 걸렸다고 한다. 이곳에서 장을 보고 물 때가 좋으면 밤에라도 배를 띄워 상주의 낙동진을 거쳐 안동까지도 올라갈 수 있는데, 대개는 비산나루에서 하루를 쉬어가며 묵었다고 한다. 경기도 파주시 임진강 두지리나루에 가면 조선시대 원형을 살려 운항하는 황포돛배가 있다. 필자는 임진강 황포돛배 체험을 위하여 경기도 파주시를 방문하였다. 조선시대 주요 운송수단이었던 황포돛배를 임진강 두지리에서 자장리까지 띄워 투어를 하고 있다. 요금은 9천 원이고 파주시 적성읍 주민에게는 8천 원을 받고 있다. 임진팔경을 가까이서 볼 수 있으며, 80만 년 전에 형성된 임진강 적벽을 볼 수 있어 인기를 끌고 있다. 50년간 민간인 출입이 금지되었던 임진강을 유람할 수 있다. 부산에서 양산시 물금읍 황산공원 나루터까지 운항하는 낙동강 생태탐방선은 교통편 때문에 인기가 별로 없다. 경기도 파주시처럼 양산시 자체로 낙동강에 황포돛배를 제작하여 물금선착장에서 타고 내리게 운항한다면 양산시민이나 외지 관광객에게 큰 관심을 끌 것으로 보인다. 2. 경상감사 영세불망비 명지소금공원으로 이전 필요 경상감사 김상휴 공과 경상감사 정재철 공의 영세불망비가 있는 곳은 구 부산시 강서구 명지파출소 앞의 담장 밑에 바짝 붙어있다. 두 비석은 나란히 있다. 파출소가 다른 곳으로 이전한 후 돌보는 사람이 없어 잡풀이 무성하고 나뭇가지가 비석을 덮고 있다. 필자가 다른 곳을 방문하였다가 고속도로에서 차가 밀려 저녁 늦게 여기에 도착했다. 사진을 찍고 있으니 마을 주민이 나와서 필자에게 부탁을 했다. 현재 비석의 관리상태가 부실하니 바로 앞에 있는 ‘명지소금공원’으로 이전했으면 좋겠다고 강서구청에 요청해주기를 당부했다. 비석을 많은 시민들이 잘 볼 수 있는 널찍한 공원으로 옮겨 잘 관리했으면 좋겠다.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백성들의 세금을 가혹하게 징수하는 것은 민란의 원인이 되기도 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다. 가렴주구를 일삼는 관리들과 아전들은 백성을 수탈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조선시대 동학혁명의 원인을 제공한 고부군수 조병갑은 역사에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얼마 전 갑자기 오른 과중한 부동산 세금 문제 등으로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선거에서 여당이 참패하는 원인의 일부를 제공했다. 경상감사 김상휴 공과 정재철 공은 백성을 사랑하여 세금을 감면해주고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이들의 공을 기리고 후세에 전하는데 소홀함이 없어야 하겠다. 경상감사 김상휴 영세불망비는 경상도 관찰사 김상휴 공이 소금을 굽는 염민들을 위해 선정을 베푼 공을 보답하고자 염민들이 세운 비다. 김상휴 감사는 순조 22년(1822년) 1월 9일 경상감사로 발령받았으며, 순보 23년 12월 10일 공조판서로 전임되었다. 순상국 김상휴 영세불망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개 소금 굽는 곳 염하(鹽下)의 여러 가지 패단은 소금 굽는 백성(鹽民)의 책임자에게 있으므로 소임을 영원히 없앤다. 당초 소임의 폐단은 또한 산창(蒜倉)의 감독에게서 유래하였으므로 감색에게도 엄중히 타일러 이 뒤로부터 일을 시킴에 있어서는 조선(漕船)과 공선(公船)의 사공 및 각 군청의 장무(掌務)와 어금군(御禁軍)이 염민들을 침범하지 말라는 새로 새긴 절 목에 한가지로 따르도록 할 것이다. 또 을유년 절목에 주사군(舟師軍)이 섬 주민을 침해하지 말라는 것과 강 연안의 각 읍에서 배를 잡아 놓는 폐단에 대한 매년의 관문 규칙 또 그 전후에 절목으로 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 바르게 하여 길이 시키도록 할 것이므로 이에 돌에 새긴다.” 영세불망비를 세운 서기 1824년은 순조 24년으로 안동 김씨의 세도가 절정에 달하였으며 삼정이 문란하여 백성들의 세금과 부역으로 인한 고통이 심했다. 그러나 김상휴 공은 선정을 베풀었다. 이 송덕비는 그가 경상감사를 떠난 이듬해에 세워졌으므로 명지 주민들의 자발적 성의가 확인된다. 송덕비의 머리글은 김상휴 관찰사에 대한 고마움을 잘 담고 있다. “어려움을 살펴 덕을 베푸시니 그 은혜 염민까지 미쳤네. 일거에 어려움이 해결되니 이제야 살았네.” 부산광역시 강서구 명지동 영강 마을에 순상국 홍재철(洪在喆) 영세불망비가 있다. 이 비는 경상감사 홍재철 공이 명지 소금 굽는 백성에게 베푼 고마운 선정을 보답하고자 세운 비다. 조선 영조 을축년(1754) 공설 염전을 설치할 때 염전이 많이 줄고 땔감 사정은 더 나빴다. 홍재철(1799~사망년도 불명)은 경상 감사로 부임한 이듬해 신축년(1841) 가을에 백성들이 공염(公鹽)으로 바쳐야 할 소금에 땔감 값을 보태어주었다. 비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비의 앞면에는 ‘순상국 홍공재철 영세불망비(巡相國洪公在喆永世不忘碑)’라는 비제(碑題)와 함께 “삼천 냥의 자금을 출연하시어/ 염민들의 어려움을 구해 주셨네. 천년 백년 후에까지/ 한 조각 비석은 전해 주리라”고 적혀 있고,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영조 을축년에 처음 공염을 설치하였을 때 72개의 솥을 건 염전을 두었는데, 점차 축소되어 37개의 솥만 남았고, 게다가 지금 땔감을 귀하기가 금과 같다. 연례로 공염 3,000석을 바치는데, 한 석의 원가가 한 냥 5전이니 합 4,500냥이고, 그 외 임자년에 정한 한 석의 땔감 값이 5전으로, 합이 1,500냥이지만 거의 만에 하나 정도 채울 뿐이라고 한다. 우리 관찰사께서 남쪽으로 오신 이듬해 신축년 가을에 걷어야 할 소금 1,000석을 한 석당 열 냥으로 땔감 값을 보태어 채워 주되 1,000냥을 먼저 내려 주시며, 춘등염(春等鹽) 2,000석에 땔감 값 2,000냥을 응당 시행할 전례로 만드셨다. 그래서 매년 3,000냥으로 바로잡아 주셨으니, 이전 수백 년 동안 없었던 은혜요, 뒤로 몇백 년 동안 썩지 않을 은택이다. 그러므로 썩지 않을 돌에 새겨 둔다. 숭정 기원 후 주상 8년 신축년 10월에 세우다. 홍재철(1799~?)은 1840년(헌종 6년) 9월부터 1842년(헌종 8년) 4월까지 경상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교리에도 경상 관찰사 홍재철(洪在喆) 영세불망비가 있다. 조세를 경감해 준 홍재철의 선정을 기려 재임 중에 주민들이 세웠다. 3. 부산 명지도 자염 생산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소금은 인류역사와 함께 해왔다. 우리나라 소금 생산기록은 삼국사기, 중국 위지동이전에 고구려, 신라 시대의 소금이 언급되고 있다. 부산시 명지도에서 소금 생산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나온다. ‘김해 도호부에 염소가 두 곳이 있으며, 모두 부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고려말 조선초에는 명지도를 포함한 낙동강 하구 일대에서 소금이 생산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지도에서 염전이 크게 발전한 것은 조선 영조 때 정부가 흉년 구제를 위해 자염(煮鹽)을 제조한 것이 계기였다. 1731년(영조 7년) 경기와 삼남 지방에 큰 흉년이 들자, 박문수는 구휼미를 마련하기 위한 차원에서 국가가 나서서 소금을 생산하는 공염(公鹽) 제도를 명지도에서 시행할 것을 적극 건의하였고, 왕명으로 이를 주관하게 되었다. 그 결과 6개월 만에 공염 1만 8,000석을 얻었고, 이를 팔아 경기도 백성을 구제하는 데 사용하였다고 한다. 소금의 원료에는 암염(巖鹽), 천연 함수(鹹水), 해수(海水)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해수(海水)에서 소금을 생산한다. 바닷물에서 얻는 소금으로는 자염(煮鹽), 천일염(天日鹽)이 있다. 자염은 바닷물의 염도(鹽度)를 높인 뒤에 끓여서 만드는 소금이다. 자염은 화염(火鹽), 전오염(煎熬鹽), 육염(陸鹽)이라 부르기도 한다. 천일염은 해수를 끌어들인 뒤에 바람과 햇볕으로 수분을 점차 증발시켜서 결정시킨 소금이다. 명지도에서 자염을 생산하던 역사적 유래는 현재의 마을 이름으로 남아 있다. 부산시 강서구 대저2동 염막(廉幕)마을은 소금과 연관된 지명이다. 염막은 발을 많이 생산한 발막섬과 염전이 있었던 염밭섬이 합쳐 생겼다. 작지 부락 남쪽 진부선 국도를 따라 송백까지 뻗어 있는 맥도의 끝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마을이 염막1구이다. 자염 생산은 보통 3월에 시작해서 10월에 끝난다. 자염 생산이 가장 활발한 시기는 4~6월이다. 7~8월에는 장마로 소금 작업이 어렵다. 천일염의 생산시기도 비슷하다. 천일염도 5~6월에 가장 많은 생산량을 보인다. 이것은 한반도의 기후가 봄철에 강수량이 적고 증발량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과거 소금의 소비량은 늦가을부터 겨울까지 제일 많았다. 건강에 좋은 자염은 만드는 과정이 힘들고 땔감이 많이 소요되어 이제 없어졌다. 최근 전통적 자염 제조 방식을 통해 소금을 생산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다. 소금배와 세곡을 실은 조운선이 오가던 황산강, 고딧줄 흔적이 남아 있는 바위의 이야기를 잘 기억하고 관광자원으로 활용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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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박사 화요칼럼-양산에서 숯가마터 발견한 영남삿갓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화제리에서 남아 있는 숯가마터 흔적을 발견한 영남삿갓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은 다방면에 재주도 많고, 호기심이 왕성하며, 양산의 향토유적 답사와 발견에도 깊은 열의를 갖고 활동을 하고 있다. 영남삿갓은 방랑시인 김삿갓인 김병연을 흠모하여 삿갓을 쓰고 도사 지팡이를 들고 개량 한복을 입고 다닌다. 시인으로서 시집도 여러 권 자비 출판하여 지인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평소에 양산숲길보전회 답사 때 참석하여 붓글씨로 즉석 시를 지어 회원들에게 증정하여 인기를 끌고 있다. 칠순 회고록도 출판하여 친구, 친지, 이웃들에게 배포하여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영남삿갓은 김삿갓의 고향이자 거주지였던 강원도 영월의 김삿갓 유적지를 가보고 싶어했는데, 필자가 운전하여 소원을 성취하도록 도왔다. 김삿갓 기념관의 동상 옆에 나란히 선 영남삿갓은 차림새도 유사하고 키도 비슷하여 삿갓 칭호를 붙일만 하였다. 김삿갓 묘소에 미리 준비해간 술과 안주를 차려놓고 절을 하고 시도 한 수 지으며 김삿갓을 추모했다. 유적지 식당에 들러 주인에게 즉석 시를 써서 선물하였다. 문화관광해설사 안내소를 방문하여 해설사에게 즉석 시를 증정하고 답례품도 받았다. 영남삿갓은 양산사랑, 고향사랑이 지극하여 행동으로써 향토애를 실천하고 있다. 2019년에는 모교인 화제초등학교 후배들에게 5백만 원이 넘는 장학금을 기부하였다. 원동면 화제리가 고향이어서 임경대 사랑은 유별나다. 임경대를 아끼는 정신이 투철하여 자비로 둘레길을 만들었다. 임경대 밑으로 흐르는 아름다운 폭포는 낭떠러지여서 접근이 불가능하였는데, 이곳에 밧줄, 버드나무 계단을 설치함으로써 폭포 옆으로 접근하여 구경할 수 있게 만들었다. 임경대에서 용화사로 가는 둘레길은 데크 계단이 잘 설치되어 있어 임경대로 갈 때는 기분좋게 내리막길로 갈 수 있는데, 반대로 임경대로 복귀할 때는 계단이 가팔라 노약자나 어린이들은 이용하기가 힘들다. 영남삿갓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자비로 둘레길을 조성하였다. 임경대 폭포 옆으로 내려가 경부선 철도 밑의 수로를 통과하여 황산베랑길로 이어지는 둘레길을 밧줄과 나무 계단으로 멋지게 만들었다. 경부선 철도 하부의 수로는 물이 흘러 미끄러운데,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도록 블록과 시멘트를 사 와서 통로를 만들었다. 영남삿갓은 임경대를 아름답게 가꾸어 일에도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꽃무릇을 대량 식재하여 매년 9월 전후하여 새빨간 꽃이 피어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양산숲길보전회 임경대 답사 때 회원들도 동참하여 꽃무릇을 심었다. 앞으로도 꽃무릇을 계속 심을 계획이다. 참나리도 씨를 여러 군데 뿌렸는데, 얼마 전에 싹이 올라왔다. 임경대 입구에 키가 큰 억새를 여러 그루 옮겨심었다. 구덩이를 팔 때 포크레인 기사를 불러 돈 주고 작업하였다. 영남삿갓은 향토 유적 보전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경남지역의 대학교수와 협조하여 사투리 보존에도 애를 쓰고 있다. 황산베랑길 복원에도 열정을 쏟고 있는데, 혼자 힘으로 잡풀과 덩굴을 제거하고 나무를 이용한 간이 다리도 설치하였다. 양산시청 문화관광과에 황산베랑길 복원 협조 요청을 했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답변을 듣고, 좀 더 빠른 복원을 위해 요즘 방문객 서명을 받는 일에 나서고 있다. 필자와 영남삿갓은 향토 유적을 답사하기 위해 자주 함께 다니는데, 화제리에 숯가마터 흔적을 발견하기 위해 지난 3월 5일 선암산 자락으로 떠났다. 발견에 대해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산자락을 헤매고 다니다가 기어코 발견하여 답사목적을 달성하였다. 양산시나 문화원에서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는데, 개인적 노력으로 숯가마터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숯가마터 흔적은 산속에서 이미 사라져 육안으로는 볼 수 없었다. 영남삿갓은 직관력을 발휘하여 산에 쌓인 낙엽을 자주 들춰 치우면서 마치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기분으로 탐색을 해나갔다. 오랫동안 여기저기 수색하다가 드디어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이 검은 숯조각을 발견하였다. 힘들게 등산하여 당초 목표하였던 숯가마를 발견할 수 있어 매우 기분이 좋았다. 영남삿갓의 회고에 의하면 과거에 화제리에 숯가마가 여러 개 있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의 산림녹화 정책에 의해 더이상 참나무를 벌목하여 숯을 만들 수 없는 환경이 되어 자연히 숯가마는 없어졌다고 하였다. 1970년대 초반까지는 땔감으로 산의 나무를 베었기에 벌거숭이 민둥산이 많았다. 숯을 구워서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들도 다른 직업을 선택해야만 했다. 진통은 있었지만 산에 나무가 울창해져 홍수와 가뭄도 방지하고, 우거진 숲을 등산, 산책로, 목재로 이용하면서 숲의 부가가치를 높여 자연히 선진국이 되는데 일조하였다. 2. 참숯의 효능 1) 방부 효과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당하리에서 발견됐던 430년 전 모자 미라가 긴 잠에서 깨어나 일반에 공개되었다. 2003년 11월 7일부터 고려대학교 박물관 2층 전시실에서 22일까지 ‘파평 윤씨 모자 미라 및 특별유물전’이 열려 미라와 유물들을 전시하였다. 1566년 매장된 미라는 수의 홑바지 허리끈에 ‘병인윤시월’이라는 한글 묵서가 적혀 있어 정확한 사망연대를 알 수 있고 부장된 화려한 색상의 복식이 쏟아져 나와 언론과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파평 윤씨 모자(母子) 미라’는 출산 중 자궁 파열로 말미암은 과다출혈로 사망한 것인데, 남아로 밝혀진 태아도 자궁에서 미라 상태로 남아 있었기에 ‘파평 윤씨 모자(母子) 미라’로 명명하였다. 목관을 에워싸고 있던 회곽이 공기의 유입을 완전히 차단하여 미라가 되었다. 시신 위로는 천연 방부제인 숯이 대량으로 쌓여 있었다. 2100년 전 서한 시대 마왕퇴(馬王堆) 귀부으로서 대후인 이창(利倉)의 부인, 50세 가량의 신추(辛追) 무덤이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완벽한 미라로 발굴되었다. 1972년 중국 후난성 창사시 교외의 한 구릉지에서 발굴되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사인을 알아내려고 해부했는데, 위에서 참외 씨 170여 개가 나왔고, 몇 개를 심었더니 자라났다고 한다. 관 주변에 장식품을 넣은 뒤 약 5톤에 이르는 숯을 빼곡하게 채워 넣었고 그 위에 흙을 덮고 봉분을 쌓았다. 숯이 습기를 흡수하고 음이온을 발산하여 방부 역할을 했기 때문에 시신과 유물, 책 등이 완벽하게 보존되었던것 이다. 2) 여과와 정화 효과 병원에서 사용하는 링거병에 든 영양수액 포도당은 숯으로 여과한 것이다. 수용액을 다루는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나쁜 균이 들어갈 수 있는데, 이를 완벽하게 여과하기 위해 숯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울산시에서는 2005년부터 야자 숯을 이용한 태화강 살리기 운동을 전개하여 성공하였다. 시작할 때 샛강의 일부 지역은 수질 등급이 5급수로 오염 지역이었지만 야자 숯 1톤을 샛강 곳곳에 투입한 결과, 안정적인 2등급 수질을 유지하고 있다. 야자열매를 1,200℃ 이상으로 구우면 참숯의 100배나 되는 정화능력이 생긴다. 3) 습도 조절 효과 옛날 한옥을 지을 때 밑에 마루를 대어 지면과 건물 내부 공간을 띄웠다. 땅에서 나오는 습도를 차단하기 위한 건축방법이었다. 또한 건물 아래의 땅에 숯을 묻어 습도조절을 하였다. 2007년 6월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하는 장경판전 건물도 바닥에 숯을 묻었다. 불국사, 석굴암, 금산사 등 여러 사찰도 건물을 지을 때 같은 방식을 사용했다. 집 안 곳곳에 숯을 놓아두면 습도를 빨아들여 한결 쾌적한 실내에서 생활할 수 있다. 숯은 건조한 스펀지가 물을 깨끗이 흡착하듯 주위의 습도를 줄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숯이 무조건 습기를 빨아들이지는 않는다. 만약 너무 건조하면 숯 내부에 있는 수분을 방출하여 자연스럽게 습도를 조절해 준다. 장롱이나 계단 뒷면, 싱크대 밑에 숯을 두면 좋다. 4) 음이온 발생 효과 가전제품 주변에 숯을 두면 음이온이 발생하여 인체에 해로운 양이온과 만나 중화된다. 숯이 양이온을 줄여 공기를 균형 있게 만들어 주면 피로도 감소하고 기분도 상쾌해진다. 숯은 탄소 덩어리이므로 탄소가 발생시키는 음이온을 무한정으로 받을 수 있다. 연구에 의하면, 탄소가 음이온을 모두 방전하는 데4천 5백만 년이 걸린다니 가히 놀랄 만한 생명력이라 할 수있다. 전자파 차단에는 백탄이 효과가 있다. 5) 원적외선 방사 효과 숯은 원적외선이 많이 나와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되는 세균을 없애고, 모세혈관을 확장시켜 혈액순환과 세포조직 생성에 도움을 준다. 또 공명 효과가 강해 세포를 구성하는 수분과 단백질 분자에 닿으면 세포를 미세하게 흔들어줌으로써 세포조직을 활성화하여 노화 방지, 신진대사 촉진, 만성피로 회복에 좋고, 각종 성인병 예방에 효과가 있다. 발한 작용을 촉진하며, 통증 완화, 중금속 제거, 탈취, 곰팡이 번식 방지 등의 효과도 있다. 6) 라돈 차단 효과 라돈은 방사성 물질로, 인체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 미국 아이오와 대학의 연구에 의하면 가정에서 라돈에 오랫동안 노출되면 폐암 위험이 커진다고 하였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폐암 환자 10명 중 1명은 라돈 가스로 인해 폐암에 걸렸으며, 미국에서는 폐암을 유발하는 요인 중 흡연 다음으로 라돈 가스를 꼽고 있다. 새집증후군 등의 인체에 해로운 물질, 라돈은 백탄을 이용하여 제거할 수 있다. 7) 냄새 제거 효과 숯을 냉장고에 넣어두면 다양한 음식물의 냄새를 제거할 수 있다. 옷장, 신발장 등에 넣어 상쾌함을 유지할 수 있다. 밥이 약간 탔을 때 밥에 숯을 넣으면 탄 냄새가 없어진다. 돼지, 닭 등을 키우는 축사의 분뇨 냄새를 제거하는 데에도 숯이 많이 사용된다. 8) 질병 예방 및 개선 효과 숯을 가루 내어 먹으면 설사가 멈추고 장의 기능을 좋아진다. 동의보감에 여러 가지 질병에 숯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의약품으로 인정된 것은 드물지만, 일본이나 미국에서는 활성탄을 의약품으로 인정하고 있다. 숯은 우선 위장에 매우 뛰어난 효능을 나타내고, 간 기능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고, 약물 중독의 해독이나 변비 개선, 숙변 제거 등에도 효과가 있다. 숯가루는 다이아몬드와 같은 구조로 아주 단단한 물질이기에 입자가 아주 곱지 않으면 날카로운 칼처럼 오히려 내부 장기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적송 숯은 분쇄하면 입자가 둥글둥글한 원형으로 먹어도 된다. 일반 참나무숯은 입자가 유리 조각같이 매우 날카로워 먹을 수 없다. 3. 진천군 참숯전시관과 참숯가마 방문 농림수산식품부가 50억 원(국비 50%, 도비1 5%, 군비 35%)을 투입하여 충북 진천군 백곡면에 참숯 테마공원을 조성하여 이곳은 관광메카로 탈바꿈하였다. 백곡면 사송리 일원 551㎡ 면적에 참숯전시관을 조성하였다, 참숯전시관 1층은 숯부작 작품전시장, 2층은 숯역산관, 숯의 길 체험관 등이 있다. 백곡저수지 생태체험쉼터, 농촌체험쉼터 등도 설치하여 2014년 초에 준공되었다. 이곳에는 물안뜰건강체험관, 물안뜰 체험관도 있다. 숙박시설인 펜션도 있어 체험과 숙박이 가능하다. 참숯전시관 앞에 백곡천에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어 산책하기 편하다. 백곡천과 저수지에서 낚시도 가능하다. 백곡면은 전국 참숯(흑탄) 생산량의 70%가 생산되는 지역이다. 백곡 참숯의 홍보를 통한 명품화가 이뤄지면 주민소득 증대와 지역경제 활성화가 기대된다. 진천군에서 백곡면 사송리 백곡저수지 주변에 조성한 참숯테마공원 입장료는 이용자 편의와 지역 관광 활성화를 위해 받지 않는다. 체험시설 또는 전시관 이용자 체험, 교육 프로그램 운용에 필요한 재료 구매와 시설 이용 대가는 실비를 받는다 필자는 양산시 원동면 화제리에서 영남삿갓과 동행하여 참숯가마터를 양산에서 최초로 발견하였다. 참숯가마터 주변에는 참나무가 많아 숯을 굽던 옛날 모습을 유추할 수 있었다. 필자는 칼럼을 쓰기 위해 전국에서 참숯의 주산지로 이름난 진천군을 방문하여 진천군에서 운영하는 참숯전시관, 백곡참숯, 대명참숯, 진천참숯 등을 방문하였다. 참숯전시관은 잘 되어 있었는데, 앞으로 시설을 확장하여 대규모 참숯 테마파크를 조성한다고 하였다. 백곡참숯을 방문하여 정영화 대표를 만나 숯에 관한 궁금증을 해소하였다. 정영화 대표는 친절하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감사드리는 바이다. 3년 전에 기자들이 자주 찾아와 환경오염 문제를 제기하여 설명하느라 애를 먹었다고 하였다. 참숯가마는 환경에 해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참숯 불가마에서 찜질을 하면 건강에 이로운데, 치매 예방효과도 있다고 하였다. 높은 온도에서 땀 흘리고 혈관이 확장되면 치매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참숯가마에서 연기가 나오지만 굴뚝 근처에 있는 나무들은 시들지 않고 멀쩡하였다. 참숯연기에서 나오는 목초액은 굴뚝온도가 80~150℃ 일 때 나오는 ‘황색 연기’로부터 채취한 것이 제일 유용하고 독성 물질이 적다고 한다. 목초액은 채취 후 수개월에서 1년 정도 숙성 및 정취를 한 후 타르 성분을 충분히 분리한 후 사용한다. 목초액은 농약 대신 이용하며, 축산업에서 분뇨 냄새나 악취를 제거할 때, 가축의 사료로 이용하기도 한다. 정장제(整腸劑), 정로환(正露丸) 등 의약품의 원료로 사용된다. 무좀, 아토피 피부염에 효과가 있다. 그 밖에 원예, 버섯재배, 건강음료, 탈취제 등으로 이용된다.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 덕분에 화제리의 옛날 숯가마터가 양산에서 최초로 발견되었다. 지상에 남아 있는 숯가마 시설은 없으며, 깊은 낙엽 더미 속에 숯 조각들이 남아 있었다. 낙엽을 치우고 간신히 숯가마터를 발견한 것은 순전히 영남삿갓의 열정 때문이다. 양산의 향토유적을 복원하지는 못해도 기록으로는 남겨두어야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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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박사 화요칼럼/최백호 가수가 부른 ‘영일만 친구’ 모델 홍수진 시인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원동면 원리 매화담 카페 옆에 있는 홍수진 시인 생가터 양산시 원동면 원리 출신 홍수진 시인의 시비가 2008년 11월 8일 매화공원에 세워졌다. 홍수진 시인은 1949년 3월 5일 양산시 원동면 원리 927번지에서 출생하였다. 한창 사회 활동할 나이에 위암으로 투병하다가 타계하여 아쉬움을 남겼다. 시인, 문학가, 예술가들은 술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원동초등학교를 졸업하는 등 유년시절을 양산에서 보냈다. 부산에서 대신중, 동성고를 나온 후 서라벌예술대 문예창작과를 중퇴하였다. 홍수진 시비를 건립하는데 앞장선 박말태 전 양산시의원을 만나서 자세한 전말을 들어보았다. 박말태 전 시의원은 4선 의원으로서 양산시와 원동면 발전에 뚜렷한 공적을 남겼다. 특히 필자가 박 전 시의원에 주목한 것은 정치인으로서 양산의 역사, 문화, 관광에 깊은 관심을 갖고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필자가 2020년 5월 19일에 쓴 ‘서종철 육군참모총장 덕분에 개설된 배태고개 도로’는 조회수가 2백만이 넘어 독자들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바 있었다. 원동면 영포리에서 배내골로 넘어가는 배태고개는 양산시 동면 출신의 서종철 육군참모총장 덕분에 개설되어 차량이 쉽게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서종철 참모총장이 고광도 군수사령관에게 지원 요청을 하고, 최갑동 공병단장(대령)이 군수사 1203 건설공병단을 투입하여 안전한 도로를 개설하였다. 군의 대민 지원 공적을 자손만대에 기리기 위해 배태고개 마루에 2014년 5월에 양산시에서 공적비를 세웠다. 원래 공적비가 있었지만 마모되어 새롭게 건립하고 주차장과 공원을 조성하였는데, 박말태 전 시의원의 적극적인 관심 덕분이었다. 박 전 의원은 원동면의 가로수 식재와 관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1022번 지방도, 69호선 국지도에 벚나무, 조팝나무를 가로수로 심었으며, 화제천, 원동천 둑방에 조팝나무를 심었다. 이제는 벚꽃과 조팝나무꽃이 함께 어우러져 관광명소가 되었다. 원동면사무소 옆에 있는 매화담 카페에서 박 전 시의원을 만나 자세한 얘기를 들었다. 홍수진 시인의 생가터가 바로 매화담 카페 옆에 있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홍수진 시인과 원동초등학교 35회 동창인 최봉열 씨를 소개해주었다. 최봉열 씨는 홍시인 이웃집에 살았다고 한다. 그를 통해 홍수진 시인의 초등학교 시절 추억을 들을 수 있었다. 홍시인의 부친은 어릴 적에 사고로 일찍 돌아가셔서 집안 형편이 어려웠다고 알려주었다. 홍시인의 고모, 삼촌이 있었고, 숙모는 교사로 근무하였다고 하였다. 홍시인은 원동초등학교 시절 공부도 잘 하였고, 글짓기 뿐만 아니라 그림도 잘 그렸다고 하였다. 1967년 진주 개천예술제 백일장 일반부에서 ‘소금’으로 장원을 하여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박 전 의원은 홍시인을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하였으며, 형님이 홍시인을 잘 안다고 하였다. 근처에 원리마을의 당집과 당산나무가 있어 물어보았더니 박 전 시원이 예산을 확보하여 건립하였다고 하였다. 홍시인의 생가터는 매화담 카페 근처에 있었다. ‘옛방앗간’ 안내판이 붙어 있는 자리다. 현재는 창고로 이용되고 있다. 생가 왼쪽 편에는 일제 강점기 때 ‘옛양조장’터라는 안내판이 있었다. 생가터 앞에서 박말태 전 시의원과 최봉열 씨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상세하게 안내해준 두 분에게 감사드린다. 홍수진 시인의 생가터라는 안내판을 새로 설치하여 관광객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 2. 매화공원의 홍수진 시비 건립에 앞장선 박말태 전 양산시의원 원동면 원리 산106-1번지의 매화공원에 홍수진 시비가 서있다. 홍수진 시비는 박말태 전 시의원이 추진위원장을 맡아 앞장서서 건립하였다. 2008년 11월 8일 10시 제막식에 오근섭 양산시장이 참석하여 축사를 하였다. 오시장은 양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시를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을 전하게 되어 기쁘다고 인사말을 하였다. 박말태 시의원은 시비 건립에 적극 참여해준 양산과 울산의 예술계, 언론계 인사들에게 감사드린다고 축사를 하였다. 울산에서는 이희석 울산예총회장, 조돈만 울산문인협회 회장, 김복만 울산대 교수, 김병길 울산매일신문 편집이사, 화가 홍맹곤, 심수구, 정기홍, 문인 최이락, 연극인 박용하, 무용가 현숙희 등 30여 명의 울산예술인들과 추진위원들이 참석하여 고인을 추모했다. 인기가수인 최백호 씨가 참석하여 그의 히트곡인 ‘영일만 친구’ 모델이 바로 친구인 홍수진 시인이라고 하여 참석자들에게 감동을 안겨주었다. 고 홍수진 시인의 절친이었던 최백호 가수는 친구를 그리며 ‘영일만 친구를 불러 참석자들의 박수를 받았다. “순수한 영혼에다 천재성과 열정까지 갖추었던 친구였으니 그의 빈 자리가 여태 채워지지 않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욱 그리워지는 친구이다”라고 홍시인을 추모하였다. 홍수진 시인은 자신이 태어난 원리마을에 있는 철도역을 주제로 ’경부선 원동역‘이라는 멋진 시를 남겼다. 이 시에 나오는 1969년은 홍시인이 만 20세 때이다. 시 구절은 먼 훗날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예감한 듯하다. 친구와의 헤어짐은 부정적 뉘앙스의 낱말이 자주 나온다. 헤어짐, 무거운 짐, 영혼, 저주, 이승의 끝, 아득할수록, 아픔뿐, 눈물 등의 단어는 이로부터 28년 후의 죽음을 일찍 예감한 것일까? 시의 마지막 연은 친구를 빗대 자신의 운명을 놀랍도록 예언하고 있다. 마치 독자가 “그대 떠난 후 남아있는 것, 시 한 줄의 아픔뿐,”이라고 추모할 때 홍시인은 독자들에게 스스로 답을 하고 있다. “너무 늦은 눈물로 내 다시 찾아오마”. 홍시인의 자문자답은 마치 자신이 독자와 대화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의 직관력, 예지력이 번득이는 천재성이 돋보인다. 다음은 홍시인의 ’경부선 원동역‘이다. 우리는 그때 부산역에서 같이 떠나,/ 완행열차가 서는 곳,/ 경부선 원동역에서 헤어졌다./ 1969년 // 무거운 짐 진 그대 영혼 멀리 떠나거라/ 우리 헤어질 때/ 빈들에는 어둠이 더욱 넓게 번지고/ 강물도 고여 멎었다. // 소리없는 강물처럼 행렬 속으로 사라지던 그대 뱉는 침 / 저주처럼 가라고 말하지만/ 역사에는 빛이 고이고/흐린 불빛은 나의 절망이었지 //떠나가는 것에 대해/ 다 시는 추억하지 않으마. 언약처럼/ 떠나거라 떠나는 길/ 이승의 끝이랴 // 휘어진 길 돌아서 가는 기치의 불빛/ 삼랑진, 낙동강변으로/ 이어진 길/ 추억이 아득할수록 그날의 불빛은 살아/ 차라리 따스하고 아름답다 // 그대 떠난 후 남아있는 것/ 시 한 줄의 아픔뿐,/ 너무 늦은 눈물로 내 다시 찾아오마/. 홍수진 시비가 있는 매화공원은 양산시 원동면 원리 산106-1에 있다. 순매원 입구에 있어 찾기도 쉽다. 낙동강과 경부선철도, 매화명소 순매원이 잘 보이는 명당자리에 시비가 있다. 매화공원은 정자가 있어 쉼터로 이용되고 있으며, 앞에는 화장실도 있으므로 가족단위 나들이 하기 좋은 곳이다. 매화공원에는 2014년 3월 30일, 4월 6일에 방영된 KBS 2TV 인기 프로그램인 1박 2일 촬영지(원동역-순매원, 영포리) 안내판도 있다. 매화공원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은 아주 좋은데, 마치 바다처럼 시원하게 펼쳐진 낙동강, 섬, 경부선 철도가 잘 보인다. 매화꽃이 피는 2월 중순부터 3월 중순까지, 그리고 벚꽃이 피는 3월 말까지 관광객이 몰려들어 주말에는 주차하기 어렵다. 3. 최백호 가수의 히트곡 ’영일만 친구‘ 모델인 홍수진 시인 최백호 가수의 젊은 시절부터 친한 친구였던 홍수진 시인이 히트곡 ’영일만 친구‘의 실제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다. 최백호는 ’영일만 친구‘ 탄생의 비화에 대하여 1978년 당시 포항에서 음악다방과 인테리어 사업을 하던 시인이며 부산지역의 인기 DJ였던 홍수진이란 친구, 소설가인 그의 친구 한 사람, 최백호 가수 셋이 포항 어느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만든 노래라고 밝힌 바 있다. 대화를 통해 세상을 염려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친구의 처지를 보고, 악상을 떠올려 동시대 젊은이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기 위해 노래를 만들었다고 한다. 최백호 가수는 젊었던 시절엔 둥둥거리는 반주가 맘에 안 들어 그 노래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들며 ’영일만 친구‘ 노래가 그의 삶에 큰 힘을 주었음을 깨닫고 열심히 부르고 다닌다고 말하였다. 그 노래를 부를 때마다 오래전 세상을 떠나 친구 홍수진의 모습이 떠오른다고 회고하였다. ’영일만 친구‘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바닷가에서 오두막집을 짓고/ 사는 어릴 적 내 친구/ 푸른파도 마시며 넓은 바다의 아침을 맞는다/ 누가 뭐래도 나의 친구는 바다가 고향이란다/ 갈매기 나래 위에 시를 적어 띄우는/ 젊은 날 뛰는 가슴 안고/ 수평선까지 달려나가는 돛을 높이 올리자/ 거친 바다를 달려라 영일만 친구야/. 경북 포항시는 2012년 7월 농특산물 공동브랜드로 ‘영일만 친구’를 확정하고 가수 최백호씨가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는 노래인 ‘영일만 친구’의 활용이 필요하게 되었다. 돈을 지불해야 하는 저작권과 상표사용 때문에 고민하였다. 공공기관은 예산 관계로 저작권 지출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항시 농업기술센터소장의 이런 걱정은 기우였다. 포항시 농업기술센터는 (사)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저작물 ‘영일만 친구’의 사용을 신청했고 협회로부터 사용료 산정에 앞서 저작 인격권자인 최백호씨에게 ‘저작 인격권료’를 지불함으로써 저작물 사용동의를 우선 얻어야 음악을 사용할 수 있다는 안내를 받았다. 나중에 최백호씨가 포항시 관련 농식품유통과로 보내온 저작물 사용 동의서에는 ‘편안히 사용하십시오’라는 글귀와 함께 지불할 인격권료는 ‘0원’으로 적혀 있었다. 최백호 가수는 평소에 포항시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왔기에 감사하다며 무료 사용을 허락하였다. 1994년 포항시 호미곶 등대박물관 옆에 ‘영일노래비’ 가 세워졌고 ‘영일군민의 노래’, 최백호의 ‘영일만 친구’노래가 새겨져 있다. 필자는 호미곶을 방문하여 ‘영일노래비’를 사진 찍고, 영일만을 보기 위해 연오랑세오녀 테마공원을 찾아갔다. 이곳은 포스코와 영일만이 잘 보였다. 영일만을 직접 보니 규모가 엄청나게 커 놀랐다. 4. 홍수진 시인의 일생 홍수진 시인(1949년~1997년)은 원동면에서 태어났지만 부산에서 중고교를 나오고 젊어서는 부산, 포항에서 활동하였다. 스물 일곱에 결혼하여 아들 둘을 두었다. 그는 포항에서 ‘해원’ 시동인과 극단 ‘은하극장’ 단원으로 활동하고, 최백호 가수와 친하게 지내며 노래 ‘영일만 친구’의 모델이 되었다. 그러나 주 활동 무대는 울산이었다. 1977년 12월 울산 중구 중앙시장길 8(옥교동) ‘사계절다방’에서 시집 『들풀』 (홍수진, 이준웅 2인 시집) 발간 및 시화전을 열었다. 1980년 울산MBC에 PD로 입사하여 울산에 정착하였으며 그해 8월 중구 성남동 ‘명다방’에서 2인 시 작품집(홍수진, 김종경) 발간 및 시화전을 열었다. 방송 활동뿐만 아니라 음악, 국악, 미술, 춤, 연극 등 다방면에서 창의적 예술 감각을 발휘하여 별명이 홍박(홍박사)이었다. 또한 ‘만능예술인’, ‘울산문화의 파수꾼’, ‘진정한 탤런트’ 등으로 불리었다. 방송인으로 말도잘 하고, 글도 잘 쓰는 천부적 재능을 지닌 전천후 예술가로 활동하였다. 1981년 최장수 시 동인이라 할 수 있는 『변방』의 창간 동인으로 참여하였다. 1981년 12월 지역문학의 새로운 모색과 활로를 개척하기 위한, 변방문학의 수문장 역할을 하자는 뜻에서 「시동인 변방」을 창립했다. 창간호의 동인은 박종해, 최일성, 김종경, 신춘희, 문영, 이충호, 김종철 홍수진 등 8인이었다. 울산문인협회에 소속되어 1982년부터 1996년까지 『변방』 1집부터 12집까지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하였다. 시집 『오늘밤 내 노래는 잠들지 않는다』, 『민요기행』, 『변방의 풀 하나가』, 『헤드폰의 소리』, 『끈 』 등의 작품이 있다. 1998년 유고 문화 칼럼집 ‘변방문화와 문화의 변방’이 출간됐다. 무용가 홍신자, 연극인 손숙, 화가 김인환, 사진가 조문호, 가수 최백호, 엄인호 등과 교우하며 지방과 중앙의 예술적 거리감을 좁혔고 문화 비평 형태의 칼럼과 에세이를 지역 신문에 발표하면서 예술 장르 간의 벽을 허물었다. 1997년 울산문인협회장을 맡아 활동하던 중 위암으로 그해 9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울산광역시 남구 옥동 산770-3번지 울산공원묘원에 있다. 홍수진 시인의 생전에 수집한 LP판 3천 장은 원동의 고향 후배인 이상국 씨가 지인을 통해 물려받았다고 한다. 홍수진 시인의 시비는 박말태 전 양산시의원이 앞장서 건립하였으나 양산시민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순매원 앞을 지나갈 때, 또는 매화꽃, 벚꽃 피는 봄에 매화공원에 들러 시도 감상하고 기념사진을 찍으면 좋다. 요즘 둘레길 걷기가 유행인데, 매화공원, 순매원, 녹색사진 촬영명소, 원동역, 원리마을 벽화, 매화담 카페, 홍수진 생가터 등을 걷는 코스를 추천하고자 한다. 홍수진 시인의 생가터에도 안내판을 세워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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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박사 화요칼럼,매화정원을 지닌 힐링의 명소 신흥사1. 신흥사의 역사와 전통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양산시 원동면 영포리 268에 있는 전통사찰 제17호인 신흥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인 통도사의 말사다. 보물인 대광전의 고색창연한 건물과 벽화, 중창불사를 통해 새로 건립된 설법전, 원통전 등의 전각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사찰이다. 풍수지리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의 눈으로 봐도 수려한 산세가 사찰을 아늑하게 감싸고 있는 명당에 자리 잡고 있다. 사찰 앞으로 영포천의 맑은 물이 흐르고, 대광전 뒤로 나지막한 산이 둘러싼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형세다. 주변의 산은 높은 산이 보이나 험악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유순한 느낌이 든다. 일주문에는 ‘축천산신흥사’라 적혀 있는데, 멀리 떨어진 동쪽의 산 위에 풍력발전기가 보이는 것이 옥의 티다. 신흥사를 방문할 때마다 쳐다봐도 풍력발전기가 돌아가지 않는다. 전통사찰에서 보이는 산 위에 효율성이 낮은 풍력발전기를 세우는 발상은 잘못된 것이다. 천왕문 앞의 영포천에 놓인 웅장한 석교인 천왕교에서 신흥사를 바라보면 커다란 돌축대와 아름다운 돌담장이 잘 보인다. 축대를 쌓아서 높은 곳에 전각을 건립하였기에 영포천의 물이 홍수로 범람하여도 사찰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도록 설계하였다. 신흥사는 선조 15년(1582년) 성순(性淳)이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연혁이라고 한다. 그 이전의 연혁은 확실하지 않으나 통일신라시대에는 어느 정도 가람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신흥사는 임진왜란 당시 승군이 주둔하였던 거점으로 역할을 하면서 전각 대부분이 불타고 대광전만 남았다고 한다. 영조 33년(1757년)에서 영조 41년(1765년) 사이에제 작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신흥사의 존재에 관한 기록이 있어 그 사이에 중건되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여지도서에 신흥사는 양산군의 서쪽 육십리 이천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지도서는 1757년(영조 33)부터 1765년(영조 41)까지 펴낸 것을 합한 것으로 295개의 읍지와 17개의 영지(營誌), 1개의 진지(鎭誌)가 포함되어 있다. 55책. 필사본으로 1973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영인, 간행하였다. 이 책은 간행된 지 270여 년이나 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다시 고치고 그동안 달라진 내용을 싣기 위해서 편찬되었다. 1757년 홍양한(洪良漢)의 건의로 왕명에 따라 홍문관에서 각읍의 읍지를 수집하여 간행하였다. 각 읍지의 첫머리에 채색지도가 실려 있고 거리와 방위 등이 정확한 대축척지도가 덧붙여져 18세기 중엽 지방사회의 실제 모습을 아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 이후에도 철종 5년(1854년)에 응향각을 건립하였으나 현존하지 않으며, 20세기 초에는 후불탱을 조성하는 등 불사를 이어왔으나 사세가 기울어 대부분의 현재 가람은 1983년부터 영규(靈珪) 스님에 의해 중창되었다. 동운 영규 스님은 통도사로 출가한 후 신흥사 주지로 부임하여 원력을 세우고 중창불사에 착수하여 오늘날의 대규모 가람을 이룩하였다. 영규 스님은 현재 신흥사 조실로 있으며, 주지는 해동 호법 스님이 맡고 있다. 정덕유 윤은선 부부의 소개로 필자가 방문하여 주지 스님을 친견하고, 조실 스님께 인사를 하였다. 1995년 신흥사에 부임한 호법 스님은 그동안의 중창불사의 역사가 담긴 스크랩북을 보여주며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주지 스님이 제공하는 귀한 차를 마시며 국사당, 중창불사에 대해 궁금한 사항을 물어보았다. 처음 시작할 때는 대광전과 작은 요사채만 있었다고 하였다.신흥사 가람의 배치는 사찰 초입에 일주문이 있으며, 그 옆에 국사당이 있다. 사천왕이 있는 천왕문을 통해 경내에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펼쳐진다. 가람의 중심에는 주불전인 대광전이 있고, 대광전 왼쪽에 응진전, 오른쪽에 향로전, 뒤쪽에는 산신각, 동쪽으로는 원통전, 지장전, 설법전, 삼성각, 서쪽에는 현풍루, 범종각, 화엄전 등이 있다. 엄청난 규모의 중창불사를 일으킨 두 분 스님께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신흥사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아름다운 절로 필자가 자주 방문하며 좋아하는 사찰이다. 절의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어 부처님께 참배하고 조용히 전각을 거닐며 사색하기에 좋다. 영규 스님과 호법 스님이 노력한 중창불사를 통해 많은 전각을 건립하여 전통사찰의 규모를 갖추었다. 사찰 주변에 민가도 없고 대자연 속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고 있어 힐링하기에 딱 알맞은 명소다. 2. 신흥사 보물 신흥사의 중심 법당인 대광전은 보물 제1120호로 온 세상에 광명을 비추는 비로자나불을 봉안한 곳이다. 1988년 대광전을 부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순치 십사년(順治 十四年)이라는 상량문이 발견되어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효종 8년(1657년)에 중건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건물의 구조는 앞면 3간, 옆면 3간의 규모로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사람 인(人) 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의 처마를 받치기 위한 공포는 다포식으로 화려하게 꾸몄다. 대광전은 조선시대 중기에 지어진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건축기법에서 조선 전기의 특징이 강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특히 건물 좌우 벽면과 앞뒤 포벽의 안과 밖에는 불상, 신장상, 꽃 등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대부분 17~18세기에 조성된 것이며, 필치와 화풍이 유려하여 조선시대 후기불화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또한 지금은 많이 퇴색되었으나 건물 내부의 단청도 색채나 문양 수법이 매우 뛰어나다. 1992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신흥사 대광전의 벽화는 건물의 내외벽과 포벽, 건물 내부의 대량(大樑 : 작은 들보의 하중을 받기 위하여 기둥과 기둥 사이에 건너지른 큰 들보)과 고주(高柱 : 안둘렛간을 감싸고 있는 기둥)에 그려진 것을 포함하면 총 70여 점에 이른다. 그중에서도 건물 내벽의 벽화는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가득 채워져 있어 그 위용을 느낄 수 있다. 현재 후불탱 뒤에서는 탱화의 초안도가 발견되었다. 벽화는 보물 제1757호로 지정되었다. 절의 일주문에는 축천산신흥사((鷲遷山新興寺)라고 현판이 붙어있는데, 글씨는 통도사 주지 월하 스님이 썼다고 한다. 신흥사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이 집결하여 왜군에 항거한 곳으로 왜군의 공격으로 절이 불타버리고 말았다. 신흥사는 단순한 전통 가람이 아니라 호국불교의 혼이 서린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지 공납 때문에 신흥사 스님들이 고통을 겪기도 했다. 신흥사가 위치한 영포리, 어영마을 등에 닥나무를 심어 한지를 만들었다. 조선시대에 많은 종이가 필요하자 원료인 닥나무 재배를 백성들에게 권장하고 지방수령들에게 잘 관리하도록 하였다. 종이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지방관청, 사찰, 민간에 공납이나 진상이라는 명목으로 종이 상납을 배정하였다. 승려들은 지나친 종이 공납 강요에 시달리다가 견디지 못하고 절을 폐하고 도망치는 경우도 있었다. 3. 매화꽃으로 단장한 아름다운 꽃절 신흥사 신흥사가 1년 중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순간은 매화꽃이 피는 봄이라 할 수 있다. 신흥사 건너편 언덕은 사찰 소유의 매화농장으로 형형색색의 매화꽃이 피어나 서로의 맵시를 자랑한다. 사찰이 위치한 영포리 마을 전체가 매화농장으로 배내골로 향하는 69호선 국지도 좌우의 야트막한 야산에 온통 매화꽃이 만발하여 산골짜기 전체에 매화향이 그윽하다. 영포리는 원동매화축제가 시작된 곳으로 매년 봄이면 관광객이 몰려 차량이 정체되고 주차난이 심화된다. 경부선 철마가 달리는 낙동강변의 순매원 근처가 매화꽃 명소로 잘 알려져 원동면 원리에서도 매화축제가 열린다. 영포리, 장선리 등은 농림부에서 주관하는 배내골권역 농촌마을 종합개발사업에 2007년 선정되어 2008년부터 2012년까지 7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원동면 영 포리에 쌍포매실다목적광장과 주차장을 조성하여 매화 축제를 개최할 수 있는 기반 시설을 마련하였다. 원동매화축제가 열리는 기간에 신흥사에서도 어린이 대상으로 매화꽃과 사찰풍경 그리기 사생대회를 매년 개최해왔다. 코로나 19 때문에 원동매화축제가 2020년, 2021년 연속 취소되어 행사가 열리지 못했다. 가족단위로 참가한 수많은 어린이들이 신흥사의 넓은 마당 곳곳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양산시민들과 가까워지기 위하여 행사를 개최하는 신흥사의 노력은 높이 살만하다. 매화꽃 향기가 진동하는 꽃절인 신흥사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매화나무가 없다. 신흥사 사찰 경내에 매화나무가 없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신흥사 앞 사찰 소유의 거대한 매화농장이 정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수천 그루의 매화나무가 있는 대자연을 신흥사의 정원으로 삼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신흥사 일주문 옆에는 매화꽃이 화려한 모습으로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신흥사 국사당은 사방팔방 매화꽃으로 포위되어 있다. 신흥사처럼 주변이 자연스럽게 매화꽃으로 장식된 꽃절은 전국을 둘러보아도 거의 없다. 신흥사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국지도 69호선을 달려 영포마을을 거쳐 신흥사 일주문에 도달하면 바로 절의 영역이 시작된다. 국사당으로 연결된 오솔길은 매화꽃으로 단장하고 있다. 포장된 도로를 따라 올라가도 매화꽃 천지다. 영포리 마을쪽으로 연결된 산책로로 매화꽃 향기를 맡으며 걸을 수 있다. 쌍포매실다목적광장으로 가는 매화 명품산책로와도 이어진다. 신흥사 주차장에 도달하기 전 언덕에도 전부 매화밭으로 조성되어 있다. 커다란 매화농장이 신흥사 앞마당을 장식하고 있는 형국이다. 신흥사 안의 전각 주변에는 계절에 따라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핀다. 봄에는 대광전 앞에 할미꽃이 수줍게 고개 숙여 핀다. 가을에는 꽃무릇이 도처에 붉은 왕관을 머리에 이고 피어난다. 백일홍, 벚꽃, 영산홍, 낮달맞이꽃, 동자꽃 등 다양한 꽃도 보이고, 부처님을 상징하는 연꽃, 수련도 전각 앞을 장식한다. 화분에도 야생화를 심어 사계절 야생화를 볼 수 있다. 신흥사는 매화정원을 가진 사찰답게 매화꽃이 피는 봄이 가장 아름답지만 69호선 국지도에 벚꽃, 조팝나무꽃이 필 때도 드라이브 하기 좋은 곳이다. 신록이 우거지는 계절, 단풍이 드는 가을에도 풍광이 아름답기 때문에 연중 어느 때 방문해도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으며, 심신의 안정을 취하고 힐링을 하기에 알맞은 꽃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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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박사 화요 칼럼/청순함을 자랑하는 양산시화 목련꽃을 사랑하자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1. 목련의 특색 목련은 한국, 일본 등지에 분포하는 낙엽활엽교목으로 제주도, 추자군도에 자생하며 관상용으로 심어 기른다. 양지와 음지를 잘 가리지 않으나 음지에서는 개화와 결실이 잘 되지 않고 내한성, 내공해성이 좋은 편이다. 목련나무의 성장이 매우 빠른데, 양산의 기후 풍토와 잘 맞는 것으로 보인다. 목련꽃은 목련, 백목련, 자목련으로 세 종류의 꽃이 있는데, 백목련은 중국이 고향이며 유백색 꽃이며 꽃잎이 여섯 장이다. 우리나라 토종인 목련은 제주도가 본고향이며 꽃의 색깔이 하얗고 꽃잎은 아홉 장이며 백목련보다 먼저 꽃을 피운다. 그 외에도 자줏빛 꽃의 자목련과 일본 원산의 일본목련, 별목련, 산목련(함박꽃) 등이 있다. 백악기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남은 가장 오래된 꽃식물 중 하나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목련이 아닌 중국 원산의 백목련이다. 목련은 백목련에 비해 꽃잎이 가늘고 꽃잎 안쪽 밑부분이 붉은빛을 띤다. 목련은 꽃받침이 뚜렷이 구분되나 백목련은 3장의 꽃받침이 꽃잎처럼 변해 6장의 꽃잎과 잘 구분되지 않는다. 목련 꽃잎은 6~9장이다. 또 다른 유사종으로는 꽃잎이 목련과 비슷하나 12~18장인 별목련이 있고 꽃잎이 자주색인 자목련, 꽃잎의 바깥쪽은 자주색이나 안쪽은 흰색인 자주목련이 있다. 백목련은 봄소식을 가장 먼저 전한다고 ‘영춘화(迎春花)’라고 하며, 보라색의 자목련은 봄이 끝나갈 무렵에 핀다고 하여 ‘망춘화(亡春花)’라 한다. 월트디즈니의 만화영화 제목인 뮬란은 중국어로 목련을 뜻한다고 한다. 1982년 일본의 어느 농촌 마을에서 약 2천 년 전에 목련이 서식했던 흔적을 발견했는데, 이곳에서 발견된 씨앗 중 일부를 심었더니 놀랍게도 싹이 텄다고 한다. 꽃봉오리는 약간 매운 맛이 나는데 한방에서는 이를 신이화(辛夷花)라고 하여 약용으로 쓴다. 꽃으로 술을 빚거나 말린 꽃을 차로 달여 먹기도 한다. 목련으로 만든 술은 감기에 잘 걸리고 콧물이 잘 나오는 사람에게 효과가 있으며, 목련차는 혈압을 떨어뜨리고 비염이나 두통에 좋다고 한다. 『화암수록(花菴隨錄)』은 지금까지 저자가 강희안(姜希顔), 송타(宋拖)로 알려져 있었으나 한양대 정민 교수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조선조 중후기에 살았던 유박(柳璞, 1730~1787)이라는 사람이 지었다고 한다. 유박은 황해도 배천군 금곡포에 살았던 사람으로서 벼슬을 하지 않고 꽃을 심어 가꾸면서 문인들과 교류하였다. 꽃으로 장식한 그의 집을 백화암(百花庵)이라 부르고, 화암수록(花菴隨錄), 화암구곡(花菴九曲), 매농곡(梅儂曲) 등을 남겼다. 유박은 식물을 아름다움보다 그 상징적 의미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었다. 목련은 7품에 속한다. 2. 양산의 목련꽃 명소 양산시화 목련은 양산 곳곳에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3월 8일 범어탑마트에 목련꽃이 피었는데, 현재는 절정기를 모두 낙화하고 말았다. 양산시청에 커다란 목련나무를 이식하여 양산시를 대표하는 꽃이라는 이미지를 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야 하겠다. 한겨울에도 피는 매화꽃과 달리 목련꽃은 날씨가 따뜻해지면 온 사방에서 일시에 피어나 순백의 미를 자랑한다. 겨우내 움츠렸던 마음도 화사한 목련을 보면 이내 힘찬 기운을 얻게 된다. 대부분의 목련꽃은 하얀색이므로 꽃을 보는 순간 마음도 정화되고 자연스레 힐링이 된다. 목련의 흰색은 단색이지만 보는 사람들에게는 청초함과 고고함을 느끼게 하는 매력이 있다. 화려한 색으로 단장하지 않아도 오직 백색 속으로만 빠져들게 하는 조화를 부린다. 목련의 꽃말은 ‘고귀함’이다. 목련은 늦여름부터 일찌감치 꽃을 피울 준비를 시작한다.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한겨울에도 봄을 맞이하기 위한 채비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회색 털에 싸인 깃봉 모양의 꽃망울이 나뭇가지 가득 달려서 인고의 세월을 보낸다. 목련의 철저한 겨울나기를 보면 봄에 일시에 피어나는 청순한 백색의 꽃잔치가 어떻게 펼쳐질지 대강 짐작은 할 수 있다. 매년 봄이 오면 원동면 낙동강변에 있는 가야진사에 키가 큰 목련나무에 꽃이 만개하여 황산베랑길 자전거 이용자, 관광객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하얀색 목련꽃, 그 밑에 있는 노란 개나리, 푸른 물결의 낙동강, 파란색의 버드나무 가지가 조화를 이루어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꽃은 어떤 환경에 자리 잡고 있느냐에 따라 그 값어치는 달라지고 아름다움은 배가된다. 아름다운 목련꽃 그늘 아래 벤치가 놓여있어 방문객들이 앉아 낙동강 풍광을 보며 떠날 줄을 몰라 사진찍기 힘들었다. 처음에 연인이 독점하고 있어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 가야진사를 둘러보며 여러 곳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돌아와 보니 햇빛을 가리기 위해 머리를 둘러싼 모자로 완전무장한 다른 두 명이 앉아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리를 비켜달라는 요청은 못하고 목련꽃 사진을 계속 찍었다. 시간이 지체되어 요청하려고 가니 자리에서 스스로 일어났다. 그때부터 사람이 없는 온전한 목련꽃을 마음껏 찍을 수 있었다. 관광지에 갔을 때 명당자리를 너무 오래 차지하고 있으면 사람들의 눈총을 받게 된다. 또한 자신들의 모습이 찍힌 사진이 인터넷에 퍼질 수 있어 동선이 노출되는 위험성도 있다. 주변에 다른 벤치도 여러 개 있으므로 이웃을 의식하는 센스있는 행동이 필요하다. 3. 불교와 목련 불교에서는 나무에 핀 연꽃이라는 의미로 목련(木蓮)이라고 부른다. 흔히 사찰의 문살 문양에서 볼 수 있는 6장의 꽃잎을 가진 연꽃은 목련을 형상화한 것이다. 목련은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다. 목련은 꽃눈이 붓을 닮아서 목필(木筆)이라고도 한다. 옥같이 깨끗한 나무라 해서 옥수(玉樹)라고 한다. 봄에 꽃피우는 대표적 꽃인 목련은 크게 백목련과 자목련이 있다. 특징은 꽃이 먼저 피고 잎이 나오는데 꽃봉오리는 북쪽을 향해 있다. 옛날에는 북향화로 불리며 임금님을 향하는 충절을 상징하기도 했다. 이는 햇볕을 많이 받은 남쪽 화피편의 세포가 북쪽 화피편의 세포보다 빨리 자라나 꽃이 북쪽으로 기울게 되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흔히 목련꽃을 팝콘에 비유한다. 자목련은 백목련에 비해 개화기간이 매우 길다. 꽃은 계속 피고 지고를 반복하여 오랜 기간동안 핀다. 통도사의 부속암자에 가면 목련꽃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암자는 극락암, 서축암, 반야암 등이다. 나무에 핀 연꽃인 목련은 사찰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어 전국의 절에 가면 목련을 쉽게 볼 수 있다. 4. 다양한 목련 품종을 모아놓은 천리포수목원 천리포수목원은 세계의 목련이란 목련은 거의 수집해 보존하고 있어 봄에 목련이 필 때는 장관을 이룬다. 수목원 설립자인 미국인 고 민병갈(Carl Ferris Miller, 1921년~2002년) 원장이 척박한 땅에 목련 품종을 수집하여 멋진 수목원을 조성하였다. 1921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웨스트 피츠턴에서 태어났고, 버크넬(Bucknell)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러시아어와 독일어를 할 줄 알았고, 한자를 배우기도 하였다. 그는 징병에서 벗어나기 위해 1944년 콜로라도 대학의 해군 정보학교 일본어 과정을 배우게 되었는데, 그 덕분에 1945년 4월 일본 오키나와 섬 미군사령부의 통역장교로 배치되었다. 1946년, 한국에 연합군 중위로 처음 오게 되었다. 당시 25살이었고, 그 후 다시 1947년 1월 주한미군사령부 사법분과위원회 정책고문관으로 지원해 한국으로 왔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시 다시 미국으로 귀국하였고 그 후 1953년 한국은행에 취직해 자리 잡을 때까지 전쟁 때 일본과 미국, 한국을 왔다 갔다 해야만 했다.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천리포수목원 조성을 시작하여 1979년 민병갈이라는 이름으로 귀화하였다. 그는 서울의 증권사에서 일하면서 수목원 조성에 힘을 쏟았고, 한국과 식물에 대한 공부에 힘을 쏟았다. 1978년 민병갈은 남해안 답사여행에서 감탕나무(Ilex)와 호랑가시나무의 자연교잡(交雜)으로 생긴 신종 식물을 발견하였고, 세계에서 한국의 완도에서만 자라는 희귀종으로 검증되었다. 민병갈은 국제규약에 따라 발견자와 서식지 이름을 넣은 학명 ‘Ilex x Wandoensis C. F. Miller’을 국제학회에 등록했고 한국이름은 '완도호랑가시'로 정했다. 민병갈 씨의 정성과 노력으로 지금은 세계가 인정한 아름다운 수목원이 되었다. 지난 2000년 세계수목협회가 선정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목원’에 꼽힌 곳이다. 밀러가든, 생태교육관, 목련원, 낭새섬, 침엽수원, 종합원, 큰골 등 7개 권역으로 나뉜다. 천리포수목원은 1979년 재단이 되었고, 1989년까지 10년 동안 해외 교류 학습을 통해 영국 왕립 원예협회(RHS) 공로메달을 수여받았다. 민병갈 원장이 1973년 황폐한 모래언덕이던 이곳에 처음 심었던 나무가 목련이었다. 목련에 반한 그는 이후 사재를 털어가며 외국의 식물원과 양묘장, 목련 애호가로부터 목련 품종을 수집했다. 천리포수목원의 목련은 1997년 국제목련학회 총회를 유치함으로써 그 진가를 인정받았다. 연지색이나 노란색 꽃을 매단 목련이 있는가 하면, 겹꽃이 피거나 버드나무처럼 가지가 늘어진 것, 만개해도 오므린 봉오리 형태를 간직하는 것 등 다양한 품종을 수집하여 수목원을 만들었다. 미국 등 60여 개국으로부터 수집된 식물들은 현재, 목련을 비롯하여 약 10,300여 종에 이른다. 중점 수종은 목련속 약 400종, 감탕나무속 370종을 비롯해 침엽수 종류와 매자나무속, 진달래속, 참나무속, 단풍나무속, 분꽃나무속, 녹나무과, 조록나무과, 자작나무과, 서향나무속, 장미과, 차나무과 식물 등 다양한 종류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5. 목련은 시민들은 관심 속에 성장 1981년 6월 15일 양산시화를 목련으로 선정하였다. 시의 이미지와도 잘 어울린다. 인고의 세월을 견디다가 일시에 하얀 꽃을 피우는 목련은 청신한 기운을 북돋워 주며, 기쁨을 선사한다. 목련이 만개하면 본격적인 봄을 실감할 수 있다. 양산시화가 목련이지만 양산시민들은 무관심한 경우가 많다. 이번 기회에 양산시화 목련, 양산시목 이팝나무에 대해 확고하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양산시의 지속적인 홍보도 중요하다. 시화, 시목으로 지정해놓고 관리를 안 하면 시민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게 된다. 양산시에서도 시화, 시목에 대한 상징 공원을 조성하여 시민들에게 더욱 친숙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유치원, 고중고생들에게도 시화에 대한 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또한 양산시민들이 공원, 학교, 가정의 화단 등에 시화, 시목을 심는 캠페인도 벌여 시민으로서의 정체성 확립에도 신경을 써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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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박사 화요 칼럼/매화꽃 향기 그윽한 신흥사 국사당/YNEWS총괄위원장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국사당 양산지역에서 사찰에 국사당이 있는 곳은 신흥사가 유일하다. 통도사 국사당은 서리마을에 있어 주민들이 관리하고 동제를 지내고 있다. 전에는 통도사에서도 재를 올렸다고 한다. 신흥사 국사당은 귀중한 문화유산이므로 잘 보호하고 전통을 이어나가야 한다. 우리나라는 고대부터 천신(天神) 신앙을 믿어왔는데, 천신은 하늘 자체 또는 하늘을 관장한다는 신(神)이다. 천신은 하늘님, 하느님, 하나님 등의 호칭이 쓰였다. 제주 신화의 천지왕, 중국 도교의 영향을 입은 옥황상제(玉皇上帝), 『삼국유사』에 나오는 불교의 영향을 입은 제석(帝釋) 등의 호칭도 사용되어왔다. 『가락국기(駕洛國記)』에서는 단순히 ‘황천(皇天)’이라고만 호칭하기도 한다. 인왕산은 한양의 서쪽에 있다하여 원래 이름은 서산(西山)이었다. 단순하고 밋밋했던 산 이름은 세종 때 지금의 이름 인왕산(仁王山)으로 바뀌었다. 인왕이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신(金剛神)의 이름인데, 조선왕조를 수호하려는 뜻에서 산의 이름을 개칭했다. 이렇듯 인왕산은 불교와 인연이 깊은 산이다. 인왕산 국사당(國師堂)은 조선시대 나라에서 제례나 기우제 등을 지냈던 신당이다. 국사당에선 지금도 인간문화재 무속인이 연례적으로 내림굿, 재수굿, 치병굿 등을 한다. 선바위는 인왕산에서 가장 유명한 바위로 2개의 거대한 바위 모습이 마치 스님이 장삼을 입고 서 있는 것처럼 보여 선(참선 禪)자를 붙여 선바위라 불렀다. 주변에 장군바위, 해골바위, 범바위 등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많다. 국사당은 나라의 스승을 모시는 사당이란 뜻으로 지금의 남산 자리에 당을 세운 것이다. 이곳에는 조선을 건국의 스승으로 나옹, 지옹, 무학대사의 영정을 모시고 태조 이성계, 정도전, 등이 모셔졌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은 국사당을 인왕산 인왕사로 철거, 이전했다. 일본 총독부는 국사당을 옮기고 남산에 일본양식의 조선신궁을 건립하였다. 세종실록 8권, 세종 2년 6월 8일 을사 1번째 사 1420 년, 상왕이 공비(恭妃)를 명하여 백악(白嶽), 목멱(木覓 : 남산), 송악(松嶽), 감악(紺嶽) 및 양주 성황(楊州城隍)의 신에 기도하게 하니, 공비가 곧 환관을 보내어 기도하였다. 세종실록 8권, 세종 2년 4월 17일 을묘 4번째 기사 1420년, 흥복사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또 바람, 우레, 비를 맡은 신에게 비를 빌고, 삼각산, 목멱산(남산), 한강, 양화진에도 비를 빌었다. 세종실록36권, 세종 9년 6월 11일 무진 1번째 기사 1427년, 각산과 목멱산에 무당을 보내어 비를 빌었다. 한승훈 원광대 동북아인문사회연구소 연구교수는 『무당과 유생의 대결 : 조선의 성상파괴와 종교개혁』이라는 책에서 조선시대 중반에 성리학 질서의 강화, 사대부들의 무속 퇴치와 성상파괴운동을 다루었다. 유학자들이 집요하게 음사(淫祀 : 부정한 제사)라고 무속신앙을 탄압했지만 무속인들은 끝내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그 유구한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천신 신앙과 무속 신앙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신앙이며, 뿌리였기에 강한 생명력을 지녔다. 불교가 처음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을 때도 우리의 고유한 토속신앙과 마찰이 심했다. 불교에서 전통 신앙을 존중하고 절충하면서 포용한 것이 사찰 내에 있는 산신각, 국사당이라 할 수 있다. 2. 사찰의 국사당 마곡사 국사당(麻谷寺 國師堂)은 충남 공주시 사곡면(寺谷面) 운암리(雲岩里) 마곡사에 있는 당우(堂宇)인데,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3호로 지정되었다. 마곡사 경내에 있으며 자장율사, 지눌, 범일, 도선 같은 고승(高僧)들의 영정(影幀)을 모셔둔 곳이다. 국사(國師)가 되기까지 필요한 많은 수행과 정진(精進)을 승려들에게 상징적으로 전하고 있는 건물이다. 1796년(정조 20)에 중창하였는데, 조선 말기의 수법이 보인다. 자연석 기단(基壇) 위에 세운 정면 3칸, 측면 2칸의 3익공(翼工) 건물로, 제공 끝은 수직으로 자르고 제공 부분에 연꽃 및 연꽃 봉오리를 조각하였다. 남쪽 1칸은 온돌방이며 나머지 2칸은 우물마루를 깔고 그 벽면에 고승의 영정을 걸었다. 또한 오른쪽 벽면에는 태화산 산신(山神)이 모셔져 있는데 이 영정들은 최근에 걸린 것이라 한다. 태화산을 품고 있는 마곡사는 대한 불교조계종 25교구 중 제6교구 본사이다. 마곡사는 100여 개에 이르는 충남지역 조계종을 관장하는 대본산의 하나로 2018년 6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7개 사찰 중 하나이다. 백범 김구 선생이 머물던 곳은 백범당이다. 김구 선생은 1896년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분노로 황해도 치하포 나루에서 일본군 장교를 처단하고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탈옥하여 마곡사 백련암에서 스님으로 은신 생활을 하였다. 마곡사에서 은거할 때 법명은원종(圓宗)이었다. 백범당에는 김구 선생의 모습이 담긴 사진과 선생이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던 친필 휘호가 있고, 옆에는 해방 후 이곳을 찾아와 기념식수를 한 향나무가 자라고 있다. ‘춘마곡추갑사(春麻谷秋甲寺)’라는 말이 있듯이 봄에는 마곡사 운치가 있고, 가을에는 갑사가 아름답다고 한다. 대구 비슬산 유가사 국사당의 위패는 ‘봉청비슬산내국사지신위(奉請琵瑟山內局司之神位)’, 상량문은 동치십일년 임신 오월 이십칠일 경술 유시(同治十一年 壬申 五月 二十七日 庚戌 酉時)로 적혀 있다. 동치 십일년은 1872년 임술년으로 유가사 국사당을 건립한지 149년이 되었다. 유가사 국사당은 전형적인 삼량가(三樑架)로 건립되었다. 서까래를 받치는 부재를 도리라고 한다. 양쪽으로 경사진 지붕을 만들려면 최소한 도리가 세 줄로 걸려야 한다. 이를 삼량가라고 한다. 삼량가는 한국건축 지붕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단위이다. 이것은 빗물 배수를 위해 양쪽 경사지붕을 만들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삼량가는 앞뒤 기둥에 대들보를 건너지른 다음 양쪽 처마에 각각 도리 하나씩과 대들보 중앙에 대공을 세우고 종도리를 얹은 다음 세 도리에 의지해 서까래를 양쪽으로 거는 구조이다. 삼량가는 규모가 작은 건물이나 살림집 중에서도 홑집 형태의 문간채나 행랑채, 광채 등 부속채에 많이 사용되는 가구 방식이다. 또 삼량가는 맞배지붕이 대부분이며 포가 없는 민도리집이나 익공형식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3. 매화꽃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신흥사 국사당 신흥사 국사당 현판에 기사년 입춘이라고 적혀 있어 1989년 2월 4일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국사당 정면 좌우에 석조 등탑이 두 기가 있다. 국사당 건물은 정면 3간, 측면 1간의 맞배지붕 건물로 왼쪽 벽에는 매화꽃, 오른쪽 벽에는 대나무, 뒷면 벽에는 나무 그림이 그려져 있다. 국사당 주변의 담장 바깥 사방은 매화나무가 있어 봄철이면 아름다운 매화꽃으로 장식되어 그윽한 매화 향을 풍기는 선경이 된다. 신흥사 국사당은 개방하지 않고 항상 문이 굳게 닫혀 있어 담장 바깥에서만 구경하고 사진을 찍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3월 7일, 11일, 13일 총 세 번을 답사하였다. 국사당 내부가 궁금하던 차에 원동면 화제리에 사는 정덕유 윤은선 부부를 만나 이런 사정을 얘기했다. 독실한 불자인 윤은선 씨는 국사당 내부의 산신령 할아버지를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였다. 그리고 주지 스님을 잘 알고 있어 국사당 내부를 볼 수 있도록 부탁을 해보겠다고 하였다. 3월 11일 오후에 시간을 내서 정덕유 윤은선 부부와 함께 신흥사를 방문하여 해동 호법 주지 스님을 친견하고 차를 마시며 궁금한 점을 질문하였다. 주지 스님은 친절하게 신흥사와 국사당의 내력을 알려주었다. 차를 마시고 허락을 받은 후 국사당 내부를 볼 수 있었다. 주지 스님과 정덕유, 윤은선 부부에게 감사드리는 바이다. 신흥사 국사당이 있는 양산시 원동면 영포리는 매화농장이 많은 곳으로 매년 3월 20일을 전후하여 국지도 69호선 도로변에 있는 쌍포매실다목적광장에서 원동매화축제가 열린다. 신흥사 일주문 주변, 국사당 주변은 매화꽃이 만발하여 연중 최고의 경치를 자랑한다. 신흥사 소유의 매화농장은 규모가 크다. 신흥사에서 바라볼 때 건너편 언덕은 신흥사 매화밭이 자리 잡고 있다. 원동매실은 1930년경 원동면 원리 삼정지마을에서 재배를 시작하여 점차적으로 확산되어 영포마을을 중심으로 대단위로 재배하게 되었다. 원동매실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2006년부터 매화축제를 개최하며 대폭 확대되어 원동지역 400여 농가에서 매실을 재배하고 있다. 원동매실의 품종은 ‘남고’로 순수 토종매실이며 원동지역의 온화한 기후와 충분한 일조량 등 매실 재배에 적합한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매실 고유의 효능이 타지역보다 높다. 개량종에 비해 과육이 단단하고 향이 진하며 매실의 주성분인 구연산의 함량이 월등히 높은 것이 특징이다. 원동매화축제가 올해는 코로나 19 때문에 작년에 이어 연속으로 취소되었다. 원동매화꽃은 해가 갈수록 전지를 심하게 해서 볼품이 없어지고 있다. 영포리 명품 매화산책로 주변에는 전지를 심하게 하여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매화나무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 이유는 매실 수확을 쉽게 하고 매실을 굵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가지를 많이 자르고 있다. 토종 매실 대신에 개량종을 심는 경우도 있고, 아예 다른 수종으로 교체해버리는 농가도 있다. 대책이 강구되어야 하겠다. 신흥사, 국사당, 신흥사 일주문 앞을 흐르는 맑은 계류인 영포천이 있는데, 상류는 민가가 없어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계곡이다. 일주문 현판에는 축천산신흥사(鷲遷山新興寺)라고 적혀 있다. 신흥사가 있는 골짜기는 옛날부터 절골이라고 하였다. 국사당 내부에는 국사대신상 그림이 있으며, 촛대 두 개와 향로가 있다. 위패는 국사대신지위(局司大神之位)라고 적혀 있다. 신상이 안치되어 있는 탁자의 서랍장은 격자무늬로 매화, 난초, 대나무, 모란 등 각종 꽃 그림이 그려져 있다. 세종실록 49권, 세종 12년 8월 6일 갑술 4번째 기사 1430년, 예조에서 각도 산천 단묘 순심 별감(各道山川壇廟巡審別監)이 보고한 조건에 의해서 마련하여 아뢰기를, “전주(全州)의 성황위판(城隍位版)에 ‘전주부성 황지신(全州府城隍之神)’이라 쓰고, 판위(版位) 뒤에 봉안(奉安)한 신상(神像)이 모두 5위(位)이온데, 영락(永樂) 11년 6월 일 예조의 수교(受敎)에, ‘산천 성황의 신(神)은 다만 신주(神主) 1위만을 남겨 두되 목패(木牌)에 쓰며, 거기에 설치한 신상(神像)은 일체 다 철거하여 사전(祀典)을 바로잡으라.’ 하였은즉, 이제 이에 설치된 신상도 또한 철거하여야 합니다.” “국사당(國師堂)에는 위판이 없고, 속설(俗說)에 전하기를, ‘법사존자(法師尊者)에게도 역시 은두고리(銀豆古里), 은향합(銀香合), 은장등(銀長燈)을 각기 하나씩 쓰고 있고, 사당지기가 4명이 있다.’ 하오니, 마땅히 사당을 헐고 은그릇을 수납하고, 사당지기는 군역에 충정해야 한다 하였사온데, 이상 8개 조항 가운데 전주, 영흥, 함흥의 성황은 국가에서 제사를 행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타례(他例)에 의하여 당해 고을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감악산(紺岳山), 의관령(義館嶺), 송악산(松岳山)의 신상(神像)은 철거하지 말고 그 근처에 적당한 땅을 택하여 따로 나라에서 제사를 행하는 사당을 세워 위판을 설치하게 하고, 그 은그릇은 타례(他例)에 의하여 놋그릇[鍮器]으로 대신하도록 하소서.”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양산에 있는 사찰 중 국사당이 있는 곳은 신흥사가 유일하다. 하북면 서리마을에 있는 국사당은 현재 마을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현판에는 축산국사(鷲山局司)라 적혀 있다. 신흥사 일주문 근처에 있는 국사당은 전후좌우로 아름다운 매화꽃으로 둘러싸여 꽃단장을 하고 있어 그윽한 매화향기가 진동한다. 불교에서 육법공양 중 꽃공양이 있는데, 바로 신흥사에서 국사대신에게 매년 봄철에 꽃공양을 올리고 있는 형국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환경을 지니고 있는 신흥사 국사당을 잘 보호하고, 보전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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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에서 가장 빨리 피는 유광화성 벚꽃/YNEWS 심상도 총괄위원장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올해는 몇 번의 꽃샘추위가 있었지만 어김없이 봄이 오고 있다. 겨울철 기온이 높아 매화꽃, 진달래꽃, 벚꽃이 작년보다 훨씬 빨리 피고 있다. 양산에서 가장 빨리 피는 벚꽃은 유산공단에 있는 유광화성의 벚꽃이다. 2020년에는 3월 18일에 벚꽃 개화 소식을 전했는데, 올해는 작년보다 4일 앞당겨 소개하게 되었다. 작년에도 소개한 날보다 2~3일 먼저 피었다. 올해는 지난 3월 12일 비가 오는 날 차를 몰고 지나가면서 보니 벚나무 아래 부분에 꽃이 일부 먼저 피었다. 어제(3월 14일)는 많이 피었는데, 오늘(3월 15일)은 활짝 피어서 아름다웠다. 양산에 빨리 피는 벚나무가 새로 발견되었다. 증산역로 주변의 작은 가로수 벚나무가 비 오던 날인 지난 3월 12일부터 꽃을 피웠다. 3월 14일에는 완전 만개하여 보기 좋았다. 걸어가는 사람들을 관찰해보니 멈춰서 사진 찍는 사람도 있었고, 무심한 듯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증산역로변 가로수는 ‘양산물금 양우내안애아파트 PARK AVENU’ 앞에 4그루가 만개하였다. 증산역로1 다섯 그루, 퍼피파파 앞 3그루, 정담기지떡 앞 1그루, 벌떡떡볶이 앞 1그루, 그램골프피팅 앞 1그루, DENT HERO 앞 2그루, 해림꽃게찜 부근 3그루가 각각 피었다. 벚나무에 새가 날아와 벌이나 다른 벌레를 잡아먹는 것이 눈에 띄었다. 벚꽃이 일찍 피어난 또 한 곳은 부산대학로변 부산대학교 기숙사 앞, 녹색국토물관리연구소 건너편 화단에도 벚꽃이 피었다. 3월 14일 저녁 무렵에 방문하여 살펴보았는데, 부산대학교 벚꽃은 부산대학로변 가로수가 아니고 부산대학 울타리 안의 화단에 있다. 벚나무는 아직 별로 크지 않은 작은 나무였는데,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하였다. 부산대학로와 물금로의 교차로 근처에 6그루, 녹색국토물관리연구소 앞 6그루, 기숙사 주차장 앞 3그루, 버스정류장 앞 2그루가 각각 꽃이 피었다. 부산배화학교의 올벚나무는 부산에서 가장 빨리 피는 벚꽃인데, 3월 14일 방문해보니 이미 꽃은 거의 낙화를 하고 일부만 남아 있었다. 배화학교의 벚꽃은 색깔이 진분홍색으로 일반 벚꽃과 확연히 차이가 나는 매우 아름다운 품종의 벚꽃이다. 봄꽃은 일찍 피는 것이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게 된다. 통도사 자장매가 불자, 관광객, 사진가의 인기를 끄는 이유는 꽃이 거의 없는 한겨울에 피고, 오랜 기간에 걸쳐 피기 때문이다. 벚꽃은 유산공단에 있는 유광화성의 벚나무가 제일 먼저 꽃을 피우는데, 올해는 증산역로변의 가로수 어린 벚나무도 일찍 꽃을 피웠다. 일반적인 벚나무 품종은 아직 며칠 더 지나야 꽃이 핀다. 제일 먼저 꽃을 피우는 올벚나무는 양산시에서 관심을 갖고 전지도 세심하게 하면서 잘 키워야 할 것이다. 양우내안애아파트 앞에 있는 벚나무는 보도 앞쪽으로 기울어진 것이 한 그루 있었는데 바로 세워야 하겠다. 올벚나무들은 좀 더 자라면 양산의 명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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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자장매와 화엄사의 흑매화 비교/ 와이뉴스총괄위원장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1. 보물인 영산전 뒤에 있는 통도사 자장매, 국보인 각황전 옆에 있는 화엄사 흑매화 전남 구례 화엄사의 홍매화는 색깔이 매우 진하고 붉어 일명 흑매화라고도 한다. 통도사의 자장매가 전국에서 가장 일찍 피어 거의 두 달 이상 동안 아름다운 꽃을 보여주기 때문에 많은 불자, 관광객, 사진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화엄사의 홍매화는 지리산 자락의 추운 곳에 자리 잡고 있어 개화기가 늦은 편이다. 화엄사의 흑매화 역시 매우 아름다워 한 번 보게 되면 반하게 된다. 개화시기와 개화 지속기간 면에서 통도사 자장매가 화엄사 흑매화보다 뛰어나다. 화엄사 흑매화는 국보인 각황전, 석등, 보물인 사자탑을 함께 사진에 담을 수 있다. 통도사는 국보인 대웅전과 금강계단이 자장매와 떨어져 있어 함께 담을 수 없다. 화엄사는 국보인 각황전, 석등, 사자탑, 보물인 대웅전, 5층탑과 흑매화를 포함하여 찍을 수 있다. 통도사는 보물인 영산전을 자장매와 한 구도에 넣을 수 있다. 화엄사는 국보와 보물을 흑매화와 한꺼번에 담을 수 있어 통도사 자장매보다 우위에 있다. 통도사와 화엄사의 입장객 통계를 통해 자장매와 흑매화의 인기도를 간접적으로 비교해보기로 한다. e-나라지표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의 통계에 의하면 통도사 입장객 수는 2017년 3,442,725명, 2018년 2,398,999명이다. 2018년 월별 입장객 수는 1월 320,831명, 2월 424,612명, 3월 315,039명, 5월 341,803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연중 1위는 2월, 2위는 5월, 3위는 1월이다. 2018년 초파일은 5월 22일로 5월의 입장객 수에 영향을 미쳤다. 구례 화엄사는 2017년 446,078명, 2018년 557,005명, 흑매화가 핀 2018년 3월은 63,611명으로 월별 통계 2위, 단풍철인 10월이 72,343명으로 월별 입장객 수 1위로 나타나고 있다. 통도사와 화엄사의 입장객 수는 통도사가 압도적으로 많고, 통도사 2월 입장객 수는 화엄사의 1년 전체 입장객 수에 근접하고 있다. 통도사 자장매가 한창인 2월에 월별 입장객 수가 최고이며, 극락보전 옆의 홍매화가 활짝 피는 3월에도 입장객 수가 3위를 기록하고 있다. 매화나무의 수령을 비교해보면 통도사의 자장매는 대략 35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는데, 305년이라 한 지도 10년은 넘은 것 같다. 통도사 창건주 이름을 따서 자장매라 부르고 있다. 또 다른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1942년 해방 직전 양산의 물금포교당에서 월하스님이 한 뿌리 얻어와 심었다고 한다. 자장매는 겹꽃으로 만첩홍매화다. 화엄사 장육화, 흑매화는 계파선사가 장륙전(각황전)을 건립 후 심었다고 한다. 장륙전은 1702년(숙종 28) 중건되었으므로 흑매화의 수령은 319년 정도인데, 자장매보다는 약간 젊은 나무다. 자장매는 밑둥에서 두 개의 가지로 뻗어나가 하나는 굵고, 하나는 작은 편이다. 화엄사 장육화(흑매화)역시 밑둥에서 두 개의 가지로 분화되었다. 2. 통도사 국보와 보물 통도사는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으뜸 사찰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불보종찰이다. 영축총림 통도사는 646년(신라 선덕여왕 15)에 자장율사(慈藏律師)에 의해 창건되었다. 통도사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정골(頂骨)과 지절(指節), 치아사리, 금란가사가 봉안되어 있어 불지종가(佛之宗家)이자 국내에서 가장 큰 가람으로서 국지대찰(國之大刹)의 사격(寺格)을 지닌 사찰이다.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梁山 通度寺 大雄殿 및 金剛戒壇)은 국보 제290호로, 정면 3칸, 측면 5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의 법당이다. 통도사의 가람 건축들은 대부분 동서방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나 대웅전은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뒤쪽에는 금강계단이 있다. 중요 유물로는 보물 제334호 청동 은입사 향완, 보물 제471호인 봉발탑, 보물 제1041호 영산전 팔상도, 보물 제1353호 영산회상탱, 보물 제1042호 대광명전 삼신불도, 보물 제1350호 석가여래괘불탱, 보물 제1351호 괘불탱, 보물 제1352호 화엄탱, 보물 제1354호 청동 은입사 향완, 보물 제1471호 삼층석탑, 보물 제1472호 아미타여래설법도, 보물 제1711호 영산전 벽화, 보물 제1735호 청동은입사향완, 보물 제1747호 은제도금 아미타여래삼존상 및 복장유물, 보물 제1826호 영산전, 보물 제1827호 대광명전, 보물 제74호 국장생석표 등이 있다. 통도사는 2018년 6월 30일 바레인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의 심의 결과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으로 등재되었다. 동시에 등재 확정된 산사는 경남 양산 통도사, 경북 영주 부석사, 충북 보은 법주사, 전남 해남, 대흥사, 경북 안동 봉정사, 충남 공주 마곡사, 전남 순천 선암사다. 3. 자장매 주변 전각인 영산전과 영각 소개 자장매 우측 앞에 있는 영산전(靈山殿)을 소개한다. 영산전은 조선시대(1714년)에 건립된 보물 제1826호로 하노전(下爐殿)의 중심 건물이다. 남향한 영산전의 전방 좌우에는 극락전과 약사전이 동서에 놓여 있고, 그 중앙 지점에는 신라 말기의 3층 석탑 1기가 있다. 이 탑은 현 위치에서 동북쪽 약 1.5m 지점에 경사진 채 있었으나 최근에 현 장소로 이동하여 복원되었다. 영산전의 초창 연대는 미상이나 현 건물은 숙종 30년(1704) 송곡대사(松谷大師)에 의하여 중건된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통도사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는 『영산전천왕문양중창겸단확기(靈山殿天王門兩重創兼丹雘記)』에 따르면, 1713년 봄 영산전과 천왕문이 화재로 소실되었고 1714년 청인(淸印), 정안(正眼), 낭일(朗日), 치원(致源) 등 4분의 대선사가 중창하였다고 한다. 건물의 구조는 전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계 양식의 맞배지붕 양식이며 내외 벽화는 매우 주목되는 작품이다. 외벽의 그림은 풍화(風化)를 받아 많이 훼손되었으나 내벽의 그림은 그런대로 잘 남아있다. 특히 내부 벽화의 다보탑을 비롯하여 양류관음(楊柳觀音), 나한상, 여러 가지 경설(經說)의 내용들이 품격 높은 수작(秀作)으로 국내에서 보기 드문 희귀한 작품이다. 영산전 팔상탱(靈山殿 八相幀)은 보물 1041호로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가로 151㎝, 세로 233.5㎝의 비단에 채색한 그림이다. 팔상탱은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코끼리를 타고 사바세계로 내려오는 장면인 도솔래의상, 석가모니가 룸비니공원에서 마야부인의 옆구리를 통해 출생하는 모습을 그린 비람강생상이 있다. 태자가 성문 밖의 중생들의 고통을 관찰하고 인생무상을 느끼는 장면의 사문유관상,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출가하는 장면을 묘사한 유성출가상, 설산(雪山)에서 수행하는 모습을 그린 설산수도상, 태자가 수행 중 온갖 유혹과 위협을 물리치는 수하항마상, 부처가 녹야원에서 최초로 설법하는 모습을 나타낸 녹원전법상, 부처가 쌍림수 아래에서 열반에 이르는 모습을 표현한 쌍림열반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통도사 자장매는 양지바른 남향의 영각(影閣) 앞에 있다. 자장매가 1월 초순부터 일찍 꽃망울을 피우는 것은 주변의 전각인 영각, 영산전, 관음전이 한겨울의 차가운 북풍한설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영각은 역대(歷代) 주지(住持) 및 큰스님들의 진영(眞影)을 봉안한 건물로 정면 8 칸 측면 3칸의 긴 장방형(長方形) 평면(平面)으로 된 팔작집이다. 초창 연대는 분명치 않으며 현재의 건물은 1704년(숙종 30년)에 지었다고 전한다. 처음에는 영자전(影子殿)이라 불리다가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4. 화엄사 국보와 보물 화엄사는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화엄사로 539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이다. 창건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사적기(寺蹟記)’에 따르면 544년(신라 진흥왕 5년, 백제 성왕 22년)에 인도 승려 연기(緣起)가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 말기에는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중수하였고 고려시대에 네 차례의 중수를 거쳐 보존되어 오다가 임진왜란 때 전소되고 승려들은 학살당하였다. 장륙전은 임진왜란 때 5,000여 칸에 이르는 화엄사의 전각들이 대부분 불에 타면서 함께 소실되었다. 범종은 왜군이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섬진강을 건너다가 배가 전복되어 강에 빠졌다고 전한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630년(인조 8년)에 벽암선사가 절을 다시 세우기 시작하여 7년만인 인조 14년(1636년)에 완성하였다. 화엄사에는 각황전을 비롯하여 국보 4점, 보물 5점, 천연기념물 1점, 지방문화재 2점등 많은 문화재와 20여동의 부속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각황전은 국보 제67호로 지정된 매우 유명한 건물이며 현존하는 목조건물로는 국내 최대 규모로 그 웅장한 외양이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한다. 대개의 절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가람을 배치하지만, 이 절은 각황전이 중심을 이루어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주불(主佛)로 공양한다. 각황전 왼편 효대라는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4사자 3층석탑은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가 어머니의 명복을 빌며 세운 탑으로 특이한 의장과 세련된 조각솜씨를 자랑하는 걸작으로 국보 제35호이다. 각황전 내부 후편에 위치하고 있는 영산회 괘불탱은 국보 제301호로 1997년도에 지정되었다. 4사자 3층석탑은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 천인상을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악기와 꽃을 받치고 춤추며 찬미하는 등의 다양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가장 주목되는 위층 기단은 암수 네 마리의 사자를 각 모퉁이에 기둥삼아 세워 놓은 구조로, 모두 앞을 바라보며 입을 벌린 채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있다. 사자들에 에워싸여 있는 중앙에는 합장한 채 서 있는 스님상이 있는데 이는 연기조사의 어머니라고 전하며, 바로 앞 석등의 탑을 향해 꿇어앉아 있는 스님상은 석등을 이고 어머니께 차를 공양하는 연기조사의 지극한 효성을 표현해 놓은 것이라 한다. 각황전 앞뜰에 서있는 석등은 국보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다. 높이 6.3m, 직경 2.8m로 국내 최대 규모이며, 통일 신라시대 불교 중흥기의 찬란한 조각예술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대웅전은 보물 299호로 조선시대의 우수한 예술성이 잘 나타나 있다. 대웅전은 화엄사의 건물 중 각황전 다음으로 큰 건물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 인조 8년(1630년)에 벽암대사가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대웅전 양편에 서있는 5층탑은 뛰어난 조형성과 섬세한 장식이 눈길을 끄는 신라시대 작품으로 보물 제132호와 133호로 지정돼 있다. 화엄사 원통전 앞 사자탑은 보물 제300호로 지정되었다. 원통전 앞에 서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독특한 석탑으로, 네 마리의 사자가 길쭉하고 네모난 돌을 이고 있는 모습이다. 절에서는 보통 노주라고 부르는데, 무엇으로 사용되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며, 불사리를 모셔놓은 것이라 하기도 하고, 불가의 공양대로 쓰였을 것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 5. 구례 화엄사의 흑매화 관리에서 통도사가 벤치마킹할 점 지리산 화엄사의 명물 홍매화와 들매화(야생 매화)를 휴대전화 카메라에 담아보는 사진 콘테스트가 열린다. 화엄사의 부속 암자인 길상암에는 천연기념물 485호로 지정된 들매화가 있다. 화엄사(주지 덕문 스님)는 3월 16~27일 ‘제1회 홍매화・들매화 휴대폰 카메라 사진 콘테스트’를 개최한다. 화엄사 홍매화는 장륙전이 있던 자리에 조선 숙종 때 각황전을 중건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계파선사(桂波禪師)가 심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장육화(丈六花)라고 하며, 다른 홍매화보다 꽃이 검붉어 흑매화라 불리기도 한다. 조선 숙종 28년(1702)에 장륙전 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각황전’이란 이름은 임금(숙종)이 지어 현판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흑매화는 국보인 각황전, 그리고 원통전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데, 매화나무의 크기는 매우 크다. 나무의 키가 각황전의 전각 1층보다 높고, 원통전 전각보다 높다. 나무가 자연스럽게 자라도록 관리하고 있다. 화엄사 흑매화는 2019년 3월 19일에 촬영하였으며, 통도사 매화꽃은 지난 3월 4일에 찍었다. 반면 통도사 극락보전 옆의 연분홍 매화나무와 진분홍 매화나무, 수양매화나무는 인위적으로 성장을 억제하는 전지로 매화꽃을 볼품없게 만들었다. 몇 년 주기로 이런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앞으로 전문 조경회사에 맡겨 세심한 전지, 영양제 투입, 거름주기 등을 할 필요가 있다. 통도사는 자장매와 홍매화 관리를 화엄사의 흑매화처럼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 좋을듯하다. 통도사는 화엄사의 휴대폰 카메라 사진 콘테스트를 벤치마킹하여 내년에 이런 이벤트를 개최하면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통도사 입장객 수는 2018년 통계에서 자장매가 활짝 핀 2월이 연중 최고로 입장객이 많다. 극락보전 옆의 홍매화를 감상할 수 있는 3월은 연중 3위를 기록하고 있음을 볼 때 홍매화 전지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통도사는 수동적인 관광객 수용 정책을 벗어나 적극적인 관광마케팅 기법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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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룡폭포와 대석저수지가 있는 물안뜰마을 당산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물안뜰마을 대석권역 창조적마을만들기 사업 양산시 상북면 대석리 물안뜰마을은 풍광이 수려한 농촌마을로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고 있는 잘 알려진 마을이다. 물안뜰마을은 2008년 농촌진흥청에서 선정한 ‘농촌전통테마마을’로 지정되면서 지어진 이름으로, 물이 풍부하고 냇가 안쪽에 있다는 의미에서 붙여졌다. 물이 풍부한 이유는 천성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어 홍룡폭포와 홍룡사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이 대석저수지에 모이고, 마을 앞의 대석천을 따라 양산천에 합류하기 때문이다. 대석리는 2015년 10월 농림축산식품부 일반농산어촌개발사업의 대석권역 창조적마을만들기 사업에 선정돼 국도비(32억 원), 지방비(8억 원) 등 모두 40억 원의 사업비가 투입되었다. 주요 사업은 대석리 마을 공동주차장, 홍룡폭포 힐링코스 조성, 대석문화마당 조성, 대석저수지 수변생태 탐방로 조성, 홍룡길 가로경관정비, 당산 정비 등을 추진하였다. 양산시는 개발제한구역내 주민지원사업비 5억 원, 대석권역단위 종합개발사업비 중 마을공동 주차장 정비사업비 3억 원 등 총 8억 원을 투입해 2015년 말에 홍룡사 입구 주차장에 주차면수 105면으로 확대, 증설했다. 주차장 주변 환경정비사업을 위해 사업비 1억 6천 8백만 원을 추가 확보해 녹지공간 및 주민과 행락객들을 위한 휴게쉼터(2300㎡) 조성, 기존등산로 정비 등을 통해 2016년 6월 양산8경다운 명품 친환경 주차장을 조성하였다. 물안뜰마을은 양산팔경인 홍룡폭포와 홍룡사, 대석저수지 둘레길, 천성산 편백나무 숲, 홍룡사 계곡 등이 있어 방문객들은 농촌체험과 자연체험을 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다. 대석저수지에서는 반딧불이도 관찰할 수 있다. 요즘 인기 관광의 추세인 힐링, 웰빙 관광 체험을 할 수 있는 마을이다. 물안뜰마을은 현재 농림축산식품부의 농촌체험휴양마을로 지정되어 있다. (사)경남농어촌체험휴양마을협의회에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다. 방문하는 체험객을 위해 농촌체험 안전보험에도 가입되어 있다. 박상언 도예작가와 정선량 부부가 운영하는 토향재, 풀과 꽃이야기 농촌교육농장에서는 도자기 만들기, 떡만들기와 떡메치기, 천성산 야생화 화분 만들기, 천연염색 스카프 만들기, 솟대만들기, 국화차 만들기, 만두 빚기, 천연화장품 만들기, 부채 만들기, 편백 숲과 계곡 탐방 등의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농촌체험휴양마을이란 마을의 고유한 전통문화를 도시민이 체험하고 학습하게 하는 장을 마련함으로써 농가소득을 증대시키고 독특한 농촌문화의 맥을 이어가는 마을을 말한다. 어른들에게는 어렸을 적 고향 추억을 일깨워주고,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꿈을 심어주는 여러 가지 농촌체험을 할 수 있는 마을을 의미한다. 2013년부터 정부 지원행사로 매년 개최되는 ‘상여소리와 행상 재현’ 행사는 물안뜰마을의 대표 행사인데, 현재는 코로나 19 때문에 중단되고 있어 아쉽다. 옛날 전통 장례의식을 재현하고 상여소리를 들려주고 있어 전국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유서쓰기, 입관체험 등 죽음과 삶에 대해 생각해보는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하였다. 물안뜰마을에는 장수 우물이 있다. 500년 된 회나무 뿌리에서 나오는데, 여름에는 차갑고 겨울에는 따뜻한 것이 특징이다. 옛날부터 모든 주민들이 이 물을 길어다 식수로 사용하였으며, 장수하는 어른들이 많은 이유도 천성산의 기운과 이 우물 때문이라고 전한다. 이 우물은 1961년 8월 15일 부산대학교에서 시멘트로 깨끗하게 정비하였다. 2. 아름답게 가꾸어진 물안뜰마을 당산 물안뜰 마을은 2008년 농촌진흥청에서 선정한 ‘농촌전통테마마을’로 지정되면서 물안뜰마을 당산 산책로를 정비하였다. 대석권역 창조적마을만들기 사업을 통해 당산은 전통 기와집 한옥으로 신축하였다. 당산은 사철나무, 꽃댕강나무, 돌복숭아나무, 천리향, 홍가시나무, 영산홍 등을 심어서 조경을 잘하였다.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장승, 당산의 누석단 돌탑도 세워놓았다. 당산 앞 도로변에는 주차장도 있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당산에는 대석마을 숲도 복원하였다. 대석마을 역사와 문화적 가치가 서려 있는 숲이다. 훼손, 소멸되고 있는 숲을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여 산림문화유산으로 계승시키고, 지역주민들과 상생하며 도시민들과 화합할 수 있는 산림문화공간으로 제공하기 위해 복원하였다. 대석 물안뜰마을 당산은 공원으로 멋지게 조성되어 당산돌기 체험장으로도 이용하고 있다. 스토리텔링이 잘 되어 있는데, 산책로를 돌며 간절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안내하고 있다. 당산돌기 유래도 안내하고 있다. 서기 661년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천성산을 오르며 수행을 하기 전부터 이곳은 성지였다. 착하게 살던 부부가 어느 날 정말 어렵고 딱한 처지에 놓여 있었는데, 우연히 길을 가다 멈추고 여기 작은 산을 돌면서 간절하게 소원을 빌었더니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 이후로 많은 소문이 퍼져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으며, 소원을 비는 사람마다 이루어지니 신성한 곳으로 여겼다.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죄인이라도 이곳에 들어가 빌고 뉘우치면 나라에서도 함부로 잡아가지 못했다고 한다. 바로 이 신성한 곳을 물안뜰 당산이라고 부른다. 여기 당산에는 소원을 들어주는 할배가 있다고 여기고 있으며, 마을의 안위를 지켜주는 신앙적 지주로 모셔지고 있다. 멋지게 한옥으로 신축한 당집이 있으며, 도로변에 축소 모형의 작은 토담집도 앙증맞게 만들어놓았다. 작은 돌담장도 있으며, 누석단도 작은 것, 큰 것이 있어 구색을 맞추고 있다. 그 앞에는 장독대도 마련해놓았다. 당산돌기 체험할 때 1바퀴 돌면 마음이 평온하고 심신이 맑아진다. 3바퀴 돌면 무병 장수한다. 6바퀴 돌면 집안에 액운이 없어진다. 12바퀴 돌면 아기가 없는 가정에는 아기를 점지해준다. 24바퀴를 돌면 간절한 소원 1가지는 이루어진다. 도로변에 있는 축소한 토담집과 안내문을 구경하고 권순도가 세운 세계인 환영비를 지나 정자가 있는 곳으로 가면 멋진 당집이 나타난다. 아담한 돌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한옥 대문이 버티고 서있다. 당집은 작은 한옥으로 전통 문이 달려있어 고풍스런 느낌이 난다. 당산나무는 소나무인데, 정자 옆에는 팽나무도 보인다. 숲길에도 커다란 소나무가 많이 있어 산책하면 소나무 피톤치트 향을 맡을 수 있어 좋다. 소나무 산책로 답사하다가 건강을 위해 산책하던 마을 할머니 한 분을 만나서 당산제를 언제 지내느냐고 물어보니 삼월삼짇날이라고 알려주었다. 대부분의 마을이 음력으로 정월 대보름, 삼월삼짇날에 당산제를 많이 올린다. 3. 홍룡사 가홍정, 대석저수지를 자비로 만든 이규홍 독립투사 가문 독립투사 백농 이규홍 선생은 상북면 대석리 397번지(현재 죽림산방이 생가)에서 아버지 이재영(李宰榮)과 어머니 김정숙(金貞淑)의 차남으로 태어나 어릴 때 한학을 배운 후 일본 명치대학 법학부에 유학했다. 대학 졸업 후 1919년 상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법무부 위원, 임시정부 학무차장, 내무차장, 재무총장(재무부장관), 외무총장(외무부장관), 의정원 의원(국회의원),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국회부의장), 헌법기초의원, 국무원(장관 : 제8차 국무령제, 국무령 김구)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천석꾼의 집안에서 태어나 재산의 대부분을 상해임시정부 독립자금으로 희사하였다. 상해에서 임정 요인으로 활동하다가 법정 전염병인 폐결핵에 걸려 고향인 양산으로 귀국하여 일본 경찰에 의해 요시찰 인물로 주목받으며 가택연금을 당해 집에서 요양하였다. 그 당시는 의료기술이 낙후되어 폐결핵은 치료약이 없었으며, 불치의 중병으로 간주되었다. 일제 경찰이 자택에 상주하며 이규홍 독립투사를 감시하였다. 전염성이 강하여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제한하였으므로 양산읍내에서 의사와 간호사가 대석마을로 왕진와서 치료하였다. 투병 중 해방을 보지 못하고 타계하였다. 백농 선생이 상해에서 귀국 후 가촌토지주식회사 사장, 환영자동차회사 무한책임사원 근무 기록이 남아 있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일제의 허가를 받아야만 했는데, 이를 무조건 친일활동으로 보는 것이 문제다. 공산당원으로 활동하거나 친북 활동을 한 좌파계열 인사도 독립유공자로 서훈하는 마당에 전 재산과 목숨을 바쳐 독립투쟁을 한 이규홍 독립투사를 서훈하지 않는 것은 보훈처의 심사규정에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하겠다. 사업을 하면서 번 돈을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으로 비밀리에 희사했다. 보훈처에서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주지 않자 유족들은 일본 외무성 자료까지 찾아서 입증 노력을 기울였다. 기록을 조사해보니 일본 경찰의 요주의 인물로 등록되어 편지까지 검열받았으며, 변절, 투옥 기록이 없다는 것이 나왔다. 이규홍 독립투사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파 명단에도 올라가지 않았다. 백농 선생과 유사한 사례지만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은 경우가 있는데, 백봉 라용균 선생이다. 백봉은 상해에서 독립투쟁을 하다가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공부 후 귀국하여 일본인 친구의 요청으로 간척사업을 하였다. 그 당시 간척사업은 일제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중요한 사업이었다. 보훈처 심사 규정은 일관성, 공정성이 있어야만 한다. 양산팔경인 홍룡사와 홍룡폭포로 가는 입구에 가홍정이라는 큰 정자가 있다. 양산문화원이 발간한 ‘양산의 누정재지’에 따르면 가홍정은 1918년 대석마을의 가선대부인 석은(石隱) 이재영(李宰榮)과 그의 친구 권순도가 건립하였다. 홍룡사 입구에 정자를 세우고 홍룡사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기 위해 만들었다. 이후 퇴락하여 방치되어 오다 박정희 대통령이 홍룡사를 방문할 무렵 철거되었다. 현재의 가홍정은 양산시에서 새로 건립하였다. 가선대부 이재영은 이규홍 독립투사의 부친이다. 1903년(고종 7년) 기근에는 금품과 곡식을 많이 출연해 대석마을 사람들을 구휼(救恤)했다. 이재영은 평소에 검소한 생활을 하며 어려운 동네 사람들을 돕는데 앞장섰다. 물안뜰마을의 대석저수지는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어 저수지를 한바퀴 돌며 산책할 수 있다. 대석저수지는 이규홍 독립투사의 아들 이종문 씨가 수리조합을 운영하며 사재를 털어 축조 후 희사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만든 대석저수지는 제방이 붕괴되어 주민들이 피해를 입은 바 있었다. 현재 저수지는 한국농어촌공사 소유로 되어 있다. 독립투사 이규홍 선생 가문은 대석마을을 위해 여러 가지 좋은 일을 하였다. 가홍정을 건립, 흉년에 마을사람 돕기, 대석저수지 축조할 때도 사재를 털어 기부하였다. 이규홍 독립투사의 손자인 이경우 씨는 월남전 참전용사로 국가유공자다. 이규홍 독립투사 집안은 대대로 나라를 위해 활동한 명문 가문이다. 3.1절을 맞이하여 물안뜰마을의 당산을 소개하며 이규홍 독립투사의 공적, 그 가문 대대로 대석마을을 위해 헌신한 일을 되돌아보며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하루빨리 상해임시정부 거물 독립투사 이규홍 선생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어야 마땅하다. 양산팔경인 홍룡폭포, 신라 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한 홍룡사(창건 당시 낙수사), 양산의 진산인 천성산 자락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대석마을은 농촌체험휴양마을로 각광받고 있다. 유서깊은 전통마을에 가선대부 이재영, 권순도, 독립투사 이규홍 선생 등 훌륭한 인물이 태어나고, 나라를 위해 헌신하였다. 전통마을에 어울리는 당산도 잘 보존되고 있고, 당산 스토리텔링도 잘 되어 있는 물안뜰마을 당산을 방문하여 산책하며 힐링해보길 권유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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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홍매화 개화상태의 2019년과 2021년 비교<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통도사 자장매와 홍매화의 매력 통도사의 350년 넘은 자장매는 한국을 대표하는 홍매화로 개화도 제일 빠르다. 자장매가 있는 영각 앞은 남향으로 양지바르고 전각이 차가운 북풍을 막아주기 때문에 성장 환경조건이 최상이다. 1월 초순부터 꽃망울을 터뜨려 3월 초순까지 피고 지고를 반복한다. 개화의 절정기는 해마다 온도 변화의 폭이 크므로 일정하지는 않다. 대체적으로 2월 중순에 만개하는 편이다. 통도사의 홍매화는 자장매가 대표적이지만 극락보전 옆에 진분홍매화와 연분홍매화도 아름다움이 자장매에 버금간다. 개화시기는 자장매가 가장 빠르고, 그 다음에 연분홍매화, 진분홍매화 순으로 순차적으로 피기 때문에 홍매화를 감상할 기간이 그만큼 길어지는 장점이 있다. 통도사의 자장매를 비롯한 연분홍매화와 진분홍매화는 전국에서 제일 먼저 봄을 화려하게 장식하기 때문에 개화시기만 되면 전국에서 많은 불자, 관광객, 사진작가들이 구름처럼 몰려온다. 통도사의 매화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은 천년고찰이자 세계문화유산인 통도사의 고색창연한 전각, 등탑, 현판 등과 조화를 이루어 사진작가들이 자신의 구도대로 멋진 사진을 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들판의 밭 가장자리나 일반 주택에 홍매화가 피어도 그 자체로는 아름답지만 주변 환경이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매력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통도사는 양산시민들에게 입장료를 받지 않기 때문에 홍매화는 자주 볼 수 있어 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많은 시민들이 자장매와 홍매화를 찍어서 SNS에 올려 봄이 왔음을 알리고 친구, 지인들에게 자랑한다. 필자도 매년 통도사 자장매와 홍매화를 감상하고 사진을 많이 찍고 있다. 봄이 오면 연달아 방문하여 홍매화의 아름다운 자태를 카메라에 담기 바쁘다. 연신 통도사를 방문하지만 홍매화는 볼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각각 개성이 강한 자장매, 진분홍매화, 연분홍매화의 황홀한 모습은 보면 볼수록 아름답다. 통도사 주차장에서 삼성반월교를 건너 성보박물관 옆에 있는 한송정 식당 앞에 도착하면 수양매화를 볼 수 있다. 수양매는 수양버들처럼 가지가 밑으로 축 처지는 모습이 특이하여 사람들의 눈에는 이색적으로 보인다. 벚꽃 종류 중에도 가지가 밑으로 처지는 수양벚꽃도 있다. 2. 통도사 홍매화 비교 통도사의 자장매, 진분홍매화, 연분홍매화, 수양매를 관리하는 차원에서 매년 병충해 방제도 하고, 거름도 주고, 전지를 하고 있다. 350년이 넘은 자장매는 특히 신경을 써서 영양제도 투입하고, 병충해 방제에 신경을 썼으면 좋겠다. 2019년 2월 20일의 홍매화는 활짝 만개하여 보기가 좋았다. 2021년 2월 21일에는 홍매화 나무 전지를 심하게 하여 꽃이 풍성하게 피지 않았다. 전지를 담당하는 조경회사가 자꾸 바뀌어서 문제가 된다. 필자는 통도사를 자주 방문하는데, 몇 년 전 여름철에 자장매, 홍매화를 전지하는 조경회사 대표를 직접 만나 적이 있어 질문한 적이 있다. 왜 홍매화 전지를 심하게 하여 꽃이 볼품없게 만드느냐고 물었더니 그때는 자신의 회사가 전지하지 않았다고 얘기했다. 한 조경회사가 맡아서 꾸준히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이따금 바뀌어 조경 비전문가가 무차별 전지를 할 때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올해 자장매는 전지를 심하게 하지 않은 편이다. 극락보전 옆의 진분홍매화, 연분홍매화는 전지를 너무 과하게 하여 마치 분재를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한송정 앞의 수양매는 가지가 밑으로 처지고 내려오는 것이 특색인데, 전지를 너무 많이 하여 수양매의 특성을 살리지 못했다. 수양매에 핀 꽃은 셀 수 있을 정도로 몇 개 되지 않는다. 통도사는 자장매와 홍매화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데, 매화나무 관리에 신경을 써야만 하겠다. 올해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꽃눈도 별로 없는 분재처럼 변신한 홍매화 때문에 통도사 입장객이 예년보다 많이 감소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앞으로 2022년 통도사 매화나무 전지는 2019년 수준으로 정성껏 하면 방문객이 구름처럼 몰려들 것으로 전망된다. 통도사 자장매를 제외하고 극락보전 옆의 연분홍매화, 진분홍매화, 한송정 앞의 수양매를 2019년 2월 20일과 올해의 2월 21일의 개화 상태를 비교해 보았다. 2019년에는 올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꽃이 풍성하게 피어 아름다웠다. 비교를 통해서 조경 전문가에 의한 세심한 전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직감할 수 있다. 지난 21일 아침 8시 조금 넘어 통도사를 방문했을 때 이미 입장객이 많았다. 자장매가 있는 영각 앞에 도착하니 김창환 화백이 나와서 그림 그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물감을 빨레트 위에서 미리 섞고, 캔버스를 단단히 고정시키는 작업을 하였다. 자장매 구경을 온 방문객들은 김창환 화백의 그림 그리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부모와 함께 세발자전거를 타고 온 꼬마도 김화백 자장매 그리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김화백은 19년째 통도사에 와서 자장매와 홍매화를 그리고 있다. 의지와 열정이 강한 화가다. 인형을 가지고 사진을 찍으러 온 동호인들이 있었는데,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작은 인형의 머리카락을 빗으로 빗기며 인형을 관리하고 정성들여 사진을 찍었다. 인형을 앞에 놓고 자장매가 나오도록 구도를 맞추어 사진 찍는 동호인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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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거리가 풍부한 순지마을의 당산나무/심상도 박사 화요 칼럼<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1. 순채에서 유래된 지명인 하북면 순지리 하북면의 순지리(蓴池里)는 순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지명이다. 순채가 자라는 연못이 있는 마을을 의미한다. 순지리에 있는 테마파크인 통도환타지아 내에는 연못이 있는데, ‘못안못’이라고 불린다. 현재는 통도환타지아 있다. 통도환타지아는 워터파크인 ‘아쿠아 환타지아’를 2019년 6월 22일 개장하여 하절기에 운영하고 있다. 순채는 여러해살이 수생식물로 길이 50~100cm이며, 작은 늪이나 연못에서 자란다. 옛날 ‘못안못’에 순채가 많이 서식하고 있어 마을 이름이 순지리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순채 이름은 중국의 한자명인 순채(蓴菜)에서 유래되었다. 순나물이라고 불리우는 순채나물은 연꽃잎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자생하는 곳 또한 연못이라 연과 비슷하다. 옛날에는 잎과 싹을 먹기 위해 논에서 재배하기도 했다. 순채는 고급 나물로 임금님 수라상에 올랐다고 한다. 순채는 부규, 순나물이라고도 하며, 중국 원산이다. 뿌리줄기가 옆으로 뻗으면서 길게 자라고 잎이 수면에 뜬다. 잎은 어긋나고 타원형이며, 뒷면은 자줏빛이 돌고 중앙에 잎자루가 달린다. 잎이 자랄 때는 어린줄기와 더불어 우무 같은 점액질로 둘러싸인다. 꽃은 5∼8월에 피고 검은 홍자색으로 잎겨드랑이에서 자란 긴 꽃자루 끝에 위를 보고 1개씩 달리며 지름 약 2cm이다. 수술은 암술을 감싸고 암술보다 길며 중앙의 암술머리는 밖으로 구부러져 있다. 수술이 시들고 나면 암술이 자라 머리에 끈적끈적한 점액질이 생긴다. 순채의 열매는 달걀 모양이며 꽃받침과 암술대가 남아 있다. 종자는 물속에서 익는다. 우무 같은 점질로 싸인 어린순을 식용한다. 어린잎은 피를 멈추게 하고, 위장을 튼튼히 하며, 소변이 잘 나오게 하는 효능이 있다. 동아시아, 인도, 오스트레일리아, 서아프리카, 북아메리카 등지에 분포한다. 우리나라에서 멸종위기 야생식물 2급으로 지정되어 있다. 2. 하북면 순지리 마을의 역사적 유래 순지리(蓴池里)는 문헌상의 구체적 기록은 알 수 없으나, 구전으로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7세기 중엽쯤에 김장자라고 하는 사람이 지금의 신평(新坪)에 살았는데 그의 아들이 어사(御使)가 되었다고 하여 ‘어사촌(御使村)’이라 칭하여 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를 근거로 7세기 중엽부터 사람이 거주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인근 방기리, 신평유적에서 청동기유적이 발굴됨에 따라 최초 거주시기는 더욱 올라갈 수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신평중앙길이 일명 어사길이라 할 수 있다. 순지를 어정리(於井里 : 샘이 있는 마을)라 한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통도사를 창건할 당시 이곳에 와서 절터를 찾느라고 어정거렸다고 하여 어정리라고도 부른다고 전해진다. 통도사 산문 앞의 마을에 커다란 바위가 많고 소나무가 우거진 곳을 ‘땅바우공원’이라고 한다. 땅바우공원 뒤에 들판이 있었는데, 땅바우들이라고 하였다. 현재는 통도사 산문 주차장으로 변했다. 역시 전설에 의하면 자장율사가 현재 구룡지 자리에 있던 커다란 연못을 메우고 여기에 통도사를 지을 때 토속신앙을 믿던 토박이 주민들과 마찰이 있었다. 통도사 창건을 방해하던 구룡의 전설은 현대식으로 해석하면 천신신앙을 믿고 있던 토박이 양산 백성들이 생소한 외래 종교인 불교에 격렬히 반대했던 것으로 유추할 수도 있다. 종교 간 마찰이 생기자 바로 땅바우공원에서 자장율사와 토박이 주민들이 협상을 벌였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 천주교가 들어올 때도 기득권 세력인 유교와 신흥 외래 종교인 천주교의 마찰로 천주교를 믿는 신자들 사이에 많은 순교자가 발생하였다. 조선 시대 중엽에 인접 마을을 합하여 ‘대순지동(大蓴池洞)’, 또는 ‘경상대동(境上大洞)’이라 칭했다. 조선조 말엽에 상북방(上北坊)이라 부를 때에 ‘순지리(蓴池里)’로 불렸다. 1910년 행정개편으로 신평이 순지리에 속하다가 신평마을이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마을을 동부, 서부, 남부, 북부리로 나누었다. 마을 인근에는 통도사와 영축산이 위치하고, 남쪽으로는 양산천이 흐르고 있다. 통도사 안으로 이어지는 계곡과 도로 주위에는 울창한 송림이 조성된 무풍한송로가 있어 마을 주민들과 관광객들에게 훌륭한 볼거리와 휴식처를 제공해주고 있다. 마을에서 잘 보이는 영축산은 사계절 내내 그 모습을 달리하여 주민들에게 맑은 공기와 훌륭한 경치를 제공해주고 있다. 순지리는 하북면 행정복지센터, 우체국, 농협, 파출소, 보건소, 하북초등학교, 보광중고둥학교, 통도환타지아, 통도아트센터, 통도사신평시외버스터미널, 신평장, 양산시 농특산물전시판매장, 각종 숙박시설, 식당 등이 자리 잡고 있어 명실상부한 하북면의 중심지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순지리와 가까운 곳에 있는 울주군의 삼성SDI 공장이 활발하게 가동될 때 하북면의 상권은 활성화 되어 주민소득 증대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공장의 많은 직원들이 충남 아산의 공장으로 대거 이전하면서 공장 직원 숫자가 줄어들자 지역의 경기도 침체되기 시작하였다. 하북면은 통도사를 방문하는 불자와 관광객에게만 의존할 수 없으므로 다양한 대책이 마련되어야 하겠다. 하북면을 살리기 위한 도시재생 뉴딜사업이 시급하다. 3. 순지리 마을의 당산나무와 통도아트센터 순지리의 당산나무는 통도아트센터 광장과 건물 앞에 있다. 당산나무에는 팽나무 안내문이 붙어 있다. 당산나무 밑에는 제단이 두 개 마련되어 있다. 앞쪽의 큰 제단은 당산 할배, 뒤쪽의 작은 제단은 당산 할매를 위한 것이다, 순지마을의 당산제는 삼월삼짓날 거행된다고 한다. 농림부의 일반농산어촌 개발사업인 ‘하북면 농촌중심지 활성화 사업’의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김상철 사무국장이 확인해주었다. 당산나무는 통도아트센터 문화광장 쪽에 6그루, 도로 반대편인 ‘언양불고기’ 식당 앞에 1그루가 있다. 당산나무는 언양불고기식당 직원에 의하면 상수리나무도 있다고 하였다. 당산나무 밑에 주민들이 무더운 날 걸터앉아 쉴 수 있도록 사각형의 구조물이 조성되어 있다. 당산나무 밑에는 통도예술마을에서 설치한 다음과 같은 안내판도 설치되어 있다. ‘통도예술마을 문화, 예술 공연장은 지역주민들의 소통과 통도사를 찾는 관광객들의 휴식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입니다. 봄, 여름에는 당산 할배가 만들어주는 시원한 그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가을과 겨울에는 소소카페에서 향긋한 커피와 음료를 즐길 수 있습니다.’ 통도아트센터에 있는 ‘CAFE소소’는 지역주민인 할머니 바리스타들이 운영하고 있어 방문객의 인기를 끌고 있다. 주민들은 바리스타를 양성하는 전문학원에 등록하여 자격증을 취득하거나 커피와 음료 실무 교육을 이수하는 열정을 보였다. 이들 할머니 바리스타의 자원봉사 덕분에 북카페인 ‘CAFE소소’ 운영이 원만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운영 수익은 센터 운영과 불우이웃돕기에 사용된다. 당산나무는 옛날 하북면 중심도로인 신평중앙길 바로 옆에 있다. 통도아트센터에서 통도사 산문 앞까지 가는 ‘통도문화예술거리’의 시작점에 당산나무가 있다. 시가지 한복판의 도로변에 있지만 여태까지 없어지지 않고 당산나무가 존재하는 것은 마을 주민들의 전통문화에 대한 강한 믿음과, 영험한 당산 할배와 당산 할매 덕분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산나무는 통도아트센터의 문화광장과 공연장에 연접하여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잘 보존될 것으로 전망할 수 있다. 문화광장 무대에서는 연중 다양한 축제, 공연이 진행되어 많은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기 때문에 당산 할배와 당산 할매는 심심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4. 당산나무와 정부 공모사업 도전 하북면은 ‘면소재지 종합정비사업’을 통해 95억 7천만 원의 국비(70%), 도비(9%), 양산시비(21%)가 투입되어 주요사업인 통도아트센터와 문화광장이 조성됨으로써 성공리에 완수되었다. 이 사업은 한국농어촌공사 경남본부에서 모범사례인 우수권역으로 선정하였는데, 김상걸 추진위원장의 탁월한 리더십 덕분이었다. 김위원장은 전국의 우수권역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자비를 들여 전국 곳곳의 선진지를 방문하는 열정을 보였다. 일반농산어촌 개발사업을 추진하는 전국의 다른 권역에서 많은 선진지 견학단이 몰려오고 있다. 하북면이 생긴 이래로 두 번째로 많은 국도비, 양산시비가 투입되는 농림부의 일반농산어촌 개발사업인 ‘하북면 농촌중심지 활성화사업’은 2019년에 착수되어 2023년까지 150억 원을 투자할 예정이다. 농촌중심지 활성화사업에는 이복우 위원장과 김상철 사무국장이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어 앞으로 성공적 추진이 예상된다. 또한 하북면에는 정부에서 공모사업으로 추진 중인 도시재생 뉴딜사업의 공모를 준비 중에 있다. 이 사업의 규모는 무려 250억 원에 달하는 큰 규모다. 하북면이 공모사업에 꼭 선정되길 기원하는 바이다. 올해 삼월삼짓날에 순지리 당산제를 지낼 때 마을주민들은 이러한 간절한 소망을 담아 당산 할배와 당산 할매의 은덕을 입을 수 있도록 잘 빌어야 할 것이다. 농림부에서는 일반농산어촌 개발사업을 추진할 때 정부 시책에 호응하여 지역주민들이 단합하고 적극적으로 사업에 참여하여 성공시키는 권역을 우선적으로 선정하고 있다. 통도아트센터에는 지하 1층에 65평 규모의 대강당이 있으며, 1층에 세계 우표・화폐・동전・도자기 전시실, 2층에 ‘순지작은도서관’, 동아리연습실, 문화강좌실 등이 있다. 전시실, 도서관은 무료시설이고, ‘CAFE소소’는 커피와 음료를 저렴하게 판매하고 있다. 세미나, 회의 등 유료 시설을 이용할 때는 예약하고 사용료를 지불하면 된다. 통도아트센터 뒤에는 ‘양산시 농특산물전시판매장’이 있는데, 대표 운영자는 박희숙 회장(010-7376-1470)이다. 길된장, 벌꿀, 현미수제누룽지, 772영농 법기수원지 약용도라지, 사과즙, 장아찌, 홍도라지 조청, 도자기 찻잔, 공예품 등을 판매한다. 천연염색 의류, 머플러, 손수건 등의 제품은 통도인디고 김경란 대표(010-6382-0067)와 회원들이 제작, 판매하고 있다. 통도사를 방문하는 가족단위 관광객, 부부, 연인들은 양산시 하북면 신평중앙길 24에 있는 통도아트센터를 방문하여 주차장에 차를 세운 다음 당산나무도 둘러보고, CAFE소소에서 커피도 한잔하고, 아이들은 각종 전시장을 구경하며, 도서관에서 책도 읽고, ‘양산시 농특산물전시판매장’에서 양산의 농특산물을 구매하면서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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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추위 속에서 토곡산 등산/심상도.총괄위원장<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복천암 갑자기 몰아친 강추위가 한창인 2월 18일 9시 35분에 원동면 화제리 내화마을에서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 범서마을에 거주하는 정덕유 씨와 함께 출발하여 복천암을 지나 해발 855m의 토곡산 정상에 올랐다. 이번 등산은 정상적인 등산로가 아닌 길이 없는 바위 너덜지대를 거쳐 무속인 기도처를 답사하는 목적의 특별한 산행이었다. 영남삿갓의 고향은 화제리 서편마을로 토곡산의 등산로를 잘 알고 있어 길을 안내하였다. 복천암 입구까지는 영남삿갓의 지인 최성수 씨에게 부탁하여 차량 편의를 제공받았다. 쌍용자동차 렉스턴 스포츠 칸 차량을 타고 복천암 입구의 가파른 오르막길까지 올라갔다. 교통편을 제공해준 최성수 씨에게 감사드린다. 최성수 씨의 부인은 이하은 아동문학가이다. 날씨는 영하를 기록하여 쌀쌀했지만 복천암이 토곡산 중턱에 있고 남향이라 바람이 불지 않고 쾌청하여 등산하기에는 좋았다. 복천암의 폭포는 물이 거의 마르고, 얼음 고드름이 달려있었다. 얼어붙었지만 물이 졸졸 흘러내려 봄이 오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복천암에서 내려다보이는 화제마을은 눈으로는 잘 보였지만 역광이라 사진을 찍기에는 곤란하였다. 복천암은 커다란 바위가 절 뒤편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폭포 뒤쪽의 산신각 옆으로 가면 커다란 바위 틈에서 석간수가 흘러나왔다. 깊은 산속의 암자나 기도처는 식수가 있어야만 생활을 할 수 있다. 바위를 뚫고 흘러나오는 석간수는 물맛이 좋고 건강에도 이롭다. 물을 마시기 위해 바가지를 찾으니 없었다. 영남삿갓이 폭포수가 떨어지는 물받이 얼음 속에 박혀있는 바가지를 발견하고 얼음을 깨서 꺼냈다. 석간수를 바가지에 떠서 마셨는데, 가슴 속까지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복천암을 복천정사라고도 불러 산행 표지판에는 복천정사가 나와 있다. 복천암은 토곡산 중턱의 해발 500m 깎아지른 절벽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복천암에서 내화마을까지는 1.7km. 토곡산 정상까지는 1.5km 정도 된다. 복천암은 터가 매우 좋은 명당자리에 있다. 바위에서 나오는 좋은 기운 덕분에 기도발은 잘 받을 것으로 보였다. 암자 왼쪽으로 가면 경사진 절벽에 그야말로 정성들여 쌓은 공든 탑이 여러 기가 나온다. 대웅전은 시멘트 콘크리트 건물로 지붕에는 청기와를 이었다. 영남삿갓의 증언에 의하면 복천암을 지을 때 마을 사람들이 시멘트, 모래, 벽돌, 블록 등을 지게로 날랐다고 한다. 인부들은 사찰 공사 짐을 운반해주고 내려올 때는 편하게 그냥 오지 않고 나무를 한 짐씩 해서 지고 왔다고 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 주민들이 먹고살기 위해 눈물겨운 고통을 감내하였다. 암자 접근성이 떨어져서 불자나 등산객이 많이 오지 않는다. 절 아래 입구까지 시멘트로 포장하여 차가 갈 수 있으나 급경사 S자 커브 길이라 승용차는 올라가지 못하고 4륜 구동차만 접근이 가능하다. 찻길이 끝나면 복천암까지 400~500m쯤 걸어 올라가야 한다. 암자의 짐은 도르레로 운반을 한다. 차를 타고 끝까지 올라가는 것은 약간 위험하므로 적당한 곳에 주차를 하고 걸어가는 것이 안전하다.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이 옛날 나무하러 다니던 산이라 익숙한 길로 안내하였다. 때로는 바위를 부여안고 조심조심 오르는 고난이도 등산으로 위험천만한 코스가 많았다. 영남삿갓과 정덕유 씨는 화제마을에 거주하여 토곡산 지리에 매우 익숙하였지만 필자는 생전 처음 가보는 난코스라 올라가는 것이 아슬아슬한 구간이 많아 애를 먹었다. 곳곳에 큰 바위가 있어 웅장한 느낌이 들었다. 2. 기도처 답사 토곡산 등산로는 암자 오른쪽으로 나 있고, 초입에 작은 동굴이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금을 채취하던 금광이다. 등산로를 조금 오르면 금광과 연결된 웅덩이에 물이 고여 있다. 그 깊이를 알 수는 없다. 복천암 뒤가 육안으로 볼 때 온통 바위투성이인데, 금맥을 찾아 굴진한 깊은 금광도 전부 암벽이었다. 등반하다가 영남삿갓의 안내로 등산로를 벗어나 험한 코스로 접어들었다. 무속인들의 기도처를 탐방하는 등산이 시작되었다. 도중에 바위 너덜겅이 있고, 집채보다 큰 바위들이 있어 사진을 연신 찍었다. 때로는 길이 없어 바위 절벽을 우회하여 위쪽으로 전진하였다. 바위 절벽의 중턱에 있는 마치 사람 얼굴 형상처럼 보이는 바위를 한참 쳐다보며 사진을 찍었다. 전쟁터에서 적을 수색하는 정찰병처럼 기도처가 있을 만한 바위 동굴을 탐색하였다. 길도 없는 곳을 헤매며 동굴을 찾는데 마침내 큰 바위 틈을 발견하여 올라갔다. 예상대로 그곳은 무속인 기도처였다. 작은 돌로 제단을 만들어놓았다. 토곡산 산신령의 영험한 기운을 받기 위하여 험한 산의 길도 없는 바위를 타고넘어 이곳까지 기도처를 찾아온 무속인의 의지는 실로 대단하다. 대부분의 기도처는 커다란 바위가 있는 작은 동굴에 자리 잡고 있다. 운 좋게 석간수가 나오면 최고의 기도처로 각광받았다. 땅을 파서 샘물이 나오면 오래 머무를 수 있다. 또는 동굴 가까운 곳에 계곡이 있으면 계곡으로 흐르는 물을 식수로 사용할 수 있다. 산 위로 계속 오르다 보니 바위 위에 고드름 있는 곳이 눈에 띄었다. 고드름은 대개 위에서 아래로 달리는데, 자세히 관찰해보니 역고드름도 보였다. 땅에서 위로 치솟는 작은 역고드름이 신기하였다. 계속 힘들게 위험한 바위 코스를 가다가 잠시 쉬면서 간식을 먹었다. 정덕유 씨가 가져온 귤, 영남삿갓의 연양갱 과자를 맛있게 먹었다. 에너지를 보충하고 산 위로 올라갔다. 토곡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등산로와 표지판이 나타났다. 등산로 옆의 커다란 바위를 사진 찍었다. 영남삿갓은 선바위라고 명명하였다. 3. 토곡산 정상 토곡산 정상에 오후 1시 무렵에 도착하였다. 정상은 해발 855m로 양산시에서 2008년 1월 1일에 정상석을 세워놓았다. 2m가 훨씬 넘는 정상석은 아마 헬기로 운반하였을 것이다. 정상석 앞에는 목제 데크, 철난간으로 전망대를 만들어놓아 사방을 조망할 수 있었다. 영남삿갓의 말에 의하면 주민들은 토곡산을 함박산으로 부른다고 하였다. 화제리, 낙동강, 원동면 함포마을. 가야진사. 양산시가지, 사송 신도시 조성지, 금정산, 천성산, 화엄벌, 영축산, 천태산, 낙동강 건너편 김해 방향의 무척산, 에덴밸리스키장 풍력발전기, 원동면 명전마을, 낙동강 주변의 부산방향 등이 쾌청한 날씨 덕분에 선명하게 보였다. 전망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산악인 추모비가 있었다. 부산지역의 모 산악회 회장을 지낸 분인데, 등산 중 사망하여 회원들이 추모비를 세웠다고 하였다. 무리한 등산을 하면 다치거나 심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므로 항상 조심해야만 한다. 등산 중에 음주도 사고를 유발하기 쉬우므로 등산을 안전하게 마치고 하산하여 하산주를 기분 좋게 마셔야 한다. 점심은 정상에서 필자가 북정동 ’고봉민 김밥인‘에서 사온 김밥을 먹고, 후식으로 초코파이, 초콜렛 등을 먹었다. 정덕유 씨가 마늘잎 장아찌 반찬, 숭늉, 커피, 보온병에 뜨거운 물을 가져와 맛있게 먹었다. 정상에는 바람이 불어서 약간 추웠지만 데크에 앉아서 점심을 먹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영남삿갓은 지필묵을 가져와 데크 바닥에 한지를 펼쳐서 붓글씨로 아름다운 시를 한 수 지었다. 시는 정덕유 씨에게 증정하였다. 영남삿갓은 양산숲길보전회 답사 때도 참석하여 붓글씨로 즉석 시를 지어 회원들에게 선물하는데, 인기가 좋다.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다른 등산객은 보이지 않았다. 4. 서룡리 방향 하산 토곡산 정상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자리를 정리 후 하산하였다. 서룡리 방향으로 내려가는데, 등산로가 암릉으로 매우 위험하니 조심하라는 안내판이 있었다. 과연 안내판대로 내려가는 등산코스는 바위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었다. 난코스 구간은 칼바위로 아주 위험하였다. 한곳에 이르니 바위 암벽에 가로막혀 내려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선도자 영남삿갓은 바위 아래로 내려가 다시 바위 위를 올라가려고 하였지만 밧줄이 없어 오르기에는 불가능하게 보였다. 필자는 내려가지 않고 관망하다가 왼쪽 편의 거대한 바위를 안고 돌면서 가니 등산로가 나와서 이 코스로 오라고 알려주었다. 바위 아래 발을 딛는 곳은 아래로 경사져 미끄러지면 추락할 수 있는 위험천만한 구간이었다. 이 코스는 비가 오는 날이나 눈이 덮여 있을 때는 통행이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위험 구간을 안전하게 통과하면서 낙동강 쪽을 바라보니 조망이 좋았다. 한참 내려오니 헬기장이 나왔다. 관리하지 않아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헬기 착륙은 불가능하였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일당 31명의 북한 무장공비가 청와대 습격을 위해 침투한 사건으로 위기의식을 느낀 박정희 대통령은 안보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1968년 4월 1일 예비군을 창설하였다. 북한은 도발을 이어가 1968년 10월 30일 울진 삼척지구에 120명의 북한 무장공비가 침투하였다. 헬기장은 이와 같은 북한의 연속되는 도발 때문에 만들어졌다. 필자가 어렸을 때 고향인 강원도 삼척군 북평읍(현재 동해시)에 살 때 초록산 속에서 울진에 상륙 후 도주하던 무장공비가 예비군에 의해 발견되었다. 예비군과 군인이 출동하여 소탕작전을 벌였는데, 예비군이 간첩을 잡는데 결정적 공을 세웠다. 무장공비를 잡기 위하여 비행기에서 쏜 조명탄이 밤하늘을 대낮처럼 환하게 밝혔다. 헬기장 자리에 앉아 한참 동안 이야기하며 쉬었다. 영남삿갓이 빅 초콜렛, 에너지 과자를 가져와 맛있게 먹으며 담소를 나누었다. 휴식을 취하며 간식도 먹으니 힘이나 폭포, 무속인 기도처를 찾아 나섰다. 5. 헬기장에서 좌측 영암사 방향 하산 국제신문 이진규 기자가 쓴 2013년 2월 13일자 ‘근교산&그너머 814회 양산 용골산~토곡산 기사에 위험하지만 전망이 좋은 토곡산 코스로 서룡리 수청마을에서 용골산을 거쳐서 토곡산 정상을 향하는 다음의 등산로를 추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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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문화예술회관, 간편 로그인 시스템 도입!“ 회원가입 없이, 네이버와 카카오 계정으로 공연 예매” 양산시시설관리공단(이사장 정순성) 양산문화예술회관과 쌍벽루아트홀에서 공연예매를 위한 간편 로그인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이에 따라 기존의 홈페이지 회원 가입 후 공연예매가 가능하던 시스템이 카카오, 네이버 계정 로그인을 통한 예매로 간소화 되었다. 단, 유료회원인 양이회원과 산이회원의 경우 기존 아이디로 로그인해야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문화예술회관 관계자는 “이번 간편 로그인 시스템 도입으로 시민들이 더 쉽고 편하게 공연을 예매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전하였다. 한편, 양산문화예술회관은 코로나19로 지친 양산시민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고자 3월 기획공연으로 쇼그맨2(박성호, 김재욱, 정범균, 김원효, 이종훈 출연)를 개최할 예정이며, 모바일 티켓운영을 비롯한 발열체크, 거리두기 좌석제 시행, 전자명부시스템 도입, 정기적 방역실시 등 감염병 관리지침 준수를 통해 시민이 안전하게 공연을 관람할 수 있도록 시설관리에 만전을 기하고 양산시시설관리공단(이사장 정순성) 양산문화예술회관과 쌍벽루아트홀에서 공연예매를 위한 간편 로그인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있다. “회원가입 없이, 네이버와 카카오 계정으로 공연 예매” 양산시시설관리공단(이사장 정순성) 양산문화예술회관과 쌍벽루아트홀에서 공연예매를 위한 간편 로그인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이에 따라 기존의 홈페이지 회원 가입 후 공연예매가 가능하던 시스템이 카카오, 네이버 계정 로그인을 통한 예매로 간소화 되었다. 단, 유료회원인 양이회원과 산이회원의 경우 기존 아이디로 로그인해야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문화예술회관 관계자는 “이번 간편 로그인 시스템 도입으로 시민들이 더 쉽고 편하게 공연을 예매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전하였다. 한편, 양산문화예술회관은 코로나19로 지친 양산시민들에게 웃음을 선사하고자 3월 기획공연으로 쇼그맨2(박성호, 김재욱, 정범균, 김원효, 이종훈 출연)를 개최할 예정이며, 모바일 티켓운영을 비롯한 발열체크, 거리두기 좌석제 시행, 전자명부시스템 도입, 정기적 방역실시 등 감염병 관리지침 준수를 통해 시민이 안전하게 공연을 관람할 수 있도록 시설관리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