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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5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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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황산벌 전투의 현장 황산성

심상도박사, 화요칼럼,황산벌 전투의 현장 황산성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연산면 관동리와 가까운 황산성 황산성(黃山城)은 충남 논산시 연산면 표정리 산20에 있다.관동리는 백제의 계백 장군의5천 명의 결사대와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5만 명의 신라군이 격돌한 전투 현장 중의 하나이다. 16세의 어린 화랑 관창이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한 곳이다.관동리라는 지명이 관창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동네 사람들은 관창이 여기에서 죽었기 때문에 관창골이라고 부른다. 황산성은 논산과 연산 일대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해발386m의 함지봉(咸芝峰)정상에 위치한 테뫼식 산성(산봉우리에 테를 두른 듯이 쌓은 산성)이다.황성(黃城)으로도 불리는 황산성은 서쪽으로 노성산성과 일직선을 이루며,동쪽으로 황령산성에서 모촌리산성으로 이어지는 백제시대 사비성 부여의 최후 방어선이다. 자연지세를 최대한 이용하였으나 북서쪽으로 멀리 바라다보이는 노성산성(魯城山城)이 산봉으로 가로막혔음을 극복하기 위하여 북문터에서300m쯤 북쪽 산봉우리에 작은 보루를 두었던 흔적이 있다.동쪽과 서남쪽으로 주변 가까이 산성들이 있고,특히 동남쪽의 평야지대는 백제멸망 당시 큰 전투가 벌어졌던 황산벌판이어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산성이다(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산성은 황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마름모꼴 형태로 자리를 잡았는데,지형에 따라 편축식(片築式:성의 바깥쪽만 쌓는 방식)과 협축식(夾築式:성의 안팎을 다 쌓는 방식)을 혼용하여 축조되었다.자연들을 깨서 사용하였으나 일부는 직사각형과 정사각형으로 다듬은 돌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시간적인 차이를 두고 개·보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의 높이는 서쪽2m,동쪽1.8m이고,산성의 둘레는870m이며,높은 북쪽 봉우리는 자연 지형을 이용하였다.『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성황산석성(城隍山石城),『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북산성(北山城)이라 하였다.아울러 성벽의 둘레는1,740척,혹은493보였으며,높이는12척이고,성내에는 우물1개소와 군창(軍倉)이 있었던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디지털논산문화대전). 황산성은 성벽 전체를 돌로 쌓은 석성으로,황산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마름모꼴의 형태로 자리하고 있는데 지형에 따라 편축식과 협축식을 혼용하여 축조하였다.축성에 사용된 돌은 부정형 할석과 방형,장방형으로 다듬은 것들이 있는데,이는 후대에 개·보수한 결과로 보인다. 성벽은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는데,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은 높이2m에 이르는 구간도 있다.부대시설로는 문지3개소와 건물지4개소,장대지1개소,우물터1곳 등이 있다.기록에는 우물터1개소와 군창(軍倉)이 있었던 사실만 전하나,실제로는 더 많은 부대시설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문지는 동벽,서벽,남벽에서 확인되었으며,남문지 안쪽으로는 가장 큰 건물지가 자리하고 있다.성내에서는 연화문 와당과 인장와(印章瓦)를 비롯한 다양한 기와와 토기 조각이 수습되었다.대체로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시기의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성 안에서 출토된‘황산인방(黃山寅方)’이라는 기와를 근거로 백제 오방성(五方城)중 득안성(得安城)으로 추정되기도 한다.여러 곳에서 고려와 조선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는데,특히‘대안원년(大安元年)’이란 명문이 새겨진 기와 조각은1209년(고려 희종5)의 것으로 보아 황산성은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계속 사용된 성터였음을 알 수 있다. 논산시에서 대전광역시로 통하는 국도4호선을 타고10㎞쯤 가면 연산면 소재지인 연산리에 이른다.여기에서 북쪽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호남선 철도를 건너면 관동리 행교골에 닿는데,이 행교골의 뒷산이 황산이다.행교골에서 황산에 이르는 길은 길이 잘 나 있는 편이며,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산성의 남벽에 닿는다. 2.황산성 복원 염원비(黃山城 復原 念願碑) 필자는2023년11월23일 논산시 연산면에 있는 황산성을 답사하였다.화랑 관창이 죽은 연산면 관동리 현장을 방문하였다가 동네 주민을 만나 물어보니 황산성으로 차가 갈 수 있고 주차장도 있다는 말을 듣고 골짜기를 지나 올라갔다.황산성 입구에 안내판과 황산성 복원 염원비가 설치되어 있어 감동받았다. 백제가 신라군에 패배하여 망국의 길로 접어든 황산벌 전투 현장을 주민들이 잊지 않고 중요한 역사 유적인 황산성을 복원하고자 하는 염원이 결실을 맺은 것으로 보여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복원 염원비를 읽어보니 황산벌 전투에서 전사한 백제군과 신라군을 모두 추모하는 내용이어서 더욱 감명깊었다.비문 내용과 유적 복원에 앞선 인사들을 소개하기로 한다. 서기660년 여름 삼한일통(三韓一統)을 꿈꾸는 신라군이 백제로 짓쳐들어왔다.신라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5만 대군에 맞서 백제는 계백 대장군의5천 결사대로 하여금 이를 저지케 했다. 오로지 나라를 지키겠다는 충의(忠議)의 깃발 아래 결사 항전에 나선 계백의5천 결사대는 신라 김유신 군(軍)과 맞서 네 번의 싸움에서 이기고도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다섯 번째 마지막 전투에서 패해 이곳 황산벌의 산중고혼(山中孤魂)이 되었다. 그 후1400여 년이 흐르도록5천 결사대 젊은 영웅들의 숨결은 이곳 황산성(山城)에 머물러 돌아보는 이 없이 천년 설움을 솔숲 소리로 토해내니 대를 물린 후인(後人)들의 가슴은 아프고 처절하다. 이에 우리 연산면의 뜻있는 후인(後人)들이 황산성복원회(黃山城復原會)결성하고 십시일반(十一飯)의 뜻을 모아 민간 복원 기금을 모금하는 등 황산성(黃山城)복원(復原)의 간절한 염원(金)을 드러내 밝히니 충청남도가 화담(和答)하고 논산시가 호응(好應)해서 마침내 황산성(黃山城)복원(復原)사업을 시작(始作)했다.이 어찌 감격스럽지 않겠는가? 바라거니와 계백 장군의 웅혼(魂)한 지략(知略)이 피어올랐던 황산성(山城)복원(原)하고 나라를 위한 충의(忠義)의 넋으로 화(化)한 백제의5천 결사대와 천리 먼 길 나서 순국혼(殉國魂)으로 화한 신라군 전몰(戰歿)장병들의 외로운 넋을 위령(慰靈)하는 합동(合同)위령비(慰靈碑)를 건립하여 자랑스러운 이 논산(論山)우리 연산(山)땅이 대한민국을 지키는 호국(護國)의 성역(聖域)으로 길이 일컬어지기를 염원(願)하여 황산성복원회(黃山城復原會)의 이름으로 이 비를 세우노라. 서기2022년12월 일 황산성 복원회장:도기정 회원:강기애,강정숙,곽도영,김만중,김명화,김선원,김의현,김중식,김태원,류진선,박민자,박지연,박현배,안종명,오인호,이순봉,이영숙,이우원,이준행,이창구,이충렬,이태경,전선희,정규태,주재순,최창열,홍만기. 3.황산성 답사 소감 백제의 최후를 장식한 계백 장군이 이끄는5천 명의 결사대의 항전은 언제 들어도 비장한 느낌이 든다.백제 의자왕의 사치와 향락,실정으로 국정은 기울고 있을 때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나라가 멸망하였다.의자왕은 성충,흥수 등 충신의 간언을 멀리 하고 아첨하는 신하들만 가까이하여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었다. 계백 장군은 꺼져가는 백제의 불꽃을 마지막으로 타오르게 하고 장렬하게 전사하여 만고의 충신으로 자리매김하였다.백제인의 충절과 기백을 보여준 계백 장군은 영원히 역사적 위인으로 추앙받고 있다.황산벌 전투도 거의1400여 년 가까이 오래전 일이 되어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의론이 분분하다.현지 주민들은 역사의 현장에서 대를 이어 살아왔기 때문에 역사학자들보다 오히려 정확하게 볼 수도 있다. 황산벌 전투가 벌어진 곳은 신양리,신암리 마을로 전해지고 있다.신암리 마을회관을 방문하여 주민들에게 물어보려고 했는데,사람이 없었다.마을 길을 걸어가면서 멀리 보니 주민이 밭에서 일하고 있어 논두렁을 가로질러가 인사를 하였다.밭에서 김장용 무를 뽑고 있었다.황산벌 전투에 대해 질문하였다. 87세 이기병 씨는 황산벌 전투에 대해 여러 가지 중요한 정보를 알려줘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화랑 관창이 죽은 장소를 알려주었는데,연산면 관동리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또한 신라군은 세 방면으로 진격해왔다고 설명하였다.신라군이 진격한 곳은 황룡리의 용처럼 생긴 황령고개,명암리 양경고개,국사봉 등이었다.중요한 정보를 알려준 데 대하여 감사 인사를 하고 화랑 관창이 죽은 관동리로 향했다. 관동교라는 다리를 지나 관동리 새마을 회관 겸 노인회관을 사진 찍고 마을 안쪽으로 계속 들어갔다.도로 옆의 밭에서 일하는 주민을 만나 화랑 관창에 대해 물어보았다. 77세의 도민선 씨는 황산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었다.황산성 입구까지 차로 올라갈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도민선 씨는 황산성을 관저골이라 불렀다고 하였다.군사 요충지인 황산성에 주둔한 관리의 주거지인 관저가 있었다고 하였다. 오후 시간이라 황산성으로 걸어갔다 오기에는 늦었지만 차로 갈 수 있다는 말에 올라가 보기로 하였다.주차장에 도착하여 조금 올라가니 황산성의 성벽이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성안에 물이 고여 있는 큰 우물도 남아 있었다.성벽을 따라 올라가는 등산로에는 영산홍,철쭉 등을 심어 놓았고 정자,벤치도 있었다.성벽은 현재 복원 공사 중으로 성벽 돌이 무너져 내린 곳이 보였다. 정상에 올라가니 향적산(국사봉)까지8.2km,주차장430m라는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었다.쉼터와 정자도 있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주변은 철쭉,영산홍을 심어 놓아 주민들이 잘 관리하는 느낌이 들었다.황산벌,비닐하우스,강 등이 내려다 보여 조망이 좋았다.쉼터 주변에는 기왓장이 많이 흩어져 있어 건물이 설치되었던 흔적이 드러났다.황산성을 내려가는 등산로는 가팔라 밧줄이 설치되었고,성벽 돌도 보였다. 황산성을 일주하고 주차장으로 내려왔을 때 등산로에 까만 산양 한 마리가 나타났다.멀리서 사진을 찍었는데 도망가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황산벌 전투에서 순국한 백제 군사가 산양으로 환생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선한 눈망울을 지닌 산양은 천천히 필자가 내려온 황산성 정상 쪽으로 올라갔다.황산성은 당초 답사 계획에 없었지만 운 좋게 주민 잘 만난 덕분에 살펴볼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숲애(愛)서(徐) 상반기 웰니스 힐링캠프 참가자 모집

숲애(愛)서(徐) 상반기 웰니스 힐링캠프 참가자 모집

- 오는 5월 25일부터 26일까지, 치유프로그램 3종 등 다양한 체험 - 양산시시설관리공단(이사장 박성관) 숲애(愛)서(徐)에서 대사질환에 관심있는 참가자를 위한 ‘2024 상반기 웰니스 힐링캠프’를 운영한다고 밝혔다. 이번 캠프는 오는 5월 25일부터 26일까지 1박 2일로 운영되며, △숲속의 객실 1박, △치유식사 2식, △대사질환 특강, △산림치유, 양산꽃차 티 테라피 등 치유프로그램 3종을 포함하며 그 외에도 열치유실(찜질방), 수치유실(목욕탕)등 다양한 부대시설을 이용할 수 있으며, 건강관리를 위한 기념품도 제공할 예정이다. 참가대상은 만30세 ~ 만65세 미만의 대사질환에 관심있는 사람으로 양산시민을 우선으로 모집하며, 참가비용은 체험, 식사, 숙박을 모두 포함하여 1인실 9만원, 2인실 16만원, 4인실 30만원으로 신청기한은 오는 5월 15일까지 숲애서 누리집을 통해 온라인 예약 선착순 접수를 진행한다. (http://www.yssisul.or.kr/forest) 한편, ‘숲애서’는 작년에 이어 2024-2025년에도 ▲한국관광공사 선정 추천 웰니스관광지에 선정되었으며, ▲경남도 최초 산림청 산림교육센터 지정, ▲경남교육청 교육연수원 특수분야 연수기관 지정, ▲경남관광재단 선정 경남 대표 웰니스 관광지에 선정되어 전국을 대표하는 치유전문시설로 거듭나고 있다.

심상도박사,오늘의뉴스 양산차인연합회 다방동 야생차나무 군락지 답사

심상도박사,오늘의뉴스 양산차인연합회 다방동 야생차나무 군락지 답사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차(茶)로 이어진 역사의 숨결’행사 소개 법기도자차문화원 이지안 원장이 인솔한 양산차인연합회 회원15명이4월21일10시 다방동 야생차나무 군락지 답사에 참가하였다. ‘차로 이어진 역사의 숨결’프로그램은 총4차에 걸쳐 진행된다. ‘4월21일 다방동 야생차 군락지’라는 주제로 열린 첫 번째 행사였다. 4월28일‘양산차 이야기(조국영 도예가)’, ‘5월12일 효충사 헌다제’, ‘5월18일 무아차회’(물금읍 워터 파크)로 행사는 이어진다. 행사 주관은 양산차인연합회,협력은 양산차(茶)문화원,법기도자차(茶)문화원,문화교육연구소田,박순희茶문화연구소,국악예술단뫼올,천호차(茶)회,달방아.행사 연락과 진행은 법기도자차문화원 이지안 원장이 담당하였다. ‘다방동 야생차 군락지’는 양산숲길보전회 회장으로서 군락지를 관리해온 필자가 안내와 해설을 맡았다.행사 전날인 토요일에 비가 많이 왔고,행사 날인 일요일에도 비가 예보되어 걱정이 많았다.특히 다방동 야생차나무 군락지는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현장 답사를 통해 눈으로 확인하고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었다.다행하게도 비가 오지 않아 행사는 계획대로 진행할 수 있었다. 필자는 사전에 준비한 특강 자료인‘다방동의 야생차나무 군락지와 음다문화(飮茶文化)’를 배부하고 설명하였다.다방동의 야생차나무 군락지는 매우 중요한 생태자원이므로 잘 보호하고 향토자원으로서 활용가치가 매우 크다는 것을 강조하였다.간단한 준비운동으로 몸을 풀고 동산장성 둘레길 다방분기점을 통해 야생차나무 군락지로 이동하였다. 행사 전날에 비가 많이 왔으나 등산로가 미끄럽지 않아서 다행이었다.다방동 야생차나무 군락지에 도착하여 차나무의 특성을 해설하고 그동안 칡덩굴 제거,신우대 제거한 현황을 설명하였다.이지안 원장이 준비한 차를 다방동 다신(茶神)에게 올리는 간략한 헌다(獻茶)행사를 하였다.군락지를 돌면서 차나무 구경을 하고 행사를 마무리하였다. 2.다방동의 지명 유래와 해결 과제 대규모 차나무 군락지가 있는 양산의 다방동은 조선총독부가1914년3월1일 시행한 부군면 통폐합(府郡面 統廢合)에 따른 행정구역 개편 때 명칭이 바뀌었다.다방동은 본래 양산군 읍내면에 속해 다방리(茶房里)라고 불렸으며,다방동(多芳洞)이라고 변경하였다. 1918년 읍내면이 개칭된 양산면에 속하였다. 다방동은 차나무가 많은 곳으로 마을 이름을 차 다(茶),집 방(房)으로 다방(茶房)이라고 하였는데, ‘많을 다(多)’, ‘꽃다울 방(芳)’으로 다방(多芳)이라 개칭하였다.원래의 고유한 명칭인 다방동(茶房洞)으로 변경하는 게 마땅하다.다방동의 수령이 오래된 고차수는 밑동 지름이23cm이다. 향기가 많은 마을이라는 의미인데 차 향기와 연관 지을 수 있으나 본래의 차(茶)라는 의미는 소멸되었다.총독부가 우리의 고유 문화를 말살하고 파괴하는 차원에서 마을 이름을 바꾼 것으로 유추된다.자연 마을로는 다방마을과 금촌마을이 있으며,주요 지명으로는 다방삼거리,당절,승방골,주막거리,칠산,황산,차밭골,패총터,신강만리 등이 있다. 다방동이라는 행정구역 명칭은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지역 차나무의 전통,문화,생태자원을 살려야 한다.양산의 야생차 군락지인 우불산,다방동,물금읍 증산 등의 차나무를 활용하여 지역의 향토산업을 육성하고 관광자원화 하는 방안이 강구되어야 하겠다. 특히 수령이100년 이상 된 귀중한 야생차나무 보호 대책의 수립,안내판 설치가 시급한 실정이다.특히 다방동 야생차나무 군락지 면적은3천~4천 평의 대규모로 보존 가치가 크므로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군락지 대부분이 사유지이므로 양산시에서 연차적으로 매입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3.다방동 야생차나무 군락지 환경정화 활동 다방동 야생차나무 군락지는 칡덩굴로 뒤덮이고,그 위에 낙엽이 쌓여 차나무가 억눌려 있었다.양산숲길보전회 회장인 필자는2019년부터 회원들과 칡덩굴을 제거해왔다. 2023년1월~3월 중 필자 혼자30일 정도 칡덩굴 제거작업을 꾸준히 하였다.이기천 회원은4일간 동참하였다. 1월8일에는 법기도자차문화원 회원7명(이지안 회장),양산숲길보전회 조상현 사무국장,필자가 함께 칡덩굴 제거작업을 하였다. 2월26일에는 양산숲길보전회 회원들이 차나무 살리기에 나섰다.차나무 군락지로 침투하는 신우대도 일부 제거하여 차나무 서식지 환경보호 활동을 하였다.필자는 다방동에서 차 씨앗을 계속 수집하여3일 동안 물에 불린 후 군락지에 식재하였다. 필자는3월13일 양산차문화연구소 지미리 소장과 함께 씨앗100개, 3월22일 공유신 시의원,양산시 산림과 김철환 산림방재팀장과 함께77개, 3월26일 양산숲길보전회 이다겸 재무,이해령 회원과 함께 씨앗84개를 심었다. 필자는2024년1월1일부터1월3일까지 다방동 야생차나무 군락지에서 환경정화 활동을 하였다. 1월5일~6, 7일~8일, 10일에 환경보호 활동을 하였다. 1월14일~14일, 17일, 1월19일~27일까지 환경정화 활동을 하였다. 19일 강동환 회원 동참, 21일에는 호미,낫,쇠스랑을 갖고 동참하였다. 1월28일 양산숲길보전회 회원들과 다방동 야생차나무 군락지에서 환경정화 활동 후 헌다제를 개최하였다.김숙희 예다회 회장이 차를 준비하였다.조국영 도예가가 축문을 준비하고 헌다제를 진행하였다.헌다제에 양산 갑지구 국회의원 후보자 이재영 기모란 부부,신재향 양산시의원이 참석하여 신우대 제거 봉사활동을 하고 다방동 다신에게 차를 올렸다. 필자는1월31일~2월3일까지 다방동에서 환경보호 활동을 하였다. 2월6일, 8일~13일까지 다방동에서 환경정화 활동을 하였다. 2월16일~19일까지 환경보호 활동을 하였다. 3월14일~15일, 19일에도 환경보호 활동을 하였다. 4월13일부터19일까지 다방동 야생차나무 군락지에서 칡덩굴 제거,신우대와 뿌리를 제거하는 봉사활동을 하였다.앞으로도 소중한 생태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환경정화 활동을 해나갈 예정이다.

심상도박사,화요칼럼, 화랑도가 이름을 남긴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 …

심상도박사,화요칼럼,  화랑도가 이름을 남긴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울주 천전리 각석 이름 변경     국보인 ‘울주 천전리 각

화랑도가 이름을 남긴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울주 천전리 각석 이름 변경 국보인‘울주 천전리 각석’의 이름이 변경되었다.문화재청은 지난2월28일부터‘울주 천전리 각석’의 명칭을‘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蔚州 川前里 銘文과岩刻畫)’로 바꾼다고2월26일 밝혔다(연합뉴스, 2024, 2.26.).문화재청에서는1973년 국보 지정 당시에는 돌에 글과 그림을 새겼다는 의미로‘각석(刻石)’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유산의 특징과 가치를 온전히 담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명문(금속이나 돌 등에 새긴 글)의 학술적 가치와 암각화의 중요성을 모두 담은 이름으로 바꾸게 됐다고 문화재청은 설명했다.문화재청은 이름을 바꾼 천전리 각석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를 포함한‘반구천의 암각화’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신청서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에 제출한 상태이다. 울산광역시가 신라시대 진흥왕과 화랑의 흔적이 있는 국보‘울주 천전리 각석’명칭 변경을 추진한다.울산광역시는 문화재 자료 검토와 전문가 자문을 거친 뒤 문화재청에 명칭 변경을 신청할 예정이라고 지난7월7일 밝혔다.지난6월 시는 문화재위원회를 열고 천전리 각석 명칭을 천전리 암각화로 변경하는 안을 가결했다(매일경제, 2023, 7.7.). 그동안 학계에서는 울주 천전리 각석은 신라시대 글자 외에도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다양한 바위 그림이 있기 때문에 포괄적이고 보편적으로 사용되는‘암각화’로 명칭을 바꾸는 것이 적절하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됐다. 특히 울산시가 추진 중인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의 유네스코 세계 유산 등재 명칭이‘반구천 일원 암각화’로 두 유산의 명칭을 통일해 올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전문가 권고도 있었다.시는 국보 명칭 변경을 위해7월11일 강봉원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위원장 등이 참석하는 학술 토론회도 개최하였다. 지난3월20일에 현장에 가보니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로 명칭이 변경되었다는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안내판도 문화재청과 울주군에서 새것으로 교체하지 않고 임시방편으로 붙인 변경된 명칭이 떨어져 관리인이 손으로 눌러 다시 붙이기도 했다.사진 찍기 위해 바위 앞의 경계를 넘어가면 자동 인식으로 방송이 나왔다.필자 옆에서 사진 찍던 한 여성이 자꾸 들락날락하니 관리인이 현장에 와서 심하게 나무랐다. 2.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의 중요성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산210-2에 있는‘울주 천전리 각석’은1973년5월4일 국보로 지정되었다.태화강 물줄기인 대곡천 중류의 기슭 너비9.5m,높이2.7m의 바위에 각종 도형과 글,그림이 새겨진 암석으로,아래,위2단으로 나누어 서로 다른 내용이 다른 기법으로 표현되어 있으며,전체적으로 조각이 가득하다. 윗단에는 쪼아서 새기는 기법으로 기하학적 무늬와 동물,추상화된 인물 등이 조각되어 있다.사실성이 떨어지는 단순화된 형태인데 중앙부의 태양을 상징하는 듯한 원을 중심으로,양 옆에 네 마리의 사슴이 뛰어가는 모습과 맨 왼쪽의 반인반수(半人半獸:머리는 사람,몸은 동물인 형상)상이 눈에 띈다.표현이 소박하면서도 상징성을 갖고 있는듯한 이 그림들은 청동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여진다(문화재청). 아랫단은 선을 그어 새긴 그림과 글씨가 뒤섞여 있는데,기마행렬도,동물,용,배를 그린 그림 등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이 중 기마행렬도는 세 군데에서 나타나고 있으며,간략한 점과 선만으로도 그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배그림은 당시 신라인의 해상활동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글자는800자가 넘는데 왕과 왕비가 이 곳에 다녀간 것을 기념하는 내용으로,법흥왕대에 두 차례에 걸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내용 중에는 관직명이나6부 체제에 관한 언급이 있어6세기경의 신라사회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사람이 이루어 놓은 작품으로,선사시대부터 신라시대까지의 생활,사상 등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어느 특정 시대를 대표한다기보다 여러 시대의 모습을 담고 있어 더욱 의미가 깊은 유적이다.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는 능선 자락 아래에 병풍처럼 펼쳐진 장방형의 대형 암면과 북편으로 이어진 여러 개의 바위 가운데4개의 암면에 그림이 새겨져 있다.울주 천전리 각석 맞은편에 있는 급경사의 높은 암벽 자락은 이곳으로부터 약2㎞떨어진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와 이어진다.동남향인 천전리 각석의 대형 암면은15도 가량 앞으로 숙여져 있다.앞의 높은 산봉우리로 말미암아 암면에는 한낮에만 잠깐 볕이 든다.(울주군,울산역사문화대전). 천전리 각석 앞 물길 둘레에는100여 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넓고 편평한 반석이 펼쳐져 있다.반석 위에는 직경만30㎝에 이르는 백악기 공룡발자국200여 개가 남아 있다. 1970년12월24일,황수영 교수와 문명대 교수가 이끄는‘동국대학교 울산지구 불적 조사대’가 원효대사의 반고사 터를 조사하다가 근처에서 주민들의 안내로 울주 천전리 각석을 발견하였다.주민들은 동국대 조사대가 오기 전에도 각석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3.바위에 새겨진 화랑도 이름 천전리 각석은 상단과 하단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상단에는 동물 그림과 동심원,마름모,나선형 등 선사시대 암각화가 그려져 있다.대체로 서석의 가로 중심선 하단부에 산재한 명문들은 내용이나 서체 등으로 볼 때5~6세기 무렵에서 통일 신라 말기에 걸치는 것까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이 중에는 글자 크기나 새기는 방법 등이 판이한 것들도 섞여 있고,시기를 달리하는 내용이 중복되어 기록되기도 하여 판독에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내용 또한 간략하게 인명이나 간지만을 기록하기도 하였으며 내용을 확실히 알 수 없는 경우도 많다.이러한 까닭에 판독 가능한 명문들은 그리 많지 않은 상황이다. 221점이 분포하는데 그 가운데3점은 근현대에 제작된 이름과 연도이다. 나머지218점은 다수가 세선 긋기 형식으로 홀로 혹은 구획되어 표현되었으며,바위면 쪼기 기법으로 새긴 것도 일부 눈에 띈다.신라 시대 사람들이 남긴 대략 천 여자 가량의 명문은 도보 인물 및 기마행렬 위로 개성삼년명(開成三年銘),병술명(丙戌銘),을미명(乙未銘),계해명(癸亥銘)등이 새겨졌다(국사편찬위원회,우리역사넷). 하단의 중간 부분에 하체만 남아 있는 인물상 위로 이 암면의 중심 명문이 남아 있는데,중심 명문 가운데 먼저 새겨진 것을 원명(原銘),뒤에 새겨진 것을 추명(追銘)이라 부른다.중심 명문 주변에 신해명(辛亥銘)을 비롯한 간지명과 승려 및 화랑의 이름들,뜻이 명확하지 않은 다수의 명문이 흩어져 있다. 하단에는 신라시대의 세선화와300여 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명문 중에는 문첨랑,영랑,법민랑 등 신라 화랑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영랑성업(戌年六月二日 永郎成業)이라는 글자는 화랑‘영랑’이 술년6월2일 업을 이루었다는 내용이다.목표를 성취했다는 것으로 짐작된다. 영랑이 화랑으로서의 수련기간을 마친 것을 기념한 각문(刻文)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며,이 영랑이 바로 효소왕 때의 영랑 일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영랑은 술랑(述郎),남랑(南郎),안상(安詳)등과 더불어 이른바 사선(四仙)의 하나로 꼽혔으며,금강산 방면의 여행과 놀이로 이름났다.그의 족적은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 문인들 사이에 회자되어‘영랑도남석행(永郎徒南石行)’이라 바위에 새겨진 삼일포(三日浦:지금의 강원도 고성군)방면을 답사,기행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금강산에는 실제로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영랑재[永郎峴]’가 있었다고 한다.『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그의 낭도 가운데는 진재(眞才),번완(繁完)등이 특히 유명하였다고 한다(『삼국유사三國遺事)』권3 탑상제4의‘백율사(栢栗寺)’조). 세상에서는 안상을 준영랑(俊永郎)의 무리라고 하였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영랑의 무리에는 오로지 진재(眞才)와 번완(繁完)등의 이름만 알려져 있는데,이들 역시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다.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하시동리에 있는‘영랑명(永郞銘)석구(石臼)’에는 신라의 선인으로 나온다(한국학중앙연구원,한구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화랑도(花郞徒)란 신라에 있었던 화랑(花郞)과 그를 따르는 낭도(郎徒)로 구성된 청소년 집단을 말한다.화랑이란‘꽃처럼 아름다운 사내’라는 뜻으로 국선(國仙),화판(花判),선랑(仙郎),풍월주(風月主)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화랑도는 함께 수련하고 가무를 즐기며 유람하였으며,여기에서 인재가 많이 길러지고 발탁되어 특히 삼국 통일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국사편찬위원회,우리역사넷). 신라 진흥왕(534~576)때 창설된 화랑도는 대개15~18세의 청소년으로 구성되었다.화랑들은 경주 남산,금장대,단석산,강릉 경포대,속초 영랑호,금강산,지리산,천전리 계곡 등과 같은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면서 심신을 수양하고 단련했다.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에 새겨진 화랑의 이름 중‘법민랑(法民郞)’이 바로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문무왕의 화랑 시절 이름이다.천전리 계곡이 신라 서라벌 귀족과 화랑이 즐겨 찾던 명소이자 수련지였음을 알 수 있다.문무왕은 태종무열왕의 왕자로 김유신 장군과 함께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화랑도의 수련지인‘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의 화랑도 유적을 지난3월20일, 21일 연 이틀간 답사하였다.같은 날 암각화박물관도 방문하여 암각화와 명문을 살펴보았다.첫날은12시 넘어 답사했는데,앞산에 해가 가려 암각화와 명문이 잘 보이지 않았다.문화관광해설사가 내일 아침10시 무렵에 오면 해가 비쳐 잘 보인다고 정보를 알려줘 다음 날 바로 달려갔다.계곡 건너편에는 공룡 발자국 회석이 많아 구경하며 사진을 찍었다. 암각화와 명문도 비바람에 풍화작용이 심하여 바위가 일부 떨어져 나가거나 선명하지 않아 모형을 만들어놓은 암각화박물관에 가서 자세히 보며 사진을 찍었다.글자를 판독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심상도 박사, 화요칼럼,김유신 장군이 수도한 단석산 석굴

심상도 박사, 화요칼럼,김유신 장군이 수도한 단석산 석굴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화랑도의 기원 화랑도의 기원과 김유신 공이 화랑도가 된 사연에 관해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이 있다.삼국사기 제41권 열전 제1(三國史記 卷第四十一 列傳 第一)김유신 상(金庾信 上)조에 김유신이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를 이끌었다고 나온다.김유신 공은15세 때 화랑이 되었다.당시 사람들은 그를 기꺼이 따르며‘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다. 진평왕 건복28년(서기611)신미,공의 나이17세였을 때,고구려(高句麗)ㆍ백제(百濟)ㆍ말갈(靺鞨)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외적을 평정하려는 뜻을 품었다.그리하여 혼자 중악(中嶽)의 석굴에 들어가서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였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三國遺事 卷第一 紀異 第一)김유신(金庾信)조에 나이18세가 되던 임신년(서기612)에 검술을 익혀 국선(國仙)이 되었다.삼국유사 제3권 탑상 제4(三國遺事 卷第三 塔像 第四)미륵선화 미시랑 진자사(彌勒仙花 未尸郞 眞慈師)조에 진흥왕은 나라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풍월도를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다시 영을 내려 양가의 남자 중 덕행이 있는 자를 뽑고 그 명칭을 고쳐 화랑이라 하였다.이리하여 처음으로 설원랑(薛原郞)을 받들어 국선을 삼았으니,이것이 화랑국선의 시초였다.그래서 명주(溟州)에 비석을 세웠다. 이때부터 사람들에게 악행을 고쳐 선행을 하게 하며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에게 순하게 하였으니,오상[五常: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과 육예[六藝: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삼사(三師)와 육정(六正)이 이 왕의 시대에 널리 행하여졌다. [『국사(國史)』에서는 진지왕(眞智王)대건8년 병신에 처음으로 화랑을 받들었다고 했으니,아마도 역사서에서 전하는 것이 잘못된 듯하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三國遺事 卷第二 紀異 第二)효소왕 시대 죽지랑(孝昭王代 竹旨郞)조에‘조정의 화주(花主)’가 나온다.화주는 조정에서 화랑을 관장하는 조직이다.제32대 효소왕(孝昭王)때,죽만랑(竹曼郞)무리에 급간 득오실(得烏失)[득오곡(得烏谷)이라고도 한다.]이 있었다.그는 화랑도의 명부인『풍류황권(風流黃卷)』에 이름이 있어서 날마다 출근했는데, 10여 일 동안 보이지 않았다. 신라 화랑도(花郞徒)의 명부(名簿)를‘황권(黃卷)’이라고도 한다.이 책에 이름이 올라있을 때에는 실제 화랑도 집단에 속하여 활동하였지만,이름을 지우거나 빼면 화랑도를 떠난 것으로 보여진다.언제 만들어졌는지 확실하지 않으나,화랑을 중심으로 화랑도가 만들어질 때 그 무리들인 낭도(郎徒)의 명단이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중악 석굴 신라 사람들은 단군 이래로 산악에 신적인 존재가 거주하는 것으로 믿는 산악숭배사상을 이어받아 영험한 산에 존재하는 산신에 대해서 제사를 지냈다.신라 오악(新羅 五嶽)은 삼국통일 이전과 이후로 달라진다.오악은 경주평야를 중심으로 한 경주 주변의 산악이었으며,삼국통일 이후에는 신라의 중앙과 사방의 산악으로 확대되었다. 신라 오악은 신라시대 국가의 제사(祭祀)대상이 되었던 다섯 산악(山嶽)이다.산악에 신적인 존재가 거주한다는 믿음으로 산신에 대해서 제사를 지냈다.삼국통일 이전에는 경주 주변의 토함산,금강산,함월산,선도산,단석산이었다. 통일 이후에는 국토의 사방과 중앙에 있는 산악으로 확대되어 토함산,계룡산,지리산,태백산,팔공산으로 변하였다.통일신라를 상징하는 존재로 동·서·남·북 각 방면의 일정한 정치적 세력을 진압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신라의 국가 제사는 대사·중사·소사로 구분되었는데 신라 오악에 대한 제사는 중사에 해당하였다(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삼국통일 이전 신라오악은 신라 중심부인 경주평야를 둘러싸고 있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21,경주부 산천조에는 토함산(吐含山)을 동악,금강산(金剛山)을 북악,함월산(含月山)을 남악,선도산仙桃山)을 서악이라고 하였고『삼국사기』41권,열전1,김유신(상)의 단석산(斷石山)이 중악이었다. 그 뒤 신라 영토가 확대되고 통일을 성취한 뒤인 문무왕 말년 혹은 신문왕대에 국토의 사방과 중앙에 있는 산악으로 변화하였다.동악은 토함산,서악은 계룡산(鷄龍山),남악은 지리산(地理山),북악은 태백산(太伯山),중악은 부악[父嶽:팔공산(八公山)]이다. 신라 오악은 서악인 계룡산 하나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모두가 소백산맥 일대와 그 동남쪽에 있는 산악들로,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로 구분되어 있는 신라통일기의 국가제사에서 중사에 편입되었다.오악에 대한 제사는 각 산에 거주한다고 생각한 산신에 대한 제사였다. 3.경주 단석산 천주사 김유신 장군 추모제 ‘제71회 김유신 장군 추모제’가2023년10월21일 경주시 건천읍 방내리 단석산 천주사에서 열렸다.대한불교 관음종 제2교육도량 경주시 단석산 천주사는 천주사 경내에서‘제71회 김유신 장군 추모제’를 열었다.추모제는 신라 삼국 통일의 주역인 김유신 장군의 호국 의지를 받들고,화랑의 정신과 기상을 이어가기 위해 개최되었다. 추모제에는 홍파 대한불교관음종9세 종정을 비롯해 도선 천주사 주지,주낙영 경주시장,김석기 국민의힘 국회의원,이철우 경주시의회 의장,박승직 경북도의원,김소현(단석산메아리 대외협력위원장)경주시의원,불자 등100여 명이 참석했다(한국일보, 2023, 10.22). 추모제는 이루리(2021미스채선)아나운서의 사회로1부와2부로 나눠 진행됐다. 1부 추도법회에서는 화랑낭도 김유신 장군 위패 이운의식을 시작으로 명종5타,삼법공양,삼귀의례,반야심경 봉독,추모제 경과보고,헌화,축사,발원문,청법가,사홍서원,관음종 총무원장의 법문이 이어졌다. 2부에서는 관음무,가야금병창,태평무,스포츠공연,초대가수 공연 등 문화행사가 열렸다. 도선 천주사 주지 스님은“김유신 장군께서6년 동안 수행하신 불선암까지 등산로 공사와 불선바위 동굴 옹달샘 보존은 단석산 김유신 장군의 성역화 사업에 첫 걸음이라 할 수 있다.”며“2025년 에이펙(APEC)정상회의를 경주에 유치,선조들이 물려준 문화유산을 세계에 알릴 수 있도록 모두 함께 희망과 기쁨이 넘치는 그날이 되도록 한마음으로 손잡고 동행하자.”며 합장했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축전을 통해“단석산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염원한 도량으로 수행의 흔적과 문화적 가치가 높은 곳이라며 김유신 장군의 정신을 알리기 위해 다같이 지역 역사문화에 큰 관심을 갖고 홍보해 지방 정주시대 실현에 함께 노력하자.”고 언급했다. 주낙영 경주시장은“화랑정신이 살아 숨쉬는 단석산 천주사에서 김유신 추모제가 열린 것에 대해서 매우 뜻깊고,감사하고 기쁘게 생각한다.”며“찬란했던 신라 왕조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고 가장 한국적인 전통 문화유산을 갖추고 있는 경주에서2025 APEC정상회의가 유치될 수 있도록100만 서명 운동에 동참을 부탁한다.”고 축사를 했다. 4.김유신 공이 수도한 불선바위 등산로 정비 경북 경주 단석산(827m)천주사와 김유신 동굴을 잇는 등산로가 새로 정비했다.경주시는 건천읍 단석산 천주사와 김유신 동굴(추정)을 잇는 등산로1.5㎞구간 정비 공사를2023년11월20일 마무리했다(매일신문, 2023. 11.20). 단석산은 경주에서 가장 높은 산이자 신라시대 김유신 장군과 화랑들의 수련장으로 알려져 있다.진달래 군락지 등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산세가 웅장해 등산객이 많이 찾는다.경주시는 사업비3억 원을 들여2023년6월부터 단석산 등산로 정비 사업을 진행했다. 등산로 입구는 침목계단으로 꾸몄고,급경사지엔 기존 낡은 계단을 철거한 뒤 방부목 데크와 울타리를 설치했다.그 밖의 구간엔 불규칙한 노면 정리를 통해 안전사고 예방과 이용객 편의를 꾀했다고 경주시에서 설명했다.주낙영 경주시장은“경주를 찾는 등산객이 안전하고 편안한 산행을 즐길 수 있도록 등산로 유지관리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언급했다. 5.김유신 공 수도처 답사 소감 필자는 지난4월8일에 천주사와 김유신 공의 화랑도 시절 수도장인 불선바위를 답사했으며 내친 김에 단석산(827.2m)정상까지 다녀왔다.불선바위는 불선암으로도 불린다.불선바위에는 옆으로 길쭉한 석굴에 석간수가 있어 기도하기에 알맞았다. 천주사에는 김유신 장군 스토리텔링 안내판이 있었으며,좌선을 했다는 커다란 바위도 삼성각 옆에 있었다.천주사가 있는 방내리는 꽃이 많아 꽃안,방내리[芳內里:꽃다울 방(芳)]라 불렸다고 전해진다.꽃다운 화랑도가 수련장인 단석산을 오르내릴 때 방내리를 거쳐갔을 것이다. 필자가 답사하면서 방내리를 살펴보니 복숭아 과수원이 많아 한창 복숭아꽃이 만발하였고,벚꽃도 피어 아름다웠다.한편 산으로 둘러싸여 아늑한 마을로 방내리(房內里)라 하였다.방내리 지명을 꽃다운 화랑도,꽃이 많은 동네와 연관지어 꽃안 또는 방내리라고 부른 것은 적절한 지명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천주사 경내도 복숭아꽃이 화려하게 피었고,자두나무꽃은 지고 있었다. 지난2022년4월12일 신선사를 거쳐 단석산 정상,송곳바위 등을 둘러보았는데, 2년 만에 또다시 단석산을 찾았다.기둥바위는 천주암(天柱巖)으로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다.천주사에서 단석산 정상까지3.3km로 원점회귀하는데4시간30분 정도 걸렸다.오후에 답사하며 기온이 올라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등산 시작할 때는 맑은 날씨였으나 저녁이 되면서 날씨가 흐렸다. 천주사에서 김유신 공 수도처인 불선바위까지는1.1km였으며,가까운 곳에 기둥바위가 있었다.등산로는 계단 목제 데크 등으로 잘 정비되어 있었지만 오르막이 심했다.단석산 정상가는 도중에 송곳바위가 있었다.낮은 곳은 진달래꽃이 만발했는데 단석산 정상 가까운 곳은 이제 막 피기 시작하였다.

중앙동, ‘동산장성 철쭉제’ 개최 준비 만전

중앙동, ‘동산장성 철쭉제’ 개최 준비 만전

- 오는 4월 20일 북부산성 정상 철쭉에 물들다 - 양산시 중앙동행정복지센터(동장 김창준)에서 올해 중앙동 동산장성 철쭉제가 오는 4월 20일에 개최한다고 밝혔다. 2016년 제1회 철쭉제를 시작으로 올해 7회째를 앞두고 있는 ‘동산장성 철쭉제’행사는 동산장성 철쭉군락지 인근에서 이루어지는 산신제를 통해 지역사회의 번영과 건강, 행복과 풍년을 기원하고, 중앙동 주민자치회를 비롯한 지역주민 200여명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중앙동은 지난 2일 계원사를 시작으로 북부장성까지의 산행길과 체육시설 등을 정비하고 동선 파악 등 안전한 축제 진행을 위해 등산로를 꼼꼼히 살폈다. 동산장성 철쭉군락지는 매년 봄 산정상을 진분홍빛의 화원으로 꾸며져 보는 이의감탄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곳으로, 도심 인근 산에 위치해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갈 수 있고 양산시내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양산 명소이다. 김창준 중앙동장은 “중앙동행정복지센터와 주민들의 노력으로 철쭉군락지를 조성하여 명소를 만들고 산신제도 거행하는 것으로서 타 지역의 주요 벤치마킹 사례가 되고있다”며 “오는 20일 동산장성 철쭉제에 많은 분들이 동행하여 철쭉과 함께 봄을 만끽하시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동산장성 철쭉제’ 개최 준비 만전

동산장성 철쭉제’ 개최 준비 만전

- 오는 4월 20일 북부산성 정상 철쭉에 물들다 - 양산시 중앙동행정복지센터(동장 김창준)에서 올해 중앙동 동산장성 철쭉제가 오는 4월 20일에 개최한다고 밝혔다. 2016년 제1회 철쭉제를 시작으로 올해 7회째를 앞두고 있는 ‘동산장성 철쭉제’행사는 동산장성 철쭉군락지 인근에서 이루어지는 산신제를 통해 지역사회의 번영과 건강, 행복과 풍년을 기원하고, 중앙동 주민자치회를 비롯한 지역주민 200여명이 참석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중앙동은 지난 2일 계원사를 시작으로 북부장성까지의 산행길과 체육시설 등을 정비하고 동선 파악 등 안전한 축제 진행을 위해 등산로를 꼼꼼히 살폈다. 동산장성 철쭉군락지는 매년 봄 산정상을 진분홍빛의 화원으로 꾸며져 보는 이의감탄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곳으로, 도심 인근 산에 위치해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갈 수 있고 양산시내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양산 명소이다. 김창준 중앙동장은 “중앙동행정복지센터와 주민들의 노력으로 철쭉군락지를 조성하여 명소를 만들고 산신제도 거행하는 것으로서 타 지역의 주요 벤치마킹 사례가 되고있다”며 “오는 20일 동산장성 철쭉제에 많은 분들이 동행하여 철쭉과 함께 봄을 만끽하시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심상도박사, 오늘의뉴스, 제10회 웅상 어르신 효 잔치

심상도박사, 오늘의뉴스, 제10회 웅상 어르신 효 잔치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양산천성산철쭉회’가 주최하고(사)한국가수협회 양산 기장지회(회장 강민지)가 주관하는 제10회 웅상 어르신 효 잔치가3월30일11시에 천성리버타운 앞 회야강 둔치 무대에서 열렸다.양산천성산철쭉회의 박종규 회장과 회원들이 힘을 모아 매년 웅상 어르신 효 잔치를 개최하고 있다. 행사의 내빈으로는 나동연 양산시장,이종희 양산시의회 의장,박인 경남도의원,허용복 경남도의원,박일배 양산시의원,성용근 양산시의원,김판조 시의원,김석규 시의원,강태영 시의원,송은영 시의원 등이 참석하였다.나동연 양산시장과 이종희 양산시의회 의장은 축사와 함께 노래도 하여 어르신들을 즐겁게 하였다. 행사 중간에 김태호 후보자와 부인,김두관 후보자도 행사장에 찾아와 어르신들에게 인사하였다.김태호 후보자의 사회자의 요청으로 노래도 하였다.도재율‘양산천성산철쭉회’초대회장도 참석하여 초창기의 행사를 회고하며 인사말을 하였다. 아리랑봉사회 음식 찬조,우리마트 생수1,000병,하나로마트 막걸리100병,두산1차 입주자 박진범 대표 돼지 한 마리 등의 많은 협찬이 있어 행사가 더욱 풍성해졌다.주최 측에서 점심 식사로 쇠고기 국밥,도토리묵,돼지 수육,떡 등을 준비하여 어르신들을 대접하였다. 효 잔치에 웅상지역의 어르신700여 명이 참석하여 점심 식사를 하고 양산지역 연예인들의 공연을 즐겼다.어르신들은 공연팀의 노래,민요,난타 공연,춤,전통무용,밸리댄스 등을 감상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출연진은MC이태기,김인영 밸리댄스,지혜,연희,정상영의 색소폰 연주,하운하 가수,우종철 가수,이남조,선미영,김소정의 민요 한마당,양인애 팀의 난타공연,민태희 무용학원 춤,이태근 가수,홍채희 가수,초린 가수,조여진 가수,나향 가수,최린 가수,정설아 가수 등이었다. 오후 두 시부터2024년 천성산철쭉제 철쭉노래자랑 예선이 진행되었는데, 65명이 참가하여 최종10명이 예선을 통과하였다.심사위원으로는 위원장 최린,위원은 강민지 회장,김갑용 운영위원장,하운하 가수가 수고하였다.

심상도박사의 화요칼럼 김유신 장군이 세운 사찰 경주 원원사

심상도박사의 화요칼럼  김유신 장군이 세운 사찰 경주 원원사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경주 원원사(慶州 遠願寺)를 세운 인물 사적 제46호,경주 원원사지는 봉서산 기슭에 있는 통일 신라 시대의 절터이다.원원사는 안혜(安惠),낭융(朗融)등 명랑법사(明朗法師)를 따르던 신인종 승려들과 김유신(金庾信),김의원(金義元),김술종(金述宗)등이 뜻을 모아 국가의 평화를 기원하기 위하여 세웠다고 한다.명랑법사가 세운 금광사와 더불어 통일 신라 시대 문두루비법의 중심 도량이었다.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은 신라와 고려 시대에 행했던 밀교 의식의 하나이다.불단을 설치하고 다라니 등을 독송하면 국가의 재난을 물리칠 수 있다는 비법의 신인종이다.신라의 명랑(明朗)이 중국에서 밀교를 배운 뒤635년(선덕여왕4)에 귀국할 때 처음으로 전하였다. 원원사는 호국사찰로 건립되었다.부처의 공덕으로 나라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고자 건립한 사찰이다.원원사는 왜적들이 울산의 바다를 통해 침입하여 경주로 향할 때 길목에 해당된다.원원사는 서라벌의 동남쪽 모화촌(毛火村)에 있는데 근처에 왜병을 막기 위해 쌓은 군사적 요충인 관문(關門)이 있어 사천왕사,감은사 등과 같이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김유신은 삼국시대 신라의 삼국통일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 장수이다. 595년(진평왕17)에 태어나673년(문무왕13)에 사망했다.신라에 투항한 가야왕족의 후손으로,진골 귀족 출신이다. 15세에 화랑이 되어 낭도를 이끌고 고구려·백제와의 전투와 귀족층의 반란 진압에서 공을 세워 중요 인물로 성장했다(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누이와 결혼한 김춘추가 태종무열왕에 즉위하면서 정치적 위상이 더 높아졌다. 660년 정월에 귀족회의의 수뇌인 상대등이 되었고,삼국통일 전쟁 과정에서 신라를 이끄는 중추적 구실을 했다.사후에 흥덕왕이 흥무대왕으로 추봉했다. 김술종(金述宗)은 진골 출신이며 화랑 죽지랑(竹旨郎)의 아버지이다.『삼국유사』에 술종공은 알천공(閼川公)을 비롯하여 임종공(林宗公)·호림공(虎林公)·염장공(廉長公)·유신공(庾信公)과 함께 신라의4영지(四靈地)의 하나인 남산 우지암(亏知巖)에서 열린 화백회의에 참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서 회합을 가졌던 대신들의 사회적 신분은 진골이었으며,상대등(上大等)인 알천공을 의장으로 하는 화백회의의 구성원이었음에 비추어볼 때 그의 정치적 지위는 대등이었다.김술종은 진덕여왕 때 지금의 춘천 방면을 포함한 영서지방 장관인 우수주군주(牛首州軍主:후에 삭주도독(朔州都督)이라고 부름)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뒤에 신라의 삼국통일에 지대한 공을 세운 아들 죽지랑을 낳았다.태종 무열왕 때 안혜(安惠)등 승려4명 및 김유신(金庾信)등과 함께 원원사(遠源寺)를 창건하였다(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귀족이었던 김의원의 정확한 신상은 알려져 있지 않다. 2.명랑법사와 문두루비법 삼국유사 제5권 신주 제6(三國遺事 卷第五 神呪 第六)에 명랑법사의 신인종(明朗神印)이 나온다.「금광사본기(金光寺本記)」를 살펴보면 이러한 기록이 있다. “법사가 신라에서 태어나서 당나라로 들어와 도를 배우고 돌아오는 길에,바다 용의 청에 따라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전하고 황금1,000냥[1,000근이라고도 한다.]을 시주 받아 땅 밑으로 몰래 와서 자기 집 우물 밑에서 솟아나왔다.자기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었고 용왕이 시주한 황금으로 탑과 불상을 장식하자 광채가 유달리 특이하였다.그래서 절을 금광사(金光寺)라 하였다.”[『승전(僧傳)』에서는 금우사(金羽寺)라 했지만 잘못된 것이다.] 법사의 이름은 명랑(明朗)이고 자는 국육(國育)이며,신라의 사간(沙干)재량(才良)의 아들이다.어머니는 남간부인(南澗夫人)인데 법승랑(法乘娘)이라고도 하며 소판(蘇判)무림(茂林)의 딸 김씨이니,즉 자장(慈藏)의 누이동생이다.재량에게는 아들 셋이 있었는데,맏아들은 국교대덕(國敎大德)이고 다음은 의안대덕(義安大德)이며 법사는 막내아들이다.처음에 어머니가 꿈에 푸른색 구슬을 삼키고 임신을 하였다. 선덕왕(善德王)원년(서기632)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정관(貞觀) 9년 을미(서기635)에 돌아왔다.총장(總章)원년 무진(서기668)에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이 대군을 거느리고 신라군과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그 후 남은 군사가 백제에 머물면서 신라를 습격해 멸망시키려고 하였다. 신라 사람들이 이를 알아채고 군사를 내어 막았다.당나라 고종이 이 말을 듣고는 크게 화를 내며 설방(薛邦)에게 명하여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문무왕이 이 소식을 듣고 걱정하며 법사를 청해 비법으로 이들을 물리치게 하였다. [이 일은「문무왕전(文武王傳)」에 실려 있다.]이 일로 인해 명랑은 신인종(神印宗)의 시조가 되었다. 또 신라 서울 동남쪽20여 리에 원원사(遠源寺)가 있는데,세상에서는 이렇게 전하였다. “안혜(安惠)등 네 대덕이 김유신(金庾信)ㆍ김의원(金義元)ㆍ김술종(金述宗)등과 함께 발원하여 창건한 것이다.네 대덕의 유골은 모두 절의 동쪽 봉우리에 묻었다.그래서 사령산(四靈山)조사암(祖師嵓)이라고 한다.”그러한즉 네 대덕은 모두 신라 시대의 고승이었다. 문무왕 때 당나라 군사가 신라를 침략하게 되자 왕은 명랑에게 적을 물리칠 수 있는 비방을 물었다.이에 명랑은 낭산(狼山)의 남쪽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우고 도량을 열 것을 제의하였는데,시간이 급박하였으므로 채백(彩帛)으로 가건물을 짓고5방(方)에 신상(神像)을 세운 뒤 유가명승(瑜伽明僧) 12인과 함께 문두루비법을 썼다. 그때 당군과 신라군이 아직 접전하기도 전에 바람과 물결이 사납게 일어나 당나라 배가 모두 물에 침몰하였다고 한다.문두루는 범어 무드라(mudra)의 음사(音寫)로 신인(神印)으로 번역된다(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절터에는 금당 터와2기의 삼층석탑,석등,그리고 부도가 남아 있다. 2기의 삼층석탑은1931년에 복원한 것으로 규모와 형태가 동일하다.석탑 사이에 석등이 있고, 4기의 부도가 절터의 동쪽과 서쪽 계곡에 나뉘어져 있는데,부도는 모두 고려 시대 이후의 것으로 보인다. 3.경주 원원사지(慶州 遠願寺址)동서 삼층석탑(東西 三層石塔) 문하재청은 경북 경주시 와동읍 모화리 산8-2번지에 위치한 사적 제46호 경주 원원사지(慶州 遠願寺址)내의 높이7m의 삼층석탑을2005년4월7일 보물 제1429호로 지정하였다.경주 원원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금당 터 앞에 무너져 있던 것을1931년 가을 경주고적보존회가 복원한 것이다. 두 탑 모두2층 바닥돌 네 면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1층 몸돌 네 면에 사천왕상을 새겼다.십이지신상은 북쪽 중앙에 있는 쥐를 시작으로 한 면에3구씩 새겨져 있는데,연꽃 위에 앉아 평복을 입고 손을 모은 자세이다.사천왕상은 동탑 남방의 증장천왕이 하체 일부만 남았고,서탑 남방의 증장천왕은 없어졌다.원원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일반적인 양식의 신라 석탑 가운데 부조상을 새긴 가장 이른 시기의 탑으로 알려져 있다. 동ㆍ서 삼층석탑(높이 약7m)은 도괴되어 있던 것을1931년 가을(조선건축사론 중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시대 일반형 삼층석탑론(건축잡지1933.11월호.藤島亥治郞)에 경주고적보존회에서 복원하였다.두 탑은 같은 구조와 양식으로 조성된2중 기단의 삼층석탑이며,하층기단 면석과 갑석 및 상층기단 면석은 각각8매,상층기단 갑석은4매로 구성되어 있다. 상·하층기단의 면석에는2개의 탱주와 우주가 있고,하층갑석의 상면에는2단의 상층 기단 괴임이 있으며,상층갑석4면의 각 기둥 사이에는 연화좌 위에 앉아 있는 십이지상을 조각하였는데 이들의 머리는 짐승이나,몸체는 평복을 입은 사람의 모습이며 옷자락이 하늘로 날리고 있는 형상이다. 1층 탑신석 이상3층 옥개석까지는 모두1매석으로 조성되어 있으며1층 탑신에는 우주가 있고, 4면에는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각 층 옥개석의 하면에는5단의 옥개받침이 있고 상면에는 각형2단의 탑신 괴임이 있으며 상륜부는 노반석과 앙화석이 남아 있다. 경주 원원사지 동ㆍ서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일반적 표현형식,옥개석의 돌다듬기 수법,기단부와 탑신부에 구현된 양식,석재의 조립방법 등으로 보아8세기 중엽에 조성된 석탑으로 추정되며,하층기단에서 십이지상을 최초로 배치한 점 등 석탑의 조각기술,구조적 특징,표현양식 등을 고려할 때 학술적,미술사적 중요한 가치를 지닌 석탑으로 평가되고 있다(문화재청,국가문화유산포털). 경주 원원사지를 지난3월23일, 4월2일 두 차례에 걸쳐 답사하였다. 3월23일 오후 늦게 답사하여 원원사지는 둘러보았으나 부도는 원원사지 서쪽 계곡을 다니며 찾아보았으나 안내 표지판이 없어 답사에 실패하였다.여러 곳을 다니다 보니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여 포기하였다. 4월2일에는 오후 이른 시간에 도착하여 원원사지를 천천히 둘러보고 동서 삼층석탑의 사천왕상과 십이지신상을 사지 찍었다.동서 두 곳의 부도를 찾기 위하여 먼저 서쪽의 부도 쪽으로 계곡을 답사하면서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 간신히 발견하였다.멋진 부도가 있었으나 안내판은 없었다. 그후 동 부도를 찾기 위하여 절의 동쪽으로 갔지만 역시 안내 표지판은 없었다.나무를 심은 수목원을 지나 낮은 곳으로 내려가 석조를 발견하였다.그리고 계곡을 건너 임도로 올라가 드디어 동 부도를 답사하였다.작은 암자에 태극기가 걸려 있었고,커다란 동 부도가 있어 반가웠지만 안내판은 없었다.날이 더워 땀을 흘리며 돌아다녔다.원원사지 가는7번 국도의 교통 체증은 매우 심했다.

양산시장, 국토부에 지역 현안사업 지원 공식 건의

양산시장, 국토부에 지역 현안사업 지원 공식 건의

- 28일 국토부 제2차관 만나 1028지방도 국도승격 주민서명부 전달 - - 지방도 1028호 국도 승격·국도 35호 대체우회도로 공식 건의 - - 사송 하이패스IC 양방향 설치 추진 지원 요청도 구두 건의 - 나동연 양산시장이 지난 28일 정부세종청사를 방문해 국토교통부 백원국 제2차관을 만나 지역 현안사업에 대한 지원을 공식 건의했다. 나 시장이 이날 백 차관에게 직접 설명하고 건의서를 제출한 사업은 지방도 1028호선 국도(지선국도) 승격과 국도 35호선 대체우회도로 개설 등 2건. 여기에 이달 타당성조사 등의 용역에 들어간 동면 사송하이패스IC(양방향) 설치 추진에 대한 지원도 구두로 요청했다. 나 시장이 이들 현안사업과 관련해 정책 건의를 한 것은 취임 후 6번째(국토부 3회, 대통령실·국회 2회)다. 지방도 1028호선은 양산의 동부인 주진동에서 서부인 상북면 대석리를 연결하는 도로(길이 8.6㎞, 너비 9.5m, 터널 길이 4.7㎞)를 건설하고자 하는 사업. 나 시장은 총 사업비(2926억원) 부족 및 사업기간 장기화 우려를 설명하며 국도 승격(국도 7호와 35호 연결)을 통해 국비 재원으로 신속히 추진될 수 있도록 2026년도 제6차 국도·국지도 건설계획에 반영해 줄 것을 건의했다. 특히 지난해 지역 이통장협의회 주관으로 펼쳐진 국도 승격 서명운동을 통해 취합된 주민 서명부도 전달했다. 서명에는 3만 1000여명의 주민이 참여했다. 국도 35호선 대체우회도로 개설과 관련해선 전체 구간(하북~동면 19.42㎞) 중 1단계인 상북 대석리~동면 가산리 간 13.7㎞ 개설을 위해 이 역시 2026년 제6차 국도·국지도 건설계획에 반영해 줄 것을 공식 건의했다. 나 시장은 상북지역 택지 개발, 국지도 60호선 개통, 1028 지방도 건설 등 지역 여건의 변화에 따른 사업 추진의 시급성을 강조하며 국가 계획 반영의 적극적인 검토를 건의했다. 구두 건의한 사송 하이패스IC 설치 건에 대해서는 주민의 요구대로 양방향으로 추진토록 사송공공주택지구 조성사업 승인권자인 국토부와 사업시행자인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검토 및 추진할 수 있도록, 사업비용은 사업시행자가 적극 부담할 수 있도록 나서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백원국 차관은 “건의된 양산의 현안사업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다”며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답했다. 나동연 시장은 “이번 정책 건의 사업은 양산의 지속적 발전과 시민 민원 해소를 위한 현안사업들로 조기에 추진되고 마무리될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심상도박사 화요칼럼 화랑도 수련장 호국사찰 울산 신흥사

심상도박사 화요칼럼  화랑도 수련장 호국사찰 울산 신흥사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의병 활동의 본거지 울산 신흥사 신흥사는 울산광역시 북구 대안4길280(대안동)동대산 자락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통도사의 말사이다.명랑대사가 신라635년(선덕여왕4)에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며,창건 당시의 이름은 나라의 태평과 백성의 평안을 위한다는 뜻인 건흥사(建興寺)였다고 한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신흥사 위쪽 기박산성을 중심으로 울산의병이 일어났는데,당시에 신흥사 주지였던 지운 스님이 왜군의 침략에 맞서 승병 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던 호국사찰이다.이후1597년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사찰이 소실되었으나, 1646년(인조24)에 나라의 지원을 받아 경상좌병영 병마절도사 이급(李伋)에 의해 재건되었으며,그로부터3년 뒤인1649년에는 현재 대웅전에 모셔진 석조아미타여래좌상이 조성되었다. 뒤이어1686년(숙종12)과1752년(영조28)에 각각 도량을 중창하였는데,대웅전 맞은편 신성(神成樓)에 병마절도사 이상국(李相國)이1757년에 쓴 현판 글씨가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뒤에도 사찰 재건이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872년에 그려진 신흥산성도(新興山城圖)에서는 신흥사와 더불어 부속 암자인 낙서암(樂西庵),염불암(念佛庵),내원암(內院庵)을 함께 볼 수 있는데 이로써 국가 호국사찰로서의 규모와 군사지정학적 중요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1998년에는 현재의 대웅전을 새로 지으면서 원래 대웅전으로 쓰이던 건물은 왼쪽으로 옮기고 이름을 응진전으로 바꾸었으며,신성루,삼성각,적묵당 등이 자리하고 있다. 원래 신흥사의 규모는16만5,289㎡에 이를 정도로 매우 넓었으며,일제강점기 이전까지 사찰 주변 약39㎢를 소유하였다. 1998년 신축한 대웅전을 중심으로 응진전,삼성각,만세루,적묵당 등의 당우(절의 건물)가 있다(울산디지털 문화대전). 2.보물 석조아미타여래좌상 ‘울산 신흥사 석조아미타여래좌상’은 신흥사 대웅전에 봉안된 대세지-관음보살좌상으로 구성된 아미타삼존상 중 본존상에 해당하는 것으로,재질은 불석(拂石,규산염의 일종으로 흰색의 광물)이다.문화재청에서2021년12월22일 보물로 지정하였다. 이 불상은 발원문에1649년 불석의 산지였던 어천(현재 포항 오천읍)에서 돌을 채석해 조성하고 배를 이용해 신흥사까지 옮겨온 사실이 밝혀져 있어 당시 불석 불상의 제작지와 이동 경로를 구체적으로 밝힌 첫 번째 사례이다. 신흥사 석조아미타여래좌상은17세기 전반기 전국에 걸쳐 활동한 조각승 영색(英賾;英頤)이 경상도 지역에서 불석이라는 재료를 사용해 만든 현재까지 알려진 유일한 기년명 불상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조각승 영색은‘英賾’(영색)또는‘英頤’(영이)라고도 쓰며,신흥사 불상은 양주 회암사 불상 다음으로 그가 수조각승이 되어 두 번째로 제작한 불상이다. 본존인 아미타여래좌상은 짧은 목에 머리를 약간 숙인 결가부좌의 자세를 하고 있으며,짧은 상반신에 비해 다리 간격이 넓고 무릎이 높은 편이어서 하체의 무게감이 느껴진다.비교적 넓적한 얼굴과 긴 눈썹,작고 오뚝한 코,눈꼬리가 올라간 긴 눈,깊게 팬 입술 가장자리와 볼록하게 올라온 턱에서 온화하면서도 개성 있는 인상이 느껴진다. ‘울산 신흥사 석조아미타여래좌상’은1649년이라는 명확한 제작 시기,영색이라는 수조각승,아미타불상이라는 존명 등을 바탕으로17세기 중엽경 불상 조성의 기준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뿐만 아니라 재료의 산지(山地)와 이운 과정을 발원문을 통해 알 수 있다. 불상 자체와 복장 유물인 발원문1점,후령통1점,직물7점,보석류1점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되었다.후령통(候鈴筒)은 불상이나 불화 등을 조성할 때,금,은,칠보 등을 담는 복장(腹藏)을 넣는 통이다(문화재청). 3.화랑도 전통무예의 성지 울산,신흥사 울산지역에서 화랑도의 전통무예를 되살리기 위한 세미나가 개최되었다.신라 화랑무예 등 전통무예 활성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간담회가30일 울산광역시 울주군의회 김상용 의원(행정복지위원장)주관으로 의사당1층 세미나실에서 열렸다(울산종합일보, 2023. 3.30). 간담회는 정우식 의원(경제건설위원장)과 이상우 의원,진병석 울주군 문화체육과장,전통무예 화랑도 진흥원 김부기 원장과 윤돈규 회장,최영길 전 태권도 협회 고문,김민호 영산대 동양무예학과 교수,울산학춤보존회 김성수 고문 등 지역 전통무예 및 문화계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화랑도 진흥원장의 상 무예의 고장 울산,화랑도 수련장 울주 등 신라 화랑무예와 지역의 연관성 설명으로 시작된 간담회에서 참석자들은 울주군 전통무예 지정 및 관련 조례 제정 등 활성화 방안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나눴다. 울산광역시 전통무예 지정을 위한 화랑 무예 예술단 오디션 행사가 열렸다(시사우리신문, 2023.3.1).화랑도 예술단은3월1일 시청 옆JIB엔터테이먼트에서 오디션 행사를 개최하였다.전통무예의 고장 울산은 옛날부터 신라의 수도 경주를 방어하는 수도방위 사령부 역할을 담당하였다.울산은 상무예 고장으로 무예를 숭상하는 지역이다.울산지역의 울주군 언양읍 천전리,울산광역시 북구 신흥사 등은 화랑도의 수련지로 알려졌다. 필자는 지난3월22일 울산 신흥사를 답사하면서 기박산성,전시관 등을 둘러보았다.기박령은 도로 오르막 경사가 심하였으며,기박령에서 신흥사로 내려가는 길은 니리막이 심하였다.신흥사에 울산 정자해변은 가까웠으며,신라시대 이래로 왜구가 경주로 침범할 때 자주 이용하던 침투로였다. 이 길목에 있는 신흥사는 자연스럽게 호국사찰의 역할을 담당하였다.임진왜란 당시에는 신흥사 스님들이 의병장으로 활약하고 군량미도 조달하였다.필자는 신라시대 화랑도의 수련지로 알려진 천전리 각석은3월20일과21일 답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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