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상세페이지

심상도 문화 박사의 제30대 통도사 주지 현문스님 취임에 따른 Storytelling

기사입력 2019.05.31 09:42

SNS 공유하기

fa tw ba ka ks url

0_823Ud018svc1eypcjto8ob6x_vsex0g.jpg

현문스님 사진=(재)영축문화재단홈페이지
 
대한불교조계종은 5월 29일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 주지로 자장암 감원, (재)영축문화재단 이사장인 현문스님이 임명됐다고 밝혔다.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 스님은 29일 오전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4층 접견실에서 현문 스님에게 통도사 임명장을 수여했다. 이날 아침 영축총림 방장 성파 스님은 신임주지 추천서를 조계종 총무부에 제출, 종무회의를 통과한 뒤 주지 임명장 수여식이 진행됐다.

현문 스님 맨 왼쪽, 서운암 전국문학인 꽃축제 참석
 
원행 총무원장은 이날 "종단의 여러 불사에 많은 협조를 부탁드리며, 통도사 대중들과 화합해 본사를 잘 이끌어주시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현문스님도 "종단 불사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겠다"고 답했다. 현문 스님은 두 번째 주지 소임을 맡게 된 소회를 밝혔다. 현문 스님은 “최근 통도사는 방장스님 주도 아래 염불원도 개원하는 등 불지종가이자 총림으로서 위상을 제대로 갖췄다”며 “방장스님의 뜻을 잘 받들어 미력하나마 총림과 불교발전에 힘을 다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자장암 현문 스님 거처
 
 
정면 현판, 향경다실, 차를 마시며 향과 경전을 함께 하는 곳
 
 
측면 현판
 
 
현문스님은 1966년 1월 통도사에서 월하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70년 4월 통도사에서 월하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그간 영축총림선원, 봉암사 태고선원, 덕숭총림선원 등지에서 안거 수행을 했다. 2006년 9월 총무원 총무부장, 흥천사 주지 등을 지냈다.

백팔계단
 
백팔계단 옆의 수국
 
백팔계단은 실제 계단이 108개가 넘는다. 끝나는 지점을 알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외부 주차장에 주차하고 잠시 걸어와 백팔계단을 오르며 백팔번뇌를 잠깐동안 잊으면 좋다. 힐링이 저절로 되는 아름다운 곡선의 길이다.
 
 
 
현문 스님 통도사 주지 권한대행

2001년 7월 13일 양산 통도사 주지권한 대행으로 현문스님이 임명되어 주지를 역임한 바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으로부터 승인을 받아 이날 통도사 주지권한 대행으로 임명된 현문스님은 월하 전 종정의 상좌로 통도사 자장암 감원을 지냈다.

통도사는 전 주지 신허 스님이 직무대행으로 취임한지 1년이 넘도록 총무원으로부터 임명을 받지 못한데 이어 6월말께부터 주지선출을 둘러싸고 영축총림의 양대 문중인 월하 경봉 문중이 의견을 달리는 바람에 진통을 겪어 왔다. 통도사 주지는 암묵적으로 경봉 스님 제자가 하면 다음은 월하 스님 제자가 맡아서 교대로 하는 것이 관례였다.

현문스님은 “종교내분으로 실추된 영축총림의 위상과 월하 큰 스님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총무원과 협의, 현재 진행중인 각종 소송의 취하를 유도하고 큰 스님의 방장직 회복을 반드시 이뤄내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취현루, 다실로 영축산을 바라보는 풍경이 아름답다.
 
 
마애여래불상
 
이후에도 통도사 문중의 의견 대립으로 통도사가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현문스님이 구원투수로 등장하여 주지직무대행을 5회 역임하였다.

현문스님은 통도사 초대 방장을 역임한 전 조계종 종정 월하스님의 유지를 받드는 사업을 하는 (재)영축문화재단 이사장을 맡아왔다.

통도사에 동진출가(童眞出家 : 어린 나이에 출가함)하여 노전, 원주, 총무, 암주, 주지까지 다 거쳤다. 요직을 다 거쳐서 일명 '통도사의 황태자’로 불리기도 했다. 다른 별명으로 명품 스님이라 불리기도 한다. 터가 좁은 자장암을 잘 가꾸어 아기자기한 불국토를 만든 걸 보면 이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현문 스님은 통도사 아랫마을에서 열세 살 때 아버지의 손을 잡고와 동진출가했다. 부친과 친한 극락암 경봉 스님이 중을 만들자고 했다. 아이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 구하 스님을 먼저 뵈었다.

절을 받고 나자 안경을 코에 건 큰스님이 “발바닥 문대봐라” 하면서 발을 내미셨다. 아이는 노스님이 싫지 않았고 그렇게 했다. 잠시 후 아버지는 스님께 인사하고 혼자 돌아갔다.

통도사 승가대학 대교과를 졸업했다. 스님은 통도사 규정국장, 총무국장, 표충사 주지, 통도사 자장암 감원, 조계종 중앙선관위 위원, 불교TV 이사 등을 역임했다.

필자 심상도의 양산신문 2013년 10월 23일자 칼럼

자장암은 자장율사가 통도사를 창건하기 전에 움막을 짓고 기도하던 곳이다. 자장암의 관음전은 거북 모양의 바위 위에 건립한 명당에 자리잡고 있다. 거북이 머리, 등, 꼬리처럼 생긴 바위를 깨지 않고 그 위에 건립하여 자연을 아끼는 조상들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바위를 살려서 관음전 건립
 
관음전 안에 있는 바위
 
관음전 뒤에 있는 거북 머리
 
자장율사가 바위에 구멍을 뚫어 살도록 한 금와보살의 전설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어 행운을 시험하는 참배객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자장암은 자장율사(慈藏律師)가 통도사를 짓기 이전에 이곳의 석벽 아래에서 움막을 짓고 수도하였으며 나중에 통도사를 창건하였다. 옛 이름은 자장방이라 하여 통도사 경내 칠방의 하나였으며, 자장율사의 사후 제자들이 수양하던 암자이다.
 
 
금와공
 
금와보살이 있는 금와공
 
법당 뒤쪽 암벽에는 석간수(石間水)가 나오는데 자장율사가 손가락으로 바위에 구멍을 뚫어 금개구리를 살게 하였다는 소위 금와공(金蛙孔)이 있어 유명하다. 이능화(李能和)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하권(下卷) '승유어급변화금와(僧遺魚及變化金蛙)' 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축서산 통도사의 자장암 곁의 커다란 암벽에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있는데 그 속에 작은 개구리가 있다. 몸은 청색이고 입은 금색인데 어떤 때는 벌이 되기도 하여 그 변화하는 것을 헤아릴 수 없다. 여름철에 바위가 과열되면 뜨겁기가 솥과 같으나 그 위를 자유로이 뛰어다닌다.

사승(寺僧)이 이를 일러 금개구리라 하더라. 그런데 이 금개구리는 도무지 산문(山門) 밖을 나가지 아니한다고 하므로 한때 어떤 관리가 그 말을 믿지 아니하고 그 개구리를 잡아 함 속에 넣어 단단히 닫고서 손으로 움켜쥐고 돌아가다가 도중에 열어보니 없어졌다. 세간에 전하기를 그 개구리는 자장율사의 신통(神通)으로 자라게 한 것이라 말한다." 
 
 
필자 심상도는 통도사와 여러 부속암자를 수시로 방문하고 있다. 특히 자장암을 찾으면 마음이 편안햐짐을 느낄 수 있다. 필자는 금와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자주 자장암을 방문한 끝에 소원을 이뤘다.

금와보살을 친견한 불자도 여러 명 만나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몇 년 전 초파일 때 아들과 같이 온 할머니 한 분이 금와보살을 친견하는 극적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 남성은 연로한 노모를 모시고 왔는데 키도 작고 허리도 굽어 금와공을 들여다 보기에는 키가 약간 작았다. 미리 알고 작은 보조 의자 받침대를 가져왔다. 할머니가 의자에 올라 금와공을 들여다보는 순간 금와보살이 구멍에서 나와 할머니 손에 앉았다. 기뻐서 어쩔줄 모르는 할머니에게 도로 금와공에 넣어드리러고 필자가 말씀 드렸다.

금와보살은 불심이 돈독해야만 친견할 수 있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필자도 수없이 자장암을 찾은 끝에 금와보살을 친견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아주머니는 금와보살 친견 후 교통사고가 났는데, 별로 다치지 않았다고 얘기했다.

기억에 남는 사람으로 서울에서 승합차를 타고 온 아주머니가 있었다. 승합차에 식수, 이불, 살림살이를 싣고다녔다. 이 분은 금와보살 친견 후 휴대폰으로 찍어 명함크기의 사진 수백장을 인화하여 코팅 후 지인들에게 보시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었다. 필자도 한 장 받아 지갑에 넣고다녔다. 금와보살을 찬견하기 위해 서울, 수도권, 전국 각지에서 방문객이 몰려든다.
 
 
자장암은 연대는 미상이나 회봉(檜峰)이 중건하였고, 1870년(고종 7)에 한 차례의 중수를 거쳐 1963년에 용복(龍福)이 중건하였으며, 1987년부터 1993년까지 현문화상이 감원실, 금와당, 취현루 등을 건립하였다.

자장암은 국내 사찰 중 전망이 좋기로 소문이 났는데, 프랑스 르몽드지 사장이 자장암의 다실에서 바라보는 경치에 최고의 찬사를 보낸 적이 있었다고 한다. 자장암에서 영축산 정상을 바라보는 풍광이 매우 아름다우며, 정면으로 보이는 영축산 줄기의 능선도 한 폭의 동양화처럼 펼쳐져 있다.

관음전은 거북바위라는 암반 위에 지었는데 암반을 깨지 않고 그대로 건물을 지었기 때문에 법당 바닥에 바위가 살아있다. 거북바위 위에 그대로 전각을 올려서 자연미를 살린 우리 조상들의 자연보호 정신과 건축기술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관음전 앞에는 거북의 꼬리 부분, 법당 안에는 거북의 몸통 부분 일부, 관음전 뒤에는 거북의 머리 부분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몇 년 전에 강릉의 한 식당에 식사를 하러갔을 때 방의 한 가운데에 돌출된 커다란 바위가 있어 주인의 자연보호 정신에 깊은 감동을 받은 적이 있었다. 바위를 살려서 식당을 지어 입소문이 나는 바람에 영업이 더 잘 된다고 한다.

자장암 중창 불사

1982년부터 암주로 주석하면서 금와당, 취현루, 감원실 3동을 중건했는데, 금와보살로 유명한 자장암의 감원(監院)을 맡아왔다. 현문 스님은 불사를 하더라도 옛 건축과 조화가 되도록 경주 양동마을과 안동 하회마을도 가보고 전통건축을 참고하여 지었다고 한다.

요사채, 자장암 마당 밑에 자리잡고 있어 자연과 조화를 이뤄 있는듯 없는듯 절묘하게 자리잡고 있다. 여러 개의 방이 있고, 안엔 수세식 화장실도 있어 스님들이 수행하기에 알맞다.

현문 스님의 자장암 중창불사를 보면 자연에 대한 깊은 이해, 탁월한 공간 감각, 전문가 못지 않은 건축 안목, 통도사 창건주 자장율사가 기도한 전통 도량을 수호하기 위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관음전
 
 
현문 스님은 2층의 다실인 취현루를 건립하였다. 2017년까지 중창불사에 나서 한옥 요사채, 백팔계단을 정비하였다. 2019년 5월에는 한옥 화장실을 완공하였다.

최근 완공된 한옥 화장실
 
통도사 모랭이길, 배내골 장터길로 연결되는 길목에 화장실을 신축하여 답사객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구하 스님 시봉

현문 스님은 출가 후 93세 구하 큰스님(1872∼1965)을 1년 3개월간 시봉했다. 구하 스님은 노환으로 몸이 불편했지만 현문 스님은 최선을 다하며 힘든 내색없이 모셨다. 구하 스님은 하루 종일 시봉하고 곤히 자는 현문 스님을 새벽예불 시간되면 들어와서 깨웠다.

구하 스님은 개화기와 일제시대를 거치는 동안 한국불교의 근대화를 위한 산파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일제시대 명진학교를 설립해 인재룰 양성하고, 스님들을 일본에 유학보내고, 40세의 나이에 통도사 주지로 취임한 후 14년에 걸쳐 연임하며 개혁을 선도했다. 또한 30본산연합사무소 위원장에 선출돼 당시 불교계를 이끌었다.

자장동천, 바위 위 다람쥐
 
자장동천의 바위에 새겨진 세이석(洗耳淅)이라는 글자는 자장율사의 친필로 전해 온다. 당시 정계는 진골 출신의 외아들이며 지혜를 겸비한 그를 산속에 가만 놔두지 않았다.

선덕여왕이 그를 재상에 앉히려고 누차 불렀으나 응하지 않자 칙령을 내려 “산에서 내려오지 않으면 목을 베리라." 하였지만 자장은 “하루를 살다 죽을지언정, 파계를 하여 백년을 살지 않겠다."고 답하였다. 일언지하에 거절한 후 자장동천에 흐르는 물로 귀를 깨끗이 씻고 세이석이라 각서하였다 한다.
 
 
 
일제강점기시대 한국불교를 대표했기에 표면적으로 친일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을 칭송하는 발언을 하는가 하면 1920년대 중후반 「조선불교총보」등에 친일 성향의 글을 발표해 불자들의 친일에 앞장서기도 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파 명단에 올렸다. 구하 스님이 겉으로는 친일을 가장하여 일본 경찰의 감시망에서 일단 벗어났다. 그러나 은밀하게 독립운동가들에게 독립자금을 제공하고 지원을 했다. 현문 스님이 그 증거를 공개하여 은사를 친일파 명단에서 당당하게 뺄 수 있었다.

구하스님의 독립자금 지원 영수증 공개한 현문 스님

2005년 현문스님은 일제시대 당시 통도사 주지를 지냈던 김구하 스님이 비밀리에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음을 증명하는 자료를 발표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공개한 자료들은 독립자금 관련 영 수증 5장, 안창호 선생 등 10명에게 자금을 지원했음을 나타내는 ‘사변시(3·1운동을 지칭) 출금증’ 등으로 구성돼 있다.

독립자금 서류
 
독립자금 제공 영수증
 
구하 스님은 안창호 선생이 이끄는 상해임시정부에 5천 환을 보내고 여기저기 모두 1만 3천 환의 군자금도 비밀리에 대주었다. 안창호라는 이름이 쓰인 자금 내역은 현문스님이 주지로 재직했던 2005년 세상에 공개됐다.

5천 원 안창호 상해임정 국무총리할 때
2천 원 백최승(초월) 경성서 혁신공보사장 할 때
3천 원 이종욱 군자금 수집
1천 원 정인섭 독립운동 직접 계산 온천
5백 원 오이산 스님 상해 있을 때 범어사와 공동보조
5백 원 장재륜 독립운동 직접 전달 동래
5백 원 신정흔 독립운동 직접 전달 통도
3백 원 김포광 상해있을 때 노비로 급하게 경성
1백 원 정탁 독립운동 참여시 계산 통도
1백 원 양만우 동시 관광 계산

'구하 스님 독립운동 지원’ 영수증 자료였다.

상해임정 요인 이규홍 선생 독립유공자 서훈

상해임시정부에서 재무총장, 외무총장,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 국무원, 의정원 경상도 의원, 청년단 출펀부장 등 요직을 역임한 이규홍 독립투사가 현재까지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안타깝게 여긴 현문 스님은 이규홍 선생의 손자인 이경우 씨를 위해 증언서를 두 차례에 걸쳐 써주었다. 현문 스님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양산시립박물관 특별기획전 "1919 양산으로부터의 울림" 전시회 이규홍 독립투사 코너
 
 
상해 임시정부 거물 백농 이규홍 선생
 
이규홍 선생 관련 일제강점기 신문 기사
 
현문 스님이 쓴 이규홍 선생을 위한 증언서, 현문 스님이 이번에 두 번째로 쓴 증언서가 마력을 발휘하여 이규홍 선생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으면 좋겠다.
 
보훈처의 무성의한 의례적인 답변서
 
필자인 심상도는 이경우 씨를 위해 증언서를 써드렸다. 연구를 하고,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여 A4용지 11페이지에 걸친 상세한 자료의 증언서를 작성하였다. 이경우 씨는 할아버지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매년 보훈처에 자료를 제출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하였다.

그 이유는 사업을 했다는 것이 친일활동이라는 단순 논리다. 이규홍 선생의 친일 활동 흔적은 알본 기록애도 한국기록에도 없다. 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 명단에도 오르지 않았다.

필자는 이경우 씨의 억울한 사연을 듣고 도와드려야겠다는 일념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경우 씨 사례를 통해 보면 독립운동을 하면 집안 3대가 망한다는 전형적인 케이스다.

이경우 씨 형님은 할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애쓰다가 이미 고인이 되었다. 이경우 씨는 월남전 참전용사로 역시 애국자다. 고엽제 후유증으로 요즘 고생하고 있다. 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지 못해 평생을 어렵게 살아왔다. 양산시민들이 적극 나서서 도와야 한다.

양산시립박물관 전시장
 
 
● 월하 스님 시봉

현문 스님이 시봉한 또 한 분은 월하 큰스님이다. 거동할 수 있는 순간까지 손수 빨래를 하셨던 월하 스님은 구하 스님의 상좌답게 검소함 그 자체였다고 한다.

월하 스님의 열반송은 “가고 머뭄을 논하지 마라. 곳곳이 나의 집이니라.” 월하 스님의 다비식 때 불을 놓기 전 “불 들어갑니다” 소리친 것은 현문스님이었다. 

● 현문 스님의 법문

2005년 현문 스님이 통도사에서 ‘진정한 열반의 의미’를 주제로 법문한 내용을 소개한다.

이번 달은 부처님의 출가일(음력 2월 8일)과 열반일(음력 2월 15일)이 함께 들어 있는 달인만큼, 부처님 열반일을 맞이하여 ‘진정한 열반의 의미’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부처님이 지향한 마지막 경지는 해탈하여 열반(니르바나)에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열반은 대체 어떤 경지일까? 그 모습을 말로 설명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선은 ‘평온한 경지’라고 정의를 해 봅시다.

우리들의 생활은 평온과는 정반대 되는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경제가 어려운 요즈음 생활고는 물론이요, 우리 인간은 ‘사고팔고(四苦八苦)’라는 생로병사의 근본 괴로움을 짊어진 존재입니다. 이런 고달픔에서 벗어나는 것, 해방되는 것이 바로 해탈이며, 열반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보거나 듣거나 생각하거나 식별하여 마음에 드는 사물에 대한 욕망이나 탐욕을 제거하는 것이 불멸의 열반의 경지이다.”

● (재)영축문화재단

2011.11.28 재단법인 "영축문화재단" 설립허가(경상남도 NO 제 2011-24호

초대 임원 구성

이사장(성파스님)
이사(현문스님, 산옹스님, 상우스님, 법진스님, 오심스님)
감사(병천스님, 도광록 회계사)
사무국장(홍성표-울산시립노인요양원장)

2012.11.27제2대 이사장 현문스님 취임

2012.12.23신규이사 취임(정우스님, 혜남스님)
2015.1.28신규이사 취임(동주스님)
2015.2.25정관상 법인 명칭 변경 "대한불교조계종 재단법인 영축문화재단"

2016.5.15신규이사 취임(최순자)
2017.12.28신규이사 취임(동진스님)

재단법인 영축문화재단(이사장 현문스님)이 제7회 영축문화대상 수상 후보자를 모집한다.

자장전
 
자장율사 영정
 
시상 부문은 부처님 자비사상과 불살생 정신으로 화합과 상생의 사회를 만드는데 실천하는 사람에게 수여하는 봉사 실천상, 전통문화 계승발굴로 정신문화 복원에 기여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학술문화상, 돈독한 신심으로 수행정진과 홍포에 매진함으로서 정법수호와 불교인재 양성, 가람수호에 기여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포교원력상 등 3분야다.

자장암 낙락장송, 금강송은 자장암의 명품 중의 하나이다.
 
각 시상 후보 기준은 해당분야 수공 기간이 10년 이상이며 동종의 공적으로 정부 관련 포상을 받은 경우는 5년 이상 경과되어야 신청가능하다. 국적, 연령, 성별, 직업, 학력, 종교에 구분이 없으며, 스님일 경우 조계종 소속이어야 한다. 소속기관 대표자나 조계종 재적사찰 주지 혹은 기관장이 추천할 수 있다.
 
 
 
초파일 불자들에게 연꽃차 대접
 
 
 
모집기간은 오는 10월 31일까지며 11월 중 서류심사를 거쳐 .12월 1일 재단 및 불교신문 등에 발표한다. 시상은 
월하대종사 추모다례재가 열리는 12월7일 거행한다.

2018년 3월 6일 영축문화재단(이사장 현문스님)이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자비나눔 기금으로 2천만 원을 쾌척했다. 
조계종단에서 모금운동 열기가 뜨거운 ‘푸에르토리코 허리케인 
피해 성금’으로도 1천만 원을 후원했다.

영축문화재단 이사장 현문스님은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4층 접견실에서 조계종 총무원장 설정스님을 예방하고 재단법인 아름다운동행에 각각 기금을 전달했다.
 
backward top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