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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와 부속암자의 추사 김정희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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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통도사와 부속암자의 추사 김정희 글씨

통도사에서 눈여겨볼 것은 전각, 불이문에 붙여 놓은 현판 글씨다. 천년 고찰 통도사의 현판에는 추사 김정희, 흥선대원군, 석재 서병오의 글씨가 여러 개 붙어 있다. 진본은 대부분 성보박물관에 보관돼 있고, 전각에 걸려 있는 것은 모각된 것이지만 글씨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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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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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도사의 추사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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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에서 눈여겨볼 것은 전각, 불이문에 붙여 놓은 현판 글씨다. 천년 고찰 통도사의 현판에는 추사 김정희, 흥선대원군, 석재 서병오의 글씨가 여러 개 붙어 있다. 진본은 대부분 성보박물관에 보관돼 있고, 전각에 걸려 있는 것은 모각된 것이지만 글씨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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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추사의 글씨는 주지실 현판에 쓰인 ‘노곡소축(老谷小築)’과 ‘탑광실(塔光室)’, 노전실의 일로향각(一爐香閣)이 바로 추사의 솜씨다. ‘산호벽수(珊瑚碧樹)’도 추사의 작품인데, 뜻은 ‘바다산호와 푸른 숲처럼 크게 번성한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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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로전의 가장 서쪽은 일반인들이 들어갈 수 없는 선원구역이다. 이곳에는 주지 스님의 처소인 탑광실, 그 옆에 보광전과 부속건물 그리고 그 뒤에 방장스님의 거처인 정변전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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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광실은 조선 영조 33년(1757년)에 범음대사(梵音大師)가 초창했다고 전하며, 1968년 청하(淸霞)스님이 중건하였다. 건물은 정면 8간, 측면 3간으로 주심포 양식으로 되어 있다. 원래는 대웅전 맞은 편에 있으면서 불전에 공양을 짓던 부엌과 향나무를 쌓아두던 향적전(香積殿)이 있었다. 설법전 불사할 때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는데, 지금은 주지 스님의 집무실과 거처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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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곡소축(老谷小築)’은 추사 행서의 멋과 힘이 느껴지는 과천 시절의 작품이다. 노곡(老谷)은 추사와 밀접한 관련을 가졌던 스님의 당호 같은데 정확히 누구인지는 모른다고 한다. 소축(小築)은 소실(小室)과 같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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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더 눈길을 잡는 것이 ‘일로향각(一爐香閣)’ 현판이다. 노전실에 걸려있는 일로향각(一爐香閣)은 ‘한 마음을 화로에 넣고 담금질해 향기를 만든다’는 뜻이다. 글의 뜻도 뜻이지만, 예서체로 쓰인 이 글씨에서는 독특한 운치가 느껴진다. 은해사, 서울 봉은사, 경주 옥룡암, 부산 범어사 등 전국 각지에 이 글씨로 현판을 단 절집이 많다. 경매에 자주 나오는 편액 중 하나다.


일로향각 편액은 통도사 상로전에 위치한 노전인 일로향각에 걸려 있던 편액으로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제주(1840~1848년), 북청(1850~1852년)에서의 유배생활을 마친 말년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일로향각 현판이 걸려 있던 전각은 철거하고 현재는 노전실에 붙어 있다. 이곳은 스님들의 수행 공간으로 일반인은 출입할 수 없다.

 

2. 극락암의 추사 글씨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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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부속암자인 극락암에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무량수각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다. 극락암 현판 바로 밑에 걸려 있다. 무량수(無量壽)란, 인도말 아미타-유스(Amitāyus)의 번역어다. 아미타란 ‘한량(限量)이 없다’는 의미이며, 유스는 ‘수명’이라는 뜻이다. 즉 수명에 한량이 없는 죽지 않는 존재가 아미타불인 것이다. 이를 한자로 무량수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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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글씨는 구불구불하여 글씨라기보다는 그림에 더 가까운 모습이다. 많은 사람들이 무(无) 자를 천(天) 자로 오해해서 천량수각으로 읽기도 한다. 추사 글을 자세히 보면 무자, 각자는 머리가 크고 가운데 양자, 수자 두 자는 돌탑을 쌓은 것처럼 뾰족하다. 즉 의도적으로 음양을 맞추고 있어 예술적이다.

 

무(無)와 무(无)는 비슷하게 사용되지만, 원래는 사용하는 용례가 약간 다르다. 있다 없다 할 때의 없다는 무(無)고 태초부터 존재한 적이 없던 것은 무(无)다. 예를 들면 ‘먹을 것이 없다’는 무(無)고, ‘나에게 세 번째 팔은 없다’는 무(无)다.

 

아미타불에게 죽음은 어떻게도 존재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 무(無)가 아닌 무(无) 자를 썼다. 즉 무(无)를 사용한 게 아미타불의 의미에 적합하며, 존숭(尊崇)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호쾌대활(好快大活)’은 극락암 삼소굴 옆의 원광제(圓光齊) 건물에 걸려 있다. 호쾌대활은 호쾌하게 웃어 크게 살아난다는 의미다. 일소일소 일로일로(一笑一少 一怒一老)라는 말이 있다. 한번 웃으면 한번 젊어지고, 한번 화내면 한번 늙는다고 한다. 사람들에게 웃음을 권할 때 자주 쓰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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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부속암자인 사명암의 ‘대몽각(大夢覺)’과 ‘일화오엽루(一花五葉樓)’가 추사의 글씨다. 통도사의 추사 작품은 완숙미가 돋보이는 말년의 작품들이다. 다른 사찰의 추사 작품 대부분이 제주도 유배 전후에 쓰인 것과는 차이가 난다.

 

3. 각고의 노력으로 독특한 추사체 완성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년)는 충남 예산에서 출생했으며 본관은 경주다. 조선시대 외척 세도 정치기에 활동한 조선 예원의 마지막 불꽃 같은 존재이다.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 완당(阮堂), 예당(禮堂), 시암(詩庵), 과노(果老), 농장인(農丈人), 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 200여 개를 사용했다.

 

조선이 고유 문화를 꽃피운 진경시대의 세계화에 성공한 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진경시대의 학문 조류인 북학 사상을 본궤도에 진입시킴으로써 조선 사회의 변화 논리에 힘을 실어준 장본인이다.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과 기계 유씨(杞溪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큰아버지 김노영(金魯永)의 양자로 들어갔다. 그의 가문은 명문 집안으로 그가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할 정도로 권세가 있었다. 추사는 영조가 지극히 사랑한 화순옹주(和順翁主)와 김한신(金漢藎)의 증손자이다.

 

1809년 10월 24세 때 생부 김노경이 동지부사로 연경에 갈 때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동참하였다. 이듬해 3월에 귀국하기까지 수 개월간 연경의 양대 경사(兩大經師)인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을 만나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완원으로부터는 청나라의 고증학이 이룩해 놓은 경학(經學)의 성과를 접함으로써 서론(書論)에 심취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옹방강을 만나 한송불분론(漢宋不分論)의 연경(硏經)자세에 공감하면서 금석고증의 방법을 전수받았고 그의 서화감식과 서학이론에 매료되었다.

 

1819년(순조 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 예조 참의, 설서, 검교, 대교, 시강원 보덕을 지냈다.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尹商度)의 옥사에 배후 조종 혐의로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순조의 특별 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로 복직되고, 그도 1836년에 병조참판, 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이 즉위하고,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 그는 다시 10년 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헌종 말년에 귀양이 풀려 돌아왔다.

 

추사는 귀양 가던 길에 대흥사에 들러 막역지우인 초의선사를 만났다. 추사는 대웅전에 이광사의 글씨가 걸린 것을 보고는 조선의 글씨를 망쳐놓은 원교의 글씨 따위를 걸어놓았냐며 초의선사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초의는 어쩔 수 없이 원교의 글씨를 내리고 추사의 글씨를 걸었다.

 

그러나 제주에서의 귀양살이는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경험이었다. 이전의 영광은 저물었고 찾는 이 한 명도 없이 외롭고 쓸쓸한 나날을 견뎌야 했다. 유배 중에 아내의 상까지 당했다. 추사는 복잡한 감정들을 달래기 위해 끊임없이 글씨를 썼다. 추사체는 유배생활로 인해 완성되었다.

 

1848년 귀양에서 풀려나 한양으로 가던 길에 추사는 대흥사에 들러 초의선사를 만나 귀양가던 그때는 내가 잘못 보았다며 내 글씨를 떼고 원교의 글씨를 다시 걸라고 말했다 한다. 그래서 지금의 대웅전에는 원교의 글씨가 걸려 있고, 옆 백설당에는 추사의 글씨가 걸려 있다.

 

1851년 친구인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일에 연루되어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 돌아왔다. 이 시기는 안동 김씨가 득세하던 때라서 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학예(學藝)와 선리(禪理)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북청에서 해배된 후 과천에 칩거할 당시에는 문예상으로 왕사정(王士禎)의 신운설(神韻說)을 따르고 불교에 의탁하여 불교적 색채가 농후해진 시기다. 1855년경에 그린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는 동기창의 화론에 기초하면서도 자신의 문예관과 생활 속에서 비롯되어 나타난 작품으로, 시, 서, 화, 선(禪)이 일치된 작품이다.

 

글씨를 잘 쓰기로 명망이 높아 우리나라 서예사를 통틀어 가장 추앙받는 서예가 중 한 사람이다. 추사 글씨의 흐름을 크게 대별하면 연경행 이후 50대 중반까지 구양순을 바탕으로 한 옹방강풍이 주류를 이룬 것이 그 하나이고, 유배 이후 10여 년간 변화를 거듭하면서 예서와 해서, 행서에서 완전한 자가풍을 창출해 낸 이른바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추사는 고증학의 성과를 수용하여 실사구시학파(實事求是學派)를 부흥시킨 가장 큰 공헌자다. 금석학에도 뛰어나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판독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며, 대표작인 ‘세한도(歲寒圖’와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로 대표되는 불세출의 화가이기도 하다.

 

추사의 세한도는 문인화의 대표작으로 인정받아 국보 180호로 지정되었다. 제주도 유배 생활 중 원하는 서적을 구하기 힘들었던 추사 선생을 위해 제자 이상적은 중국 사신으로 나갈 때마다 최신 서적을 구해 제주도로 보냈다.

 

유배 전과 후, 변함없는 이상적에게 감동한 추사 선생이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그림뿐이었다. 겨울이 돼서도 변함없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이상적에 비유하여 그렸다.

 

통도사의 추사 글씨는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인 주지실, 노전실 앞, 성보박물관에 있어 쉽게 접할 수 없다. 그러나 부속암자인 극락암에 가면 ‘극락암’(極樂庵) 현판 밑에 달린 ‘무량수각(无量壽閣)’이라는 추사의 글씨를 볼 수 있고, 옆에 있는 원광제(圓光齊)의 여러 현판 중에서 추사의 글씨인 호쾌대활(好快大活)을 볼 수 있다.

 

YNEWS 총괄운영위원장 심…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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