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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화사의 황산 잔로비와 나모ᄃᆡ원본존디장보살/심상도 박사 화요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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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용화사의 황산 잔로비와 나모ᄃᆡ원본존디장보살/심상도 박사 화요 칼럼

양산 황산잔로비(梁山 黃山棧路碑)는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에 있는 비석이다. 2015년 7월 30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593호로 지정되었다. 잔로(棧路)는 잔도(棧道)라고도 하는데 가파른 벼랑길에 나무를 걸쳐 낸 길을 말한다. 황산 비리, 황산 베리 등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대동여지도』에는 황산도(黃山道)로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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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산 잔로비

 

양산 황산잔로비(梁山 黃山棧路碑)는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에 있는 비석이다. 2015년 7월 30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593호로 지정되었다.

 

잔로(棧路)는 잔도(棧道)라고도 하는데 가파른 벼랑길에 나무를 걸쳐 낸 길을 말한다. 황산 비리, 황산 베리 등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대동여지도』에는 황산도(黃山道)로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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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대에서 황산역에 이르는 비탈길을 일러 황산천(黃山遷; 황산베리) 또는 물금천(勿禁遷; 물고미잔로)이라고 한다. 밀양 검세리의 까치비리와 함께 낙동강 하류의 대표적인 비리길이다. 좁고 험하여 사고가 잦았는데, 이만도의 『양산군읍지』에 보면 "황산천은 군 서쪽 20리에 있으니 서울에서 동래까지 이르는 큰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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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산을 깎아 아래로 낙동강을 굽어보면서 헤쳐나가는 험한 길이라 뾰족한 석각과 크고 험한 바위는 수레바퀴를 망가뜨리고, 말을 전패(顚沛 : 엎어지고 자빠지게 함)케 하는 우환이 일어나기가 십상이었다.“고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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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로비는 황산천(黃山遷: 황산 벼리)을 따라 건설된 영남대로의 3대 잔도 중의 하나에 대한 중요한 역사적 증거가 되는 중요한 자료이다. 황산 잔로비를 보호하기 위하여 용화사 경내로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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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잔로비의 재질은 화강암으로 제작되었으며, 현재는 비신(碑身)만 남아 있다. 비신 전면과 후면에 작은 글씨로 비문이 음각(陰刻)되어 있는데, 육안으로 판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마모가 심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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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제액인 ‘황산잔로비(黃山棧路碑)’ 다섯 글자 가운데 ‘잔(棧)’은 거의 확인 불가능하며 나머지는 어느 정도 판독이 가능한 상태다. 비문의 대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전면에는 강희(康熙) 33년(1694) 황산잔로를 정비한 후 그 일의 시말에 대해 기록했다. 군수 권성구가 탄해 스님과 별장 김효의를 시켜 깊은 곳은 메우고 험한 곳은 깎아 평탄한 길을 만든 공을 기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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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석은 강희 34년 갑술년(서기 1694년)에 세워진 뒤 홍수 등으로 인해 무너진 것을 도광 23년(서기 1843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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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면에는 황산잔로비가 어떤 연유로 인해 쓰러져 묻혀 있다가 1843년 주민들에 의해 다시 중수되어 세워진 일에 관해 밝혀놓았다. 따라서 전면과 후면의 내용은 각기 다른 것이며, 작성 시기도 150년 정도 시간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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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9년에 양산군수 박규환(朴奎煥)이 밀양부사 임수적(任守迪)과 작원(鵲院) 황산(黃山) 등의 벼리길을 보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갑술 후 42년 병진년(1736)에 군수 임진하가 중 학능(學能)에게 명하여 재원을 마련하게 하고 4년 뒤 기미년(1739)에 군수 박규환이 밀양부사 임수적과 힘을 합해 작원 황산 두 잔도를 고쳤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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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 잔로비는 원래 용화사 대웅전 왼쪽에 있었는데, 주지스님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황산 잔로비 안내문은 비문 옆에 있지 않고, 황산베랑길 자전거도로에 있다. 용화사에도 안내판을 설치해야 하겠다. 용화사에 들르지 않고 황산베랑길로만 가는 관광객에게는 현재의 안내판이 도움이 될 것이다. 자전거만 타고 쌩쌩 달리는 관광객에게는 주목을 받지 못한다.

 

2. 나모ᄃᆡ원본존디장보살 비석

 

용화사의 황산잔로비 오른쪽에 더 큰 비석인 ‘나모ᄃᆡ원본존디장보살’이라는 조선시대 고어체가 있어 국문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임을 알 수 있다. ‘나모ᄃᆡ원본존디장보살’(南無大願本尊地藏菩薩)은 현대어로 고치면 ‘나무대원본존지장보살’이다.

 

대부분의 관광객은 황산잔로비에 집중하여 ‘나모ᄃᆡ원본존디장보살’(南無大願本尊地藏菩薩) 비석은 그냥 무관심하게 지나친다.

 

필자 역시 한자로 크게 보이는 南無大願本尊地藏菩薩은 다른 절에도 있는 평범한 비석으로 생각하고 한글로 적힌 글자는 못보고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같이 간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이 그 비석을 살펴보더니 고어체로 적혀 있다고 알려주었다. 이시일 시인의 관찰력은 항상 감탄사를 불러일으킨다.

 

자세히 살펴보니 요즘 쓰지 않는 조선시대 고어체로 ‘아래 아’자를 사용하고 지장보살을 디장보살로 써 놓아서 깜짝 놀랐다. ‘나모ᄃᆡ원본존디장보살’을 다시 한 번 음미하며 비석의 옆면과 뒷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왼쪽 옆면은 글자가 마모되어 잘 분별이 되지 않았다.

 

오른쪽 옆면에서 확인 가능한 이름은 박춘동(朴春東), 박돌쇠(朴乭釗), 김씨 보현화(金氏 普賢花)였다. 김씨 보현화는 절에서 스님이 지어주는 법명이다. 박돌쇠라는 이름에 주목해보자. 돌쇠는 평범한 백성의 대표적인 이름으로 친근감이 있다.

 

지장보살은 모든 악업에서 해탈하게 하는 보살이며, 죽은 사람과 산 사람 모두를 이롭게 하는 보살이므로 박돌쇠라는 불자는 먼저 세상을 떠난 조상의 극락왕생을 빌거나 자기 가족의 공덕을 빌었을 것이다.

 

“나무 유명교주 지장보살(南無 幽冥敎主 地藏菩薩), 나무 남방화주 지장보살(南無 南方化主 地藏菩薩), 나무 대원본존 지장보살(南無 大願本尊 地藏菩薩)”을 염송했을 것이다. “지극한 마음으로 유명교주이신 지장보살님께 귀의합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남방화주이신 지장보살님께 귀의합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대원본존이신 지장보살님께 귀의합니다.”

 

뒷면은 비석을 축대에 바짝 붙여 세워 놓았기에 사진을 찍기가 매우 힘들었다. 뒷면에 여러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용화사에 시주를 하고 비석을 세우는데 기여한 불자들의 이름으로 보였다. 김씨 보덕화(金氏 普德花)라는 이름이 있었다.

 

3. 지장보살과 지장경언해(地藏經諺解)

 

지장보살(地藏菩薩)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원하는 보살이다.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지옥에 몸소 들어가 죄지은 중생들을 교화, 구제하는 지옥세계의 부처님이다.

 

석가의 위촉을 받아, 그가 죽은 뒤 미래불인 미륵불(彌勒佛)이 출현하기까지 일체의 중생을 구제하도록 의뢰받은 보살이다. 관세음 보살과 함께 가장 많이 신앙되는 보살이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불에게 “지옥이 텅 비지 않으면 성불(成佛)을 서두르지 않겠나이다. 그리하여 일체의 중생이 모두 제도되면 깨달음을 이루리라”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부처가 없는 시대 즉, 석가모니불은 이미 입멸하고 미래불인 미륵불은 아직 출현하지 않은 시대에 천상, 인간, 아수라, 아귀, 축생, 지옥의 중생들을 교화하는 보살이다. 천상에서 지옥까지의 일체중생을 교화하는 대자대비의 보살이다.

 

지장경언해(地藏經諺解)는 조선 세조 시기에 만들어진 불경 언해서로 지장보살본원경언해(地藏菩薩本願經諺解)라고도 부른다. 총 3권 1책으로 현재 중간본이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등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 세조 시기에 고승 학조(學祖)가 왕의 명을 받아 간경도감(刊經圖監)에서 불교의 대표 경전 중 하나인 지장경(地藏經)을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이후 책으로 인쇄하여 전국에 배포하였으며, 세조가 직접 지은 월인석보 권21에도 그 내용이 수록되었다.

 

하지만 세조 때 만들어진 원본은 현존하지 않는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1569년(선조 2년), 1752년(영조 28년), 1791년(정조 15년)에 중간된 것들이다. 이 중 정조 때 중간된 본은 따로 음역지장경(音譯地藏經)이라고 부른다. 비록 원본은 소실되었지만 중간본들을 통해 그 형식과 내용이 그대로 전해 내려오고 있으므로, 15세기 훈민정음 창제 직후의 한국어를 연구하는 데 중요하게 사용된다.

 

제작시기를 보면 1762년(영조 38)(간행), 1765년(간행), 1791년(정조 15)(간행), 1879년(고종 16)에 간행되었다. 간행 및 발행한 곳은 견성암(1762), 약사전(1765), 송광사(1791), 보정사(1879) 등이다. 1569년(선조 2) 하동 쌍계사에서 중간한 3권 1책의 판본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전한다.

 

그 밖에 1752년(영조 28)에 간행된 판(3권)은 순 한글로 되어 있고, 1791년(정조 15)에 간행된 판은 『음역지장경(音譯地藏經)』이라 하여 한글로 원문을 음독(音讀)한 것이다.

 

월인석보 제21(하) 지장경 ① 원문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善利얻젼니내 이제 죠고맛 疑心 이리 이셔 世尊묻노니 願世尊이 慈悲샤날爲야펴니쇼셔 부톄 閻羅 天子려니샤네 무르라 내 너 爲ㅎ.야 닐오리라

 

지장경 ①을 현대어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선리를 얻은 까닭이니 내가 이제 조그만 의심 일이 있어 세존께 여쭈니 원하건대 세존이 자비하시어 날 위하여 펴 이르십시오. 부처가 염라천자더러 이르시되 네가 한껏 물으라. 내가 너를 위하여 말하겠다.

 

지장경에서 부처는 부톄로 표기되었다. 지장경언해에 나타난 국어학적 특징을 견성암판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ㄷ구개음화현상이 나타난다. 원순모음화현상이 보인다. 어두 유기음에 ○이 보인다. 어말자음 ㅅ과 ㄷ이 혼용된다. 지장경언해는 근대국어 연구에 좋은 자료를 제공한다.

 

구개음화)口蓋音化)는 ‘ㄷ, ㅌ’이 ‘ㅣ’모음을 만나 ‘ㅈ, ㅊ’으로 바뀌는 현상을 말한다. ‘ㅈ, ㅊ’과 같이 혓바닥과 센입천장 사이에서 나는 소리를 구개음이라고 하는데 구개음이 아닌 ‘ㄷ, ㅌ’이 ‘ㅣ’모음과 함께 쓰이면 구개음인 ‘ㅈ, ㅊ’으로 바뀌는 현상을 말한다. 구개음화가 일어나는 까닭은 소리를 좀 더 쉽게 내기 위해서다. 즉, ‘디’와 ‘지’를 소리내 보면 ‘지’가 혀의 움직임이 더 적은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혀의 움직임이 적어야 소리내기가 쉬워진다.

 

용화사의 비석에 적혀 있는 ‘나모ᄃᆡ원본존디장보살’이라는 조선시대 고어체는 국문학사의 귀중한 연구 자료다. ‘ᄃᆡ원’에서 ‘아래 아’ 자의 용례를 볼 수 있고, ‘디장보살’에서 지장보살로 바뀌는 구개음화 현상도 고찰할 수 있다. 용화사 안의 황산 잔로비에 안내판을 설치해야 하고, ‘나모ᄃᆡ원본존디장보살’ 비석 역시 방문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상세한 안내판을 설치해야 하겠다.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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