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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지역의 제철 유적 / 심상도박사 화요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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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양산지역의 제철 유적 / 심상도박사 화요 칼럼

양산 물금 유적에서 제련로를 비롯한 다수의 제철로가 확인되어 고대에 철생산이 대량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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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금지역에서 발견된 제철 유적과 고대 도로

 

양산 물금 유적에서 제련로를 비롯한 다수의 제철로가 확인되어 고대에 철생산이 대량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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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김해, 밀양 지역에는 여러 곳의 제철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양산시 물금읍 가촌리 1248-5 일원, 양산시 물금읍 범어리 2762-13 일원에서 제철유적이 발견되었다. 물금신도시 조성과정의 사전조사에서 제철 유적이 나와 동아대학교에서 발굴조사를 하고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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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점은 제철 유적들이 원위치에 보존되고 전시관을 만들어야 하는데, 보고서만 작성하고 유물은 그대로 땅속에 묻히고 말았다. 그당시 발굴에 참여하였던 조국영 향토사학자에 의하면 제철 유적이 나온 현장은 현재 디자인공원과 부산대학교 사이에 있는 도로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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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영 향토사학자

 

발굴조사를 마치고 제철 유적, 우물 등은 땅에 도로 묻었다고 하였다. 디자인공원 건너편 부산대학교 쪽의 인도 근처라고 위치를 알려주었다.

 

양산시 물금읍 범어리 1106-2, 1106-4, 1107-1번지 일원에서 신라시대 도로가 발견되었다. 이 도로는 고대 신라 왕경(王京)인 경주와 낙동강변에 있는 물금을 잇는 역할을 했다. 통일신라시대 전후 시기 제철과 관련된 도로 유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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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리 도로 유적은 6~7세기 신라의 제철 유적과도 관련된다. 이 도로는 신라의 국가 통치에 필요한 기능과 함께 물금읍 가촌리 유적과 범어리 유적에서 생산된 철을 운반하는 기능도 하였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이 도로는 물금 신도시 조성으로 묻혔지만 발견된 도로의 노선 안내판을 만들어 제철유적과 아울러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필요도 있다.

 

양산시립박물관은 국립김해박물관에 보관돼 있던 물금 제철 유적 출토유물 243점을 2014년 3월에 인수하여 전시회를 개최한 바 있다. 양산시립박물관은 국립김해박물관에 국가 귀속된 물금 제철 출토유물 243점을 임시보관처인 동아대학교박물관으로부터 인수받았다. 

 

2. 물금 제철유적

 

물금 제철유적의 배후인 오봉산 서쪽 사면에는 15세기부터 1995년까지 철광석을 채광했던 양산 물금광산이 있다. 

 

낙동강 물금 주변에는 서북쪽 약 11㎞ 거리의 김해 상동광산을 비롯해 밀양 미촌리 유적(사촌 제철유적), 임천리 유적(금곡 제철유적), 김해 하계리, 여래리 유적, 창원 봉림동 유적 등 제철유적이 분포한다.

 

물금 제철유적은 우리나라 최대 제철유적 중의 하나로 손곱히고 있다. 제철조업과 관련된 45기 이상의 유구가 조사되었다. 주요한 유구를 살펴보면, 구상유구는 물을 이용해 비중선광(比重選鑛)을 하던 선광장으로 추정되었다. 수혈유구 중에는 선광된 철광석을 소결시키는 배소유구(焙燒遺構)와 배소된 광석을 제련하는 제련로가 다수 포함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패각(貝殼 : 조개 껍데기) 소성유구(燒成遺構)와 저장유구는 제련 시 조재제(造滓劑)로 사용할 패각을 소성 및 저장하던 곳이다. 도로유구와 우물은 원광석 및 생산품을 운송하고 조업에 필요한 물을 공급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제사유구는 제철 조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길 기원하던 제의행위와 관련된 유적이었다. 유적에서 철광석, 송풍관, 노 벽체편, 철괴, 유출재 등 다수의 제철 관련 유물이 출토되었다.

 

물금 제철유적은 시기적으로 5~8세기경에 제철 조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주거지, 도로 관련 유적, 고분 역시 4~7세기로 편년되고 있어 당시 이 일대에 한반도 최대규모의 제철산업단지가 조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야와 신라가 각축을 벌이던 시기에 낙동강을 경계로 양산, 밀양 지역은 신라, 김해, 창원 지역은 가야의 고지(古地)였다. 

 

당시 철산지를 확보하기 위한 신라와 가야의 전쟁이 치열했음을 보여주는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양산은 그당시 양산천을 경계로 동쪽은 신라, 서쪽은 가야지역이었다. 어곡동에서 화제리로 넘어가는 고개에 마고산성이 있는데, 산정상을 중심으로 둘러싼 퇴뫼식 산성이다. 고대의 분쟁이 일어났던 역사의 현장이다. 물금지역은 가야와 신라의 국경지역으로서 기능을 했다. 그후 금관가야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결국 신라에 흡수되고 말았다.

 

물금지역 신도시 개발사업에 앞서 1997~1998년 동아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가촌리유적에는 삼국시대 수혈주거지 2동, 수혈유구 13기, 소형수혈 및 주혈군이 밀집분포하였다. 범어리 유적에서는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에 걸친 수혈유구 24기, 우물 2기, 도로유구 1기, 부석(敷石) 구상유구(溝狀遺構) 3기 등 모두 30기의 유구가 조사되었다.

 

물금유적은 오봉산(530m)에서 동남쪽으로 뻗은 구릉이 끝나고 평지가 시작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서쪽 2~2.45㎞ 거리에는 낙동강이 북서에서 남동으로 흐르고, 동쪽 1.7~2.2㎞ 거리에는 양산천이 남으로 흘러 낙동강에 합류한다. 유적 앞쪽으로는 양산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다. 

 

양산시립도서관과 디자인공원을 사이에 두고 북쪽에 범어리유적이, 남쪽에 가촌리유적이 서로 450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위치한다. 철을 생산하기 위한 나무가 오봉산에 풍부했고, 완성된 철을 운반하기 좋은 낙동강과 양산천이 있었다.

양산의 경우,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는 임경산(臨景山)에 사철이 생산된다는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화자포(火者浦)에서 철이 생산된다 하였다. 

 

화자포는 원동면 화제리를 말한다. 원동면 화제리 일원의 내화마을에 자철석, 배소 흔적이 있다. 불무골이라는 지명도 있다. 필자는 이시일 시인과 답사를 한 바 있다. 이러한 기록은 이 지역이 예로부터 철산지였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며, 실제로도 근대, 현대 양산에는 물금광산과 경남 철산이 자철광과 적철광의 주요산지였다.

 

2. 물금 제철유적의 역사적 중요성

 

제철로(製鐵爐)로 추정되는 유구는 상부의 삭평이 심해 원래의 형태를 알기 어렵다. 

 

대부분 원형 혹은 방형에 가까운 평면형태를 가지며, 내부에 고온에 의해 붉은색으로 경화된 둥근 부분이 있거나, 노 벽체편, 철광석, 대구경 송풍관, 철괴, 유출재 등이 출토되어 원통형의 노(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노의 크기나 출토유물로 보아 상당수가 제련로인 것으로 보이지만 후속공정인 단야조업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패각 저장 및 소성유구에서는 제첩, 개조개, 굴 등의 패각이 다량 검출되었으며, 경사진 부석 구상유구에서는 위치에 따라 크기가 서로 다른 철광석이 다량 출토되어 물의 흐름을 이용해 철광석을 선별하던 장소로 판단되었다. 제사유구에서는 고배류를 중심으로 한 토기의 의도적 매납현상이 관찰되었다.

 

제련 시 철 성분과 불순물의 분리를 원활히 하기 위해 패각을 첨가했다. 유적에서 출토된 5점의 철재에 대한 금속분석 결과, 산화칼슘(CaO)과 이산화티탄(TiO₂) 함량은 그리 높지 않았고 철의 잔유량(全鐵量)은 30~50%로 확인되었다. 

 

또한 올리바인(olivine)과 마그네타이트(magnetite) 조직이 주상(主狀)으로 나타났다.

 

출토된 철광석은 대부분 자철광석이고, 크기는 다양하지만 5㎝ 미만의 선광된 것도 많다. 

 

노 벽체편은 출토량이 많지 않지만 식물성 섬유가 혼입된 점토 덩어리들이 상기한 각종 제철관련 유물들과 함께 출토된 점으로 보아 제련로의 벽체로 추정된다. 

 

철괴는 적갈색을 띠는 등 외관상으로는 철성분이 많이 포함된 것으로 보이나 금속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성분을 알 수 없다. 유출재는 조업 중 노 바깥으로 흘려 내려 쇠똥처럼 층층이 쌓인 전형적인 제련재이다. 송풍관은 상당히 많은 양이 출토되었는데, 잔존상태가 좋지 않아 정확한 크기와 형태를 알기 어려우나 대부분 직경 13.1~18㎝의 일자(一字)형 직관(直管)이며, 외면에 자성이 강한 철재가 용착된 것이 많다.

 

신라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한 철생산지인 양산 물금지역, 밀양 지역, 김해지역을 지배함으로써 삼국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다. 고대나 현재나 철은 여전히 산업의 쌀로서 부국강병의 필수적 소재로 쓰이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 박태준 포철회장이 포항제철을 설립하여 철강산업을 발전시켜 세계적인 자동차 생산국, 세계 1위의 조선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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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영 향토사학자의 말에 의하면 디자인공원 서쪽에 있는 황전아파트에서 디자인공원 쪽으로 작은 계곡이 내려왔는데, 제철 과정에서 물을 이용하기 좋은 자연지형이었다. 현대적인 도시에서 사용하는 일종의 공업용수였다고 판단된다. 계곡은 신도시 조성과정에서 땅속으로 묻혔다고 한다. 도로 밑으로 묻힌 우물은 제철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식수로 사용하거나 제철작업에도 활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에도 양산은 첨단의 제철산업이 활발하게 작동하는 산업현장이었고, 그 전통을 이어받아 현재도 공장이 밀집한 일반산업단지가 곳곳에 조성되어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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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공원 안에 없어진 남정마을 망향비가 서 있었다. 디자인공원은 다양한 역사적 유적을 지니고 있고, 가족단위로 운동하거나 유아 숲체험을 할 수 있는 소중한 휴식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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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는 물금 제철유적, 신라시대 도로 등에 관한 안내판도 세워야 하겠다.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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