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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발전에 따라 인기 떨어지는 경운기 /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의 시대적 흐름에 대한 삶

기사입력 2020.05.12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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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삿갓 이시일시인

우리나라는 전통 농경사회였고 이러한 농사방식은 별 변화없이 지속되어 왔다. 특히 쌀을 주식으로 했던 우리민족은 쌀의 가치를 최고로 치며 시장경제의 기준으로 삼았다. 쌀 농사 짓는 과정은 전적으로 육체노동에 의존하였다. 농우라는 소의 힘을 빌려 일손을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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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인 1970년대 까지도 농경은 소와 사람 중심을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였다   지게로 짐을 운반하고 먼거리의 타지방과의 교류에서만 소가 끄는 수레를 소구루마라는 이름으로 이용했다. 구루마는 일제로부터 생겨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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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농촌의 농업이 실질적인 변화가 시작된 것은 1970년대 초반 새마을 사업으로 마을 안길과 농로가 넓혀지면서 손수레가 등장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 손수레의 이름은 리어카로 지금도 이 이름이 익숙하게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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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손수레 한대 값은 쌀 두어가마 정도로 비싸 마을의 부자집들만 가질수 있었다. 이로써 서너 번의 지게 짐을 리어카로 편하게 한꺼번에 운반이 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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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이전에 수동으로 돌려서 물을 퍼올리는 발동기가 있었지만 거의가 일본 제품이었다.

농촌의 농업발전은  새마을 사업으로 마을 안길을 넓히고, 이 기계로 마을의 쌀찧는 도정을 하였다. 

이보다 10년 전쯤 1960년대 중반에 일본에서 수입한 경운기를 보았다. 이 시기에 이 기계는 한두번 구경할 정도이지 농사는 여전히 소와 더불어 하는 농사였다.

농업의 기계화는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70년대 중반 일제인 수입 경운기가 한 지역에 한 두대 들어왔다. 이것을 이용하여 논갈이, 흙부수기 즉 로타리작업을 쉽게 할 수 있었다.

이당시 경운기는 농촌의 농사 일에 사용되는 획기적인 도구였다. 그때 기계라면 문외한인 대분분의 농민들은 기계를 다루는 것에 겁을 냈다. 이방면에 호기심이 있고, 재력있는 집만이 장만했다. 

비유한다면 지금의 1톤 화물차보다 몇배 더 고가의 귀한 존재였다. 짐을 실으면 열배도 더 싣고, 빠르기는 자동차보다 약간 느린 정도였다. 초창기 경운기는 농사일 외의 시기엔 동네 주민들이 장보러 가는 장짐을 싣거나 운반해주었다. 그 비용을 받아 기름값이며 부품값에 충당하였다. 또한 자기의 일당도 챙기는 일종의 농촌운수업을 겸했다.

이렇게 경운기가 농사에 유용하게 쓰이기 시작하는 시기에 경운기를 구입했다. 1977년 겨울에 장가를 갔다. 평소 경운기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나도 저걸 가지면 뭐던 할것 같은 생각을 했다. 중매로 만난 새색시와 의논을 하였다. 

어짜피 우린 시골에 살것인데 반지 시계 등 결혼 패물을 장만해야 별 쓸데가 없을 것 같았다. 그 돈을 모아 경운기를 한대 사자고 했다. 우리는 그렇게 하기로 의견 일치를 보고 아무에게도 말을 안했다. 

당시 경운기는 현찰 50만 원 정도이고, 그중 50%인 30만 원만 내면 기계를 가져오고 5년을 분할해서 값으면 된다고 했다. 그 25만원은 우리집과 처가집에서 우리들 시집 장가가는데 쓰일 패물이며 옷값이었다. 

결혼식 이튿날은 처가집에서 인사를 하고 동상제를 하며 쉬는 날이다. 처가의 손위 집안 처남에게 새경운기를 몰고오게 하였다. 하룻밤을 지나고 신랑 집에서 잔칫하는 날이다. 새 신부를 데리고 집에 갔다. 

처갓집에서 마련한 이불이며 준비된 혼수품을 경운기에 실었다. 그리고는 먼저출발 시켰다.
 
신랑신부 상객(집안 어른)은 자가용 택시를 빌려타고 점심때쯤 맞춰 들어갔다. 

신랑각시가 먼저 도착하고, 이내 낯선 새 경운기에 혼수짐을 실은채 들어갔다. 잔치를 보러온 화제 동네의 축하객과 집안 어른들이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아버지, 엄마, 고모, 이모 등 놀라지 않은 사람들이 없었다. 심지어 중매를 한 고모도 놀랐다.
그런 사연을 알게 된 모든 사람들은 신혼부부의 기발한 생각에 한번 더 놀라고, 이 소문은 화제 동네방네 다 펴졌다.

사실 나는 약골이었다. 또래보다 힘이 약하고 체격도 왜소하였다. 늘 집안 식구들은 하는 일이 다부지지 못하다고 한마디씩 했다. 그후 이젠 경운기의 힘을 빌리니 못할 게 없었다. 

물금장날은 화제리 벌등의 채소짐을 실어다 주고 운임비를 받았다. 돌아올 때는 종형의 정미소 경유 두 드럼을 싣고오면 한 드럼당 5천 원을 받았다. 쌀장사 차에도 실어 올 수 있지만 같은 값이면 내사촌 동생을 생각하기 때문에 일거리를 주었다.

양산장날은 더 일찍 집에서 나가고, 구포장날은 어둠이 한창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나갔다. 벌등에서 짐을 싣고 구포까지의 옛날 비포장길을 가야 하고, 아침 아홉시 이전에 도착해야 하므로 아침부터 서둘렀다. 화제리에서 첫 버스 타고온 장짐 임자와 만나 짐을 내려 놓고는 아침인 꿀맛같은 국수 한그릇을 비웠다. 

먼길을 왔으니 돌어갈 때 빈 차로 갈 수 없다.  약간의 짐이라도 실어야 운전하기 편하다. 빈 경운기일 경우 스프링(쿠션)이 없어 돌길에 마구 덜컹거리고, 쇠받이 안장이어서 엉덩이가 아팠다  짐을 실어서 약간의 운임비도 받았다. 매번 거의 빈 채로 오지는 않지만 실은 짐들은 그 마을까지 가져다 주었다. 이렇게 하는 날은 거의 밤 아홉시쯤 되어야 일이 끝났다.

사실 농촌에 살면서도 섬세한 노동 일을 하지 못했다 위로 형과 아버지가 있으니 농사철이면 못단이나 져다 나르고 뒷일만 했지 직접 물논에 소를 부리며 힘들게 논갈이는 하지않아도 되었다. 경운기가 생기면서 완전히 전도 되었다. 논갈이며 로타리 써레질은 내가 다 했다. 

틈나는 대로 때론 내 일을 놔둔 채로 남의 집 논 일을 해주었다. 한마지기당 얼마의 품을 받을 수 있고, 또 농사일은 시기가 있고 이 일도 늘 있는게 아니니 집안에서도 그렇게 하기를 바랬다. 
 
경운기가 생기고 나서 소작농으로 1만평의 농사를 지었다. 겁도 없이 이걸 맡아 봄철에 쟁기질로 논을 갈어엎고 모심기 할땐 로타리로 모심을 논을 다루고 다 심은 후엔 경운기에 양수기를 달아 물을 퍼넣었다.

김매고 두렁베고 새 신랑각시는 밤늦게 나란히 경운기를 타고 유행가를 불렀다. 시끄러운 경운기 소리를 듣고, 매캐한 경운기 매연을 맡으면서 귀가했다.  집에 오면 대강 씻고 식사 후 잠자리에 들었다. 

자고 일어나면 또 새로운 일을 할 힘이 생겼다. 또한 보리타작이나 가을의 나락 타작도 경쟁적으로 온 들판과 산전의 계단 논을 누비고 다미며 했다. 타작을 하고 품삮으로 한섬에 몇 말을 받았다. 보리타작을 하루 해주면 평균 하루에 서너 가마를 벌고, 나락은 두가마 정도 벌이를 하였다. 이 시대 이만한 하루 벌이는 경운기를 가진자 만이 할 수 있었다. 

1980년대 부터는 경운기의 전성기 시대였고 누구나 경운기를 사면 경운기의 작업기에 따라오는 것 외에 보리타작과 나락타작의 탈곡기는 거금을 들여서라도 사들일 필수품이었다. 
 
탈곡기 2,3m 뒤에 머리 엔진을 두고 긴 평밸트를 연결하고 서로의 긴장감있게 긴 잔대로 버티어 주고는 엔진을 시동하고 벨트를 결면 탈곡기는 회전하였다. 이 모습이 당시의 타작 그림이며 타작된 곡식 가마는 그 집까지 운반하고 주인이 정해주는곳에 차곡차곡 쌓아 주어야 그 집 일을 마치게 된다. 

그런 후 다음 차례 타작마당을 갔다. 이때는 보통 밤 9,10시가 보통이고 보리타작은 내일의 날씨 따라 밤을 세우기도 하였다 .

1990년대는 트랙터와 경운기의 공용시대가 되었다. 2000년대 부터는 모든 농작업이 기계화 시대로 변했다. 지금은 농사의 거의 모두는 자동화가 이뤄진 시대다.

이렇게 경운기 한대의 다목적 기계는 지금은 뒷방센님 신세가 되어 있다. 웬만한 중농의 농가에서 두대 이상의 경운기에 각기 역활이 정해져 있다 한 대는 트레일러를 달고있는 짐운반 전용으로 한 대는 로타리가 쳐워진 채 작은 밭의 경운용으로 구석진 곳에서 허름하고 낡은 갑바를 덥어쓰고 있다. 
 
정작 넓은 큰 농장의 일들은 트렉터가 네 발로 기어다니면서 다 한다. 요즘농촌의 가정마다 승묭차와 화물차도 같이 자리잡고 있는시대다.
 
영남삿갓 이시일 시인 프로필

• 원동면 화제리 출신
• 전 원동면 농촌지도자 회장
• 한맥문학 등단 2000년 6월
• 전 삽량문학 회장
• 대한불교 법사회 이사
• 경남방언연구회 회원
• 종합문예 유성 시부문 등단 2020년 4월
• 시집 '체험과 공간' 6집 자비 출간
• 회록 디딤돌 일곱마당 2019년 1월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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