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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진휼정책과 코로나 19 민생안정 대책의 비교/심상도박사 화요 칼럼

기사입력 2020.04.28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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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1. 흉년에 양산 백성을 구제한 양유하 공과 이만도 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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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거가선대부양공유하이혜불망비(京居嘉善大夫梁公有夏貽惠不忘碑)는 양산과 부산 금정구의 경계 지역인 지경고개 근처에 있다. 지난 2월 23일 양산숲길보전회에서는 금정산 숲속둘레길 답사를 하면서 이 비석 근처에서 출발하였다. 지경고개는 양산시 동면 사송리와 부산광역시 금정구 노포동 사이에 위치한 고개이다. 금정산과 계명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동쪽에 위치하며 고개를 따라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간다. '지경'은 땅의 경계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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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영남대로의 고개로 사배고개라고 불렀다가 1961년 고시로 지경고개로 지명이 변경되었다. 옛날 이곳에서 쇠가 났고 서낭당이 있었다고 하였다. 사배 지명은 '새벽'의 이두식 표기이며 양산의 동쪽에 위치하여 일찍 새벽이 온다는 뜻이라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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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지지』(양산)에 "사배야현(沙背也峴)은 남쪽 40리에 있으며 동래(東萊)로 가는 길이다."라고 하였다. 『해동여지도』(밀양 양산)에 사배현(沙背峴), 『해동지도』(양산)에 사배치(沙背峙)로 기재되어 있는 것을 비롯해 조선 후기 고지도에 동래와 양산의 경계부에 고개가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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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석은 원래 부산과 양산의 경계인 지경고개에 세웠는데 도로 확장 시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비석의 앞과 뒤가 뒤바뀌어 세워졌다고 한다. 주영택 가마골 향토역사연구원장에 의하면 ‘비석 뒷면에 나오는 ‘東萊 梁山 幷立(동래 양산 병립)’을 ‘함께 세웠다’가 아닌 ‘경계’로 잘못 해석해서 단순 표지석으로 오해하면서 빚어진 해프닝’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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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울에 사는 가선대부 양유하의 은혜를 잊지 못해 세운 비로서, 이어진 기근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서 이미 제사를 지내고, 사람들이 굶주림에 양공이 많은 재산을 내어 구휼하니 누가 사적으로 할 수 있겠는가? 양공은 이때 의를 일으켜 곡식을 날라서 굶주림을 건지고, 재산을 나누어주어 은혜를 베풀고, 승려들을 모아서 뼈를 묻어주고, 제사를 지내서 혼을 위로해 주니 영혼도 감격하여 오랫동안 떠나지 않으니 아름다운 이름을 돌에 새겨 후세 사람들에게 보여주노라. 옹정 13년에 세웠다)’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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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 7년(1731년)에서 9년(1733년)까지 3년간 전국적으로 대가뭄이 들었는데, 동래와 양산 지역도 흉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관가에서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이 예로부터 전해지고 있다. 이때 서울에 사는 양유하가 자신의 재산으로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였고, 승려를 모아 죽은 시신을 묻어주고 혼백을 불러 제사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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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도 양산군수(1842~1910)는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하계마을에서 아버지 복제(復齊) 이휘준(李彙濬)과 어머니 야성(冶城) 송씨(宋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양산군수로서 재임시 세금 징수를 너그럽게 하고 물난리를 만나 곤경에 처했던 백성을 도와 칭송이 자자했다. 이 공으로 한양으로 상경한 그는 홍문관 수찬에 이어 1882년 통정대부 및 공조참의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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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退溪) 이황의 11대손으로 25세에 과거시험에 장원 급제하였다. 이만도는 과거에 급제한 후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병조좌랑, 사간원 정원, 홍문관 부수찬, 홍문관 부교리, 사헌부 장령 및 지평, 병조정랑, 사간원 집의 등을 거쳤다. 1895년 8월 을미사변이 발발하자 예안에서 이중린(李中麟), 이인화(李仁和)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910년 9월 4일, 이만도는 서파(西坡) 류필영(柳必永)과 권재훈(權載勳)으로부터 한일병합이 발표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증조부 묘소에 나아가 통곡하다가 이윽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했다. 10월 10일 단식 24일 만에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이만도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2. 조선왕조실록 영조 9년에 기록된 재난

 

임금이 사직단에서 1월 9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인 기곡제(祈糓祭)를 친히 행하였다. 이보다 앞서 여러 신하들이 임금의 건강이 좋지 않고 봄추위도 아직 매섭다는 이유로 기곡제를 친히 행한다는 명을 중지할 것을 청하면서 경연(經筵)에서 아뢰었으나, 임금이 끝내 윤허하지 않고 이때에 와서 재계·목욕하고 친히 제사를 행하였다.

 

1월 10일 도성의 쌀값이 등귀하고 품귀 현상이 일어나자 금주령을 거듭 내렸다. 비국 당상(備局堂上) 김동필(金東弼)이 ‘곡식을 소비시키는 것으로 술보다 더 심한 것이 없으니, 엄중하게 금지할 것’을 청하자, 임금이 그대로 따른 것이다.

 

1월 13일 좌의정 서명균이 백성이 굶주린다고 함부로 군량과 공납미를 중지시킨 충청 감사 이형좌의 죄를 논하였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했다. 좌의정 서명균(徐命均)이 말하기를, "충청 감사 이형좌(李衡佐)는 흉년이 거듭 들어 백성이 굶주린다는 이유로 조정에 품하지도 않고 군향(軍餉)과 안흥(安興)의 공진미(貢津米)를 마음대로 중지시켰으니, 마땅히 추고(推考)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월 13일 영남의 감진 어사(監賑御使) 이종백(李宗白)이 도신(道臣)과 연명(聯名)으로 아뢰기를, "바다 연안 지역 아홉 고을이 재해(災害)를 더욱 많이 입었으니, 청컨대 조정의 명령으로 대동미(大同米)를 매결(每結)마다 두 말씩, 그리고 기병(騎兵), 보병(步兵)의 군포(軍布)를 3분의 1을 감하게 해 주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1월 25일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고, 흉년이 들었다 하여 여러 도(道)의 봄철의 조련(操鍊)을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군사훈련을 중지하여 백성들의 피해를 줄이고자 하였다.

 

1월 27일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상소하여, 명지도(鳴止島)의 소금을 구워 흉년을 구제하는 잇점을 말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지금 전국에 흉년이 거듭 들어 많은 백성들이 거의 죽게 되었는데, 저축은 이미 바닥나 구제하여 살릴 대책이 없습니다. 올해는 사람이 서로 잡아 먹는 지경인데, 다시 한 해 거듭 흉년이 든다면 백성이 하난들 남아나겠습니까? 온 나라 안에 많은 사람이 다 굶주리고 있으니, 부황이 들어 다 죽게 되면 하수(河水)가 터진 다음에 물고기가 썩는 것과 같을 것이니, 어떻게 수습할 수가 있겠습니까?

 

6월 9일 여러 도에서 전염병인 여역(癘疫)을 상문(上聞)하였는데, 영남은 바야흐로 앓는 자가 1천 9백 15명, 이미 나은 자가 2백 70명, 죽은 자가 3백 25명이요, 호서는 처음 앓는 자가 1천 50명, 사망한 자가 3백 78명이라고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영남 다섯 고을에 이미 나은 자가 없고, 안동(安東)은 사망자가 자그만치 백여 명이나 된다. 수령이 된 자가 만약 동포(同胞)의 뜻과 유곤(庾袞)의 일을 생각했다면 어찌 진(秦)나라 사람이 월(越)나라 사람 보듯 했겠는가? 여러 도에 신칙하라. 

 

또 활인서(活人署)는 한갓 그 이름만 있으니, 묘당과 해서(該署)에 명하여 그 근만(勤慢)을 조사하여 전최(殿最)에 쓰라.“

11월 17일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가 안흥(安興)을 살펴보고 돌아왔다. 임금이 호서(湖西)의 민간의 일에 대해 물으니, 박문수가 말하기를, "금년에 큰 흉년이 들어서 열 집에 아홉 집은 양식이 떨어졌습니다. 신이 호서에 장곡(庄穀)이 있기 때문에 1백 곡(斛)의 곡식을 출연(出捐)하여 공주(公州)에 주어 진자(賑資)를 돕도록 해서 호서 사대부들의 창도(倡導)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조정에서 지휘한 바는 아닙니다." 하였다.

 

3. 조선 영조 임금과 현 정부의 재난 지원책

 

2월 13일 이때 대궐 문을 지키는 군사들 중에 굶어 죽는 자가 많았다. 병조 참지(兵曹參知) 조명교(曺命敎)가 상소하여, 진휼청(賑恤廳)에서 인구를 계산하여 쌀과 장을 보내 주고, 본조(本曹)에서는 그 형편을 살펴서 제때 공급하도록 하자고 청하니, 임금이 진휼청으로 하여금 보살펴 주게 하였다.

 

2월 16일 임금이 미역 6백 동(同)과 장(醬) 20통(桶)을 두 진휼소(賑恤所)에 보내어 진휼소의 죽(粥)에 보태게 하였다. 또 어공미(御供米)에서 감한 것을 보리가 익을 때까지 수량을 계산해서 두 진휼소에 나누어 주어 간혹 밥을 해 주게 하고, 또 쌀 5섬과 장 5통을 병조에 하사(下賜)하여 문을 지키는 기병(騎兵)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7월 11일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삼남(三南)의 농사 상황이 이미 큰 흉년으로 결판이 났습니다. 흉년을 대비하는 대책은 다만 곡식을 무역하는 길이 있을 뿐인데, 경사(京司)의 전목(錢木)이 또한 텅 비어 저축된 것이 없습니다. 지부(地部)와 선혜청(宣惠廳)에 비축되어 있는 것으로 먼저 공가(貢價)를 지급하여 공인(貢人)의 다급한 것을 해소시켜 주고, 삼남 공곡(公穀)으로 상납할 것들을 우선 받아서 본도(本道)에 받아둘 것을 허락하여 천천히 조치를 의논하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8월 2일 우의정 조문명(趙文命)이 말하기를, "금년의 수재(水災)와 한재(旱災)는 삼남(三南)이 가장 혹독한데, 여러 도(道)도 또한 그러합니다. 진휼을 의논하는 정사를 진실로 마땅히 미리 강구해야 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마른 곡식을 무상 지급하는 법이 생겨나면서부터 지방의 간민(奸民)이 간혹 기민(饑民) 속에 함부로 끼어 들어온 경우가 있어 허실을 매양 서로 속이는 일이 있을까 염려스럽습니다. 다만 기민을 선별하기를 정밀하게 하여 죽(粥)을 쑤어서 먹이는 것이 실질적인 효과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10월 1일 이때 주전(鑄錢)의 의논이 이미 결정되었다. 임금이 호조와 진휼청(賑恤廳)에 명해서 주전소(鑄錢所)를 나누어 설치하여, 간위(奸僞), 문란(紊亂)의 폐단을 막게 하였다.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평시서(平市署)를 설치한 것은 바로 물가를 조절하고 경중을 알맞게 하기 위한 것인데, 주전(鑄錢)의 명령이 내려지고부터 쌀을 저축해 이익을 꾀하는 자들이 시기를 타서 낮추었다 높혔다 하려고 하여, 돈은 천하고 쌀은 귀함을 핑계삼아 조등(刁蹬)이 절제가 없으니, 조금 재정(裁定)을 가한 후에야 백성이 폐해를 입지 않을 것입니다.


코로나 19 사태로 정부에서는 민생안정 대책으로 긴급재난지원금을 준비하고 있는데, 여야간 의견 차이로 논란이 있었다. 조선 영조 때 자연재해, 전염병으로 백성들이 피해를 입을 때 조정에서 적극적인 대책을 시행하였다. 

 

동전을 대량 발행하면서 쌀값이 오르는 문제가 있었는데, 현재도 유사한 문제점이 있다. 비상시국이니만큼 현 정부에서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민, 기업, 자영업자, 실직자들을 대상으로 과감한 지원을 해야 하겠다. 조선시대는 경제적으로 궁핍했지만 현재는 세계 11대 경제 강국이므로 다양한 정책을 개발해야만 한다. 양산시도 독자적인 재난지원금을 마련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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