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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적산 봉수대와 부산, 언양을 연결하는 봉수대/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

기사입력 2020.03.31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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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학 박사 심 상 도

 

1. 원적산 봉수대 올라가는 임도변 산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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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시 상북면에 있는 원적산 봉수대는 벚꽃이 피는 요즘이 가장 아름답다. 필자는 3월 30일 봉수대 벚꽃을 사진 찍기 위해 석계일반산업단지 내부 도로를 통해 봉수대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접근로는 두 군데로 다른 한 곳은 기존의 ‘상북문화의 집’ 앞으로 난 도로를 통해 올라갈 수 있다. 석계일반산업단지를 지나 봉수대로 올라가는 임도는 벚나무를 한쪽으로 심어놓았는데, 많이 자라서 벚꽃이 매우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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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가면서 중간에 차를 잠깐 세우고 벚꽃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한 곳에 우연히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으려고 보니 나무가 불탄 흔적이 있었다. 얼마 전 뉴스에서 원적산 봉수대에 산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혹시 봉수대 근처에 불이 난 것이 아닌가 해서 놀란 적이 있었다. 다행하게도 올라가는 임도 중간 정도 왼쪽에서 불이 났지만 진화가 빨리 되어 피해 면적이 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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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백나무 10여 그루 밑동이 불에 그을린 흔적이 있었다. 임도변 벚나무 쪽으로는 더이상 번지지 않아서 피해는 없었다. 나중에 원적산 봉수대로 올라가 산불감시 초소에 근무하는 산불감시원 김철수 씨를 만나서 산불에 관한 자초지종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김철수 씨는 산불 감시반장을 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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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5일 저녁에 상북면 석계리 산20-5번지 일원에 산불이 발생해 양산시 산불진화차 4대, 진화인력 80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김철수 반장은 산불감시 근무를 끝내고 퇴근 후 집에서 쉬고 있었다고 한다. 지인이 갑자기 전화를 하여 산불이 났다고 알려주었다고 한다. 양산시에서 연락이 와서 급하게 산불 현장으로 출동하여 산불을 껐다고 한다. 저녁 9시 20분경에 산불을 완전히 껐는데, 바람이 불지 않아서 확산이 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고 한다. 경남도 산불방지대책본부의 추정에 의하면 약 0.05ha의 산림이 소실된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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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철에는 건조한 날씨와 강풍으로 산불 위험성이 높으므로 밭두렁 태우기는 하지 말아야 하고, 쓰레기 소각도 금해야만 한다. 김철수 반장에게 전에 근무하던 산불감시원 안부를 물어보니 일을 그만두었다고 하였다. 필자는 원적산 봉수대에 갈 때마다 그분하고 대화를 많이 나누었는데, 연로하고 가정형편도 좋지 않아서 걱정되어 물어보았다.

 

2. 조선시대 봉수제도

 

봉수는 높은 산의 봉수대에서 불을 피워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시대의 통신 제도이다. 봉수제는 기록상으로 고려 중기(12, 3세기)에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었다. 김수로왕이 다스리던 가락국에서 AD48년(수로왕 7년) 7월 27일에 허 왕후가 타고 오는 배를 보고 횃불을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체계적으로 정비된 때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해진 고려 말 이후부터 조선 초기에 들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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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는 횃불을 뜻하는 봉(烽)과 연기를 뜻하는 수(燧)를 말하는데, 대략 수십 리의 간격으로 바라보고 살피기 좋은 산꼭대기 요지에 봉수대를 설치하여, 밤에는 횃불을 올리고 낮에는 연기를 피워 중앙 또는 변경 기지에 급보를 알리던 통신방법이다. 봉화를 올릴 때 땔감이나 섶 속에 소똥이나 말똥을 넣어서 태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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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경우 신호 방법으로 홰의 수를 평시에는 한 개, 적이 나타나면 두 개,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세 개, 적이 국경을 침범하면 네 개, 적과 아군이 싸우기 시작하면 다섯 개를 올렸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홰의 수를 4개로 하였다. 자연조건 때문에 비가 와서 불이나 연기를 피울 수 없거나 바람이 불어 연기나 불이 잘 보이지 않을 때에는 봉수군이 다음 봉수대로 빨리 달려가 그 소식을 직접 전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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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대의 종류로는 경봉수(京烽燧), 연변봉수(沿邊烽燧), 내지봉수(內地烽燧)의 세 가지가 있는데, 경봉수는 서울의 목멱산(남산)에 설치된 것으로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되는 중앙 봉수를 말하는 것으로 다섯 개의 화덕이 있었다고 한다. 연변봉수는 국경선이나 바닷가 근처에 설치한 봉수로 최일선에 배치된 봉수를 말하며, 내지봉수는 경봉수와 연변봉수를 연결하는 중간봉수로 직선봉수(직봉)와 간선봉수(간봉)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전국의 봉수 노선은 다섯 갈래의 직선봉수(직봉)를 중심으로 연결되었다. 직봉 사이에는 중간의 신호불통을 우려하여 직봉으로 전달되는 작은 갈래의 간선봉수(간봉)라는 보조노선이 있었다. 간봉은 봉수대 사이의 중간지역을 연결하거나 국경 초소로부터 각 마을에 소식을 전하는 역할을 하였다. 봉수는 조선 600년간 국가적 기간 통신망 역할을 했다. 해안과 국경의 안위를 횃불과 연기로 특정한 신호 전달 체계에 의해 병조와 승정원에 알렸고, 최종적으로는 왕에게 보고되었다.

 

조선시대 전국의 봉수 노선은 제1로 : 함경도 경흥→ 강원도→ 경기도→ 중랑구 아차산 → 남산봉수, 제2로 : 부산 다대포→ 경상도→ 충청도→ 경기도→ 성남 천림산 → 남산봉수, 제3로 : 평안도 강계→ 황해도→ 경기도→ 서대문 무악동봉수 → 남산봉수, 제4로 : 평안도 의주→ 황해도→ 경기도→ 서대문 무악서봉수 → 남산봉수, 제5로 : 전라도 순천→ 충청도→ 경기도→ 양천구 개화산 → 남산봉수 등 5개의 노선이 있었다.

 

함경북도 종성에서 서울까지 500km를 5-6시간 걸려 도달하였다고 하므로 시간당 100km를 전달한 셈으로 그 당시의 어느 통신 수단보다 신속한 전달 수단이라 할 수 있다. 봉수는 옛 통신수단 중에서 가장 빨리 모든 사람들에게 어디서나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도록 하여 똑같은 소식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봉수대에서는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불이나 연기를 피워서 나라의 사정을 알렸다.

 

봉수제도는 변방에서 발생한 나라의 위급 상황을 중앙에 알리기 위한 장거리통신 중계방식이다. 오늘날 현대적 마이크로웨이브 무선통신 중계소의 위치는 옛 봉수대가 있던 장소에 위치하고 있어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부산 황령산 봉수대에는 MBC 중계탑이 있다. 또한 부산의 계명봉 봉수대와 양산의 원적산 봉수대, 언양의 부로산 봉수대는 경부고속도로 노선과 거의 일치하며 부로산에는 방송국 송신탑이 있다.

 

3. 부산과 양산, 언양을 연결한 원적산 봉수대

 

1468년(예종 1)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는 계명산 봉수와 양산 위천 봉수(원적산 봉수), 울주군 언양의 부로산(夫老山) 봉수에 대해 다루고 있으나, 1425년(세종 7) 편찬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에는 이 봉수들에 대한 언급이 없다. 즉 세종 초기에 정비된 조선 시대 부산 지역의 봉수는 전국 5개의 직봉(直烽) 봉수 노선 가운데 제2경로 봉수 노선으로서 석성 봉수~황령산 봉수~간비오산 봉수를 거쳐 기장 남산 봉수로 이어져 수도인 한성 목멱산 봉수로 연결되었다.

 

1425년에서 1468년 사이에 계명산 봉수 등 3곳의 봉수가 추가되어 황령산 봉수~계명산 봉수~양산 원적산 봉수로 연결되었다. 조선 전기 부산 지역의 봉수 체제가 해안을 따라 연결되는 연변 봉수(沿邊烽燧)인 점과 1530년(중종 25)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계명산 봉수 등이 보이지 않은 점에서 계명산 봉수는 일시적으로 폐지된 것으로 추정된다.

 

노포동산성은 계명산 계명봉에서 동남쪽 50m 아래 뻗어 내려 온 능선이 계명암에서 오는 길과 만나는 곳인 해발 200~250m 지점으로 계명산 봉수의 아래에 위치한다. 노포동산성은 2007년 한국고속철도건설공단이 경부고속철도 공사 구간 중 부산 경남권의 문화유적 발굴 예비 조사를 실시하는 과정에서 유적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산성으로 알려졌으나 계명산 봉수대를 방호하기 위한 시설로 보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둘레 약 50m 규모의 평면 타원형의 토석 혼축으로 된 담장이다. 담장은 노포소류지 위쪽 동문지 주변에서 5~6단의 석축이 확인되며, 대부분 붕괴되어 흔적만을 알 수 있을 정도이다. 담장 안에서는 조선 시대로 편년되는 기와편과 자기편이 수습되었다. 둘레 약 50m 규모의 평면 타원형의 토석 혼축으로 된 담장이다.

 

원적산 봉수대는 1992년 10월 21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위천봉수(渭川烽燧)로 이름이 바뀌었다. 원적산 정상부에서 서쪽으로 뻗어내리는 표고 325m의 낮은 구릉에 있으며 면적은 1,600㎡이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양산군읍지』에는 원적산 봉수대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고, 위천(渭川) 봉수가 나타난다.

 

위천봉수는 남쪽으로 동래 계명산 봉수, 북쪽으로 언양 부로산 봉수와 연락한다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원적산 봉수에 관한 설명과 일치한다. 따라서 위천봉수가 곧 원적산 봉수라고 추정된다.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 보면, 위천산(渭川山) 봉수는 양산군 북쪽 21리에 있다고 하여 현재 상황과 유사하다.

 

원적산 봉수대는 조선시대 남동해안의 봉수제도와 봉수대의 실태를 알 수 있는 좋은 역사유적이며, 호국문화유산이다. 1997년에 복원하여 깔끔하게 정비하였으며, 조경도 잘 되어있고, 봉수대 바로 앞에는 회양목으로 울타리를 조성하였다. 봉수대 주변은 벚나무를 심었는데, 요즘 활짝 피어 매우 아름답다. 전망대 데크도 조성하여 상북면 소재지, 경부고속도로, 내석마을, 통도사 앞 신평, 양산천 주변 등이 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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