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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두연대와 최흥국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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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두연대와 최흥국 선생

두연대지(斗淵臺址)는 임진왜란 당시 전공을 세운 최흥국 선생이 자신이 거처하는 집 곁에 지은 정자터다. 남계 최흥국은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양산으로 귀향하여 한강 정구의 문하에 들어가 제자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망우당 곽재우 등과 함께 화왕성 전투 등에 참전하여 전략을 세우고 진두지휘하여 전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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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학 박사 심 상 도

 

1. 두연대를 건립하고 후진 양성에 힘쓴 최흥국 선생

 

두연대지(斗淵臺址)는 임진왜란 당시 전공을 세운 최흥국 선생이 자신이 거처하는 집 곁에 지은 정자터다. 남계 최흥국은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양산으로 귀향하여 한강 정구의 문하에 들어가 제자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망우당 곽재우 등과 함께 화왕성 전투 등에 참전하여 전략을 세우고 진두지휘하여 전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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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끝나자 최흥국은 공신 책봉을 사양하고 현재의 양산시 어곡동 지역으로 와 자신이 거처하는 집 곁에 두연대라는 정자를 짓고, 양산의 사호(四豪)라 일컫는 안근(安瑾), 이수생(李秀生), 이몽란(李夢鸞) 등과 함께 후학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두연대와 관련하여 일야당(一也堂) 안효필(安孝弼)의 시가 전하고 있다. 현재 두연대는 터만 남아 있으며, 1997년 어곡리 4차선 도로 확장공사에 의해 옮겨진 두연대유허비가 유산천 개울가 동편에 자리하고 있다. 두연대는 2002년 5월 10일 조성된 어곡주민공원에 있다. 공원에는 야외무대, 체육시설, 화장실, 실내 게이트볼장, 산책로, 어실교 등이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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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협 어곡동지점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조금 걸어가면 두연대 유허비를 만날 수 있다. 1077번 지방도로에서 유산천 위에 설치된 도보 전용 어실교를 건너서 갈 수도 있다. 양산천 자전거도로를 따라서 유산천으로 진입하면 산책로와 자전거도로가 있다. 어곡공단 방향으로 계속 올라오면 어곡주민공원 안에 있는 두연대유허비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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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흥국은 자가 강후(康侯)고 호는 남계(南溪)로 1550년(명종 5) 4월 6일, 양산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경주로 고운 최치원 선생의 후손이다. 1588년(선조 21) 33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합격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경주, 화왕산, 팔공산 등지에서 대구의 손처약(孫處約). 손린(孫遴), 밀양의 손기양(孫起陽), 박수춘(朴壽春) 등과 의병활동에 참여했다. 이러한 의병활동을 연고로 그는 전후 대구부 창산동(昌山洞)에 피난하며 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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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계 최흥국은 대구 유림들과 갈등 없는 관계를 유지했으며 특히 손처눌을 중심으로 좌도와 우도를 잇는 문화적 교량역할을 하였다. 남계는 대구의 문인들과 폭넓은 교유를 하였고 17세기 대구 문화의 발전에 기여했다.

 

박세욱의 연구에 따르면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의 모당일기(慕堂日記)에 최흥국 선생과 관련된 활동 기록이 많이 나온다. 모당(慕堂)은 30년간 자신의 삶을 기록한 일기를 보면 25년 동안 강후(康侯) 최흥국(崔興國) 선생과 교유(交遊)했다. 모당일기는 17세기 대구지역 유학 중흥의 과정을 보여주는 가장 생생한 기록으로 평가된다. 모당의 일기를 통해 보면 최강후는 임진왜란 이후 모당이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1550-1615)과 더불어 대구지역의 유학을 재건하는 가장 중요한 시기를 함께하며 활발하게 교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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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당은 남계보다 세 살 아래지만 친구로서 약 13년 동안 자주 만나서 학문을 논하고 시를 짓고, 술을 마시고, 명승지와 사찰을 유람하며 우정을 돈독히 하였다. 모당의 기록에는 남계의 활동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지만 아쉽게도 남계의 문집이나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2. 최흥국 선생의 스승 한강 정구

 

최흥국 선생이 스승으로 모신 한강 정구는 조선시대의 저명한 유학자였다. 정구(鄭逑, 1543년~1620년)는 호가 한강(寒岡), 시호가 문목(文穆)이다. 5세에 이미 신동으로 불렸으며 10세에 『대학』과 『논어』의 대의를 이해하였다. 13세인 1555년 성주향교 교수인 오건(吳健)에게 역학을 배웠는데 건(乾), 곤(坤) 두 괘(卦)만 배우고 나머지 괘는 유추해 스스로 깨달았다고 한다. 1563년에 이황(李滉)을, 1566년에 조식(曺植)을 찾아 뵙고 스승으로 삼았으며, 그 무렵 성운(成運)을 찾아 뵙기도 하였다.

 

1563년 향시(鄕試)에 합격했으나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김우옹(金宇顒)이 추천해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는 등 여러 번 관직에 임명되어도 사양하다가 1580년 창녕현감, 1584년 동복현감을 거쳐, 이듬해 교정청낭청(校正廳郎廳)으로 『소학언해』·『사서언해』 등의 교정에 참여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통천군수(通川郡守)로 재직하면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다. 1593년 선조의 형인 하릉군(河陵君)의 시체를 찾아 장사를 지낸 공으로 당상관으로 승진한 뒤 우부승지, 장례원판결사, 강원도관찰사, 형조참판, 대사헌 등을 지냈다.

 

학문은 성리학과 예학뿐만 아니라 제자백가, 역사, 산수(算數), 병진(兵陳), 의약(醫藥), 복서(卜筮), 풍수지리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박학하였다. 문인으로는 서사원(徐思遠), 송원기(宋遠器), 손처눌(孫處訥), 한준겸(韓浚謙), 문위(文緯), 장흥효(張興孝), 이윤우(李潤雨), 허목(許穆), 황종해(黃宗海) 등이 있다.

 

최흥국 선생이 교유한 학자들은 한강 정구, 낙재 서사원, 여헌 장현광, 괴헌 곽재겸, 아헌 송원기, 문탄 손린, 오매정 손처약, 동고 서사선, 국담 박수춘, 귀정 류사온, 사월당 류시번, 쌍벽당 이원생 등이 있다. 곽재겸(郭再謙)은 의병장 곽재우의 사촌형으로 역시 임란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고, 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곽재겸은 벼슬을 사양하고 대구 해안(解顔, 현재 대구시 동구)에서 후학양성에 힘을 기울여 17세기 대구 유학 중흥에 일조하였다. 곽재겸은 대구지역 문인으로는 가장 일찍 최흥국과 교유하였다.

 

남계가 대구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인 양산으로 돌아간 것은 정구 선생이 봉산욕행을 했던 해인 1617년 1월이었다. 남계는 고향인 양산에 돌아가서도 정구 선생의 봉산욕행의 과정에서 교유의 흔적을 남겼고 대구와의 교류를 끊지 않고 봄가을의 중요한 행사에 참여하며 좌도와 우도의 교량역할을 하였다.

 

사월당선생문집(沙月堂先生文集) 연보(年譜)에 따르면 1617년 7월 ”한강 선생을 모시고 온정(溫井)에 목욕하러 가다“란 조 아래 남계 최흥국 일기에 한강 선생이 온천으로 떠났는데 뒤따라오는 벗들이 있었다. 손처약, 정사상, 도여유, 허사중, 류시번, 이종노, 김응명, 이난귀, 정헌도, 이상진 약간의 사람들이다. 류연정은 당시 감기를 앓고 있었으나 아픈 몸을 부축하여 배알하러 왔다.

 

3. 최흥국 선생이 참전한 화왕성 전투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이 이끄는 화왕성 전투에 최흥국 선생이 참전하였다.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화왕산 일대에 '화왕산성'(火旺山城)이 있다.

 

이 성곽은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64호로 지정되었다. 명나라와 왜의 화의협상이 결렬됨에 따라 1597년 즉 정유년 정월에 왜적이 다시 조선을 침략하여 정유재란이 발발하였다. 왜군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이제는 의병장이 아니라 방어사가 된 곽재우 장군은 그해 7월 21일, 밀양, 영산, 창녕, 현풍의 네 고을 피난민과 병력을 거느리고 화왕산성으로 들어가는 청야(淸野) 전술을 펼쳤다.

 

가토 기요마사 군대는 울산을 점령한 뒤 창녕, 합천을 거쳐 전라도로 들어가 남해로 건너온 병력과 합세해 남원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의 창과 칼은 햇빛에 빛나고 깃발은 들을 덮었으며, 들을 채우고 이어지는 행렬이 눈길 닿는 데까지 끝이 없을 정도로 기세등등하게 곽재우가 농성하던 화왕산성 부근으로 들이닥쳤다.

 

왜장의 당면 목적은 한시바삐 전라도 남원으로 진격해 그곳을 함락하는 데 있었으므로 화왕산성을 무리하게 공격하지 않았다. 용맹하고 지략이 뛰어난 곽재우 장군이 지키던 화왕산성을 공략하며 시간을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곽재우 장군의 추격을 막기 위해 가토군은 하루 밤낮 동안만 화왕산성 일대에서 군사 시위를 감행하였다. 그러나 산성의 형세가 험난하고 조선군의 진영이 잘 갖추어진 모습을 보고는 공격을 하지 않고 떠났다. 계획대로 가토 군대는 순조롭게 진군해 8월 1일에 안음의 황석산성을 격파하고, 호남에 진출해 남원을 쳤다.

 

하영휘 박사는 화왕산성 전투가 성을 무사히 지켜내기는 했지만 적의 앞길을 막거나 타격을 가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무의미하지는 않지만, 크게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홍의장군으로 알려진 곽재우 장군 때문에 왜군은 공략할 엄두를 내지 못한 것이다. 덕분에 큰 전투 없이 화왕산성 안의 군사들과 피난 온 백성들도 무사하였다. 진주성 혈전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던 것을 생각하면 방어를 잘 한 것도 큰 공이라 할 수 있다.

  

최흥국 선생은 과거시험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하지 않고 임진왜란 때 구국의 일념으로 화왕성 전투에 참전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공신 책봉을 사양한 것은 후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역대 정부의 고위관료, 공공기관 간부, 정치인들의 자질이 떨어지고, 심지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뇌물을 받고 범죄를 저질러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나라를 구하려는 충정에서 목숨 걸고 싸우고 논공행상에 참여하지 않은 최흥국 선생은 진정한 애국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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