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8 (목)
1. 한민족과 친근한 호랑이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단군신화에 곰과 호랑이가 등장한다. 우리나라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고조선과 단군에 관한 기록은, 중국의 『위서(魏書)』를 인용한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편(紀異篇)>에 실린 자료가 있다.
옛날 환인의 아들 환웅이 세상에 내려와 인간 세상을 구하고자 하므로,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헤아려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 세상에 내려가 사람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의 신단수(神壇樹)에 내려와 신시라 이르니, 그가 곧 환웅천왕이다. 그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세상을 다스렸다.
이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 안에 살면서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은 이들에게 신령스러운 쑥 한 줌과 마늘 20쪽을 주면서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된다고 일렀다. 곰과 범은 이것을 먹고, 곰은 37일 만에 여자의 몸이 되고 범은 참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熊女)는 그와 혼인해주는 이가 없어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배게 해달라고 축원하였다. 이에 환웅이 잠시 변하여 혼인하여서 아이를 낳으니, 그가 곧 단군 왕검(王儉)이다.
우리나라는 국토의 3분의 2가 산으로 이뤄져 옛날부터 호랑이가 많이 살아 ‘호랑이의 나라’로 불릴 정도였다. 호랑이는 단군신화 뿐만 아니라 민화에 나오는 까치호랑이로 우리 민족에게 친숙한 한류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호랑이를 표현한 미술 작품도 많다. 1988년 서울올림픽의 마스코트는 호랑이를 형상화한 ‘호돌이’였다. 2018 평창 겨울올림픽의 마스코트는 백호(白虎)를 형상화 한 ‘수호랑’이었다.
전국 사찰의 산신각에서는 영물로 형상화 된 호랑이의 모습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산신각은 불교 토착화의 한 형태로, 민간신앙이었던 산신 사상과 불교가 습합되면서 나타난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문화다. 호랑이는 인간을 보호해 주는 수호적 존재이자 호환을 방지하기 위한 존재로 신격화 되면서 산신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원효대사가 중국에서 건너온 천여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내원사 입구에 도달했을 때 지금의 산령각이 있는 곳에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났다. 호랑이는 산신령을 의미한다. 원효대사 앞에 무릎을 꿇은 호랑이는 꼬리로 원적산을 가리켰다고 한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대사는 지금의 내원사로 갔고, 추운 겨울날 칡꽃 두 송이가 피어 있는 것을 보고 신기해하며 여기에 암자를 짓고 머무르게 되었다. 호랑이가 중간에서 가로막았다고 이곳을 중방이라 부르게 되었다.
2. 호랑이에 피해를 당한 백성들
호랑이의 균형 잡힌 거대한 몸집과 강렬한 눈빛, 포효하는 울음소리, 늠름한 기품 등은 조상들에게 있어 숭배의 대상이자 공포의 대상이었다. 호랑이로 인한 재앙, 호환을 두려워한 조상들은 오히려 호랑이에게 잡귀를 물리치는 영물이라는 지위를 부여하고 제를 지내기도 했다.
호식총(虎食塚)은 산간지역에서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고 난 뒤에 남긴 유구(遺軀)를 거두어 장사(葬事) 지낸 무덤으로 강원도 삼척시 등에 일부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팔자에 없으면 범에게 잡혀가도 먹히지 않는다든가 눈썹이 길면 호환을 당할 운명이라든가 하는 속신(俗信)도 있었다. 산길을 걷는 사람들 중에 앞뒤의 행렬 순서와 관계없이 호환(虎患)의 피해를 당하며, 방 안에서 자는 사람들을 습격해도 한가운데 있는 사람을 호랑이가 데려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호랑이에 의한 호환은 단순한 사고가 아닌 신령에 의한 운명적 사건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호환을 당한 사람의 영혼은 ‘창귀(倀鬼)’라는 귀신이 되어 죽어서도 호랑이의 부림을 받는 딱한 처지가 된다. 이 창귀는 다른 사람을 유인하여 호랑이에게 바쳐야만 창귀의 신세를 면하고 보통의 귀신이 될 수 있다고 전해져왔다. 창귀는 호랑이의 노예에서 벗어나기 위해 항상 희생자를 찾는데 가족과 인척들 순으로 찾아간다. 때문에 호환을 당한 집안과는 사돈의 팔촌하고도 혼사를 맺지 않는다. 이런 물귀신 행위를 ‘다리 놓기’나 ‘사다리’라 한다. 창귀는 이런 교대를 통해 호랑이에게서 벗어난다.
옛날 통도사 뒷산이 영축산, 신불산, 간월재 등에는 호랑이, 표범 등 맹수들이 많았다. 신불산에는 호랑이, 간월산에는 늑대, 배내봉에는 표범이 서식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먹이감으로 노렸다. 인적이 드문 간월재를 오르내리는 주민들, 장사꾼들은 호시탐탐 노리는 맹수 때문에 생명을 지키기 위해 일곱 사람 이상이 모여 산길을 걸어갔다. 모이는 장소는 간월마을 당수나무 아래로, 일제강점기에 제재소가 있었던 인근이었다.
3. 백운암 스님을 짝사랑한 마을 처녀와 호혈석
옛날 호랑이가 많을 때 통도사까지 내려와 사람을 물어가는 호환이 발생하여 문제가 되었다. 이에 얽힌 재미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통도사 부속암자인 백운암은 영축산 8부 능선에 위치하고 있다. 옛날 백운암에 젊고 잘생긴 스님이 수행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훌륭한 강백이 되기를 희망하던 이 스님은 불경 공부를 열심히 하며 수행에 몰두하고 있었다. 장차 통도사의 강백이 되어 스님들을 가르치고자 하는 꿈을 지니고 있었다.
날이 저물면 인적이 끊기는 백운암에서 인기척이 나며 여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의아하게 생각하며 문을 연 스님 앞에 나물 캐러 온 처녀가 나타났다. 통도사 근처 마을에 사는 처녀는 나물 캐러 나왔다가 그만 길을 잃고 헤매다가 백운암으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날은 저물고 호랑이가 출몰하는 밤길이 위험하므로 처녀는 하룻밤 묵어갈 것을 스님에게 요청하였다.
암자의 방이 하나뿐이라 스님 입장에서 매우 난처하였지만 단칸방의 아랫목을 그 처녀에게 내주고 윗목에 정좌한 채 밤새 경전을 읽었다. 스님의 불경을 읽는 낭랑한 목소리가 처녀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스님의 단아한 모습과 듣기 좋은 염불 소리에 반한 처녀는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처녀는 날이 밝자 백운암을 떠나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으나 마음속에 늠름한 스님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스님을 연모하는 마음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 병이 들어 몸은 여위어만 갔다. 처녀는 결국 상사병애 걸리게 되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처녀는 병에 좋다는 약을 다 썼으나 백약이 무효로서 부모의 걱정은 태산 같았다. 좋은 혼처도 마다하고 식음을 전폐하며 끙끙 앓는 딸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한 처녀의 어머니는 안타깝기만 했다.
어머니가 병석의 딸을 간호하며 딸과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병의 원인을 어렵사리 알아냈다. 나물 캐러 갔다가 백운암에서 만났던 젊은 스님을 잊지 못해 마음이 아프다고 하였다. 처녀의 부모는 자식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백운암의 스님을 찾아가 한 살림 차려 줄 것을 약속하며 혼인을 애원하였으나 젊은 스님의 수행 자세는 변함이 없었다.
그 후 처녀는 스님을 잊지 못하고 사모하는 한을 가슴에 품은 채 죽었다. 한이 맺힌 처녀는 영축산 호랑이가 되었다고 한다. 스님은 계속 흔들림 없이 공부하여 서원하던 통도사 강백이 되었다. 여러 학승들에게 경전을 가르치던 어느 날 강원에 갑자기 거센 바람이 일며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큰 호랑이가 전각 지붕을 넘나들며 포효하고 문을 할퀴며 위협을 했다.
호랑이의 행동을 지켜보던 대중들은 스님 중의 누군가와 무슨 사연이 있을 거라는 데 중지를 모았다. 각자 저고리를 벗어 밖으로 던져 그 연이 누구와 이어졌나를 알아보기로 하였다. 저고리를 벗어 하나씩 밖으로 던졌으나 호랑이는 본체만체하더니 강백 스님의 저고리에 반응을 보였다.
강백 스님은 주저없이 속세의 인연인가보다 하고 호랑이 앞으로 나갔다. 호랑이는 기다렸다는 듯 그 스님을 입으로 덥석 물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다음날 통도사의 모든 스님들은 강백 스님을 찾아 온 산을 헤맸다. 스님은 백운암 옆 산등성이에서 발견되었다. 죽은 강백 스님을 자세히 살펴보니 남성의 상징이 보이지 않았다.
그 후에도 통도사 스님들이 호환 피해를 계속 입게 되자 호랑이의 기를 누르기 위해 호혈석(虎血石), 또는 호석(虎石)을 경내 두 곳에 배치하였다. 마치 강백 스님의 피가 묻은 것처럼 붉게 보이는 바위는 응진전 바로 옆과 극락전 옆 북쪽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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