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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박사 화요 칼럼/임진왜란 공신 이구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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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칼럼

심상도 박사 화요 칼럼/임진왜란 공신 이구 선생

1. 의병으로 활동한 영천 이씨 이구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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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양산시 물금읍 가촌로 181에 임란공신 이구 선생을 모시는 세덕사가 있다. 영천 이씨 이구(李鳩) 선생은 고려 말 절의자 남곡(南谷) 이석지(李釋之)의 후손이다. 남곡공파(南谷公派)의 지파인 서파공파(西坡公派)의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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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의 본관은 영천, 시조인 고려 평장사 이문한 공의 후손으로 중시조인 고려시대 영양군(永陽君) 문정(文貞) 대영(大榮) 공의 14세손이다. 문헌상으로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이구 선생의 공적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선조 임금 초반 1570년대에 출생하여 인조 후반 1640년대에 타계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묘소 안내판에 나와 있다.

 

이구 선생은 임진왜란 때 양산에서 이수생(李秀生), 최흥국(崔興國) 등과 창의하여 의병 활동을 하다가, 왜적의 포로가 되어 송담(松潭) 백수회(白受繪, 1574~1642) 선생과 함께 일본으로 피랍되었다. 3년간의 포로 생활 동안 끝내 적에게 굴복하지 않아 왜적이 그 절의에 감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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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는 피랍된 지 3년 뒤 귀국하여 정유재란 때 경상남도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그 공로와 절의로 인해 선무원종공신 3등 훈련원 판관에 녹훈되는 한편, 포로 생활을 같이 한 백수회의 매제가 되었다. 

 

1603년(선조 36) 무과에 등재하여 벼슬이 훈련원정(訓鍊院 正)에 이르렀다. 이구 선생은 2012년 9월 양산시 교동 춘추공원내 충렬사에 송담 백수회 선생 등 임란공신 28위와 함께 위패가 봉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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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산군수 조영규가 송상현 동래부사를 돕기 위해 동래성 전투에서 순절하였기 때문에 양산에서는 체계적인 군의 동원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밀양부사 박진 지휘 하의 일부 지원군도 늦게 도착하여 양산은 쉽게 점령당하고 말았다. 양산이 일본군에 의해 함락된 시기는 대략 4월 17일이었다.

 

양산이 함락당하고 양산읍성에 왜군이 가득찼지만 양산군민들은 왜적을 물치기 위하여 의병활동을 활발하게 하였다. 양산의 이구(李鳩), 김영호(金永浩) 삼부자, 정호인(鄭好仁)・정호의(鄭好義) 형제, 안근(安瑾) 삼부자와 종제・종질, 최흥국(崔興國), 유정(柳汀)과 그 일문, 이수생(李秀生), 이몽란(李夢鸞), 방익(房翼), 윤옥(尹沃)과 윤발(尹潑) 형제 등이 의병으로 나서 왜군을 퇴치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2. 세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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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 선생은 영천 이씨 김해・양산의 입향조로서 1987년에 건립한 세덕사에서 봉향하고 있다. 배위는 숙부인 부여 백씨로 송담 백수회 선생의 누이동생이다. 부인의 묘소는 당초 물금읍 가촌리 청룡등에 있었으나 물금 신도시 계획사업으로 1998년 이장 후 현재 남편의 묘소와 합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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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회 선생은 임진왜란 때 포로가 되어 9년간 억류되었는데, 이구 선생은 3년간 억류되었다. 두 사람은 처남과 매제 사이로 절의의 표상이 되었다. 비록 포로가 되어 일본에 끌려갔으나 일본 관리에 굴하지 않고 끝내 애국 충절의 절개를 지켰으며 고향 양산으로 귀국하였다. 이구 선생을 모신 세덕사와 백수회 선생을 모신 송담서원은 가까운 거리에 있다.

 

영천 이씨 양산 문중은 1982년 말에 재실 건립을 발의하여, 1987년 4월 26일 물금읍에 사당인 세덕사(世德祠)와 재실인 경정재(景正齋)를 낙성하였다. 사당에는 이구의 위패와 선조 가운데 관직을 역임했던 산수정(山水亭) 이종양(李宗讓), 이제손(李悌孫 혹은 李俤孫), 이구수(李龜壽)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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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처음 건물을 낙성했을 때는 대문에 편액이 없었고, 재실의 현액은 ‘경정재’라 했으며, 사우의 현액은 ‘세덕사’라 하였다. 1999년 후손 이유민(李裕民)이 주도하여 경정재 편액을 내리고, 그 자리에 조상의 훌륭한 가르침을 후손들이 강마(講磨)한다는 의미에서 ‘명교당(明敎堂)’이라는 편액을 걸었으며, 대문에도 ‘숭정문(崇正門)’으로 현액하였다.

 

이유민은 명교당과 숭정문이라는 명칭은 물론이고 「명교당기문(明敎堂記文)」을 직접 지었다. 「명교당기문」은 현재 목판에 새겨져 명교당 건물 안쪽에 걸려 있다. 2005년 발간된 『양산의 누정재지』에는 경정재에 대해 “원래 양산시 원동면 내포리에 세웠으나 1974년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이구의 11세손인 이종찬은 1987년 물금읍 가촌리에 처음 경정재를 건립하였고, 원동면 내포리에 있는 재실은 이구의 후손을 모신 재실로 경정재와는 별개라고 하였다.

 

영천 이씨 김해・양산 후손들이 1999년 이구 선생의 4대조 제단을 설치하여 매년 음력 10월 10일 후의 첫 일요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이번 필자의 답사에서 후손의 도움으로 사진 촬영을 할 수 있었는데 감사드리는 바이다.

 

3. 화왕산성 전투

 

이구 선생이 참전한 화왕산성 전투를 소개한다. 화왕산성은 가야시대에 축조되었고, 신라를 거쳐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왜군을 방어하는 중요한 거점 역할을 했다. 명나라와 일본의 강화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를 보였다. 평화 교섭이 결렬되자 다시 1597년 정유재란으로 이어졌다. 울산, 부산포, 거제 등지에서 장기 주둔하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군사 5만 명을 이끌고 안의를 거쳐 전주로 향하면서 남부지방 도처를 공격하고 약탈했다.

 

경상좌도 방어사로 있던 홍의장군 곽재우는 밀양, 영산, 창녕, 현풍 네 지역의 군사를 이끌고 창년의 화왕산성으로 들어가 왜적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제16권 ‘선조조’ ‘고사본말’에 보면 그 당사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정유년 가을 왜적이 두 번째 침범해왔다. 재우가 방어사로서 창녕의 화왕산성을 지키며 사수할 뜻을 보이니 온 군중이 적의 군사가 많음을 두려워하여 벌벌 떨었다. 적병이 이미 성에 다가왔는데도 재우는 조용히 웃으며 다만 굳게 지키라고 명령하여 말하기를 ‘제 놈들도 병법을 알 터이니 어찌 경솔하게 덤벼들 수 있겠는가’ 하더니 과연 하루 밤낮을 지나자 적이 싸우지 아니하고 강을 건너갔다.

 

적이 황석산성을 공격하고 남원을 함락해 각 진이 모두 무너지니 체찰사 이원익이 공에게 군사를 철수시킬 것을 명령했다. 공(곽재우)이 사람을 보내 보고하기를 ‘제(齊)나라의 72성 중 즉묵성만은 홀로 보전되었으며, 당나라의 군사가 100만 명이었으나 안시성은 능히 그들을 당해냈는데 어찌 모든 성이 파했더라도 홀로 지켜내지 못할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왜군이 경상우도를 침입했을 때 곽재우 홀로 화왕산성을 굳게 지키던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곽재우는 화왕산성으로 군사를 모은 후 자신이 머무르던 객사에 섶을 쌓아 죽기를 결심하고 지킬 뜻을 보인다.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어 군사들이 두려워할까 미리 취한 조치였다. 곽재우는 인근 성이 모두 무너질 때도 동요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물러나는 적의 배후를 기습해 전과를 올린다.

 

왜적은 마침내 낙동강을 건너 서쪽으로 가서 안음의 황석산성을 공략하고 전라도 남원성을 함락했다. 체찰사 이원익이 곽재우에게 적은 병력으로는 성을 지킬 수 없음을 지적하면서 그에게 피하라고 명령했으나, 곽재우는 혼자 힘으로 왜적에 대항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표명했다. 그의 탁월한 용기와 판단력으로 승리를 거둔 전투가 화왕산성전투였다.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 6월 28일에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의병이 일어난 일과 경상도 지역의 전투 상황을 보고한 치계(馳啓)에 곽재우 장군에 관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의령(宜寧)에 사는 고(故) 목사(牧使) 곽월(郭越)의 아들인 유생(儒生) 곽재우(郭再祐)는 젊어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연습하였고 집안이 본래 부유하였는데, 변란을 들은 뒤에는 그 재산을 다 흩어 위병을 모집하니 수하에 장사(壯士)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재우는 그 아비가 명나라 북경에 갔을 때에 황제가 하사한 붉은 비단 철릭(帖裏)을 입고서, 지금 장사(將士)들을 거느리고 의령현의 경내 및 낙동강 가를 마구 누비면서 왜적을 보면 그 수를 불문하고 반드시 말을 달려 돌격하니, 화살에 맞는 적이 많아서 그를 보면 바로 퇴각하여 달아나 감히 대항하지 못합니다. 

 

왜적에게 사로잡혔던 사람이 돌아와 ‘왜적들이 「이 지방에는 홍의 장군(紅衣將軍)이 있으니 조심하여 피해야 한다.」고 했다 합니다.”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심상…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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