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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송담 백수회 선생의 우국충정과 가사문학

기사입력 2020.01.07 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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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수회 선생 송담서원.jpg

 

송담 백수회 선생의 우국충정과 가사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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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상도

 

송담 백수회 선생의 본관은 양산(梁山), 자는 여빈(汝彬), 호는 송담(松潭), 원래 부여(扶餘)백씨다. 백수회는 1574년(선조 7년)에 양산군 동면 사배리에서 출생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당시 19세였으며, 재실에서 독서를 하다가 왜적에게 포로가 되어 일본에 끌려가서 억류되었다가 9년 만에 귀환했다. 

 

2. 송담서원복원 기념비.jpg

 

일본에서의 포로 시절 충절과 기개를 지킨 것으로 유명하며 이때 지은 가사나 한시들이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

 

양산시 물금읍 가촌서2길 14-13에 가면 백수회 선생을 기리는 송담서원이 있다. 현종실록 18권, 현종 11년 윤2월 9일 병신 1번째 기사(1670년)에 보면 절개를 세운 고 찰방 백수회에게 증직하고 정문을 세워주라는 현종의 명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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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은 고(故) 찰방 백수회(白受繪)에게 증직하고 정문을 세워주라고 명하였다. 백수회는 양산(梁山) 사람으로 나이 19세에 임진왜란을 만나 적에게 함몰당하자 ‘차라리 이씨의 귀신이 될지언정 개와 양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 영위이씨귀 부작견양신(寧爲李氏鬼 不作犬羊臣)’이라는 10자(字)를 등에 써 붙였다.

 

4. 송담 백수회 선생 정려비각.jpg

 

왜적들이 항복시키려고 가마솥에 삶겠다고 협박하였으나 끝내 두려워하지 않자, 왜인이 의롭게 여겨 석방하여 돌려보냈다. 광해(光海) 때 길에서 흉소(凶疏)의 통문을 보고 통곡하면서 찢어버렸다. 인조(仁祖) 때에는 연신(筵臣)의 계달로 인해 자여 찰방(自如察訪)에 제수되었다가 죽었다. 이때에 와서 경상 감사 민시중(閔蓍重)이 앞뒤로 절개를 세운 일을 진달하자 예조가 정문을 세워주고 포상할 것을 계청하여, 이 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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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담 백수회 선생은 12세에 부모를 잃고, 14세에 현감 석지의 딸 칠원 배씨와 결혼하였다. 경남 양산 물금 가촌의 산방에서 학행에 힘썼고, 어렸을 때부터 의지와 기상이 출중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에게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가 포로생활을 하였지만 고국에 대한 충절을 굽히지 않고 오히려 왜인을 감탄케 하였다.

 

6. 백수회 선생 고향사배리 사송신도시 조성.jpg

 

송담 선생은 1696년에 양산 충렬사에 조영규 군수와 함께 배향되었다가 문중에서 서원을 별도로 세워 그곳에 배향하였다. 숙종이 1717년(숙종 43) 사액(賜額)을 하사한 양산의 유일한 사액서원이다. 송담서원은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85년에 가을에 사우를 중건(重建)하였다. 매년 3월 중정일에 유림이 향사(享祀)하고, 매년 음력 5월 20일에 후손이 제향(祭享)해오고 있다.

 

송담 선생은 조선으로 돌아온 후 10년이 넘도록 외부와 단절한 채, 어떠한 교류도 하지 않았다. 선생은 옳고 그름에 사리가 밝았다. 40세가 되던 해 광해군의 폐모사건이 일어나고, 광해군의 난정으로 민심이 흉흉함을 보고 여러 번 상소하여 맹렬히 비판하였다. 조정에서 날아온 폐모 통문(通文)을 받고는 이런 흉역지서(凶逆之書)를 받을 수 없다고, 찢어버렸다.

 

이로 인하여 점차 명사들과 교류의 길이 트이고 잠시 벼슬길에 나아가기도 하였는데, 1623년 인조반정 후 사옹원(司饔院)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을 지낸 후 자여도 찰방(自如道察訪)을 지냈다. 1628년(인조 6년) 상소를 올린 것이 각하되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후학에 힘쓰며 여생을 보내다가 69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백수회 선생이 타계하고 28년이 지난 후인 1670년(현종 11년)에 나라에서 통정대부 호조참의라는 벼슬을 추증하였다.

 

송담 백수회 선생의 시조와 가사문학

 

송담 백수회 선생이 임진왜란 때 포로가 되어 일본에서 억류 생활할 때 소회를 읊은 시조는 일편단심 충절의 정신을 표현라며 귀국을 소원하고 있다. 일본에 끌려가 억류되었던 9년 동안의 회한과 고국을 그리워하는 정을 비장한 어조로 읊은 작품이 대부분이다. 포로 생활의 고독한 심사를 시편이나 가사로 지었다.

 

해운대 여윈 날에 대마도 돌아들어 눈물 베서고/ 좌우를 돌아보니 창파만리를 이 어디라 할 게이고/ 두어라 천심조순(天心順助)하면 사반고국(使返故國) 하리라. 송담 선생의 ‘도대마도가’ 국문시가는 타국에서의 조국애가 서려 있는 몇 안 되는 우리 민족의 애국 시다.

 

어와 하도할샤(아! 많기도 하구나)/ 이내 분별 하도할샤(이내 생각이 많기도 하구나)/ 남모르는 근심을 못내 하여 설운지고(남모르는 근심이 말할 수 없이 많아 슬프구나)/ 언제나 하늘이 이 뜻을 알으셔 사반고국 하려니고(언제나 하늘이 뜻을 알아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려는가).

 

포로생활 중 일본 경도에서 안인수(安仁壽)라는 사람을 만나 지은 화답시조가 ‘화경도인안인수가(和京都人安仁壽歌)’이다. 안인수가 시가를 지어 위로하였다. 이 가사는 이에 화답하여 지은 작품으로, 형식은 4음보 1행을 기준으로 5행의 짧은 가사이다.

 

한등객창에 벗 없이 혼자 앉아/ 님 생각하면서 좌우를 돌아보니 북해인가 연옥인가 이 어디라 할 게이고/ 청풍과 명월을 벗삼은 몸이 위국단심을 못내 슬퍼하노라./ 해석은 다음과 같다. 객창의 차가운 등불아래 벗 없이 혼자 앉아/ 고국을 생각하며 사방을 둘러보니 북풍한설 몰아치는 북해인지, 불길에 휩싸인 연옥인지 여기가 어디라 할 것인가?/ 청풍명월을 벗 삼았지만 조국으로 돌아갈 마음만 있을 뿐 못내 슬프기만 하구나./

 

재일본장가(在日本長歌)는 술회가사(述懷歌辭)로 송담 백수회 선생의 나라를 위한 단심(丹心)과 부모를 그리워하는 효심(孝心)이 여실히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재일본장가’는 일본에 포로로 끌려가 있을 때 지은 가사이다. 박인로(朴仁老)의 ‘태평사’, ‘선상탄’과 함께 전쟁 가사 중 하나이다. 

 

나라를 위한 단심과 부모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히 묻어나고 있다. 백수회의 작품은 박인로의 가사들과 함께 국문사학사에서 찬연히 빛나고 있다. 극도의 혼란과 참혹한 살육전이 벌어진 임진왜란 때는 한가하게 시조를 읊고 기록을 남길만한 여건이 되지 않았다. 두 분의 작품은 가사 문학 공백기의 맥을 이어주고 있어 중요하다.

 

아아! 이 내 몸이 일일도 삼추로다./ 해동 이역을 이 어디라 할 것인가?/ 천심이 블조하니, 만리 표림이라./ 눈물을 씻고서 좌우를 돌아보니,/ 어음이 부동하고, 풍속이 상위로다./ 청의를 메었고, 성전에 절하며,/ 이제의 채미와 소무의 한절과/ 천상의 위국단심을 잊지 않은 이내 마음/ 조조 모모에 서산을 창망하니,/ 일촌 간장이 끊는 듯 잇는 듯/ 건곤을 부앙하고, 고사를 사량하니,/ 부모의 은덕과 형제의 우애를 못다 갚은 잔구로다./ 침상에 꿈꾸어 고국에 돌아 오니,/ 궁실이 여전하고, 송국이 황무로다./ 부모께 절하며, 이제를 덥썩 잡고,/ 중년 불견하며, 양생 상비/ 이르며 물으면서 체루를 상휘하고,/ 적적 전정을 못내 베푼 사이에/ 이요 난이하니, 원접 경회하도다.

 

송담 백수회 선생과 박인로 선생의 가사 작품의 가치

 

양산 출신 백수회 선생은 왜국에 포로로 잡혀 있으면서 고독한 마음을 시편이나 가사로 글을 지었다. 오늘날 한시 11수, 서적 1권, 편지 1통, 국문시가 4편이 전해오고 있다. 시가 4편은 국문학사에서 중요작품으로 거론되고 있다. 박인로, 김상헌의 작품과 비교해 보기로 한다.

 

박인로(朴仁老) 선생의 가사들과 함께 임진왜란기의 가사문학에 있어서 공백기의 맥을 이어주는 국문학사적 의의와 적지에서 불굴의 우국충정을 노래했다는 문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임진왜란 때 수군 만호로 참전한 박인로(朴仁老) 선생이 광해군 3년(1611)년에 지은 누항사(陋巷詞)라는 가사는 구성이 서사, 본사, 결사의 3단으로 4음보의 연속체다. 

 

서사는 길흉 화복을 하늘에 맡기고 안빈 일념으로 살려는 심정을 나타냈다. 본사 1은 충성심으로 백전 고투했던 왜란의 회상, 본사 2는 전란 후 돌아와 몸소 농사를 짓는 심정을 읊었다. 본사 1을 소개한다.

 

배고픔과 추위가 몸을 괴롭힌다 한들 일편단심을 잊을 것인가./ 의에 분발하여 내 몸을 잊어서 죽어서야 말겠노라고 마음 먹어/ 전대와 망태에(전쟁할 때 쓰는 무기들을) 한 줌 한 줌 모아 넣고/ 임진왜란(전란) 5년 동안에 죽고 말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 주검을 밟고 피를 건너는 혈전을 몇백이나 치루었던가.

 

재일본장가(在日本長歌)는 단시조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도대마도가(到對馬島歌)는 단시조에서 벗어나고 있어 파격을 보여주고 있다.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간 백수회 선생, 수군 만호로 참전한 박인로 선생의 시조와 가사문학 작품에서 나오는 우국충정은 국민들이 본받아야 하겠다. 백수회 선생이 탄생한 사배리는 마을 전체가 수용되어 사송신도시로 조성 중인데 백수회 선생의 고향에 대한 표석과 안내문을 세울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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