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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충렬사 삼조의열인 양산군수 조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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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람

심상도 박사의 화요 칼럼/충렬사 삼조의열인 양산군수 조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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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산군수 조영규 동래성 전투에서 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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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양산의 충렬사는 양산 정신의 근간인 삼조의열 3위(三位)를 비롯해 임란공신 28위, 항일 독립운동 유공자 39위의 충혼을 모신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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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양산군수 조영규(趙英圭, 1535~1592)는 동래부사 송상현(정읍 출신)과 함께 동래성을 지키다가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삼조의열 중의 한 분이자 충효의 상징인 조영규 양산군수는 양산을 대표하는 인물로 존경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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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규의 자는 옥첨(玉瞻), 본관은 직산(稷山)이며, 수의부위 준(準)의 아들로서 중종 30년(1535) 장성부 백암리에서 출생하였다. 

 

조영규는 1554년(명종 9년) 무과에 급제한 후 훈련원 초관(訓練院哨官), 사복시 주부, 제주 판관, 무장 현감, 영암 군수, 용천 군수, 낙안 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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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를 행함이 엄격하고 투명하였으며, 청렴결백하였고, 나이 들어서는 더욱 독실(篤實)하였다. 무장에 있을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해 벼슬에서 풀려 집에 돌아가니 집에는 한 섬의 양식이 없을 정도였으며, 효성도 지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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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 25) 양산 군수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래읍성에 가서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과 함께 성을 지키고, 나라를 위해 죽을 결심을 하였다. 송상현 부사에게 양산으로 돌아가 모친께 하직 인사를 하고 오겠다고 약속하였다. 송상현 부사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가려고 핑계를 대는 줄 알았다. 

 

조영규 양산군수는 아들 조정로(趙廷老)에게 부탁하기를 “너의 아버지는 나라를 위하여 싸움터에 나아가니 너는 할머니를 잘 모시고 고향에 돌아가라”고 하였다. 조영규 군수는 약속대로 동래읍성으로 돌아와 북문으로 달려갔다. 

 

성을 포위하고 있는 왜병들을 노호(怒號) 질타(叱咤)하며 성문 앞 가까이 이르자 왜병들도 감복하여 순순히 길을 열어주었다고 한다. 송상현 부사를 도와 힘껏 싸우다가 순국하였다.

 

아들 조정로는 할머니를 모시고 한 달이 넘도록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서 고향인 장성에 도착하여 할머니를 깊은 벽지(僻地)에 모셨다. 

 

부친이 이미 죽은 줄 알고 머리를 풀고 걸어서 동래에 이르니 온 성에 시체가 쌓여 가득하므로 아버지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초혼(招魂)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서 허장(虛葬 : 시신 없는 무덤 조성)하였다. 

 

조정로는 적과 함께 하늘을 같이할 수가 없다며, 한 개의 토실(土室)을 지어 문을 닫고 나오지 않고 20년을 애모(哀慕)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1667년(현종 8)에 이르러 장성 사람들이 조영규 부자를 모암 서원(慕巖書院)에 모시고, 2년 후 송준길(宋浚吉)이 왕에게 조영규 부자의 충효를 아룀으로써 정려(旌閭)를 명하고 충효 양문(兩門)을 세우게 하였다. 조영규 정려(趙英圭 旌閭)는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웠으며, 1985년 2월 15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78호로 지정되었다.

 

조영규는 1696년(숙종 22년) 양산 충렬사에, 1709년(숙종 35년) 동래 충렬별사(忠烈別祠)에, 1736년(영조 12년) 동래 충렬사에 각각 모셔졌다. 숙종 때 조영규에게는 호조 참판을, 아들 조정로에게는 빙고 별검(氷庫別檢)을 각각 추증하였다.

 

2. 동래부순절도에 묘사된 조영규 양산군수

 

조영규 양산군수는 보물 제392호인 동래부순절도(東萊府殉節圖)에 나와 있다. 1963년 9월 1일 보물 제392호로 지정되었다. 견본설채(絹本設彩). 1폭. 145×96cm. 육군사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동래부의 전속 화원(畵員)인 변박(卞璞)이 1760년(영조 36년)에 개모(改摹)하였다. 원래는 송상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안락서원(安樂書院)에 봉안되어 있었다.

 

1592년 4월 15일 왜구에 맞서 대항하다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과 동래부민의 저항을 중심으로 동래성의 전투 상황을 묘사한 일종의 전쟁기록화다. 문헌기록에 의하면 동래부순절도의 제작은 원래 1658년(효종 9년) 동래부사 민정중(閔鼎重)이 처음 구상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1709년(숙종 35) 동래부사 권이진(權以鎭)이 사당을 짓고 그 벽 좌우에 벽화 형식으로 처음 시도한 것이다. 

 

그 후 1760년(영조 36년) 동래부사 홍명한(洪名漢)이 훼손된 순절도를 동래 사람 변박(卞璞)에게 다시 그리도록 하고 그 그림을 충렬사에 보관하였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 조선에 상륙한 왜군은, 14일에 부산진(釜山鎭)을 공략하고, 15일에는 동래부를 공략하여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 등 군민(軍民)이 모두 순절하였다. 부산진 순절도와는 달리 교전 양상을 다양하게 설명하였으며 사경(寫景)을 곁들인 부성(府城)을 부감압축(俯瞰壓縮)시켜 교전에 얽힌 설화를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모든 형상의 등차비례(等差比例)가 상당히 간과되었으나 권계(勸戒)를 목적으로 한 이 그림의 초점은 절의의 상징인 송상현과 비충겁약(非忠怯弱)한 경상좌병사 이각(李珏)을 서로 대조시킨 데 있다. 동래 안락서원(安樂書院)에 게안(揭安)되어 있다가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

 

비겁한 경상좌병사 이각은 동래읍성을 벗어나 울산병영성으로 돌아와 첩과 재물을 도피시키고, 또다시 탈출하였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한양을 지나 임진강까지 도망을 갔다. 한강 방어선을 지키지 않고 후퇴하는 도원수 김명원 부대로 합류하였다. 경상도에 있어야 할 이각을 본 도원수 김명원은 이각을 참수하였다.

 

경상좌수사 박홍은 보유한 함선과 장비들을 파기하였다. 왜군의 갑작스런 대규모 기습을 받아 경상좌수영 진포 태반이 쓸려나가며 제때 대응하지 못했고 이후 동래성으로 향했으나 압도적인 병력 차이에 동래성 구원을 포기하고 한양으로 후퇴했다. 이후 좌위대장에 임명되어, 임진강 방어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패했다. 그 뒤로 여러 전투에 참가하였다.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귀향하다 병사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는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울산군수 이언성은 동래성을 구원하러 왔다가 왜군에 포로가 되었다. 왜군은 나중에 이언성에게 강화를 요청하는 서찰을 주어 석방하였다. 이언성 군수는 서찰을 전하지 않고 도망쳐 왔다고만 변명하였다. 이런 비겁한 관리들에 비하면 조영규 양산군수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고 영원한 충신이 되어 양산을 대표하는 인물로 충렬사에 모셔졌다.

 

2. 동래부사 권이진의 상소

 

숙종 36년 11월 10일(1710년) 동래 부사(東萊府使) 권이진(權以鎭)이 장계(狀啓)를 올렸다. "임진 왜란(壬辰倭亂) 때에 양산 군수(梁山郡守) 조영규(趙英圭), 동래 교수(東萊敎授) 노개방(盧蓋邦), 제생(諸生) 문덕겸(文德謙), 비장(裨將), 송봉수(宋鳳壽), 김희수(金希壽), 부리(府吏) 송백(宋伯), 부민(府民) 김상(金祥), 송상현(宋象賢) 부사(府使), 겸인(傔人) 신여로(申汝櫓)가 국난(國難)에 함께 순절(殉節)하였으니, 포장(褒奬)을 더하여 윤상(倫常)을 부지(扶持)함이 마땅한데, 쓸쓸히 1백 년 동안 절일(節日)에 한 그릇의 밥을 놓고 충혼(忠魂)을 위로한 적이 없었습니다.

 

신이 이미 여러 사람이 순절(殉節)한 옛 땅에 빈 터를 사서 조영규(趙英圭)를 제사하게 하고 노개방과 제생 문덕겸은 또 낭무(廊廡)를 지어 제사하게 하였습니다. 비장(裨將)·부리(府吏) 이하 항절(抗節)한 자들에게 사액(祠額)을 내려 주시고, 관원을 보내어 사제(賜祭)하셔서 1백 년의 충혼(忠魂)을 위로하고, 변민(邊民)의 관첨(觀瞻)을 용동(聳動)시키소서." 하였다.

 

조선 숙종 37년 2월 21일(1711년) 동래 부사(東萊府使) 권이진(權以鎭)이 상소(上疏)하였다. 충렬사(忠烈祠) 별묘(別廟)의 일을 논하여 말하기를, "윤문거(尹文擧)가 부사(府使)가 되었을 때에 사당[廟] 가운데에 별옥(別屋)을 지어 정발(鄭撥)을 따로 향사(享祀)하려고 했으니, 이에 별묘(別廟)를 만들어서 다른 사절 제인(死節諸人)을 향사하였습니다.

 

신이 도임(到任) 초에 즉시 그 자리에 별묘(別廟)를 세워서 양산 군수(梁山郡守) 조영규(趙英圭), 교수(敎授) 노개방(盧盖邦) 이하 여러 사람을 향사하였는데, 예조(禮曹)에서 계하(啓下)한 관문(關文)에 별묘(別廟)를 철거하고 본사(本祠)에 합향(合享)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민(吏民)이 반드시 별묘를 세우려고 하는 데는 다 곡절(曲折)이 있는데, 본묘(本廟)가 협착(狹窄)하여 반드시 뜯어고쳐야 하고 별묘(別廟)를 철거하여 옮기는 데도 또한 공력(功力)을 허비하게 되니, 청컨대 다시 처분(處分)을 내려 주시어 읍인(邑人)의 소망을 위로하소서." 하고, 끝으로 해변을 방어하는 일을 여러 조목(條目) 논하니, 임금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였다. 충렬 별묘(忠烈別廟)는 임진년(1712) 5월에 복계(覆啓)하여 그대로 시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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