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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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문화예술회관, ‘VOS·제이세라 콘서트’ 개최- 오는 5월 25일(토), 오후 5시 대공연장에서 - 양산시시설관리공단(이사장 박성관) 문화예술회관은 오는 5월 25일(토) 오후 5시 대공연장에서 VOS·제이세라 콘서트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이번 콘서트는 데뷔 20주년, 제2의 SG워너비라 불리는 한국 발라드 및 R&B 대표 남성 3인조 보컬 VOS와 드라마 OST여왕으로 불리며 꾸준한 싱글앨범 발표, 방송 및 콘서트 등 폭넓은 활동을 펼치고 있는 여성 보컬리스트 제이세라의 라이브 공연으로 알차게 구성되어 양산문화예술회관을 찾아온다. VOS의 <눈을 보고 말해요>, <매일매일>, <반쪽>, <울어>, <미친것처럼>, <다시 만날까봐>, <나 이젠> 등과 제이세라의 <언제나 사랑해>, <가슴으로 운다>, <사랑시 고백구 행복동> 등 봄처럼 따듯한 무대를 선사할 예정이다. 공연예매는 오는 4월 30일(화) 오전 10시부터 유료회원, 5월 1일(수) 오전 10시부터 양산시민, 5월 2일(목) 오전 10시부터 일반회원을 대상으로 PC 및 모바일을 통해 양산문화예술회관 홈페이지(http://www.yangsanart.net)에서 가능하다. 입장료는 S석 4만원, A석 3만원이다. (공연문의 : 양산문화예술회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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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황산벌 전투의 현장 황산성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연산면 관동리와 가까운 황산성 황산성(黃山城)은 충남 논산시 연산면 표정리 산20에 있다. 관동리는 백제의 계백 장군의 5천 명의 결사대와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 5만 명의 신라군이 격돌한 전투 현장 중의 하나이다. 16세의 어린 화랑 관창이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한 곳이다. 관동리라는 지명이 관창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네 사람들은 관창이 여기에서 죽었기 때문에 관창골이라고 부른다. 황산성은 논산과 연산 일대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해발 386m의 함지봉(咸芝峰) 정상에 위치한 테뫼식 산성(산봉우리에 테를 두른 듯이 쌓은 산성)이다. 황성(黃城)으로도 불리는 황산성은 서쪽으로 노성산성과 일직선을 이루며, 동쪽으로 황령산성에서 모촌리산성으로 이어지는 백제시대 사비성 부여의 최후 방어선이다. 자연지세를 최대한 이용하였으나 북서쪽으로 멀리 바라다보이는 노성산성(魯城山城)이 산봉으로 가로막혔음을 극복하기 위하여 북문터에서 300m쯤 북쪽 산봉우리에 작은 보루를 두었던 흔적이 있다. 동쪽과 서남쪽으로 주변 가까이 산성들이 있고, 특히 동남쪽의 평야지대는 백제멸망 당시 큰 전투가 벌어졌던 황산벌판이어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산성이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산성은 황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마름모꼴 형태로 자리를 잡았는데, 지형에 따라 편축식(片築式 : 성의 바깥쪽만 쌓는 방식)과 협축식(夾築式 : 성의 안팎을 다 쌓는 방식)을 혼용하여 축조되었다. 자연들을 깨서 사용하였으나 일부는 직사각형과 정사각형으로 다듬은 돌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시간적인 차이를 두고 개·보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의 높이는 서쪽 2m, 동쪽 1.8m이고, 산성의 둘레는 870m이며, 높은 북쪽 봉우리는 자연 지형을 이용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성황산석성(城隍山石城),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북산성(北山城)이라 하였다. 아울러 성벽의 둘레는 1,740척, 혹은 493보였으며, 높이는 12척이고, 성내에는 우물 1개소와 군창(軍倉)이 있었던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디지털논산문화대전). 황산성은 성벽 전체를 돌로 쌓은 석성으로, 황산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마름모꼴의 형태로 자리하고 있는데 지형에 따라 편축식과 협축식을 혼용하여 축조하였다. 축성에 사용된 돌은 부정형 할석과 방형, 장방형으로 다듬은 것들이 있는데, 이는 후대에 개·보수한 결과로 보인다. 성벽은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는데,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은 높이 2m에 이르는 구간도 있다. 부대시설로는 문지 3개소와 건물지 4개소, 장대지 1개소, 우물터 1곳 등이 있다. 기록에는 우물터 1개소와 군창(軍倉)이 있었던 사실만 전하나, 실제로는 더 많은 부대시설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문지는 동벽, 서벽, 남벽에서 확인되었으며, 남문지 안쪽으로는 가장 큰 건물지가 자리하고 있다. 성내에서는 연화문 와당과 인장와(印章瓦)를 비롯한 다양한 기와와 토기 조각이 수습되었다. 대체로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시기의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성 안에서 출토된 ‘황산인방(黃山寅方)’이라는 기와를 근거로 백제 오방성(五方城) 중 득안성(得安城)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여러 곳에서 고려와 조선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대안원년(大安元年)’이란 명문이 새겨진 기와 조각은 1209년(고려 희종 5)의 것으로 보아 황산성은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계속 사용된 성터였음을 알 수 있다. 논산시에서 대전광역시로 통하는 국도 4호선을 타고 10㎞쯤 가면 연산면 소재지인 연산리에 이른다. 여기에서 북쪽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호남선 철도를 건너면 관동리 행교골에 닿는데, 이 행교골의 뒷산이 황산이다. 행교골에서 황산에 이르는 길은 길이 잘 나 있는 편이며,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산성의 남벽에 닿는다. 2. 황산성 복원 염원비(黃山城 復原 念願碑) 필자는 2023년 11월 23일 논산시 연산면에 있는 황산성을 답사하였다. 화랑 관창이 죽은 연산면 관동리 현장을 방문하였다가 동네 주민을 만나 물어보니 황산성으로 차가 갈 수 있고 주차장도 있다는 말을 듣고 골짜기를 지나 올라갔다. 황산성 입구에 안내판과 황산성 복원 염원비가 설치되어 있어 감동받았다. 백제가 신라군에 패배하여 망국의 길로 접어든 황산벌 전투 현장을 주민들이 잊지 않고 중요한 역사 유적인 황산성을 복원하고자 하는 염원이 결실을 맺은 것으로 보여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복원 염원비를 읽어보니 황산벌 전투에서 전사한 백제군과 신라군을 모두 추모하는 내용이어서 더욱 감명깊었다. 비문 내용과 유적 복원에 앞선 인사들을 소개하기로 한다. 서기 660년 여름 삼한일통(三韓一統)을 꿈꾸는 신라군이 백제로 짓쳐들어왔다. 신라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 5만 대군에 맞서 백제는 계백 대장군의 5천 결사대로 하여금 이를 저지케 했다. 오로지 나라를 지키겠다는 충의(忠議)의 깃발 아래 결사 항전에 나선 계백의 5천 결사대는 신라 김유신 군(軍)과 맞서 네 번의 싸움에서 이기고도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다섯 번째 마지막 전투에서 패해 이곳 황산벌의 산중고혼(山中孤魂)이 되었다. 그 후 1400여 년이 흐르도록 5천 결사대 젊은 영웅들의 숨결은 이곳 황산성(山城)에 머물러 돌아보는 이 없이 천년 설움을 솔숲 소리로 토해내니 대를 물린 후인(後人)들의 가슴은 아프고 처절하다. 이에 우리 연산면의 뜻있는 후인(後人)들이 황산성복원회(黃山城復原會) 결성하고 십시일반(十一飯)의 뜻을 모아 민간 복원 기금을 모금하는 등 황산성(黃山城) 복원(復原)의 간절한 염원(金)을 드러내 밝히니 충청남도가 화담(和答) 하고 논산시가 호응(好應)해서 마침내 황산성(黃山城) 복원(復原) 사업을 시작(始作)했다. 이 어찌 감격스럽지 않겠는가? 바라거니와 계백 장군의 웅혼(魂)한 지략(知略)이 피어올랐던 황산성(山城) 복원(原)하고 나라를 위한 충의(忠義)의 넋으로 화(化)한 백제의 5천 결사대와 천리 먼 길 나서 순국혼(殉國魂)으로 화한 신라군 전몰(戰歿) 장병들의 외로운 넋을 위령(慰靈)하는 합동(合同) 위령비(慰靈碑)를 건립하여 자랑스러운 이 논산(論山) 우리 연산(山) 땅이 대한민국을 지키는 호국(護國)의 성역(聖域)으로 길이 일컬어지기를 염원(願)하여 황산성복원회(黃山城復原會)의 이름으로 이 비를 세우노라. 서기 2022년 12월 일 황산성 복원회장 : 도기정 회원 : 강기애, 강정숙, 곽도영, 김만중, 김명화, 김선원, 김의현, 김중식, 김태원, 류진선, 박민자, 박지연, 박현배, 안종명, 오인호, 이순봉, 이영숙, 이우원, 이준행, 이창구, 이충렬, 이태경, 전선희, 정규태, 주재순, 최창열, 홍만기. 3. 황산성 답사 소감 백제의 최후를 장식한 계백 장군이 이끄는 5천 명의 결사대의 항전은 언제 들어도 비장한 느낌이 든다. 백제 의자왕의 사치와 향락, 실정으로 국정은 기울고 있을 때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나라가 멸망하였다. 의자왕은 성충, 흥수 등 충신의 간언을 멀리 하고 아첨하는 신하들만 가까이하여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었다. 계백 장군은 꺼져가는 백제의 불꽃을 마지막으로 타오르게 하고 장렬하게 전사하여 만고의 충신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백제인의 충절과 기백을 보여준 계백 장군은 영원히 역사적 위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황산벌 전투도 거의 1400여 년 가까이 오래전 일이 되어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의론이 분분하다. 현지 주민들은 역사의 현장에서 대를 이어 살아왔기 때문에 역사학자들보다 오히려 정확하게 볼 수도 있다. 황산벌 전투가 벌어진 곳은 신양리, 신암리 마을로 전해지고 있다. 신암리 마을회관을 방문하여 주민들에게 물어보려고 했는데, 사람이 없었다. 마을 길을 걸어가면서 멀리 보니 주민이 밭에서 일하고 있어 논두렁을 가로질러가 인사를 하였다. 밭에서 김장용 무를 뽑고 있었다. 황산벌 전투에 대해 질문하였다. 87세 이기병 씨는 황산벌 전투에 대해 여러 가지 중요한 정보를 알려줘서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화랑 관창이 죽은 장소를 알려주었는데, 연산면 관동리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또한 신라군은 세 방면으로 진격해왔다고 설명하였다. 신라군이 진격한 곳은 황룡리의 용처럼 생긴 황령고개, 명암리 양경고개, 국사봉 등이었다. 중요한 정보를 알려준 데 대하여 감사 인사를 하고 화랑 관창이 죽은 관동리로 향했다. 관동교라는 다리를 지나 관동리 새마을 회관 겸 노인회관을 사진 찍고 마을 안쪽으로 계속 들어갔다. 도로 옆의 밭에서 일하는 주민을 만나 화랑 관창에 대해 물어보았다. 77세의 도민선 씨는 황산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황산성 입구까지 차로 올라갈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도민선 씨는 황산성을 관저골이라 불렀다고 하였다. 군사 요충지인 황산성에 주둔한 관리의 주거지인 관저가 있었다고 하였다. 오후 시간이라 황산성으로 걸어갔다 오기에는 늦었지만 차로 갈 수 있다는 말에 올라가 보기로 하였다. 주차장에 도착하여 조금 올라가니 황산성의 성벽이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 성안에 물이 고여 있는 큰 우물도 남아 있었다. 성벽을 따라 올라가는 등산로에는 영산홍, 철쭉 등을 심어 놓았고 정자, 벤치도 있었다. 성벽은 현재 복원 공사 중으로 성벽 돌이 무너져 내린 곳이 보였다. 정상에 올라가니 향적산(국사봉)까지 8.2km, 주차장 430m라는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었다. 쉼터와 정자도 있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주변은 철쭉, 영산홍을 심어 놓아 주민들이 잘 관리하는 느낌이 들었다. 황산벌, 비닐하우스, 강 등이 내려다 보여 조망이 좋았다. 쉼터 주변에는 기왓장이 많이 흩어져 있어 건물이 설치되었던 흔적이 드러났다. 황산성을 내려가는 등산로는 가팔라 밧줄이 설치되었고, 성벽 돌도 보였다. 황산성을 일주하고 주차장으로 내려왔을 때 등산로에 까만 산양 한 마리가 나타났다. 멀리서 사진을 찍었는데 도망가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황산벌 전투에서 순국한 백제 군사가 산양으로 환생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선한 눈망울을 지닌 산양은 천천히 필자가 내려온 황산성 정상 쪽으로 올라갔다. 황산성은 당초 답사 계획에 없었지만 운 좋게 주민 잘 만난 덕분에 살펴볼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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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화요칼럼, 화랑도가 이름을 남긴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울주 천전리 각석 이름 변경 국보인 ‘울주 천전리 각화랑도가 이름을 남긴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 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울주 천전리 각석 이름 변경 국보인 ‘울주 천전리 각석’의 이름이 변경되었다. 문화재청은 지난 2월 28일부터 ‘울주 천전리 각석’의 명칭을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蔚州 川前里 銘文과 岩刻畫)’로 바꾼다고 2월 26일 밝혔다(연합뉴스, 2024, 2.26.). 문화재청에서는 1973년 국보 지정 당시에는 돌에 글과 그림을 새겼다는 의미로 ‘각석(刻石)’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유산의 특징과 가치를 온전히 담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명문(금속이나 돌 등에 새긴 글)의 학술적 가치와 암각화의 중요성을 모두 담은 이름으로 바꾸게 됐다고 문화재청은 설명했다. 문화재청은 이름을 바꾼 천전리 각석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를 포함한 ‘반구천의 암각화’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신청서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에 제출한 상태이다. 울산광역시가 신라시대 진흥왕과 화랑의 흔적이 있는 국보 ‘울주 천전리 각석’ 명칭 변경을 추진한다. 울산광역시는 문화재 자료 검토와 전문가 자문을 거친 뒤 문화재청에 명칭 변경을 신청할 예정이라고 지난 7월 7일 밝혔다. 지난 6월 시는 문화재위원회를 열고 천전리 각석 명칭을 천전리 암각화로 변경하는 안을 가결했다(매일경제, 2023, 7.7.). 그동안 학계에서는 울주 천전리 각석은 신라시대 글자 외에도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다양한 바위 그림이 있기 때문에 포괄적이고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암각화’로 명칭을 바꾸는 것이 적절하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됐다. 특히 울산시가 추진 중인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의 유네스코 세계 유산 등재 명칭이 ‘반구천 일원 암각화’로 두 유산의 명칭을 통일해 올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전문가 권고도 있었다. 시는 국보 명칭 변경을 위해 7월 11일 강봉원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위원장 등이 참석하는 학술 토론회도 개최하였다. 지난 3월 20일에 현장에 가보니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로 명칭이 변경되었다는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안내판도 문화재청과 울주군에서 새것으로 교체하지 않고 임시방편으로 붙인 변경된 명칭이 떨어져 관리인이 손으로 눌러 다시 붙이기도 했다. 사진 찍기 위해 바위 앞의 경계를 넘어가면 자동 인식으로 방송이 나왔다. 필자 옆에서 사진 찍던 한 여성이 자꾸 들락날락하니 관리인이 현장에 와서 심하게 나무랐다. 2.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의 중요성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산210-2에 있는 ‘울주 천전리 각석’은 1973년 5월 4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태화강 물줄기인 대곡천 중류의 기슭 너비 9.5m, 높이 2.7m의 바위에 각종 도형과 글, 그림이 새겨진 암석으로, 아래, 위 2단으로 나누어 서로 다른 내용이 다른 기법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조각이 가득하다. 윗단에는 쪼아서 새기는 기법으로 기하학적 무늬와 동물, 추상화된 인물 등이 조각되어 있다. 사실성이 떨어지는 단순화된 형태인데 중앙부의 태양을 상징하는 듯한 원을 중심으로, 양 옆에 네 마리의 사슴이 뛰어가는 모습과 맨 왼쪽의 반인반수(半人半獸 : 머리는 사람, 몸은 동물인 형상)상이 눈에 띈다. 표현이 소박하면서도 상징성을 갖고 있는듯한 이 그림들은 청동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여진다(문화재청). 아랫단은 선을 그어 새긴 그림과 글씨가 뒤섞여 있는데, 기마행렬도, 동물, 용, 배를 그린 그림 등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기마행렬도는 세 군데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간략한 점과 선만으로도 그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배그림은 당시 신라인의 해상활동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글자는 800자가 넘는데 왕과 왕비가 이 곳에 다녀간 것을 기념하는 내용으로, 법흥왕대에 두 차례에 걸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 중에는 관직명이나 6부 체제에 관한 언급이 있어 6세기경의 신라사회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사람이 이루어 놓은 작품으로, 선사시대부터 신라시대까지의 생활, 사상 등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어느 특정 시대를 대표한다기보다 여러 시대의 모습을 담고 있어 더욱 의미가 깊은 유적이다.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는 능선 자락 아래에 병풍처럼 펼쳐진 장방형의 대형 암면과 북편으로 이어진 여러 개의 바위 가운데 4개의 암면에 그림이 새겨져 있다. 울주 천전리 각석 맞은편에 있는 급경사의 높은 암벽 자락은 이곳으로부터 약 2㎞ 떨어진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와 이어진다. 동남향인 천전리 각석의 대형 암면은 15도 가량 앞으로 숙여져 있다. 앞의 높은 산봉우리로 말미암아 암면에는 한낮에만 잠깐 볕이 든다.(울주군, 울산역사문화대전). 천전리 각석 앞 물길 둘레에는 100여 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넓고 편평한 반석이 펼쳐져 있다. 반석 위에는 직경만 30㎝에 이르는 백악기 공룡발자국 200여 개가 남아 있다. 1970년 12월 24일, 황수영 교수와 문명대 교수가 이끄는 ‘동국대학교 울산지구 불적 조사대’가 원효대사의 반고사 터를 조사하다가 근처에서 주민들의 안내로 울주 천전리 각석을 발견하였다. 주민들은 동국대 조사대가 오기 전에도 각석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3. 바위에 새겨진 화랑도 이름 천전리 각석은 상단과 하단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상단에는 동물 그림과 동심원, 마름모, 나선형 등 선사시대 암각화가 그려져 있다. 대체로 서석의 가로 중심선 하단부에 산재한 명문들은 내용이나 서체 등으로 볼 때 5~6세기 무렵에서 통일 신라 말기에 걸치는 것까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 중에는 글자 크기나 새기는 방법 등이 판이한 것들도 섞여 있고, 시기를 달리하는 내용이 중복되어 기록되기도 하여 판독에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내용 또한 간략하게 인명이나 간지만을 기록하기도 하였으며 내용을 확실히 알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까닭에 판독 가능한 명문들은 그리 많지 않은 상황이다. 221점이 분포하는데 그 가운데 3점은 근현대에 제작된 이름과 연도이다. 나머지 218점은 다수가 세선 긋기 형식으로 홀로 혹은 구획되어 표현되었으며, 바위면 쪼기 기법으로 새긴 것도 일부 눈에 띈다. 신라 시대 사람들이 남긴 대략 천 여자 가량의 명문은 도보 인물 및 기마행렬 위로 개성삼년명(開成三年銘), 병술명(丙戌銘), 을미명(乙未銘), 계해명(癸亥銘) 등이 새겨졌다(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하단의 중간 부분에 하체만 남아 있는 인물상 위로 이 암면의 중심 명문이 남아 있는데, 중심 명문 가운데 먼저 새겨진 것을 원명(原銘), 뒤에 새겨진 것을 추명(追銘)이라 부른다. 중심 명문 주변에 신해명(辛亥銘)을 비롯한 간지명과 승려 및 화랑의 이름들, 뜻이 명확하지 않은 다수의 명문이 흩어져 있다. 하단에는 신라시대의 세선화와 300여 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명문 중에는 문첨랑, 영랑, 법민랑 등 신라 화랑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영랑성업(戌年六月二日 永郎成業)이라는 글자는 화랑 ‘영랑’이 술년 6월 2일 업을 이루었다는 내용이다. 목표를 성취했다는 것으로 짐작된다. 영랑이 화랑으로서의 수련기간을 마친 것을 기념한 각문(刻文)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이 영랑이 바로 효소왕 때의 영랑 일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영랑은 술랑(述郎), 남랑(南郎), 안상(安詳) 등과 더불어 이른바 사선(四仙)의 하나로 꼽혔으며, 금강산 방면의 여행과 놀이로 이름났다. 그의 족적은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 문인들 사이에 회자되어 ‘영랑도남석행(永郎徒南石行)’이라 바위에 새겨진 삼일포(三日浦 : 지금의 강원도 고성군) 방면을 답사, 기행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금강산에는 실제로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영랑재[永郎峴]’가 있었다고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그의 낭도 가운데는 진재(眞才), 번완(繁完) 등이 특히 유명하였다고 한다(『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탑상> 제4의 ‘백율사(栢栗寺)’조). 세상에서는 안상을 준영랑(俊永郎)의 무리라고 하였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영랑의 무리에는 오로지 진재(眞才)와 번완(繁完) 등의 이름만 알려져 있는데, 이들 역시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다.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하시동리에 있는 ‘영랑명(永郞銘) 석구(石臼)’에는 신라의 선인으로 나온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구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화랑도(花郞徒)란 신라에 있었던 화랑(花郞)과 그를 따르는 낭도(郎徒)로 구성된 청소년 집단을 말한다. 화랑이란 ‘꽃처럼 아름다운 사내’라는 뜻으로 국선(國仙), 화판(花判), 선랑(仙郎), 풍월주(風月主)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화랑도는 함께 수련하고 가무를 즐기며 유람하였으며, 여기에서 인재가 많이 길러지고 발탁되어 특히 삼국 통일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신라 진흥왕(534~576) 때 창설된 화랑도는 대개 15~18세의 청소년으로 구성되었다. 화랑들은 경주 남산, 금장대, 단석산, 강릉 경포대, 속초 영랑호, 금강산, 지리산, 천전리 계곡 등과 같은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면서 심신을 수양하고 단련했다.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에 새겨진 화랑의 이름 중 ‘법민랑(法民郞)’이 바로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문무왕의 화랑 시절 이름이다. 천전리 계곡이 신라 서라벌 귀족과 화랑이 즐겨 찾던 명소이자 수련지였음을 알 수 있다. 문무왕은 태종무열왕의 왕자로 김유신 장군과 함께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화랑도의 수련지인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의 화랑도 유적을 지난 3월 20일, 21일 연 이틀간 답사하였다. 같은 날 암각화박물관도 방문하여 암각화와 명문을 살펴보았다. 첫날은 12시 넘어 답사했는데, 앞산에 해가 가려 암각화와 명문이 잘 보이지 않았다. 문화관광해설사가 내일 아침 10시 무렵에 오면 해가 비쳐 잘 보인다고 정보를 알려줘 다음 날 바로 달려갔다. 계곡 건너편에는 공룡 발자국 회석이 많아 구경하며 사진을 찍었다. 암각화와 명문도 비바람에 풍화작용이 심하여 바위가 일부 떨어져 나가거나 선명하지 않아 모형을 만들어놓은 암각화박물관에 가서 자세히 보며 사진을 찍었다. 글자를 판독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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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 박사, 화요칼럼,김유신 장군이 수도한 단석산 석굴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화랑도의 기원 화랑도의 기원과 김유신 공이 화랑도가 된 사연에 관해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제41권 열전 제1(三國史記 卷第四十一 列傳 第一) 김유신 상(金庾信 上) 조에 김유신이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를 이끌었다고 나온다. 김유신 공은 15세 때 화랑이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기꺼이 따르며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불렀다. 진평왕 건복 28년(서기 611) 신미, 공의 나이 17세였을 때, 고구려(高句麗)ㆍ백제(百濟)ㆍ말갈(靺鞨)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외적을 평정하려는 뜻을 품었다. 그리하여 혼자 중악(中嶽)의 석굴에 들어가서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고하여 맹세하였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三國遺事 卷第一 紀異 第一) 김유신(金庾信) 조에 나이 18세가 되던 임신년(서기 612)에 검술을 익혀 국선(國仙)이 되었다. 삼국유사 제3권 탑상 제4(三國遺事 卷第三 塔像 第四) 미륵선화 미시랑 진자사(彌勒仙花 未尸郞 眞慈師) 조에 진흥왕은 나라를 일으키려면 반드시 풍월도를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다시 영을 내려 양가의 남자 중 덕행이 있는 자를 뽑고 그 명칭을 고쳐 화랑이라 하였다. 이리하여 처음으로 설원랑(薛原郞)을 받들어 국선을 삼았으니, 이것이 화랑국선의 시초였다. 그래서 명주(溟州)에 비석을 세웠다. 이때부터 사람들에게 악행을 고쳐 선행을 하게 하며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에게 순하게 하였으니, 오상[五常 :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과 육예[六藝 :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 삼사(三師)와 육정(六正)이 이 왕의 시대에 널리 행하여졌다. [『국사(國史)』에서는 진지왕(眞智王) 대건 8년 병신에 처음으로 화랑을 받들었다고 했으니, 아마도 역사서에서 전하는 것이 잘못된 듯하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三國遺事 卷第二 紀異 第二) 효소왕 시대 죽지랑(孝昭王代 竹旨郞) 조에 ‘조정의 화주(花主)’가 나온다. 화주는 조정에서 화랑을 관장하는 조직이다. 제32대 효소왕(孝昭王) 때, 죽만랑(竹曼郞) 무리에 급간 득오실(得烏失)[득오곡(得烏谷)이라고도 한다.]이 있었다. 그는 화랑도의 명부인 『풍류황권(風流黃卷)』에 이름이 있어서 날마다 출근했는데, 10여 일 동안 보이지 않았다. 신라 화랑도(花郞徒)의 명부(名簿)를 ‘황권(黃卷)’이라고도 한다. 이 책에 이름이 올라있을 때에는 실제 화랑도 집단에 속하여 활동하였지만, 이름을 지우거나 빼면 화랑도를 떠난 것으로 보여진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화랑을 중심으로 화랑도가 만들어질 때 그 무리들인 낭도(郎徒)의 명단이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 중악 석굴 신라 사람들은 단군 이래로 산악에 신적인 존재가 거주하는 것으로 믿는 산악숭배사상을 이어받아 영험한 산에 존재하는 산신에 대해서 제사를 지냈다. 신라 오악(新羅 五嶽)은 삼국통일 이전과 이후로 달라진다. 오악은 경주평야를 중심으로 한 경주 주변의 산악이었으며, 삼국통일 이후에는 신라의 중앙과 사방의 산악으로 확대되었다. 신라 오악은 신라시대 국가의 제사(祭祀) 대상이 되었던 다섯 산악(山嶽)이다. 산악에 신적인 존재가 거주한다는 믿음으로 산신에 대해서 제사를 지냈다. 삼국통일 이전에는 경주 주변의 토함산, 금강산, 함월산, 선도산, 단석산이었다. 통일 이후에는 국토의 사방과 중앙에 있는 산악으로 확대되어 토함산, 계룡산, 지리산, 태백산, 팔공산으로 변하였다. 통일신라를 상징하는 존재로 동·서·남·북 각 방면의 일정한 정치적 세력을 진압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신라의 국가 제사는 대사·중사·소사로 구분되었는데 신라 오악에 대한 제사는 중사에 해당하였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삼국통일 이전 신라오악은 신라 중심부인 경주평야를 둘러싸고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21, 경주부 산천조에는 토함산(吐含山)을 동악, 금강산(金剛山)을 북악, 함월산(含月山)을 남악, 선도산仙桃山)을 서악이라고 하였고 『삼국사기』 41권, 열전 1, 김유신(상)의 단석산(斷石山)이 중악이었다. 그 뒤 신라 영토가 확대되고 통일을 성취한 뒤인 문무왕 말년 혹은 신문왕대에 국토의 사방과 중앙에 있는 산악으로 변화하였다. 동악은 토함산, 서악은 계룡산(鷄龍山), 남악은 지리산(地理山), 북악은 태백산(太伯山), 중악은 부악[父嶽: 팔공산(八公山)]이다. 신라 오악은 서악인 계룡산 하나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모두가 소백산맥 일대와 그 동남쪽에 있는 산악들로, 대사(大祀) · 중사(中祀) · 소사(小祀)로 구분되어 있는 신라통일기의 국가제사에서 중사에 편입되었다. 오악에 대한 제사는 각 산에 거주한다고 생각한 산신에 대한 제사였다. 3. 경주 단석산 천주사 김유신 장군 추모제 ‘제71회 김유신 장군 추모제’가 2023년 10월 21일 경주시 건천읍 방내리 단석산 천주사에서 열렸다. 대한불교 관음종 제2 교육도량 경주시 단석산 천주사는 천주사 경내에서 ‘제71회 김유신 장군 추모제’를 열었다. 추모제는 신라 삼국 통일의 주역인 김유신 장군의 호국 의지를 받들고, 화랑의 정신과 기상을 이어가기 위해 개최되었다. 추모제에는 홍파 대한불교관음종 9세 종정을 비롯해 도선 천주사 주지, 주낙영 경주시장, 김석기 국민의힘 국회의원, 이철우 경주시의회 의장, 박승직 경북도의원, 김소현(단석산메아리 대외협력위원장) 경주시의원, 불자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한국일보, 2023, 10.22). 추모제는 이루리(2021 미스채선) 아나운서의 사회로 1부와 2부로 나눠 진행됐다. 1부 추도법회에서는 화랑낭도 김유신 장군 위패 이운의식을 시작으로 명종 5타, 삼법공양, 삼귀의례, 반야심경 봉독, 추모제 경과보고, 헌화, 축사, 발원문, 청법가, 사홍서원, 관음종 총무원장의 법문이 이어졌다. 2부에서는 관음무, 가야금병창, 태평무, 스포츠공연, 초대가수 공연 등 문화행사가 열렸다. 도선 천주사 주지 스님은 “김유신 장군께서 6년 동안 수행하신 불선암까지 등산로 공사와 불선바위 동굴 옹달샘 보존은 단석산 김유신 장군의 성역화 사업에 첫 걸음이라 할 수 있다.”며 “2025년 에이펙(APEC) 정상회의를 경주에 유치, 선조들이 물려준 문화유산을 세계에 알릴 수 있도록 모두 함께 희망과 기쁨이 넘치는 그날이 되도록 한마음으로 손잡고 동행하자.”며 합장했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축전을 통해 “단석산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염원한 도량으로 수행의 흔적과 문화적 가치가 높은 곳이라며 김유신 장군의 정신을 알리기 위해 다같이 지역 역사문화에 큰 관심을 갖고 홍보해 지방 정주시대 실현에 함께 노력하자.”고 언급했다. 주낙영 경주시장은 “화랑정신이 살아 숨쉬는 단석산 천주사에서 김유신 추모제가 열린 것에 대해서 매우 뜻깊고, 감사하고 기쁘게 생각한다.”며 “찬란했던 신라 왕조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고 가장 한국적인 전통 문화유산을 갖추고 있는 경주에서 2025 APEC 정상회의가 유치될 수 있도록 100만 서명 운동에 동참을 부탁한다.”고 축사를 했다. 4. 김유신 공이 수도한 불선바위 등산로 정비 경북 경주 단석산(827m) 천주사와 김유신 동굴을 잇는 등산로가 새로 정비했다. 경주시는 건천읍 단석산 천주사와 김유신 동굴(추정)을 잇는 등산로 1.5㎞ 구간 정비 공사를 2023년 11월 20일 마무리했다(매일신문, 2023. 11.20). 단석산은 경주에서 가장 높은 산이자 신라시대 김유신 장군과 화랑들의 수련장으로 알려져 있다. 진달래 군락지 등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산세가 웅장해 등산객이 많이 찾는다. 경주시는 사업비 3억 원을 들여 2023년 6월부터 단석산 등산로 정비 사업을 진행했다. 등산로 입구는 침목계단으로 꾸몄고, 급경사지엔 기존 낡은 계단을 철거한 뒤 방부목 데크와 울타리를 설치했다. 그 밖의 구간엔 불규칙한 노면 정리를 통해 안전사고 예방과 이용객 편의를 꾀했다고 경주시에서 설명했다. 주낙영 경주시장은 “경주를 찾는 등산객이 안전하고 편안한 산행을 즐길 수 있도록 등산로 유지관리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언급했다. 5. 김유신 공 수도처 답사 소감 필자는 지난 4월 8일에 천주사와 김유신 공의 화랑도 시절 수도장인 불선바위를 답사했으며 내친 김에 단석산(827.2m) 정상까지 다녀왔다. 불선바위는 불선암으로도 불린다. 불선바위에는 옆으로 길쭉한 석굴에 석간수가 있어 기도하기에 알맞았다. 천주사에는 김유신 장군 스토리텔링 안내판이 있었으며, 좌선을 했다는 커다란 바위도 삼성각 옆에 있었다. 천주사가 있는 방내리는 꽃이 많아 꽃안, 방내리[芳內里 : 꽃다울 방(芳)]라 불렸다고 전해진다. 꽃다운 화랑도가 수련장인 단석산을 오르내릴 때 방내리를 거쳐갔을 것이다. 필자가 답사하면서 방내리를 살펴보니 복숭아 과수원이 많아 한창 복숭아꽃이 만발하였고, 벚꽃도 피어 아름다웠다. 한편 산으로 둘러싸여 아늑한 마을로 방내리(房內里)라 하였다. 방내리 지명을 꽃다운 화랑도, 꽃이 많은 동네와 연관지어 꽃안 또는 방내리라고 부른 것은 적절한 지명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주사 경내도 복숭아꽃이 화려하게 피었고, 자두나무꽃은 지고 있었다. 지난 2022년 4월 12일 신선사를 거쳐 단석산 정상, 송곳바위 등을 둘러보았는데, 2년 만에 또다시 단석산을 찾았다. 기둥바위는 천주암(天柱巖)으로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다. 천주사에서 단석산 정상까지 3.3km로 원점회귀하는데 4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오후에 답사하며 기온이 올라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등산 시작할 때는 맑은 날씨였으나 저녁이 되면서 날씨가 흐렸다. 천주사에서 김유신 공 수도처인 불선바위까지는 1.1km였으며, 가까운 곳에 기둥바위가 있었다. 등산로는 계단 목제 데크 등으로 잘 정비되어 있었지만 오르막이 심했다. 단석산 정상가는 도중에 송곳바위가 있었다. 낮은 곳은 진달래꽃이 만발했는데 단석산 정상 가까운 곳은 이제 막 피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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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의 화요칼럼 김유신 장군이 세운 사찰 경주 원원사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경주 원원사(慶州 遠願寺)를 세운 인물 사적 제46호, 경주 원원사지는 봉서산 기슭에 있는 통일 신라 시대의 절터이다. 원원사는 안혜(安惠), 낭융(朗融) 등 명랑법사(明朗法師)를 따르던 신인종 승려들과 김유신(金庾信), 김의원(金義元), 김술종(金述宗) 등이 뜻을 모아 국가의 평화를 기원하기 위하여 세웠다고 한다. 명랑법사가 세운 금광사와 더불어 통일 신라 시대 문두루비법의 중심 도량이었다.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은 신라와 고려 시대에 행했던 밀교 의식의 하나이다. 불단을 설치하고 다라니 등을 독송하면 국가의 재난을 물리칠 수 있다는 비법의 신인종이다. 신라의 명랑(明朗)이 중국에서 밀교를 배운 뒤 635년(선덕여왕 4)에 귀국할 때 처음으로 전하였다. 원원사는 호국사찰로 건립되었다. 부처의 공덕으로 나라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고자 건립한 사찰이다. 원원사는 왜적들이 울산의 바다를 통해 침입하여 경주로 향할 때 길목에 해당된다. 원원사는 서라벌의 동남쪽 모화촌(毛火村)에 있는데 근처에 왜병을 막기 위해 쌓은 군사적 요충인 관문(關門)이 있어 사천왕사, 감은사 등과 같이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김유신은 삼국시대 신라의 삼국통일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 장수이다. 595년(진평왕 17)에 태어나 673년(문무왕 13)에 사망했다. 신라에 투항한 가야왕족의 후손으로, 진골 귀족 출신이다. 15세에 화랑이 되어 낭도를 이끌고 고구려·백제와의 전투와 귀족층의 반란 진압에서 공을 세워 중요 인물로 성장했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누이와 결혼한 김춘추가 태종무열왕에 즉위하면서 정치적 위상이 더 높아졌다. 660년 정월에 귀족회의의 수뇌인 상대등이 되었고, 삼국통일 전쟁 과정에서 신라를 이끄는 중추적 구실을 했다. 사후에 흥덕왕이 흥무대왕으로 추봉했다. 김술종(金述宗)은 진골 출신이며 화랑 죽지랑(竹旨郎)의 아버지이다. 『삼국유사』에 술종공은 알천공(閼川公)을 비롯하여 임종공(林宗公)·호림공(虎林公)·염장공(廉長公)·유신공(庾信公)과 함께 신라의 4영지(四靈地)의 하나인 남산 우지암(亏知巖)에서 열린 화백회의에 참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서 회합을 가졌던 대신들의 사회적 신분은 진골이었으며, 상대등(上大等)인 알천공을 의장으로 하는 화백회의의 구성원이었음에 비추어볼 때 그의 정치적 지위는 대등이었다. 김술종은 진덕여왕 때 지금의 춘천 방면을 포함한 영서지방 장관인 우수주군주(牛首州軍主: 후에 삭주도독(朔州都督)이라고 부름)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뒤에 신라의 삼국통일에 지대한 공을 세운 아들 죽지랑을 낳았다. 태종 무열왕 때 안혜(安惠) 등 승려 4명 및 김유신(金庾信) 등과 함께 원원사(遠源寺)를 창건하였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귀족이었던 김의원의 정확한 신상은 알려져 있지 않다. 2. 명랑법사와 문두루비법 삼국유사 제5권 신주 제6(三國遺事 卷第五 神呪 第六)에 명랑법사의 신인종(明朗神印)이 나온다. 「금광사본기(金光寺本記)」를 살펴보면 이러한 기록이 있다. “법사가 신라에서 태어나서 당나라로 들어와 도를 배우고 돌아오는 길에, 바다 용의 청에 따라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전하고 황금 1,000냥[1,000근이라고도 한다.]을 시주 받아 땅 밑으로 몰래 와서 자기 집 우물 밑에서 솟아나왔다. 자기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었고 용왕이 시주한 황금으로 탑과 불상을 장식하자 광채가 유달리 특이하였다. 그래서 절을 금광사(金光寺)라 하였다.”[『승전(僧傳)』에서는 금우사(金羽寺)라 했지만 잘못된 것이다.] 법사의 이름은 명랑(明朗)이고 자는 국육(國育)이며, 신라의 사간(沙干) 재량(才良)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남간부인(南澗夫人)인데 법승랑(法乘娘)이라고도 하며 소판(蘇判) 무림(茂林)의 딸 김씨이니, 즉 자장(慈藏)의 누이동생이다. 재량에게는 아들 셋이 있었는데, 맏아들은 국교대덕(國敎大德)이고 다음은 의안대덕(義安大德)이며 법사는 막내아들이다. 처음에 어머니가 꿈에 푸른색 구슬을 삼키고 임신을 하였다. 선덕왕(善德王) 원년(서기 632)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정관(貞觀) 9년 을미(서기 635)에 돌아왔다. 총장(總章) 원년 무진(서기 668)에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이 대군을 거느리고 신라군과 합세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 후 남은 군사가 백제에 머물면서 신라를 습격해 멸망시키려고 하였다. 신라 사람들이 이를 알아채고 군사를 내어 막았다. 당나라 고종이 이 말을 듣고는 크게 화를 내며 설방(薛邦)에게 명하여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문무왕이 이 소식을 듣고 걱정하며 법사를 청해 비법으로 이들을 물리치게 하였다. [이 일은 「문무왕전(文武王傳)」에 실려 있다.] 이 일로 인해 명랑은 신인종(神印宗)의 시조가 되었다. 또 신라 서울 동남쪽 20여 리에 원원사(遠源寺)가 있는데, 세상에서는 이렇게 전하였다. “안혜(安惠) 등 네 대덕이 김유신(金庾信)ㆍ김의원(金義元)ㆍ김술종(金述宗) 등과 함께 발원하여 창건한 것이다. 네 대덕의 유골은 모두 절의 동쪽 봉우리에 묻었다. 그래서 사령산(四靈山) 조사암(祖師嵓)이라고 한다.” 그러한즉 네 대덕은 모두 신라 시대의 고승이었다. 문무왕 때 당나라 군사가 신라를 침략하게 되자 왕은 명랑에게 적을 물리칠 수 있는 비방을 물었다. 이에 명랑은 낭산(狼山)의 남쪽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우고 도량을 열 것을 제의하였는데, 시간이 급박하였으므로 채백(彩帛)으로 가건물을 짓고 5방(方)에 신상(神像)을 세운 뒤 유가명승(瑜伽明僧) 12인과 함께 문두루비법을 썼다. 그때 당군과 신라군이 아직 접전하기도 전에 바람과 물결이 사납게 일어나 당나라 배가 모두 물에 침몰하였다고 한다. 문두루는 범어 무드라(mudra)의 음사(音寫)로 신인(神印)으로 번역된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절터에는 금당 터와 2기의 삼층석탑, 석등, 그리고 부도가 남아 있다. 2기의 삼층석탑은 1931년에 복원한 것으로 규모와 형태가 동일하다. 석탑 사이에 석등이 있고, 4기의 부도가 절터의 동쪽과 서쪽 계곡에 나뉘어져 있는데, 부도는 모두 고려 시대 이후의 것으로 보인다. 3. 경주 원원사지(慶州 遠願寺址) 동서 삼층석탑(東西 三層石塔) 문하재청은 경북 경주시 와동읍 모화리 산8-2번지에 위치한 사적 제46호 경주 원원사지(慶州 遠願寺址)내의 높이 7m의 삼층석탑을 2005년 4월 7일 보물 제1429호로 지정하였다. 경주 원원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금당 터 앞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31년 가을 경주고적보존회가 복원한 것이다. 두 탑 모두 2층 바닥돌 네 면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1층 몸돌 네 면에 사천왕상을 새겼다. 십이지신상은 북쪽 중앙에 있는 쥐를 시작으로 한 면에 3구씩 새겨져 있는데, 연꽃 위에 앉아 평복을 입고 손을 모은 자세이다. 사천왕상은 동탑 남방의 증장천왕이 하체 일부만 남았고, 서탑 남방의 증장천왕은 없어졌다. 원원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일반적인 양식의 신라 석탑 가운데 부조상을 새긴 가장 이른 시기의 탑으로 알려져 있다. 동ㆍ서 삼층석탑(높이 약 7m)은 도괴되어 있던 것을 1931년 가을(조선건축사론 중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시대 일반형 삼층석탑론(건축잡지 1933.11월호. 藤島亥治郞)에 경주고적보존회에서 복원하였다. 두 탑은 같은 구조와 양식으로 조성된 2중 기단의 삼층석탑이며, 하층기단 면석과 갑석 및 상층기단 면석은 각각 8매, 상층기단 갑석은 4매로 구성되어 있다. 상·하층기단의 면석에는 2개의 탱주와 우주가 있고, 하층갑석의 상면에는 2단의 상층 기단 괴임이 있으며, 상층갑석 4면의 각 기둥 사이에는 연화좌 위에 앉아 있는 십이지상을 조각하였는데 이들의 머리는 짐승이나, 몸체는 평복을 입은 사람의 모습이며 옷자락이 하늘로 날리고 있는 형상이다. 1층 탑신석 이상 3층 옥개석까지는 모두 1매석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1층 탑신에는 우주가 있고, 4면에는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각 층 옥개석의 하면에는 5단의 옥개받침이 있고 상면에는 각형 2단의 탑신 괴임이 있으며 상륜부는 노반석과 앙화석이 남아 있다. 경주 원원사지 동ㆍ서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일반적 표현형식, 옥개석의 돌다듬기 수법, 기단부와 탑신부에 구현된 양식, 석재의 조립방법 등으로 보아 8세기 중엽에 조성된 석탑으로 추정되며, 하층기단에서 십이지상을 최초로 배치한 점 등 석탑의 조각기술, 구조적 특징, 표현양식 등을 고려할 때 학술적, 미술사적 중요한 가치를 지닌 석탑으로 평가되고 있다(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경주 원원사지를 지난 3월 23일, 4월 2일 두 차례에 걸쳐 답사하였다. 3월 23일 오후 늦게 답사하여 원원사지는 둘러보았으나 부도는 원원사지 서쪽 계곡을 다니며 찾아보았으나 안내 표지판이 없어 답사에 실패하였다. 여러 곳을 다니다 보니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여 포기하였다. 4월 2일에는 오후 이른 시간에 도착하여 원원사지를 천천히 둘러보고 동서 삼층석탑의 사천왕상과 십이지신상을 사지 찍었다. 동서 두 곳의 부도를 찾기 위하여 먼저 서쪽의 부도 쪽으로 계곡을 답사하면서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 간신히 발견하였다. 멋진 부도가 있었으나 안내판은 없었다. 그후 동 부도를 찾기 위하여 절의 동쪽으로 갔지만 역시 안내 표지판은 없었다. 나무를 심은 수목원을 지나 낮은 곳으로 내려가 석조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계곡을 건너 임도로 올라가 드디어 동 부도를 답사하였다. 작은 암자에 태극기가 걸려 있었고, 커다란 동 부도가 있어 반가웠지만 안내판은 없었다. 날이 더워 땀을 흘리며 돌아다녔다. 원원사지 가는 7번 국도의 교통 체증은 매우 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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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화랑도 수련장 호국사찰 울산 신흥사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의병 활동의 본거지 울산 신흥사 신흥사는 울산광역시 북구 대안4길 280(대안동) 동대산 자락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통도사의 말사이다. 명랑대사가 신라 635년(선덕여왕 4)에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며, 창건 당시의 이름은 나라의 태평과 백성의 평안을 위한다는 뜻인 건흥사(建興寺)였다고 한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신흥사 위쪽 기박산성을 중심으로 울산의병이 일어났는데, 당시에 신흥사 주지였던 지운 스님이 왜군의 침략에 맞서 승병 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던 호국사찰이다. 이후 1597년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사찰이 소실되었으나, 1646년(인조 24)에 나라의 지원을 받아 경상좌병영 병마절도사 이급(李伋)에 의해 재건되었으며, 그로부터 3년 뒤인 1649년에는 현재 대웅전에 모셔진 석조아미타여래좌상이 조성되었다. 뒤이어 1686년(숙종 12)과 1752년(영조 28)에 각각 도량을 중창하였는데, 대웅전 맞은편 신성(神成樓)에 병마절도사 이상국(李相國)이 1757년에 쓴 현판 글씨가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뒤에도 사찰 재건이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872년에 그려진 신흥산성도(新興山城圖)에서는 신흥사와 더불어 부속 암자인 낙서암(樂西庵), 염불암 (念佛庵), 내원암(內院庵)을 함께 볼 수 있는데 이로써 국가 호국사찰로서의 규모와 군사지정학적 중요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1998년에는 현재의 대웅전을 새로 지으면서 원래 대웅전으로 쓰이던 건물은 왼쪽으로 옮기고 이름을 응진전으로 바꾸었으며, 신성루, 삼성각, 적묵당 등이 자리하고 있다. 원래 신흥사의 규모는 16만 5,289㎡에 이를 정도로 매우 넓었으며,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사찰 주변 약 39㎢를 소유하였다. 1998년 신축한 대웅전을 중심으로 응진전, 삼성각, 만세루, 적묵당 등의 당우(절의 건물)가 있다(울산디지털 문화대전). 2. 보물 석조아미타여래좌상 ‘울산 신흥사 석조아미타여래좌상’은 신흥사 대웅전에 봉안된 대세지-관음보살좌상으로 구성된 아미타삼존상 중 본존상에 해당하는 것으로, 재질은 불석(拂石, 규산염의 일종으로 흰색의 광물)이다. 문화재청에서 2021년 12월 22일 보물로 지정하였다. 이 불상은 발원문에 1649년 불석의 산지였던 어천(현재 포항 오천읍)에서 돌을 채석해 조성하고 배를 이용해 신흥사까지 옮겨온 사실이 밝혀져 있어 당시 불석 불상의 제작지와 이동 경로를 구체적으로 밝힌 첫 번째 사례이다. 신흥사 석조아미타여래좌상은 17세기 전반기 전국에 걸쳐 활동한 조각승 영색(英賾; 英頤)이 경상도 지역에서 불석이라는 재료를 사용해 만든 현재까지 알려진 유일한 기년명 불상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조각승 영색은 ‘英賾’(영색) 또는 ‘英頤’(영이)라고도 쓰며, 신흥사 불상은 양주 회암사 불상 다음으로 그가 수조각승이 되어 두 번째로 제작한 불상이다. 본존인 아미타여래좌상은 짧은 목에 머리를 약간 숙인 결가부좌의 자세를 하고 있으며, 짧은 상반신에 비해 다리 간격이 넓고 무릎이 높은 편이어서 하체의 무게감이 느껴진다. 비교적 넓적한 얼굴과 긴 눈썹, 작고 오뚝한 코, 눈꼬리가 올라간 긴 눈, 깊게 팬 입술 가장자리와 볼록하게 올라온 턱에서 온화하면서도 개성 있는 인상이 느껴진다. ‘울산 신흥사 석조아미타여래좌상’은 1649년이라는 명확한 제작 시기, 영색이라는 수조각승, 아미타불상이라는 존명 등을 바탕으로 17세기 중엽경 불상 조성의 기준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재료의 산지(山地)와 이운 과정을 발원문을 통해 알 수 있다. 불상 자체와 복장 유물인 발원문 1점, 후령통 1점, 직물 7점, 보석류 1점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되었다. 후령통(候鈴筒)은 불상이나 불화 등을 조성할 때, 금, 은, 칠보 등을 담는 복장(腹藏)을 넣는 통이다(문화재청). 3. 화랑도 전통무예의 성지 울산, 신흥사 울산지역에서 화랑도의 전통무예를 되살리기 위한 세미나가 개최되었다. 신라 화랑무예 등 전통무예 활성화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간담회가 30일 울산광역시 울주군의회 김상용 의원(행정복지위원장) 주관으로 의사당 1층 세미나실에서 열렸다(울산종합일보, 2023. 3.30). 간담회는 정우식 의원(경제건설위원장)과 이상우 의원, 진병석 울주군 문화체육과장, 전통무예 화랑도 진흥원 김부기 원장과 윤돈규 회장, 최영길 전 태권도 협회 고문, 김민호 영산대 동양무예학과 교수, 울산학춤보존회 김성수 고문 등 지역 전통무예 및 문화계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화랑도 진흥원장의 상 무예의 고장 울산, 화랑도 수련장 울주 등 신라 화랑무예와 지역의 연관성 설명으로 시작된 간담회에서 참석자들은 울주군 전통무예 지정 및 관련 조례 제정 등 활성화 방안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나눴다. 울산광역시 전통무예 지정을 위한 화랑 무예 예술단 오디션 행사가 열렸다(시사우리신문, 2023.3.1). 화랑도 예술단은 3월 1일 시청 옆 JIB엔터테이먼트에서 오디션 행사를 개최하였다. 전통무예의 고장 울산은 옛날부터 신라의 수도 경주를 방어하는 수도방위 사령부 역할을 담당하였다. 울산은 상무예 고장으로 무예를 숭상하는 지역이다. 울산지역의 울주군 언양읍 천전리, 울산광역시 북구 신흥사 등은 화랑도의 수련지로 알려졌다. 필자는 지난 3월 22일 울산 신흥사를 답사하면서 기박산성, 전시관 등을 둘러보았다. 기박령은 도로 오르막 경사가 심하였으며, 기박령에서 신흥사로 내려가는 길은 니리막이 심하였다. 신흥사에 울산 정자해변은 가까웠으며, 신라시대 이래로 왜구가 경주로 침범할 때 자주 이용하던 침투로였다. 이 길목에 있는 신흥사는 자연스럽게 호국사찰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신흥사 스님들이 의병장으로 활약하고 군량미도 조달하였다. 필자는 신라시대 화랑도의 수련지로 알려진 천전리 각석은 3월 20일과 21일 답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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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김유신 장군을 모신 숭무전과 흥무공원1. 숭무전(崇武殿) 숭무전(崇武殿)은 경상북도 경주시 충효동 314번지에 있다. 숭무전은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흥무대왕(興武大王) 김유신(金庾信, 595~673) 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드리는 제전(祭殿)이다. 김유신은 가야국(伽倻國)시조 김수로왕(金首露王)의 13세손으로 신라 진평왕(眞平王 17년, 595년) 때 만노군(萬弩郡,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 태수 김서현(金舒玄)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5세에 화랑이 되어 진평왕 51년(629) 낭비성(娘臂城)에서 고구려군에게 처음 승리한 이후 백제, 고구려군과 여러 차례 싸워 큰 공을 세웠다. 안으로는 상대등 비담(毗曇)의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진덕여왕 8년(654)에는 김춘추(金春秋)를 태종무열왕으로 옹립하였다. 태종무열왕 7년(660)에는 백제를 병합하고 문무왕 8년(668)에는 고구려를 통합하여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이에 나라에서는 신라 최고의 관직인 태대각간(太大角干)을 제수하였고, 문무왕 13년(673) 79세로 세상을 떠나자 금산원에 장사지냈으며 그 뒤 흥덕왕 10년(835)에 흥무대왕으로 추봉하였다. 1992년에 전각을, 1993년에는 부속건물을 세워 지금의 모습으로 갖추었다. 편액의 글씨는 김대중(金大中)(1924~2009) 전 대통령이 썼다. 2. 흥무공원 경주시는 충효동 산 7-1번지 일원의 7,500여 평의 부지에 주민편의시설을 갖춘 근린공원을 조성하고 2005년 10월 19일 지역주민 등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식을 거행했다. 흥무근린공원은 2004년 11월 16일 공사에 착공하여 국비 20억 원, 경주시비 1억 원 등 21억 원을 투입하였다. 기반시설, 화장실 1동, 주차장, 가로등을 설치하고, 수목 및 초화류 2만 4천 본을 심었다. 공원 이름을 흥무공원으로 명명하였다. 흥무근린공원은 경주시청 산림과 주관으로 다인산업개발(주), ㈜태호, 강산조경(주), ㈜이주산업개발, 미광계전 등의 업체가 공사에 참여하였다. 넓은 잔디밭이 있고, 시원한 나무 그늘이 많은 공원으로, 주차장과 화장실 등 편의 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피크닉 명소로 인기를 끌고 있다. 봄에는 공원 앞 도로 ‘흥무로 벚꽃길’에서 아름다운 벚꽃을 감상할 수 있고, 가을에는 은빛 물결로 살랑거리는 억새밭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기 좋아 여행객들이 많이 방문한다. 공원 옆길을 따라 걷다 보면 ‘센과 치히로 통로’라 불리는 작은 굴다리를 통해 맛집 ‘금산재 칼국수 집으로 갈 수 있다. 흥무공원 바로 위에는 또 김유신 장군 영정, 위패가 모셔진 숭무전, 재실인 금산재가 있다. 흥무공원에서 철길 지하통로를 지나면 더 넓은 잔디밭이 전개된다. 이곳 나무 그늘도 피크닉하기 좋다. 피크닉과 함께 등산을 즐기고 싶다면 인근에 야산과 같은 송화산 쉼터도 있다. 짧은 거리의 산행도 가능한 곳이 흥무공원이다. 3. 흥무대왕(興武大王) 어록비(語錄碑) 知成功之不易念守成之亦難(지성공지불이념수성지역난) 성공하기도 쉽지 않지만 수성 또한 어렵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어록비음기(語錄碑陰記) 송화산(松花山) 금산원(金山原)에 흥무대왕(興武大王) 김유신(金庾信) 장군의 천년 유택이 자리하고 있으며 신라에서는 능하의 송화방(松花坊)에 원찰인 금산사(金山寺)를 국가에서 세워 해마다 나라에서 향사를 주관하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조선조 이곳에 금산재(金山齋)ᅩ를 세워 향화를 이어오다가 근년에 숭무전(崇武殿)으로 높여 유림(儒林)과 전국에서 모여든 후손으로 춘추향사를 봉향하고 있다. 숭무전 아래 공원 조성이 논의되어 오던 중 가락중앙종친회 김봉호(金琫鎬) 회장의 노력으로 예산 21억 원이 확보됨으로써 경주시장 백상승(白相承)의 주관하에 9,000여평의 부지에 공원을 조성하고 2005년 10월 19일 준공식과 함께 흥무공원(興武公園)으로 명명하였다. 유서 깊은 이곳 산록에는 대왕의 화랑정신(花郎精神)이 스며있는 곳, 만인들이 찾아와 대왕의 위훈을 숭모하고 산책하며 심신을 단련하는 공원으로 자리잡고 있다. 智•德•勇을 겸비한 대왕은 나가서는 양장(良將)이요, 들어와서는 현상(賢相)으로 많은 유훈을 남겼는데 그 중 “창업에 성공하기도 쉽지 않지만 경영 또한 어렵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는 1300여년 전의 말씀은 만고불변의 진리로 오늘날 국가나 기업을 경영하는 지도자들은 명심해야할 교훈이기에 語録碑에 새겨 귀감으로 삼고저 한다. 이 어록비는 가락중앙종무위원회에서 세우다. 가락기원 1965년 서기 2006년 4월 일 세움 4. 송화방지(松花坊址), 연리지(連理枝) 송화방지(松花坊址)는 김유신 장군 가문 원찰 터 자리라고 전해져오는 곳에 세운 비석이다. 김유신 장군이 돌아가신 후 재매부인이 여기에 절을 짓고 출가하여 송화방이라고 이름 지어 김씨 가문의 원찰로 삼아 장군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송화방지 비석 옆에 수령이 100년쯤 되는 팽나무 연리지 한 그루가 있다. 이곳은 한반도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신라 김유신 장군의 정기가 서려 있는 유서 깊은 곳으로 여기에 있는 100여 년 팽나무 연리지는 더욱 뜻이 깊다. 나라의 경사, 부모에 대한 효심, 친구간의 우정, 부부간의 애정 등을 상징한다고 여겨 옛 문헌에도 귀하고 경사스러운 일이라 전해온다. 이 나무는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나무라고 안내판에 적혀 있다. 왼쪽으로 돌면 아들을 낳게 해주고, 오른쪽으로 돌면 딸을 낳게 해준다고 한다. 그리고 남녀가 손을 잡고 같이 돌면 사랑의 묘약이 되어 백년해로하게 된다고 한다. 5. 금산재 칼국수 금산재(金山齋)는 김유신 장군의 제사를 모시는 재실이다. 금산재를 관리하는 관리사가 옆에 있다. 숭무전, 금산재를 관리하는 후손이 칼국수 집을 운영하고 있다. 이 식당은 맛집으로 소문나 있어 김유신 장군 묘소, 흥무공원, 숭무전, 금산재를 답사하는 많은 관광객이 찾아와 식사하고 있다. 금산재 관리인이 운영하는 식당을 가는 길은 흥무공원에 주차를 하고 걸어가면 된다. 두 번째 길은 김유신 장군 묘소에 주차를 하고, 숭무전으로 연결되는 산책로를 따라 금산재로 걸어가면 된다. 흥무공원은 경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승용차로 5분여 거리에 있는 근린공원이다. 흥무공원은 나들이하기 좋은 경주의 여행지로 많은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다. 금산재 칼국수 식당으로 가기 위해서는 흥무공원 넓은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철책을 따라 일직선으로 쭉 가다 보면 작고 좁은 지하통로가 보인다. 철로 밑으로 난 지하통로이다. 얼핏 보면 어두컴컴하다. 비가 오거나 흐린 날이면 처음 지나가는 사람들은 섬뜩함도 느낀다. ‘공포의 터널’로 알려져 있다. 지하 통로 위로는 동해남부선 철로가 지나간다. 오후 늦게 지하 통로를 지나다 보면 산속에서 내려오는 물소리까지 더해 으스스한 느낌마저 드는 곳이다. 저녁에는 조명이 켜지지만 지나가기가 껄끄러운 곳이다. 그러나 요즘 MZ 세대들에게는 사진 찍기 좋은 명소로 소문나 인기 포토존이다.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인생 사진을 찍기 위해 몰려들고 있다. 지하 통로 앞에서 사진을 찍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2002년 개봉한 애니메이션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영화를 봐야 한다. 일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극장 애니메이션 영화이다. 일본에서 2001년에 개봉하고, 국내에는 2002년에 개봉했다. 영화에 나오는 낯선 터널 같은 수상한 공간이 바로 여기 지하 통로의 모습과 비슷하다. 영화에는 수상한 터널을 통과하면 금지된 신들의 세계가 펼쳐지는데, 흥무공원 지하 통로를 지나면 초록의 잔디가 깔린 아름다운 모습의 풍광이 펼쳐진다. 김유신 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배향을 하는 사당인 숭무전과 부속 건물인 금산교육관, 금산재가 눈 앞에 펼쳐진다. 영화의 한 장면과 비슷하다. 영화를 즐겨 보던 MZ 세대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애니메이션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주인공 치히로의 부모는 수상한 터널을 지나 신들의 음식을 먹은 뒤 돼지로 변한다. 그러나 흥무공원 지하 통로를 지나면 맛있는 금산재 칼국수 집이 나온다. 고택의 정취가 느껴지는 금산재 칼국숫집은 금산재를 관리하는 건물이다. 식당 메뉴는 칼국수, 들깨 칼국수, 부추전, 수육이 있다. 손님들이 적을 때는 한옥 고택 대청마루에 앉아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 칼국수의 맛을 볼 수 있다. 손님들이 많을 때는 야외 천막에서 식사할 수 있다. 식당이 잠시 쉬는 시간은 오후 3시부터 4시까지 1시간이다. 이 시간에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해 관리사 바로 옆 잔디가 깔린 금산재 대청마루에서 휴식을 취하도록 배려를 하고 있다. 요즘 핫한 곳인 지하 터널도 구경하고, 연리지 나무 한바퀴 돌고, 흥무공원 산책 후 칼국수로 식사하면 좋다. 필자는 2월 15일에 김유신 장군 묘소를 참배하고, 임신서기석을 최초로 발견한 석당 최남주 선생을 기리는 석당공원을 답사하고, 흥무공원을 구경한 후 금산재, 숭무전을 둘러보았다. 숭무전은 출입할 수 없어 담장 바깥에서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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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미추왕릉 죽엽군과 김유신 장군 혼령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미추이사금(미추왕) 즉위 미추이사금(262년~284년)이 즉위하다(262년 01월).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三國遺事 卷第一 紀異 第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미추 이사금(味鄒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또는 미조(味照)라고도 하였다.]. 성은 김씨이다. 어머니는 박씨로 갈문왕 이칠(伊柒)의 딸이다. 왕비는 석씨 광명부인(光明夫人)으로 조분왕(助賁王)의 딸이다. 그의 선조 알지(閼智)는 계림에서 태어났는데 탈해왕(脫解王)이 데려다가 궁중에서 길러 후에 대보(大輔)로 삼았다. 알지는 세한(勢漢)을 낳고 세한은 아도(阿道)를 낳았으며,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보(郁甫)를 낳았다. 그리고 욱보는 구도(仇道)를 낳았는데 구도가 곧 미추왕의 아버지이다. 첨해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미추를 임금으로 세웠다. 이것이 김씨가 나라를 다스리는 시초가 된다. 23년(서기 284) 봄 2월, 나라 서쪽의 여러 성을 두루 돌며 위로하였다. 겨울 10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대릉(大陵)[또는 죽장릉(竹長陵)이라고도 한다.]에 장사 지냈다. 2. 미추왕릉과 죽엽군(竹葉軍) 유리왕대 이서국 사람들이 침략하자 미추왕릉에서 죽엽군이 나와 물리치다. 제14대 유리왕(儒理王) 대에 이서국(伊西國) 사람들이 와서 금성(金城)을 공격하였다. 현재의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에 있던 소국으로, 『삼국유사』 권1 기이1 노례왕조의 기록에 따르면, 유리왕 19년(서기 42)에 신라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한다. 금성은 신라 초기의 궁으로서, 혁거세거서간 21년(서기전 37)에 축조되었으며, 그에 관한 기록이 소지마립간 22년(500)까지 나온다. 우리가 크게 막으려 했으나 오랫동안 견딜 수 없었다. 홀연히 이상한 병사가 있어 와서 도와주었는데 모두 댓잎[竹葉]을 귀에 꽂고 있었다. 우리 병사와 힘을 합쳐 적병을 공격해 격파했다. 적군이 물러간 후에 [이상한 병사들이] 돌아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다만 대나무의 잎이 미추왕의 능 앞에 쌓여있음을 보고 그때서야 선왕에 의한 음덕의 공이 있었음을 알았는데, 이로 인하여 죽현릉(竹現陵)이라 하였다. 3. 김유신 장군과 미추왕 혼령의 대화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第一) 혜공왕대 유신공이 원통함을 미추왕에게 호소하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오래 지나 제36대 혜공왕(惠恭王) 대인 대력(大曆) 14년 기미(己未) 4월에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유신공(庾信公)의 무덤에서 일어났다. 그 속에 한 사람이 준마를 타고 있었는데 모습이 장군과 같았다. 또한 갑주를 입고 무기를 든 40여 명의 군사가 뒤를 따라와서 죽현릉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에 능 속에서 우는 소리 혹은 호소하는 듯한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 호소하는 말에, “신은 평생에 난국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한 공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혼백이 되어 나라를 진호하여 재앙을 없애고, 환란을 구제하는 마음을 잠시도 가벼이 하거나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난 경술년(770)에 신의 자손이 죄도 없이 죽음을 당하였으니 군신들이 저의 공훈을 생각지 않습니다. 신은 다른 곳으로 멀리 가서 다시는 힘쓰지 않으려니 왕께서 허락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대답하여 이르기를 “오직 나와 공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이오. 공은 전과 같이 노력해 주시오.” 하였다. [유신공이] 세 번 청하였으나 [미추왕은] 세 번 모두 허락하지 않았고, 회오리바람은 이내 돌아갔다. 혜공왕이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바로 상신 김경신(金敬信)을 보내어 김공의 능에 가서 사죄하고 공을 위하여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을 취선사(鷲仙寺)에 내리어 명복을 빌게 하였다. 이 절은 김공이 평양을 토벌한 후 복을 빌기 위해 세운 곳이기 때문이다. 미추왕의 혼령이 아니었더라면 김유신 공의 노여움을 막지 못했을 것인즉, 왕이 국가를 보호하려는 노력이 크지 않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라의 사람들이 그 덕을 기리며 삼산(三山)과 함께 제사 지내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서열을 오릉(五陵) 위에 두어 대묘(大廟)라고 불렀다. 필자는 경주에 있는 미추왕릉을 2월 7일에 방문하였다. 날씨가 영하로 떨어져 쌀쌀하여 사진 찍을 때 손이 시렸다. 경주 대릉원 내에 있는 미추왕릉을 답사하며 삼국유사에 나오는 죽엽군(竹葉軍)을 연상하면서 왕릉 옆의 대나무도 사진 찍었다. 넓은 대릉원을 구경하고 천마총 앞에까지 갔지만 오후 늦은 시간이라 관람은 하지 않았다. 대신 대릉원 영상관을 둘러보았다. 미추왕릉의 남쪽에 숭혜전이 있어 해마다 제향을 받들고 있다. 외형은 둥근 봉토분이며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다른 무덤과 마찬가지로 돌무지덧널무덤일 가능성이 있다. 청도의 이서국이 금성을 공격해오자 대나무 잎을 귀에 꽂은 병사들이 홀연히 나타나 나라를 구하고 왕릉 속으로 사라졌다고 하여 죽장릉(竹長陵) 혹은 죽현릉(竹現陵)으로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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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화랑도의 수련지 경주 금장대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화랑도의 기원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 진흥왕 조에 보면 화랑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진흥왕은 처음에는 미녀를 뽑아 원화 제도를 도입하였다. 두 여성의 질투로 제도를 폐지하게 되었고, 나중에 잘 생긴 남자를 선정하여 곱게 꾸며 화랑이라고 하였다. 37년(서기 576) 봄, 처음으로 원화(源花, 화랑의 전신)를 받들었다. 일찍이 임금과 신하들이 인재를 알아볼 방법이 없어 걱정하다가, 사람들 여럿을 모아 함께 놀게 하고 그들의 행동거지를 살펴본 후 천거하여 쓰고자 하였다. 마침내 두 미녀를 뽑았으니 하나는 남모(南毛), 하나는 준정(俊貞)이었다. 3백여 명의 무리가 모여들었다. 그런데 두 여인이 아름다움을 서로 질투하다가,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에 유인하여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하고는 끌고 가서 강물에 던져 죽였다. 준정은 사형에 처해졌으며, 무리들은 화목을 잃어 흩어지고 말았다. 그 후에 다시 잘생긴 남자를 택하여 곱게 꾸며 ‘화랑(花郞)’이라 이름 짓고 그들을 받드니, 무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도의를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 서로 즐겼는데, 산과 물을 찾아 노닐고 즐김에 멀더라도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그 사람됨의 악함과 바름을 알게 되어, 선량한 이를 택하여 조정에 천거하였다. 김대문(金大問)은 『화랑세기(花郞世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질고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이로부터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로부터 생겼다.” 최치원은 「난랑비(鸞郞碑)」 서문(序文)에서 말하였다. “우리나라에 현묘(玄妙)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 가르침의 근원에 대해서는 선사(仙史)에 자세히 밝혀져 있거니와, 실로 이는 유불선 삼교(三敎)를 포괄하여 뭇 백성들을 교화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집에 들어와서는 효를 행하고 밖에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함은 노나라 사구(司寇, 공자)의 가르침이고, 억지로 하는 일을 하지 않고 말없는 가르침을 실천함은 주나라 주사(柱史, 노자)의 뜻이며, 모든 악행을 하지 않고 모든 선행을 하라 함은 축건태자(竺乾太子, 석가모니)의 교화이다.” 당나라 영호징(令狐澄)은 『신라국기(新羅國記)』에서 말하였다. “귀족의 자제 중 아름다운 이를 택하여 화장을 시키고 곱게 꾸며서 이름을 화랑(花郞)이라 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들을 높이 받들어 섬겼다.” 2. 금장대 (1) 금장대는 신라팔괴의 하나 금장대는 형산강과 경주 시가지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아름다운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곳은 경치가 빼어나 경주의 하늘을 지나가는 모든 기러기들이 반드시 쉬어간다[金藏(丈)落雁]는 경주 삼기팔괴(三奇八怪)의 장소 중 한 곳이다. 금장대 아래 형산강의 본류인 서천과 북천이 만들어낸 예기청소(藝妓淸沼)는 경주가 고향인 소설가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巫女圖)’ 의 배경이 되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신라 자비왕 때 한 여인이 왕과 연회를 즐기는 도중에 실수로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며, 조선시대 시인묵객들이 자연의 아름답고 영원함과 유한한 인간의 삶, 과거를 통해 오늘을 경계하며 시를 읊조리던 공간이었다. 또 임진왜란 때 경주성(慶州城) 수복 정찰기지 역할을 하였고, 왜군들이 물러났을 때 승리의 기쁨을 노래하던 곳이기도 하다. 선사시대 경주인들의 주술적 기원을 담고 있는 얼굴, 동물 등 다양한 문양이 새겨진 암각화(岩刻畵)도 발견되었다. 맑고 탁 트이고 우뚝한 금장대[금장청광(金藏淸曠)]는 형산강의 대표적인 절경(絶景)으로 형산강팔경(2016)에 선정되었고, 석장동 암각화는 경상북도 기념물 (1994)로 지정 보전되고 있다. 금장대는 신라 팔괴의 하나이다. 금장대는 화랑도의 수련지였으며, 화랑이 하늘에 맹세한 곳이었다. 임신서기석이 금장대 인근에 있는 석장사지 근처 천수답 논에서 발견되었다. 임신서기석의 임신년은 550년, 612년이라는 주장이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이용현 씨는 ‘임신서기석의 문체와 연대의 재고찰’이라는 논문에서 임신서기석 연대가 문체 분석을 통해 552년임을 입증했다. 그동안 임신서기의 연대는 612년설이 주류로 인식돼왔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임신서기석은 신라시대 젊은이 두 사람이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충성을 다바칠 것과, 유교경전을 3년 안에 습득할 것을 맹서한 것으로, 임신년 연대에 대해서는 그간 정해진 의견이 없었다.”며 “간지(干支) 연대가 60년마다 반복되는 데다가 결정적인 자료가 결여됐던 탓에 유교 경전이 신라 사회에서 학습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정황을 기준으로 732년, 612년, 552년 등 다양한 의견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용현 학예연구사는 논고에서는 ‘맹서하기를 … 라고 맹서한다’라는 서술어 반복 문체가 6세기대 신라 금석문에 보이는 것을 근거로 임신년의 연대를 552년으로 특정했다.”며 “이번 연구를 계기로 임신서기석이 국어학에서 이두 발전 연구의 기준 연대를 새롭게 제시할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뉴스1, 2017, 1.24). 김유신은 화랑 3년째인 612년 열박산(울산광역시 울주군 두서면 내와리 백운산)에 들어가 하늘에 빌었다. 15살 때부터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를 거느렸으며, 17세 때에는 외적을 물리치기 위에 홀로 중악(中嶽) 석굴에 들어가 빌었더니 산신이 나타나 방술(方術)을 전해 주고는 오색찬란한 빛을 남긴 뒤 모습을 감쳤다. 18살에는 열박산(咽薄山) 골짜기에 들어가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리자 빛이 내려와 보검에 실리고 칼이 스스로 움직이는 듯했다. (2) 형산강팔경(兄山江八景), 경주 8색 형산강(江)은 경주시 서면 도리 인내산(忍耐山)에서 발원(최장 63.9km)하여 천년 신라의 역사, 문화와 근대 산업 정신을 품고 있다. 형산강 유역의 경주시와 포항시, 그리고 경상북도는 상생 발전 협력을 위하여 형산강 프로젝트를 추진하였고, 그 사업의 일환으로 2016년 2월 형산강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경관지 8경을 선정하였다. 영일대(迎日臺), 포항운하(浦項運河), 부조정(扶助亭), 양동마을(良洞마을), 보문 물너울교(普門 물너울橋), 금장대(金藏臺), 월정교(月精橋), 삼릉솔숲(三陵솔숲). ‘경주 8색’으로 꾸미는 야간경관 개선사업, 경주 8색은 화랑 적색, 불국 홍색, 서라벌 황색, 남산 녹색, 동해 청색, 첨성 자색, 금관 금색, 삼국흑색. (3) 제78차 국제펜대회 금장대를 찾아주신 모든 분들에게 이곳에서 함께 나눈 시낭송회가 영원히 기억되길 바라면서 2012. 9. 12 제78차 국제펜대회 금장대 시낭송회 개최 기념 금장대藏에서 권위 Gwon Wi(權暲, 1552-1630) 동도의 전한 자취 찾아 두루 돌아왔지만 고요한 하늘에 새도 지나지 않는구나 오직 금장대 아래로 흐르는 물이 있어 봄바람에 오히려 옛 연기 물결 띠 되어 흐르네 3. 신라 삼보, 삼기 팔괴 삼보(三寶)는 신라를 지킨 보물이다. ‘황룡사 장육존상’과 하늘이 내렸다는 ‘천사옥대’, ‘황룡사 구층목탑’을 지칭한다. 모두 현존하지 않는다. 몽고 침략으로 소실된 장육존상은 현재는 황룡사지에 석조대좌만 남아있다. 『삼국유사』에는 ‘고려 왕이 신라를 치려고 하다가 말하기를 신라에는 세 가지 보배가 있으니 침범해서는 안 된다’고 적혀 있다. 삼기팔괴(三奇八怪)는 경주의 예로부터 세 가지 진기한 보물과 여덟 가지 괴상한 풍경을 말한다. 삼기(三奇)는 금척(金尺), 옥적(玉笛), 화주(火珠)이다. 금척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꿈에 신인(神人)으로부터 받았다는 금으로 만든 자다. 묻힌 곳이 금척리고분군이라 전해진다. 옥적은 옥으로 만든 피리로 죽어서 용이 된 문무왕과 김유신 장군의 혼령이 합해져 신문왕에게 내려 준 만파식적이라는 설이 있다. 화주는 선덕여왕이 지녔던 수정 돋보기로 햇볕을 비추면 솜에 불이 붙어 화주라고 불렀다. 신라 옥피리 2점과 분황사 탑에서 나온 돋보기는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삼기에는 성덕대왕신종이 들어가기도 한다. 팔괴는 금장낙안(金丈落雁), 남산부석(南山浮石), 문천도사(蚊川倒沙), 계림황엽(鷄林黃葉), 압지부평(鴨池浮萍), 백률송순(栢栗松筍), 불국영지(佛國影池), 나원백탑(羅原白塔), 서산모연(西山慕煙), 금오만하(金鰲晩霞)이다. 금장낙안(金丈落雁)의 금장은 서천과 북천(알내)이 합치는 곳으로 임금이 노닐던 금장대를 말한다. 높은 바위에 올라서 바라보면 서라벌이 한눈에 굽어 보이는데, 예기청소 푸른 물에 비치는 전망이 아름다워 날아가던 기러기도 잠시 내려서 쉬어 갔다고 한다. 남산부석(南山浮石)은 버선을 거꾸로 세워 놓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버선바위라고 부르기도 하며, 남산의 국사골에 있다. 큰 바위 위에 또 한 개의 바위가 얹혀 있는데, 실을 넣어 당겨보면 바위가 공중에 뜬 채로 있기 때문에 실이 빠져나온다는 속설이 있다. 문천도사(蚊川倒沙)는 문천(남천)의 모래가 너무나 부드러워 물은 아래로 흘러가지만 모래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문천은 예로부터 모기내 또는 물개(모래)내라고 불렸다. 계림황엽(鷄林黃葉)은 계림의 나뭇잎이 움이 트면서 붉은색을 띄는 것이다. 압지부평(鴨池浮萍)은 안압지에 부평초가 무더기로 떠다니는데, 뿌리가 땅에 닿지 않은 채 바람에 밀려 다니는 모양이 또한 장관이다. 백률송순(栢栗松筍)은 소나무에는 순이 돋아나지 않는데 백률사에 있는 소나무는 가지를 치면 거기서 새순이 난다. 불국영지(佛國影池)은 아사달과 아사녀의 전설이 얽혀있는 영지에는 날이 밝으면 불국사의 전경이 물에 비치는데, 다보탑만이 보이고 석가탑은 비치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석가탑을 무영탑이라 부른다. 나원백탑(羅原白塔)은 현곡면 나원리에 있는 나원리 오층석탑이 백색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오래도록 흰 빛깔을 유지하는 것을 일컫는다. 서산모연(西山慕煙)의 서산은 선도산인데, 서라벌의 서쪽을 지키는 성산으로 선도성모가 계신 곳으로 크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석양이 비친 노을이 빼어나 서산모연이라고 한다. 금오만하(金鰲晩霞) : 금오산(남산)은 언제나 아지랑이가 끼어 있다. 아지랑이가 저녁놀에 반사되어 연분홍 빛으로 피어오르는 광경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신비한 아름다움이다. 필자는 금장대를 2월 4일, 2월 7일 2회에 걸쳐 답사하였다. 첫 번째 방문 때는 저녁 시간대이고 흐린 날씨여서 암각화 사진이 잘 나오지 않아 맑은 날인 2월 7일에 다시 방문하였다. 맑은 날이어서 암각화가 잘 보여 사진 찍기 좋았다. 재방문한 보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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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임신서기석이 발견된 석장사지1. 임신서기석이 발견된 석장사지 임신서기석의 최초 발견자인 석당 최남주 선생 자제인 최정간(매월다암 원장, 차문화연구가) 씨가 밝히는 발견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35년 봄 경주군 현곡면 석장사지부근에서 농수로공사로 인해 신라시대 와당들이 출토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천수답 경사 언덕 맨 아래쪽에서 ‘남산신성비’처럼 생긴 작은 강돌(川石)이 최남주의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앞면이 치석되어 첫머리에 임신년(壬申年)이란 글자체가 음각되어 있었다. 석당 최남주는 분명히 1934년 발견한 ‘남산신성비’의 자체(字體)와 ‘임신서기석’이 같다고 밝히고 있어 발견 시기도 일본인 오사카 긴타로의 1934년과는 차이가 난다. 석당 최남주는 소년시절 경주의 대유학자 김계사(김범부 스승) 선생으로부터 ‘사서삼경’을 배웠고 보성고보 시절 은사 황의돈 선생(민족사학자)으로부터 고대 금석문 강독법을 배웠다. 오히려 오사카보다 금석문 해독실력이 뛰어났다. 임신서기석은 향가 연구자인 김영회 씨의 해석에 의하면 화랑도가 하늘에 맹세한 내용이므로 화랑 서기석으로 명칭을 바꿔야 한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두 명의 화랑은 김유신 장군의 3년 후배 정도 된다고 하였다. 임신서기석이 국가 보물로 지정되기 전에 조국영 도예가가 탁본을 한 것이 있다. 임신서기석이 발견된 장소는 석장사지 인근이라고 한다. 석장사는 신라시대 양지 스님이 주석한 사찰이다. 삼국유사 제4권 의해 제5(三國遺事 卷第四 義解 第五) 양지사석(良志使錫 : 양지 스님이 지팡이를 부리다) 조에 양지 스님 기록이 나온다. 승려 양지는 그 조상이나 고향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신라 선덕왕(善德王) 때의 행적이 드러났을 뿐이다. 지팡이 끝에 포대 하나를 걸어두면 지팡이가 저절로 시주의 집으로 날아가서 흔들면서 소리를 내었다. 그 집에서도 이를 알고 재에 쓸 비용을 담아주었다. 포대가 차면 다시 날아서 돌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양지가 머무른 곳을 석장사(錫杖寺)라고 하였다. 양지의 신기하고 기이한 행적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이 외에도 여러 잡다한 기예에도 두루 통달하여 그 신묘함을 비길 곳이 없었다. 또 글씨와 그림 실력도 뛰어났으니, 영묘사(靈廟寺)의 장륙삼존상과 천왕상, 전각과 탑의 기와, 천왕사(天王寺) 탑 밑의 팔부신장(八部神將)과 법림사(法林寺)의 주불삼존과 좌우 금강신 등이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이 외에도 영묘사와 법림사의 현판을 썼다. 또 일찍이 벽돌을 조각하여 작은 탑 하나를 만들었고, 아울러 삼천불을 만들어 그 탑을 절 안에 모시고 예를 드렸다. 양지 스님이 영묘사의 장륙상을 만들 때 선정에 들어가 삼매경에서 뵌 부처를 모형으로 삼았는데, 온 성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운반하였다. 그 당시 부른 풍요(風謠)는 이러하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이 세상은 서럽더라. 서럽더라 무리여, 공덕 닦으러 절에 오다. 지금도 그곳 사람들이 방아를 찧거나 다른 일을 할 때면 모두 이 노래를 부르는데, 아마도 이때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불상을 만들 때 든 비용은 곡식 23,700석이었다.[혹은 금색을 칠할 때 쓴 비용이라고 한다.] 논평하여 말한다. “양지스님은 재주가 완전하고 덕이 충분하였지만 하찮은 재주에 자신의 능력을 숨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이 찬미한다. 재 마치니 법당 앞에 지팡이는 한가로운데 고요히 향로에 향불 피운다네. 남은 불경 다 읽자 할 일이 없어 불상 빚어 놓고 합장하며 뵌다네. 2. 동국대학교에서 발굴한 석장사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2006~2012년 신라 호국사찰 사천왕사 터를 발굴하였다. 그리고 양지 스님의 작품으로 알려진 녹유벽전의 여러 조각을 수습하였으며, 3종류의 벽전을 모두 복원하여 2015년 이를 기념하는 양지사석 전시회를 개최한 바 있다. 신라의 대표적 예술가를 꼽자면 서예가 김생, 화가 솔거, 음악가 백결, 그리고 조각가 양지 스님이 있다(박윤정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 세계일보, 2017, 2.18).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박물관에서는 1986년과 1992년 두 차례에 걸쳐 학교 인근의 석장사로 추정되는 절터를 발굴하였다. 그 결과 ‘錫杖(석장)’이라는 묵서가 적힌 자기가 발견되어 이곳이 바로『삼국유사』에 기록된 석장사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양지 스님이 만들었다는 삼천불탑과 관련된 많은 유물들을 발굴하는 성과가 있었다(한정호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박물관 전임연구원, 동대신문, 2010, 10.4). 석장사지에서 확인된 다수의 탑상문전은 울산 농소사지 전과 청도 불령사진 전과는 비견되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불상의 도상과 탑들이 표현되어 있어 고대 조각사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작례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탑상문전 상부에 남아있는 위치 표시 부호 등을 통해 당시 전탑 조성이 치밀한 구성과 계획을 바탕으로 수립된 건축물임을 증명해주고 있다(동국대 WISE캠퍼스 박물관 안내문). 석장사지에서 확인된 유물 중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닌 유물은 연기법송명문전이다. 고대 인도부터 전해지고 있는 불탑 속에 다라니를 봉안하는 신앙이 우리나라로 전파되어 적어도 7세기 때부터는 유행했을 가능성을 시사해 주는 유물로 평가되고 있다. 석장사지 연기법송 탑상문전은 탑상문과 마찬가지로 불상과 탑이 번갈아가며 표현되고 있지만 배열에 있어 차이를 보인다. 불상과 탑을 각각 10구와 10기씩 상하로 배치하고, 탑과 탑 사이 4행으로 “모든 것은 원인에서 비롯된다(諸法從緣起). 부처님은 그 원인을 말씀하셨다(如來說是因). 모든 것은 원인에 따라서(羅彼法因緣盡),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다(是大沙門說).”라는 게송이 좌우가 뒤집힌 상태로 음각되어 있다. 3. 석장사지 답사 석장사지는 경주시 석장동 옥녀봉 중턱에 자리잡고 있으며 신라의 천재 조각가인 양지 스님이 주석했던 사찰로 잘 알려져 있다. 동국대 경주캠퍼스 박물관이 발굴 조사하여 그 사역, 규모, 사명, 그리고 출토 유물과 양지 스님과의 관계 등이 대부분 확인되었다. 1, 2차 발굴을 통해서 탑상문전, 소조상편, 연기법송명문전, 금동불, 각종 자기편 등 약 450여 점의 유물이 확인되었다. 이 중 주목되는 유물은 ‘석장’이라 쓰여진 자기편으로, 『삼국유사』 양지사석(良志使錫) 조의 양지 스님이 주석했던 사찰인 석장사지일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필자는 2월 4일 경주 석장사지를 답사하였으며, 동국대 WISE(경주)캠퍼스 박물관을 2월 7일 관람하면서 석장사지에서 출토된 유물을 사진 찍었다. 박물관에 전시된 임신서기석 모형을 살펴보았으며, 학생복지관 앞에 세운 커다란 임신서기석 조형물도 구경하였다. 경주 석장사지는 동국대 WISE캠퍼스를 지나 경주 화랑마을 정문 들어가기 전 오른쪽에 있는 경주선교교회 옆의 등산로를 따라 산으로 올라갔다. 안내 표지판이 없어 오솔길 등산로로 올라가면서 석장사지 위치를 가늠해 보았다. 마침내 등산객들이 많이 다닌 주 등산로를 만나서 석장사지는 신우대가 있다는 인터넷 글을 보고 우측으로 내려갔다. 유심히 보니 신우대가 보여 올라갔다. 석장사지는 경사진 산자락에 남향으로 절터를 잡았으며, 정면에서 오른쪽에는 작은 계곡이 있어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메인 등산로에서 석장사지를 가기 위해서는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도랑을 건너야 한다. 도랑 위에는 나무를 잘라 만든 임시 다리가 있었는데, 습기가 많아 파란 이기가 끼어 있었다. 동국대 경주캠퍼스 박물관에서 1, 2차 발굴 조사를 마친 후 사진으로 보니 석장사지는 신우대도 제거하고 주변이 정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1, 2차 발굴 후 38년~32년이 경과하다 보니 신우대가 우거져 최초 모습과는 달라지고 잡풀이 우거졌다. 앞으로 동국대경주캠퍼스 박물관에서 매년 석장사지 주변의 신우대와 잡덩굴을 제거하여 유적지를 잘 보존했으면 좋겠다. 필자가 양산의 다방동 야생 차나무 군락지 환경보호를 하면서 신우대, 칡덩굴을 제거하고 있기 때문에 신우대의 특성을 잘 파악하고 있다. 신우대는 땅위에 있는 부분을 잘라도 땅속에 뿌리가 남아있어 쉽게 죽지 않는다. 신우대를 제거하기 위해서 자른 후 뿌리 부분에 농약을 주입하면 된다. 필자는 차나무 군락지를 보호하기 위해 농약을 주입하지 않고 일일이 뿌리를 힘들게 캐내고 있다. 칡덩굴 역시 땅위의 줄기만 자르면 안 죽고 땅속의 뿌리를 캐내야 한다. 발굴조사 때 나온 기단석을 밑에 모아 놓고 그 위에는 기와 조각을 쌓아놓았다. 사찰 건물의 주춧돌, 축대의 돌도 보였다. 신우대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보니 이따금 기와 조각이 보였다. 필자는 기왓장 조각 중 큰 것은 기와 조각 쌓아놓은 곳에 가져가 올려놓았다. 석장사지 답사 후에 내려 올 때는 올라갔던 등산로로 원점 회귀하지 않고 ‘휴앤락 오토캠핑장’으로 내려왔다. 4. 화랑도 조직 구성에 승려 포함 석장사지는 주변에서 임신서기석이라는 중요한 유물이 나온 곳으로 주목을 받았다. 임신서기석은 일제 시대 때 일본인이 이름을 붙였는데, 내용은 화랑도가 나라에 충성하고 학문을 연마하는 것을 하늘에 맹세하는 다짐의 글이었다. 향가 연구자인 김영회 씨가 내용을 정확히 해석하여 화랑도의 맹세, 정신 등을 밝혔다. 화랑도를 닦는 자를 풍월도(風月徒), 풍류도(風流徒), 국선(國仙)이라고 불렀다. 화랑 집단은 각기 화랑 한 명과 승려 한 명 그리고 화랑을 따르는 다수의 낭도(郎徒)로 구성되었다. 낭도는 집에서 매일 노동하지 않아도 생활할 수 있는 평민 이상의 계급이지만, 중심 구성원은 진골(眞骨)과 6·5·4두품이었을 것이다. 화랑도는 낭도 자신의 의사에 따라 결합하였으며 조국 수호, 나아가서는 이상 세계 건설이라는 원대한 공동 목표를 위해 일정 기간 수련하는 단체였던 만큼 구성원 사이의 인적 결합은 매우 긴밀하였다. 낭도는 대체로 15∼18세로 구성되었으며, 한 화랑이 이끄는 인원은 200∼300명에서 1,000명 안팎의 집단이었다. 진평왕 때는 많으면 7개 이상의 화랑 집단이 동시에 존재하기도 하였다. 화랑도 조직에 승려 한 명이 포함되는데, 화랑 서기석이 석장사지 인근에서 발견된 것은 화랑도가 하늘에 맹세하면서 돌에다 내용을 새겨서 석장사에 보관한 것으로 추정된다. 화랑 서기석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석장사가 폐사되어 절 바깥으로 떠내려가 흙 속에 묻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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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화랑 서기석 최초 발견자 최남주 선생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임신서기석 발견 1959년 9월 21일 중앙대학보에 당시 문리과대학 사학과에 재학 중인 허웅(許熊)이란 사학도가 ‘화랑도 유물 임신서기석에 대하여’란 기고문을 통해 임신서기석의 최초 발견자는 최남주라고 발견 경위를 기고하였다. 여름방학을 이용해 경주 사학자 석당 최남주 댁에 머무르면서 여러 가지 화랑도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중 특히 ‘화랑서기석(임신서기석)’ 이야기를 감명 깊게 새겼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대한경제, 2023, 9.25). “이 돌(임신서기석)은 지금부터 24년 전 단기 4268년(1935년) 경주 금장리 석장사 한 부근에서 공사 중 출토되어 바로 최남주(崔南柱)씨의 손에 제일 먼저 들어왔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1935년 공사 중에 발견되었다는 최남주의 증언이다. 이 부분이 오사카의 석장사 답사 중 발견하였다는 증언과는 틀리는 부분이다. 또한 석당 최남주는 분명히 1년 전에(1934년) 발견한 ‘남산신성비’의 자체(字體)와 ‘임신서기석’이 같다고 밝히고 있어 발견 시기도 오사카 긴타로의 발견인 1934년과는 차이가 난다.” 석당 최남주의 자제인 현암 최정간(매월다암 원장, 차문화연구가) 씨의 증언에 의하면 선친의 화랑 서기석(임신서기석) 발견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35년 봄 경주군 현곡면 석장사지부근에서 농수로공사로 인해 신라시대 와당들이 출토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천수답 경사 언덕 맨 아래쪽에서 ‘남산신성비’처럼 생긴 작은 강돌(川石)이 최남주의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앞면이 치석되어 첫머리에 임신년(壬申年)이란 글자체가 음각되어 있었다. 또한 중간에 3년이란 맹세문장이 쓰여있어 직감적으로 작년에 발견한 ‘남산신성비’ 문장체제와 같다고 확신했다. 이튿날 이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경주박물관으로 옮겨가니 관장인 오사카가 첫눈에 가짜라고 단정하고 유물 수장고에 방치해버렸다. 망국의 한이었다.” 일제 총독부는 조선인을 중요 유물 발견자나 논문 발표에서 철저히 배제시켰다. 1935년 12월 18일 스에마츠 야스카츠가 경주박물관 방문 시 이 비석의 가치를 어느 학자보다 먼저 알아보고 1936년 『경성제대 사학지 제10』에 ‘경주 출토 임신서기석에 대해서’란 논문을 통해 발견자가 오사카 긴타로라고 소개하였다. 그 후 오사카는 ‘임신서기석’을 자기 개인 소장품으로 둔갑시켜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 박물관장실에 보물처럼 보관하였다. 1960년대 이후 오사카는 석당에게 편지로 ‘임신서기석’의 안부를 물어왔다. 석당은 정부 수립 후 오사카의 이러한 파렴치한 만행을 밝힐 수 있었으나 신라 화랑의 보물인 임신서기석이 일본으로 유출되지 않고 경주박물관에 소장 전시되어있는 것만으로도 큰 보람을 느꼈다. 2. 석당 최남주 선생을 추모하는 석당공원 (1) 석당 최남주 선생 石堂 崔南柱 先生(1905-1980) IN MEMORY OF MR. CHOE NAM-JU(1905-1980) 평생을 문화재 발굴과 보존을 위해 헌신한 최남주 선생은 민간문화재 보호단체의 효시인 경주 고적보존회 활동을 시작으로 현 국립경주박물관 창설에 참여하였고, 고고학자인 스웨덴의 구스타프 황태자와 서봉총 발굴에 동참했다. 그가 발견한 주요 유물은 경주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경주 남산 철와곡 석불두(鐵瓦谷 石佛頭), 흥덕왕릉 비편 등이 있다. 또한, 사재(私財)를 들여 무열왕릉 비각을 건립하기도 했다. 선생은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스웨덴 왕실로부터 동양인 최초로 바자훈장 기사장을 수훈受勳했다. 이후, 칼 구스타프 현 국왕의 초청으로 스웨덴 왕실을 방문하여 국위를 선양하였다. 경주시민들은 문화유산 보전에 대한 그의 공로를 기념하여 2001년 추송비를 세웠다. (2) 추송비(追頌妃) 영리와 이재를 모르고 가정을 돌보지 않은 채 신라인들이 걸어온 아득히 먼길을 이름 없는 돌처럼 따라갔고 무너진 신라탑(新羅塔) 다시 일으키며 흙밑 뒤져 청태(靑苔) 낀 기왓장과 토기편(土器片), 비편(碑片)들을 수없이 발굴하여, 이 민족 역사를 증언했고 신라의 얼을 찾아 평생(平生)을 경주(慶州)의 산야(山野)를 헤맨 나그네 어느 왕조(王朝)의 상신(相臣)이 이처럼 천년왕조(千年王朝)를 섬기고 사랑하였던가. 귀천(歸天)하시어 신라문화(新羅文化)를 쌓아 올렸던 자랑스런 선인(先人)들을 만나 후예(後裔)로서 부끄럽지 않게 그들에게 아름다운 신라(新羅)의 향기(香氣)를 온누리에 풍긴 진정한 역사(歷史)의 장부(丈夫)였네. 2001년 5월 19일 서울대학교(大學校) 고고미술사학과(考古美術史學科) 교수(敎授) 임효재(任孝宰)가 비문(碑文)을 짓고 대한민국 학술원 위원 무의자(無衣子) 권옥연(權玉淵)이 제자(題字)를 쓰고 석장(石匠) 윤만걸(尹晩杰)이 새기다. (3) 석당(石堂) 최남주(崔南柱) 선생 약력 - 1905년 4월 1일 경주시 성건동에서 출생 - 1924년 보성고등보통학교 졸업 - 1926년 경주박물관 창설에 참여 - 1926년 스웨덴 구스타프 6세 아돌프 황태자와 함께 서봉총(瑞鳳塚) 금관 발굴에 참여 - 1926년-1939년 한국 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南山) 불적(佛蹟) 조사에 한국인 최초로 참여하여 수많은 불교 문화재를 발굴, 경주박물관에 전시 - 1934년 신라 고대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인 남산(南山) 신성비(新城碑) 발견 - 1938년 한국 미술사학계 개척자이신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 선생과 문무대왕의 해중릉(海中陵)이 있는 동해구(東海口) 유적 학술답사 - 1945년 광복 후 경주문화재 보존 연구에 전념, 수많은 문화재를 찾아서 신라사 연구 및 고고학계에 공헌 - 1970년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 서훈 - 1971년 스웨덴 왕실 최고훈장 바자 훈장 기사작(騎士爵) 서훈 - 1975년 스웨덴 국왕 칼 구스타프 16세의 초청으로 스웨덴 왕실 방문, 스웨덴 고고학계 시찰 - 1980년 2월 향년 75세로 성건동 자택에서 환원(還元 : 천도교에서 사망을 의미) (4) 한국박물관협회에서 건립한 석당공원 추모비 경주 문화재 발굴 보존의 선구자 석당 최남주(石堂 崔南柱) 우리나라 고고학계와 박물관학계의 여명기였던 1926년 한국인으로선 유일하게 경주박물관 창설에 참여하여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 박물관 문화의 개척과 신라문화재 보존을 위해 평생을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을 가셨던 석당 최남주선생 탄생 101주년을 맞이하여 한국박물관인들의 이름으로 석당 선생님의 박물관과 신라문화 사랑의 아름다운 정신을 이 패에 새겨 드립니다. 2006년 9월 24일 한국박물관협회 회장 김종규 (5) 한국일보 추송비 건립 경위 평생을 신라문화재 발굴 및 보존에 헌신 한 우리나라 고고학계의 선구자인 고(故) 석당(石堂) 최남주(崔南柱·1905~1980·사진) 선생의 추송비가 후학 및 스웨덴 왕실에 의해 세워진다. 김태중(金泰中) 경주문화원장은 19일 오후 3시 경북 경주시 충효동 김유신 장군 묘 앞에서 석당 최남주 선생 추송비(사진)에 대한 제막식을 갖는다고 18일 밝혔다. 일제 강점기에 경주박물관 창설 및 신라 문화재 발굴 등에 참여했던 최선생은 특히 1925년 스웨덴의 아돌프 구스타프 6세 왕세자와 함께 경주시 노서동 서봉총(瑞鳳塚)을 발굴한 것으로 유명하다. 서봉총이라는 명칭은 스웨덴의 한자명 서전(瑞전)에서 '서'를, 이곳에서 발굴된 금관의 봉황 장식에서 '봉'자를 각각 따서 붙인 것. 당시 왕세자는 “이제 국왕이 되지 않아도 좋다”고 말했을 정도로 발굴에 흥분했고 이 과정에서 유일한 한국인이었던 최선생과 깊은 교류를 나눴다. 두 사람은 이후에도 우정을 지켰고 왕이 된 구스타프 6세는 73년 왕실 최고훈장을 서훈키도 했다. 이날 제막식엔 스웨덴 왕실 특사인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스웨덴 대표 페테 하마스드럼 소장을 비롯, 임효재(任孝宰) 서울대 교수, 한국박물관협회 김종규(金宗圭) 회장, 최무장 건국대 교수, 한나라당 손학규 의원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 /박일근 기자 ikpark@hk.co.kr 3.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 최남주 무너진 신라의 탑 다시 일으켜 세우고 흙 밑 뒤져 청태 낀 기왓장과 비석조각을 주워 신라의 향기를 온누리에 배달한 역사 배달부 최남주옹의 추송비가 작고한 지 20년 만인 엊그제 경주 김유신 장군묘 입구에서 제막되었다(조선일보, 2001년 5월 21일). 이 제막식에서 눈길을 끄는 손님이 있었으니 바로 스웨덴 왕실이 보낸 벽안의 특사다. 웬 인연으로 이 자리에 왕실 특사가 왔을까. 후에 스웨덴 구스타프 6세가 되는 44세의 황태자가 고고학자로 1926년 경주 서봉총에서 최남주옹과 더불어 금관을 발굴해 낸 묵은 인연 때문이다. 서봉총을 발굴할 때 연이틀 흙비가 내려 왕릉을 파헤친 빌미라는 원성이 있었음이며 발굴책임자인 고이즈미라는 일본사람이 출토한 금관을 차능파라는 기생에게 씌워준 것이 탄로나 견책을 당하기도 했다는 등의 금관발굴 전후의 이야기들을 최옹으로부터 들은 기억이 난다. 최옹의 공적으로 남산 신성비의 발견을 들 수 있다. 어느 날 헌강왕릉의 묘지기가 자기 집 앞 돌다리에 글자 같은 것이 새겨져 있다고 한 말을 듣고 추적하여 20자씩 9행으로 된 이두비문이 새겨진 자연석을 발견,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합치함을 고증해낸 것이다. 그 비문에는 완공한 후 자기가 맡은 공구가「3년 내로 무너지면 죄를 달게 받겠다」고 맹서하고 있어 이 비를 세웠던 신라인들의 아름다운 책임감이 표출되어 감명을 주었던 신성비다. 석굴암의 감실 앞에 놓였던 유마거사상과 11면 관음보살상 앞에 놓였던 아담한 5층 석탑을 당시 조선 총독이던 데라우치가 일본으로 가져간 것을 확인 추적하기도 했던 최옹이다. 그 밖의 흥덕왕릉비 조각을 발굴하는 등 경주 유적으로 최옹의 손을 거쳐가지 않음이 드물다 할 정도로 신라의 역사배달부 노릇으로 75년 인생을 쇠진시켰다. 깨끗하지만 어려웠던 만년이었던 것 같다. 「나는 앞으로 또 얼마나 먼 여로를 가야할지 모르며 꿈만 먹고 사는 맥처럼 살 수 없는 노릇일지라도 이미 정해진 이 길을 가야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고 「그러다가 저승에 가서 신라문화를 쌓아올렸던 선인을 만나면 부끄럽지 않음을 자부하고 신라의 향기를 온누리에 배달한 역사의 배달부로서 최선을 다했다고 대답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던 최옹이다. 석당공원을 지난 2월 15일에 답사하였다. 김유신 장군 묘소에서 가까운 곳이라고 하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산책하는 동네 주민들에게 석당공원 위치를 물어보았다. 대부분 모르고 있어 흥무공원 앞에 쉬고 있는 사람들에게 질문하니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었다. 김유신 장군 묘소를 들어가고 나오는 길은 일방통행로인데, 나오는 길 끝 부분에 석당공원이 있었다. 대로변에서 차로는 역주행이라 들어갈 수 없고, 주차하고 조금 걸어서 들어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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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화랑도의 충성 맹세 임신서기석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임신서기석의 중요성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사람들은 신라의 명장 김유신 장군을 필두로 한 화랑도들이었다. 원광법사가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에게 전수해준 화랑도의 세속오계는 신라시대 화랑이 지켜야 했던 다섯 가지 계율이다.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사량부(沙梁部)에 사는 화랑 귀산과 추항이 가르침을 청하자 내려준 계율이다. 세속오계는 다음과 같다. 첫째, 충심으로 왕을 섬긴다[事君以忠(사군이충)]. 둘째, 효로써 부모를 섬긴다[事親以孝(사친이효)]. 셋째, 신의로써 친구를 사귄다[交友以信(교우이신)]. 넷째, 전쟁에 나가서 물러서지 않는다[臨戰無退(임전무퇴)]. 다섯째, 살아 있는 것을 죽일 때는 가려서 한다[殺生有擇(살생유택)]. 유교·불교·도교 등 세 가지 사상이 전래되기 전부터 신라에 존재하던 풍류·화랑도 등의 고유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공동체의식과 철저한 의리 정신, 숭고한 희생 정신, 그리고 선량한 인간의 정신을 담은 세속오계가 나온 것이다. 그 당시 신라인들이 가지고 있던 시대정신이 당대의 석학인 원광의 탁월한 식견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정리·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임신서기석은 신라 화랑도 두 청년이 우정과 면학에 대한 목표를 맹세하면서 서로 간에 다짐의 증표로써 작은 비석을 만들어 언약을 새겨놓은 것이다. 친구 두 사람이 하늘에 명세하는 것은 화랑도의 관행과 동일하다. 청도 가슬갑사의 원광법사를 방문한 신라의 화랑 청소년 귀산과 추항이 원광법사로부터 화랑정신의 기본이념인 세속오계를 설법 받는 시점과 임신서기석 제작의 인물 정황과 사상적 배경 시점이 서로 유사한 점이 있다. 한자·한문을 받아들여 우리의 표기수단으로 삼을 때 향찰식(鄕札式) 표기, 한문식(漢文式) 표기 외에 훈석식(訓釋式) 표기가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증거해 주는 유일한 금석문 유물로 세속 5계 중의 ‘교우이신(交友以信)’, 즉 신라 젊은이들의 신서(信誓) 관념의 표상물(表象物)이고, 우리 민족의 고대 신앙 중 ‘천(天)’의 성격의 일단을 시사해 주는 자료이다. 서기석의 규모는 높이 32cm, 너비 12.4cm, 두께 4.6cm이며, 반질하고 편평한 면을 가진 개울가 냇돌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5행에 총 74자를 새겼다.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길쭉한 형태의 점판암(粘板巖)으로 만들었다. 임신서기석은 비문의 균형미, 고졸미(古拙美), 모양, 색감까지 고려하여 2004년 6월 26일 보물 제1,411호로 지정되었으며,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2. 임신서기석 해석 다음은 국립경주박물관 안내문에 나와 있는 임신서기석의 한자 원문과 해석 내용이다. 비석의 첫머리에 임신(壬申)이라는 간지(干支)와 충성을 서약하는 글귀가 보여 붙여진 이름이다. 1934년 경주시 현곡면 금장리에서 발견되었다. 임신년이라는 간지가 어느 해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비문 내용에 중에는 신라 국학(國學)의 주요한 교과목이 등장하는 점이나 화랑도의 근본 정신을 강조한 점 등을 들어 화랑도가 융성하였던 시기의 임신년인 552년 또는 612년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신라 융성기에 신라 청소년들의 강렬한 유교도덕 실천사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지료이다. 壬申年六月十六日二人幷誓記天前誓今自 三年以後忠道執持過失无誓若此事失 天大罪淂誓若國不安大舐世可容 行誓之又別先辛未年七月卄二日大誓 詩尙書礼傳倫淂誓三年 임신년 6월 16일에 함께 맹세하여 기록한다. 하늘 앞에 맹세하기를, 지금으로부터 3년 이후에 충실한 도(道)를 지키고 과실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약 이 맹세를 잃으면 하늘에게 큰 죄를 얻을 것을 맹세한다. 만약 나라가 편안하지 않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지면, 가히 행하는 것을 용납함을 맹세한다. 또한 따로 이전 신미년 7월 22일에 크게 맹세하였다. 『시<경>(詩<經>)』, 『상서(尙書)』, 『예<기>(禮<記>), 『춘추<전>(春秋<傳>)』 등을 차례로 3년 동안 습득하기를 맹세하였다. 3.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가 붙인 이름 임신서기석의 길이는 약 34cm이며, 상단의 너비는 12.5cm, 하단의 너비는 9cm로 아래로 갈수록 폭이 좁아지는 모양이다. 두께는 2cm이며, 냇돌의 자연석(自然川石)으로 비교적 반질반질한 면을 이용하여, 1행 18자, 2행 16자, 3행 14자, 4행에 16자, 5행에 10자, 도합(都合) 5행 74자의 한자(漢字)를 새겼다.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 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오사카 긴타로(大阪金次郞)가 1934년 5월 4일 발견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 선덕여왕 대의 유명한 양지 스님과 관련된 석장사(錫杖寺) 터를 조사하고 돌아오던 길에 경주 금장대 부근에서 우연히 발견하였다고 주장하지만 최초 발견자는 한국인 최남주였다. 오사카 긴타로는 이 돌의 글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다. 이듬해인 1935년 12월 18일. 당시 일본 역사학의 대가 경성제대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 교수가 경주분관을 둘러보았다. 수집해둔 몇 편의 비석 편 가운데 그의 눈길을 끈 것이 바로 이 돌이었다. 바로 ‘임신년에 서로 서약하는 내용을 기록한 돌’이란 의미에서 그 자리에서 이 돌의 이름을 임시로 부르기로 했다. 그는 바로 이 돌에 새겨진 글자를 판독해서 이듬해인 1936년 경성제대 사학회지 제10호에 ‘경주출토 임신서기석에 대해서’라는 제목으로 탁본과 함께 논문으로 발표했다. 스에마쓰 야스카즈가 이름붙인 임신서기석이란 용어가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이 돌은 오사카 긴타로의 개인소유였다. 그는 해방 후 수집한 유물을 급하게 챙겨 일본으로 밀항하면서 임신서기석은 미처 가져가지 못하고 남겨두었기 때문에 경주박물관에 남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귀중한 문화재가 일본으로 약탈당할 뻔하였다. 4. 동국대 향가 만엽집 연구실장 김영회의 해석 스에마쓰 야스카즈가 ‘임신서기석’이라 하였지만 최초 발견자인 최남주는 화랑의 맹세를 기록한 돌이라는 의미에서 ‘화랑 서기석’이라고 하였다. 동국대 향가 만엽집 연구실장 김영회도 명칭을 ‘화랑 서기석’을 추천하고 있다(유튜브 김영회 TV, 임신서기석의 충격 1부~6부). 돌의 한 면을 글자 74자로 꽉 채워놓았다. 넓은 곳은 넓은 대로 좁은 곳은 좁은 곳대로 글씨 크기와 줄 사이 공간이 고려되어 있다. 글자의 공간 배치와 균형미가 놀랍다. 글자의 고졸미(古拙美)도 일품이다. 명필가, 석공의 기량이 합해져서 만들어진 멋진 예술품이다. 돌도 아무 돌이나 주워와서 만든 것이 아니고, 완성된 후의 모양과 색감까지 고려하여 애써 찾아온 것이 분명하다. 석공이 강에 나가 직접 찾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명필로부터 글자를 받아 숙련된 석공이 새긴 것이다. 스에마쓰 야스카즈가 풀이한 임신서기석의 내용도 정확하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구절이 있으며, 발견자도 최남주가 아닌 오사카 긴타로로 날조하였다. 만든 목적도 나오지 않고 맹세한 두 사람이 화랑인지 아닌지도 밝히지 못하고 있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 학자들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현재까지 100여 년이 흘렀다. 신라 화랑의 단아한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명품이다. 이런 예술품에 임신서기석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붙여놓았다. 일본인 스에마쓰 야스카즈는 우리 민족의 문화에 대한 애정이 없어 이런 만행에 가까운 이름을 붙인 것이다. 임신서기석은 화랑 서기석이라고 개명이 필요하다. 이 비석은 천년 신라를 빛내주고, 세계 10대 강국인 대한민국의 품격을 빛내주는 돌이다. 김영회 실장은 향가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새로운 방법을 적용하여 완벽하게 풀이하였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획기적인 향가 풀이에 대해 별다른 반응이 없이 묵살하고 있는 실정이다. 임신서기석을 해석하면서 향가 작법을 사용하여 풀어내었다. 김영회 실장은 향가의 특징으로 고대 표기법으로 만들어졌다고 하였다. 향가의 문자는 뜻글자 또는 일타쌍피 글자이며, 노랫말은 우리말 어순이고, 문장은 노랫말 + 청언 + 보언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일타쌍피 글자는 하나의 글자가 뜻글자와 소리글자로 동시에 기능하는 말한다. 김영회 실장은 향가 작법을 임신서기석의 미해결 구절에 적용해 보았다. 그는 임신서기석이 향가 표기법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임신서기석이 노래도 아닌 일반적인 글인 데, 향가 작법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김영회 실장 해석 임신년 6월 16일 두 사람이 나란히 맹세한 것을 기록한다 하늘 앞에 맹세한다 지금부터 3년 후까지 충성의 길을 걷고 (낭도들을) 맡아 다스리고 (그들을) 돕는 데 있어 허물이 없을 것을 맹세한다 忠道執持 執 맡아다스리다 집 持 돕다 지 화랑도는 우두머리인 화랑과 수백 명의 낭도로 구성된 조직이었다. 화랑이 낭도들을 맡아 다스린다는 것은 화랑의 임무 중 하나였다. 持는 돕다 지로 풀이하였다. 네이버 한자 사전을 찾아보면 지(持)는 16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다. 돕다 지로 풀이하는 것은 향가 찬기파랑가 안에 있었다. 화랑 기파가 기강이 해이해진 낭도들을 아주 엄격히 다스렸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기파가 낭도들을 다스릴 줄은 알았지만 돕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화랑 기파를 처형하였다. 강가에서 징소리가 울렸고 기파의 목은 띵에 떨어졌다. 화랑의 임무 세 가지는 ① 충성의 길을 간다. ② 낭도들을 맡아 다스린다. ③ 낭도들을 도와주다. 임신서기석은 화랑도를 알게 하는 역사적 유물이었다. 若 此事失 天大罪淂誓 만약, 이 일을 함에 있어 허물이 있게 되면 하늘로부터 큰 죄를 받을 것을 맹세한다 國不安大舐世可容行誓之 나라가 불안하고 크게 어지러운 세상이 되면 용모를 꾸미고 나가 임무룰 수행할 것을 맹세한다 容 몸을 꾸미다 용, 치장하다 용 삼국사기 진흥왕 37년 → 미모의 남자를 택하여 곱게 장식하여 화랑이라 이름하였다 서기석의 젊은이들은 치장하는 젊은이들이었다 두 젊은이는 바로 화랑이었다 화랑도 뿐만 아니라 옛날 멕시코나 아프리카 전사들도 전쟁에 나갈 때 얼굴 분장을 하고 꾸몄다 별도로 앞서 신미년 7월 22일에도 크게 맹세하였다 시 상서 예기 전 륜을 습득할 것을 맹세하였다 3년 안에 끝마치기로 하였다 두 명의 화랑이 하늘에 서하는 맹세였다. 천지신명에게 화랑의 임무를 수행하되 임무에 있어 일을 그르치면 벌을 받을 것이라고 서(誓)하는 맹세였다 두 젊은이는 화랑이었다 화랑의 두 가지 임무(다스리다 + 돕다) 화랑은 문무를 겸비 화랑에 임명되며 맹세식을 가졌다 향가 표기법으로 풀이한 내용에서는 아주 새로운 내용이 밝혀진다 우선 두 젊은이의 신분이 화랑이라는 게 확실히 밝혀진다 어디에서도 없었던 화랑의 임무 세 가지가 정확하게 밝혀진다 화랑은 전쟁에 나가면서 치장했다는 사실도 밝혀진다 화랑 서기석은 두 젊은이가 화랑에 임명되면서 서식을 가졌고 맹세의 내용을 기록한 돌이었다. 우리는 화랑이 어떠한 꿈을 꾸었고 무엇에 목숨을 걸게 되었는지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세계 어느 민족의 젊은이들 영혼이 이토록 아름다운 꽃과 같을까? 서기석은 향가를 알게 한다. 향가 제작법의 존재를 입증하였다. 향가는 우리 민족의 역사, 문화 더 나아가 인류의 고대 역사까지 풀어내 주는 결정적인 열쇠가 될 수 있다. 일제 식민지 시절 일본인 스에마쓰 야스카즈가 풀이하거나 해방 이후 우리나라 학자들이 풀이한 내용은 국립경주박물관의 임신서기석 내용에서 잘 나타난다. 일부 내용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임신서기석은 최초 발견자를 일본인 오사카 긴타로로 조작하였다. 최남주로 바로잡고 임신서기석도 화랑 서기석으로 개명해야 한다. 김영회 실장의 새로운 접근법인 향가 제작법으로 풀이한 내용은 누구에게나 확실하게 이해가 된다. 맹세의 주인공을 기존의 풀이는 막연하게 신라의 두 젊은이로 보았으나 김영회 실장은 명확하게 화랑도라는 것을 입증하였다. 화랑도의 임무 세 가지를 밝혀내고, 화랑도가 전쟁에 출전할 때 용모를 꾸민다는 사실도 밝혀내었다. 기존의 역사학계는 김영회 실장의 새로운 풀이와 향가적 접근법에 대해 외면하고 묵살할 것이 아니라 답을 내놓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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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화랑 죽지랑을 사모하여 지은 노래 모죽지랑가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삼국유사』에 나오는 죽지랑 김유신 장군과 동시대 인물로 삼국통일에 공을 세운 죽지랑이라는 화랑도가 있었다. 김유신 장군 밑에서 부수[副帥 : 주장(主將)을 보좌하는 장수]로 활약한 장군이었다. 진덕왕(眞德王)ㆍ태종(太宗)ㆍ문무왕(文武王)ㆍ신문왕(神文王)의 4대에 걸쳐 재상을 지냈다. 화랑도인 죽지랑의 낭도로서 활동한 득오곡이 죽지랑을 사모하여 지은 노래가 모죽지랑가이다. 모죽지랑가는 향가로서 팔구체로 구성되어 있다. 득오곡이 모죽지랑가라는 향가를 지었을 때 죽지는 상당히 나이가 든 노화랑이었다. 화랑도 죽지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하는 데 큰 공을 세웠고, 그 후 여러 대에 걸쳐 대신으로서 존경과 찬미를 한 몸에 받았던 노화랑(老花郎)의 쇠잔한 모습을 안쓰러워하는 득오의 심정과 죽지랑을 향한 변하지 않는 존경을 잘 나타낸 작품이다. 향가의 다른 작품들에서 보이는 주술적·종교적인 색채가 보이지 않는 순수한 개인의 감정을 노래한 서정시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죽령 자락인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에는 「모죽지랑가」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디지털영주문화전자대전).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三國遺事 卷第二 紀異 第二), 효소왕대(孝昭王代) 죽지랑(竹旨郞), [죽만(竹曼) 또는 지관(智官)이라고도 한다.] 제32대 효소왕(孝昭王) 때, 죽만랑(竹曼郞) 무리에 급간 득오실(得烏失)[득오곡(得烏谷)이라고도 한다.]이 있었다. 그는 화랑도의 명부인 『풍류황권(風流黃卷)』에 이름이 있어서 날마다 출근했는데, 10여 일 동안 보이지 않았다. 죽만랑이 그의 어머니를 불러 아들이 어디에 있는지 물었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당전(幢典) 모량부(牟梁部)의 익선(益宣) 아간(阿干)이 제 아들을 부산성(富山城)의 창고지기로 임명했습니다. 말을 달려 급히 가느라고 미처 죽만랑께 인사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죽만랑이 말하였다. “그대의 아들이 만약 사적인 일로 그곳에 갔다면 찾아가 볼 일이 없겠지만, 지금 공적인 일로 갔으니 내 찾아가 대접을 해야겠소.” 그리고는 떡 한 합과 술 한 항아리를 가지고 하인[우리말로는 개질지(皆叱知)라고 하니, 종을 말한다.]들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낭도 137명도 의장을 갖추고 따라갔다. 부산성에 이르러 문지기에게 득오실(得烏失)이 어디에 있는지 묻자, 문지기가 말하였다. “지금 익선의 밭에 있습니다. 관례에 따라 부역을 하고 있습니다.” 죽만랑이 밭으로 가서 가지고 온 술과 떡으로 득오실을 먹였다. 그리고 익선에게 휴가를 청하여 함께 돌아가고자 하였다. 하지만 익선이 굳이 이를 거부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관원인 간진(侃珍)이 추화군(推火郡)의 능절조(能節租) 30섬을 징수하여 관리하면서 성 안으로 운반하고 있었는데, 죽만랑이 부하를 중시하는 풍모를 아름답게 여기고 익선이 꽉 막혀 융통성이 없는 것을 야비하게 여겼다. 그래서 거두어 가던 30섬을 익선에게 주고 죽만랑을 도와서 휴가를 요청하였지만, 여전히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진절(珍節) 사지(舍知)가 타던 말의 안장을 함께 주자 그제야 허락하였다. 조정의 화주(花主)가 이 말을 듣고 익선을 잡아다가 그 더러움과 추악함을 씻어주려 하였는데, 익선이 도망가 숨었으므로 그 맏아들을 잡아왔다. 그때는 한겨울의 매우 추운 날이었다. 성내의 연못에서 목욕을 시켰더니 곧 얼어 죽고 말았다. 대왕이 이 말을 듣고 명을 내려, 모량리(牟梁里) 사람으로 벼슬에 있는 자들을 모조리 내쫓아 다시는 관공서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고 중도 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미 중이 된 자는 종과 북이 있는 절에는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명령을 내려 간진의 자손을 평정호손(枰定戶孫)으로 삼아 그를 표창하였다. 당시 원측법사(圓測法師)는 해동의 고승이었지만 모량리 사람이었기 때문에 승직을 주지 않았다. 2. 『삼국유사』에 나오는 죽지랑의 탄생 설화 처음에 술종공(述宗公)이 삭주도독사(朔州都督使)가 되어서 근무지로 가려고 하였는데, 마침 삼한에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기병 3천 명으로 그를 호위하였다. 죽지령(竹旨嶺)에 이르렀는데 어떤 한 거사가 그 고갯길을 평평하게 닦고 있었다. 공이 이를 보고 매우 좋게 생각했으며, 거사도 공의 위세가 매우 뛰어난 것을 좋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서로 마음으로 느끼는 바가 있었다. 공이 근무지에 도착해서 한 달이 되었을 때, 꿈에 거사가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공의 아내도 같은 꿈을 꾸어서 매우 놀라고 괴이하게 여겼다. 그래서 다음날 사람을 시켜 거사의 안부를 물어보게 하였더니, 그곳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거사께서 돌아가신 지 며칠 되었습니다.” 심부름꾼이 돌아와서 보고했는데, 그가 죽은 날이 꿈을 꾼 날과 같았다. 공이 말하였다. “아마도 거사가 우리 집에서 태어나려나 보오.” 그리고는 다시 군졸을 보내 죽지령 위의 북쪽 봉우리에 장사 지내고 돌미륵 하나를 만들어 무덤 앞에 두었다. 아내가 꿈을 꾼 날부터 태기가 있었는데, 아이를 낳은 뒤에 고개 이름을 따서 죽지(竹旨)라고 하였다. 그 죽지가 장성하여 벼슬을 하였는데, 부수(副帥)가 되어 유신 공과 함께 삼한을 통일하였고, 진덕왕(眞德王)ㆍ태종(太宗)ㆍ문무왕(文武王)ㆍ신문왕(神文王)의 4대에 걸쳐 재상이 되어 나라를 안정시켰다. 3. 모죽지랑가 해석 ① 원문 거은춘개리미(去隱春皆理米) 모동거질사곡옥시이우음(毛冬居叱沙哭屋尸以憂音) 아동음내질호지사오은(阿冬音乃叱好支賜烏隱) 모사년수취음타지행제(貌史年數就音墮支行齊) 목연회어시칠사이의(目煙廻於尸七史伊衣) 봉오지악지작호하시(逢烏支惡知作乎下是) 랑야 모리시심미 행호시도시(郞也 慕理尸心未 行乎尸道尸) 봉차질항중숙시야음유질하시(蓬次叱巷中宿尸夜音有叱下是) ② 양주동 박사 해독 “간봄 그리매(간 봄 그리매) 모든 것ᅀᅡ 우리 시름(모든것사 설이 시름하는데) 아ᄅᆞᆷ 나토샤온 즈ᅀᅵ(아름다움 나타내신 얼굴이) 살쯈디니져(주름살을 지니려 하옵내다) 눈 돌칠 ᄉᆞ이예(눈 돌이킬 사이에나마) 맞보ᄋᆞᆸ디지ᅀᅩ리[만나뵙도록(기회를)지으리이다.] 郎이야 그릴 ᄆᆞᅀᆞᄆᆡ녀올 길(郎이여, 그릴 마음의 녀올 길이) 다봊ᄆᆞᅀᆞᆯᄒᆡ 잘 밤 이시리(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이 있으리이까.) ③ 최철 현대어 풀이 간 봄 그리워함에 모든 것이 서러워 시름하는데 아름다움을 나타내신 얼굴이 주름살을 지으려 하옵내다. 눈 돌이킬 사이에나마 만나뵙도록 하리이다. 낭이여 그리운 마음의 가는 길이 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이 있으리이까. 노래를 보면 지나간 봄을 그리며 시름에 젖고, 또 죽지랑의 아름답던 모습이 쇠함을 바라보는 득오곡의 낭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리움의 정서가 작품의 주된 정조를 형성하고 있다. 한때 삼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하는 데 큰 공을 세웠고, 그 후 여러 대에 걸쳐 대신으로서 존경과 찬미를 한몸에 받았던 노화랑(老花郎)의 쇠잔한 모습을 안쓰러워하는 득오곡의 심정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향한 변하지 않는 존경을 잘 나타낸 작품이다. 작품의 제작 시기에 대해서는 죽지랑의 생존시에 지어진 작품이라는 설과, 그의 사후에 그를 추모하여 지은 노래라는 설이 학계에 제기되어 있다. 전자에 따를 때 이 노래는 득오가 앞서 익선에게 끌려 가서이거나 그 일이 있은 뒤 낭을 사모하여 지은 노래가 되고, 후자의 경우 죽지랑이 죽은 뒤 그의 덕을 사모하여 추모 찬송한 추모가의 성격을 지닌다. 이 작품은 지난 날 위대하였던 노화랑 죽지랑이 일개 아간 벼슬의 익선에게 수모를 당할 정도로 그 위엄과 위의를 상실해 간 화랑도의 세력을 잃은 모습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모죽지랑가의 무대 부산성 부산성은 경북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 산195-2 일대에 있는 신라의 포곡식 석축 산성이며, 사적이다. 성의 높이는 2m이며, 둘레는 9,470m에 달한다. 경주 부산성(慶州 富山城)은 신라 진평왕 대에 초축되었다는 설과 문무왕 대에 축성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조선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성 내부에서는 경주 남산신성(南山新城)의 서창지와 비슷한 규모의 대형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신라시대에 초축된 경주 부산성은 왕경의 외곽을 방어하는 기능을 하였으며, 조선시대까지 경주와 영천, 포항 지역을 관할하는 군창의 역할을 담당한 중요한 관방시설이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쌓은 신라 산성으로 주사산성(朱砂山城)이라고도 한다. 주사산·오봉산·오로봉산·닭벼슬산이라고도 불리는 부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세 줄기의 골짜기를 따라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석축성이다(경주시청). 경주 부산성(慶州 富山城)은 건천읍 서쪽에 있는 부산주1 정상부를 중심으로 3개의 곡부를 감싸고 있는 포곡식 석축 산성이다. 경주 부산성의 외곽은 경사가 심하고 험준하여 방어를 하기 유리하며, 성 내부에는 평탄한 지형이 많아 관련 시설을 설치하기에 유리하다. 경주 부산성이 초축된 시기와 관련하여서는 서로 충돌하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6에서는 문무왕 3년 1월에 경주 부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문호왕 법민조에도 문무왕 대에 경주 부산성을 쌓기 시작하여 3년 만에 축조를 마쳤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런데 『삼국유사』 권2 기이2 효소왕대 죽지랑조에서는 진평왕 때에 화랑 죽지랑의 낭도가 부산성(富山城) 창직(倉直)으로 근무하였다는 사실이 언급된다. 이에 따라 경주 부산성은 진평왕 대에 처음 축조되었고, 문무왕 3년(663)에 개축되었을 가능성을 살펴볼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성곽조에는 ‘부산성은 석축이고 둘레가 3,600척, 높이가 7척인데, 절반 정도가 붕괴된 상태이며, 성 내부에 개천 3개소, 연못 1개소, 우물 9개소와 군창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의 『대동지지』 경주부 성지조에는 ‘문무왕 3년에 성을 석축하였고, 둘레가 3,600척이며, 연못 1개소, 우물 9개소가 있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반면에 『경상도속찬지리지』에는 ‘건복 신해년(진평왕 13년, 591)에 부산성을 쌓았고 둘레가 16,593척이다’라고 전한다. 이와 같이 경주 부산성의 축성 시기와 규모에 대한 기록은 사료마다 다른데, 이것은 경주 부산성이 조선 숙종 대의 대대적인 산성 정비 사업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한편 단순한 기록상의 오류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초축 시기와 관련하여, ‘591년에 부산성이 초축되었다’라는 『경상도속찬지리지』의 기록은 『삼국유사』 효소왕대 죽지랑조와 연관된 설명으로 보인다. 이 기록을 근거로 진평왕 대에 부산성이 초축되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나오게 되었다. 그렇지만 『삼국유사』 권1 기이1 선덕여왕 지기삼사조에 ‘부산 아래 여근곡에 백제의 병사가 침입했다’라는 내용을 근거로 진평왕 대에는 부산성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이해할 수 있어 진평왕 대에 부산성이 초축되었다는 설을 부인하는 견해도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주 부산성은 아직 발굴 조사(發掘調査)가 진행되지 않았다. 다만 지표조사와 실측 조사를 통하여 부산성의 둘레가 9,470m이며, 지형에 따라 축조 방식이 다르나 대체로 협축식으로 축조된 산성임을 확인하였다. 경주 부산성 남동쪽 지점에는 치성(雉城)처럼 돌출된 성벽이 존재하고, 성 내부에는 복두암이 있다. 이로 인해 부산성이 내외성 2중 구조로 된 산성인지, 아니면 고려시대에 방어를 위해 이 시설을 부가한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필자가 2024년 1월 11일 부산성 답사 중 복두암을 가보니 스님들은 떠나고 암자는 텅 비어 있었다. 스님들이 1천일 동안 결사 정진하는 무문관 수행도장으로 일절 외부인(신도, 일반인 모두)의 출입을 엄금한다는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암자로 통하는 등산로는 철조망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암자 건물은 나무로 지은 어설픈 전각이 몇 채 있었고, 불상도 남아 있었다. 암자에 스님이 없어 등산객들이 철조망 옆으로 길을 내 등산로로 이용하고 있었다. 경주 부산성의 대부분 구간은 붕괴된 상태이다. 그렇지만 상태가 양호한 20m 정도의 구간이 남아 있으며, 이곳에서 최대 높이 약 2m의 성벽이 확인된다. 체성(体城)부는 가공하지 않은 안산암 계통의 할석(割石)으로 면석(面石)을 쌓고 중간에 잡석을 채우는 방식으로 조성되었다. 해당 구간의 성벽은 고려시대 이후에 축조되었거나 수리된 것으로 보인다. 경주 부산성에는 동 · 서 · 남 · 북 총 4개소의 문지가 확인되었지만, 남문지를 제외하면 훼손이 심한 상태이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동문지와 남문지는 주 출입구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남문지에는 반원형의 옹성(甕城)이 설치된 것으로 파악된다. 남문지 주변에서는 다량의 와편이 수습되고 있어 남문은 문루를 갖추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타 암문지 1개소, 치(雉) 2개소도 파악되었다. 지표 조사를 통해서 6개소의 건물군이 확인되었는데, 이 건물지들은 장대지(將臺地) 혹은 창고와 관련된 유구인 것으로 파악된다. 건물지 주변에서는 토기편이 수습되고 있다. 이 중에서 창터골이라고 불리는 산성마을 동편에서 초석주7을 갖춘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이 건물지는 상하단으로 구분되는 구간에 초석이 있어 창고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단부의 건물지는 정면 11칸, 측면 5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경주 남산신성(南山新城) 서창지와 유사한 규모이다. 경주 부산성에 창고가 있었다는 것은 『삼국유사』 권2 기이2 효소왕대 죽지랑조에서 언급된 부산성 창직의 존재와 연결된다. 한편 성 내부의 수량은 풍부하며, 4개소의 우물이 확인되었다. 산성 내에서는 신라시대뿐 아니라 고려~조선시대의 유적도 확인된다. 또한 9㎞가 넘는 대형 산성이라는 점, 성벽에서 후대에 개축된 구간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고대 산성에서 확인하기 어려운 옹성을 갖춘 남문지 등은 경주 부산성이 고려 이후에 만들어진 중세 산성의 성격을 가졌던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필자는 경주 부산성을 세 번 답사하였다. 2024년 1월 5일 주사암, 김유신 장군 수련장인 마당바위를 보기 위해 유학사, 여근곡을 통해 1차로 답사하였다. 2차 답사는 1월 11일 부산성 서문 쪽을 둘러보기 위해 성암사로 등산하였다. 3차 답사는 1월 16일 성암사를 거쳐 천지연못, 여근곡 갈림길, 주사암, 마당바위를 보고 성암사로 원점 회귀하였다. 성벽은 많이 파괴되었으나 일부 구간은 원형대로 남아 있는 구간도 있었다. 산세가 험하여 답사하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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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신라 시조 박혁거세를 낳은 선도산 성모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삼국사기의 신라 건국신화 『삼국사기』 제1권 신라본기 제1(三國史記 卷第一 新羅本紀 第一)에 신라 시조 혁거세 거서간(始祖 赫居世 居西干)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재위기간은 BC 57년 ~ AD 4년이다. 시조의 성은 박씨, 이름은 혁거세(赫居世)이다. 전한(前漢) 효선제(孝宣帝) 오봉(五鳳) 원년 갑자(기원전 57) 4월 병진[정월 15일 이라고도 한다.]일에 왕위에 올랐다. 왕호는 거서간(居西干)이다. 이때의 나이는 열세 살이었으며 나라의 이름은 서라벌이었다. 이에 앞서 조선(朝鮮)의 유민들이 산골에 나뉘어 살면서 여섯 개의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첫째는 알천(閼川)의 양산촌(楊山村)이라 하고, 둘째는 돌산(突山)의 고허촌(高墟村)이라 하고, 셋째는 취산(觜山)의 진지촌(珍支村)[혹은 간진촌(干珍村)이라고도 한다.]이라 하고, 넷째는 무산(茂山)의 대수촌(大樹村)이라 하고, 다섯째는 금산(金山)의 가리촌(加利村)이라 하고,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의 고야촌(高耶村)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진한(辰韓) 6부가 되었다. 고허촌의 촌장 소벌공(蘇伐公)이 양산(楊山)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 옆의 숲 사이에 말이 무릎을 꿇고 앉아서 울고 있었다. 곧장 가서 보니 말은 보이지 않고 다만 커다란 알이 있었다. 그것을 쪼개자 속에서 어린아이가 나왔기에 거두어 길렀다. 나이 십여 세가 되자 뛰어나고 영리하며 몸가짐이 조신하였다. 6부의 사람들이 그의 출생을 신비롭고 기이하게 여겨 높이 받들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임금으로 삼은 것이다. 진한 사람들은 박[匏, 조롱박]을 ‘박(朴)’이라고 하였는데, 처음의 커다란 알이 마치 박의 모양과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그의 성을 ‘박’으로 한 것이다. 거서간은 진한의 말로 임금을 뜻한다.[혹은 존귀한 사람을 칭하는 말이라고도 한다.] 2. 『삼국유사』의 신라 건국신화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三國遺事 卷第一 紀異 第一)에 신라 건국신화가 나온다. 진한(辰韓) 땅에는 옛날에 여섯 촌이 있었다. 전한(前漢) 지절(地節) 원년 임자(기원전 69)[고본(古本)에는 건호 원년 또는 건원 3년이라 하는 것들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3월 초하루에, 여섯 부의 조상들은 자제를 거느리고 알천(閼川)의 언덕 위에 모여서 의논하여 말하였다. “우리들은 위로 백성들을 다스릴 임금이 없어서 백성들이 모두 방자하고 안일하여 제멋대로 하고 있소. 그러니 어찌 덕 있는 사람을 찾아 임금으로 삼고 나라를 세워 도읍을 정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래서 이들은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았는데 양산(楊山) 밑에 있는 나정(蘿井) 가에 번갯빛처럼 이상한 기운이 땅에 드리워져 있고, 한 백마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곳을 찾아가보니 자줏빛 알[푸른빛의 큰 알이라고도 한다.] 하나가 있었다. 말은 사람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 알을 깨뜨리자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모습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모두들 놀라고 이상하게 여기며 아이를 동천(東泉)[동천사(東泉寺)는 사뇌야(詞腦野) 북쪽에 있다.]에서 목욕을 시켰는데,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따라 춤을 추었으며, 천지가 진동하더니 해와 달이 맑고 밝아졌다. 그래서 이름을 혁거세왕이라고 하였다.[‘혁거세’는 아마도 우리말일 것이다. 혹은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하는데 밝은 빛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해설하는 자는 “이것은 서술성모(西述聖母)가 낳은 것이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찬양하면서 ‘어진 이를 임신해서 나라를 열었다.’라는 구절이 있으니 바로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계룡(雞龍)이 상서로움을 나타내서 알영(閼英)을 낳았다는 것도 어찌 서술성모가 나타났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왕위를 거슬한(居瑟邯)이라고 하였다.[거서간(居西干)이라고도 한다. 처음 입을 열었을 때에 ‘알지(閼智) 거서간(居西干)이 한 번 일어났다.’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 말에 따라 이렇게 부른 것이다. 이후로 왕의 존칭이 되었다.] 당시 사람들이 다투어 축하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 천자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셨으니, 당연히 덕 있는 왕후를 찾아 임금의 배필로 삼아야 하리라.” 이날 사량리(沙梁里) 알영정(閼英井)[아리영정(娥利英井)이라고도 한다.] 주변에 계룡이 나타났는데 왼쪽 옆구리에서 여자 아이가 태어났다.[혹은 용이 나타났다가 죽었는데, 그 배를 가르고 여자아이를 얻었다고도 한다.] 얼굴과 모습이 매우 고왔지만 입술이 닭의 부리와 비슷하였다. 월성(月城)의 북쪽 시내에서 목욕을 시켰는데, 그 부리가 떨어졌다. 그래서 그 시내 이름을 발천(撥川)이라고 하였다. 3. 박혁거세 모후(母后)인 선도성모정령(仙桃聖母精靈)을 모신 사당(祠堂) 신라의 수도 서라벌 서쪽 선도산은 도교의 서왕모에서 유래하고 있다. 서왕모는 인간들에게 불로불사(不老不死)를 가능하게 하는 여신으로서 도교의 수많은 신들 가운데 가장 인기가 많은 신이다. 신라 및 통일신라의 경우 박혁거세를 낳았다는 선도산(仙桃山) 성모(聖母) 전설과 관련하여 몇 가지 모티프가 선도성모를 서왕모로 추정하게 하는 근거가 된다. 즉 선도산은 곧 서악(西嶽)인데 이는 곤륜산을 암시하고 선도는 곧 서왕모의 반도이다. 선도성모의 사자인 솔개[鳶]는 서왕모의 시중을 들었던 청조(靑鳥)와 맹금류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신라에서 서왕모 신화는 상당히 깊고 넓게 받아들여져 토착화의 단계에 이르렀다(정재서, “조선시대의 신선문화, 증산도문화사상 국제학술대회 기조강연, 2021”). 신라 건국신화에 의하면, 건국시조 박혁거세는 선도산(仙桃山) 성모(聖母)가 낳은 아들이다. 선도산은 신라 왕도 경주에서는 서악(西岳)이었다. 삼국통일 이전 신라오악은 신라 중심부인 경주평야를 둘러싸고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21, 경주부 산천조에는 토함산(吐含山)을 동악, 금강산(金剛山)을 북악, 함월산(含月山)을 남악, 선도산仙桃山)을 서악이라고 하였고 『삼국사기』 41, 열전 1, 김유신(상)의 단석산(斷石山)이 중악이었다. 그 뒤 신라 영토가 확대되고 통일을 성취한 뒤인 문무왕 말년 혹은 신문왕대에 국토의 사방과 중앙에 있는 산악으로 변화하였다. 동악은 토함산, 서악은 계룡산(鷄龍山), 남악은 지리산(地理山), 북악은 태백산(太伯山), 중악은 부악[父嶽: 팔공산(八公山)]]이다. 신라 오악은 서악인 계룡산 하나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모두가 소백산맥 일대와 그 동남쪽에 있는 산악들로, 대사(大祀) · 중사(中祀) · 소사(小祀)로 구분되어 있는 신라통일기의 국가제사에서 중사에 편입되었다. 오악에 대한 제사는 각 산에 거주한다고 생각한 산신에 대한 제사였다. 선도(仙桃)라는 이름 자체는 중국의 곤륜산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녔다. 즉, 중국 곤륜산 신화에서 서왕모가 지배하는 곤륜산에는 불로장생을 보장하는 선도(仙桃)가 자란다고 했다. 이와같은 도교의 설화를 신라 왕도에 적용한 산악이 바로 선도산이었다. 선도산 성모는 신라 건국시조의 어머니인 까닭에 성모(聖母)로 추앙됐다. 성모(聖母)란 신라라는 왕국을 낳은 최고 여신격이란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선도산 성모가 바로 신라판 서왕모이다. 필자는 1월 12일 선도산을 등산하며 정산 바로 아래에 있는 성모사를 답사하였다. 성모사(聖母祠)는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朴赫居世) 모후(母后)이신 선도성모정령(仙桃聖母精靈)을 모신 사당(祠堂)이다. 창건은 신라시대에 하였고, 임진왜란(壬辰倭亂)에는 신라 시조왕 위판(位版 : 위패)을 임시 봉안(奉安)했던 곳이기도 하다. 성모 조성기(聖母 造成記) 하늘이 내리신 성모님은 휘영청 밝은 달 아래 황성이 보이는 영산인 선도산 고봉(高峯)에 자리하고 천년 도읍을 지켜보고 계시오니 그 은혜는 하해(河海)와 같도다. 신라의 시조 왕(王)으로 두신 아들 때문에 저 높은 곳에서 자애로운 모정을 쌓아왔을까? 지금까지 잊혀졌던 성모님의 사당을 찾는 분이 많았으나 사당에서 유허지까지는 근거리임에도 길이 없어 불편함을 알고 봉찬회 23대 회장 안순희 박시환 부부가 정성을 다해 통행로를 개설하고 중수함으로 후손들이 후원하여 유허지 바닥에 천년석으로 시공하고 주위를 정비하였다. 성모님의 다정한 음성이 선도산에 메아리 되어 월색만 고요한 황성옛터의 횃불은 영원하리라. 후원하신 분 봉찬회 23대 회장 안순희 이백 팔십만 원 부회장 박순연 오십만 원 부회장 박삼희 오십만 원 부회장 서성자 오십만 원 14대 회장 임금옥 십만 원 16대 회장 이숙자 십만 원 20대 부회장 박상남 삼십만 원 사방회원 신선이 소원사 선철스님 일백만 원 양북회원 박영숙 삼십만 원 박을인 박만필 박순필 박금옥 박연자 1인 오만 원 숭덕전 219대 전 참봉 박제영 이백만 원 숭덕전 220대 전 참봉 박동만 오십만 원 경주시 종친회원 박정웅 박춘환 1인 십만 원 봉찬회 24대 부회장 박문자 오십만 원 2016년 7월 15일 성모(聖母) 유허지(遺墟址)는 현재의 성모사에서 350m 떨어진 곳에 있다. 이 표지판을 보지 못한 관광객은 현재의 성모사만 보고 하산하게 된다. 표지판을 따라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 350m를 가면 유허비(遺墟碑)가 설치된 유허지(遺墟址)가 나온다. 유허비가 설치된 곳은 전망이 아주 좋아 경주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선도산 정상에는 나무가 우거져 경주 시가지를 제대로 조망할 수 없고 사진에도 담기 힘든데, 이곳은 최고의 조망처이자 사진 찍기 좋은 곳이다. 유허비가 있는 곳에 거의 가까워졌을 때 오른쪽에 있는 바위에서도 경주 시가지가 잘 보인다. 4. 김유신 장군의 출생과 무술 연마와 관련된 도교적인 요소 삼국통일을 이룩하는데 큰 공을 세운 김유신(金庾信) 장군에 관한 도교적인 신비한 방술의 설화가 『삼국사기』 권41∼43의 본전과 『삼국유사』 김유신 조 등에 나온다. 김유신의 탄생에서부터 도교적인 내용의 전설이 등장한다. 등에 칠성문(七星文)이 있었는데, 그것은 칠요(七曜)에서 정기를 받은 표시라고 하여 태어날 때부터 신이성을 지녔다고 보았다. 김유신은 17세 때 이미 큰 뜻을 품고 단신으로 중악(中嶽)의 석굴에 들어가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 삼국통일을 성취할 힘을 내려 주기를 기도했는데, 신령스런 노인이 나타나 김유신에게 신비한 방술의 비법을 전해주었다. 열박산(咽薄山)에 들어가 천관(天官)에게 빛을 드리워 자기 보검에 강령(降靈)해 달라고 비니, 두 별에서 광채가 내려와 그의 보검을 움직여 신령한 기운을 내려 주었다. 김유신의 보검은 까치로 변신한 백제 공주의 정체를 파악하고, 고구려군과의 접전에서 신비한 위력을 발휘했다. 김유신 장군은 생전에 항시 음병(陰兵 : 신이 내려보낸 호위병)의 호위를 받고 살았다고 한다. 김유신 장군이 죽을 때 집에서 음병이 나갔다는 이야기도 도교적인 요소와 깊은 관련이 있다. 4. 경주 서악동 마애여래삼존입상 선도산 정상 가까이의 큰 암벽에 높이 7m나 되는 거구의 아미타여래입상을 본존불로 하여, 왼쪽에 관음보살상을, 오른쪽에 대세지보살상을 조각한 7세기 중엽의 삼존불상(三尊佛像)이다.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성모사(聖母祠) 바로 옆에 있다. 서방 극락세계를 다스린다는 의미를 지닌 아미타여래입상은 손상을 많이 입고 있는데, 머리는 완전히 없어졌고 얼굴도 눈 있는 부분까지 파손되었다. 그러나 남아 있는 뺨, 턱, 쫑긋한 입의 표현은 부처의 자비와 의지를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넓은 어깨로부터 내려오는 웅장한 체구는 신체의 굴곡을 표현하지 않고 있어 원통형으로 보이지만, 여기에는 범할 수 없는 힘과 위엄이 넘치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묵직해 보이며, 앞면에 U자형의 무늬만 성글게 표현하였다(문화재청). 중생을 구제한다는 자비의 관음보살은 내면의 법열(法悅)이 미소로 스며나오는 우아한 기풍을 엿보게 하는데, 어느 것 하나 소홀하게 다룬 데 없는 맵시 있는 솜씨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본존불에 비해 신체는 섬세하며 몸의 굴곡도 비교적 잘 나타나 있다. 중생의 어리석음을 없애준다는 대세지보살은 얼굴과 손의 모양만 다를 뿐 모든 면에서 관음보살과 동일하다. 사각형의 얼굴에 눈을 바로 뜨고 있어서 남성적인 힘을 강하게 풍기고 있다. 이 삼존불은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 불상조각으로 이어지는 과도기의 중요한 작품으로, 본존불은 높이 7m, 관음보살상 높이 4.55m, 대세지보살 높이 4.62m이다. 협시보살은 몇 개의 조각으로 파괴되어 아래 계곡에 굴러 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한 것이다. 왼쪽 협시보살은 대좌까지 모두 4개로 분리되어 있던 것으로, 머리 부분은 목까지 남아 있는데, 머리에는 중앙에 화불(化佛)이 조각된 삼산보관(三山寶冠)을 쓰고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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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도박사 화요칼럼 여근곡에서 백제군을 물리친 신라군동남문화관광연구소 소장 관광경영학 박사 심 상 도 1. 경주시 건천읍에 있는 여근곡 경북 경주시 건천읍 신평리에 여근곡(女根谷)이 있다. 옥문곡(玉門谷)이라고도 한다. 오봉산 아래의 산세 모양이 여성의 국부 모양을 닮아서 여근곡이라 부른다. 옛날부터 풍수지리적으로 음과 양을 중시하는 풍수가들은 음양의 조화를 따졌다. 전국의 산세 중에 여근곡이라 볼 수 있는 곳이 몇 곳 있지만 경주시 건천읍에 있는 여근곡이 제일 유명하고,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에도 나올 정도로 역사적 연원도 오래되었다. 건천읍 신평리에는 등산객을 위한 여근곡 주차장이 넓게 조성되어 있으며, 안내판, 등산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주차장에서 마을 안으로 약간 들어가면 연못, 정자가 있다. 건천읍 신평2리 마을회관 옆의 식당은 단체가 예약하면 이용할 수 있다고 한다. 마을회관 옆의 ‘여근곡 기 박물관’은 요즘에는 운영을 하지 않고 있다. 희귀한 수석을 전시하고 있으며, 건물 옥상에 여근곡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수석박물관은 매각을 위해 내놓았다고 한다. 여근곡(女根谷)은 선덕여왕의 지기삼사(知幾三事)에 관한 전설 중의 하나에서 유래하는 지명이다. 여근곡의 위치는 자인(玆仁)에서 경주로 가는 길목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에는 마곡산(馬谷山) 밑의 회곡치(回谷峙)가 있었던 곳으로 지형의 생김새로 보아 여근곡이었을 것으로 본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여근곡이 있는 마을인 신평리 일대의 들판은 국토지리정보원 지형도에 ‘샙들’로 표기돼 있다. 그러나 이 마을주민들은 여근곡 아래의 들이라 하여 듣기에 민망한 ‘X들’이라 부르고 있었다. 오봉산을 오르는 산행 들머리는 이 샙들을 지나 여근곡의 회음부에 해당하는 위치에 자리 잡은 유학사에서 시작한다. 유학사, 여근곡 옥문지, 부산성, 오봉산, 주사암, 마당바위 등을 차례로 둘러볼 수 있다. 유학사에는 산신각이 있는데, 여근곡의 영향인지 산신도의 산신은 여신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유학사에서 물이 나오는 샘이 있는 옥문지로 가는 등산로는 절 왼쪽에 표지판이 있다. 완만한 계단을 올라 다리를 건너면 금방 옥문지에 도착한다. 옥문지를 1월 5일에 답사하였는데, 생명수인 물이 나오고 있었다. 가는 물줄기 때문에 호스를 연결하여 놓았다. 주변에 작은 계곡이 몇 개가 있어 물이 마르지 않았다. 습기가 많으니 음기도 강한 것으로 보였다. 옛날에는 작은 샘물인 옥문지를 휘저으면 마을 처녀들이 바람이 난다고 금기시하여 청년들이 지켰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과거 보러 한양으로 가던 선비들은 여근곡을 보면 부정을 타서 과거에 낙방한다는 속신 때문에 이 근처를 지날 때 애써 고개를 돌려 여근곡을 외면하고 지나갔다고 전해진다. 여근곡을 사진 찍기 위해서는 오전에 가는 것이 좋다. 오후가 되면 역광으로 빛이 반사되어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2. 선덕왕의 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 선덕왕이 미리 안 세 가지 일(善德王知幾三事)은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三國遺事 卷第一 紀異 第一)에 나온다. 제27대 덕만(德曼)[만(曼)을 만(萬)이라고도 한다.]의 시호는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으로 성은 김씨이고 아버지는 진평왕(眞平王)이다. 정관(貞觀) 6년 임진(서기 632)에 왕위를 올라 16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 앞일을 미리 안 것이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 당 태종이 붉은색ㆍ자주색ㆍ흰색의 세 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과 그 씨 석 되를 보내왔는데, 왕이 그 그림을 보고 말하였다. “이 꽃은 정녕 향기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는 씨를 뜰에 심도록 명하였다. 그 꽃이 피었다 지기를 기다렸는데, 과연 그 말과 같이 향기가 없었다. 둘째, 영묘사(靈廟寺)의 옥문지(玉門池)에서 겨울인데도 많은 개구리가 모여서 3~4일 동안이나 울어대었다. 나라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기어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급히 각간인 알천(閼川)ㆍ필탄(弼呑) 등에게 명하여 정예병 2천 명을 뽑아 속히 서쪽 교외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을 물어보면 그곳에 반드시 적군이 있을 것이니, 습격해서 죽이라고 하였다. 두 각간이 명을 받들어 각각 군사 1천 명씩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에 가서 물어보았더니, 부산(富山) 아래에 과연 여근곡이 있었고 백제 군사 5백 명이 그곳에 숨어 있기에 모두 죽여버렸다. 백제의 장군 우소(亐召)란 자가 남산(南山) 고개 바위 위에 숨어 있는 것을, 또 포위하여 활을 쏘아 모조리 죽여버렸다. 그리고 그 뒤에 병사 1,200명이 왔지만 역시 쳐서 죽였으니,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였다. 셋째, 왕이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여러 신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짐은 모년 모월 모일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忉利天) 속에 장사 지내라.” 여러 신하들이 그곳을 몰라 다시 어디인지 물으니 왕이 말하였다. “낭산(狼山) 남쪽이다.” 그달 그날이 되자 왕은 과연 세상을 떠났다. 여러 신하들이 낭산의 남쪽에 장사를 지냈다. 10여 년이 지난 뒤 문무대왕(文武大王)이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왕의 무덤 아래에 세웠다. 불경에 사천왕천(四天王天)의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하였으니, 그때서야 대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게 되었다. 당시 여러 신하들이 왕에게 물었다. “모란꽃과 개구리의 두 일이 그러할지 어떻게 미리 아셨습니까?” 왕이 말하였다. “꽃은 그렸지만 나비는 없었소. 그래서 향기가 없는 것을 알 수 있었소. 이것은 당나라 황제가 내가 남편이 없는 것을 비웃은 것이오. 개구리가 화가 난 모습은 병사의 모습이고, 옥문(玉門)이란 여자의 음부요. 여자는 음(陰)이고 그 빛이 백색이며 백색은 서쪽을 뜻하오. 그래서 적군이 서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소. 남근이 여근 속으로 들어오면 반드시 죽는 법. 그래서 쉽게 잡을 줄도 알았소.” 그러자 여러 신하들이 모두 왕의 성스러운 지혜에 탄복하였다. 세 가지 색깔의 꽃을 보낸 것은 아마도 신라에 세 여왕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그런 것일까? 선덕ㆍ진덕(眞德)ㆍ진성(眞聖)이 이들이다. 당나라 황제는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이다. 선덕왕이 영묘사(靈廟寺)를 세운 일은 「양지사전(良志師傳)」에 자세히 실려 있다. 「별기(別記)」에는 이 선덕왕 대에 돌을 다듬어서 첨성대(瞻星臺)를 쌓았다고 한다. 3. 여근곡에서 백제군을 물리친 김유신 장군 김유신 장군은 선덕여왕대부터 왕의 측근 실세가 된 김춘추와 함께 많은 활약을 한다. 당시 신라는 백제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김유신은 이 치열한 항쟁의 선봉에서 활약했다(우리역사넷). 당시 신라에서 김유신의 역할과 위상은 다음 일화에서 잘 알 수 있다. 644년(선덕여왕 13) 9월에 그는 대장군으로서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성열성(省熱城), 동화성(同火城) 등 7성을 격파하고 가혜진(加兮津, 지금의 경북 고령군 인근으로 추정)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다음 해 1월 신라 왕성으로 돌아와 선덕여왕에게 보고하려고 하였는데, 미처 왕을 뵙기도 전에 백제 대군이 쳐들어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에 왕이 다시 김유신을 상주장군(上州將軍)으로 삼아 이를 막도록 명령하자, 그는 바로 다시 말을 타고 전장으로 나아가 적군을 격파하였다. 3월에 다시 왕을 뵙고 명령을 완수했음을 보고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다시 백제가 대군을 동원해 공격해 올 것이라는 첩보가 들어왔다. 이에 왕이 다시 김유신에게 출정할 것을 명한다. 그는 잠시 집 앞에서 장수(漿水, 숭늉 내지 미음)만을 마시고 잠시도 쉬지 않고 바로 전장으로 나아갔다. 647년(선덕여왕 16) 선덕여왕이 위중하자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이 왕위를 노리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김유신은 김춘추와 함께 이 반란을 진압하고 진덕여왕(眞德女王)을 옹립하였다. 이로써 김춘추와 김유신은 권력을 장악하고 신라가 삼국통일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김춘추는 당으로 건너가 군사동맹을 맺는데 성공했고, 김유신은 여러 백제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나갔다. 적의 침입을 막아내는데 그치지 않고, 공격하여 많은 성을 탈취하고 백제의 장졸들을 격살하였다. ] 648년에 백제의 공격을 옥문곡(玉門谷)에서 저지하며 백제 장군 8명을 사로잡고 1,000명에 달하는 적군을 목 베었다. 이때 포로로 잡은 백제 장군과 김춘추의 딸 부부 유해를 교환하여 김춘추의 한을 일부 풀어주기도 하였다. 이어 승세를 몰아 공격해 악성(嶽城) 등 12성을 빼앗으며 2만여 명을 죽이고 9천 명을 생포하였다. 또 더 진격하여 진례성(進禮城) 등 9성을 공파(攻破)하고 9천 명을 죽이고 600명을 생포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오봉산을 등산 목적지로 설정하면 삼국유사에도 나오는 여근곡, 옥문지를 볼 수 있고, 천년 고찰인 주사암, 신라시대 성인 부산성도 답사할 수 있다. 주사암은 신비로운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주사암에는 김유신 장군과 화랑도들의 수련장인 마당바위에서 인생샷을 찍을 수 있다. 마당바위는 인기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등산로는 일부 구간이 가파르지만 중간에 포장된 임도도 거치게 된다.